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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근거 : 진주강씨대동보(晉州姜氏大同譜), 편집 겸 발행 진주강씨대동보편찬위원회(晉州姜氏大同譜編纂委員會), 1994년 12월 발행, 광일사(光一社), 전(全)31권.
〇 참고 : 진주강씨세감(晋州姜氏世鑑), 발행처 진주강씨사적연구회(晋州姜氏事跡硏究會), 편집 겸 발행인 강한신(姜漢信), 2001년 10월 10일 발행, 전(全)3권.
❏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의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성(姓) 강(姜), 아명(兒名) 학봉(鶴鳳), 휘(諱) 일순(一淳), 자(字) 사옥(士玉), 호(號) 증산(甑山)이다. 시조 강이식(姜以式)장군으로부터 43세(世)이며, 박사공 6대손 통계공 2자 참판공 안복 8자 진천군 이온(博士公六代孫通溪公二子叅判公安福八子晉川君利溫)의 후손으로 몰락한 양반가이다.
〇 호(號) 증산(甑山)은 마을 뒤에 있는 시루산(증산甑山, 시루 증甑, 뫼 산山)에서 취하였다.
❏ 증산이 출생한 곳은 전라도 전주부 고부군 답내면 서산리(全羅道 全州府 古阜郡 畓內面 西山里, 현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팔선리 서산마을 全羅北道 井邑市 梨坪面 八仙里 書山마을)이다.
〇 1812년경 간행된 「고부군읍지(古阜郡邑誌)」의 건치연혁에 따르면 「고부는 본래 백제의 고사리부군(古沙夫里郡)이었으며, 신라에서 고부로 개칭하였다. 이후 영주(瀛洲),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로 개칭하였다가 다시 고부 명칭을 사용하였으며, 군수(郡守)가 임명되는 군(郡)이다.」라고 기록되었다.
① 1870년 안동권씨가 태몽을 얻었을 당시 고부군에 편제된 면소재지는 다음과 같다.
거마면(巨麻面), 궁동면(宮洞面), 남부면(南部面), 달천면(達川面), 답내면(畓內面), 덕림면(德林面), 동부면(東部面), 백산면(白山面), 벌미면(伐未面),
부안면(富安面), 북부면(北部面), 서부면(西部面), 성포면(聲浦面), 소정면(所井面), 수금면(水金面), 오금면(梧琴面), 우덕면(優德面), 우일면(雨日面),
장순면(長順面) 등 19개 면(面)이다.
② 1870년(경오) 당시 고부군 답내면(畓內面)에 서산리(書山里)가 편제되어 있었다.
국정리(菊汀里), 금반리(金盤里), 금계리(金鷄里), 덕정리(德汀里), 도계리(道溪里), 도원리(桃源里), 돈지리(敦池里), 두전리(斗田里), 두지리(斗池里),
마항리(馬項里), 목교리(木橋里), 무릉리(武陵里), 산매리(山梅里), 산신리(山新里), 상송리(上松里), 상신리(上新里), 서산리(書山里), 석전리(石田里),
석정리(石汀里), 세곡리(世谷里), 신장리(新長里), 연화리(蓮花里), 예동(禮洞), 용전리(龍田里), 운전리(雲田里), 월평리(月平里), 장춘리(長春里),
중신리(中新里), 지지리(知止里), 창전리(蒼田里), 팔선리(八仙里), 평령리(平嶺里), 포룡리(抱龍里), 하송리(下松里), 하신리(下新里), 한교리(漢橋里),
한수리(漢水里), 현동(玄洞), 화랑리(花浪里), 황전리(黃田里)이다.
③ 『증산천사공사기(甑山天師公事記)』, 『대순전경(大巡典經)』, 『동곡비서(銅谷祕書)』에 「증산이 고부군 마항면 서산리(古阜郡 馬項面 西山里)에서 출생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상기 ①항을 살펴보면 당시 마항면(馬項面)이 없었으며, ②항에 마항리(馬項里)가 보일뿐이다. 따라서 마항면은 마항리의 오류(誤謬)임을 알 수 있다.
④ 1914년 양력 3월 1일(갑인년 정묘월 병술일, 1914년 음력 2월 5일) 12부 317군의 부군(府郡) 행정개편에 이어, 동년(同年) 양력 4월 1일(갑인년 무진월 정사일, 1914년 음력 3월 6일) 면리(面里) 행정개편이 시행되었으며, 이때 고부군은 다음과 같은 행정개편이 이루어진다.
〇 답내면(畓內面)과 궁동면(宮洞面)을 이평면(梨坪面)으로 통합 개칭하는 한편, 고부군을 고부면(古阜面)으로 격하(格下)하여 정읍군(井邑郡) 고부면으로 편제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라북도 정읍군 이평면 서산리(全羅北道 井邑郡 梨坪面 書山里)」로 개편된다.
〇 고부군 답내면의 금반리(金盤里) 마항리(馬項里) 상송리(上松里) 석전리(石田里) 연화리(蓮花里) 창전리(蒼田里) 하송리(下松里)를 통합하여 「전라북도 정읍군 이평면 마항리(馬項里)」로 개편되었다.
〇 고부군 답내면의 서산리(書山里) 석정리(石汀里) 예동(禮洞) 용전리(龍田里) 팔선리(八仙里) 현동(玄洞)이 「전라북도 정읍군 이평면 팔선리(全羅北道 井邑市 梨坪面 八仙里)」로 개편되었다.
〇 1995년 양력 1월 1일(갑술년 병자월 임진일, 1994년 음력 12월 1일) 정읍군이 정읍시로 승격되었으며 「전라북도 정읍시 이평면 팔선리 書山마을(全羅北道 井邑市 梨坪面 八仙里 書山마을)」로 개편된 후 현재에 이른다.
❏ 증산이 성장한 곳은 전라도 전주부 고부군 달천면 신월리(全羅道 全州府 古阜郡 達川面 新月里, 현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全羅北道 井邑市 德川面 新月里 新松마을)이다.
〇 『증산천사공사기』에는 「증산의 나이 8~9세에 이르러 서산리(西山里)로부터 동군 우덕면 객망리(同郡 優德面 客望里)에 이거(移居)하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1880년경 당시 ‘우덕면’은 있었으나 ‘객망리’ 지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① 1880년을 전후하여 고부군 우덕면에 편제되었던 동리 중 객망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내오리(內五里), 내촌(內村), 대암리(大岩里), 동곡리(洞谷里), 동죽리(東竹里), 두지리(斗池里), 만종리(萬宗里), 배장리(拜長里), 부예리(夫禮里),
상학리(上鶴里), 수침리(水砧里), 신기리(新基里), 신정리(新丁里), 쌍정리(雙丁里), 연촌(硯村), 외오리(外五里), 용곡리(用谷里), 용전리(龍田里),
제우리(際隅里), 천곡리(泉谷里), 폐목리(杮木里), 하학리(下鶴里), 학림리(鶴林里), 학전리(鶴田里), 효죽리(孝竹里)이다.
② 당시 고부군 달천면(古阜郡 達川面)에 ‘신월리(新月里)’가 있었다.
부정리(夫丁里), 산우리(山隅里), 삼봉리(三峯里), 송산리(松山里), 신월리(新月里), 쌍봉리(雙峯里), 영달리(永達里)이다.
③ 상기 ①②항을 살펴볼 때 당시 지명은 「전라도 전주부 고부군 달천면 신월리(全羅道 全州府 古阜郡 達川面 新月里)」이다.
〇 1914년 양력 3월 1일(갑인년 정묘월 병술일, 1914년 음력 2월 5일) 부군 개편 당시 고부군이 고부면으로 격하(格下)되어 정읍군 고부면에 편제되는 한편, 고부군 우덕면과 고부군 달천면을 통합하여 정읍군 덕천면으로 개칭되었다. 이때 비로소 「전라북도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全羅北道 井邑郡 德川面 新月里)」라는 행정구역이 성립되었다.
〇 1995년 양력 1월 1일(갑술년 병자월 임진일, 1994년 음력 12월 1일) 정읍군이 정읍시로 승격되면서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全羅北道 井邑市 德川面 新月里 新松마을)」로 변경된 후 현재에 이른다.
▲ 증산이 성장한 신송마을의 시루봉 2009년 12월 7일
▲ 증산이 성장한 신송마을 2009년 12월 7일
▲ 증산이 성장한 신송마을의 자택 2009년 12월 7일
▲ 증산이 성장한 신송마을 자택의 증산 영정 2009년 12월 7일
❏ 증산이 사망한 곳은 전라도 전주군 우림면 동곡리 동곡약방(全羅道 全州郡 雨林面 銅谷里 銅谷藥房,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590번지 全羅北道 金堤市 金山面 淸道里 590番地)이다.
〇 증산은 생전에 전북 칠군(全北 七郡)이라 일컫는 전주(全州), 태인(泰仁), 정읍(井邑), 고부(古阜), 부안(扶安), 순창(淳昌), 함열(咸悅)을 기반으로 활동하였다.
〇 1903년 전라북도 전주군 우림면 동곡리(全羅北道 全州郡 雨林面 銅谷里,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全羅北道 金堤市 金山面 淸道里)의 태운(太雲) 김형렬(金亨烈, 1862~1932) 집에 머물던 증산이 1908년 옆집에 살던 김준상(金俊相) 아내의 발에 난 종기를 치료해준 후 김준상의 방 한 칸을 빌려 사람들을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동곡약방의 기원이다. 1909년 6월 24일 증산이 사망한 후 여러 차례 집주인이 바뀌면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다가 2003년 대순진리회에서 동곡약방과 주변 부지를 매입한 후 제대로 관리되나 싶었는데, 2009년 12월부터 종교성지로 만들기 위한 공사를 진행하고 있으니 필경 예전의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게 변화될 것이다. ‘동곡’이라는 지명은 옛날에 도예(陶藝)를 만들었던 까닭에 ‘그릇골’이라고 불렸으나 지역 방언으로 인하여 ‘구릿골’로 변형되었으며,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 ‘구리 동(銅)’ ‘골 곡(谷)’을 쓰면서 동곡(銅谷)이 되었다. 현재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590번지(全羅北道 金堤市 金山面 淸道里)」로 등재되었다.
▲ 청도리 동곡약방(1) 2009년 9월 30일
▲ 청도리 동곡약방(2) 2009년 9월 30일
▲ 청도리 동곡약방(3) 2009년 9월 30일
▲ 청도리 동곡약방(4) 2009년 9월 30일
▲ 청도리 동곡약방(5) 2009년 9월 30일
▲ 청도리 동곡약방(6) 2009년 9월 30일
▲ 청도리 동곡약방(7) 2009년 9월 30일
▲ 청도리 동곡약방 공사중(1) 2009년 12월 7일
▲ 청도리 동곡약방 공사중(2) 2009년 12월 7일
❏ 증산의 가족관계
① 부(父) 강흥주(姜興周, 1846~1916)
증산의 부친(父親)이다. 본관(本貫)은 진주(晋州), 성(姓) 강(姜), 휘(諱) 흥주(興周), 자(字) 문회(文會).
본래 강한중(姜漢重)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백부(伯父, 아버지 맏형) 강두중(姜斗重)에게 자식이 없어 양자로 갔다. 〈증산의 무남독녀인 강순임(姜舜任, 1904~1959)은 『화은당실기(華恩堂實記)』를 통하여 자신이 13세이던 1916년(병진) 조부(강흥주)가 사망하였다고 적었다.〉
② 모(母) 안동권씨(安東權氏) 양덕(良德, 1850~1926)
증산의 모친(母親)이다. 권씨는 천성이 선(善)하여 남의 흉을 입에 올리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진경(眞經)』 354쪽 40절에 「선돌부인이 수년전 권씨대모(權氏大母) 정씨사모(鄭氏師母) 순임낭자(舜任娘子) 세분을 화해리 마동으로 합솔(合率, 흩어져 지내다가 한집에서 같이 살다)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이후 1926년 5월(병인년 갑오월) 77세를 일기로 손바래기에서 사망하였다.
③ 장남 강일순(姜一淳, 1871∼1909)
아명(兒名) 학봉(鶴鳳), 휘(諱) 일순(一淳), 자(字) 사옥(士玉), 호(號) 증산(甑山)이다.
④ 여식 강선돌(1881~?)
증산의 누이(여동생)이다. 선돌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관한 기록을 찾기가 쉽지 않다. 성장 후 선돌마을(입석리立石里, 돌이 서있는 마을)에 사는 박창국에게 시집간 것에 기인하여 ‘선돌댁’으로 불렸다. 결혼 후 10년 넘도록 후사(後嗣, 대를 잇는 자식)가 없어 심히 구박을 받았으며, 박창국은 후처를 얻어 다른 살림을 차렸다고 전해진다.
㉮ 『진경眞經』 354쪽 40~41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1919년 기미년) 遺族(유족)은 權氏大母(권씨대모) 鄭氏師母(정씨사모) 舜任娘子(순임낭자) 세분이신데 客望里(객망리)에 사시더니 先生(선생, 증산 칭)의 妹氏(매씨) 선돌夫人(부인)께서 數年前(수년전)에 花海里(화해리) 馬洞(마동) 當身宅(당신댁)으로 合率(합솔)하게 하셔서 只今(지금)까지 사시옵니다. 그 家宅(가택)은 本來(본래) 先生(선생, 증산 칭)님께옵서 化天(화천) 前年(전년) 가을에 사셔서 선돌夫人(부인)에게 주신 집이옵니다.」
「(1919년 기미년) 夫人(부인)께서는 只今(지금) 三十九歲(39구세)시오며 일찍이 古阜(고부) 立石里(입석리)의 朴氏(박씨) 宅(댁)에 出嫁(출가)하셨으나 十年(십년)이 넘도록 所生(소생)이 없으셔서 夫君(부군) 朴昌國(박창국)이 小室(소실)을 두고 薄待(박대)가 甚(심)하므로 先生(선생, 증산 칭)님께서 그 집을 사주셨나이다.」
〇 1919년 당시 화해리에 선돌댁과 함께 권씨대모(증산 모 안동권씨, 당시 70세), 정씨사모(증산 본처 정치순), 순임낭자(증산 여식 강순임)가 기거(起居)하고 있었다.
〇 343쪽 11절, 353쪽 37절, 354쪽 41절, 356쪽 46절에 「1919년 정월 20일 아침 선돌댁과 정산 조철제(鼎山 趙哲濟)가 처음 상면하였다.」라고 기록되었다.
〇 364쪽 57절에 「선돌댁(1881년 신사년생, 당시 39세)과 정산(1895년 을미년생, 당시 25세, 훗날 무극도無極道 창설, 태극도太極圖로 개칭)이 동거를 시작한다. 이때부터 정산이 선돌댁을 가리켜 선덕부인(宣德夫人)이라고 부른다.」라고 기록되었다.
㉯ 선돌댁이 박창국에게 출가한 입석리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〇 1905년, 선돌댁이 혼인하였던 당시 13도제를 실시하였던 시기이다. 당시 행정구역은 「전라북도 고부군 남부면 입석리(全羅北道 古阜郡 南部面 立石里)」이다.
〇 1914년 3월 1일 고부군을 고부면으로 격하(格下)시켜 정읍군 고부면으로 편제하는 한편, 고부군 남부면의 입석리(立石里) 만화리(萬化里) 성촌(星村) 신장리(新場里) 진장리(鎭將里)를 병합하여 「전라북도 정읍군 고부면 입석리(全羅北道 井邑郡 古阜面 立石里)」로 편제되었다.
〇 1995년 1월 1일 정읍군이 정읍시로 승격되면서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입석리 입석마을(全羅北道 井邑市 古阜面 立石里 立石마을)」로 변경된 후 현재에 이른다.
㉰ 선돌댁이 친정 식구들과 합솔하였던 1919년 당시 화해리의 행정구역은 다음과 같다.
〇 1914년 3월 1일 고부군 우일면의 가전리(加田里) 마동(馬洞) 부동(付洞) 순목리(順木里) 화야리(花野里)와, 정읍군 북면 한교리(漢橋里)를 병합하여 우순면 화해리로 개칭되었다. 이로 인하여 「전라북도 정읍군 우순면 화해리(全羅北道 井邑郡 雨順面 花海里)」로 편제되었다.
〇 1935년 3월 1일, 우순면과 정토면(淨土面)을 병합하여 북면(北面)으로 개칭하는 한편, 남산리(南山里) 영파리(暎波里) 화해리가 북면에 편제된다. 따라서 이 시기의 행정구역은 「전라북도 정읍군 북면 화해리(全羅北道 井邑郡 北面 花海里)」이다.
〇 1995년 1월 1일, 정읍군이 정읍시로 승격되면서 「전라북도 정읍시 북면 화해리(全羅北道 井邑市 北面 花海里)」로 변경된 후 현재에 이른다.
〇 현재 화해리에 속한 동리 지명은 가전(加田)마을 내야1(內野一)마을 내야2(內野二)마을 내야3(內野三)마을 원화해(元花海)마을 외야(外野)마을 조동(槽洞)마을이다.
⑤ 차남 강영학(姜永學, 1883~1904)
증산의 남동생으로 사망 당시 22세의 약관(弱冠)이었다. 친형인 증산이 보는 앞에서 청춘에 명줄을 놓다보니 죽은 자도 살렸다고 알려진 절대자의 발목을 잡는 계륵(鷄肋, 닭갈비, 먹자니 먹을 것 없고 버리자니 아까운 모양)이 되었다. 현재 강영학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어졌다.
강영학은 1904년 22세에 전라북도 태인군 남촌일변면 굴치리(全羅北道 泰仁郡 南村一邊面 屈峙里, 현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 全羅北道 井邑市 七寶面 水淸里)에서 사망하였다.
〇 태인 굴치(泰仁 屈峙) : 동국여지지(東國輿地誌) 태인(泰仁)에 굴령(屈嶺)으로 표기되었다. 여지고(輿地考)에 ‘굴치(屈峙)는 굴령을 가리킨다.’라고 하였다.
〇 1904년 강영학이 사망할 당시 13도제를 시행하였던 시기이다. 이 당시 굴치의 행정구역은 「전라북도 태인군 남촌일변면 굴치리(全羅北道 泰仁郡 南村一邊面 屈峙里)」이다.
〇 1914년 4월 1일 「전라북도 정읍군 칠보면 수청리(全羅北道 井邑郡 七寶面 水淸里)」이다.
〇 1986년 고당산高堂山(640m) 아래에 수청저수지(水靑貯水池)가 준공되면서 굴치리(屈峙里)와 광덕리(光德里)가 수몰되었다.
〇 1995년 1월 1일 정읍군이 정읍시로 승격되면서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수청리(全羅北道 井邑市 七寶面 水淸里)」로 편제되었다.
⑥ 증산의 무남독녀 강순임(姜舜任, 1904~1959)
호(號) 화은당(華恩堂), 1916년 13세에 고모 강선돌(1881~?)의 중매로 양(楊)씨에게 출가하였으나 가정생활이 원만하지 못하여 헤어졌으며, 무극도(無極道)를 창설한 조철제(趙哲濟, 1895~1958)에게 의탁하여 10여년을 보냈다. 1936년 33세가 되던 해 김병철(金炳澈)과 가정을 이루었다. 1937년 전주부 노송정(全州府 老松町, 현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노송동 全羅北道 全州市 完山區 老松洞)에 증산천사향원(甑山天師享院)을 세워 종교 활동을 시작한 후 여러 곳을 전전하며 종교 활동을 펼쳤다. 1948년 전라북도 정읍군 남이면 대흥리(全羅北道 井邑郡 南二面 大興里, 현 전라북도 정읍시 입암면 대흥리 全羅北道 井邑市 笠岩面 大興里)에 있는 증산의 유해를 전라북도 전주군 우림면 동곡리(全羅北道 全州郡 雨林面 銅谷里,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全羅北道 金堤市 金山面 淸道里)로 이장하였으며, 1949년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오리알터(全羅北道 金堤郡 金山面 金山里 오리알터,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434-2번지 全羅北道 金堤市 金山面 金山里 434-2番地)의 3,000여 평 대지를 증산법종교본부(甑山法宗敎本部)로 삼아 삼청전(三淸殿) 등을 지었으며, 1952년 영대(靈臺)를 지어 부친 증산과 모친 정치순의 유해를 석관(石棺)에 안치한 후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1959년 4월 1일 사망하였다.
▲ 증산법종교본부 외부 2009년 12월 7일
▲ 증산법종교본부 내부 2009년 12월 7일
▲ 증산법종교본부 경춘대 2009년 12월 7일
▲ 증산법종교본부 삼청전 2009년 12월 7일
▲ 증산법종교본부 영대 2009년 12월 7일
❏ 증산의 부인과 수부
(1) 본처(本妻) 제1수부(首婦) 하동정씨 치순(河東鄭氏 治順, 1874~1928)
1874년 정월 그믐(갑술년 병인월 계유일, 1874년 양력 3월 17일) 전라도 전주부 금구현 초처면 내광리(全羅道 全州府 金溝縣 草處面 內光里, 현 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 全羅北道 金堤市 鳳南面 內光里)에서 태어났다.
1891년(신묘) 21세의 증산과 18세의 정치순이 결혼하였다.
❏ 내광리 유래는 다음과 같다.
〇 1874년(갑술) 정치순이 태어날 당시 「전라도 전주부 금구현 초처면 내광리(全羅道 全州府 金溝縣 草處面 內光里)」이다.
〇 1914년 양력 3월 1일(갑인년 정묘월 병술일, 1914년 음력 2월 5일) 부군 개편 당시 「전라북도 금구군 초처면 내광리(全羅北道 金溝郡 草處面 內光里)」로 개편되었다. 이때 금구군 초처면 내광리와, 남면(南面) 구호리 만복리 신덕리(九湖里 萬福里 新德里)를 전라북도 김제군 초처면 내광리(全羅北道 金堤郡 草處面 內光里)로 통합 개편하였다.
〇 1935년 양력 3월 1일(을해년 기묘월 병자일, 1935년 음력 1월 26일) 쌍감면(雙坎面)을 황산면(黃山面)으로, 수류면(水流面)을 금구면(金溝面)으로, 하리면(下里面)과 초처면이 봉남면(鳳南面)으로 통합 개편되었다.
〇 1995년 양력 1월 1일(갑술년 병자월 임진일, 1994년 음력 12월 1일) 김제시(金堤市)와 김제군(金堤郡)이 통폐합되면서 김제시가 신설되었으며, 이때 「전라북도 김제시 봉남면 내광리(全羅北道 金堤市 鳳南面 內光里)」로 개편된 후 현재에 이른다.
① 『용화전경』 제6장에 「정씨사모님께서는 전라북도 김제군 봉동면 (전 하류면) 내고아리 하동정씨 가문에서 서기 1874년 음력 정월 30일에 탄생하신지라. 세존님께서 정씨사모님이 성장하시던 내광리에서 훈학(訓學)하시게 되였은즉 이로 인(因)한 연유로 중매되어 출가하신지라. 사모(師母)님은 세존님께서 공부하실 때 모든 정성을 다하사 몸과 마음을 아끼지 않으시고 불피풍우(不避風雨)하사 여일령(如一令)으로 시봉(侍奉)하신지라. 세존님께서 신축년 6월초에 시루봉하(峯下)에서 14일간을 공부하실 때에 하루에 세 번씩 진지를 올리시는데 ...(중략)... 세존님께서 고생한다고 위로하시고 진지를 올리실 때 ...(하략)」라고 기록되었다.
② 『화은당실기』 제2장-1-2)에 「그 당시 성부께서 화천하셨다는 소식을 조부님께서는 통보받으셨으나 모녀에게는 정상이 너무 가련하다하시어 알리지 않으시고 ...(중략)... 비로소 그 사실을 모녀에게 이야기하니 모녀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을 접하고 부둥켜안고 애통해마지 않았다. 성부께서 화천하신 뒤로 가세는 더욱 궁핍하여 생계가 곤궁 막심하니 관흥하신 어머니는 방아품을 팔거나 유리걸식하시며 따님을 기르시기에 온갖 정성을 다하시고, 노쇠하신 할아버지는 짚신을 삼아가며 아드님의 크나큰 이상을 생각하고 그의 재림을 기원하며 사시로 치성을 올리시고 축원하는 그 모습은 실로 필설로는 형언키 어려웠다. 이 무렵 화은당 나이 팔세 시, 전라도 순천에 사는 장기동 종반이 찾아와서 가장집물을 사주어 가난하고 막막한 살림살이를 도와주고 외로운 처지를 위로해주니 그 은혜 실로 골수에 아로새겨져 잊지 못할 바였다.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의지하여 근근이 지내더니 세월은 흘러 선사 나이 열세 살 되었을 때 그동안 하늘같이 믿고 의지하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다. ...(중략)... 조부가 별세하시고 나자 선사모녀를 없앰으로서 자기가 성부님의 후계사를 맡아할 수 있다는 그릇된 공명심과 욕심에 눈이 어두워진 고모는 선사모녀를 없애기 위해 갖은 흉모를 꾀한 나머지 모녀를 모함하고 문중과 동리사람들을 선동하여 모녀를 핍박하였다. 마침내는 양모(楊某)라는 자의 어미와 모의하여 어느 날 밤 난봉꾼을 동원하여 선사모녀를 집안에서 축출하고 말았으니 성모께서는 홀로 이곳저곳을 떠돌며 유리걸식하시면서 거의 실성한 사람처럼 방황하였고 선사는 정읍에 사는 어느 노파의 집에 끌려가서 모녀간에 생이별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었다. ...(중략)... 선사 열네 살 되던 해 8월 15일에 원평 일우에서 모녀가 상봉하여 서로 붙들고 통곡하였다. 이는 성부를 신앙하는 조철제씨의 주선에 의한 것이었으며 그 후 다시 모녀가 삼년간 헤어졌다가 선사 나이 십칠 세에 만나 구 태인읍에서 칠년간을 함께 지내며 ...(중략)... 정씨 대모님께서 선사 나이 25세 되시던 무진년 2월부터 우연히 득병하시어 신음하시더니 ...(중략)... 천기58년(4261, 1928, 무진戊辰) 8월 15일 아침에 정씨성모는 새 옷을 갈아입으시고 “내가 아침에 죽으면 동리사람들이 각기 명절을 지내느라고 오지 못할 것이니, 오늘 정오에 가기로 하노라.”하시더니 정오가 되자 오색채운이 영롱하게 집을 덮고 방안이 캄캄하여지면서 이름 모를 향기가 가득하더니 홀연 선화하시었다.」라고 기록되었다.
(2) 제2수부(首婦) 김말순(金末順, 1890~1911)
1904년 증산은 첫 수제자(首弟子)인 태운(太雲) 김형렬(金亨烈, 1862~1932)의 셋째 딸 말순과 수부 의식을 치름으로써 두 번째 수부로 들인다. 이로부터 말순은 3년 동안 수종(首從, 1904년 가을~1907년 11월 3일까지)하였다.
(3) 제3수부(首婦) 고판례(首婦 高判禮, 1880~1935)
증산의 세 번째 수부이다.
『고부인신정기高夫人神政記(천후신정기天后神政記), 1963년 12월 22일 초판 남주 이정립, 1985년 3월 26일 재판 회상 정영규)』에 고판례의 출생배경과 증산을 만난 상황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천후(天后)의 성(姓)은 고씨(高氏)요 본(本)은 장택(長澤)이요 이름은 판례(判禮)니 이조(李朝) 고종(高宗) 경진(庚辰) 삼월(三月)에 전라도 담양군 무면 성도리(全羅道 潭陽郡 武面 成道理, 무면은 무정면武貞面의 오류誤謬)에서 탄생(誕生)하시니 부친(父親)의 이름은 덕삼(德三)이요 모친(母親)은 박씨(朴氏)니라. 박부인(朴夫人)이 기묘년(己卯年) 오월(五月)에 어느 절에서 기도(祈禱)할 새 하루 밤 꿈에 높은 산(山)에 올라 굉장(宏壯)한 집에 들어가니 한 선관(仙官)이 붉은 책(冊)과 누런 책(冊) 각(各) 한권(一卷)씩 주거늘 부인이 받아가지고 놀라 깨었더니 이로부터 잉태(孕胎)하여 천후(天后)께서 탄강(誕降)하시니라. 천후(天后)를 낳으신지 여섯 달 만에 부친상(父親喪)을 당(當)하시고 아홉 살에 모친(母親)을 따라서 정읍군 입암면 대흥리(井邑郡 笠岩面 大興里)에 이사(移徙)하시고 이로부터 이숙(姨叔) 차치구(車致九)를 좇아 동학(東學)을 믿으시니라. 정미년(丁未年) 동짓달 초이튿날 천사(天師)께서 순창(淳昌) 농(籠)바우로부터 대흥리(大興里)에 오실 새 태인(泰仁) 행단(杏壇)에 이르사 차경석(車京石)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나의) 일은 수부(首婦)가 들어야 되는 일이니 네가 일을 하려거든 수부(首婦)를 들여세우라 하시니라. 차경석(車京石)이 천사(天師)를 모시고 돌아와서 그 이종매(姨從妹) 고씨(高氏) 천후(天后)를 천거(薦擧)하니 동짓달 초사흗날 천사(天師)께서 천후(天后)를 맞아 결혼(結婚)하실 새 천후(天后)에게 일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만나려고 십오년(十五年)동안 정력(精力)을 들였나니 이로부터 천지대업(天地大業)을 네게 맡기리라.」라고 기록되었다.
❏ 증산 강일순 직계 해제에 관한 발췌근거
〇 진주강씨대동보(晉州姜氏大同譜), 편집 겸 발행 진주강씨대동보편찬위원회(晉州姜氏大同譜編纂委員會), 1994년 12월 발행, 광일사(光一社), 전(全)31권.
〇 참고 : 진주강씨세감(晋州姜氏世鑑), 발행처 진주강씨사적연구회(晋州姜氏事跡硏究會), 편집 겸 발행인 강한신(姜漢信), 2001년 10월 10일 발행, 전(全)3권.
❏ 진주강씨대동보 1권에 한하여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① 519면에 진주강씨대동보 박사공파 세계도(晉州姜氏大同譜博士公派世系圖)가 기록되었다.
② 605면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 하편(晉州姜氏博士公派大同譜 下篇)이 시작된다.
③ 607면부터 새로운 1면이 시작된다.
④ 1면 진주강씨 박사공파 대동보 1권(晉州姜氏博士公派大同譜一卷)
시조 휘 이식始祖諱以式(고구려병마도원수高句麗兵馬都元帥) 원대손遠代孫 1세~5세.
구분 | 주인공 | 내력 | 배우자 | 세보 근거 |
1세 | 계용啓庸 생몰년미상 | 고려高麗, 문과文科 국자박사國子博士 | 부전不傳 | 1권 1면 |
2세 | 독자 인문引文 생몰년미상 | 고려, 문과文科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 부전 | 1권 1면 |
3세 | 독자 사첨師瞻 생몰년미상 | 고려, 감찰어사監察御使 증 판내의령 참리부사贈判內議令參理副使 | 나주정씨羅州鄭氏 생몰년미상 | 1권 1면 |
4세 | 차남 창귀昌貴 생몰년미상 | 고려, 음판도정랑蔭版圖正郞 증 중대광 문하시중 진원부원군贈重大匡門下侍中晉原府院君 | 안동권씨安東權氏 생몰년미상 | 1권 1면 |
→ 5세 군보君寶는 1권 7면으로 | ||||
5세 | 독자 군보君寶 ?~1380 | 고려,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삼중대광 문하좌시중三重大匡門下左侍中 | 경주김씨慶州金氏 ?~1392 | 1권 7면 |
6세 | 장남 시蓍 1339~1400 | 고려, 삼중대광 상의 문하찬성사三重大匡商議門下贊成事 | 진주하씨晉州河氏 1338~1399 | 1권 7면 |
7세 | 차남 회중淮仲 ?~1441 | 고려~조선朝鮮, 자字 중부仲父, 호號 통계通溪 고려말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조선초 병조판서兵曹判書 | 본처 의령남씨宜寧南氏 ?~1407 후처 전주최씨全州崔氏 생몰년미상 후처 청송심씨靑松沈氏 생몰년미상 | 1권 11면 |
8세 | 차남 안복安福 생몰년미상 | 조선, 형조 도관 정랑刑曹都官正郞, 증 병조참판贈兵曹參判 | 인천이씨仁川李氏 생몰년미상 | 1권 12면 |
→ 9세 이온利溫은 1권 198면으로 통계공 회중 제2자 참판공 안복파(通溪公淮仲第二子叅判公安福派) 〈1권 150면〉 | ||||
9세 | 8자 이온利溫 생몰년미상 | 조선,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 증 순충보조공신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진천군贈純忠補祚功臣嘉善大夫吏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管晉川君 | 언양김씨彦陽金氏 생몰년미상 | 1권 198면 |
10세 | 4남 부溥 생몰년미상 | 조선, 좌랑佐郞 | 전주이씨全州李氏 생몰년미상 | 1권 206면 |
11세 | 독자 세의世義 1492~1547 | 조선, 자字 의중宜中, 생부生父 숙淑 선략장군 충순위 사용宣略將軍忠順衛司勇 | 의성김씨義城金氏 생몰년미상 | 1권 206면 |
12세 | 독자 우雨 생몰년미상 | 조선, 생부生父 세인世仁, 사용司勇 | 여산송씨礪山宋氏 생몰년미상 | 1권 206면 |
13세 | 장남 윤상允常 생몰년미상 | 조선, 등登 무과武科, 사용司勇 | 전주최씨全州崔氏 생몰년미상 | 1권 206면 |
→ 14세 영穎은 23권 261면으로 박사공 6대손 통계공 2자 참판공 안복 8자 진천군 이온편(博士公六代孫通溪公二子叅判公安福八子晉川君利溫編) 〈23권 243면〉 | ||||
14세 | 독자 영穎 생몰년미상 | 조선, 자字 사징士澄 | 부안김씨扶安金氏 생몰년미상 | 23권 261면 |
15세 | 독자 후진後振 생몰년미상 | 조선, 자字 중선仲善 | 진위원씨振威元氏 생몰년미상 | 23권 261면 |
16세 | 독자 익주翊周 1637~? | 조선, 자字 여상汝尙 | 본처 전의이씨全義李氏 생몰년미상 후취 남원양씨南原梁氏 생몰년미상 | 23권 261면 |
17세 | 장남 진창晉昌 1670~? | 조선, 부전不傳 | 문화류씨文化柳氏 생몰년미상 | 23권 261면 |
18세 | 독자 세복世卜 생몰년미상 | 조선朝鮮, 생부生父 우창遇昌 | 창녕조씨昌寧曺氏 생몰년미상 | 23권 261면 |
→ 19세 위거渭擧는 24권 301면으로 | ||||
19세 | 장남 위거渭擧 기해생(오류誤謬) | 조선, 자字 시좌時佐 기해생은 기묘생(1759년)의 오류誤謬) | 고부이씨古阜李氏 생몰년미상 | 24권 301면 |
20세 | 독자 석장錫章 1783~? | 조선, 자字 군양君讓 | 본처 장수황씨長水黃氏 생몰년미상 후취 밀양박씨密陽朴氏 생몰년미상 | 24권 301면 |
21세 | 장남 두중斗重 1808~? | 조선, 자字 자선子先 | 능성구씨綾城具氏 생몰년미상 | 24권 301면 |
22세 | 독자 문회文會 1846~1916 | 조선, 자字 흥주興周 생부生父 한중漢重 | 안동권씨安東權氏 양덕良德 1850~1926 | 24권 301면 |
23세 | 독자 일순一淳 1871~1909 | 조선, 자字 사옥士玉 호號 증산천사甑山天師 문회의 차남 강영학(姜永學, 1883~1904)이 누락됨 | 본처 동래정씨東萊鄭氏 치순治順 생몰년미상 후취 장택고씨長澤高氏 판례判禮 1880~1935 | 24권 301면 |
24세참고 | 독녀 순임舜任 1904~1959 | - | 부夫 김병철金炳澈 의성인義城人 | - |
→ 24세 경형炅馨은 28권 406면으로 | ||||
24세 | 독자 경형炅馨 1920~1993 |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대한민국大韓民國 자字 석조石釕, 생부生父 영필永鏎 | 선산유씨善山柳氏 1928~? | 28권 406면 |
❏ 3개월 전부터 도차주(道次主) 강수(姜守, 강사원姜士元, 강방준姜方俊, 강시원姜時元)에 관하여 진주강씨대동보 60여 권을 해제하고 있습니다만 근거가 미약하다보니 3개월째 지체되고 있습니다. 준비 되는대로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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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 자료 감사 드림니다....수고하셨습니다...시천주!!!!
반갑습니다. 감사합니다. 작은 힘이나마 카페에 보탬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