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海里 시인, 그는 누구인가 (1) / 임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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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보 시인
난정기蘭丁記
임 보
세이천洗耳泉 오르는 솔밭 고개
바다만큼 바다만큼 난초蘭草밭 피워 놓고
한란寒蘭, 춘란春蘭, 소심素心, 보세報歲
흐르는 가지마다 그넷줄 얽어
구름을 박차고 하늘을 날다
빈 가슴에 시가 익으면
열 서넛 동자놈 오줌을 싸듯
세상에다 버럭버럭 시를 갈긴다.
졸 시집『은수달 사냥』(1988)에 수록되어 있는 「난초 書房 海里」라는 글인데
난정에 대한 인상을 8행의 짧은 시 속에 담아 본 것이다. 그가 난에 심취한 것은 세상에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한때는 남도의 산하를 매 주말 누비며 채취해 온 기천 분의 춘란을 기르기 위해 자신의 집보다 넓은 온실을 갖고
있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그를 ‘蘭丁’이라고 칭호한 것이다. 그러니 난정이 난을 즐긴다는 것은 특별한 정보랄 것
도 없다. 이 글의 핵심은 마지막 두 행에 있다. 천진난만한 어린이가 시원하게 오줌을 갈기듯 거침없이 세상을 향
해 시를 쏟아내는 그의 열정을 찬미한 것이다. 그의 시는 늘 활기에 차 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음을 잃지 않고 싱싱
하다.
천길 낭떠러지다, 봄은.
어디 불이라도 났는지
흔들리는 산자락마다 연분홍 파르티잔들
역병이 창궐하듯
여북했으면 저리들일까.
나무들은 소신공양을 하고 바위마다 향 피워 예불 드리는데
겨우내 다독였던 몸뚱어리 문 열고 나오는 게 춘향이 여부없다
아련한 봄날 산것들 분통 챙겨 이리저리 연을 엮고
햇빛이 너무 맑아 내가 날 부르는 소리,
우주란 본시 한 채의 집이거늘 살피가 어디 있다고
새 날개 위에도 꽃가지에도 한자리 하지 못하고 잠행하는 바람처럼
마음의 삭도를 끼고 멍이 드는 윤이월 스무이틀
이마가 서늘한 북한산 기슭으로 도지는 화병,
벼락치고 있다, 소소명명!
― 홍해리「봄, 벼락치다」
난정의 시집『봄, 벼락치다』(2006)에 수록되어 있는 작품이다. 봄의 경이를 낭떠러지와 벼락이라는 역설적인 두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뀌는 계절적인 급격한 변이를 ‘천길 낭떠러지’로, 봄이 화자의 심리에
던지는 충격을 ‘벼락’으로 보았으리라. 그러나 그 벼락은 화자를 혼절케 하는 파괴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을 환하게
밝히는 광명[昭昭明明]이다. 두 이미지를 작품의 전후에 배치하여 사진의 액자처럼 감싸고 있는 구조도 흥미롭다.
속도감 있게 번지고 있는 북한산 자락의 진달래꽃들을 타오르는 불, 유격대(파르티잔)의 격전, 창궐하는 역병 등
역동적인 이미지로 표현하고 있다. 싱그럽게 잎을 피우는 나무는 푸른 불꽃으로 몸을 태우는 소신공양인가? 바위
사이에서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도 향불 같다. 한겨울 감추었던 종아리 드러내고 거리로 나온 여성들 다 춘향이처럼
곱다. 벌이며 나비 같은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몸치장하고 짝을 찾는구나. 이 밝은 봄날 그냥 보내지 말라고, 내 속에
서도 나를 일깨우는 소리 은은하다.
제4연은 좀 난해한 면이 없지 않지만 내 나름대로 더듬어 읽어 보면 이런 뜻이 아닌가 짐작된다. 우주 안에 존재하는
삼라만상은 일체가 한 집안 식구와 같다. 그러므로 서로 분별할 일이 아닌데 새의 날개나 나뭇가지를 스치고 지나는
바람처럼 내 마음속에도 잔잔한 파동이 일어난다. 속된 욕망을 잘라내고자 하나 뜻대로 잘 되지 않는 이 고뇌, 이 봄
에도 북한산의 봄과 더불어 내가 앓는다. ‘화병’의 ‘화’는 火와 花의 중의(重義)를 지닌 시어로 보아 무방하리라.
이처럼 난정의 시는 활력이 넘쳐난다.
이 글을 쓰면서 살펴보건대 난정과 나는 여러 모로 상반된 취향과 성질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난정이 살아 있는 난을 좋아하고 있을 때 나는 생명이 없는 돌[水石]에 빠져 있었다. 그는 천성이 부지런해서 많은
생명들을 보살필 수 있었던 반면, 나는 게을러서 처음부터 부담 없는 돌에 기울었던 것 같다. 그는 열정적인 낭만파
라면 나는 이지적인 고전파에 가깝다. 그는 내가 못 가진 적극성과 과단성 그리고 카리스마를 지녔다. 아마도 그가
지닌 이러한 성품이 <우이동 시인들>에 이어『우리詩』를 수십 년 동안 이끌어 왔으리라.
나와 난정이 북한산 밑자락 우이동 골짝(행정구역상 난정은 우이동 나는 쌍문동이지만 지호지간의 거리다.)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970년도 후반 무렵이다. 그런데 우리가 교유를 하게 된 것은 지연地緣이 아닌 인연人緣 때문이었다.
내 맏딸인 우원진이 성신여중 2학년 때 그 학교의 영어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난정을 좋아해서 내 처녀시집
『임보의 시들 <59-74>』를 보낸 바 있다. 이로 하여 우원진의 애비가 임보라는 사실을 난정이 처음 알게 되었는데
그때가 아마 1978쯤으로 기억된다. 이를 계기로 서로를 알게 되었으니 우리의 교유는 30년이 넘은 셈이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자주 만나게 된 것은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지를 함께 하면서부터이다.
1986년 가을부터 우이동 인근에 사는 몇 시인들- 홍해리 채희문 신갑선 이생진 등이 자주 만나서 술을 하게 되었고,
드디어는 의기투합하여 사화집을 만들어 보자는 데 이르렀다. 그렇게 해서 ‘우이동 시인들’이라는 동인이 탄생하게
되고 이듬해인 1987년 봄에 사화집 창간호가 간행되었다. 그러면서 동인지 출간 기념으로 시낭송을 덕성여대 입구에
자리한 <파인웨이>이라는 카페에서 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이동시낭송회(지금의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의 효시가
된다.
우이동 시인들의 사화집은 매년 2회씩 봄가을에 간행되었다. 1999년 ‘우이시회’에 통합되기까지 총 25집을 만들어 냈다. 신갑선 시인은 제6집까지만 참여하고 떠났기 때문에 제7집부터서는 동인들이 네 사람이었다. 우리는 한 동네에 살고 있어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주말은 물론 주중에도 틈만 나면 만났다. 꽃이 피면 꽃 핑계로 단풍이 들면 단풍 핑계로, 세이천에서 혹은 소귀천에서, 솔밭에서 혹은 진달래 능선에서 술병을 지고 돌아다녔다.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아서 우이동 한 건물의 옥탑을 빌어 사랑방 ‘시수헌詩壽軒’을 만들어 놓고 북을 울리기도 하고, 삼각산 자락에 수십 그루의 복숭아나무로 ‘우이도원牛耳桃源’을 일궈 놓고 흥청거리며 지냈다. 꽃이 한창 피어나는 봄철엔 시화제詩花祭를 단풍이 곱게 물든 가을에는 단풍시제丹楓詩祭를 천지신명께 올리며 시와 풍악의 잔치를 벌이는 곳도 바로 이 우이도원이다.
우리 네 사람은 매 사화집에 합작시를 만들어 실었다. 하나의 시제를 놓고 한 사람이 첫 연을 시작하면 그것을 보고 다음 사람이 둘째 연을 쓰고 또 다음 사람이 이어받아 쓰는 공동 연작의 형식이다. 다음의 글은 제24집 『아름다운 동행』에 수록된 합작시 「우이동 시인들」이란 제목의 상호 인물평이다. 채희문, 홍해리, 임보, 이생진 순으로 썼다.
홍해리는 애란가愛蘭歌를 부르며 불도저를 모는 ‘난정법사蘭丁法師’
임보는 구름 위에 앉아 마술부채로 시를 빚는 ‘시도사詩道士’
이생진은 섬을 돌며 시를 섬으로 캐는 ‘시詩심마니’
채희문은 버스 끊어진 정거장의 썰렁한 ‘에뜨랑제’
임보 시인은 일경구화一莖九華다, 백운대 청상한 바람으로 향을 날리는.
이생진 시인은 제주한란濟州寒蘭이다, 성산포 청정한 석간수로 꽃을 올리는.
채희문 시인은 중국보세中國報歲다, 인수봉 삽상한 침묵으로 꽃을 피우는.
홍해리는 춘란소심春蘭素心이다, 우이동 옥진의 소주로 향을 씻고 있는.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성산포城山浦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은 포천抱川의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청원淸原의 들소
나 임보林步는 화산華山의 하찮은 염소
‘산다는 것은 기다리는 거’ 누가 올 것 같아 문을 닫지 못하는 희문喜門
‘애란愛蘭은 혼의 전령’ 시의 생리生理, 시의 열양熱襄, 시의 정자亭子, 시의 해리海里
‘시인은 북이다. 쓰고 싶은 놈 다 써라’ 소리치며 숲 속으로 걸어가는 임보林步
‘갈매기와 나는 한배에서 태어났으니까’ 끼룩끼룩 바다로 떠나는 생진生珍
서로를 공히 부추기고 자신을 낮추는 겸손을 보이고 있다. 나는 내가 쓴 부분을 다음과 같이 더 줄여 「네 마리의 소」라는 제목으로 사단시집 『운주천불』(2000)에 실었다.
고불古佛 이생진李生珍은 물소/ 포우抱牛 채희문蔡熙汶은 황소/
난정蘭丁 홍해리洪海里는 들소/ 나 임보林步는 조그만 염소
우이동 시인들 네 사람을 우직한 소에 비유해서 읊은 것인데 이 작품의 말미엔 다음과 같은 짧은 해설이 달려 있다.
* 우이동 사인방四人幇의 인물시다. 고불은 섬에 미처 늘 물을 떠나지 못한 것이 마치 물소와 같다. 포우는 이중섭의
그림 속에 나온 황소처럼 강렬해 보이지만 사실 양순하고, 난정은 난과 매화를 즐기는 선비지만 들소와 같은 정력이
없지 않다. 나 임보는 굳이 소라고 친다면 보잘것없는 염소라고나 할까. 이분들의 아호는 내가 붙인 것이다.
세상물정 모르고 지낸 네 사람의 풍류를 나는「시수헌詩壽軒」이라는 글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한시로 읊었다.
詩茶酒鼓 佛牛蘭華* 不聽騷音 不問世情 牛耳好日 勝於仙境
(시에, 차에, 술에, 북에/ 시수헌의 네 사람/
세상 소리에 귀 닫고/ 세상 물정에 입 다문/
소귀골의 좋은 나날/ 신선 세상 뺨칠레라!)
* 佛은 古佛 이생진, 牛는 抱牛 채희문, 蘭은 蘭丁 홍해리, 華는 華山 임보인데
이를 붙이면 佛牛와 蘭華가 되는 것이 흥미롭다.
시화집을 간행하고, 사랑방 시수헌을 만들고, 우이도원을 일구며 시제를 올리는 등 이러한 일을 꾸미고 주도한 사람이 난정이다. 그에겐 들소처럼 밀어붙이는 추진력이 있다.
또한 그의 성미는 곧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초심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지킨다. 그가 한번 좋아한 사람은 평생 변함없이 좋아하고 그의 눈에 한번 거슬린 사람은 회복하기 힘들다. 결벽증에 가까운 그의 이런 성미는 글을 쓰는 데도 작용한다. 그는 산문을 쓰려 하지 않는다. 시인이 시를 쓰지 않고 산문에 기웃거리는 것은 순수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것 같다.
「세란헌洗蘭軒」이라 제한 난정의 작품을 보도록 하자.
하늘이 씻은 너를 내 다시 씻노니
내 몸에 끼는 덧없는 세월의 티끌
부질없이 헛되고 헛된 일이 어리석구나
동향마루 바람이 언뜻 눈썹에 차다.
그는 이 글의 말미에 ‘우이동에서 난을 기르고 있는 달팽이집만한 마루’라고 주를 달았다. <세란헌>은 난정의 당호다.
난은 원래 정결한 식물이다. 그런데도 만족치 못하고 그 난을 더 정결히 하려고 씻는 집이란 뜻이다. 이 작품에서의
난은 난정 자신의 상징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염결 지향의 그의
의지를 느낄 수 있다.
난정은 담배를 아주 싫어한다. 그 주변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간 핀잔을 듣기 마련이다. 많은 애연가들을 금연토록
만든 금연전도사다. 평교사인 그가 학교의 교무실은 말할 것도 없고 교장실의 재떨이까지 추방한 일화는 유명하다.
잡기雜技도 그는 싫어한다. 화투는 말할 것도 없고 바둑 장기 당구 같은 오락을 일절 가까이 하지 않는다.
문학단체에서 거들먹거리는 소위 문단정치인이라든지, 조잡한 문예지를 만들어 수준미달의 신인들을 양산하는 문단
장사치들을 그는 혐오한다. 감투나 수상을 넘보지 않으며 아첨과 아부를 싫어한다. 다만 그가 좋아하는 것이 시 이외에
하나 더 있다. 술이다. 아마도 마음에 맞는 사람들의 술자리면 종일 마셔도 사양치 않으리라. 수년 전 난정과 나는 거금
도 앞 바다에 배를 띄워 놓고 종일 마셔대며 주위를 놀라게 한 적이 있다.
독일의 시인
귄터 아이히(Guenter Eich, 1907~1952)는 자랑했다
사론스키에 내 시를 읽는 독자가 한 사람
바트나우하임에도 또 한 사람 있음을 안다
그러면 벌써 두 명 아닌가!
춘추시대의 악인樂人 백아伯牙는
그의 소리를 아는 유일한 친구
종자기鍾子期가 세상을 떠나자
거문고 줄을 끊었다
귄터는 둘
백아는 하나
오늘 내 소리를 듣는 이는 몇인가?
내가 알기로는 아직
하나도 없다
졸시 「지음知音」이다.
한평생 자신을 알아 줄 지기를 얻기가 힘들다. 나는 하나도 없다고 한탄했는데, 그래도 혹 내 소리를 들어 줄 ‘지음知音’
이 한 사람쯤 내 가까이에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버리지 않고 있다. 우이동 사인방 가운데서 고불古佛은 방학동
으로 포우抱牛는 의정부로 편리한 아파트를 찾아 일찌감치 떠나갔다. 그런데 나는 지금까지 우이동 골짝을 버리지 못
하고 이렇게 버티고 있다. 난정이 아직도 세란헌에 머물며 내 소리를 들어 주고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두 집의 내외는 매년 4월 25일 전후쯤 자리를 함께 해 서로의 결혼기념일을 축하하며 또한 자축하는 자리를 갖는다.
나의 기념일을 24일, 난정은 26일이기 때문이다.
- 시선집『시인이여 詩人이여』(2011, 우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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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海里 시인 그는 누구인가 (2) / 김금용 시인
洪海里 시인 그는 누구인가 (2)
김금용 시인
장가도 가지 않고 직장도 없는 한 젊은이를 만났다. 사십이 넘은 나이에 여전히 책가방을 메고 온종일 도서관에서 책과 씨름하며 시에 맞서는 보기 드문 열정파 전업시인을 만났다. 한참 위의 문단 선배들 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막힘없이 펼쳐내는 당당함에 맞닥뜨렸다. 그런 건방진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를 대견스럽게 받아주는 우리시 대표시인님의 그 너른 헤아림과도 맞닥뜨렸다. 마치 사막에서 목마름에 헐떡이다 단물을 마시듯 시와 세상과의 관계에 대한 해결 방안을 어린아이처럼 자랑하기에 바쁜 그와 귀한 싹을 찾아낸 듯 감싸 안으며 들어주고 계신 아버지 연세의 홍 회장님과 대좌한 모습이 충격적으로 내게 각인되었다. 이렇게 막무가내로 자기사랑에 빠진 열정적인 시인을 과연 얼마나 볼 수 있을까. 자신이 찾아낸 길을 향해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찾아 걸어가는 이의 모습은 진정 아름답다.
『우리시회』는 2007년 8월 하계수련회를 강릉에서 가졌다. 연곡해수욕장에서 시낭송을 마치고 소금강계곡의 한 펜션에서 짐을 풀었지만 아무도 잠자러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2박 3일 동안 모두 새벽 세 시까지 밤을 새웠다. 마치 수학여행을 온 고교생들처럼 육십을 넘으신 분들이 밤을 새우고도 끄떡없이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소금강 계곡으로 산책을 나갔다. 그러고도 아침 9시부터 바로 시작된 세미나 시간엔 한 명도 빠짐없이 세 시간여에 걸친 토론에 참석 당신들의 시에 대한 견해 당신의 시 쓰기에 대해 털어놓았음은 물론이다. 이런 지치지 않는 건강과 정열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사회적 지위와 나이와 체면을 다 잊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심취하는 시인들의 순수하고 맑은 영혼이 있기에 시인들은 세상 것을 갖지 못하였어도 추레하지도 늙지도 병들지도 않는 것이 아닐까. 진정한 놀이의 달인은 바로 이런 우리 시인들이 아닐까 싶다.
시도 때도 없어
세월이 다 제 것인 사람
집도 절도 없어
세상이 다 제 것인 사람
한도 끝도 없이
하늘과 땅 사이 헤매는 사람
죽도 밥도 없이
생도 사도 없이 꿈꾸는 사람.
- 홍해리의 「시인」 전문
위 시는 그런 면에서 세상을 건너뛰고 비워낸 마음 하나로 자족하는 ‘시인’에 대한 단적인 표현이며 정의라고 본다. 직업란에 적기가 망설여져 끝내 무직이라 적고 대출이나 보험 자격이 안 되며 원고료로는 밥이 나오지 않는 현실 이지만 누구보다 여유롭게 미소로 답할 줄 알며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둥글게 아름다워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김금용 시인 약력
동국대 국문과 졸업. 중국 북경 중앙 민족대학원 중문과 석사 졸업.
* 199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 시집<광화문 쟈콥> ('98년 '고려원' 발간)
<넘치는 그늘>(2006년 '천년의 시작' 발간)
번역시집 <문화혁명이 낳은 중국현대시> 한.중대역판 <나의 시에게>
* 2005년 중화봉사상 2006년 칭다오 명예시민 2008년 펜번역문학상 수상.
* 현 <우리시> 편집위원
* 이메일: poetrykim417@naver.com rmadyd417@hanmail.com
* 블로그: blog.naver.com/ poetrykim417 '넘치는 그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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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海里 시인 그는 누구인가 (3) / 손소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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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왜 맛이 없는가
손소운 시인
밥맛 떨어지는 사람' 이라는 말울 우리는 자주 사용하고 있다.
이 세상 살아 가는 삶의 여정에서 피할 수 없는 많은 인간들을 만나면서 느끼게 되는 '사람의 맛'에 대한 느낌의
표현이다.
'인간은 왜 맛이 없을까?'
홍해리 시인의 "독종毒種' 이라는 시에서 이 세상 살아가면서 공존공생하며 만나게 되는 독종이라는 성향의 생명
적 지향의 탐색에서 발현되는 시적 언어로 귀착하게 되는 경계해야 할 속성의 근원적인 물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세상 삶이란 성향을 달리하는 것들이 서로를 찾으며 또는 어울리며 끝없는 평행으로 달려가면서 이원적 성격
으로 서로를 탐색하며 살아가는 성격의 의미라고 생각된다.
이 서로의 관계에서 끝없는 갈구와 접착 욕구가 긴장을 조성하고 정신의 질을 형성하는 공존과정에서 유쾌하지
못한 느낌의 경험에서 우리는 상대를 가리켜 밥맛이 없어질 정도로 맛이 가는 성향을 경험하며 인간에 대한 맛을
생각하게 된다.
맛이 있는 인간은 신선함이며 반대로 맛이 없는 인간은 썩고 악취가 풍기는 고약함이다.
그것을 우리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독성 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래서 '독종'이란 참으로 비극적인 표현이 된다.
이 세상에 결점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누구나 이런저런 결점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기에 말이나 행동에서 실수는 피할 수 없게 된다. 공자와 같은 성인도
하루에 세번씩 자신의 실수와 행동에 대한 반성을 하며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소위 '독종'에 속하는 인간에게는
반성의 겸허함이 전연 없는 속물적 인간성을 가지고 있는 부류에 속하고 있다.
적극적으로 자기의 결함을 고쳐 나갈 수 없는 이 '독종'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는데 이에 관해 몇가지
추려 보면 대강 다음과 같다.
1,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을 유심히 관찰하여 쉽게 다가가기 위해 온갖 미사려구를 사용하여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데
세치의 혀를 능숙하고 화려하게 놀려대는 무기를 가지고 있다. 이 달콤하고 허황한 종횡술에 안 넘어가는 장사가 없
을 정도다.
2, 독종들의 한결 같은 비겸술은 상대방의 가려운 곳을 잘 긁어 준다는 점이다. 결국 가려운 곳을 잘 긁어 주다보면
상대는 어느새 통제권 안에 들어오기 마련이다.
3,처음에는 자신의 의도를 잘 드러내지 않다가 시간이 흐르면서 상대방이 기꺼운 마음이 될 때 호의를 베풀며 상대를
어떤 이익에 급급하게 만든다.
그 밖에도 모든 일에 분에 넘치는 기교를, 작은 것에서 큰 것을 얻으려는 지나친 욕심이, 매사에 치밀한 기만술을 적절
유용하게, 기회를 엿 보며 상대를 기만할 술책을, 해야 할 것 보다는 하지 말아야 할 것을을 우선으로 행동하는 비열함,
상대를 얕잡아 보는 교묘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특성이 있다.
'독종'들에게서 우리는 어떤 인간적인 도덕성이나 가치관 또는 사회적인 규범이나 예절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독종을 가리켜 망종 이라 부른다.
오늘날의 현실처럼 복잡하고 시끄러운 사회 속에 살아 가다보면 제정신을 잃고 떼밀려만 가기 일쑤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골빈 속물이 되고 말 때가 있다.
가끔씩 휴식을 하며 여가를 가지고도 닳아지는 인간의 영역을 회복시키지 못하고 더욱 소모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독종들로 부터 피해를 당하지 않으려면 제정신에 집중하고 몰입하는 일이 필요하다.
제정신에 집중하려면 우선 불필요한 말을 아껴야 하며 모든 행동을 하기 전에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 보는 신중함이
있어야한다.
사람이 짐승 보다 뛰어난 것은 말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구개신기산 설동시비생
口開神氣散 舌動是非生 이라 했다
입을 열면 신기로운 기운이 흩어지며 혀를 함부로 놀리면 시비가 생긴다는 지혜 깊은 성찰을 의미하는 좋은 뜻이 담긴
말이다.
말을 적절하게 선용하지 않고 함부로 놀려 대면 ‘말 많은 사람’ ‘믿을 수 없는 사람’ ‘밥 맛 없는 사람’이란 악평을 받게
되며 상대로 부터 경계해야 할 인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왜 우리 인간에게 조물주는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와 한 개의 입을 만들어 주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의 작용에 대하여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인간의 몫으로 생각해야 할 요소적인 의미라고 본다.
따라서 사람답게 살아 갈 요소이기도 하다.
홍해리 시인의 시적 언어로 표현된 '독종'에 관한 시말에 전적으로 동감을 한다.
이 세상 만물 가운데 독이 들어 있는 사물에는 반드시 화려하고 고운 색깔과 모양 그리고 피면적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 아름답고 화려함으로 상대에게 독이라는 무서운 촉수를 펴고 있다.
그러나 별로 아름답지 못하면서도 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간이 아닐까?
그렇다. 가장 무서운 독종은 바로 인간이다.
그 독종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자리 잡고 개들의 세상을 만들어가고 있다. 반드시 경계해야 할 일이다.
얼마 전 어느 시인의 시비 제막식에 시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독을 품은 독종 인간들이 국회의원 또는 무슨무슨
지역명사라는 허울을 쓰고 희희낙락 웃고 있는 사진을 본 일이 있다. 과연 그 사진을 보며 누가 시인의 시비라는 선
량하고 정서적인 문화의 면모를 상상할 수 있을까.
아래 '독종'이라는 시를 쓰신 시인은 내가 존경하는 홍해리 시인이며 홍해리 시인을 존경하는 이유로
'시인다운 시인이라' 말 하면 너무 겸손하신 성품 탓에 날더러 '뻥튀기 튀기는 사람' 이라 말씀 하시지만
홍해리 시인은 자신이 쓴 시를 읽으며 진정으로 감응하고 조응하는 한 사람의 독자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행복한 시인의 반열에 계셔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즘 하루에도 수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시인들이 양산되고 있고 시 같지 않은 시집들도 부지기수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
넘쳐나는 시인공화국에 서점 좌판을 당분간 메우고 있는 시집천국을 아무도 시기하거나 나무랄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많은 시인들 가운데 진정한 독자는 과연 몇이나 관계하고 있을지 의문이 생긴다.
나와 더불어 진정한 의미에서 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홍해리 시인은 줄 창 시만을 쓰고 있다.
벌써 열다섯 권의 시집을 생산하고 있는 홍해리 시인은
매일 새벽 세시에 잠에서 깨어나 맑은 정신을 가다듬고 시를 쓰신다. 수십 년째 계속 이어지는 시성 현자의 모습이다.
내게 여유가 좀 돌아가면 청주 어딘가 아니면 우이동 또는 삼각산 오르는 길목 어디쯤 '홍해리 시비'를 세우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
혹여 내가 혀를 함부로 놀리는 독종이 아닌가, 조심이 되지만 마음만이라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존경한다는 뜻으로
해석해 볼 일이다.
너무 길었던 이야기 여기서 멈추면서
홍해리 시인이 생각하며 쓴 시 '독종' 이라는 시를 소개해 본다
우리 친구님들 ! 좋은 시 좀 읽읍시다
좋은 시가 우리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시인의 관조가 우리들 마음에 거짓 없이 감응되어 전달되기 때문이며 좋은 시를
읽으면 우리들의 정신과 생각의 품성이 맑아지며 진실 된 세정에 통달하게도 되며 수양과 사고 또는 사유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독종毒種
洪 海 里
세상에서 제일의 맛은 독이다
물고기 가운데 맛이 가장 좋은 놈은
독이 있는 복어다
가장 무서운 독종은 인간이다
그들의 눈에 들지 마라
아름답다고 그들이 눈독을 들이면 꽃은 시든다
귀여운 새싹이 손을 타면
애잎은 손독이 올라 그냥 말라죽는다
그들이 함부로덤부로 뱉어내는 말에도
독침이 있다
침 발린 말에 넘어가지 마라
말이 말벌도 되고 독화살이 되기도 한다
아름다운 색깔의 버섯은 독버섯이고
단풍이 고운 옻나무에도 독이 있다
곱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독종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하면서도 독종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라는 못된 종자이다.
인간은 왜 맛이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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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洪海里 시인 그는 누구인가 (4) / 李 茂 原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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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원시인
그는 순식물성이다. 풀로 말하면 蘭이요, 나무로 말하면 梅花다. 술로 말하면 소주요, 밥으로 말하면 꽁보리밥이거나 순 쌀밥이지 팥이나 콩이 섞인 잡곡밥은 아니다. 그는 술을 좋아하지만 술을 욕되게 하는 법이 없고, 그는 詩를 생명처럼 사랑하지만 말을 많이 하지 않는다. 그는 좋은 것은 좋고 싫은 것은 싫기 때문에 좋고도 싫다든가 싫지만 좋다는 어정쩡한 중간 개념에는 익숙하지 못하다. 그는 직설적으로 짧게 말하므로써 더욱 많은 말을 하는 사람이다. 두루뭉실 굴러가야 살기 편한 세상에 그는 낙락장송이듯 초연하다.
이 다사다난, 복잡미묘한 세상에 곁눈질 한 번 하지 않고 오로지 시에만 매달려 사는 생활태도가 한편 부럽고 한편 답답해지기도 한다. 그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추진력의 화신이기도 하다. 그의 말에는 어떤 마력이 숨어 있는지, 평소에 닦아논 분위기가 만들어내는 반작용인지는 몰라도 그가 맡아서 하는 일에는 여러 번 예고하거나 독촉하거나, 사정하거나 억압하지 않아도 의도된 대로 일은 척척 진행될 뿐만아니라 관계된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따라주고 끝내는 찬사의 박수를 보내준다.
그는 요즘 牛耳洞이 된 것 같다. 우이동으로 이사한 지 근 이십여 년, 처음에 우이동 산자락에 난초집을 멋들어지게 짓고 우이동을 예찬하면서 난 백여 분을 기르며 유유자적 난과 더불어 난이 되어 살더니 요즈음 그는 우이동의 몇몇 시우들(이생진, 임보, 채희문)과 뜻이 맞아 <우이동 시인들>이란 동인회를 만들어 시낭독회를 66회, 우이동 시인들의 동인지를 벌써 14호째나 만들어 냈다. 이제는 우이동이 그를 우이동으로 만드는지 그가 우이동을 우이동으로 만드는지 분간을 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는 우이동의 솔바람 소리가 되고 洗耳泉의 샘물이 되더니 진달래가 온 산에 춤을 출 때면 <北漢山詩花祭>를, 가을이 와 낙엽이 구르면 <牛耳洞落葉祭>를 올리는 우이동 귀신이 다 되었다.
<우이동 시낭독회>(매월 마지막 토요일 5시, 도봉도서관에서 개최)에 가 보면 그가 사회를 보는데 놀라운 것은 언제부터 저 친구가 저렇게 말을 잘 하느냐 하는 것이다. 사람의 재주란 숨어 있는 것인가. 도대체 모를 일이다. 술자리에서도 늘 안경을 벗어 호호 불면서 닦는다든가 상대방의 말을 받아 대꾸하기보다는 술잔에 손이 더 자주 가는 저 친구의 달변은 어디서 오는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의 서재에 꽂혀 있는 수많은 책과 독서량이 그 공급원이 아닐까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그는 나보고 담배 끊고 술 먹으라 하고 나는 그에게 담배맛도 모르고 무슨 시를 쓰느냐고 빈정대지만 나는 담배 때문에 위장병이 완치되지 않는다는 의사의 진단을 이미 받고 있으니 그의 말을 듣기는 들어야 할 것 같다. 그도 옛날보다는 술 실력이 많이 줄긴 했어도 마음속으로는 이제 그만 마시라고 술자리마다 눈치를 준다.
우리는 대학 다닐 때 같은 하숙집에서 반찬이 시원찮다고 소복한 밥그릇 위에 숟가락을 꽂아 제사를 지내고, 함께 자취를 할 때는 쌀이 떨어져 밥을 굶은 채 답십리에서 안암동까지 걸어가 인촌 묘소 잔디밭에 팔베개를 하고 나란이 누워 고향 생각에 하늘이 젖어오던 공동의 추억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는 벌써 여덟 권의 시집을 냈고 또 한 권의 시집을 준비하고 있다. 말 많고 번잡스런 세사를 외면하고 오직 시업에만 매달려 살아가는 그의 은근과 끈기에 대해 박수를 보낼 뿐이다. 머지않아 그의 집 마당에 매화가 꽃을 피우면 그 향기와 더불어 우이동 산새들이 그를 알고 에워싸 춤추며 노래하리라.
<詩>
洪 海 里
산자락 울리는
칼바람
파란 하늘만 먹어도 넉넉한
새벽 숨결
선혈이듯 번지는
살 속의 뼈
헤어지고 나서야
풍기는 香
- 월간『시문학』(1994. 2월호)
이무원 약력
1942 6.7일 충북 청원 출생
청주고등학교, 고려대 영문학과 졸업
1979년 월간 『시문학』으로 등단
한국문인협회,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원
응시 동인,
시집 : 『물에 젖는 하늘』『그림자 찾기』『빈 산 뻐꾸기』『물詩』2002 『서하 일기』
홍익대 부속고교 교장역임
현재 공간시낭송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