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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선종(禪宗)의 본보기
— 『대혜보각선사법어』 중, —
① 첫 번째 본보기 = 도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지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도는 마음을 깨닫는 것이지,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즈음에는 이 도를 배우는 자가 흔히 근본을 버리고 말단을 쫓으며, 바른 것을 등지고 삿된 것에 뛰어들며, 기꺼이 자기의 발 밑에서 마지막 진실을 찾지는 않고 오로지 종사(宗師)가 말한 곳에 머물러 있으니, 비록 지극히 정밀하게 말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본분(本分)의 일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옛 사람은 배우는 사람들이 헛것을 보고 진짜로 여기는 것을 보고서, 마지못하여 방편(方便)을 시설하여 그들을 이끌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의 본지풍광(本地風光)을 알고 자기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밝게 보도록 하였을 뿐이니, 처음부터 사람에게 줄 참된 법이란 없는 것입니다.
예컨대 강서(江西)의 마조(馬祖)는 처음에는 좌선(坐禪)을 좋아하였습니다. 뒤에 남악회양(南嶽懷讓) 스님은 그가 좌선하는 곳에서 벽돌을 갈았습니다. 마조가 선정(禪定)에서 일어나 물었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어쩌시렵니까?”
회양이 답했습니다.
“거울을 만들려 하네.”
마조가 웃으며 말했습니다.
“벽돌을 간다고 어떻게 거울이 되겠습니까?”
회양이 말했습니다.
“벽돌을 갈아서 거울이 되지 못한다면, 좌선을 하여 어떻게 부처가 되겠는가?”
회양 스님이 마조에게 좌선하여 무엇을 하려 하느냐고 물었는데 마조는 부처가 되길 바란다고 답했으니, 경전 속에서 말한 “먼저 선정(禪定)으로 움직이고 뒤에 지혜로 뽑아낸다.”는 것입니다. 마조는 좌선하여 어떻게 부처가 될 수 있느냐는 말을 듣고서, 비로소 마음이 조급해져서 이윽고 자리에서 일어나 절을 하여 경의를 표하고는 물었습니다.
“어떻게 해야 옳습니까?”
회양은 마조에게 때가 온 것을 알고서 비로소 그에게 말했습니다.
“비유하면, 우마차가 있는데 수레가 만약 가지 않는다면 소를 때려야 옳은가? 수레를 때려야 옳은가?”
그리고 다시 말했습니다.
“그대는 좌선(坐禪)을 배우느냐? 좌불(坐佛)을 배우느냐? 만약 좌선을 배운다면, 선은 앉거나 눕는 것이 아니다. 만약 좌불을 배운다면, 부처는 정해진 모습이 아니다. 머묾없는 법에서 취하거나 버려서는 안된다. 그대가 만약 좌불을 배운다면 곧 부처를 죽이는 것이고, 만약 앉는 모습에 집착한다면 그 도리에 통달하지 못한다.”
마조는 말을 듣고서 문득 깨닫고는, 이윽고 물었습니다.
“어떻게 마음을 써야 무상삼매(無相三昧)에 합치하겠습니까?”
회양이 말했습니다.
“그대가 마음의 법문(法門)을 배우는 것은 마치 씨앗을 심는 것과 같고, 내가 법의 요체를 말해 주는 것은 비유하면 저 하늘이 비를 내리는 것과 같다. 그대는 인연을 만난 까닭에 그 도를 볼 것이다.”
마조가 다시 물었습니다.
“도는 색깔이나 모습이 아닌데,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회양이 말했습니다.
“법을 보는 마음의 눈으로 도를 볼 수 있다. 무상삼매(無相三昧)도 그러한 것이다.”
마조가 말했습니다.
“이루어지거나 부서지는 것입니까?”
회양이 말했습니다.
“이루어지고 부서지고 모이고 흩어지는 것으로써 도를 보려 한다면, 잘못이다.”
앞서 “방편으로 이끈다.”고 말했는데, 이 일화가 바로 우리 종문(宗門) 가운데 첫번째 본보기입니다. 묘명거사(妙明居士)는 이것에 의지하여 공부하기 바랍니다.
② 두 번째 본보기 = 자기의 보물창고를 깨닫는다
옛날 대주(大珠) 스님이 처음 마조(馬祖)를 찾아뵈었을 때, 마조가 물었습니다.
“어디에서 오는가?”
대주가 말했습니다.
“월주(越州)의 대운사(大雲寺)에서 옵니다.”
마조가 말했습니다.
“여기에 와서 무슨 일을 하려 하는가?”
대주가 말했습니다.
“불법(佛法)을 찾아 왔습니다.”
마조가 말했습니다.
“자기의 보물창고는 돌아보지 않고, 자기를 버리고 이리저리 내달려서 어쩌겠는가? 나의 여기에는 한 물건도 없는데, 무슨 불법을 찾는가?”
대주가 이에 절을 하고서 물었습니다.
“어떤 것이 저 혜해(慧海) 자신의 보물창고입니까?”
마조가 말했습니다.
“지금 나에게 묻는 것이 곧 그대의 보물창고이다.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고, 또 부족함이 없으며, 자재하게 사용하는데, 왜 밖에서 구하겠는가?”
대주는 말을 듣고서 자기의 본 마음은 알아차려서 얻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뒤에 대주산(大珠山)에 머물렀는데, 질문을 받으면 질문에 따라 답을 하여 자기의 보물창고를 열어서 자기의 재산을 꺼내도록 하였는데, 마치 쟁반 위를 구르는 옥구슬처럼 걸림이 없었다. 일찍이 어떤 승려가 대주에게 물었다.
“반야는 큽니까?”
대주 : “반야는 크다.”
승려 : “얼마나 큽니까?”
대주 : “끝이 없다.”
승려 : “반야는 작습니까?”
대주 : “반야는 작다.”
승려 : “얼마나 작습니까?”
대주 : “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승려 : “어느 곳입니까?”
대주 : “어느 곳이 아닌가?”
그대는 그가 자기의 보물창고를 깨닫는 것을 살펴보시오. 남에게 전해 줄 진실한 법이 조금이라도 있습니까? 나 묘희(妙喜)는 늘 이 도를 배우는 자들에게 말합니다. 만약 참으로 도를 보는 사람이라면, 마치 종경(鐘磬)이 틀에 걸려 있는 듯하고 골짜기에 메아리가 울리는 듯하여, 크게 치면 크게 울리고 작게 치면 작게 울립니다.
요즈음의 불법은 애처롭게도 남의 스승 노릇하는 자가 먼저 기특하고 현묘한 것을 가슴에 쌓아 놓고서 차례차례 서로 따라서 이어받아 입에서 귀로 전해 주는 것으로 종지(宗旨)를 삼습니다. 이러한 무리는 삿된 독이 마음에 들어와 있으나, 치료할 수도 없습니다. 옛 스님은 이들을 일러 반야를 비방하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이런 사람들은 “천 분의 부처가 세상에 나와도 참회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우리 선종(禪宗)이 뛰어난 방편으로 배우는 사람을 이끄는 두 번째 본보기입니다. 묘명거사가 꼭 마지막 진실을 찾고자 한다면, 마땅히 이러한 본보기처럼 공부하여야 합니다.
③세 번째 본보기 = 달을 보고 손가락은 잊는다
이미 이러한 마음을 갖추고서 이 한 수를 이해하고자 한다면, 먼저 모름지기 결정적인 뜻을 세우고, 경계를 대하고 인연을 만남에 순조롭거나 거스를 경우에도 물샐틈없이 지키며 주인 노릇 하면서 여러 가지 삿된 말을 듣지 말아야 합니다. 일상생활에서 인연을 만날 때에는 늘 세월은 재빨리 흐르니, 삶과 죽음이란 두 낱말을 콧마루 위에다 걸어 놓으십시오. 또 마치 백만 관(貫)의 빚을 진 사람이 돌려줄 돈은 한 푼 없는데 빚쟁이가 문 앞을 지키고 있어서 걱정되고 두렵지만, 천 번을 생각하고 만 번을 헤아려도 돌려줄 길이 없는 것과 같아야 합니다. 만약 늘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나아갈 몫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반은 나아가고 반은 물러나며,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는다면, 집이 두세 채 뿐인 시골의 지혜 없는 어리석은 사내만도 못한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도리어 여러 가지 잘못된 지식이나 깨달음이 장애가 되질 않고, 오로지 어리석음을 지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옛 스님이 말했습니다.
“지극한 도리를 캐보려 한다면 깨달음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
요즈음은 흔히 깨달은 종사(宗師)를 믿지 않고, 깨달음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고 말하고, 깨달음은 건립된 것이라고 하고, 깨달음은 파정(把定)이라 하고, 깨달음은 두 번째에 떨어진 것이라 하니, 사자의 껍질을 쓰고서 여우의 울음을 우는 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법을 가려볼 눈을 갖추지 못한 자가 종종 이런 무리들에게 속으니, 잘 살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잘 생각하여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종사가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을 가르쳐서 달을 보고 손가락은 잊게 만드는 세 번째 본보기입니다. 묘명거사가 삶과 죽음의 소굴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것을 일러 바른 말이라 하고, 다르게 말하는 것을 일러 삿된 말이라 합니다. 잘 생각하십시오!
④네 번째 본보기 = 문자의 모습을 떠나고 분별의 모습을 떠나고 언어의 모습을 떠난다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는 의심의 뿌리를 완전히 뽑아내지 않으면, 백겁(百劫)의 세월 동안 천 번을 윤회하며 업(業)을 따라 과보를 받으며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면서 쉴 때가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세차게 심혈을 기울일 수 있다면, 단번에 깨끗이 뽑아내 버리고 곧 중생의 마음을 떠나지 않고 부처의 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오래된 원력(願力)이 있어서 참되고 바른 선지식을 만나 뛰어난 방편에 이끌려 일깨워진다면,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보지 못했습니까? 옛 스님이 말했습니다.
“세속에는 사람을 가로막는 마음이 없고, 부처님과 조사에겐 사람을 속이는 뜻이 없다. 다만 요즈음 사람들이 지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세속이 사람을 가로막지 않는다고 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과 조사의 말씀이 비록 사람을 속이지는 않지만, 다만 이 도를 배우는 자가 방편을 잘못 알고서 한 마디 말과 한 구절 속에서 현(玄)함을 찾고 묘(妙)함을 찾고 얻음을 찾고 잃음을 찾는 까닭에 뚫어내지 못하고 부처님과 조사가 사람을 속이지 않는다고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눈먼 사람이 햇빛이나 달빛을 보지 못하는 것이 눈먼 자의 허물이지 해와 달의 허물이 아닌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이 도를 배움에 문자의 모습을 떠나고 분별의 모습을 떠나고 언어의 모습을 떠난 네 번째 본보기입니다. 묘명거사는 잘 생각하십시오.
⑤다섯 번째 본보기 = 본바탕은 본래 더러움이 없고 더럽게 만들지도 못한다
태어나도 온 곳을 알지 못하고 죽어도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의심을 아직 잊지 않았다면, 삶과 죽음이 뒤얽힐 것입니다. 다만 이렇게 뒤얽힌 곳에서 한 개 화두(話頭)를 살펴보십시오 : 승려가 조주에게 물었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조주가 말했습니다. “없다.” 다만 이 태어나도 온 곳을 알지 못하고 죽어도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의심을 ‘없다’는 글자 위에 옮겨온다면, 뒤얽힌 마음이 사라질 것입니다. 뒤얽힌 마음이 사라지고나면, 오고가는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심이 끊어질 것입니다. 다만 끊고자 하나 아직 끊어지지 않은 곳에서 맞붙어 버티다가 때가 되어 문득 확 하고 한 번 뚫리면, 곧 경전에서 말하는 “마음의 살고 죽음을 끊고, 마음의 선(善)하지 못함을 멈춘다.”는 것이 마음의 무성한 번뇌망상을 잘라내고, 마음의 더러움과 혼탁함을 씻어내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 무슨 더러움이 있겠습니까? 마음에 무슨 혼탁함이 있겠습니까? 좋고 나쁨을 분별하는 잡독(雜毒)이 모인 것을 일러 선하지 않다고도 하고, 더럽고 혼탁하다고도 하고, 빽빽한 번뇌망상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만약 참으로 확 하고 한 번 뚫린다면, 단지 이 빽빽한 망상의 숲이 곧 향기로운 전단나무의 숲이고, 단지 이 더럽고 혼탁한 것이 곧 깨끗하게 해탈하여 조작이 없는 묘한 본바탕입니다. 이 본바탕은 본래 더러움이 없고, 더럽게 만들지도 못합니다. 분별이 생기지 않아 텅 비고 밝고 스스로 비추는 것이 곧 이 조그만 도리입니다. 이것이 종사가 배우는 자로 하여금 삿됨을 버리고 바름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다섯 번째 본보기입니다. 묘명거사는 다만 여기에 의지하여 공부하십시오. 오래오래 하면 저절로 빈틈없이 들어맞을 것입니다.
⑥여섯 번째 본보기 = 분별하지 않으면 저절로 막힘이 없다
도는 있지 않는 곳이 없으니 닿는 곳마다 모두 참되어서, 참됨을 떠나 발 디딜 곳이 없고 발 딛는 곳이 곧 참됩니다. 경전에서 말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직업에 종사하는 것들이 모두 바른 도리를 따르고 실상(實相)과 어긋나지 않는다.”
이 까닭에 방거사(龐居士)가 말했습니다.
“일상생활에 다른 것은 없고
오직 나 스스로 내키는 대로 어울린다.
하나하나의 일을 취하지도 버리지도 않고
곳곳에서 어긋남이 없다.
붉은색과 보라색이라고 누가 이름 지었는가?
언덕과 산에는 한 점의 티끌먼지도 없네.
신통(神通)과 묘용(妙用)이
물 긷고 땔나무 나르는 일이로다.”
그러나 곧 이렇다고 알고 있으면서 묘한 깨달음을 구하지 않으면, 다시 일 없는 껍질 속[무사갑리(無事甲裏)]에 떨어져 있게 됩니다.
보지도 못했습니까? 위부(魏府)의 노화엄(老華嚴)이 말했습니다.
“불법(佛法)은 그대가 매일 생활하는 곳에 있고, 가고․머물고․앉고․눕는 곳에 있고, 죽 먹고 밥 먹는 곳에 있고, 말로써 서로 묻는 곳에 있다. 그러나 일부러 만들거나 행하거나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면 도리어 옳지 않다.”
또 진정(眞淨) 스님이 말했습니다.
“마음으로 헤아리지 않으면, 하나하나가 밝고 묘하며, 하나하나가 자연스러우며, 하나하나가 마치 연꽃이 물에 젖지 않는 것과 같다. 자기 마음에 어두운 까닭에 중생이 되고, 자기 마음을 깨달은 까닭에 부처가 된다. 중생이 본래 부처이고 부처가 본래 중생이지만, 어리석음과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중생과 부처라는 차이가 나는 것이다.”
또 석가모니가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은 법의 지위(地位)에 머물러 있고, 세간의 모습도 늘 머물러 있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은 생각하고 헤아리고 분별하는 것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역시 마음으로 헤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일 뿐입니다. 참으로 인연에 응하는 곳에서, 안배(安排)하지 않고, 조작(造作)하지 않고, 마음으로 생각하거나 헤아리거나 분별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면, 저절로 막힘없이 트여서 바랄 것도 없고 의지할 것도 없고, 유위(有爲)에 머물지도 않고, 무위(無爲)에 떨어지지도 않고, 세간이니 출세간이니 하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곧 일상생활의 행위 속에서 본래면목(本來面目)에 어둡지 않은 여섯 번째 본보기입니다.
⑦일곱 번째 본보기 = 다만 힘들지 않은 곳을 가리켜 줄 뿐, 따로 전해 줄 현묘하고 기특한 도리는 없다
본래 삶과 죽음의 일이 크고 세월은 재빠른데 아직 자기의 일을 밝히지 못했기 때문에 종사(宗師)를 찾아 뵙고 삶과 죽음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았으나, 도리어 삿된 스승의 무리들을 만나면 더욱더 얽어매이고 더욱더 속박을 당합니다. 옛날의 속박을 아직 풀지도 못했는데 새로운 속박을 더하면서도, 도리어 삶과 죽음이라는 속박은 이해하지 못하고, 다만 한결같이 쓸데없는 잡다한 말들만 이해하여 종지(宗旨)라 부르니, 매우 중요한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짓입니다. 이것이 경전에서 말한 “삿된 스승의 잘못이지, 중생의 허물이 아니다.”는 것입니다.
삶과 죽음에 속박되지 않으려면, 다만 늘 마음 속을 텅 비워 버리고, 단지 태어날 때 오는 곳을 알지 못하고 죽을 때 가는 곳을 알지 못하는 마음을 언제나 인연을 만나는 곳에서 붙들고 계십시오. 붙들고 있는 것이 익숙해져서 오래되면 저절로 걸림없이 트일 것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힘들지 않음을 느낄 때가 곧 이 도를 배움에 힘을 얻는 곳입니다. 힘을 얻는 곳에서 무한히 힘들지 않으며, 힘들지 않은 곳에서 다시 무한한 힘을 얻습니다. 이 도리는 남에게 말해 줄 수도 없고, 남에게 보여 줄 수도 없습니다. 힘들지 않은 것과 힘을 얻는 것은 마치 사람이 물을 마셔서 그 차가움과 따스함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묘희는 일생동안 다만 힘들지 않은 곳을 사람들에게 가리켜 주었을 뿐, 수수께끼를 붙잡고 이리저리 헤아리도록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단지 이렇게 수행할 뿐이고, 이 밖에 따로 요상하고 괴상한 일을 만들 것은 없습니다. 내가 힘을 얻은 곳은 남이 알지 못하고, 내가 힘들지 않은 곳 역시 남이 알지 못하고, 살고 죽는 마음이 끊어진 것 역시 남이 알지 못하고, 살고 죽는 마음을 아직 잊지 못하는 것 역시 남이 알지 못합니다. 다만 이 법문(法門)을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 줄 뿐, 따로 전해 줄 현묘하고 기특한 것은 없습니다.
묘명거사가 반드시 묘희처럼 수행하고자 한다면, 다만 이 말에만 의지하시고, 다시 다른 도리를 찾을 필요는 없습니다. 참된 용(龍)이 가는 곳에는 구름이 저절로 따라오는데, 하물며 신령스럽게 통하는 광명(光明)이 본래 저절로 있는 경우에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보지 못했습니까? 덕산(德山) 스님이 말했습니다.
“그대가 다만 마음에 일이 없고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면, 텅 비면서도 신령스럽고 텅 비면서도 묘하다.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그 근본과 말단을 말한다면, 모두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이것이 이 도를 배우는 중요한 길인 일곱 번째 본보기입니다.
⑧여덟 번째 본보기 =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스스로 세속을 떠맡을 것이다
위와 같은 7개 본보기가 부처에 머무는 병과 법에 머무는 병과 중생에 머무는 병을 한꺼번에 다 말했으나 다시 여덟 번째 본보기가 있으니, 도리어 묘원도인(妙圓道人)에게 묻기바랍니다. 다시 묘원도인을 대신하여 한 마디를 말합니다.
“큰 깨달음을 그대가 얻지 못한다면, 잡다한 세속을 그대 자신이 떠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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