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분 |
동 영 상 자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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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
동춘당은 조선시대의 명유 동춘 송준길선생이 그의 부친 송이창이 지은 건물을 1643(인조21)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한 건물로서 우리 고을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단아한 기품의 선비가 좌정한 듯 저만치 물러나 있는 동춘당은 조선시대 별당건축의 진수를 보여준다. 팔작지붕의 절묘한 곡선과 그 안에 배치된 공간구성은 형언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배어있다.
동춘당의 구조는 전면 3칸 측면 2칸에 홑처마 팔작지붕으로 좌측 한 칸은 온돌방이고 우측 두 칸은 대청마루인데 대청창호는 전면과 우측면에 ‘들어열개문’을 설치하였다. 들어열개문을 열어 들쇠에 걸면 내부의 공간과 외부의 공간이 하나가 되어 대청에 앉아있으면서도 내부공간이 아닌 자연으로 동화되는 것이다.
동춘당의 편액은 동춘 선생 사후 1678년 우암 송시열 선생이 쓴 것으로, ‘동춘’ 이란 만물과 더불어 봄(仁)을 같이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치장이나 꾸밈없는 동춘당의 간결한 멋은 별당건축의 검소하고 아름다움을 지닌 대덕의 대표적인 건축유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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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족산성 |
대덕구 장동 산디마을의 동북 편 계족산 정상에 위치한 계족산성은 삼국시대 축조된 것으로 전해지는 유서 깊은 석축산성으로 성의 둘레가 1,037미터로 대전지역에 소재한 30여 개의 산성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계족산성은 백제와 신라의 접경지대로 산성에 올라서면 당시 신라의 영토였던 동쪽의 충북 옥천군과 북동쪽의 보은군이 마주하고 있어 군사 요충지임을 알 수 있다. 계족산성은 옹산성으로 추정되는데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부흥군의 주요거점으로 김유신 장군이 이끄는 신라군과 맞서 싸우다 수천 명이 전멸당한 백제인의 한과 넋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산성내부에는 석축성벽을 비롯하여 건물지 문지 봉수대 저수지 우물지 등의 시설물들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는데 성 내부의 평탄한 곳에는 대략 10여 개소의 건물지가 존재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지에서 출토된 유물은 토기와 자기류로 토기는 고려시대에 완, 동, 이, 병 등이 있으며 자기류는 순청자와 삼강청자들로써 완이나 잔 병 등이 주요 기종을 이루고 있다. 출토된 기와는 선조문 격자문 어굴문 계통으로 구분되며 이외에도 철제품과 동경이 출토되었다. 또한 남문지 부근 능선에 위치한 봉수대에서는 조선시대에 백자 옹기 기와 편들과 삼국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의 기와와 토기들이 출토되었다.
13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성벽의 일부가 남아있는 것은 돌을 엇갈리고 맞물려 쌓는 모 쌓기 기법의 축조방식으로 흙이 닿는 뒷면까지 이어져 쌓았기에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원형의 성벽은 30여 미터만 남아있어 당시의 산성축조 방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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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분 |
동 영 상 자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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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동 돌장승 |
법동 사거리에서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 돌장승 2기가 좌우에 배치되어 있는데 대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장승으로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이 장승은 나무 장승이었으나 약 300년 전 이 마을에 사는 갑부 송민노 라는 사람이 사재를 털어 돌장승을 깎아 새운 것으로 전해진다.
장승은 마을의 액운을 막고 주민의 안녕과 건강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입구에 세웠는데 이 마을 주민들은 매년 정월 열나흘 날 모여 산신제를 지내고 내려와 이곳에서 장승제를 지낸다.
법동 돌장승은 화강암으로 윗부분에 얼굴을 새기고 남 장승 가슴에 천하대장군, 여 장승 가슴에 지하 대장군이란 글을 새겼다. 또 남 장승 옆에는 길쭉하게 생긴 선돌이 있는데 남성을 상징하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고, 여 장승 옆에는 넙죽한 선돌이 있어 여성을 상징하는데 선돌을 장승의 아들딸 이라 하여 아기장승이라고도 부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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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용억 가옥 |
동춘당을 지나 동쪽으로 백보 정도 옮기면 시 민속자료로 지정된 송용억 가옥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옛집은 동춘 송준길 선생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여 살던 집으로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17세기 양반가옥의 특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된다.
가옥의 일각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 사랑채 소대헌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 사랑채 오숙재가 있으며, 오숙재 뒤에는 안채가 있고 그 뒤편에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단촐 하면서도 섬세한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소대헌은 송준길의 증손인 송요화가 1714년에 지은 건물로 자신의 호를 따서 소대헌이라 하였다.
건물의 구조는 전면 5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이고, 오숙재는 전면 8칸, 측면 2칸 집이다. 안채는 ‘ㄷ’자형으로 여느 사대부집과 다름이 없으나 이곳은 여류시인 호연재 김씨의 체취가 남아있는 곳이다. 호연재 김씨는 송요화의 처로 호연재 유고를 남겼으며 조선시대 난설헌 허씨, 옥봉 이씨, 죽서당 박씨의 맥을 잇는 당대의 여류문객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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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현성 |
가양공원에서 추동으로 넘어가는 비래동 질티재 고개 북쪽 산 정상에 위치한 질현성은 백제가 신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시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성곽의 둘레는 약 800미터이며 남쪽에 성문자리가 있고 북쪽으로 이어진 능선에는 작은 고루들이 있다.
성안의 평탄한 지역은 건물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며 북벽 내 가장 높은 곳에 통신 수단이던 봉수대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은 성벽이 무너져 내려 원래의 형태는 확실하지 않지만 동벽과 북벽에는 석축이 남아있어 산성 축조기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질현성은 백제 패망 후 부흥군의 주요 활동지역의 하나였던 지라성에 비정되는 백제인 들의 한이 서린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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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술성 |
읍내동 수척골에 위치한 우술성은 갑천 변에 테뫼식으로 쌓은 토성으로, 대전~신탄진간 국도에서 불과 60~70미터 거리에 있어 접근이 쉬운 곳이다. 지금은 산성의 본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나 산성의 평면 모습은 삼각형 형태이며 성의 둘레는 580미터이다. 산성 북벽의 높이는 2.2미터 남벽은 3.4미터인데 문터는 남문 터 만 확인될 뿐이며 남문을 나서면 향교가 있는 효자골에 이른다.
산성의 남쪽으로는 읍내동 당산이 있고, 서쪽으로는 갑천이, 동쪽으로는 계족산이 위치해 있다. 연축동 산성이라 불리는 이 산성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1,000여 명이 죽고 항복한 백제인의 한이 서린 곳인데 백제시대 우술군의 치소로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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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동 산성 |
이현동 산성은 계족산성 동북쪽으로 길게 발달된 능선을 따라 1.3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 산성이다. 산성은 두 개의 봉우리를 중심으로 축조되었으며, 전체적인 평면은 마치 누에고치와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현동 산성은 지리적인 입지로 볼 때 계족산성에 북쪽을 호위하는 자성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산성은 둘레가 약 300미터에 달하는 테뫼식 석축산성으로 성체는 거의 붕괴되어 그 원형을 파악하기 어렵다. 성내에는 별다른 시설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으나 서벽과 동벽의 중간 쯤 되는 평탄한 지역에 건물지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북쪽 봉우리에 저장시설 또는 고대의 봉수시설로 보이는 흔적이 남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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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래동 고인돌 |
송촌을 지나 경부고속도로 아래 터널을 지나면 계족산 자락의 황학봉 아래 조그만 마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고성이씨 집성촌인 비래 골이다. 새가 날아든 자리라 하여 비래 골이라 불리는 이 마을은 16세기 초 훈련원 주부를 지낸 이계종이 연산군 때 잇단 사화가 일자 화를 면하기 위해 이곳으로 이주하면서 고성이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마을 어귀에는 500년 남짓한 느티나무가 마을의 수호신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매년 정월이면 나무아래에서 거리제를 지낸다. 논가에는 시 기념물로 지정된 고인돌이 놓여있다. 이 고인돌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인 비파형동검, 삼각만 입석촉, 홍도 등이 출토되어 비래 골에는 선사시대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아 왔음을 입증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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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덕향교 |
읍내동 효자골에 위치한 회덕향교는 조선시대 교육을 담당했던 관립학교이자 선현들의 제사공간이다. 회덕향교는 조선 초 창건 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0년 경 선조 때 중건된 후 1812년 순조 때 크게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향교입구에는 지나는 사람은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라는 ‘하마비’가 있고, 바로 뒤쪽에 향교의 경계를 나타내는 홍살문이 세워져 있다. 솟을삼문으로 된 외삼문을 들어서면 교육을 담당하던 명륜당이 있고 여기서 좀 더 오르면 내삼문이 나타난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대성전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곳에 공자를 비롯한 중국의 오성사현과 우리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매년 봄가을에 석전제를 올리고 있다. 18현 중에는 우리 지역의 동춘 송준길, 우암 송시열 선생이 모셔져 있다.
대성전은 맞배지붕으로 단촐 하면서 엄숙한 멋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조선시대 창설한 지방 교육기관이었던 향교는 현재는 교육기능은 소멸되고 제사기능 만이 유지되고 있는 현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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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백정 |
신탄진에서 대청댐까지는 강변도로가 시원스럽게 이어진다. 강 주위에는 용호동, 삼정동, 미호동 등이 있는데 진주 강씨가 터를 잡고 대대로 살아온 전통 마을이다.
대청호 어귀에 이르면 오른쪽 언덕 정상위에 취백정이 위치해 있다. 이 건물은 동춘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고 숙종 때 예조판서를 지낸 제월당 송규렴 선생이 말년에 제자를 모아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취백정은 1701년에 세워졌는데 그 후 정조임금이 사호각이란 현판을 내렸으나 없어지고, 지금은 송규렴 선생이 직접지은 상량문만이 남아있다.
이 건물은 전면 3칸, 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인데, 우측 2칸은 툇마루 달린 마루방을 두었고 좌측 1칸 중 아래는 그릇 등을 넣어두는 토방이고, 위에는 다락방 형식으로 경관이 수려한 금강을 조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취백정에서 수십 보 떨어진 곳에는 미호서원이 있던 자리를 알려주는 ‘미호서원유허비’가 세워져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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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영 상 자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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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 홍원모 영세불망비 및 비각 |
비석군이 있는 동사무소 뒤편 뒷골로 이어지는 길목에 곱게 단청한 어사 홍원모 영세불망 비각이 자리하고 있다. 홍원모는 순조 임금 때 통정대부 승지로 1829년 46세에 암행어사가 되어 10월에 회덕현에 이르렀는데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고 있는 회덕현민에게 선정을 베풀어 그 은덕을 잊지 않기 위해 홍원모가 다녀간 2년 뒤 1831년 마을주민 강덕환이 비를 세우고 1847년 연재호가 비각을 다시 건립했다.
이 비각은 팔각주 죽돌 위에 뿌리기둥을 세우고 사면에 홍사를 둘렀으며 내부에 비가 세워져 있다. 공포에는 화려한 연꽃 봉우리들이 조각되어 있고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단청을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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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직공 충신 정려각 |
송촌동 대양초등학교 앞에는 시 문화재 자료인 이시직 충신 정려각이 자리하고 있다. 송촌에서 태어난 죽창 이시직 선생은 의절이 남달리 뛰어나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장렬하게 순절한 충신으로 선생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다.
정려각은 전면1칸, 측면1칸으로 사면에 홍살을 두르고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단청을 하였다. 내부에는 정려편액과 중수기가 걸려있는데 중수기에 의하면 1751년에 중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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