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절도 스님도 없는 돌궐(투르크)족이 사는 곳
호국(胡國) 이북은 북쪽으로는 북해에, 서쪽으로는 서해에, 동쪽으로는 중국에 이르며, 그 이북은 모두 돌궐(突厥, 투르크 Turk)족이 사는 지역이다. 이들 돌궐족들은 불법을 알지 못하며 절이나 스님들도 없다. 옷 입는 복장은 모직 외투와 모직 적삼이며 고기를 먹는다. 성곽을 거처로 하지 않고 전포로 천막을 쳐 집으로 삼는다. 거주할 곳을 찾아다닐 때는 이 천막을 몸에 지니고 물과 풀을 따라 다닌다. 남자들은 모두 수염과 머리를 깎고 여자는 머리를 기른다. 언어는 다른 나라들과 같지 않다. 이 나라 사람들은 살생을 좋아하고 선악을 알지 못한다. 땅에서는 낙타, 노새, 양, 말 종류가 많이 난다.
又從此胡國已北 北至北海 西至西海 東至漢國 已北總是突厥所住境界 此等突厥不識佛法 無寺無僧 衣著皮毬疊衫 以虫爲食 亦無城郭住處 氎帳爲屋 行住隨身 隨逐水草 男人並剪鬚髮 女人在頭1) 言音與 諸國不同 國人愛殺 不識善惡 土地足駝騾羊馬之屬 1) 頭는 髮의 誤字인 듯
◎ 해설 : 이 장에서 말하는 북해와 서해는 아랄해와 지중해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아랄해는 지금의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 두 나라의 영토에 걸쳐 있는 바다이다. 돌궐(突厥 : Turk)은 6세기 중엽부터 몽골고원을 중심으로 흉노에 이어 두 번째로 통일된 유목제국을 세워 약 200년간 중앙아시아일대를 장악했던 민족이다. 처음 나라를 세운 건국자가 누구인지 밝혀지지 않아 건국 초기의 역사가 확실하지 않다. 다만 오르콘(Orkhon)에 돌궐 비문이 남아 있어 이를 연구한 학자들의 설명은 6세기 중엽 수령 부민(Bumin)이 초원로를 장악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한다. 새로운 초원의 지배자가 된 토문은 자신을 ‘일 카간(Il Qaghan: 伊利可汗)이라 부르고 수도를 오르콘 강 유역의 외투켄(Outiken)에 정하였다. 오르혼 강변에서 발견된 돌궐비문은 돌궐제국의 건국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록을 전하고 있다 한다. “위로는 푸른 하늘과 아래로는 적갈색 땅이 창조되었고, 이 사이에 인간의 아들들이 태어났다. 인간의 아들들을 위해 우리의 위대한 조상인 부민 카간(Bumin Qaghan)과 이스테미 카간(Istemi Qaghan)이 군림 하였다. 이들이 군림하시면서 돌궐민족의 국법을 잡아 주셨고 세워 주셨다. 그때 사방은 모두 적들이었다. 그분들은 군대를 이끌고 사방에 있는 적들을 토벌하여 복속시켰다. 그들의 머리를 숙이게 하였고 무릎을 꿇게 하였다. 조직이 없는 상태로 살아가던 돌궐민족을 잘 조직해 다스렸다. 그분들은 현명하고 용감한 군주들이셨으며 신하들도 현명하고 용감하였다. 왕족들과 백성들도 융화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그분들은 나라를 잘 다스렸다. 나라를 다스리고 법을 세웠다.” 돌궐은 성립초기부터 이원적 통치 체계를 갖추어 부민 가한은 동쪽을 통치하고 동생 이스테마는 서쪽을 지배하였다. 이러한 통치구조가 나중에는 결국 제국의 분열을 가져온다. 3대 가한 목간(木杆 可汗재위553~572)이 나라의 기틀을 굳건히 세웠다. 그는 영토를 확장 서역제국을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하고 동으로는 거란을, 북으로는 키르기스를 정복하여 돌궐의 판도를 바꾼다. 결국 돌궐의 세력이 동으로는 요동만, 서로는 카스피 해, 북으로는 바이칼 호, 남으로는 고비사막에 까지 이른다. 목간 가한은 제국을 구역을 나누어 중앙과 동․ 서․ 남부 서부변경부 등으로 5부로 나누어 통치하면서도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목간 가한이 죽은 후 타발(他鉢)가한이 즉위한 후에도(재위 572~581)돌궐의 발전은 계속되었다. 동쪽으로 중국 북방 변경까지 세력이 확대되어 중국과 마찰을 초래했다. 또 타발 가한은 불교를 장려하여 불경을 번역하기도 하였다. 타발 가한의 사후 가한 승계문제로 분란이 일어나 결국 583년 제1돌궐 제국은 시파라(始波羅재위 581~587)를 가한으로 하는 동돌궐과 대라편(大邏便)을 가한으로 하는 서돌궐로 분열되었다. 이후 7세기 중엽에 당의 의해 멸망될 때까지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다. 수나라와 군신관계를 맺고 있던 동돌궐이 수말 당초에 내분에 휩싸이다가 630년 당나라 이정(李靖)이 이끌고 간 토벌군에 의하여 힐리(頡利재위 620~634) 가한이 생포 되고부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한편 서돌궐은 594년 당시 중국에 망명해 있던 이스테미의 아들 달두(達頭재위576~603)가 가한으로 등극한 이래 서투르키스탄의 여러 민족을 복속시키고 돌궐의 재통일을 시도 하였다. 그러나 그가 603년 토욕혼(吐浴渾)의 반란을 평정하다 전사하자 권력 다툼이 일시 재연되다가 618년 통엽호(재위 618~630) 가한이 등극하여 수습되었다. 통엽호는 숭불정책을 써 불교를 크게 장려하였다. 현장이 구법도중 통엽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서돌궐도 통엽호 가한이 피살된 후 내분이 일어나 국력이 급속히 기울여져 당나라의 정벌군에 의해 망하고 만다. 이 해가 658년이었다. 이후 돌궐족은 당으로부터 박해를 당한다. 그러다 제2 돌궐이 다시 부흥한다. 중국에 저항하면서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던 돌궐이 골탈록(骨咄祿재위 682~691))을 중심으로 682년 막남(漠南) 지역에서 제2 돌궐재건에 성공하였던 것이다. 이 제2 돌궐은 골탈록 사후에 등극한 묵철(黙啜재위 691~716) 가한에 의해 다시 나라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쿠드르계 부족연맹체인 회흘(回紇), 복고(僕固), 혼(渾), 발예고(拔曳固), 동라(同羅), 사결(思結), 계필(契苾), 아포사(阿布思), 골륜옥골(骨崙屋骨) 등 9성을 복속시키고 국력을 크게 신장하였다 그러나 발예고에 반란이 일어나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묵철이 피살되자 골탈록의 아들 비가(毗伽: 재위716~734))가 가한으로 즉위한다. 이 비가 가한의 치세 때 혜초가 이 지역을 지나며 돌궐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였다고 보아지는 것이다. 비가 가한은 친중국정책을 쓰며 나라를 이끌어 갔지만 734년 신하에게 독살되고 만다. 그리하여 제2 돌궐도 망하고 위구르제국이 일어나게 된다. 돌궐은 중앙아시아 유목민족 중에서 최초로 문자를 만들어 사용한 민족이다. 제2 돌궐제국시대 비문을 남긴 것들이 있어 후대에 와 이를 통해 돌궐의 역사를 추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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