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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ood morning 노평원!
벌써 작년 여름이란 표현을 씁니다. 세월 참 빠릅니다. 그 때 그러니까 제가 문창반에 다닐 때 시작한 제 자서전쓰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앞으로 가끔 올리겠습니다. 여러분들 좋은 날들 만드시며 즐겁게 지내십시오! 지병석드림
ps/지난번에 제가 카메룬 얘길 일부 하다가 중단했기에 연이어 나가겠습니다.
‘흐르는 강물처럼’ [카메룬 2]
1970년대 초에서 80년대 말까지 이어진 중동 건설 붐은 참으로 대단했다. 그 당시 중동에 한번 안 다녀온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많은 분들이 이역만리 열사의 나라 중동에서 땀방울을 흘렸다. 그리고 그 당시 웃지 못 할 유행어가 있었으니, “여보, 내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고 그저 오버타임 열심히 해서 돈 많이 부치세요” 처음으로 비행기를 타다 보니 웃지 못 할 에피소드도 많았다. 대개 홍콩이나 또는 방콕 같은 도시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목적지로 갔는데 호텔에서 나오면서 타월과 스리퍼 등을 들고 나와 때때로 호텔 측과 마찰을 빗기도 했다.
한국에서 해외취업을 위해 비행기를 타기까지는 신원조회, 소양교육 등을 의무적으로 받았는데 그 과정도 쉽지가 않았다. 여권발급신청을 하면 우선 신원조회를 거쳐야 된다. 신원조회서류를 아마 4~5통은 작성해서 제출한 것 같다. 그것도 반드시 검정색 볼펜으로, 파란색 볼펜으로 작성해서 내면 반송돼서 돌아왔다. 이유가 파란색은 안 된다 였다. 다시 검정색 볼펜으로 작성해서 제출하면 거의 한 달은 걸려야 소위 신원조회가 떨어졌다. 나중에 친지를 통해서 들은 얘긴데 6.25때 동조한 가족, 납북된 가족, 부역한 가족 등이 있는지를 일일이 조사했단다. 그리고 신원조회에 걸리면 3급 이상 공무원의 신원보증이 있어야만 여권이 나왔다. 그 당시 3급 이상 공무원의 신원보증 얻기가 얼마나 어려웠나 하면 말 그대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만에 하나 신원조회에서 걸리면 그걸 풀기 위해 얼마나 고생들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소양교육, 해외에 나가서 지켜야 될 예의범절에서부터 사상교육까지 몇 시간씩 받았다. 소양교육은 해외개발공사에서 주로 받았지만 어떤 때는 소양교육 받을 인원이 너무 많아서 장충체육관에서 받기도 했다. 이렇게 해서 소양교육 필증을 받아서 여권서류에 붙여야 여권이 나왔다. 그것도 개인은 만져보지도 못하고 회사에서 여권을 보관했다. 비행기 시간이 오후 3시인데 본사로 출국소집을 아침10시쯤 했다. 그리고 이번엔 회사차원에서 또 교육이다. 총무과장이 한 마디, 이어서 노무과장이 같은 소리 또 한 마디, 사고 치지 말고 잘 들 하세요! 끝으로 인솔자가, 자, 오와 열을 맞추세요! 이제 곧 공항으로 이동합니다. 점심도 굶은 채 공항으로 가서 여권을 받아 들고 탑승수속 그리고 드디어 비행기 안으로 들어간다.
그 당시 카메룬을 가기 위해서는 프랑스 파리에서 두알라(Douala)행 비행기를 타야 했다. 두알라는 카메룬의 제2의 도시이자 서부 대서양에 접한 항구도시로 경제중심지였다. 파리에서 두알라 가는 비행기는 일주일에 한번밖에 없어서 어떤 때는 삼 사 일을 파리에서 묵을 때도 있었다. 그 당시 파리에는 경남기업 파리지사가 있어서 카메룬으로 들어오는 인력들을 안내도하고 또 현장에서 필요한 자재와 물품들을 구매해서 보내 주기도 했다. 파리에서 묵을 때는 파리 르 메르디앙이라는 꽤 괜찮은 호텔에서 묵었는데 여기서도 에피소드가 있다. 파리는 호텔도 주택들도 화장실은 건식 시스템이어서 바닥에 물을 뿌리면 안 된다. 물이 빠져 나갈 하수구가 없는 것이다. 다행히 욕조가 있으면 좋은데 욕조가 없으면 변기 비데에서 머릴 감는 친구도 있었으니 지금 생각하면 쓴 웃음이 나올 일이다.
파리에서 두알라 까지는 약6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 비행기 안에는 북한사람들도 탔었고 간혹 말을 걸어오기도 했다. “동무네는 남조선에서 왔소?” 높이 올려 친 상고머리에 양복 깃에는 누런 김일성 뺏지, 출국 전 소양교육에서 강사가 하던 말, 혹시라도 북한사람을 만나면 절대 응대하지 말고 국내 들어와서 라도 가까운 경찰서에 가서 신고하라던 말이 떠올라 굳은 표정으로 전전 긍긍하며 그 사람들을 피했던 기억. 이렇게 힘들게 김포공항을 떠나 순수 비행시간만 25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카메룬 현장에 도착을 했다. 숙소는 대서양 빅토리아(Victoria)만에 접한 바로 바닷가 야자수 나무가 척 늘어진 그늘아래 포터블캠프로 잘 꾸며져 있었다.
"흐르는 강물처럼“ -카메룬 3)-
카메룬 서부 바닷가에 있는 카메룬산은 해발4095m로 서부아프리카에서 제일 높은 산이다. 카메룬산의 화산폭발로 인해 인근 해안의 모래, 흙, 나무 색깔 심지어 파도색깔까지도 새까맣다. 처음 느낌은 모든 것이 까만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정말 까만 색깔에 대한 강한 인상을 받았다. 물론 현지인(Native)도 까맣다. 그런데 흑인도 종족에 따라서 피부색깔에 차이가 있다.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는 아주 새까만 피부에서부터 아라비카 커피 선전에 나오는 짙은 갈색 같은 까만 색 등 아주 다양했다. 처음 카메룬여자를 보면 도무지 미의 기준이 서질 않는다. 그저 전부 새까맣고 똑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달만 지나면 예쁘고 어쩌고 하는 여자들에 대한 평판을 할 수 있게 되니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카메룬에서는 야생 동물고기가 공공연히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원숭이고기도 팔고 있었으며 특히 한국 사람들은 원숭이 뇌를 구해와 작은 종지에 담아서 참기름과 소금을 섞어서 먹었다.
카메룬은 아프리카에서도 풍부한 밀림과 다양한 야생동물을 자랑하는 나라다. 카메룬인구 2,300만 명의 절반 이상이 도시를 벗어난 지역에서 살고 있는데 이들의 생업은 농업과 사냥이다. 그러나 울창한 밀림에서는 농사가 어렵다보니 자연 야생동물들을 잡아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한다. 깊은 산속에는 고릴라들이 군락을 이뤄 살고 있었다. 우리가 머물었던 빅토리아에는 규모가 꽤 큰 동물원이 있었는데 여러 동물 중에서도 나는 25세라고 소개된 고릴라의 담배 피는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쇠창살에 갇혀 있었는데 그 앞에 사람이 서면 고릴라는 창살 틈으로 손을 내밀며 담배 피는 흉내를 내며 담배를 달랬다. 고릴라가 우수 깃든 표정으로 코와 입으로 담배연기를 내 뿜는 모습은 참 딱해보였고 거기다 관람객으로부터 뺏은 안경을 척 걸치고 있었다.
경남기업은 프랑스의 건설회사 ‘프로코 프랑스(Proco France)’로부터 배관 공사를 수주했다. 수주금액은 US 100만 불, 이 금액은 요즘 같으면 국내공사에서도 아주 규모가 작은 소형공사금액이다. 그러나 거의 40년 전 수주금액임을 감안하면 글쎄, 요새 1000만 불정도 규모의 공사쯤 될까 모르겠다. 경남기업직원15명에 한국 기능 인력은 150명 그리고 현지인 300명이 공사에 참여했다. 건설장비 및 모든 기자재는 프로코 프랑스에서 공급했고 경남기업은 인력을 투입한 것이다.
배관자재는 프로코 프랑스에서 작성, 제공한 BM(Bill of Materials)Book에 의해서만 수령이 가능했는데 소자재(Small Bore)는 보관도 쉽지 않았지만 도난을 당해서 항상 부족했다. 현지인들은 2“이하 Pipe류와 Valve & Fitting류 들을 철조망 밖 숲속에 던져놓고는 퇴근해서 밤으로 운반을 해 갔다. 또 현지인들은 옛날 우리들 60년대 알미늄 도시락 같은 점심 그릇을 갖고 다녔는데 점심을 먹고 빈 그릇에는 항상 시멘트를 담아들 갔다. 자재부족으로 공정은 진척되지 않지, 달리 조달할 방법은 없고 해서 고민하고 있을 때 우리 작업자들이 특공대(?)를 조직해서 현장 안에 있는 프로코 프랑스의 자재창고를 털겠다는 제안(?)을 해온 것이다. 우리 스탶들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말도 안 된다고 못들은 척 슬쩍 비켜섰고 작업자들은 정말로 야밤에 자재창고 철조망을 넘어 들어가서 주로 소자재류(2”이하 Valve류 Fitting류와 Nipple포함)들을 들고 나왔다.
사실 그 때 우리가 건설하던 빅토리아정유공장은 토탈(Total)이 북극지방에 건설한 정유공장의 복사판이었다. 그러니까 북극지방에 건설한 기존공장과 규모와 시설 면에서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그대로 건설하는 카피 플랜트(Copy Plant)였다. 사다리로 타워(Tower)를 오르는 중간 중간의 플랫폼(Platform)에는 제설용 모래를 보관하는 모래적재함이 있었고 지하배관의 동결심도가 1.2m였다. 심지어 냉각수라인에 보온작업을 하고 공정측면(Processwise)하곤 거리가 먼 배관에도 겨울 동파를 대비해서 스팀 트레싱(Steam Tracing)을 했다. 우리가 원청사인 토탈이나 프로코 프랑스 사람들에게 여긴 아프리카인데 왜 이런 제설모래적재함과 보온작업이 필요하냐고 물으면 그들도 그냥 웃으며 두 팔을 벌리고 두 어깨만 움찍거릴 뿐 그게 다였다.
공사가 막바지로 갈수록 잔 작업은 많이 남아있고 기능 인력이 많이 부족해졌다. 경남기업은 인력을 한국에서 데려오려니 시간(최단 2개월)과 비용(‘80년에 1인 왕복250만원)이 만만치 않아서 원청(프로코 프랑스)눈치만 보며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답답해진 프로코 프랑스사에서는 공기를 맞추기 위해서 프랑스 기능 인력을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1주일 만에 프랑스 기능 인력 15명이 투입됐는데 프로세스 유니트(Process Unit)에 6명, 그리고 내가 맡고 있던 Off Site Area에 9명이 배치됐다. 나는 그들을 주로 Pipe Sleeper에 설치되는 배관작업과 Steam Tracing작업을 맡겼다. 그들은 웃통을 벗어 제치고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일과 후 타임카드를 내게 들이밀며 Sign을 받아갔다. 소위 선진국 기능 인력을 Supervision해보기는 그 때가 내 평생에 처음이자 그 후로 예가 없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들은 휴일 날 나를 자기들 숙소로 초대해서 바비큐요리를 대접하곤 했다. 또 어떤 때는 프랑스에서도 최고로 친다는 염소불알요릴 해주기도 했는데 지금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 맛이나 모양을 살려 낼 수가 없다.
그 당시 우리 현장소장님은 아무리 공사가 바빠도 토요일 오후부터 일요일은 휴무를 시행했다. 우린 기다리던 주말이 되면 카메룬 제2의 도시인 두알라로 가거나 카메룬마운틴(해발4095m)자락 해발1000m에 독일인들이 건설한 휴양도시 부에야(Buea)로 끼리끼리 여행을 갔다. 식당에다 부탁해서 김밥 싸고 라면 챙겨 싣고 지도하나 들고 그냥 갔다. 두알라는 항구도시였고 부에야는 산악도시다. 특히 독일점령치하의 행정수도였던 부에야는 해발 1000m에 세워진 도시라서 현장이 있는 Victoria 해안도시보다 5-6 도정도 기온이 낮아서 에어콘이 필요 없는 지역이었다. 그때 깨달은 것 한 가지, 적도 주위 남북 15 도 내외의 해발 1000 미터 이상은 어디든 살기 좋은 곳 일거라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 당시 ‘노신영외무장관’이 아프리카 순방중에 우리 현장을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노장관은 모든 직원들에게 가스라이터를 하나씩 선물했고 직원들을 빅토리아에 독일인이 경영하는 고급호텔로 초청해서 만찬을 베풀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노장관의 한 말씀, “여러분, 현지인들에게 욕만은 가르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가르친 그 욕을 제가 되돌려 먹었습니다^^”
현장으로 들어오는 길목의 현지어린아이들한테 자동차창문을 열고 손을 흔들었더니, 야, 이 18놈아, 하며 주먹질을 해 댔단다. - 다음에 -
Have a good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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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실감나는 감동을 느끼며 마음에 많이 많이 담았습니다~~ 감사감사합니다
생생하게 장면 장면이 그려집니다.
25세 고릴라의 담배피는 모습 ...
되돌려 먹는 욕...
이 18놈아... 참으로 real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댓 글 들을 달아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현장일이 길어져서 아마도 내년 봄은 문산에서 날 것 같습니다. 돌아가면 다시 노평원에서 글쓰기 공부, 팝송배우기 그리고 영어회화반 등등 이것저것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좋은 하루 들 되십시오! Have a good ti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