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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지하 교회당, 목사가 마지막 축도를 마치자 솔희는 마침찬송을 반주해 준다.
퇴장할 성도들이야 젖먹이 아기들까지 합해 30여명 남짓한 작은 무명 교회였다.
성도들 숫자에 상관없이 솔희는 서로 담소를 나누며 나가는 이들을 위해 작고 소박한 곡을 따로 연주해 주며 예배가 끝난 기쁨의 여운을 만들어 주고 있었다.
“채솔희 성도님, 잠시 저좀 뵐까요?”
중년의 개척교회 담임목사가 모든 성도들이 퇴장하자 나홀로 반주를 끝내고 일어서는 솔희를 따로 부르는데 약간 상기된 표정이다.
히스패닉 교회의 지하층을 일요일 11시에 세내어 사용하는 목사 집무실은 창문도 없는 좁은 창고와 진배없는 초라한 곳이다.
목사 집무실로 들어온 솔희는 살짝 미소를 띠워주며 목사가 권하는 간이의자에 착석했다.
목사님은 테이블 설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서 솔희에게 전달한다.
“이건 뭔가요, 목사님?”
“알다시피 가난한 개척교회입니다만, 채솔희 선생님께 드리는 저희의 작은 정성입니다”
그러자 솔희는 정색한 표정으로 그 봉투를 목사쪽으로 살짝 민뒤 목사를 향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거절의사를 밝혔다.
“목사님, 반주자가 없다면 제가 봉사차원에서 봉사하겠다고 처음 출석할때 말씀드렸어요. 이곳의 성도님들 숫자나 가정환경도 뻔히 알고 교회살림도 대략 짐작이 가는데 제가 어찌 사례비를 바라겠어요? 그리고 선생님이란 호칭 부담스럽구요. “
“이곳 한인 기독교계는 좁은 바닥입니다. 채솔희 성도님의 학교와 기존에 사역하셨던 교회에 대해 바깥 사람들의 전언이 있었어요. 저희같이 작은 곳에 오셔서 무료봉사 해주시는데 그냥 마음의 표시로 받아주십시오. 채성도님같은 분이 저희 교회 출석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더 몸둘바가 없어져요, 목사님”
솔희의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는 목사 역시 단호한 어조로 솔희에게 사례비를 받을 것을 요구했다.
그녀가 엘에이에 귀환한 후로 예전 정균과 함께 성가대에 다니던 그 교회에는 그와 이혼한 몸으로 도저히 컴백할수가 없었고 그 교회에서 그녀를 위해 자리를 비워놓았을리도 만무했다.
다른 대형교회는 자리가 없었고 중형교회만 해도 페이도 괜챦았지만 반주자로서 보통 기혼여성을 선호했고 부부동시 출석을 요구했다.
미국교회나 다문화교회로 갈까도 생각했지만 솔희는 보스톤에서 생성된 미국인들에 대한 반감과 트라우마로 인해 한인교회를 찾기로 했다.
이민사회 특성상 금새 사람들 사이에 그녀에 대한 소문이 퍼질것을 우려해 솔희는 일부러 시내 외곽으로 떨어진 작은 개척교회에 예배를 보러갔다.
성가대는 커녕 피아노 반주자도 없이 온 성도가 육성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을 보고 충격받은 솔희는 처음 온날 목사님에게 그냥 피아노 렛슨을 오랫 동안 받아온 비전공자라고 소개했고 그녀가 무료 봉사를 해주겠노라고 자처했었다.
“성도들도 다 알아요, 소박하고 단순한 찬송가곡이지만 채성도님의 음색이 다르다고요………저는 막귀지만 성도들이 채솔희 성도가 상당 레벨까지 수련한 전공자일 것이라고 추측하더라구요. 그런데 다른 경로로 채성도님 학력과 경력에 대한 놀라운 내용이 입수되었어요”
“누가 전언했는지는 모르지만 그런거 부질없더라구요. 저는 지금 위치에서 최선을 다할 뿐이어요”
사실 솔희는 이 작고 소박한 교회를 다니며 마음의 평안을 얻었고 성도들의 엉망진창이었던 개창이 그녀의 반주로 인하여 제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을 보며 마치 아이를 키우는듯한 보람을 느끼고 있었고, 오히려 이런 경험은 돈주고도 못 얻을 것이었다.
목사님은 진지하게 봉투를 두손으로 솔희의 앞방향으로 밀어 넣으며 말을 이었다.
“채솔희 성도님은 언젠가 그릇에 맞는 쓰임새를 찾으실겁니다. 때가 되면 언제든지 떠나셔도 됩니다. 다만 떠나기 전에 제게 이야기는 해주길 부탁드립니다”
이 교회는 솔희가 오기 전에도 몇명의 전공 피아니스트가 거쳐갔다고 한다.
솔희는 목사님의 그 이야기에서 알게 모르게 전공 피아니스트들로부터 상처를 받은 것이 있었던듯 싶었다.
또한 30대 초중반의 나이로 미혼은 아닌듯이 보이는 여성이 홀로 교회에 출석하는데 대한 사연, 상당한 스펙으로 구태여 이 보잘것 없는 곳에 출석하는데 대한 사연이 궁금할듯 싶었지만 목사님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녀는 목사의 부탁에 살짝 미소로 답했을뿐 명확한 대답은 하지 않은채 일어서서 다시 고개를 숙여 인사한뒤 교회건물을 빠져나왔다.
성도들이 우르르 빠져나간 직후라 주일 한낮인데도 불구하고 그 엘에이에서 남쪽 외곽의 그 교회가 위치한 곳은 스산했다.
때마침 어떤 미친 노숙자가 뜻을 알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지르며 솔희 옆으로 비틀비틀거리자 솔희는 핸드백을 움켜주고 잔뜩 움츠려든채 옆걸음을 쳐서 주차되어 있는 곳으로 총총걸음을 했다.
솔희의 청록색 랜드로바 근방에 히스패닉 청년 세명이 서성이는 장면을 목격하자 솔희는 불안과 공포에 눈앞이 캄캄해져왔다.
그들이 어느 순간 강도로 변하거나 그녀를 어디론가 끌고가 욕보이려 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휩싸였다.
뒤돌아서서 목사님 방문을 두들겨 그녀의 차있는곳까지 동행을 부탁하고 싶었지만 교회 지하실 출입구는 문이 닫히면 밖에서 열수 없는 구조였기에 그것도 불가능할듯 싶었다.
뛰는 가슴을 부여 잡으며 핸드백에서 열쇠를 재빨리 꺼내 원격시동장치를 누르고 차에 잽싸게 올라 문을 잠갔다.
차 안에까지 그 청년들이 피우던 마리화나 냄새가 따라 들어왔다.
그녀는 차를 움직여 한길로 들어서며 한숨을 지었다.
“누군가 보호자가 있다면, 저런것들은 신경도 안썼을텐데. 만약 여기서 돈을 뺏기던지, 맞던지, 욕을 당하던지 누가 날 신경써주지? 경찰? 아니야….”
보스톤생활의 중기부터 느끼기 시작했던 보호자의 부재는 솔희를 짜증나게 했지만, 솔희는 이제 와서야 보호받을 권리에는 반드시 또 다른 방식의 댓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가고 있었다.
그전의 솔희는 남자로부터의 그런 보호가 당연한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며, 오히려 솔희를 보호를 해야하는 남자에겐 그것부터가 생의 영광일것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언뜻 신장과 체격이 비슷해 보이는 에벌린이란 백인 여자한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 굴복해 그 밑을 기어야 했지만 그 누구도 솔희를 구해주지 않았고 심지어 동정조차 받지 못했던 경험은 그녀에겐 매맞은 상처의 아픔만큼이나 뼈아픈 것이었다.
솔희는 그녀의 거칠것 없는 사나운 성격에 비해 힘과 전투력이 형편없었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뭐든지 강한 남자 누군가와 짝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다시 각성되었다.
그때 솔희에게는 놀랍게도 전혀 의도하지 않은 정균의 모습과 분위기가 떠올랐다.
(그 남자가 내 곁에 있었더라면 이런 불안은 없었을텐데........내 선택은 옳기만 한건 아니었을지도.....)
그렇다한들 솔희가 정균에게 감사하게 생각하지도 않았을뿐더러 그 남자는 너무나도 당연한 의무를 이행했을뿐 거기에 대한 생색을 내면 찌질한 남자이며 아내에게 늘 무언가 댓가를 요구하는 음흉한 남편으로 여겼을 것이다.
“우습지, 내 결정과 각오라는게………여생 독신으로 편하고 자유롭게 살자고 각오했어도 한번의 눈길로 무너지고, 대낮 주차장에서 공포심에 또 무너지고”
불과 15분만에 솔희가 모는 그린색 랜드로바는 코리아타운으로 들어섰다.
목사님이 주신 봉투를 차안에서 열었을때 깨끗한 100불짜리 지폐 다섯장이 든 것을 보는 순간 갑자기 눈시울이 붉어진다.
그전의 대형교회에서 매달 천오백불씩 받던 사례비보다 더 값진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한인복합 쇼핑몰로 지하주차장에 차를 댄뒤 아가방을 찾았는데 폐업세일중이었다.
한국의 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어서 영유아 관련 비지니스가 쇠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민사회는 그보다 더 심했다.
예쁜 여자아이용 옷을 몇벌을 골라 계산한뒤 솔희는 다시 차를 몰고 행콕파크라는 과거의 부유층 지역으로 차를 몰았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펜스도 없이 마당에는 그린색 잔디가 깔려 있는 2층 저택을 개조한 한국계 산후조리원이었다.
앙상블 멤버였던 다솜이가 아이를 낳았는데 월요일 퇴소한다길래 퇴소 직전에 선물을 전달하기 위해 약속을 잡아 놓은터였다.
다솜이는 솔희가 이혼할 즈음에 결혼했는데 아이를 빨리 갖고 싶어 부지런히 알아보다가 난임판정을 받았었다.
답답할 정도의 독실한 천주교 신자인 다솜이는 난임클리닉이나 인공수정을 거부하며 자녀를 포기했지만 기적적으로 자연임신이 되어 출산했으니 그 흥분과 기쁨은 이루말할수 없었을 것이다.
“솔희 언니, 와 줘서 고마워. 우리 애기 있는 방으로 같이 가보자”
몸과 얼굴이 부운 다솜이는 그래도 건강해보이고 기력이 있어 보였다.
“언니, 한번 안아볼래?”
솔희는 다솜이로부터 생후 14일된 여자 아기를 받아 조심스레 안아 들었다.
콕 눌르면 부스러질것 같은 작은 생명체는 솔희의 두 팔에 안기고 그녀의 가슴에 배와 허리가 밀착되었고 그 느낌과 질감은 묘하고 신비스러운 것이었다.
겨우 눈을 뜬듯했지만 까맣고 조그만 두 눈동자는 솔희를 응시하고 있었고, 그 아기의 눈동자는 솔희를 알수 없는 곳으로 빨아들이고 있다.
아기를 안고 그 순수한 눈빛을 바라보는데 신기함과 신비함이라는 두 감정은 슬픔과 좌절로 인도했다.
아이를 애엄마인 다솜이에게 인계한 솔희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고 온 몸의 기운이 빠져나가는듯 했다.
느낌탓일까, 오래전 칼자국이 남아 있을 그녀의 자궁에서 통증이 강하게 올라오고 있는것 같아 솔희는 허리를 살짝 숙이며 한손을 배꼽 아래에 대고 얼굴을 찡그렸다.
“왜, 그래 언니, 어디 불편해? 아님 뭘 잘못 먹었어?”
“아니, 나야 뭐 소화기관 튼튼한건 세상이 다 알잖아?”
“호호호, 언니도 은근 싱겁기는……..!”
“그때 찾아왔던 아기의 영혼이 다솜이의 아기한테로 옮겼을까? 그렇게라도 환생했으면 좋으련만”
산후조리원에서 나와 쓸쓸히 다운타운 아파트를 향해 운전하는 솔희는 아직도 한손으로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은 아랫배를 쓸어내리며 회한에 잠겨 있다.
“선생님, 다 끝났어요”
“..........................”
“선생님!!”
“응? 그래? 어디 보자”
스튜디오에서 렛슨생의 연주가 끝났는데도 솔희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어두운 얼굴로 그녀의 무릎만 바라보다가 기다리다 못한 학생이 안타깝게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이제야 반응을 했다.
그런데 학생이 어디를 어떻게 쳤는지가 통 기억이 안나 뭐라 평을 해줄수가 없었다.
신경내과를 다녀온 솔희는 우울증 재발의 위기에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우울증은 재발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조금만 스트레스를 받으면 바로 의사에게 연락하라는 언질을 받았고 투약을 시작해야 할지 여부는 상태를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녀의 우울증은 서서히 심각해져갔고 한국인 신경내과 전문의는 투약을 검토하고 있었지만 솔희는 투약을 주저하고 있었다.
향정신성 우울증 치료제의 부작용은 무엇보다도 일을 못할 정도로 늘 집에 누워 있어야만 했고 살이 찌는건 덤이었다.
겨우 살을 빼고 몸매를 만들고 미모를 회복시켰는데 그것은 솔희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투약과 치료를 거부하다 보면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게 되고 완전히 머리가 돌아버릴 것이며 생활은 엉망이 되어버릴 것이다.
보스톤에서 만난 인도계 의사가 보여준 끔찍한 여성노숙자들의 실태가 머리에 떠오르자 솔희는 그렇게 되느니 죽는게 낫다고 생각했다.
죽어도 아름다움과 명예를 간직한 상태에서 죽고 싶었다.
하지만 솔희가 그 인도계 의사가 말한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있었는데, 그것은 자살충동의 우려였다.
“솔희야! 나를 찾는 여정을 다시 하자. 그리고나서 죽을지 살지 결정하자. 살 생각 있으면 약받아먹고 잠시 살쪘다가 빼면 돼. 누구 말마따나 내 의지로 살빼는건 가능하지만 정신병은 내 의지로 안된다니깐. 죽을거면 어디가서 조용히 흔적 남기지 말고 세상에서 없어지는거야.”
늦은 오후의 어느날 팔로스 버디스의 주택단지, 솔희는 차를 몰고 와서 그녀가 예전에 정균과 함께 결혼생활을 했던 그 주택을 멍하니 한참동안 바라보고 있다.
솔희의 인생사에 있어서 결혼했던 경험 그 자체는 빼놓을래야 빼놓을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었고, 솔희는 이를 인정하기 싫어 결혼생활의 기억을 모두 삭제하려 했지만 그게 종이쪼가리나 컴퓨터 파일처럼 간단히 삭제가 되는게 아니었다.
별 느낌없이 결혼했던 남자 정균 또한 그녀의 인생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남자라는 것도 인정해야만 했다.
샌디에고 라호야 비치 곳곳을 둘러보며 그곳이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듯이, 솔희는 예전에 살림을 하던 이 집도 그녀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았다.
그녀의 예민한 청각신경은 비제의 ‘나의 마음은 자유로와’라는 피아노곡이 그 집에서 들려오고 있었고, 솔희의 몸과 영혼을 그대로 예전 집으로 이끌었다.
솔희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차에서 내려 예전에 살던 집의 잔디밭을 건너 현관문 앞에까지 걸어가 그 피아노 소리를 감상했다.
최소한 전공자나 그 이상급으로 수련한 이가 치는 피아노 스킬이었다.
분명 이 집의 새 주인도 피아노 전공자나 뮤지션임에 틀림없을 것이었다.
현관문에 “Mr. Su H Kang”이라 세대주명이 새겨진 걸이형 문패가 걸린진 것을 확인한 솔희는 그녀가 이혼할 당시 한국인이 새로 이 집을 승계했구나라고 확신했다.
어느 순간 피아노 연주가 멈추었고, 솔희는 그 멈추어진 피아노 소리와 공백의 시간 사이에 이미 그녀는 그곳에 머물수 없다는 것을 자각해서 뒤돌아 서서 다시 그녀가 걸어온 길을 나가기로 했다.
6년전, 정균과 이혼도장을 찍고 정균의 배웅을 받으며 여행 캐리어를 끌며 나온 그 길을 솔희는 다시 걸어나가고 있었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솔희의 등뒤에 어색한 한국어를 구사하는 여자의 외침이 들린다.
“저어기여, 참칸만요! 기다려주세요!”
“에, 에벌린?! 여기에도?”
깜짝 놀란 솔희가 뒤로 돌자마자 그녀는 온 몸이 굳어버렸다.
백인여자에게 트라우마가 생긴 솔희는 눈물을 왈칵 쏟으며 아무 기력없이 땅바닥에 푹 주저앉아 버렸다.
하지만 더 놀란 사람은 그 집에서 튀어나온 미국여자였다.
“왜, 왜 그러세요? 혹시 예전 이 집 여주인 아니신가요?! 왜 땅바닥에 주저앉나요? 불편하세요?”
이제부터 피아노를 연주하다가 멈추고 튀어나온 그 집 여주인은 영어로 솔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솔희는 고개를 푹 숙였다가 온 몸을 부르르 떨며 겨우겨우 고개를 들었다.
솔희의 얼굴은 그새 온통 눈물로 젖어 있었고 아직도 팔다리의 경련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의 앞에 선 미국여자는 에벌린과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였고 체구와 얼굴 형태는 비슷했지만 파란 눈빛은 호수와도 같이 잔잔했고 무엇보다도 유순하고 순박해 보였다.
이제야 안심한 솔희는 자신의 행동에 창피함을 느끼고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집 여주인은 솔희의 손을 잡고 집안으로 이끌며 솔희에게 놀라운 질문을 했다
“예전 여주인이시죠?”
“......! 그, 그걸 어떻게 아셨나요?”
“저희 부부가 이사오기 전에 이 집에 걸린 웨딩초상을 보았어요. 너무 아름다우셔서 인상에 남았고 꼭 보고 싶었어요”
생각해 보니 솔희는 이 집에서 짐을 싸서 나올때까지 응접실의 그 웨딩초상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정균과 마지막 키스를 나눌때도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기억했다.
정균은 솔희가 떠난 뒤에도 이사나가기 전까지도 그 웨딩초상을 그대로 보존했을 것이고 새로운 입주자인 이 미국여성의 눈에 띄었을 것이긴 했다.
(앗! 저거는!)
“音樂愛好家 主人과 音樂家 夫人의 空氣로 빚는 美麗한 家政”
정균의 부모님과 잘 아신다는 유명한 서예가가 선물한 저 현판이 그대로 걸려 있는 것도 신기했다.
물론 그 아래 걸린 웨딩포토는 전혀 다른 것이 걸려 있긴 했다.
웨딩포토는 한국인 남편과 미국인 아내라는 부자연스럽고 드문 조합이긴 했다.
미국인 여주인은 솔희가 그 현판을 보고 놀라는 것을 의식한 듯 그녀도 궁금증이 많은 듯 했다.
그 백인여자는 솔희를 쇼파에 앉혀놓고 본인도 함께 자리에 앉아 솔희에게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남편분은 어디 가셨죠? 저희 부부가 이사올 때 부인께서 꾸며놓으신 연습실에 제가 꽂혀 버렸어요. 남편은 둘이 살기엔 너무 넓다고 했는데 연습실만큼은 제가 양보할수 없어서 이 집을 선택했어요. 이 집의 피아니스트 부인에 대해 너무 궁금했구요, 사진보니깐 너무나 미인이라서 꼭 보고 싶었는데 지금이라도 보게 돼서,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솔희는 이 얼토당토않는 상황에서 뭐라 말을 해야할지 알수 없었다.
정신차리고 보니 리사라고 하는 이 미국여자는 간편하지만 여성스러운 드레스차림이었고 놀랍게도 미국식 풀메이크업, 루시스타일의 짙은 파운에션을 바른 화장을 한 상태였다.
“곧 외출이나 연주회를 가실 시간이었는데 제가 침해한게 아닌가 싶네요”
“네? 왜 그리 생각하세요?”
“콘서트용 풀메이크업까지 하셔서요”
“오호호호! 아니어요, 걱정마세요. 저 어디 안 나가요. 이제 남편만 오면 돼요. 남편 기다리면서 저는 늘 이렇게 해요. 남편 좋아하는 노래도 연주하고, 남편이 저 화장한거 좋아하는 눈치라 밤화장도 하고 주말에 낮 화장도 해요”
솔희는 또 한번 그 리사라는 여자에게 놀라움을 선사받았다.
리사가 딱 한번 솔희에게 그녀의 남편의 행방을 묻고는 더 이상 캐묻지 않은 것이 솔희에게 안도감을 준다.
이제 마음이 가라앉은 그녀는 리사에게 마음까지 오픈해 버렸다.
솔희는 리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솔희가 6년전 이 집을 떠난 직후의 몇주간의 간극에 있었던 일을 알수 있었다.
이 둘은 오랜 친구처럼 여자들끼리의 은밀한 이야기까지 주워섬겼다.
“피임시술받으셨다구요? 저두 그랬어요. 남편이 조금 고민했지만 이내 동의해 주었구요. 그 덕에 우리 부부는 서로에게만 집중하는 삶을 즐길수 있답니다. 결혼한지 9년되었지만 9개월된 느낌이에요. 아이가 없는건 전혀 우리 부부에게 문제가 되지 않아요. 전 무엇보다 남편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기 싫답니다.”
이들 집에 아이들 방이 없는 듯했고 그렇다고 아이들을 기다리는 눈치도 없는 듯해서 물어본 질문에 대한 리사의 답변은 명쾌했고 리사의 피임시술 이유에 대해 솔희는 또 다시 놀랐다.
솔희의 수술 이유는 그녀만을 위한 결단이었지만 지금 마주하고 있는 여인에겐 부부만의 행복한 삶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이 신선한 충격을 준 것이다.
똑같은 방식의 수술이지만 두 가정의 영향이 이토록 틀릴줄이야.
이때 문이 열리며 그 집의 가장인 듯한 한국인 남성이 들어왔다.
리사는 바로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으로 드레스자락 휘날리듯 튀어나가 솔희가 보던 말던 리사는 그녀 남편의 목을 뱀처럼 휘어감은채 진하고 길고 낮뜨겁게 입을 쪽쪽짝짝 소리가 나도록 맞추었다.
그리고 리사는 그녀의 남편 앞에서 솔희를 향히 손을 뻗자 그 집 남편은 멍하니 솔희를 한참 바라보았고 솔희는 이 상태가 너무 무안해 고개를 숙였다.
“채정균씨댁 사모님 맞으시죠? 저도 웨딩포토를 보고 사모님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채선생께서도 사모님 칭찬을 워낙 많이 하셔서요. 자, 우리는 배고픈건 못참습니다. 일단 우리 집에서 같이 식사나 합시다”
리사는 응접실 테이블 어딘가에 있던 립스틱을 꺼내 익숙한 동작으로 키스로 인해 다소 색상이 어긋난 입술에 다시 바르는 도중에도 남편이 말하는대로 솔희의 팔을 한손으로 낚아채어 주방으로 인도한다.
솔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어벙벙했지만 어느덧 예전 주방으로 움직이는 자신을 발견했다.
리사의 식사준비를 도와주려 했지만 리사는 솔희의 도움을 거절하며 그녀를 반강제로 식탁에 앉혔다.
“그러셨군요...........이것참 저희가 죄송합니다. 잘못 알고 있었어요.”
“아닙니다. 전 남편은 아무래도 새로 오실 내외분들의 희망찬 미래에 누를 끼치기 싫어 상황설명을 제대로 안한 것 같아요”
익숙하고 눈에 익은 집이건만 전혀 다른 분위기의 가정에서 식사를 마치고 리사 부부와 솔희는 다시 응접실 쇼파로 자리를 옮겨 티타임을 가지며 모든 진실을 공유했다.
솔희는 눈에 비친 리사라는 미국인 피아니스트는 자기의 예술과 아름다움을 남편에게 모두 주고 있는 여자로 보였다.
그러면서 리사도 남편의 바깥생활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공유하고 싶어하는 여성으로 비추어졌다.
언어와 인종과 문화가 다른 남녀가 이렇게도 치열하게 사랑할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충격적인 놀라움이었다.
그중 솔희에게 깊은 영감을 준 것은 음악이라는 공통점으로 이들 부부가 깊이 결합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그 서예가의 현판이 이들에게로 그대로 전달되어 그대로 녹아들고 있었을까, 진정한 현판의 주인을 만난 듯 했다.
“그랬군요. 전 IT전문가인데 전 남편께서 제게 이메일을 보냈죠. 사모님과 잘 결합해서 보스톤에서 나날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고요. 그런데 IP주소를 보니 한국 강원도로 나오더군요. 그래서 두분이 강원도 여행중인가보다 했지만 내용과는 좀 매치가 안되서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그 집의 한국인 가장은 놀라운 이야기를 했다.
솔희는 엘에이로 귀환하고 나서 정균의 소식에 대해 전혀 둔감하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인맥으로는 정균의 행방에 대해 묘연할 수 밖에 없었지만 한국으로 아주 들어간 것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겨우겨우 미국에 정착해 놓고 한국, 그것도 변방 소도시로 떠날만큼 이혼의 충격이 그 남자에게 그리도 컸을까라는 생각이 미치자 솔희는 그 부부 앞에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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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리님 오래 기다렸어요
이제는 기다림이 조금만
짧아 졌으면 좋겠어요
감사히 읽었습니다
네, 제가 여행중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