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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산(谷山) 연씨(延氏)
곡산(谷山)은 황해북도 북동부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고구려 때에는 십곡성(十谷城)이라 불렸고, 748년(신라 경덕왕 7) 십곡성현(十谷城縣)으로 편성되었다가 757년에 진서현(鎭瑞縣)이라 개칭하여 영풍군(永豊郡)이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곡주(谷州)로 개편되고 995년(성종 14)에는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1393년(태조 2)에는 곡산으로 개칭하고 부(府)로 승격하였으나, 태종 때는 곡주(谷州)에서 다시 곡산군으로 격하하였다.
1669년(현종 10) 부로 승격되었으나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곡산군(谷山郡)이 되어 개성부(開城府)에 속하였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황해도로 편입 되었다. 별칭으로는 덕돈홀(德頓忽)·고곡(古谷)·곡성(谷城)·진서(鎭瑞)·상산(象山) 등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 남양에서 계출된 성씨인 연씨(延氏)는 홍농(弘農) 출신 연계령(延繼笭)의 7세손인 연수창(延壽菖)이 충렬왕비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배종(陪從)하여 고려에 와 곡산(谷山)에 정착한 것을 시원으로 한다.
이후 연계령의 11세손인 연주(延柱)가 광록대부(光祿大夫)로 삼사좌사(三司左使)에 오르며 곡성군(谷城君)에 추봉되자 후손들이 곡산을 본관으로 삼았다.
의흥(義興) 예씨(芮氏)
의흥(義興)은 경상북도 군위군(軍威郡)에 속해 있는 지명으로 삼국시대 이전의 역사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고려 초에 의흥군(義興郡)이 되어 1018년(현종 9)에 안동부(安東府)에 속하게 하였고, 1390년(공양왕 2)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부계현(缶溪縣)을 병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이 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의흥군으로 승격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의흥군이 폐지되었고 의흥지역이 군위군에 편입되면서 의흥면이 되었다.
의흥예씨(義興芮氏) 시조 예낙전(芮樂全)은 고려 인종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낸 석학이었다. 그의 선대가 중국에서 왔다고 하는데, 언제 우리나라로 왔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삼국사기》에도 고구려, 신라에 예씨가 있었다는 기록도 있고 경상남도 울주군 천전리 서석에도 예씨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한다. 의흥을 본관으로 삼은 것은 시조 예낙전이 부계군(缶溪君)에 봉해졌기 때문인데, 부계가 의흥의 옛 이름이다.
예씨는 의흥 단일본이다.
오씨(吳氏)
고창 오씨(高敞 吳氏)
고창(高敞)은 전라북도 고창군 고창읍(高敞邑)과 고수면(古水面)·아산면(雅山面) 일대를 아우르는 옛 지명으로 백제 때 모량부리현(毛良夫里縣)이라 하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고창현(高敞縣)이 되어 무령군(武靈郡: 靈光)이 관할하였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고부군(古阜郡)에 속하였다가 1401년(태종 1)에 다시 고창현으로 감무가 파견되었고 1413년에는 현감이 배치되었다. 1895년(고종 32)에 지방제도 개정으로 고창군·무장군·흥덕군으로 나누어져 전주부에 소속되었다가, 1904년에 고부의 부안면이 편입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무장군과 흥덕군을 고창군으로 합병하고, 1916년에 대산면·공음면·상하면의 일부는 영광군에, 영광군의 대마면(大馬面)·홍농면(弘農面)·진량면(陣良面)의 일부는 고창군에 편입되었다. 1935년에 17개 면이 14개 면으로 편합되었다가 1955년 고창면(高敞面)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고창오씨(高敞吳氏)는 고려 정종 때 한림태학사(韓林太學士)를 지낸 오학린(吳學麟)을 시조로 하고 있다. 아들 오질(吳質) 역시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지냈고, 손자 오세문(吳世文)이 승보시(陞補試)에 장원급제하여 동각시학(東閣侍學)에 이르며 가문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그 후 6세손 오계유(吳季孺)는 충숙왕 대에 수충보절좌리안사공신(輸忠保節佐理安社功臣) 삼중대광도첨의(三重大匡都僉議) 찬성사(贊成事)에 올랐고 모양군(牟陽君)에 봉해졌다. 모양은 고창의 옛 이름으로 이로인해 관향을 고창으로 하게 되었다. 그 이후 대대로 관로에 두루 진출하여 가문을 빛냈다
군위(軍威) 오씨(吳氏)
군위(軍威)는 경상북도 중앙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신라의 노동멱현(奴同覓縣: 일명 如豆覓縣)이었는데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적라현(赤羅縣)으로 개칭하여 효령현(孝靈縣)·부림현(富林縣)과 함께 숭선군(崇善郡: 善山)의 관할이 되었다. 군위현(軍威縣)의 명칭에 대한 일설로는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할 무렵 후백제군을 치기 위해 이 지역을 지날 때 고려군의 위세가 당당함을 칭송하기위해 촌장에게 군위라는 이름을 지어준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1018년(현종 9)에는 군위·효령·부계현(부림현)이 상주목(尙州牧)에 속하였으며, 1143년(인종 21) 일선군(一善郡) 소속으로 개편되었다. 1390년(공양왕 2) 효령현은 군위현으로, 부계현은 의흥군(義興郡)으로 각각 통합되어 감무가 파견되었다. 1413년(태종 13)에는 의흥군이 현으로 강등되었다. 1896년(고종 33) 군위현(軍威縣)과 의흥현이 군으로 개편되었으며,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의흥군과 의성군의 일부가 군위군으로 병합되었다. 1979년에는 군위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군위오씨(軍威吳氏) 시조 오숙귀(吳淑貴)는 고려 때 비안군(比安君)에 봉해진 인물로서 동복오씨(同福吳氏) 시조 오현좌(吳賢佐)의 아들이다. 따라서 군위오씨는 동복오씨에서 분적되었다고 할 수 있으며 후손들이 군위에 세거하면서 관향으로 삼은 경우이다. 이후 명망을 떨치게 된 것은 6세손 오인철(吳仁哲)이 고려조에 사복(司僕)을 지냄으로써 이다.
군위오씨는 동복오씨(同福吳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나주(羅州) 오씨(吳氏)
나주(羅州)는 전라남도 나주시(羅州市) 지역으로 백제 때 발라군(發羅郡)으로 불리었고, 뒤에 죽군성(竹軍城)으로 바뀌었다. 백제 멸망 후 당나라가 이곳에 대방주(帶方州)를 설치하였으며, 686년(신라 신문왕 6)에는 통의군(通義郡)으로, 757년(경덕왕 16) 이후로는 금산군(錦山郡) 또는 금성군(錦城郡)으로 부르며 무주(武州: 光州)의 관할로 두었고, 회진현(會津縣)·여황현(艅艎縣)·철야현(鐵冶縣) 등이 부속으로 영입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나주로 지명이 바뀌었고, 983년(성종 2)에 나주목이 설치되었다. 995년(성종 14)에는 나주진해군절도사(羅州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1018년(현종 9) 다시 나주목으로 고쳐 5개의 속군(무안·담양·곡성·낙안·남평)과 11개의 속현(철야·반남·안노·복룡·원율·여황·창평·장산·회진·진원·화순)을 거느렸다. 1310년(충선왕 2)에 지주사(知州事)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승격하였다. 고려·조선시대를 통하여 주로 목(牧), 부(府)로서 전남지역 행정의 중심지를 이루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로서 나주군 등을 관할하였고, 1981년 나주읍과 영산포읍이 통합하여 금성시로 승격하여 나주군에서 분리되었고, 금성시는 1985년 나주시로 개칭되었다. 1995년 나주시와 나주군이 통합되어 나주시로 개편되었다.
나주오씨(羅州吳氏)는 고려시대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오언(吳偃)을 일세조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 오언의 선대는 신라 지증왕 1년에 우리나라에 온 중국 사람인 오첨(吳詹)이라 한다. 그 이후 오숙규(吳淑珪)가 분적하여 나주오씨의 세계를 이루었다.
그러나 오숙규 이후 4대의 세계가 분명치 않아 오언을 기세조로 하고 있다. 그 후 5세손 오자치(吳自治)가 조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을 세운 후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져 그 후손들이 나주를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현재 같은 뿌리이면서도 관향을 금성(錦城)이라 부르는 후손들이 있는데, 이것은 금성이 나주의 옛이름이기 때문이다.
낙안(樂安) 오씨(吳氏)
낙안(樂安)은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樂安面)·외서면(外西面)과 보성군(寶城郡) 벌교읍(筏橋邑) 일대를 통칭하던 지명이다. 백제 때에는 분사군(分沙郡: 分嵯郡·夫沙郡·波知成)이었다.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 분차주(分嵯州)를 설치하고 귀차(貴且)·수원(首原)·고서(皐西)·군지(軍支)를 영현으로 두었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757년(신라 경덕왕 16) 분령군(分嶺郡)이라 했고, 940년(고려 태조 23)에 낙안군으로 개칭했으며, 1018년(현종 9)에 나주(羅州)의 속군이 되었다. 1172년(명종 2)에 낙안현으로 감무를 둠으로써 독립했으며, 후에 군으로 승격하였다. 부사(浮槎)·낙천(洛川)이라고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낙안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 낙안군이 되었다. 1908년(융희 2)에 군면 폐합이 실시되어 낙안군이 폐지되고, 내서·외서·동상·동하·초상·초하·읍내 등의 면은 순천군으로, 남상·남하·고상·고하 등의 면은 보성군으로 나누어 편입되었다.
낙안오씨(樂安吳氏)는 고려시대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역임하고, 외적을 토벌한 공으로 낙안군(樂安君)에 봉해진 오사룡(吳士龍)을 시조로 하고 있다. 그는 원래 해주오씨(海州吳氏)인데, 후손들이 그의 봉호를 따라 관향을 삼은 것이다.
시조 오사룡은 해주오씨 오응(吳膺)의 32세손으로 낙안군으로 봉해졌고 이후 후손들이 낙안을 관향으로 삼았으므로 낙안오씨는 해주오씨(海州吳氏)에서 분적된 성씨이다.
동복(同福) 오씨(吳氏)
동복(同福)은 전라남도 화순군(和順郡)에 위치한 지명이다. 백제 때에는 두부지현(豆夫只縣)으로 불리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동복현(同福縣)으로 바뀌어 곡성군(谷城郡)의 영현이 되었다. 1018년(고려 현종 9)에는 보성군(寶城郡)에 편입되었다가 감무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1395년(태조 3)에 화순(和順)에 편입되었고, 1405년(태종 5)에 화순군에 병합되어 복순(福順)으로 개칭하였다가 1416년(태종 16)에는 현으로 복구하였다. 1655년(효종 6)에 화순군에 합속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동복군이 되었고, 1896년에 전라남도 동복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동복군이 폐지되고 화순군에 편입되었다.
동복오씨(同福吳氏) 시조 오현좌(吳賢佐)는 고려 고종 때 동복군(同福君)에 봉해졌다. 그에 따라 관향을 동복으로 한 것이다. 그의 선계는 중국에서 신라 지증왕 대에 우리나라로 건너온 무혜공(武惠公) 오첨(吳瞻)이고, 22세손 오수권(吳守權)은 거란군이 침략하자 당시 병부상서(兵部尙書)로서 아들인 오현보(吳賢輔)·오현좌·오현필(吳賢弼)에게 그를 격퇴하게 하였고 그 공으로 각각 해주군(海州君)·동복군·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또한 이들은 모두 분적하였고 관향은 같은 뿌리를 갖는 것이다.
보성(寶城) 오씨(吳氏)
보성(寶城)은 전라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한 보성군(寶城郡) 지역의 옛 지명으로 마한 54국 중 불운국(不雲國)이었다고 한다. 백제 때에는 복홀군(伏忽郡)이라 불리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보성군(寶城郡)으로 개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다. 고려 태조는 삼양군(三陽郡)이라 하였으며, 996년(성종 15)에 패주(貝州)로 고쳤다가 1018년(현종 9)에 다시 보성군(寶城郡)이 되었다. 1441년(세종 23)에 조양현(兆陽縣)과 복성현(福城縣)을 제외한 대부분의 속현이 흥양현으로 이속되어 면적이 크게 축소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나주부 보성군, 1896년에 전라남도 보성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권역이 다시 확대되었고 1941년에 보성면이 읍으로 승격하였다.
보성오씨(寶城吳氏)는 오수권(吳守權)의 셋째 아들인 오현필(吳賢弼)을 시조로 하고 있다. 오현필은 고려시대 거란의 침입을 막아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이로부터 후손들이 관향을 보성으로 하였다. 3세손 오한경(吳漢卿)은 고려 원종 대에 감시(監試)에 장원급제하여 동궁시학(東宮侍學)에 선발되었고 충선왕 대에 삼사우사(三司右使)를 거쳐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를 지냈고, 문온공(文溫公)에 봉해졌다. 6세손 오사충(吳思忠)은 대사성(大司成)과 좌상시(左常侍)를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 좌명개국삼등공신(佐命開國三等功臣)으로 영성부원군(寧城府院君)에 추증되었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정당문학(政堂文學), 판사평부사(判司平府事)를 지내며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보성오씨는 나주오씨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연일(延日) 오씨(吳氏)
연일(延日)은 경상북도 동해안에 위치한 포항시 영일읍(迎日邑)의 옛 지명으로 신라 때에는 근오지현(斤烏支縣) 또는 오량지현(烏良支縣)이라 불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임정현(臨汀縣)으로 개칭하고, 의창군(義昌郡: 興海)의 영현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영일현(迎日縣: 延日)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에 경주부(慶州府)에 내속되었다. 1390년(공양왕 2)에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다. 조선 초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병마사(兵馬使)가 지현사(知縣事)를 겸하게 하였다.
세종대에 다시 병마첨절제사로 고쳤다가 후에 현감만을 파견하였다. 1732년(영조 8)에 통양포(通洋浦) 아래에 포항창(浦項倉)을 설치해 함경도 진휼(賑恤)의 바탕으로 삼게 함으로써 함경도와 경상도를 연결하는 동해안 해로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동래부 영일군이 되었고, 1896년 경상북도 연일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연일군은 연일면 등 5개면으로 분면되어 흥해·장기·청하군과 함께 영일군으로 통폐합되었고, 1980년 연일면이 연일읍으로 승격하였다. 1995년 영일군이 포항시에 통합되었다.
연일오씨(延日吳氏) 시조 오연경(吳延慶)은 해주오씨(海州吳氏)의 시조 오인유(吳仁裕)의 6세손 효성공(孝成公)의 큰아들로 성품이 강직하여 연일(延日)로 유배, 그 곳에 살게 됨으로써 후손들이 해주에서 분적하여 관향을 연일로 삼았다고 한다.
오연경에게는 오치(吳治), 오흡(吳洽), 오순(吳洵)의 세 아들이 있었다. 큰아들 오치는 아들 오수창(吳壽昌)과 함께 화천(華川)에서 해주오씨를 계승하였고, 오흡·오순 두 아들이 다 같이 연일오씨의 일세가 되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시조를 오흡으로 그 선계는 분명하지 않고 연일에 세거하던 토착사족이라고 하기도 한다.
연일오씨는 해주오씨 오연경이 연일로 유배되면서 분적한 성씨이다.
평해(平海) 오씨(吳氏)
평해(平海)는 경상북도 울진군(蔚珍郡)에 속해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와 신라에 속했을 때의 근을어현(斤乙於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평해로 고쳐 유린군(有隣郡)의 영현으로 하였다. 고려 현종 때 예주(禮州)의 영현이 되었고, 1172년(명종 2)엔 지군사로 승격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울진군 평해면이 되었고, 1963년에는 울진군이 강원도에서 경상북도로 이관되었다. 1980년 평해읍으로 승격되었다.
평해오씨(平海吳氏) 시조 오극중(吳克中)은 고려시대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추증된 인물이다. 그는 해주오씨의 시조 오현보(吳賢輔)의 먼 후손이라 하는데 분명치 않다. 그의 아들 오종인(吳宗仁)은 은청광록대부(銀靑光錄大夫)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을 지냈고 손자 오경(吳璥)은 조선조에 상호군(上護軍)·이부상서(吏部尙書)를 역임하여 가문의 기틀을 다졌다.
함양(咸陽) 오씨(吳氏)
함양(咸陽)은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때는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성(含城)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천령군(天嶺郡)이라 개칭하였고, 이안현(利安縣: 安陰)·운봉현(雲峰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고려 초에 허주(許州)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에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하였으나 1010년(현종 1) 함양군으로 개칭하였고, 1172년(명종 2)에 함양현으로 강등되었다. 1395년(태조 4) 함양군으로 승격하였으며, 1629년(인조 7)에 현으로 바뀌었고 1729년(영조 5) 함양부(咸陽府)로 승격하였다가 1788년(정조 12) 다시 함양군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함양군, 1986년 경상남도 함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안의군(安義郡)에 있던 현내(縣內)·황곡(黃谷)·초점(草岾)·대대(大垈)·지대(知代)·서상(西上)·서하(西下) 등 7개 면을 통합해서 함양군으로 합병하였다. 1933년 위성면이 함양면으로 개칭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통합하여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함양오씨(咸陽吳氏) 함양(咸陽)은 경상남도 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신라 때는 속함군(速含郡) 또는 함성(含城)이라 하였다가,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천령군(天嶺郡)이라 개칭하였고, 이안현(利安縣: 安陰)·운봉현(雲峰縣)을 영현으로 관할하였다. 고려 초에 허주(許州)로 개칭하였고, 983년(성종 2)에 허주도단련사(許州都團練使)로 승격하였으나 1010년(현종 1) 함양군으로 개칭하였고, 1172년(명종 2)에 함양현으로 강등되었다.
1395년(태조 4) 함양군으로 승격하였으며, 1629년(인조 7)에 현으로 바뀌었고 1729년(영조 5) 함양부(咸陽府)로 승격하였다가 1788년(정조 12) 다시 함양군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진주부 함양군, 1986년 경상남도 함양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안의군(安義郡)에 있던 현내(縣內)·황곡(黃谷)·초점(草岾)·대대(大垈)·지대(知代)·서상(西上)·서하(西下) 등 7개 면을 통합해서 함양군으로 합병하였다. 1933년 위성면이 함양면으로 개칭되고, 1957년에는 석복면(席卜面)을 함양면에 통합하여 함양읍으로 승격되었다.
함양오씨(咸陽吳氏) 시조 오광휘(吳光輝)는 도시조 오첨(吳瞻)의 24세손 오현필(吳賢弼: 보성오씨의 시조)의 셋째 아들로 고려시대 좌복야(左僕射)를 지내고, 흥위위상장군(興威衛上將軍)으로서 거란군을 물리친 공으로 추충정란광국일등공신(推忠靖亂匡國一等功臣)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에 올랐으며 함양부원군(咸陽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보성오씨에서 분적하여 함양을 관향으로 삼았다.
함양오씨는 보성오씨(寶城吳氏)에서 분적한 성씨이다.
해주(海州) 오씨(吳氏)
해주(海州)는 황해도 남해안에 위치한 도청소재지이다. 고조선시대에 대방군(帶方郡)에 속하여 고죽(孤竹)으로 불리었다. 고구려 때에는 내미홀(內米忽) 또는 지성(池城)·장지(長池) 등으로 불리우다가, 748년(신라 경덕왕 7)에 폭지군(瀑池郡)으로 바뀌었다. 936년(고려 태조 19)에 태조가 남쪽이 바다와 접하고 있다고 하여 해주를 사명(賜名)했으며 성종 때 와서는 별호로 대령(大寧)·서해(西海) 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983년(성종 2)에 해주목으로 승격된 데 이어 1018년(현종 9)에 안서도호부로 개편되었고 1247년(고종 34)년에는 다시 해주목으로 환원되었다. 1616년(광해군 8) 현으로 강등되었다가 1623년(인조 1)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해주부가 설치되었고, 1896년 도제 실시로 황해도의 도청소재지가 되었다. 1945년 해주시로 개편되었다. 1954년 북한의 관제 정비로 황해남도에 편입되었다.
해주오씨는 중국 송나라의 학사로 이름이 높았던 오인유(吳仁裕)로 고려 성종 때 건너와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내고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후손들은 본관을 해주로 하였다.
오연총(吳延寵)은 고려 예종 때 윤관(尹瓘)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 및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의 벼슬에 올랐다. 이 밖에도 오한경(吳漢卿)이 찬성사(贊成事)에, 오광정(吳光廷)이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며 가문의 기반을 다졌다.
오인유의 후손은 7세를 전후로 20여개의 파로 나뉘었다. 8세 오반(吳潘)의 후손은 찬성공파(贊成公派), 9세 오중수(吳仲守)의 후손은 사복시정공파(司僕侍正公派), 9세 오희(吳僖)의 후손은 양정공파(陽亭公派), 9세 오처권(吳處權)의 후손은 용강공파(龍岡公派), 9세 오생운(吳生韻)의 후손은 생원공파(生員公派)를 이루었다. 이외에도 묘제공파(墓齊公派), 지군사공파(知郡事公派), 사복시랑공파(司僕侍郞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장춘공파(長春公派), 해성부원군파(海城府院君派),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징사공파(徵士公派)로 분파하였다. 그 이후 14세손 대에서 다시 여러파로 분리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의령(宜寧) 옥씨(玉氏)
의령(宜寧)은 경상남도 중앙부의 낙동강 하류 서안에 위치한 지명이다. 본래 신라의 장함현(獐含縣)인데 757년(경덕왕 16)에 의령현으로 개칭하여 함안군의 영현을 삼았다. 1018년(고려 현종 9)에 진주(晉州)에 편입되었다가, 1390년(공양왕 2) 감무(監務)를가 파견되어 신번현(新繁縣)을 병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현으로 승격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가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친 곳으로 유명하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의령군으로 개칭되어 진주부 관할이 되었다가 1896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의령군이 되었다. 1979년에 의령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옥씨(玉氏)는 중국 성씨로 우리나라 옥씨는 당나라에서 고구려로 파견된 8재사(八才士)의 한 사람인 옥진서(玉眞瑞)를 시초로 하고 있다. 그는 고구려 멸망 후 신라로 들어가 국학교수(國學敎授)를 역임하였는데 그 공으로 의춘군(宜春君)에 봉해졌고 문혜(文惠)라는 시호를 받았다.
그 후의 세계에 대해서는 문헌이 전하지 않아 알 수 없으며, 후손들은 고려 때 창정(倉正)을 지낸 옥은종(玉恩宗)을 일세조로 하고 있다. 의춘은 의령(宜寧)의 옛 이름이므로 후손들이 의령을 관향으로 삼았다.
옥천(玉川) 옹씨(邕氏)
옥천(玉川)은 순창(淳昌)의 다른 이름이다. 순창(淳昌)은 전라북도 남쪽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원래 백제의 도실군(道實郡)인데, 757년(신라 경덕왕 16) 순화군(淳化郡)으로 고쳐 적성현(赤城縣)·구고현(九皐縣)을 영현(領縣)으로 관할하였다. 940년(고려 태종 23) 순창(淳昌: 淳州)으로 이름을 고쳐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1018년(현종 9) 남원의 속현으로 병합되었다가 1175년(명종 5) 감무를 설치함으로써 독립하였다. 1314년(충숙왕 1)에 국사(國師)인 정오선사(丁午禪師)의 고향이라 하여 군으로 승격되어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조선 초에도 순창군(淳昌郡)으로 남원부에 속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남원부에서 독립하였고, 1896년 도제 실시로 전라북도에 소속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임실군과 남원군의 일부가 편입되었다. 1935년 구암면(龜巖面)과 무림면(茂林面)을 통합하여 구림면으로 개편, 11개 면이 되었다. 1979년 순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옥천옹씨(玉川邕氏) 의 시조는 고려시대에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낸 옹희태(邕羲泰)이다.
《옥천옹씨세보(玉川邕氏世譜)》에 따르면 옹씨는 삼한시대부터 있었던 성씨로서 고려 건국에 공을 세워 여러 대에 걸쳐 높은 관직과 훈작으로 영화를 누리던 명문이었다고 한다.
옹씨의 원래의 본관은 옥천이지만 1930년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서 본관을 기록할 때에 일족 중의 일부가 바뀐 지명인 순창으로 본관을 등록함으로써 순창옹씨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두 본관은 동일한 본관으로 간주되고 있으며, 족보에서 역시 두 본관을 구분하지 않고 함께 기재하고 있다.
거창옹씨(居昌邕氏) 또한 1930년에 실시된 조선총독부 국세조사에서 당시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신고함으로써 생겨나게 되었다.
파평옹씨(坡平雍氏) 역시 국세조사에서 경상남도 창원군에 8가구가 살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는데 이는 옹(邕)의 한자를 잘못 기록함으로써 생겨난 성씨로 옹(雍)씨는 옹(邕)씨의 분적종이라 할 수 있다.
개성(開城) 왕씨(王氏)
개성(開城)은 경기도 북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현재 개성직할시가 되었다. 본래 고려의 수도였으며, 그 이전까지 송악군(松嶽郡)·송도(松都)·개경(開京)·부소갑(扶蘇岬)·동비홀(冬比忽)·촉막군(蜀莫郡) 등으로 불리었다. 고구려 때에는 부소갑(扶蘇岬)이라 했으며, 465년(백제 개로왕 11)에는 100년 동안 백제 영토였다. 555년(신라 진흥왕 16)에 신라가 점령한 이후 송악군(松嶽郡)으로 개칭되었고, 898년(효공왕 2)에 궁예가 잠시 태봉의 도읍으로 삼기도 하였다. 919년(고려 태조 2) 1월 수도를 철원(鐵原)에서 송악산(松嶽山) 남쪽으로 옮긴 후 개풍군과 송악을 합쳐 개주(開州)라 불렀고 5부를 설치하였다. 960년(광종 11)에는 개경(開京)으로, 995년(성종 14)에는 개성부(開城府)로 개칭하였다.
조선이 개국하여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1467년(세조 13)에 개성부로 경기도에 편입되어 개성부윤(開城府尹)이 부임해 오다가 1906년 개성군으로 개편되었다. 1949년 시제(市制) 실시에 따라 개성시가 되었고, 1954년 10월 개풍군과 판문군(板門郡)이 황해북도에 편입되었다. 1955년 개성시와 황해북도 개풍군·판문군이 통합되어 개성직할시로 승격되었으며, 1961년 3월 황해북도 장풍군에 강원도 철원군 일부를 편입시키면서 개성직할시의 관할이 되었다. 2004년 1월 개성직할시를 황해북도 개성특급시(開城特級市)로 바꿨다.
송악(松嶽)의 호족 집안이었던 개성왕씨(開城王氏)의 시조는 왕건(王建)의 증조인 왕국조(王國祖)이다. 후에 그는 원덕대왕(元德大王)에 추존되었다.
유년시절부터 총명하고 자질이 비범하던 왕건은 태봉(泰封) 국왕인 궁예(弓裔)의 휘하에서 무공을 세우고,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 힘써 백성들의 신망을 얻었고, 궁예의 횡포가 극심해지자 중신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라 고려왕조의 문을 열었다.
이후 고려는 34대 475년에 걸쳐 계속되었으나 이성계(李成桂)에 의해 조선이 건국된 후, 정치적 보복으로서의 멸족의 변을 당하여 전(全), 옥(玉), 금(琴), 전(田)씨 등 왕(王)자를 변형한 성씨로 바꾸어 간신히 그 혈맥을 유지하였다. 조선 정조 때에 다시 왕씨(王氏)로 돌아와 송악(松嶽)의 옛 지명인 개성(開城)을 본관으로 삼았다.
따라서 개성왕씨는 모두 고려 태조의 후손으로 족보에는 태조의 제15왕자인 효은태자(孝隱太子: 즉 東陽大君) 왕원(王垣)을 1세조로 하고 있다.
제남(濟南) 왕씨(王氏)
제남(濟南)은 중국 산동성(山東省)의 성도(省都)로 황하의 삼각주(三角洲)와 동산(東山)과의 경계선 가까이에 위치한 지명으로 1904년 개부(開埠)하였다.
제남왕씨(濟南王氏) 시조 왕이문(王以文)은 중국 제남부(濟南府) 출신으로 본래 이름은 왕봉강(王鳳崗)이다.
청(淸)나라 세조(世祖)가 주문왕(周文王)의 후예인 왕씨(王氏)를 멸족(滅族)하고자 1945년(인조 23) 왕봉강을 심양포로소(瀋陽捕虜所)로 압송(押送)하였다.
그때 마침 심양(瀋陽)에 볼모로 있던 봉림대군(鳳林大君: 효종)이 그를 보고는 서로 뜻이 맞아 결의(結義)하였다. 후에 봉림대군이 풀려날 때 배종(陪從)하여 함께 우리나라에 정착하였는데, 효종이 이문(以文)이라는 이름을 하사(下賜)하였고, 궁중(宮中)에서 침식을 같이 하며 북벌대계(北伐大計)를 논의(論議)하였다.
그 후 자손(子孫)에게 세록(世祿)을 하사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승정원승지(承政院承旨)로 추증하였다. 왕이문이 제남부 장구현(章丘縣)에서 왔으므로 후손들은 본관(本貫)을 제남(濟南)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제남왕씨는 5대조인 왕유(王儒)를 원조(元祖)로 하고 있으므로 왕이문은 류조(流祖)라 칭한다.
禹(우)氏
고려말의 유명한 학자 우탁(禹倬)을 배출하고 우현보(禹賢寶)·우성전(禹性傳)등의 인물이 나온 우(禹)씨는 문헌에 단양(丹陽)·예안(禮安)·영주(榮州)·강주(剛州)·목천(木川)등 5본이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목천(木川)을 제외한다른 모든 우(禹)씨는 모두 단양(丹陽)에서 갈려진 것으로 오늘 날에는 단양우(丹陽禹)씨 단본으로 일원화 되었다.
현재 있는지 없는지 확실하지 않는 목천우(木川禹)씨에 대해서는 재미있는 애기가 전해지고 있다.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세울 무렵 목천(木川, 지금의 충남 천원군) 지방 백제 유민들이 백제 부활을 간했다는 것이다. 이에, 몹시 노한 왕건(王建)이 이 지방민에게 우(牛, 소)·상(象, 꼬끼리)·돈(豚, 돼지)·장(獐, 노루) 등의 성을 붙여주었다는데 그중 우(牛)씨가 뒷날 천(千)씨로, 다시 우(禹)씨로 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문헌을 보면 목천상(木川尙)씨, 목천돈(木川頓)씨, 목천장(木川張)씨가 나와 있는 것을 보면 같은 음의 다른 글자로 성을 바꾼게 아닌가 하는 신빙성을 주기도 하지만 믿을 수는 없다.
단양우(丹陽禹)씨는 시조 우현(禹玄)의 9대손 내지 10대손에서 크게 10파로 나눠진다.
대제학공(洪書)파·예안군(洪富)파·집의공(洪得)파·판서공(洪命)파 등 5파로 모두 고려말(高麗末) 정승 우현보(禹賢寶)의 아들 형제들이고, 창의공(元光)파·봉상정공(元明)파·문강공(國珍)파·정평공(仁烈)파·문숙공(希烈)파 등 10파가 그것이다.
그 중 우현보(禹賢寶)의 아들 5파가 특히 번창하여 지금 우(禹)씨의 80%를 차지하고 파별로는 예안군(洪富)파와 안정공파가 대파로 전체 인구의 40%를 차지한다.
단양우(丹陽禹)씨는 시조 우현(禹玄)의 5대손인 우중대(禹仲大)의 아들 5형제 천규(天珪)·천계(天啓)·천석(天錫)·천우(天佑)·천성(天成)이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을 하게 되면서 중앙 정계에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그 때가 고려 충렬왕조 전후 무렵이다.
우현보(禹賢寶)는 고려 말엽의 청렴 강직한 명신(名臣)이다. 그는 그 때의 가장 유명한 이색·정몽주 등과 가깝게 지냈다. 한 때 정몽주와 한 패라는 죄로 조선에서 구양살이를 하기도 했지만 청백리에 녹선되었고, 그의 아들 5형제는 모두 고려조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는데 고려가 망하자 고려를 다시 일으키려고 일을 꾀하다가 모두 귀양을 갔다. 귀양지에서 홍서(洪書)·홍득(洪得)·홍명(洪命)은 죽음을 당했다. 둘째 홍부(洪富)와 셋째 홍강(洪康)은 풀려나와 조선에서 벼슬을 했다.
우성전(禹性傳)은 선조 때 동인이 남인·북인으로 갈려지면서 남인의 우두머리가 된 사람이다. 그가 남산 밑에 살았기 때문에 그와 그를 따르는 벼슬아치들은 남인이라 불렀었다. 이퇴계 문인으로 선조 1년에 문과에 급제한 우성전(禹性傳)은 홍문관, 교리, 의정부사인(舍人) 등을 지내고 선조 24년 그의 반대파인 북인의 모함으로 관직에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수천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의병장으로 크게 활약하고 대사성(大司成)으로 특진되어 왜병을 경남 의령까지 쫓아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평에서 죽었다. 지은 책으로는 역리(易理, 역학의 이치)와 이기설(理氣說) 등이 있다.
우희열(禹希烈)은 태종 대 충청·경기도의 도관찰사(都觀察使)를 거쳐 세종 때 호조판서를 지냈다. 그는 특히 관개(灌漑, 농사 짓는데 필요한 물을 끌어들이는 일)에 식견이 높아 각 도에 파견되어 제방공사를 독려했다. 그의 5대손으로 나주·충주 목사를 지내며 선정을 베풀고 유학자로 이름이 알려진 우복룡(禹伏龍)이 있다.
조선시대에 단양우(丹陽禹)씨는 3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다.
단양(丹陽) 우씨(禹氏)
단양(丹陽)은 충청북도 단양군 지역의 옛 행정구역명으로 고구려의 적산현(赤山縣) 혹은 적성현(赤城縣) 일대였다. 단양은 삼국시대에 삼국이 각축을 벌였던 지역으로, 551년(신라 진흥왕 12)에 백제와 신라의 공동작전으로 신라의 영토가 되어 진흥왕이 순시할 때 세운 적성비가 남아 있다. 757년(경덕왕 16)에 내제군(奈提郡: 堤川)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단산현(丹山縣)으로 이름을 바꾸고 1018년(현종 9)에 원주(原州)에 속하였다가 뒤에 충주(忠州)의 속현이 되었다.
1291년(충렬왕 17) 감무(監務)를 두면서 독립하였고, 1318년(충숙왕 5)에 단양으로 개칭하여 지군사(知郡事)로 승격하였다. 1413년(태종 13)에 군(郡)이 되었고,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충주부(忠州府)의 관할하에 들어갔다가, 1914년에 군면 폐합으로 영춘군(永春郡)을 병합하여 단양군이 되었다. 1979년에 단양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다.
단양우씨(丹陽禹氏)는 중국 성씨의 하나이며 우왕(禹王)의 후예라 전해지지만, 문헌의 실전으로 그 선계는 상고할 수 없다. 우현(禹玄)은 고려 현종 때 진사에 급제한 이래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역임하였고,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에 추증되었다. 우현의 9세손인 우현보(禹玄寶)가 단양부원군(丹陽府院君)에 봉해지면서 단양을 본관으로 삼았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병오보(丙午譜)》 세덕(世德)편에 따르면 6세손인 시중공(侍中公) 우중대(禹中大)가 단양을 본관으로 삼아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다고 한다. 따라서 단양우씨는 우중대 이후로 단양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온 것이 옳다.
원주(原州) 원씨(元氏)
원주(原州)는 강원도 남서부에 위치한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평원군(平原郡) 또는 치악성(雉岳城)인데,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북원소경(北原小京)이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북원경(北原京)으로 고쳤다. 940년(고려 태조 23)에 원주(原州)로 개칭하였고, 1018년(현종 9)에 군으로 바꾸어 열월군과 제천군을 속군으로 평창현·단산현·영춘현·주천현·황려현을 속현으로 거느린 큰 군이 되었다. 1259년(고종 46)에 일신현(一新縣)으로 강등되었다가, 1260년(원종 1)에 원주군으로 복구되었다.
1269년(원종 10)에 정원도호부(靖原都護府)로 승격되었으며, 1291년(충렬왕 17)에 익흥도호부(益興都護府)로 개칭되었다. 1308년(충렬왕 34)에 원주목으로 승격되었으나, 1310년(충선왕 2)에 성안부(成安府)로 강등되었다가 1353년(공민왕 2)에 원주목으로 회복되었다. 조선에 들어서도 원주목을 유지했으며, 강원도의 관찰사영이 위치한 행정중심지였다. 1683년(숙종 9)과 1728년(영조 4)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23부를 실시함에 따라 강원도의 감영이 폐지되고 충주부 소속의 원주군이 되었다가, 1896년에 도제 실시로 강원도 원주군이 되었다. 1955년 원주읍이 원주시(原州市)로 승격되고 나머지는 원성군(原城郡)이 되었다. 1989년 원성군을 다시 원주군으로 개칭하였고, 1995년 원주군이 원주시에 통합되었다.
원씨(元氏)는 중국에서 시작된 성씨로 《을축보(乙丑譜)》에는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아들인 강숙(康叔)의 후손이 원현(元縣)을 다스렸으므로 천자(天子)가 원씨(元氏)를 사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원주원씨(原州元氏)의 시조는 당 태종이 고구려에 파견한 8학사(學士) 중 한명인 원경(元鏡)인데, 중국 원성(原城) 사람으로 처음 이름은 원경(元慶)이다.
《원주원씨원사(原州元氏源史)》에 따르면, 그는 당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평장사(平章事)를 지냈으며, 고구려에 와서 두 나라의 국교회복과 보장왕(寶藏王)의 책봉에 힘썼으므로 보장왕이 그를 좌명공신(佐命功臣)에 책봉하였다고 한다.
원씨는 원주(原州)를 단본으로 하며, 계보를 달리하는 운곡계(耘谷系), 원성백계(原城伯系), 시중공계(侍中公系), 충숙공계(忠肅公系)의 네 파로 나뉘어져 있다. 그러나 충숙공계와 원성백계는 합보되었다.
각 계통의 의견이 달라 합보간행은 못하고 있지만 원경을 시조로 하는 단일본임은 일치를 보았다.
장흥(長興) 위씨(魏氏)
장흥(長興)은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원래는 백제의 오차현(烏次縣)이었다.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오아(烏兒)로 개칭되어 보성군에 속하였다. 고려 초에 정안현(定安縣)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가 현종 때에 장흥부(長興府)로 승격되었다. 1265년(원종 6)에 다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다가, 1310년(충선왕 2)에 장흥부로 강등되었다. 1392년(태조 1)에 수령현의 중령산에 성을 쌓고 중심지로 했으며, 1413년(태종 13)에 장흥도호부로 승격되었고 1652년(효종 3) 장흥현으로 강등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장흥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웅치(熊峙)·회천(會泉) 2개면이 보성군에 이관되었으며, 1936년 부동면(府東面)을 장흥면으로 개칭하고, 남상(南上)·남하(南下) 양면을 용산면(蓉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하였다. 1942년 장흥면이 장흥읍으로 승격하였고, 1980년 관산면이 관산읍으로, 대덕면이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장흥위씨(長興魏氏)의 시조는 신라시대 상서시중(尙書侍中)을 역임하고, 회주군(懷州君)에 봉해진 위경(魏鏡)이다. 위씨는 삼국 말기에 중국 당나라에서 귀화해 온 성씨로 위경이 638년 선덕여왕(善德女王)의 초청으로 당 태종이 파견한 팔학사(八學士)의 일원으로 우리나라에 왔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가 봉해진 지역인 회주(懷州)는 장흥(長興)의 옛 이름이므로 장흥이 위씨의 본관이 되었다.
하지만 위경 이후의 기록이 실전되어 고려 초 대각간시중(大角干侍中)을 지낸 위창주(魏菖珠)를 중시조로 세계를 이어왔다.
함평이씨기성군파모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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