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진(朴昊鎭), 세계에 던져지고,
세상과 자웅을 겨루다가 하느님이 그를 부활시키다.
1988년 11월 19일 서울특별시 관악구에서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있었다. 어머니의 따뜻한 뱃속에서 밀어진 사내아이……. 나의 부모는 특이할 것이 없는 386세대였다. 아버지는 내가 태아나기 전부터 심사숙고하여 자신이 직접지은 이름 호진으로 아기를 불렀다. 이 ‘호진(昊鎭)’이라는 뜻은 ‘하늘 호’에 ‘진압할 진’으로 하늘을 진압한다, 누른다는 뜻이다. 이름을 따라 세상을 잡아먹을 듯이 성장해 나갔다. 그렇게 8개월이 지나 외가 친척들과 하계휴가가게 되었다. 그런데 지방의 사찰에서 장이 꼬이게 되어 근처 병원으로 갔으나, 그 의원의 기술적 한계로 몇 시간을 더 허비한 후에 근처 종합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비수술적 방법으로 장을 풀려고 했으나, 풀리지 않아 결국 개복수술을 시술 받게 되었다. 장이 꼬인 지 20시간이 흐른 후 라서 위험한 상황이었다.(장은 꼬인 후 24시간 이내로 풀어주지 못하면 썩기 시작한다) 이 수술 중 아버지와, 큰 외삼촌이 나를 잡아 수술대에서 고정을 하려 하였지만, 초인적인 힘을 썼는지, 도저히 나의 힘을 버티지 못해 작은 외삼촌, 이모부까지 잡게 되었다고 부모님께서 말씀해 주셨다. 이제야 되돌아보며 느끼는 것이지만, 하느님께서 나를 살려주셨음을 느낀다.
유아기 시절에는 신앙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며, 비그리스도인들의 가정교육과 같이 피아노, 웅변, 속셈, 태권도 등을 배웠다. 이 시절을 되돌아보면 결코 하느님의 손길이 없지는 않았다. 아주 사소한 배움 속에 하느님의 사랑이 녹아 있었다. 부모님께서 의도하시지는 안았을 수도 있지만, 태권도를 배우며 ‘아버지, 어머니’라는 단어를 배우고 또래가 쓰던 ‘아빠, 엄마’를 쓰지 않으면서 예의 있는 아이로 많은 이웃의 사랑을 받았다. 또한 웅변을 배우며 누구와 이야기를 해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하고, 말하는 것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느님께서는 서서히 나를 교회로 부르고 계셨다.
하느님 존재를 믿고, 그 존재가 무엇인지 알게 되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고, 어머니의 치마폭에서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로 우등생으로 학교를 다니던 중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나와 동생을 이끌고 학교 뒤 공사장 옆 가건물로 가셨다. 그 건물 안은 가건물임에도 불구하고 따뜻함과 성스러움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 느낌 속에서 같은 학교에 다니는 친구와 옆집 형, 누나가 미사를 드리고 있었으나, 무지 속에 있던 나는 그곳이 성당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마냥 또래 친구들이 많이 있고 놀고 있었을 뿐 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매주 토요일 13시까지 데려다 주셨고, 시나브로 친구들을 사귀고, 교리를 배우면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배우기 시작 하였다.
힘만 센 장난꾸러기, 신부님이 멋있어 복사에 입단하다.
초등학교 3학년, 개근으로 세례를 받고 첫 영성체를 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복사단장 선생님께서 복사를 해보지 않겠느냐는 권유를 받게 되었고, 나와 함께 성당에 다시 다니기 시작하시며 교사를 하시던 어머니께서도 꼭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당연히 복사단에 입단을 하게 되었고, 미사 때 가장 가까이에서 신부님을 도와드리면서 자연스럽게 신부님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되었으나, 막연히 멋있다는 것 하나로 신부님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학년 복사 중에서도 남달리 키가 크고 덩치가 좋았던 나는 본당의 성시간, 십자가의 길, 성체강복 등 행사에서 복사를 자주 맡게 되었다. 그러나 힘만 센 장난꾸러기였기에 캠프나, 복사연수 등에 참여해서는 누구보다도 먼저 사고를 냈고, 이리저리 도망 다니는 신세였다. 기억에 남지는 않았지만 후에 들은 이야기로는 유승학 신부님, 김덕원 신부님을 힘으로 물 먹인 아이는 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성당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성당은 나에게 놀이터이자 안식처 피난처가 되어갔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빛으로 인도하신 하느님
하늘이 하루가 다르게 가까워지던 초등학교 6학년부터 중학교 3학년까지 하느님의 손길은 이곳저곳에서 나를 도와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에 미치도록 좋아하던 이성친구가 있어 그 친구에게 고백을 한 기억이 있다. 그 친구와 지내며 사랑까지는 아니지만, 사심이 가득하게 좋아하는 감정을 경험했다. 친구 집에 자주 가서 놀기도 하다 보니 내 기억에는 없지만, 그 친구 어머니와 대화를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 대화중에 기억에 남는 것을 후에 친구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이 “너 ○○와 사귈 때에 ‘나는 신부님이 되려고 해, 그래서 너랑은 잠시 만나는 거야.’라고 이야기 했는데 기억나니?”였다. 이 이야기 덕분에 성소에 고민을 하던 대입시기에 나를 잡아주는 말이 되었다. 그런 마음으로 중학교에 올라가니 예비신학생 모임이 있었고 그곳에서 지금의 신학교 동기인 김현재, 이민재, 신동휘등과 만났다. 중학교에서 덩치가 크고 늙어 보인다는 이유로 속칭 일진회에 들어가게 되었다. 하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마음속에 들어오신 예수님 덕분인지 누구를 다치게 하거나, 행패, 금전거출은 하지 않았다. 흡연만 조금 했을 뿐이다. 일진회와 예비신학생 모임 이 두 가지 중 일진회는 사제의 꿈이 있었기에 1년만 활동을 하다가 탈퇴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하느님께서 예신 친구들과의 관계 속에서 나의 정체성을 찾게 해 주었다. 예신 친구들과 만나면 담배를 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그 이야기의 주된 주제는 장래희망이었으며, 그 장래희망은 신부님이었다. 일진회에 들어갔을 때 잘 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었지만, 나의 마음속의 하느님께서 나를 잡아주셨기에 지금의 내가 있게 되었다.
사회와 교회 속에서의 갈등, 그리고 세뇌
질풍노도의 시기가 끝나갈 고등학교 3학년 가장 큰 시련이 있었다. 그 것은 ‘다수가 선택하는 사회인가?, 소수가 선택하는 교회인가?’라는 문제였다. 수능이 끝나고 대입원서를 제출하기 시작하니, 마음 한 구석에서 숨어있던 사회에 대한 열망이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곧 바로 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사제의 길을 걷느냐?, 일반 인문 대학교로 진학하여 공부를 하다가 신학교에 가느냐?’라는 고민이 화두였다. 그래서 주임신부님이셨던 윤승일 유스티노 신부님과 상담도 해보고, 부모님과도 상담을 했지만 끊임없이 나를 괴롭혔다.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나에게 구원의 손이 다가왔다. 그 손의 주인공은 당시 대학원 1학년 이었던 정성종 요한 베르크만스 신부님이셨다. 정성종 신부님께서는 내 이야기를 듣고서는 무조건 신학교에 들어와야 한다고 하셨다. 이거는 상담이 아니라, 그냥 명령이었던 것이다. 그 후부터 맛있는 것도 사주시기 시작하셨다. 만나면 항상 하시던 말씀은 ‘신학교에 무조건 들어와야 한다, 딴맘 먹지 마라.’였다. 나를 이끄는 것이 아니라, 그냥 등을 떠미는 구원의 손이었다. 귀에 딱지가 앉도록 신학교 가야한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자연스럽게 신학교에 원서를 제출했다. 무슨 세뇌를 당했던 것 같이 말이다. 그러나 그 세뇌는 하느님의 부르심임을 이제야 느낀다. 신부님을 통해, 세뇌라는 방법을 통해 구원의 손을 체험하다니 나도 참 신기하다.
“엘리, 엘리 레마 사박타니?”(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지금까지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하느님께 감사하는 글이었다. 하지만 내 삶의 비구원적 체험을 적고자 한다.
1997년 대한민국은 IMF를 맞았다. 나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으로 학교에서 활발하게 생활하고 있으나, 아버지께서는 정리해고를 당하셔서 실직을 하게 되었다. 매일 아버지께서는 술을 드시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어머니와 불화가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자고 있던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와 어머니께서 다투시는 소리였다. 커튼으로 보이는 실루엣에 두 형상은 서로 몸싸움을 하는데, 어머니의 목소리 “죽일 테면 죽여봐!, 내가 너 때문에 미쳐!”후에 아버지의 그림자에서 쇳소리와 함께 날카로운 것이 바닥으로 던져지는 것을 보았다. 아버지께서는 “너나 나나 다 죽자, 애들도 다 같이 죽자.”하셨다. 실루엣이라 다행이지만 눈앞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상상하기도 싫지만, 몇 주후 결국 보았다. 아직도 그 기억만 하면 치가 떨린다. 그 때 하느님은 어디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 악몽이 조금씩 잊히기 시작할 즈음, 어김없이 약주를 하시고 오신 아버지께서는 다짜고짜 나와 동생을 끌고서는 집 앞 사거리의 중앙에 세우셨다. 그러시더니 갑자기 옷을 벗으라고 하셨다. ‘옷을 벗어?’ 이해 할 수 없는 명령, 하지만 벗었다. 아버지도 같이 벗으셨다. 큰소리로 우시며, 한오백년을 부르시며……. 나중에 옆집이웃이 와서 옷을 입히고 일을 마무리하였지만 이 치욕적인 기억 속에 하느님은 어디에 계신지 모르겠다. 이 사건, 아니 악몽은 내가 삶을 살면서 두고두고 묵상하고 해결해야한다.
그렇게 지내시던 아버지께서는 세례를 받으시고, 신사가 되시는 것 같았다. 술도 내가 신학교에 입학을 하면서 공식적으로는 끊으셨다. 하지만 성당형제님들에게 사기도 당하고, 상처도 받으시면서 냉담을 하시게 되었다. 가정경제는 창업을 하시면서 안정되었지만, 아버지의 상처를 깊어만 지신 것이다. 결국 몇 해 전부터는 술을 몰래 드신다. 몰래 드시는 것을 좋지만, 항상 인사불성이 되신다. 어머니도, 나도, 동생도 못 알아볼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일이 두 달에 한번은 일어났다.
이러한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신 어머니의 몸에는 결국 대장암이 생겼다. 남들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암, 나는 학부 1학년 2학기를 지내고 있었기에 외부와 전화도 할 수 없었기에 모르고 있었다. 후에 방학을 해서 갔을 때, 어머니께서는 약냄새가 진동하는 병실에, 그것도 돈이 아까우셔서 8인실에서 누워계셨다. 하느님이 원망스러웠다. 하느님께서는 진정으로 나를 사랑하시는가?, 사랑한다면 어찌하여 이런 일이 내게 벌어진다는 말인가?
이런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께서 퇴원을 하시고, 몸이 괜찮아 지시자, 아버지의 악습은 고쳐지지 않았다. 내가 국방의 의무를 하고 있을 때에도, 신학교에서 지내고 있는 지금도, 나의 가족 안에서 하느님의 손길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신을 찾아 떠나는 신학, 나를 알고 싶어 선택한 심리 상담
비구원의 체험 속에 있는 나는 애초 신부수업 한 부분으로 보았던 신학을, 믿는 대상인 그분을 찾기 위해, 즉 신앙하기 위해 공부를 하게 되어간다. 내가 완벽히 알 수 없는 그분을 조금이라도 더 알기 위해서……. 하지만 스스로를 모르고서는 그분께 다가갈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학교에서 진행 중인 심리 상담을 신청 하였다. 많은 상처를 받고 살아왔다고 생각하는 내가 어떤 모습을 감추고 있는 것인지 나도 모르기에 이번 심리 상담에서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해 보고자 한다.
저의 삶을 되돌아 볼 수 있도록 과제를 내주신 송용민 사도요한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