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배신과 불신
가로수 이파리에 가을이 스미고 있었다. 초록빛이 바래 누르스름하고
불그레하게 단풍 들어가는 잎사귀들이 소슬한 바람결에 스산함을 자아냈
다. 어떤 잎새들은 벌써 낙엽져 도심의 보도나 차도에 흩날리고 있었다.
나뭇잎들보다 계절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더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흰
색에서 검정색으로 바뀐 학생들의 교복이었다. 그리고 길거리마다 연탄
실은 마차들 오가는 게 부쩍 늘어났다. 길목길목에 자리를 잡았던 그 많
은 냉차장수들은 자취를 감추었고, 군밤이나 군고구마 냄새가 어스름
깔리는 거리에 퍼지기 시작했다.
지프를 개조한 검정색 자가용에서 내린 강기수는 헛기침을 하며 호텔
을 흘끗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서울에서 제일 높은 건물인 8층짜리 반
도호텔의 끝은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흥, 장면이가 여길 좋아한다더니 이젠 신파놈들이 아지트로 삼는 모
양이구나. 그래, 자알들 논다.
강기수는 콧방귀를 뀌며 넥타이를 고치다가 양복을 스치고 떨어지는
낙엽을 구두로 짓밟았다. 그리고, 잽싸게 앞선 비서가 열어주는 호텔문
으로 들어섰다. 훈김과 함께 왈칵 끼쳐온 것은 야릇한 담배 냄새였다.
아, 이 양농 냄새!
강기수는 순간적으로 멈칫했다. 그 향 짙은 시가 냄새는 미국사람을
맞대했을 때와 같이 사람을 주눅들게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미국사
람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며 어깨를 폈다. 하지만 이런
거북한 데다 약속장소를 정한 상대방에게 기분이 상하고 있었다. 미국
사람들이 드글거리는 이런 데보다 방석 깔고 노닥거리는 요정이 한결
운치 있고 마음 편했다.
세상이 확 달라졌으니 영어란 걸 익히긴 익혀야 되는데 말야.......
강기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커피숍을 찾아가고 있는 비서를 따라갔
다. 느닷없이 해방이라는 것이 되고 미군정이 실시되었을 때 영어를 배
우려고 했었다.
"봐라, 시상은 요런 것이다. 해묵은 놈이 또 해묵고, 심 있는 놈이 심
있는 놈을 지 편으로 삼는 것이여. 그렇게 양지만 골라감서 시상 요령 지
게 사는 법은 어느 짝이 심 있는가 딱 종그고 있다가 판이 째였다 허먼 넌
먼첨 그짝으로 찰팍 붙어야 혀. 인자 미국 시상으로 결판났응께 니넌 일
본말 싹 잊어불고, 옛적에 일본말 배우든 열성으로 미국말 배와야 되야.
이 애비 시절은 다 갔어도 니 시절은 인자 새로 시작잉께로. 알겄지야?"
해방이 되고 두 달 동안 서울로 피해 있다가 무사하게 되어 집으로 돌
아가며 아버지가 한 말이었다. 해방이 된 다음날부터 경찰서며 주재소
는 학생과 청년들 차지가 되어버렸고, 그들의 서슬에 일본과 친했던 사
람들은 피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에 숨어 있으
면서 그만 세상이 끝장난 줄 알았다. 그런데 미군은 군정을 실시하면서
산으로 어디로 피신한 경찰이며 공무원 출신들을 찾아내 예전 자리에
다시 앉혀줄 뿐만 아니라 승진까지 시켜주었다. 그 기막힌 새 세상에 맞
추려고 애썼지만 영어 익히기는 뜻 같지 않았다.
"강 의원님, 여깁니다. 어서 오십시오."
민주당 신파의 실력자 중의 한 사람인 정 의원이 반색을 했다.
"이거 원........"
강기수는 마뜩찮은 얼굴로 실내를 획 둘러보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
았다.
"마음에 안 드셔도 좀 이해하십시오. 남들 눈을 피하느라구요."
상대방은 정권을 잡은 여당의 실력자답지 않게 겸손을 보였다.
"뭐, 괜찮습니다. 그런 건 신경 쓰지 마시고........"
강기수도 사교적으로 겸손을 꾸미며 어서 용건이나 꺼내라는 투로 말
했다.
그러나 상대방은 커피를 시키고 담배를 권하고 하며 뜸을 들였다. 장
면 총리는 새 기강을 확립한다고 정치인과 공무원들에게 요정 출입과
양담배를 엄금하고 있는 판인데 그 직속이 권한 것은 팔말이었다. 살렘
은 여자나 피우는 것이고, 켄트는 싱겁고, 카멜은 너무 짧고, 팔말은 담
배답게 독하면서도 길어서 멋있다고 해서 단연 인기였다.
"뭐......, 보셔서 다 아시는 일입니다만 지난 9월 말에 구파에서 20여
명, 무소속에서 10여 명이 우리 신파로 오면서 대세는 완전히 굳어진 것
아니겠습니까. 그동안 심사숙고하셨으니 강 의원께서도 그만 결단을 내
려주시지요."
강기수는 상대방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상대방은 더 무슨 말을
할 기미가보이지 않았다. 강기수는 그만 기분이 획 상했다. 그냥 민주
당으로 옮기려고 여태껏 버티어온 것이 아니었다. 신구파 세력다툼을
이용해 주가를 올릴 대로 올려서 큼직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려는 속셈
이었다. 오늘 그 협상인 줄 알았더니 대세론으로 밀고 나와?
"에에 또......, 대세라 말씀하셨는데, 구파가 신당을 창당할 것은 기
정사실이고, 그리 되면 장군 멍군 아닐까요. 다 아시다시피 구파 쪽에서
도 우리를 귀찮게 굴고 있으니 나 혼자 어쩔 수 없고 우리끼리 다시 의
논을 해봐야지요. 우리도 유권자들의 뜻이 있고 하니까......."
강기수는 성질을 부리는 대신 거만을 있는 대로 부리며 일부러 '우
리'를 강조하고 있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일단 들어오셔서......."
"알겠습니다. 저녁에 우리 모임이 있어서 그만......."
강기수는 상대방의 말을 자르고 벌떡 일어섰다.
"빌어먹을 자식!"
얼굴이 벌겋게 되어 호텔을 나선 강기수는 담배를 사정없이 팽개쳤다.
그 길목을 지키고 있었던지 남루한 입성의 노인네가 금세 나타나 연
기 피어오르고 있는 담배를 길고 가는 막대기로 찍어 올렸다. 막대기에
묶인 펜촉에서 담배를 빼내는 노인네의 찌든 얼굴에 웃음이 피어났다.
그 담배는 미처 반도 안 탄 것이기 때문이었다.
강기수를 태운 차는 정릉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시내의 가로수와는
달리 정릉 뒷산에는 한결 곱게 단풍이 물들고 있었다. 봄은 산을 타고
오르는 데 비해 가을은 산을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의원님 가을이네요."
윤 마담이 미모에 어울리는 농염한 웃음을 피웠다.
"가을이나마나 다 왔어?"
강기수가 퉁명스럽게 내쏘았다.
"네에, 네 분이 기다리세요."
나긋한 목소리와는 달리 윤 마담은 강기수의 꼭뒤에다 눈을 흘겨댔다.
"이거, 판이 더럽게 돼가고 있소. 대세가 신파 쪽으로 굳어졌으니 그
냥 들어오라는 배짱놀음으로 나오는 판이오."
강기수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참아왔던 화를 터뜨리듯 말했다.
"아니, 그래 뭐랬소?"
최영찬이 다급하게 말을 받았다. 그도 다시 당선이 되었지만 표차가
강기수의 4만표에 비해 어림이 없었다. 동석한 다른 세 사람도 가까스
로 턱걸이한 형편이었다. 그러다 보니 표차가 월등한 강기수가 여당과
의 협상에 주도권을 잡고 앞으로 나서게 된 거였다.
"배짱에는 배짱으로 튕기는 것 아니오. 우리 힘을 과시해 주고 내가
먼저 자리를 차고 나와버렸소."
내 배짱이 어떠냐는 듯 강기수는 좌중을 둘러보았다.
"그거 참 잘하셨어요."
"암 잘하구말구요."
"그럼요, 몸 다는 건 제놈들이니까."
그들은 한꺼번에 입을 모았다.
"그런데 말이오......, 대세가 굳어졌다는 게 꼭 공갈치는 것만은 아니
잖겠소. 정치란 현실인데, 우리끼리 솔직하게 말해서 그동안 여당생활
만 해온 우리가 실권도 없고 또, 야당으로 바뀔 게 뻔한 구파와는 애당
초 손을 잡을 뜻이 없었던 것인데, 신파에서 우리의 이런 입장을 약점으
로 공격하는 것 아니겠소. 우리 욕심을 좀 줄이고 이 시점에서 차선책을
찾는 게 현명하지 않을까 싶소."
최영찬이 강기수의 눈치를 살피며 신중하게 말했다.
"그렇기도 해요. 우리 무소속이 철통같이 단결하지 못하고 지난 월말
에 10여 명이 넘어가면서 남은 우리의 입지가 약해졌어요. 더 약해지기
전에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 해요."
한 사람이 동의를 하고 나섰다.
"에에......., 최 의원님 말도 일리가 있으나 꼭 그렇게 나쁘게 볼 것만
은 아니오. 만약 우리 다섯 전부가 구파로 간다고 했을 때 신파 쪽에서
얼마나 몸이 달겠소. 다시 말해 신파의 약점도 투시해야 한다 그거요."
강기수는 한쪽으로 쏠릴 위험이 있는 분위기에 제동을 걸었다 이들
을 이용해 큼직한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싶은 욕심을 버리지 않은 채.
"그야 그렇지요. 허나 힘은 그쪽이 세고, 우린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
야 말이지요."
다른 사람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막말로 노름도 새벽에 끗발 오르는 놈이 이기더라고 이 일도 지금이
고비요. 우리도 저쪽도 두 달이 넘게 이 일로 실랑이질하고 버팅기고 하
느라고 지칠 만큼 지쳤소. 허나 우리보다 더 지치고 몸이 달아 있는 건
저쪽이오. 왜냐, 우린 저쪽 하나뿐이었지만, 저쪽은 우리 회유하랴 구파
하고 쌈질하랴 상대가 둘인데다. 이젠 구파의 분당이 명백해진 상황이
란 말이오. 이 분당 사태야말로 우리의 주가를 최대한 올릴 수 있는 절
호의 기회고, 또 우리가 고대했던 바로 그 기회가 아니겠소. 우린 이 막
바지에서 정신 똑바로 차리고 더욱 일치단결하여 우리가 원하는 고지를
점령해야 하는 거요. 그러기 위해서 마지막 강수로 우리 모두가 구파로
간다고 위장술을 써보는 게 어떻겠소."
"그야 밑져봐야 본전이긴 한데, 별효과가 없으면요?"
최영찬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때야 우리 요구조건을 낮춰서 우리한테 필요한 이권이나 톡톡히
챙기면서 들어가면 될 거 아니겠소."
"그거 좋은 방법입니다. 특혜 건을 하나 물어왔는데 일은 안 풀리지,
선거빚 이자는 불어나지 죽을 지경입니다."
"나도 환장하겠어요. 그리 결정합시다."
"그럼 내가 다시 한 번 몰아붙여도 되겠습니까?"
강기수는 자신의 뜻대로 된 것에 만족하며 형식적으로 물었다.
"예, 좋습니다."
"빨리 잘 좀 풀어보세요."
그들은 다같이 찬성하며 술 마실 채비를 했다.
"거 교수놈들은 왜 또 떠드나 그래."
"그까짓 것 신경 쓸 거 없어요."
한국교수협회에서는 '민주당 정부와 국회는 집권 이래로 혁명의 정신
이나 국민이 지지해 준 선거의 의의를 망각하고 권력의 쟁탈을 위한 파
쟁으로 시일만 허송하고 도리어 반혁명세력과 결탁하여 가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는 내용의 시국선언을 발표했던 것이다.
도심의 술집인데도 화단이 있어서인지 가을 풀벌레 소리가 구슬프게
울리고 있었다. 쓸쓸하고 외로운 정감이 사무치는 그 가녀린 소리를 반
주삼기라도 한 듯 어느 방에선가 (과거를 묻지 마세요)를 구성지게 부
르는 젊은 여자의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 영화 주제가는 한창 유
행바람을 타고 있었다.
남재구는 자신도 모르게 그 멀리 들리는 노래에 귀를 팔고 있었다. 그
노래의 대상이 여자인데도 어쩐지 자신의 지나온 인생살이를 엮어낸 것
처럼 느껴지며 가슴에 잠겨오고 있었다.
"......어둡고 괴로웠던 세월도 흘러......."
특히 이런 대목은 콧등이 시큰해지도록 감정을 자극했다.
"이봐,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어서 술 마셔."
한인곤이 잔을 내밀었다.
"이런, 무슨 술을 그리 급히 마시나 속상해 하지만 말고 오늘 일어난
일이나 얘기해 봐."
남재구는 축축해진 감정을 털어내며 한인곤이 따르는 술을 받았다.
"참 한심해, 내가 왜 국회의원이 됐는지 모르겠어."
한인곤이 푹 한숨을 쉬며 술주전자를 상이 울리게 놓았다.
"허! 자네 어르신 말씀마따나 배부른 소리하고 앉았군. 그래도 만년
육군 대령보단 나을 텐데?"
남재구는 담배를 빼들며 이죽거렸다.
"말 마. 오늘 그 일 당하고 나니까 내가 국회의원이라는 게 너무 창피
하고, 그동안 참아왔던 당에 대한불만과 실망이 한꺼번에 터져오르는
게 다 때려치우고 싶은 심정이야."
"글쎄, 그런 자네 심정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닌데 말야, 오늘 당한
일이 신문에 난 그대론가?"
"아니야 신문들을 보니까 그래도 국회 체면을 봐주려고 한 건지, 아
니면 약게 국회 눈치를 봐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는데, 크기도 별로 크지
않고 내용도 왜 점잖게 쓴 거야."
한인곤은 술잔을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남재구는 술잔을 건네며 어
이없어했다.
"아니, 회의가 중단되고, 국회의장석을 빼앗기고, 연단이 엎어지고,
학생들이 의장석을 짓밟고 올라가고, 그런 것을 다 썼는데도 점잖게
써? 그럼 도대체 얼마나 심했는데?"
"한마디로 엉망진창 우리 군대에서 흔히 쓰는 말로 개판이고 깽판이
었어. 부상학생들이 환자복이며 흰 까운을 입은 채로 목발을 휘둘러대
며 파쟁 국회, 만주 반역 국회 해산 하라고 외쳐대지, 분노할 대로 분노
한 60여 명이 물불 가리지 않고 행동하면서 연단의 유리란 유리는 다 박
살나지, 발포자들이 무죄라면 우리를 다 죽이라고 외쳐대며 유리컵을
깨서 할복을 하려고 옷을 벗어붙이지, 그걸 말리려고 쫓아나간 의원들
이 휘둘러대는 목발에 맞고 쓰러지지, 모든 의원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죄인으로 고개 숙이고 앉았지, 그 창피스럽고 한심한 국회 꼴은 말로 다
할 수가 없어. 빌어먹을!"
한인곤은 술잔을 왈칵 비웠다.
"이거 좀 뭣한 말이지만, 당연히 올 게 온 거 아닌가."
"암, 당해서 싸지."
한인곤은 얼굴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물었다.
"정신 차려야 해. 이번 사건이 장면 정권과 민주당의 위기를 단적으로
입증하는 거니까."
"누가 아니래나. 그래도 정신 차리긴 글렀으니 사람 미칠 일이지."
한인곤은 또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4 .19 부상학생들이 정기국회를 열고 있는 민의원 단상을 점거한 사
건은 사흘 전에 있었던 혁명재판의 결과에 분노한 때문이었다. '혁명재
판'이라고 이름 붙여진 그 재판에서는 발포자 다섯 명중에 한 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하고 나머지는 모두 무죄 처리를 했다. 그리고 악명 높은
반공청년단 간부들이면서 정치깡패인 네 명중에 한 명에게만 5년형을
언도하고 나머지에게는 벌금형과 무죄를 내렸다. 여섯 달을 질질 끌어
오던 '혁명재판'의 그 결과에 시민들은 다음날 즉각 데모로 응답하고
나섰다.
마산에서 재판부를 규탄하는 철야데모를 일으킨 것을 시작으로 날마
다 전국의 대도시에서 데모가 격렬하게 벌어졌다. 그 기세가 두려웠던
것인지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뒤늦게 '혁명정신을 모독한 법관들을 탄
핵소추해야 한다', '재판관들의 정실감정이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
다. 그 공격에 재판관들은 '특별법을 제정하지 않고 이제 와서 비난하
는 것은 국회의원들의 무책임'이라고 책임을 떠넘겼다. 사태의 심각성
을 알았는지 그동안 존재가 없는 것 같았던 대통령도 '그 판결은 민족
정기를 무시한 것'이라며 국회에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고 나섰다. 그런
와중에서 마침내 부상 학생들이 병원을 뛰쳐나와 국회로 쳐들어가기에
이르렀다.
일부의 비판처럼 그 재판관들이 과거의 정치 부패세력과 결탁한 자들
이건, 정신감정이 필요한 자들이거나 간에 어쨌든 모든 책임은 집권당
인 민주당에 있었다. 지난 총선거에서 민주당은 164석(신파 88, 구파 76)
을 차지해 의석의 3분의 2 선을 넘었고. 자유당 출신 무소속은 35석, 사
회대중당이 3석이었다. 국민들이 그런 엄청난 지지를 해주었는데도 민
주당은 집권 두 달 반이 다 되도록 신구파로 갈려 세력다툼만 하느라고
다른 일들은 더 말할 것도 없고 혁명재판을 위해 하루가 급한 특별법조
차 만들지 못하고 허송세월을 한 것이었다.
"아니 그럼, 의사당 앞에서 데모대가 시키는 대로 신구파 싸움을 중지
하겠다고 악수까지 해놓고 또 싸우겠다는 거야?"
남재구가 너무 어처구니없어 하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그야 데모대의 기세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한 거고, 그 싸움은 아무
도 고칠 수 없는 고질병이야. 고질병.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는지 모
르겠어? 그놈의 권력욕이라는 게 뭔지 난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급
하고 중한 나라 일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말야. 이런 꼴 보자고 국회의
원 된 게 아닌데."
한인곤은 술을 거푸 들이켰다.
"차암, 그 간부하는 윗대가리들은 다 귀먹고 눈멀었나? 지금 민심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렇게도 몰라? 자유당정권만 무너지는 줄 아
나. 한 번 정권을 무너뜨려 본 국민은 두 번째는 더 쉽게 무너뜨릴 수 있
다는 걸 알아야지."
남재구도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그래. 젊은 의원들이 그런 식의 말을 해도 늙은이들은 마이동풍이야.
이걸 그냥 성질대로 때려치울 수도 없고 말야."
"자네, 그런 소리는 말어. 자네가 말했지. 군대 기질 버렸고, 정치는
곡선이라고. 내가 미력이나마 자넬 돕기로 한 건 생활안정 때문도 아니
고 감투 때문도 아니야. 광복군 때의 그 마음으로 정치를 하겠다는 데에
감동했고 나하고 똑같은 식으로 당한 자네가 내 몫까지 다해서 이 나
라를 바로잡는 데 일익을 담당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이야. 나도 자네 같
은 여건이었으면 정치를 했을 테니까. 그러니 참고 기다려. 기다려야 때
가 와."
한인곤은 술기운이 걷히는 긴장감으로 남재구를 응시했다. 술을 마셔
서 그런지 그가 처음으로 털어놓은 속마음이었다. 여건이 같았으면 자
신도 정치를 했을 거라는 말이 가슴을 징 울리고 있었다.
"알았어, 자네 말대로 할게."
약속의 표시인 듯 한인곤은 술잔을 건넸다.
"그래, 정동진은 만나봤나?"
남재구는 말머리를 돌렸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마음이 안 내켜."
"허허, 저러고도 곡선인 정치를 해?"
"이 사람아, 생각해 봐. 내가 예편당하니까 인정사정없이 싹 외면했던
놈이 국회의원에 당선되니까 득달같이 연락을 했는데, 그게, 그게 어디
인간이야. 인간의 탈을 쓰고 그렇게도 뻔뻔하고 교활한지, 도무지 사람
들 속은 알 수가 없고 세상 살기가 겁나."
한인곤은 고개를 내둘렀다.
"여보게, 인간이니까 그러는 거야. 대개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약아빠
지게 살지 않던가. 다 그러려니 생각하고 만나보도록 하게. 손해날 것
없으니까."
"거 무슨 소리야? 인간들 태반이 그렇더라도 친구 사이엔 그러지 말
아야지. 그놈이 왜 날 다시 접촉하려는지 모르나? 내 국회의원 자리 이
용해 먹자는 수작 아니냔 말야."
한인곤이 참고 있던 화를 터뜨렸다.
"자넨 확실히 나보다 순수해, 사회물을 덜 먹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자넨 지금까지도 정동진을 친구로 놓고 말하는데, 정동진은 이미 그렇
지 않아. 정동진이가 자넬 이용물로 생각하는 것처럼 자네도 그렇게 작
정하고 만나는 거야."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긴, 말 그대로지. 자넨 이젠 일개 대령이 아니라 국회의원
이란 걸 잊어선 안 돼 국회의원은 자기 나름대로 많은 정보망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정동진은 명색이 장군이고, 군부는 무시할 수 없는 또
하나의 세력 아니냔 말야. 그보다 더 좋은 정보망이 어디 또 있겠나. 적
을 모르고 싸우면 백전백패지만 적을 알고 싸우면 백전백승이다. 자네
알지? 이용당해 주면서 더 크게 이용하라구."
남재구는 술잔을 들며 야릇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 눈빛은 차고 매웠다.
"응, 그럴 수도 있겠군. 자넨 역시 훌륭한 내 스승이야."
"그 무슨 소리. 자네의 충실한 참모지."
그들은 마주보고 웃으며 술잔을 부딪쳤다.
다음날 한인곤은 국회가 법안을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또다시 놀라고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회는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부
랴부랴 '민주반역자 처리 법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그 신속함이 국민
을 위해서가 아니라 데모를 무서워한 것이었고, 특별법이 제정되기까지
잠정적 조치이긴 하지만 법을 하룻밤 사이에 졸속으로 꾸며대는 것은
더 문제였다. 두 달 반을 허송한 무책임이나 그 벼락치기의 무책임이나
다를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것 참......,이것 참......."
아무 힘도 없는 초선의원 신세의 서글픔에 젖어 한인곤은 연달아 한
숨을 쉬고 혀를 차고 했다.
"왜 그러십니까? 뭐가 마땅찮으세요?"
옆자리의 오재섭이 윗몸을 기울이며 낮게 물었다.
"글쎄, 이렇게 서둘러대면 법도 부실해지고, 국민들한테도 오히려 웃
음거리가 될 수 있고, 좀 곤란하지 않아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만, 이따가 끝나고 얘기하십시다."
전후 유행어인 핸섬보이답게 생긴 오재섭은 눈을 찡긋했다.
"예 그럽시다."
오재섭은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와 당 수뇌부에 속하는 어느 인사의
비서 노릇을 하다가 그 사람이 중병으로 눕자 그 지역구를 물려받아 당
선된 초선이었다. 나이는 서너 살 아래지만 정치학과를 나온데다가 국
회물을 오래 먹어서 아는 게 많았고, 자신에게 색다른 호감을 보여 한인
곤은 오재섭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정치란 마술 같은 면이 있고, 특히 기회 포착이 중대합니다. 국민이
나 대중들은 순진한 관객이구요. 마술사가 연달아 실수하면 관객들이
가만히 있습니까? 특별법을 지연시킨 건 분명 잘못이고, 그걸 당장 만
들 수는 없고, 국민들 마음은 급하고, 그렇게라도 임시방편을 하지 않으
면 정말 수습할 수 없는 큰 위기가 닥치게 됩니다. 한 의원님이나 저나
얼마나 많은 고생을 해서 따낸 당선인데, 일도 못 해보고 밀려날 수야
없는 일 아닙니까?"
이런 오재섭의 말에 한인곤은 더 할말이 없었다.
"그나저나 이승만 때보다도 더 살기가 어려워졌다고 민심이 뒤숭숭하
고, 이놈이고 저놈이고 정치하는 놈들은 다 틀렸다고 난리 아니오? 근
데, 장 총리가 발표한 5개년 기본경제 발전계획이니 농촌 고리채 정리
를 한다는 농자금 방출 같은 건 말한 대로 제대로 되겠소?"
"글쎄요, 저도 걱정입니다. 곧 미국에 원조를 요청한다는데, 미국이
어쩔지......"
"남의 떡 가지고 굿하겠다는 건데, 참 아슬아슬한 줄타기요."
"예, 지금이라도 뭉쳐야 하는데......."
그들은 함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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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강 = 제1부 격랑시대 (2권)ㅡㅡㅡ21. 배신과 불신
소슬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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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26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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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예나 지금이나 정치는 ... 소슬바람님 고맙습니다 힘드실텐데도 여전히 올려 주셨네요 잘 읽고 갑니다
병아리님.. 제가 고맙지요.. 며칠 못쓴 댓글 오늘 숙제하듯 다 썼습니다..ㅎㅎㅎ 주말 잘 보내세요..
수많은 세월이 흐러도 변치않는것이 정치라더니.....예나 지금이나 변한건 없는듯 하여이다. 흠~!!
에고..가인님.. 주말인데 일찍 댕겨 가셨네요..ㅎㅎㅎ .. 날씨 좋지요? 산에 안가시는지요..예쁜사진 많이 찍어 저도 좀 주셈...
예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넘들만 얘기만 나오면 열받오~~~즐거운 주말 되십시요^^*
이긍..열받지 마셈.. 그러려니 함서 살아야제 언제 우리가 그치들 덕보고 살았남유.ㅎㅎㅎ.. 오늘도 근무중이겠구먼유 .. 수고하셈...
에효! 문득 님의 손가락과 손목이 걱정되는군요..허나,,상상해 봅니다..컴퓨터 앞에 앉으시어 자판을 두드리시는 님의 모습을요..멋져요! 가을에는 더 많은 분들이 님의 소설읽기에 푸욱~~빠지셨으면 좋겠군요^^*이 가을은 몽땅 님의 계절이옵네다..^^*
진필님!!! ~ 손목. 손가락 아픈건 잠시라니까요..ㅎㅎㅎ.. 이렇게 변함없이 찾아 주시는 님들과 격려해 주시는 님들이 계시어 넘 즐겁답니다. 이제 시작되는 이 가을 다 가기전에 꼭. 님을 뵙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에효..늘 바쁘신 분인줄 알면서도 욕심을 부려보는게지요. 찾아와 주셔서 넘 행복 합니다. 고운날..
창에 보여 반갑습니다. 창 열고 싶은데 한의원 가는 날이라..꾹 눌러 참고 나갑니다. 성현이 만나고 왔습니다. 나눔터 에 글 올려 놓았습니다. 손가락 관절.. 하하 조심하세요.
하하하.. 난 오늘 행복 합니다. 두분 나란히 다녀가심에 .. 한의원 잘 다녀 오세요.. 이따 전화 드리겠습니다.
반갑습니다 오랬만에 왔더니만 많이 밀렸네요 번개불에 콩구워먹듯이 날치기 통과하듯시 읽어야 할것 깉네요 그러나 차그 차근 꼼꼼이 읽을께요 나날이 좋은날 되소서...
굴렁쇠1님.. 그동안 바쁘셨나 봅니다. 다시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하하..천천히 읽으소서 한꺼번에 많이 읽으시다 눈 아프실까 염려됩니다. 고운밤 되시길...
오합지졸이 정치인이여....뽑아준사람도 뽑힌사람도 ...국민의 머슴이란생각은아예 없으니...힘들게 올린글 편하게 잘봤습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