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 지훈이에게 쓴 편지
♥내 아들 지훈아..
나의 분신인 아들아..
*나의 성격 형성기부터 얘기 하련다.~
한 많은 세월 조선에서 삶을 시작한지 5년만에 우리 가정이 풍지박산의 시련을 겪고 형은 형 대로 아버지는 홧병으로 떠나시고, 유난히 수즙음이 많던 10대에 광주서중학교에 합격하고도 진학을 포기하고 남평초등학교 급사로 취업, 학교종을 치고 학교 선생님들의 심부름 등 급료를 모아 1년후, 사범학교에 합격하여 당시 '호남신문' 배달을 하며 어려운 시기 친구와 자취생활도. 또 남평에서 4km거리를 왕복하는 기차통학을 하면서 졸업하여 無力한 가정환경이라, 진도군.영암군을 돌아 나주군으로 돌아와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교직생활을 영위하는데 특히 우리가정은 월북자 가족(형)이라는 연좌제의 사슬에 묶인시절 수시로 경찰서 보안과에 출두지시.. 남파간첩 여부를 조사 받는 엄혹한 시대를 헤쳐나온 恨 많은 청년시절 한때는 늙은 어머니만 맡아줄 이 있다면 차라리 먼 곳으로 떠나고 싶었던 시절을 마음 추스리고, 천주교에 스스로 찾아가 입교하여 얼마 안돼 너의 어머니를 만나 신앙의 은혜로 결혼하여 곧 바로 아들 둘을 받아서 참으로 기쁨속에 보람있고 행복한 세월 잘 살아왔다.
나는 어려서부터 가난과 시대의 고통을 몸으로 떼우시며 조선에 오신것을 한탄하시는 부모님의 한숨소리에 순응하기도 하고 아버지의 치미는 울화에 불같은 호령에 무릅꿇고 감내하는 여리고 소심한 성격으로 성장했었다. 그가운데 때로는 정의감에 전율하는 투사형을 지향하며 문학과 미술에 전념하기도 했고(文壇,畵壇에 등단하지 않았지만)~
퇴임후, 소망하던 일은 시골에서 큰 병없이 산길과 밭 언저리를 다니며 좋은 공기 마시고 순박하게 살아가다 적당한 시기에 두 아들과 근처에서 함께 사는 순박한 일념 하나로 여생을 편안하게 살다 두 아들의 전송을 받으며 이승을 떠나고 싶었다.
그동안 날마다 눈 뜨면 우리 '가정을 위한 기도' 드리는 일과로 하루가 시작되고 하루가 저물어 갔다. 그래도..
언젠가 너희도 냉담을 접고 하느님을 잘 따르는 축복을 받는 자녀가 되어 함께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간간이 외식도 즐기는 날들 기다리면서..
그런데 할 말이 없다.
아버지의 성격이.. 아버지의 언행이 너를 이 지경으로 내 몰았다는 아들의 충고는 너무도 무섭고, 서럽고 원통하구나.
나는 절대로 우리 가정을 잊고 내 인생만 생각하고 살아오지 않았다.
내 인생은 내 가족이 전부였다. 어제도 오늘도 또 내일도..
한 사람이라도 없으면 나는 살아나지 못한다.
유독~내 깃발 같은 아들, 지훈이가 없는 세상은 상상할 수 없다.
하늘보다 더 사랑하는 내 아들 지훈아!!!
아버지의 간절한 소망과 외침을 들어다오.
너의 의지와 믿음과 인내로 굳건히 일어서다오.
어머니의 애절한 기도소리를 들어다오.
네가 아버지에게 원한 이야기는 다 가슴에 담아 들은대로 실행하겠다.
부탁한다.
하느님은 다 용서하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신다.
병마를 물리치고 잘 이겨 주리라 믿고 또 믿는다.
지훈아..사랑한다.
<아버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