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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손의왕릉여행◈ 스크랩 제16대, 장릉(長陵)-어찌하면 나라가 망하는지 알려주는 임금, 인조(仁朝)
길손旅客 추천 1 조회 162 12.09.12 10:40 댓글 4
게시글 본문내용

제16대, 장릉(長陵)

인조와 원비 인렬왕후 한씨의 능

인조(仁祖)와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의 합장릉(合葬陵)

장릉(長陵) -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삼릉로 89 (파주삼릉坡州三陵) / 파주삼릉관리소 031-941-4208

 

인조 이종

1595년(선조28년) 11월 17일~1649년(인조27년) 5월 8일

조선16대왕 (재위 1623~1649)

아버지는 추존왕 원종(元宗=정원대군), 어머니는 인헌왕후 구씨(仁獻王后 具氏=연주군부인)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종(倧)입니다.

선조의 서손으로 첫손자입니다. 임진왜란을 피하여 황해도로 피난중에 태어났습니다. 동생 능창군의 죽음과 아버지 정원대군이 홧병으로 죽자 광해군을 증오하며 복수를 다짐하게 됩니다. 이 후 반정에 참여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습니다. 

 

인렬왕후 한씨

1594년(선조27년) 7월 1일~1635(인조13년) 12월 9일

조선16대왕 인조의 원비

본관은 청주(淸州), 아버지는 영돈령부사 서평부원군 한준겸(領敦寧府事 西平府院君 韓浚謙)의 넷째딸입니다.

한준겸은 선조가 영창대군의 보필을 유교한 7인중의 한사람입니다.

광해군2년(1610년) 능양군과 가례를 올려 청성현부인(淸城顯夫人)에 봉해졌고, 능양군의 즉위하면서 왕비로 책봉되었습니다.

 

인조는 인렬왕후 한씨와의 사이에서 소현세자(昭顯世子), 봉림군(鳳林君, 조선17대왕 효종), 인평군(鱗坪君), 용성군(龍城君)의 4남을 두었으며, 계비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와는 후사가 없으며,

후궁 폐귀인조씨(廢貴人趙氏=소용조씨昭容趙氏)에게서 숭선군(崇善君), 낙선군(樂善君) 2남과 효명옹주를 두었습니다.

그 외의 후궁으로 귀인장씨(貴人張氏), 숙의나씨(淑儀羅氏)가 있습니다.

 

 

장릉 정자각 신계

정자각 오르는 계단은 두곳, 내려오는 곳은 한곳입니다. 오르는 곳은 동쪽, 내려오는 곳은 서쪽으로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 하며, 오르는 계단은 '좌상우하(左上右下)'로 왼쪽이 혼령이 오르는 계단, 오른쪽이 임금이 오르는 계단입니다.

 

 

 

파주시 탄현면에 자리한 장릉은 16대왕 인조와 원비 인렬왕후의 합장릉입니다.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임금이지요. 그러나 인조는 불신과 의심이 팽배한 임금입니다.

그로 인하여 자신의 아들과 그 가족까지 죽였으며, 조선시대 전례에 없던 고관대작들의 참수가 있었습니다. 또한 반정공신의 불만에 의한 이괄의 난으로 인하여 조선이 열린이후 처음으로 내란으로 피난을 떠난 왕이였으며, 그 이후에도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두번을 더 한양을 버리기도 하였으며 삼전도의 치욕을 겪기도 하였습니다.

어찌보면 정치적인 역량이 부족한 왕이기도 합니다. 또한 외교적인 역량도 부족합니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한 자의 반란이 그러하고, 청과 명의 상황을 유려하지 못하고 고집불통의 명나라 숭배에 의한 두번의 난리가 그러하지요. 볼모로 잡혔다가 돌아온 아들을 의심한 나머지 아들과 며느리,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몰고 간 왕, 인조. 재위 내내 왕의 정통성으로 고민하였으며, 당쟁으로 피로에 지친 왕이었습니다. 반정으로 왕에 오른지 27년, 보령55세로 승하하였습니다.

  

'장릉(長陵)'은 인렬왕후가 먼저 찾았습니다. 

인조14년(1636년), 선조의 막내아들인 용성군을 낳은 후 산후병으로 승하하여, 묘호를 장릉이라 하고 파주 운천리(지금의 문산읍)에 예장하였습니다. 이 때 인조는 인렬왕후릉의 곁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이 후 인조27년(1649년) 인조가 승하하여 그 자리에 장사를 지냈습니다. 그러나 뱀과 전갈등의 벌레들이 석물 틈에 집을 짓고 무리를 이루고 있어서 영조7년(1731년)에 지금의 자리로 천장하여 합장한 것입니다.

 

장릉의 능침공간을 먼저 만나봅니다.

삼면의 곡장을 두르고 그 안의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을 세웠고 면석에는 목단문과 연화문을 새겨 넣었습니다. 전통 양식이라면 운문과 12지신상을 새겼을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는 옛 능에서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옛 능의 병풍석과 난간석, 혼유석의 길이와 너비가 맞지 않아 옮겨오지 못하고 대신 새로이 조성하게 되었는데, 그 때 목단문과 연화문으로 바뀌었다고 전합니다.

그런 이유로 장릉은 처음 1636년과 1649년에 만들어진 석물들과 100년 뒤의 1731년의 석물들을 같이 만나 볼수 있는 왕릉입니다.  

병풍석의 주위로 난간석을 두르고 그 밖으로 석양과 석호 각각2쌍이 호위를 하고 있습니다. 

능침의 앞에는 혼유석을 두개를 놓아 합장릉임을 알리고 있으며, 좌우로 망주석 한쌍을 세워 초계공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문인석 한쌍과 석마한쌍과 중앙에 팔각장명등이 놓이며 중계공간을 이룹니다. 

하계에 무인석 한쌍과 석마 한쌍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아래로 정자각이 서고 우측 위로 비각이, 우측 아래로 수복방이 자리합니다. 

홍살문 넘어 금천교를 지나면 재실 가는 길인데, 오랜 시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이유로 장릉의 산세는 울창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장릉 금천교

장릉은 비공개릉으로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뒤 왕권강화를 위하여

정인홍, 이이첨등의 대북들은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을 죽이고, 인목대비의 아들 영창대군마저 죽이게 됩니다. 또한 부왕 선조가 세자로 책봉하려던 신성군의 양자 능창군을 '신경희의 옥사'와 연관시켜 역모로 죽입니다. 그러한 모습을 본 능창군의 아버지 정원군(원종)은 화병으로 쓰러져 죽게 됩니다. 막내동생의 죽음과 아버지의 죽음을 본 정원군의 장자 능양군은 절치부심 복수의 날만을 기다립니다. 그러던 중 광해군은 인목대비마저 서궁으로 유폐를 시키지요. 이는 서인들에게 반정의 구실이 됩니다. 그리하여 반정을 모의하고 거사일을 정하였지요.

 

 

반정거사의 날,

광해군15년(1623년) 3월 12일, 홍제원 골짜기에는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김류(金류), 최명길(崔鳴吉), 심기원(심기원), 이괄(이괄)등의 서인세력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후 능양군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뒤이어 이서(李曙)와 이중로(李重老)가 군사를 이끌고 그들과 합류합니다. 그리고 자정을 넘기자 능양군의 반정군은 김류를 총대장으로 세검정을 거쳐 창의문을 지나 창덕궁으로 진군합니다. 여기서 '세검정(洗劍亭)'이란, '(광해군 폐위 문제를 논의하고) 이곳 정자밑으로 흐르는 물에 칼을 씻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입니다.

창덕궁에 이르자 이홍립은 돈화문의 문을 열어주고 자신은 몸을 피합니다. 어려움 없이 입성한 반정군은 순식간에 창덕궁을 점령하지요. 서궁에 유폐되었던 인목대비에게 윤허를 받고 1623년, 능양군이 왕위에 오르니 보령 29세의 조선16대왕 인조입니다.

 

 

 

 

반정군이 궁궐에 들어서자 광해군은 의관 안국신의 집으로 피했지만 결국 잡히게 됩니다. 인목대비는 자신의 아들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을 증오하고 있었기에 광해군을 죽일것을 명하였지만 반정들이 만류하여 강화도로 유배를 보내게 됩니다.

 

 

장릉의 홍살문과 정자각, 수복방, 비각

정자각의 뒤로 능침공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인조의 즉위, 복수의 날만을 기다린 그는 대대적인 북인 숙청으로 조선시대, 전례가 없는 피바람을 불고 옵니다.

광해군을 등에 업고 궁궐을 장악했던 대북파의 정인홍(鄭仁弘), 이이첨(李爾瞻)등 수십명의 대신들을 처형하였고, 대신들의 가족들까지 멸문을 시킵니다. 7월에 들어서는 영의정 유몽인(柳夢寅)등 북인계의 인사들을 역모로 몰아 숙청하였으며, 북인이었으나 인목대비 폐모론에 반대하던 기자헌(奇自獻)과 같은 중립의 인사도 숙청하여 옥에 가둡니다. 더욱이 이듬해 반정공신이었던 이괄의 난으로 공주까지 피신을 하던 중, 옥에 갖혀있던 기자헌, 유몽인을 포함하여 옥에 함께 갖혀있던 북인계 인사 40여명을 처형하기도 합니다. 

새로운 왕의 등극은 사형선고를 받은 죄인도 면제하였던 관례와 전국의 옥에 갖힌 범죄자도 형을 면제하거나 낮추어주는 것이 보통의 관례였다고 한다면, 인조의 즉위 이후 행동은 복수와 불신에 불탄 개인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소인배라 하겠습니다.

역사속의 이러한 인조의 피바람은 연산군조차 혀를 내두를 만한 수준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조의 재위시대에는 너무도 크고 많은 변란으로 인하여 감춰져 버린것이지요. 

 

그렇게 200여명의 대북세력을 숙청한 후,

반정에 공을 세운 33명에게는 3급으로 나누어 정사공신(靖社功臣)의 훈호를 내려 등위에 따라 벼슬을 얻게 됩니다. 반정의 성공에 잔치를 벌인것이지요. 이귀, 김류, 김자점, 심기원, 이홍립등은 1등 공신으로 판서의 반열에 올랐으며, 이괄은 2등공신으로 올라 한성부윤의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러데 여기서 이괄의 불만이 터져 나온것입니다.

이괄(李适, 1587~1624)은 무신출신으로 반정 당일 반정군의 기강을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고 생각하여 나름 인조반정에 1등공신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괄은 용병에 능하다하여 포섭된 인물로 처음부터 주동의 성격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거사 당일 총대장인 김류가 홍제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같은 반정이었던 이이반(李而?)의 누설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로인해 김류는 몸을 숨겼던 것입니다. 그로인해 소문을 들은 반정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는데, 이때 이귀가 이괄에게 군사를 통제하라 일렀고 이에 이괄은 '규율을 어기면 누군든 목을 베겠다'며 반정군을 통솔하였고 이에 복종을 맹세하게 됩니다. 그리고 뒤늦게 김류가 나타난것이지요. 그러자 이괄과 김류가 지뤼권을 놓고 말싸움을 벌였고, 이귀의 중재로 김류가 지휘권을 잡고 반정군의 총대장을 수행합니다. 

2등공신으로 낮추어진 그해 10월, 이괄은 황현(黃玹), 이유림(李有林)등과 함께 선조의 열번째 서자이자 후궁 온빈한씨의 아들 흥안군(興安君)을 왕으로 추대하려 한다는 역모에 휘말리게 됩니다. 결국 자신만 2등공신이 된것에 불만을 품고 있던 이괄에게 이번에는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 도원수 겸 평안병사로 좌천되어 영변에 머물게 되니 불만이 더해지게 된것이지요.

그리하여 인조2년(1624년) 1월 '이괄의 난(李适의 亂)'을 일으키게 됩니다. 

이괄의 반란군이 승승장구하며 한양까지 밀고 내려오자 인조는 한양을 떠나 공주로 피신하였는데 피난 중 흥원군이 이괄의 진영을 찾았고 한양으로 올라가 왕으로 추대됩니다. 그러나 2일후 길마재 전투에서 이괄이 패하자 흥원군은 한양에서 심기원에게 살해당하였으며, 이괄은 관군을 피해 도망가던 중 부하에게 살해되었습니다. 말그대로 삼일천하(三日天下)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이괄의 난이 진압 된 뒤, 이괄의 잔당 중에 한명련(韓明璉, ? ~1624)의 아들 한윤(韓潤)이 후금으로 도망을 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됩니다. 이는 곧 '정묘호란(丁卯胡亂)'으로 이어지는 명분이 됩니다.       

    

 

 

정자각과 비각

장릉의 참도는 신도와 어도와 함께 바깥에 박석이 갈려 있습니다.

 

 

 

'친명배금정책(親明排金政策)',

인조는 광해군 폐위의 정당성을 위하여 후금(훗날 청나라)을 배척하고 명나라와 사친합니다.

광해군 대에는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중립외요정책으로 별다른 반향이 없었습니다만, 인조반정의 이유 중 하나가 후금과 명의 전쟁에서 명의 원병요청이 있자 광해군은 원병을 보내면서 명이 쇠퇴하고 후금이 일어서는 정세를 파악하고 '명을 위해 싸우되 여의치 않으면 후금에 투항하라'는 광해군의 밀서에 따라 장군 강홍립이 후금에 투항하였고, 조선의 임진왜란때 출병해준 명나라의 출병요구를 부득이 응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해명합니다. 이를 두고 강홍립을 사사하여야 한다는 의견들이 있었지만, 그러한 이유로 누르하치는 정세를 인정하여 조선에 친화적인 입장을 보여 광해군때에 후금과의 전쟁을 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광해군의 실리외교에 대한 반발로 번정을 일으킨 인조와 서인세력들이었기에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 친명배금의 정책으로 급 전환하게 된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정책은 훗날 조선의 치욕스런 시대를 만들게 됩니다.

 

당시 명나라는 후금에 빼앗긴 요동지역을 수복하려고 모문룡(毛文龍)의 군사들을 보내었는데 조선은 그들을 위해 평안도에 머물도록 하는 원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금의 입장에서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후금의 뒤를 위협하는 모문룡을 없앨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자면 조선을 공격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입니다. 더욱이 후금은 인조4년(1626년)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의 초대임금인 누르하치의 죽음으로 그의 아들 태종의 즉위로 더이상 조선에 대한 온유한 외교는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괄의 난으로 도망쳐 후금으로 망명한 한윤이 있던 것입니다. 그는 광해군의 폐위와 인조의 즉위는 부당한 것이라 하고 지금 조선의 군세는 매우 약하며, 모문룡의 군사들도 사기가 떨어져 있으니 지금 조선을 공격하여 광해군을 다시 조선의 왕으로 올려야 한다고 하게 된것입니다.

인조5년(1627년) 1월, 후금은 군사 3만을 이끌고 조선을 공격하니 '정묘호란(丁卯胡亂)'입니다.

일부의 군사는 평안도 철산 가도(?島)의 모문룡을 공격하면서 주력 3만의 군사들은 의주를 지나 6일만에 평안도 곽산(郭山)의 능한산성을 함락하고, 3일 뒤에는 평양까지 함락하였습니다. 후금의 군사가 평양을 거쳐 황해도 황주에 이르자 인조는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피난을 갑니다. 후금은 다시 의주를 거쳐 평산까지 함락하자 조정을 강화도로 천도하기에 이릅니다. 

평산까지 이른 후금은 더 이상 남하하게 되면 후방을 공격당하여 고립될 수 있는 것을 염두에 두었으며, 명나라와의 전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군사를 조선에 계속 둘수 없다고 생각하여 조선에 '강화(講和)'를 주장하게 됩니다.

이 때까지도 조선의 조정은 전쟁을 계속할것이냐, 강화를 할것이냐를 두고 의견이 분분하였습니다.

그러나, 후금의 군사는 더 이상 남하할수 없음을 간파한 최명길의 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맹약을 맺으니, '정묘화약(丁卯和約)'입니다.

화약의 내용은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는 것, 화약성립직후 군사를 철수할 것, 양국은 압록강을 넘지 말것과 더불어 후금과 강화하지만 명을 적으로 하지 않는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결국 정묘화약은 열세의 군사를 가진 조선으로서 후금의 군사가 오랜기간 주둔할 수 없는 점을 활용한 협상으로 후금의 철수와 명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는 명분을 만든 것이지요.

그러나 기뻐할일이 아니었지요. 대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습니다만, 조선은 계속 '친명정책'을 펼쳐나가고 있었습니다.  

 

정묘호란 이후, 

조선의 군사력 강화를 중심으로 한 국방정책에 매진합니다.

남한산성에 수어청(守禦廳)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인원을 늘려 조선후기의 5군영체제를 구축하게 됩니다. 이듬해인 인조6년(1628년)에 네덜란드 선박이 난파되면서 네덜란드인 벨테브레가 표류하여 제주도에 도착을 하였고, 그를 통하여 서구의 세상을 알게 되었지요. 인조는 그에게서 대포와 총기를 알게 되어 대포의 제작 및 총기사용법을 지도하게 하였고, 그에게 박연(朴淵)이라는 이름을 주어 조선에 정착할 수 있게 하니 원산박씨의 시조가 됩니다. 

  

 

경사면을 이용한 정자각

대지를 평지로 만든것이 아닌, 경사진 대지를 그대로 두고 앞을 높게, 뒤는 낮게 조성하였습니다.

 

 

 

정묘호란 직후 후금은,

몽골부족 차하르(察哈爾)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조선에는 높은 액수의 세폐(歲弊)를 수시로 요구해 왔는데, 인조와 대신들은 여전히 배명정책으로 인해 오랑캐와의 형제관계를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인조9년(1632년)에는 만주와 내몽골의 대부분을 함락하였고, 북경(北京)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조선에 더 많은 액수의 세폐를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또한 정묘화약으로 맺어진 형제의 관계를 고쳐 군신(君臣)의 관계를 맺고 신하의 도리를 갖도록 요구하면서 세폐를 더욱 늘려 요구하면서 삼천필의 말과 정병 삼만명을 요구하기에 이릅니다. 이에 조선은 후금과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에는 명나라 공격에 필요한 군량을 공급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요구를 조선의 입장에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지요.

조선은 여전히 친명정책을 고집하고 있었으며,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후금을 소위 야만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여진족들을 모아 놓은 나라로 무시하고 있었던 이유입니다.

그러던 인조13년(1636년), 후금의 태종은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게 됩니다.

같은 해 인조의 원비 인렬왕후 한씨가 승하하자 조문단을 보내고, 그러면서 태종의 존호를 알리고 신사(臣事)를 강요합니다.

그러나, 조선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하여 이를 거부하자 그 해 12월 2일, 만주족, 몽골족, 한족으로 이루어진 12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게 됩니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난 것입니다.  

 

청의 군사는 12월 9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로 향하고 있었는데,

당시 의주부윤 임경업(林慶業) 장군이 백마산성(白馬山城)을 방비하고 있어, 청의 군사는 그 길을 피하여 한양으로 직행하였고, 그 결과 10일만에 개성을 지나고 한양에 다다랐습니다. 

다시금 청나라의 침략에 조정은 12월 14일에 봉림대군과 인평대군, 비빈, 종실등은 강화도로 피난을 갔으며, 인조 자신도 소현세자와 함께 강화도로 들어가려고 남대문까지 이르렀으나 청군이 이미 마포일대를 장악했다는 보고를 듣고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강화도로 갈 수 없음을 인지한 인조는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어영대장 이서(李曙), 수어사 이시백(李時白), 어영부사 원두표(元斗杓) 등에게 성 안의 군병 1만 3,000여 명으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납서(蠟書, 밀랍으로 감싼 비밀 문서)를 전국으로 보내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는 한편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기에 이릅니다.

 

이 때, 남한산성 내의 군량은 약 50일분이었습니다.

16일이 되자 청군의 선봉이 남한산성에 도착하였고, 계속해서 많은 군사들이 산성으로 몰려왔습니다.

근왕병들이 속속 도착하였으나 힘 한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퇴각하거나 전멸당하게 됩니다. 우후죽순으로 쓰러져 가던 조선의 군대는 더 이상 남한산성을 찾지 않게 됩니다. 몇몇의 의병들이 남았으나 무력하기만 하였지요.

인조가 기대하던 명나라 원병은 극히 작은 수를 보내었으나 그도 풍랑으로 인해 배를 돌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1월 1일, 남한산성 아래 탄천에는 12만의 청군이 결집이 되었고, 20일에는 인조가 성에서 나와 항복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22일, 강화도가 함락되었고, 그곳의 피난을 간 비빈과 왕자들, 그리고 종신백관들 약200여명이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이미 남한산성의 군량도 바닥이 나기 시작하였으며, 무엇보다 혹한의 추위가 문제였습니다. 그 와중에도 대신들은 척화와 주화의 논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1월30일, 인조는 46일간의 혹독한 저항을 하다가 결국 항복을 결심하게 됩니다.

'정축하성(丁丑下城, 정축년에 성을 내려가다)', 즉 인조는 항복이라 하지 않고 하성이라 쓰도록 한것입니다.

인조는 지금의 송파동인 삼전도(三田渡)로 나가 수항단(受降壇)에 좌정한 청태종을 향해 무릎을 ?었습니다. 그리고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항복의식의 치욕스런 수모를 당합니다.

곤룡포 대신 평민들이 입는 남색 옷을 입고 청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의식이었지요. 더욱 처참하였던 것은 땅에 머리를 닿을때 소리가 나야하는 것으로 청태종은 소리가 나지 않았다며 다시 할것을 요구하여 실제로 인조는 수십번을 땅바닥에 부딪혀 이마는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대부들이 조롱하던 미개인에게 임금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국론의 분열이 가져온 참혹한 상황,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조선인들에게는 충격과 공황이었으며, 청군들은 그러한 모습들을 조롱하고 이었던 것이지요. 이것이 '삼전도의 굴욕'입니다.

그리고 조선은 청나라를 황제국으로 섬기게 되었습니다.

화의의 대가는 처참하였습니다. 그 중,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나라의 볼모로 끌려가야 했고, 척화론 삼학사(三學士)인 오달제(吳達濟), 윤집(尹集), 홍익한(洪翼漢)등의 대신들이 인질이 되어 선양으로 떠났으며, 수만명의 아녀자들이 포로로 잡혀가게 됩니다. 

 

훗날,  

포로로 잡혀갔던 아녀자들이 속환이나 도망을 통해 천신만고 끝에 조선으로 돌아온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불렀습니다.

이것은 또 다른 불행의 시작으로 사대부의 부녀자들은 ‘오랑캐에게 절개를 잃은 여자’라는 따가운 시선 때문에 고통받아야 했으며, 일부 신료들은 ‘속환되어온 며느리에게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할 수는 없다.'면서 이혼을 허락하라고 요구하기도 합니다. 또한, 출가했던 딸이 환향녀가 되어 돌아와 시댁에서 ?겨나 친정으로 온 딸을 둔 부모들의 속은 시커멓게 타들어 갔습니다.

최명길은 '이혼을 섣불리 허락해서는 안된다.' '모든 아녀자가 실절했다고 보아서는 아니되며, 급박한 전쟁의 상황에서 환향녀의 누명을 쓴 이들도 있기에 이혼을 허락해서는 안되며, 이혼을 허락하면 속환을 포기하고 이역만리에서 원귀가 되고 말것'이라며 이혼반대론을 주장하였으나, 대부분의 신료들은 '충신은 두임금을 섬기지 않으며,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 '포로가 된 부녀자들은 본심이 아니었을지라도 변을 만나 죽지 않았으니 이는 절개를 잃은 것으로 포로가 되었음에도 북지 않은것이 이미 허물이다.'라며 이혼찬성론을 펼치기도 합니다. 결국 대부분의 환향녀들은 본래의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았습니다. 

그리고 훗날 '환향녀''화냥년'으로 변하여 불리게 됩니다. 결국 그녀들의 비극은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게 된것입니다.   

   

 

수복방

능을 지키던 수복이 지내던 곳으로 정자각의 오른쪽 앞에 위치합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나라와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여 개시(開市)합니다. 1637년에 북관의 회령(會寧)및, 경원(慶源)에서 개시가 되었고, 1647년에는 압록강의 중강(中江)개시가 행해집니다. 단, 개시에는 상품의 금액과 오고가는 일수, 매매하려하는 총 수량과 총 금액을 미리 결정 하도록 하였습니다. 

병자호란때 정비 인렬왕후가 승하하고, 3년 뒤 왕비간택령을 내려 인조16년(1638년) 그해 10월, 14세의 장렬왕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는 비록 계비이자 어머니이지만 아들과 며느리보다도 나이 어린 계비로 훗날 조정의 당쟁에 휘말리는 결과를 만들게 됩니다.

 

그러던 인조22년(1644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崇禎帝)가 자살하며 명이 멸망하자 이듬해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갔던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봉림대군과 부인 장씨가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소현세자가 두달만에 의문의 변사를 당하게 됩니다. 공식사망원인은 '학질'이었으나,

실제 소현세자의 죽음 '독살'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로 끌려간 뒤 새로운 문물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청나라에 대한 시각이 바뀌어 있던 것이지요. 조선으로 돌아 온 소현세자, 아직까지 조선은 주전파가 득세하고 있었으며, 비록 항복을 하였으나 청나라는 배척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친청의 사고를 가진 소현세자이기에 인조와 갈등하게 됩니다. 이는 의심많은 인조에게 결코 좋은 일이 아니지요. 8년이라는 긴시간동안 인질생활을 하면서 청나라의 조정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한 소현세자였기에 청나라에서는 자신을 퇴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옹립하려한다는 위기감이었습니다.

소현세자는 귀국 두달만에 병석에 누웠고, 사흘만에 숨지게 됩니다.

당시, 어의 이형익(御醫 李馨益)은 독살설을 제기하였으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고 서둘러 입관을 하였고, 세자임에도 불구하고 평민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게 합니다. 훗날 소현세자의 독살에는 인조가 아닌, 후궁 소용조씨에 의한것이라 전하고 있습니다. 

후궁 '소용조씨(昭容趙氏)'는 인조의 총애를 받던 후궁으로 숭선군(崇善君)과 낙선군(樂善君)을 낳았습니다. 그녀는 응큼하고 간사한 여인으로 계비 장렬왕후등을 인조에게서 멀어지게 만들었으며,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를 싫어하였지요.

 

소현세자의 죽음 후, 궁궐에서는 세자책봉에 대한 문제로 다시 소란스럽게 됩니다. 

대신들은 적장자의 원칙에 따라 소현세자의 장자 '경선군 석철(慶善君 石鐵)'을 세손으로 책봉해야 한다고 하였으나, 인조는 자신의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합니다. 속 좁은 인조, 결국 소현세자의 가족 조차 보기 싫었음이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문제는 이러한 일들이 인조 스스로의 판단이 아닙니다. 

인조역시도 후궁 조소용의 치마폭을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사단을 내게 되니, 소현세자의 독살로 이어졌으며, 이는 다시 세자빈 강씨에게 불똥이 튑니다.

독살의 징후를 알게 된 세자빈 민회빈 강씨는 이는 필시 조소용의 짓으로 단정하고 있었지요.

그러자 인조의 총애를 받던 조소용은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는 세자빈 강씨를 없애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것입니다. 강씨가 청나라에서 많은 비단을 가져온 것을 보고 역모를 꾸미기 위한것이라 고하게 되지요. 또한 인조의 수라상에 올라온 전복에 독을 넣고는 이는 세자빈 강씨의 음모라며 인조에게 고하게 됩니다. 

 

정말 단순한 왕, 인조는? 자신의 며느리인 강씨를 죽이려 합니다. 이른바 '강빈의 옥사(姜嬪의 獄事)'입니다.

대신들은 반대를 하였습니다.

조소용의 이간질임을 알고 있었기에 인조에게 사실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인조는 그 말을 듣지 않습니다. 결국 영의정 김류를 비롯한 대신들은 영을 따를 수 없다고 하게 됩니다. 더욱 화가 난 인조는 소현세자의 도움으로 청나라에 억류되었다가 풀려난 백강 이경여(白江 李敬與, 1585~1567)를 관작을 삭탈하고 진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신하들은 반발하였습니다. 

그러자 인조는 강빈의 궁녀들과 수라간의 궁녀등을 하옥하고 심문하기에 이릅니다. 

수많은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 국문은 계속되었고, 궁녀들은 혹독한 고문속에 죽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로인해 대신들과 산사의 간원들은 인조의 처사를 보고는 관직을 사퇴하는등 낙향하기에 이릅니다. 

이제 궁궐 안에는 아첨의 신하들만이 남게 됩니다.

결국 강씨의 오라버니 '강문성(姜文星, 1603~1646)'과 '강문명(姜文明, 1613~1646)'이 역적이 되어 체포되었고 곤장을 맞다가 죽었으며, 세자빈 강씨도 인조24년(1646년) 3월, 기어이 폐출 되어 옛집으로 ?겨나 사사되었습니다.

또한 세 손자를 제주도로 유배를 보냅니다. 그러나 인조24년(1648년) 9월 18일, 12살이었던 장자 '경선군 석철(慶善君 石鐵)'이 죽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2월 23일에는 8살의 둘째 '경원군 석린(慶完君 石?)'이 죽게 됩니다.

이로서 세인들은 인조를 비난하기에 이릅니다.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며느리의 가족들을 몰살시키고 이제는 자신의 손자들까지 죽였다는 파렴치한이 된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무마하려는 인조는 유배지에서 세손들의 시중을 들었던 궁녀들을 잡아다 문초하게 되니 억울함을 호소하였으나 끝내 장살을 당하게 됩니다.   

         

 

 

비각

 

 

 

인조 재위 26년 6개월,

인조반정으로 왕위에 올라 광해군의 일파를 모조리 숙청하여, 조선 역사상 유례없는 수많은 고위대신들은 처형하며 궁궐을 피바다로 만들고, 자신의 반정 공신이 난을 일으켜 내란으로 도성인 한양을 떠났던 최초의 임금이 됩니다. 광해군대의 외교정책에 반하여 친명배금정책으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 나라는 뿌리채 흔들렸습니다. 야만인으로 치부하던 후금에게 삼전도의 굴욕을 맞본 왕입니다. 또한, 자신의 애첩에게 휘둘려 자신의 아들과 며느리, 그리고 손자들까지 죽음으로 몰고간 장본인입니다. 

광포한 성격을 가졌으며, 소심하고 의심많은 왕이었습니다.  

 

모든 역사는 당대의 실록이며, 후세에 의한 평가입니다. 

인조의 정치적, 외교적인 역량은 임금의 그릇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고집으로 대신들의 충언을 무시하였지요. 비록 폭군이라며 폐위된 광해군이지만, 인조 재위때 보다는 안정적인 국사의 운영이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근래에는 광해군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재조명 되고 있지요.

과연 인조도 다시금 후세에 의한 재조명을 받을 수 있을까요?

 

동시에 작금의 대한민국을 봅니다.

이 글을 쓰는 날이 2012년 7월 2일입니다. 제19대 국회가 개회되는 날이지요. 못난 왕이라면 충언을 할 신하가 있어야 하거늘, 지금의 '국회'는 그나마도 '국개(犬)'로 불리고 있는 실정입니다. 때(?)가 되면 자신의 사리사욕을 위해 얼마든지 마음을 바꾸어 버리는 금뺏지들과 그러한 사정과 맞물려 임금마저 자신의 노후대책을 위해 불철주야 뛰고 있지요.

과연 지금의 시대를 후세는 무엇이라 평가할까요?...

 

그저..살 맛 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장릉 능침공간

 

혼유석이 두개입니다.

이는 인조와 인렬왕후의 합장릉임을 표시하는 것으로 하나의 봉분 앞에 두개의 혼유석이 놓여있습니다.

 

병풍석과 난간석

면석에 목단문과 연화문이 새겨져 있으며, 병풍석 인석에도 모란무늬가 새겨져 있습니다.

 

 

 

 

 

 

 

 

 

INFO..

파주장릉坡州長陵  /  제향일 매년 양력 6월 17일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 파주삼릉관리소 031-941-4208

※ 파주장릉은 제한공개릉입니다.

    (연구 및 학술조사 목적일 경우 능 관리소 방문 신청 후에 입장 가능합니다.)

 

 

 

 

by 박수동

www.gilson.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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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2.09.12 13:54

    첫댓글 우리의 역사를 알고갑니다 감사합니다 좋은글과 사진 고맙습니다

  • 작성자 12.09.13 14:48

    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즐거운 날 되시길요.

  • 12.09.13 10:07

    늘 좋은 정보와 사진 잘 보고 잇어요 ~~

  • 작성자 12.09.13 14:48

    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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