역사를 뒤집은 해상무역 경제 특구 Malakaq : 믈라까 왕국(Melaka : A.D. 1402 ~ A.D. 1511)
1402년부터 1511년까지 말레이반도의 남부에 믈라까를 중심으로 번영한 왕국이다. 믈라까 왕국의 기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논쟁 중에 있으나 그 중 가장 유력한 건국설은 다음 두가지다. 마자빠힛(Majahpahit) 왕국의 한 공주와 결혼한 빠라메스와라(Parameswara)라는 수마트라 빨렘방(Palembang)의 한 왕자가 세웠다는 설이다. 그는 15세기 초에 스리비자야 왕국의 왕권계승 문제로 일어난 빠레그레그(Paregreg) 난을 추종자들과 도망쳐 가서 세운 왕국이 믈라까 왕국이다.
또 하나는 스리비자야 왕국의 왕자인 빠라메스와라(Pawameswara)가 1377년 마자빠힛(Majapahit) 왕국의 공격으로 스리비자야 왕국이 패하자 빠라메스와라(Parameswara)와 그의 추종자들은 해상으로 탈출하여 말레이반도 방면으로 이동하게 되었는데, 싱가포르 섬에 잠시 피신해 있다가 믈라까 하구 그 당시 브르땀(Bertam) 강 유역에 정착하게 되었다.
믈라까라는 국명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래가 전해 내려온다. 빠라메스와라(Parameswara : “빠라메스와라”라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에서 파생되었다. 힌두 개념 문자적으로 "강한 신"을 의미한다. “최고”라는 의미의 "Parama”는 신의 호칭을 강조하기 위해 “Ishvara : 통치자”에 추가 되었다. Paramesvara 또한 시바 신의 이름들 중의 하나이다.) 왕자가 강 주변 나무 그늘에서 쉬고 있을 때 그의 사냥개가 깐찔(Kancil : Mousedeer)을 궁지에 몰고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궁지에 몰린 깐찔은 개를 위협하며 들아받아 강에 빠지게 함으로써 위험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왕자는 깐찔의 처지가 자신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새로운 국가를 세울 것을 결단한다. 자신이 앉았던 쉬고 있던 강 주변을 왕도로 정했다. 그리고 명상을 하면서 깨달음을 얻은 고타마 시타르타가 앉았던 나무 그늘은 보리수 나무 그늘 아래였듯이, 빠라메스와라 왕자 깨달음을 얻은 나무 그늘은 믈라까 나무 그늘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의 새로운 나라 이름을 믈라까(Melaka)라고 명명했다는 전설이다.
또 다른 전설에 따르면 믈라까(Malacca)라는 국명은 타밀어로 거꾸로(upside down)이라는 의미인 믈라까(Mallakka)에서 차용한 것으로 알려진다. 사냥개와 깐찔(Kancil : Mousedeer)이 입장이 뒤바뀐 상황을 보고 타밀어인 믈라까를 나라 이름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다른 하나의 믈라까 왕국의 이름에 대한 기원은 무하마드샤(Muhammad Shah : 1424–1444)의 통치기간 동안 정책적으로 페르시아나 아랍, 인도의 이슬람 상인들을 끌어들여 무역상인들의 편의에 정성을 쏟았다. 그 당시 말라카 해협은 해적들이 들끓던 곳이었다. 믈라까 왕국은 이런 해적들을 상대로 상인들을 보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또한 교역 시설을 확충하여 화재 및 도난 방지를 위해 지하 창고까지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무역을 활성화 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법과 행정이 매우 정교하게 짜여져 있어 상인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그곳이 많은 무역상인들의 공동체의 주거지가 있었기 때문에 아랍상인들은 'Mulakat'(Mulaqah 아랍어로 "연합, pertemuan","perhimpunan segala dagang, 무역상인행정구")이라 불렀다.
수마트라 섬에 스리비자야 왕국의 왕자인 빠라메스와라가 마자빠힛 왕국의 침공을 피해 그의 추종들과 함께 건너가 말레이반도를 전전하다가, 그는 브르땀(Bertam : 믈라까 강의 옛이름) 강하구의 어촌마을에 이르러 머물게 되었다. 우선 빠리메스와라 왕자는 오랑 라웃(Orang Laut)이라고 불리는 해상부족과의 유대 관계를 돈독히 하여 믈라까를 국제무역항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했다. 마침내 1402년 힌두-불교 왕국이 세워졌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믈라까 해협은 해적들이 빈번히 출몰하는 곳이었다. 또한 당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시암(Siam 태국) 왕국과 마자빠힛(Majapahit) 왕국으로부터 벗어날 목적에서 공식적으로 중국 명나라의 보호를 요청했다. 명의 보호는 중국과 인도, 중동, 아프리카와 유럽사이의 무역경로에 주요 무역 거점지로 믈라까가 발전하도록 도왔다.
믈라까(Melaka) 왕국 초기에는 중국 명(明)나라의 영락제가 파견한 제1차(1405~1407) 정화 함대를 통해 믈라까 해협의 해적들을 물리치고 치안을 담당하였다. 이로 믈라까 왕국은 명나라의 도움으로 정치적인 안정을 꾀하고, 자유로운 해상무역의 거점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중국의 국내적 필요에 의해 명나라는 자국 생산품의 해외 판로와 증가하는 외국 상품에 대한 국내수요를 충당하기 위하여 동남아와의 무역에 적극적인 관심을 나타낸 결과이다. 믈라까에는 대규모의 중국 무역상들이 유입되어 “중국인 언덕”이라는 부킷 차이나(Bukit China)를 조성하기도 했다. 남지나해와 인도양에서의 통상 패권을 목표로 하는 정화 함대는 믈라까를 근거지로 하여 기반을 닦았다. 이것에 따라 믈라까는 명에 몇 번이나 조공 사절을 보내, 그 충실한 조공국이 된다. 파라메스와라(Parameswara)를 시작으로 이스칸다르 샤흐(Iskandar Shah), 무하마드 샤흐(Muhamad Shah)는 정화 함대에 동승하여 수차례 중국을 방문했다.
빠르메스와라(Parameswara) 왕은 향신료 무역의 중계항으로서 인도, 중동에서 많은 이슬람 상선이 이곳을 찾아 왔으며, 힌두교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페르시아나 아랍, 인도의 이슬람 상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했을 정도로 철저했던 무역 전략이 믈라까를 무역 왕국으로 발전하게 했다. 빠라메스와라 왕은 1409년 빠사이(Pasai : Samudera Darussalam 혹은 Samudera Pasai로 알려진 A.D.13세기부터 A.D.15세기까지 수마트라(Sumatera) 섬의 북쪽 해안에 이슬람 항구 왕국이었다. 동부 자바섬에 무슬림 묘비는 1082년에 해당하는 날짜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서 작은 두 이슬람 무역 왕국인 빠싸이(Pasai와 Peureulak 또는 Perlak : 수마트라 북부의 왕국)에서 이슬람의 실질적인 증거는 A.D.13세기 말에 단지 북부 수마트라에 시작되었다. 1297년 사무다라(Samudera)에서 왕의 무덤은 아랍어로 완전히 새겨져 있다.)의 공주와 결혼을 통해 이슬람으로 개종하고 자신의 이름을 라자 이스깐다르 샤(Raja Iskandar Shah)로 개명했다. 이슬람 세력과 협력하며 믈라까 왕국은 봉건제도(Feudal System) 관할지역을 통합시켜 가며 확장시며 말레이반도와 군도로 넓혀 나가며 해상 국가로서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통치자들의 해상 무역을 정책적으로 지원한 결과였다. 이 때문에 동남아시아 이슬람 포교의 거점지가 되는 계기도 되었다.
1402년 명나라의 제3대 황제 영락제가 즉위하였다(1402년:태종 2년5월에 김사형(金士衡), 이무(李茂), 이회(李薈) 등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混一疆理歷代國都之圖)라는 서유럽과 아프리카대륙, 그리고 아라비아반도가 표기된 세계지도를 제작함). 원래 명을 창건한 태조 홍무제인 주원장의 경우에는 환관에게는 권력을 주지 않도록 했다. 하지만 주원장의 손자인 혜제 건문제가 즉위한 뒤, 황제권 강화를 위해 자신의 숙부들인 왕들을 제거하자 연왕 주체(후의 성조 영락제)가 난(정난의 변:靖難之變)을 일으켜서 건문제를 몰아내고 황제로 즉위했다. 반란으로 즉위한 영락제는 백관들이 자신을 따르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대신들의 본거지인 남경에서 북경으로 천도하고, 백관들 대신에 환관을 중용하게 되었다. 정화 또한 영락제가 중용했던 환관 중의 한사람이다.
정화는 국적은 중국이지만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 집안 출신이다. 성의 마(馬)는 무슬림에게 흔한 '무하마드'의 음차. 윈난성(雲南省)의 한 지방 관리였던 마합지(馬哈只)의 아들로 태어났다. 역시 합지(哈只)라는 이름은 메카 성지순례를 마친 사람에게 붙는 칭호인 하지(Haji)의 음차이다.
1382년 윈난성이 명나라에 정복되자 명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끌려왔다. 어린 나이에 명나라에 끌려온 후 거세되어 환관이 되었고 훗날 영락제가 되는 연왕(燕王) 주체(朱棣)를 섬겼다. 정난(靖難)의 변 때에 연왕을 따라 무공을 세웠고, 연왕이 건문제를 물리치고 황제로 즉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후 환관의 장관인 태감(太監)에 발탁되었으며, 정(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정화를 나타내는 글 중에 호탕한 기개와 우람한 체격을 나타내는 말이 있다. 문신들이 환관을 파견한 제1차 정화 함대가 내항했다(중국이 유럽보다 먼저 해상시대를 시작했는데, 정화가 지휘한 명나라 세력의 인도양 진출은 1492년 콜럼버스, 1497년 바스코 다 가마의 인도양 도달보다 무려 80∼90년이나 앞서는 것). 유럽인들의 목적이 식민지 수탈에 있었던 것과 달리, 중국 명나라 시대에는 단지 중국황제의 위엄을 과시할 목적에 머물러 있었고 문신들의 환관에 대한 견제에 부딪혀 원양선이 제거되고 무역이 금지되면서 1405~1433년까지 7차에 걸친 해양개척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믈라까(Melaka)의 건국자 빠라메스와라(Parameswara) 왕은 우호관계를 보이기 위해 1410년에 처자 및 신하 500여 명을 이끌고 중국을 방문했다고 『명사(明史)』 기록하고 있다. 믈라까 왕국은 1405년 이래로 명나라의 보호를 받았고, 자주 명군의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건국이래 믈라까(Melaka) 왕국은 계속해서 각종 사절단을 북경에 보냈다.
정화의 대함대는 유럽에서 대항해시대의 물결이 퍼져나가기 백여년 전, 남지나해와 인도양을 넘어 아프리카의 동부 해안까지 다다르게 되었다. 비록 이후부터는 다시 본래대로의 모습으로 귀환하게 되었지만, 비록 단발성의 이벤트에 가깝다고 해도 그 위상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당초 믈라까의 경쟁 상대는 북쪽 수마트라의 이슬람 항구도시였지만, 무자파르 샤(Mujapar Shah)가 이슬람을 국교로 정하고, 타이 아유타야 왕국의 침공을 물리쳐 말레이반도 전역과 수마트라 섬 동해안에 세력을 확대하면서 점차 동서 무역의 중계항으로서 번영하기 시작했다.
믈라까의 거대한 무역망과 막대한 교역물자에 관한 소식을 접한 포르투갈의 동 마뉴엘(Don Manuel) 왕은 세께이라(Sequeira)를 파견하여 그 곳의 통치자와 우호관계를 맺고 믈라까를 포함한 인도 동부지역에서 자신의 대리인 역할을 하도록 명했다. 당시 믈라까는 인도의 벵갈만, 남중국해, 그리고 자바해 지역 해상 네트워크의 교차점에 위치하여 중요한 무역항으로 발전하였는데 그곳에 상주해 있던 여러나라의무역대표들이믈라까의술탄 마흐무드샤(Mahmud Syah)에게포르투갈을받아들이지말것을권고했고, 술탄은 무역대표들의 권고를 받아들여세께이라부하들을체포하고일부는참하였다. 이런일이벌어지자포르투갈은무력사용만이믈라까무역망을장악하는유일한수단이라고판단했다.
15세기 믈라까는 동남아에서 인도양 무역로로 향하는 유일한 출구로서 그 위상이 높았다. 믈라까 술탄국의 힘은 매우 강력했으며, 당시 수도가 대표적인 국제 무역항으로 성장하였고 말레이반도의 대부분과 리아우 제도, 수마트라 섬의 중요한 부분을 지배하였다. 인도와 중동, 멀리는 유럽의 상품들을 적재한 무역선이 믈라까에 도착하여 동남아의 각종 향신료는 물론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 등과 교환하는 방식의 중계무역이 성행하였다. 당시 태국, 베트남, 일본, 필리핀 등지에서 출항한 많은 무역선들이 각종 물품들을 싣고 믈라까에 입항했다.
믈라까(Melaka)에는 특별한 행정기구를 두어 다양한 외국의 상인들이 자유롭게 거래행위를 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제공했다. 말레이 귀족들은 시장활동에 관여하지 않고, 상인들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했으며, 단지 입출항의 질서나 해적으로부터 해안을 보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이렇듯 해상무역을 중심으로 믈라까 왕국은 1470년경에 전성기를 맞았고 점차로 제국(帝國)형태로 발전되어 나갔는데 그 장본인은 뚠 뻬락(Tun Perak)이었다. 뚠 뻬락은 거대한 재산가이자 빈틈없는 정략가이며 성실한 무슬림이었다. 그는 3대에 걸친 술탄 친정(親政)의 치세기간 중 뛰어난 수완을 바탕으로 4명의 술탄을 모셨다. 뚠 뻬락은 자주 정략결혼을 주선하였고, 그 자신도 정략결혼을 통해서 믈라까의 술탄이 되었다. 뚠 뻬락의 치세 기간 중 믈라까 왕국은 봉건제도 관리통합 확장해 가며 태국 남부 빠따니(Pattani)와 쁘르리스(Perlis), 끄다(Kedah), 끌란딴(Kelatan), 뜨렝가누(Terengganu), 뻬락(Perak), 빠항(Pahang), 슬랑오(Selangor), 믈라까(Malaka), 조호르(Johor)를 포함하는 전 말레이반도와, 리아우(Riau), 링가(Lingga), 빈땅(Bintang), 만달링(Mandaling), 로깐(Rokan), 시악(Siak), 깜빠르(Kampar), 잠비(Jambi), 인드라기리(Indragiri) 등 믈라까 해협을 사이에 두고 믈라까와 마주 보는 수마트라 중동부 대부분의 지역을 완벽하게 왕국의 영향하에 두었다.
믈라까 왕국을 구성한 종족은 믈라유족으로 이들은 이미 수세기 이전부터 동남아 각지와 멀리 아프리카 남동부의 마다가스카르(Madagascar) 섬까지 분포지역을 확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순종적이고 적응력이 강하여 어느 지역에서나 어떤 문화적 배경을 가진 왕국과의 교섭도 잘 소화해 내었다. 믈라유 종족들의 주된 문화권은 필리핀 남부 민다나오(Mindanao)와 북부 보르네오(Borneo), 자바의 수마트라 그리고 말레이반도 전역이었으나, 믈라까 왕국이 번성함에 따라 보다 많은 수의 이들 믈라유인들이 믈라까를 중심으로 믈라까해협 양안(兩岸)의 말레이반도와 수마트라의 중동부 지역에 집중되기 시작했다.
믈라까 왕국은 이슬람교를 수용함에 따라 말레이반도와 자바섬을 아우르는 범 이슬람 문화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 시기 자바섬의 마자빠힛 왕국이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고, 믈라까 왕국의 세력 확장은 북쪽으로 아유타야(시암 : Siam) 왕국을 위협할 정도였다. 따라서 믈라까 왕국은 말레이반도와 해협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었다.
믈라까(Melaka) 왕국은 거대한 군도 부분과 반도의 여러 지역을 넘어서 그들의 지배권을 뻐칠 수 있는 통합적 봉건 제도(Feudal System:중앙 정부는 수도와 일부 요충지만 직접 통치하고 다른 지방에는 제후나 영주를 임명하여 세습하여 다스리게 하는 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1511년 포르투갈이 점령한 후 이 봉건적 정치 제도는 점점 관심을 잃었다(Syed Husin Ali, The Malays, Their Problems and Future, The Orther Press, Kuala Lumpure, 2008, p.14.)
다음 대의 만수르 샤(Mansur Shah:재임시기 1459-1477)는 믈라까(Melaka) 국왕으로서 처음으로 술탄이라고 칭하였고, 아유타야의 속국인 빠항(Pahang)을 함락하고 자바 섬 북안에 성립한 드막(Demak), 자빠라(Japara), 뚜방(Tubang), 수라바야(Surabaya) 등의 이슬람 항구도시와 협력해 마자빠힛(Majahpahit) 왕국을 한층 더 약화시켰다.
제7대 술탄 알라우딘 리아얏 샤의 치세는 26세에 젊은 나이에 독살로 막을 내렸다. 그의 아들 마뭇 샤는 어린 나이에 술탄으로 옹립되었지만, 유능한 인재를 등용하여 교역항으로서의 믈라까는 최성기를 맞이한다. 당시 인도의 구라자트 이슬람교 지역이 가장 중요한 무역 상대였으며, 남 인도의 타밀인이나 자바 섬의 사람들이 그 뒤를 이었다. 당시 중국은 해금정책을 이어갔었지만, 금지령을 어기며 내항하는 중국인 밀무역 상인도 적지 않았다. 교역의 내용은 인도의 면직물을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나 수마트라 섬의 금과 후추,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티모르 섬의 백단 등과의 교역이 주를 이루었다. 왕국에는 내항하는 상선이 입항세를 지불했다.
1446년과 1456년 태국의 공격을 받았으나 뚠 뻬락(Tun Perak)이 이끄는 믈라까 군대가 격퇴시켰는데 중국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믈라까 왕국은 중국과의 우호적 관계를 유지했는데, 이러한 전통은 스리비자야시기부터 시작됐다.
빠라메스와라 왕은 중국과 사신을 교환했고, 명나라 정화(鄭和)가 남해원정을 실시할 당시 믈라까 왕실로부터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고 한다. 남중국해와 인도양에서의 통상 패권을 목표로 하는 정화 함대는 믈라까를 근거지로 하여 기반을 닦았다. 이것에 따라 믈라까는 명에 몇 번이나 조공 사절을 보내, 그 충실한 조공국이었으며, 또한 명나라 항리뽀(Hang Li Po) 공주가 만슈 샤(Manshur Shah, 1456-1477)왕과 결혼하기 위해 500명의 사신들과 믈라까를 방문했다. 한자로 믈라까는 만랄가(滿剌加)로 표기했다.
동 시기에 교역국으로서 번영한 류큐 왕국과도 해상무역을 하였다. 류큐 왕국(오키나와어: 琉球國류추쿠쿠)은 동중국해의 남동쪽, 현재 일본 오키나와 현 일대에 위치하였던 독립 왕국이다. 100여 년간 삼국으로 분할 되어 있던 것을 1429년에 중산국(中山國)이 통일하여 건국하였다. 류큐국은 중국이나 일본, 동남아시아 등과의 중계무역으로 번성하였다.
15세기초 이슬람교는 전세계에서 가장 활발한 확장세를 가지고 있었다. 유럽 국가들은 아직 미개발이었으나, 포르투갈만은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확실한 기술을 개발해 내고 있었다. 그들은 온갖 지혜를 짜내서 기동력이 뛰어난 군함을 만들어 내었다. 1460년 경부터 포르투갈의 항해가와 모험가들은 리스본(영어:Lisbon 리즈번, 포르투갈어 : Lisboa 리스보아)에서 군함을 타고 미지의 바닷길로 탐험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무슬림 상인들의 무역항로를 탈취하여 황금을 획득하고자 아프리카의 서쪽해안을 따라 남으로 남으로 긴 탐험 여행을 시작했다.
포르투갈인들은 향신료를 원했다. 그들은 유럽시장에 독점적으로 향신료를 공급해 온 무슬림들의 무역망을 차단하고, 황금의 땅 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찾고자 했다. 겨울이 유난히 길고 추운 유럽에서는 겨울동안 도살한 고기의 선도를 유지하기 위해서 믈라까에서 오는 향신료가 꼭 필요했다. 믈라까를 거치는 향신료 중 가장 인기가 있었던 것은 인도네시아 동부군도(몰루꾸 제도:향신료 제도)에서 생산되는 특별한 향신료인 정향(Clove)과 너트메그(Nutmeg, 육두구)등이었는데, "검은 황금"이라 불리는 향신료를 찾아 포르투갈 상인들이 16세기 중엽부터 몰루꾸 제도를 왕래했기 때문이다(포르투갈의 해상권이 강해지기 전 유럽의 향신료 시장은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무역상들이 독점하고 있었다. 인도와 동맘아시아에서 생산된 향신료는 육로로 아랍상인들의 중개무역울 거쳐 베네치아로 유입되었다. 1453년 비잔티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당하면서 베네치아와 이탈리아의 향신료 시장 독점 시대가 막을 내렸다. 포르투갈은 아프리카 항로와 희망봉을 개척하며 인도와 향신료 시장을 연결시켜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최초로 몰루꾸 제도를 무력으로 정복한 포르투갈인은 1536년 130명의 포르투갈 군대를 이끌고 할마헤라(Halmahera:주위의 작은 섬들이 있음. 북단의 작음 섬이 모로따이"Morotai", 당시 유럽인들은 모로"Moro" 혹은 모르티"Morty" 섬으로 부름. 서쪽에 떼르나떼"Ternate" 섬이 있음.)섬의 작은 섬 떼르나떼(Ternate)에 상륙한 안또니오 갈바옹(Antonio Galv?o) 선장이었다.
1487년과 1497년에 포르투갈은 이미 인도와 접촉했으나, 그들은 믈라까를 거쳐오는 인도네시아 군도의 수출품과는 품질면에서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포르투갈은 결국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아시아의 무역망을 장악해야만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있다는 판단을 하기에 이르렀다. 알부께르끄(Albuquerque) 제독이 지휘하는 포르투갈 함선은 1503년 인도에 도착해서 1507년 인도 서쪽해 안에 위치한 고아(Goa)를 점령하였다. 그는 이 곳을 포르투갈령 인디아국의 수도로 삼아 동양정 복의터전을 마련하여 아시아 해상무역 점령에 나섰다.
그후 해상무역의 중요한 거점지인 믈라까는 네덜란드에 의해 1641년에 점령되어 영국이 1786년 말레이 반도에 진출하기 전까지 식민지로 있었다. 영국이 1795년 믈라까를 점령하였고 또 다시 네덜란드가 믈라까를 점령하여 1811년에서 1825년까지 네덜란드의 통치를 받다가 영국-네덜란드 조약(The
Anglo-Dutch of Treaty of 1824 혹은
The
treaty of London)으로
영국이 믈라까를 네덜란드로부터 획득하고 대신 네덜란드는 후추 생산지로 유명한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에 위치한 븡꿀루(Bengkulu)를 영국으로부터 할양받았다..
영국은 1832년, 삐낭(Penang), 빵꼬르(Pangkor), 믈라까(Malacca), 싱가포르(Singapore)로 해협식민지(Straits Settlements)가 구성하였다.
1896년에, 프랭크 스웻텐헴(Frank Swettenham), 대대적인 판무관의 조정을 통해 슬랑오(Selangor)는 느그리 슴빌란(Negeri Sembilan), 뻬락(Perak) 그리고 빠항(Pahang) 등과 함께 연방 말레이 주들로 그 연방 말레이 주들의 주도인 꾸알라 룸뿌르(Kuala Lumpur) 안에서 연합되어 1946년까지 지속되다가 이전의 해협 식민지들과 비연방 말레이 주들과 함께 말레이 연맹(Malay Union)을 결성했다.
2년 후, 연맹(Union)은 말레이 연방이 되었고, 마침내 1963년에 사바(Sabah : 그 당시 North Borneo), 사라왁(Sarawak) 그리고 싱가포르(Singapore : 1965년 연방 탈퇴함.)를 포함시켜 말레이시아 연방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였으며, 1965년에 싱가포르(Singapore)가 말레이시아 연방 정부와의 다툼 끝에 연방을 탈퇴하여 결국 독립국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