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라와스띠(Sravasti, Shrawasti)
- 인도 웃따르 쁘라데쉬 주(Uttar Pradesh 州)
1. 개요
번성했던 과거의 영화(榮華)는 아스라이 사라지고 졸리도록 한적한 시골 마을이 되어버린 사왓티(Sāvatthi, Sk. Śrāvastī). 금강경을 비롯하여 한국에서 읽히는 많은 경전이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 기수급고독원(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 祇樹給孤獨園)........’으로 시작하는데, 그곳이 바로 기원정사가 있는 사왓티(현재의 지명은 스라와스띠), 즉 사위성(舍衛城)이다. 부처님 당시의 인도 16대 강대국의 하나였던 꼬살라(Kosala)왕국의 수도였던 이곳이 궁핍한 시골 마을이 되어있음을 보면서 굳이 부처님 가르침의 하나인 무상(無常)을 떠올리지 않아도 야은 길재(冶隱 吉再)의 시조가 생각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헤트-마헤트(Saheth-Maheth)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는 이곳은 부처님께서 가장 많은 안거를 보내신 곳이다. 특히 부처님의 만년(晩年)에 이곳에서 당신의 가르침을 체계화하고 많은 승속 제자들을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신 곳으로 곳곳에서 부처님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후대에 생긴 많은 위경(僞經)이 부처님께서 이곳에서 그 경(經)을 설하신 것이라고 주장을 하게 된다.
경을 읽다 보면 참 많은 일이 이곳 기원정사와 동원정사에서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알려진 것은 아나타삔디까(급고독)이라고 널리 알려진 수닷따 장자(Sudatta 長者), 찐짜마나(Cincamana)외도(外道)여인, 끼사 고따미(Kisa gotami), 앙굴리말라(Angulimala), 부처님께서 보이신 천불화현 등의 3가지 신통력, 부처님의 아들인 라훌라(Rahula)존자, 꼬살라왕국의 빠세나디(Pasenadi, Sk. Prasenajit=波斯匿)왕과 그 아들인 위두다바(Vidudhaba), 녹자모강당(동원정사)를 세운 미가라마따(Migaramata=위사카(Visakha))의 이야기 등이 있다.
1. 빡끼꾸띠 2. 깟취치 꾸띠 3. 왕은정사 4. 오라자르 5. 미얀마 사원 6. 한국 사원
7. 인도 사원 8. 태국 사원 9. 동원정사
2. 역사
(1) 초기역사
인도의 2대 서사시인 '마하바라타(Mahabharata)'와 '라마야나(Ramayana)'에도 언급되는 곳이지만 서기전 6세기경에 꼬살라 왕국이 가장 번성했고, 서기전 4세기경에 마우리야(Maurya) 왕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부처님 당시에는 빠세나디왕이 다스리고 있었으며, 당시 16대 강국 중의 하나였다. 마우리야 왕조 이후에 숭가 왕조, 꾸샨 왕조, 굽따 왕조 때에도 도시는 번성하였으며 상업 도시로써 명성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신 후, 2번째 안거를 보내셨을 때, 라즈기르(왕사성)를 방문한 수닷따 장자가 부처님을 뵙고 귀의하며, 부처님을 모시겠다고 청하였다. 사왓티로 돌아온 그는 사원을 짓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 제따(Jeta)왕자의 숲에 기원정사(祇園精舍, Jetavana-Anathapindika vihara)를 지어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을 올렸다.
스라와스띠는 부처님 당시에 자이나교를 비롯한 많은 신흥 사상가들이 활동하던 곳이기도 하다. 고대 자이나교 사원유적이 있으며 현재에도 자이나교 사원이 2개나 있다.
아소까 황제가 이곳을 순례하고 2개의 석주와 탑, 하나의 승원을 지어서 공양을 올렸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다. 407년 이곳을 순례했던 법현스님은 ‘98개의 승원이 있으며, 많은 유적이 폐허로 남겨져 있다’고 기록을 남겼다. 637년 이곳을 순례했던 현장스님은 ‘궁성(宮城) 건물유적은 주위가 20여리나 되지만 모두 황폐하였고, 주민이 살고 있으며, 승원은 수백 개가 있지만 무너진 곳이 너무 많다.’ 또한 ‘빠세나디왕이 세운 왕사(王寺)와 기원정사,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계실 때 왕이 조성한 불상과 향실은 남아있다.’라고 기록을 남겼다.
1119년 ‘마다나팔라’왕이 통치하는 시기에 ‘비드야다라’라는 지방 영주가 기원정사를 중수하여다는 명문이 발견되었으며, 12세기 중반까지는 승원이 남아있었으나 점차 쇠퇴하여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갔다.
(2) 발굴과 보존
1863년 A. 커닝엄(Alexander Cunningham)의 발굴로 16개의 불탑, 유물 등등 기원정사 유적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나타나게 되었다. 현재 남아있는 유적지는 동서 152미터, 남북 457미터인데 온전한 건물이 남아있는 것은 없고 모두 기단부만 남아있다. 1875~1876년, 1884~1885년에 호이(William Hoey)가 발굴을 계속하여 모두 34곳의 유적이 발견되었다.
1907-1911년에 걸쳐 보겔(J. P. Vogel)이 발굴을 하였고, 마샬(J. Marshall), ‘사흐니(B. Sahni)’ 등이 지속적인 발굴을 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가 되었다. 인도고고학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발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 유적지 입장료 있음
1. 매표소/출입구 2. 라훌라 꾸띠 3. 꾸띠, 4. 라즈까라메야 꾸띠 5. 8아라한의 사리탑
6. 사리뿟따 꾸띠 7. 사리뿟따-붓다데와 사리탑 8. 앙굴리말라 꾸띠 9. 시왈리 꾸띠
10. 아난다 보리수와 쌍둥이 탑 유적 11. 부처님의 경행대 12. 꼬삼바 꾸띠
13. 아난다 꾸띠 14. 부처님의 우물 15. 간다꾸띠 16. 담마살라(설법장) 17. 승원유적
18. 목욕장과 승원 유적 19. 스리랑카 사원 20. 중국 사원 21. 미얀마 사원
3. 유적
(1) 기원정사(祇園精舍)
‘제따와나 아나타삔디까 위하라(Jetavana-Anathapindika Vihara)’라는 이름의 사원을 한문경전에서 ‘기원정사’라고 하는 것은 ‘기타(祇陀, Jeta)왕자의 동산(園, vana)’에 ‘급고독(給孤獨, Anathapindika)장자가 지은 절(精舍, Vihara)’이란 뜻이다. 사헤트(Saheth = Jetavana)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기원정사가 있는 지역을 다른 이름으로 사헤트 마헤트(Saheth-Maheth)라고 하는데 마헤트는 사위성(舍衛城)을 의미한다.
법현스님은 높이 21미터의 아소까 석주 2개가 있으며, 우측 석주의 상단에는 소(牛)가, 좌측에는 법륜(法輪)이 있다고 기록하였으나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
1) 여래향실(如來香室, Gandha-kuti)
부처님께서 지내셨던 건물을 부르는 이름으로써 간다(Gandha)라는 말은 ‘향기’란 뜻이 있고, 꾸띠(kuti)는 작은 집을 말한다. 현재 기원정사에 남아있는 간다꾸띠는 여러 번에 걸쳐 덧지어진 흔적을 가지고 있다. 수닷따 장자가 맨 처음 건물을 지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곳이며 19안거(安居, vassa)를 지내신 곳이다. 부처님께서 반열반을 하신 후에 증축되어 7층까지 지었다는 기록도 있다. 현재 남아있는 건물 기단을 보더라도 2층 이상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오늘날에도 간다꾸띠에는 꽃, 향, 등(燈), 금박(金箔) 등을 공양 올리는 수많은 순례자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많은 스님이 경전을 독송하고, 수행을 이어가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2) 아난다 보리수(Ananda's Bodhi tree)와 쌍둥이 탑(Twin stupa)유적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서 안거를 보내신 후, 유행(遊行)을 떠나시면 많은 사람이 부처님을 그리워하였다. 이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잘 헤아린 아난다 존자가 부처님께 승낙을 받고, 수닷따 장자가 보드가야의 보리수 가지를 잘라와 이곳에 심었다. 부처님께서 이 나무에 축복을 내리셨고, 자주 이 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드셨다고 한다. 그 후로 사람들이 이 보리수를 보면서 부처님을 뵙는 것으로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현재의 보리수는 후대에 옮겨 심은 것이다.
아난다 보리수 바로 아래에 쌍둥이 탑의 유적이 있다. 수닷따 장자가 승원을 짓기 위해 제따 왕자의 숲을 사려고 제따 왕자의 숲을 황금으로 덮는 작업을 할 때, 황금을 녹이던 곳을 기념하여 세운 탑 유적이다.
3) 꼬삼바꾸띠(Kosamba kuti)와 부처님의 경행대(經行臺)
부처님께서 임시로 머무신 곳이라고 전해지는 곳으로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이 공양을 올렸다고 해서 꼬삼바꾸띠라고 한다.
대승불교권의 일설에는 부처님께서 도리천에 올라가신 동안 빠세나디왕이 전단나무로 부처님을 조성하여 간다꾸띠에 모셨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돌아오셨을 때까지 그 상(像)이 있어서 왕이 급히 꼬삼바꾸띠를 지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인도 최초의 불상은 서기 1세기를 전후하여 간다라 지역에서 조성되었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곳의 동쪽에는 부처님께서 경행(經行)을 하시던 곳에 벽돌로 된 테라스가 있다. 이곳에서 출토된 보살상의 명문(銘文)에 ‘이곳은 부처님의 경행을 하신 곳이므로 이 상을 세운다.’라고 되어있다.
4) 아난다 꾸띠(Ananda kuti)와 부처님의 우물(Buddha's well)
아난다 존자의 꾸띠는 간다꾸띠의 남쪽에 있으며 꼬삼바꾸띠와 간다꾸띠의 중간에 있다.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을 시봉(侍奉)하는 일에 불편하지 않도록 가장 가까운 곳에서 지냈다.
여래향실의 동쪽에 부처님께서 사용하셨던 우물이 있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우물 옆에 수동펌프를 달아놓았다.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 아소까 황제가 세운 탑이 있어서 신기한 일이 자주 일어났다라고 되어있지만, 현재 그 탑의 정확한 위치를 알 수는 없다.
5) 설법장(說法場, Dhammasala)
‘담마살라’는 부처님께서 기원정사에 머무시면서 제자들에게 설법하실 때 앉으셨던 자리라고 전해진다. 여래향실의 북동쪽에 있다. 현재 담마살라는 부처님께서 앉아서 설법하시던 곳과 스님들이 모여서 설법을 듣던 중앙 홀, 승원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러 차례 증축과 보수를 통해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
6) 사리뿟따 꾸띠와 사리뿟따-붓다데와 사리탑
사리뿟따(舍利弗, Sāriputta)존자의 거처는 여래향실에서 아난다 보리수를 지나서 걸어가다 보면 오른쪽에 조금 높은 기단을 가지고 있는 건물유적이다.
사리뿟따 꾸띠의 북쪽에 탑의 기단만 남은 유적이 3개가 있는데 사리뿟따 존자와 붓다데와(佛天, Buddhadeva) 존자의 사리탑으로 알려져 있다.
7) 라훌라(Rahula)꾸띠, 앙굴리말라(Angulimala)꾸띠, 시왈리(Sīvali) 꾸띠
부처님의 아들이자 아라한인 라훌라 존자의 거처는 아난다 보리수에서 남서쪽으로 난 길을 따라 사리뿟따 꾸띠를 지나서 왼쪽 첫 번째에 있는 건물유적인데 매우 단순한 구조이다.
앙굴리말라 존자의 거처는 사리뿟따 꾸띠의 서쪽에 있고, 시왈리 존자의 꾸띠가 바로 그 옆에 있다.
시왈리 존자는 부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먼저 공양을 받는 분이라고 한다. 동남아의 불자들, 특히 스리랑카 불자들은 반드시 이 꾸띠에 참배를 하며 복(福)을 기원하는데, 시왈리 존자에게 공양을 올리면 즉시 복을 받는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시왈리 꾸띠는 항상 순례자들이 붙여놓은 금박(金箔)으로 번쩍인다.
8) 8아라한의 사리탑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8아라한의 사리탑이 기단만 남아있는 모습으로 발굴되었다. 라훌라 꾸띠와 앙굴리말라 꾸띠의 중간에 있다.
9) 라즈까라메야 꾸띠(Rajkaramya kuti)
꼬살라의 빠세나디왕이 승가에 공양을 올린 승원이라고 전해진다. 동쪽으로 입구가 있고, 사방에 스님들의 거처(작은 방)가 배치되어 있으며, 중앙에는 스님들이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서쪽으로는 불단(佛壇), 또는 설법단(說法壇)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단이 있다.
10) 기타 유적들
부처님과 스님들이 목욕하셨던 목욕장, 이름이 없는 커다란 승원, 크고 작은 꾸띠, 탑의 기단부 등이 넓게 퍼져있다.
현재 유적지로 지정된 곳은 실제 기원정사의 크기보다 많이 축소된 것이라고 한다.
(2) 사위성 유적
1) 빡끼 꾸띠(Pakki kuti)
앙굴리말라 회심처(Angulimala 廻心處)로 알려진 빡끼 꾸띠(Pakki kuti)는 기원정사에서 북동쪽으로 약 2킬로미터의 지점에 있다. 앙굴리말라가 부처님을 해치려고 칼을 들고 쫓아왔다가 부처님의 위신력에 손에 들고 있던 칼과 손가락을 잘라 만든 목걸이를 버리고 출가한 곳에 세워진 탑이다. 앙굴리말라의 원래 이름은 비폭력(非暴力)이란 뜻의 아힘사(Ahiṃsā=Ahimsaka)이다.
A. 커닝엄이 발굴을 하여 앙굴리말라와 관련된 곳임을 확인하였다.
2) 깟취치 꾸띠(Kachchi kuti)
수닷타 장자의 집터로 알려진 깟취치 꾸띠는 앙굴리마라 회심처의 남동쪽 60m지점에 있다. 깟취치 꾸띠라는 이름이 생긴 것은 불에 굽지 않은 벽돌로 건물이 지어졌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있는 탑 유적은 수닷따 장자의 집터에 그를 기리는 탑을 세운 것으로 연구되었다.
1~2세기 꾸샨(Kushan)왕조로부터 12세기까지 많은 증축과 보수를 하였다. 법현스님과 현장스님의 기록으로 확인되었다.
2) 녹자모강당 (鹿子母講堂=東苑精舍, Pubbarama Vihara)
밧디야(Bhaddiya)지역의 장자인 다난자야(Dhanañjaya)와 수만나(Sumanā)의 딸인 위사카(Visākhā)가 사위성의 미가라(Migāra) 집안으로 시집을 와서 나형외도(裸形外道=자이나교)를 따르던 남편의 가족들을 모두 불교로 개종시킨다. 이 과정에서 시아버지인 미가라가 수다원과(Sotāpanna)를 성취하였고 그 고마움으로 위사카에게 ‘그대는 나의 어머니와 같다.’라고 한 것이 위사카의 별명인 미가라마따(Migāramātā=녹자모)가 되었다. 후에 위사카가 아들을 낳음으로써 실제로도 ‘미가라’의 어머니가 되었다. 부처님과 승가에 사원을 지어 공양을 올렸는데 위사카의 별명을 따서 녹자모강당(Mīgāramātupāsāda)이라고 불렀다. 기원정사의 동쪽에 있어서 동원정사로도 불렸다. 부처님께서 모두 6안거를 이곳에서 보내셨다. 오라자르에서 북쪽으로 향하는 마을 길을 따라 약 1Km를 지나서 마을의 서쪽 방향으로 가면 새로이 발굴된 동원정사 유적지가 있다. 현재 시바 링가가 동원정사 유적지의 중앙에 자리 잡고 있는데 부러진 아소까 석주를 갈아서 만든 것으로 보인다.
3) 왕은정사(王恩精舍=王寺, Rajkaramya Vihara)
왕은정사는 최근에 발굴이 되었다. 빠세나디 왕이 비구니 승가를 위하여 사위성 내에 건립한 비구니들을 위한 최초의 정사이다. 유적은 기단부만 남아있어서 찾아가기가 쉽지 않다.
4) 천불화현(千佛化現)의 터(Orajhar)
기원정사에서 발람뿌르(Balrampur) 방향으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는 유적이다. 이교도(異敎徒)들이 신통력으로써 사람들을 현혹하고, 부처님께 신통력으로 도전을 해왔을 때,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衆人環視) 가운데서 천불화현(千佛化現)의 기적, 물과 불의 기적, 망고나무의 기적 등을 보이시고 그들을 제도하셨다. 이렇게 3가지 신통력을 보이신 자리에 세워진 탑과 사원유적이 있는데 이것을 ‘오라자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세 가지 신통력을 보이신 후, 세 걸음 만에 도리천으로 올라가셔서 도리천에 남자 천신으로 태어난 어머니인 마야왕비에게 설법을 하시고 인간의 시간으로 3개월(안거)을 보내시고 상카샤로 내려오신다.
5) 사위성(Sāvatthī)
기원정사에서 북동쪽으로 약 1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사위성 성벽이 남아있다. 사위성 성벽을 지나서 사위성 유적으로 들어가면 자이나교 사원유적이 있고 계속해서 약 900미터를 더 가면 수닷따 장자의 집터가 나온다.
수닷따 장자의 집터 뒤쪽으로 왕궁과 그 외의 많은 유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데 여러 번의 발굴에도 계속하여 많은 유물이 나왔다.
(3) 기타
1) 데와닷따의 연못
데와닷따가 부처님을 살해할 목적으로 열 손가락 손톱에 독을 바르고 부처님 몸에 상처를 내고자 하였지만, 데바닷타가 앉아있던 연못가 나무 아래의 땅이 저절로 꺼지면서 무서운 불꽃이 일어났다. 데와닷따가 불에 타면서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Namo Buddha)’를 외치면서 지옥으로 떨어졌다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자취를 찾을 수 없다.
2)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인도, 한국 불교사원이 성지 주변에 있다. 특히 기원정사 입구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 내부의 벽화가 눈여겨 볼만한데 그림 5~24번까지는 모두 사위성과 기원정사 일대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려놓았다.
4. 순례 가는 길
(1) 드나드는 법
1) 뉴델리에서 스라와스띠로 가려면 뉴델리에서 항공편으로 럭나우까지 가서 그곳에서 택시를 임대하는 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다. 뉴델리와 럭나우를 연결하는 기차가 많으므로 럭나우역까지 기차로 가서 그곳에서 택시를 임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뉴델리에서 기차를 이용해서 스라와스띠로 가려면 뉴델리와 고락뿌르(Gorakpur)를 연결하는 기차노선에 있는 곤다(Gonda)역으로 가는 것이 가장 유용하다. 뉴델리에서 곤다역까지 가는 기차는 여러 편이 있는데, 가장 유용한 기차(No. 12554, 19:50-06:20)로써 1일 1회뿐이다. 만약 뉴델리 역에서 출발하는 기차표를 구하기 힘들다면 델리(Delhi)역에서 출발하는 기차를 알아보는 것이 좋다.
다른 성지를 들러서 가는 길이라면 럭나우(Lucknow)와 고락뿌르(Gorakhpur)에서 곤다로 가는 기차는 여러 편이 있으므로 시간표를 보고 상황에 맞게 이용하면 된다.
만약 곤다에서 기차로 스라와스띠를 가려면 곤다역에서 출발하는 기차(No. 15322, 09:55)를 타고 자르깐띠(Jarkanti)역에서 내리면 되지만 권하고 싶지는 않다. 자르깐띠역은 발람뿌르(Balrampur)라는 작은 도시의 중앙에 있다. 발람뿌르라는 역이 있지만 스라와스띠로 가는 데는 불편하다.
스라와스띠에서 다음 행선지의 기차표를 예매하려면 곤다역이나 발람뿌르역에서만 가능하다.
2) 곤다역에서 서쪽으로 걸어가면 만나게 되는 큰길에는 발람뿌르까지 가는 합승 지프가 언제나 손님을 기다리고 있다. 곤다에서 발람뿌르까지는 43Km가 떨어져 있는데 1.5~2시간이 걸린다. 여러 명이 함께 순례한다면 곤다역 광장에서 손님을 기다리는 택시를 임대해서 스라와스띠까지 바로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3) 발람뿌르에서 까뜨라(Katra=스라와스띠)까지는 17Km(30분~1시간)가 떨어져 있는데 합승지프나 정부운행 버스를 타고 까뜨라 입구에서 내리면 바로 기원정사 유적지 입구가 나온다. 합승 지프나 정부운행 버스는 발람뿌르에서 스라와스띠 쪽으로 철길을 건너면 있다.
4) 럭나우, 고락뿌르, 소나울리(Sonauli, 네팔국경)에서 스라와스띠로 가려면 택시를 임대해서 가는 것이 가장 무난한 방법이다. 특히 네팔에 있는 룸비니를 순례하고 오는 길이라면 소나울리에서 석가족이 세운 부처님의 진신사리탑이 있는 삐쁘라흐와(Piprahwa)를 거쳐서 스라와스띠로 가는 방법이 유용하다.
(2) 묵을 곳, 먹을 곳
1) 스라와스띠는 기원정사 때문에 많은 순례자가 방문하기 시작한 이후로 여러 호텔과 순례자 숙소가 건설되었다. 발전기가 갖춰졌고 식사가 가능한 고급호텔(Lotus Nikko Hotel, Residence Hotel, Imperial Hotel) 등이 있지만, 시설대비 가격이 비싸고 성지순례시즌에는 언제나 단체순례자들로 만원이기 쉽다. 성수기에는 예약을 하지 않고 머물기가 어렵다.
전기 사정이 점점 좋아지고 있기는 하지만 자주 정전이 되므로 전기 사정이 좋은 편은 아니다.
2) 한국, 스리랑카, 미얀마, 인도, 태국 사찰이 순례자 숙소를 운영하면서 식사제공을 하고 있으므로 빈방이 있는지를 알아보고 머물 수 있다. 정해진 것은 없으나 떠나기 전에 순례자의 형편에 따라 적절한 보시(donation)를 하는 것이 예의이다.
3) 스라와스띠에서 17Km가 떨어져 있는 발람뿌르에 몇 개의 숙소가 있고 식당도 있다. 만약 스라와스띠에서 머물 수 없는 상황이라면 발람뿌르에서 숙박을 하고 스라와스띠 유적을 순례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4) 식사는 숙소에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좋다. 까뜨라(스라와스띠)에는 시장이 있지만, 외국인이 먹을 만한 식당은 없다. 시장에는 넉넉하고 다양하지는 않지만, 채소를 비롯한 먹을거리가 있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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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재(吉再, 1353~1419, 호는 야은(冶隱))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한데 인걸은 간 데 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 수닷따 장자가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을 올릴 사원을 짓기 위해 제따 왕자의 숲을 사려고 했지만, 왕자는 번번이 거절하다가 왕자가 지나가는 말로 ‘숲을 모두 황금으로 덮으면 팔 수도 있지......’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수닷따 장자는 거래가 성립된 것으로 생각하고, 자신의 전 재산을 황금으로 바꿔서 현재 쌍둥이탑 유적이 있는 자리에서 황금을 녹여 판을 만들어 제따 왕자의 숲을 덮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실이 왕자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왕자는 수닷따 장자가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왕자는 숲을 자신의 이름으로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을 올렸고, 수닷따 장자가 그 숲에 사원을 지어 부처님과 승가에 공양을 올렸다. 그래서 제따(Jeta=祇陀)왕자의 숲(vana=園)에 아나타삔디까(Anathapindika, 외로운 사람을 도와주는 이(給孤獨) = 수닷따 장자의 별명)가 승원(vihara)를 지어 공양을 올린 사원(祇樹給孤獨園=祇園精舍)이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함께 성지순례를 오신 분들께 설명을 하는데 누군가가 손을 들고 내게 물었다.
“금판의 두께는 얼마나 두꺼웠어요?”
“제가 기억력이 없어서.......”
모두 웃었다.
*** 부처님께서 머무시던 건물을 여래향실(如來香室)이라고 한다. 부처님 반열반 이후에 7층의 목조 건물로 지어졌으나 화재로 전소되었는데 전단향나무로 만든 불상만 타지 않았다고 한다. 후대에 벽돌 2층 건물을 다시 지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모두 허물어지고 기단부만 남았다.
일부에서는 부처님께서 오라자르에서 세 가지 신통력을 보이신 뒤, 도리천에 남자천신으로 태어난 어머니 마야왕비에게 법문을 하러 가셨을 때, 빠세나디(Pasenadhi)왕이 만든 전단향목(栴檀香木) 불상을 모셔 놓은 곳이라고 전한다. 하지만 최초의 불상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아 간다라 지역에서 서기 1세기 전후하여 처음 조성된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 부처님께서는 세속적인 삶을 유지하면서도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지를 묻는 수닷따 장자에게 이렇게 설법을 하셨다. (법구경 264, 265)
만약 남을 속이거나 수행을 하지 않는다면
비록 머리를 깎았다고 하더라도 수행자라고 하지 않는다.
욕심과 이기심이 가득하다면
그를 어찌 수행자라 부르겠는가?
그는 미세하거나 거칠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악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모든 악을 완전히 정복하였기에
그를 진정한 수행자라 부른다.
***** 스리랑카 사원(Ananda Bodhi society of India)의 법당 내부에는 부처님 일대기의 중요한 4장면(4대 성지)과 기원정사, 사위성에서 있었던 부처님의 중요한 사건들을 벽화로 그려놓았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관련된 경전과 함께 찬찬히 살펴볼 만하다.
1.부처님의 탄생-사문유관-출가 / 2.성도(成道) / 3.초전법륜 / 4.열반 / 5.수닷따 장자와의 만남 / 6-7.기원정사 건립 / 8.아난다 보리수 / 9.녹자모강당 / 10.짜꾸빠왈라(장님)비구 / 11.마따 꾼달리(약값이 없는 병자) / 12.깔리약키니 / 13.데와닷따 / 14.보디가타띳사 비구 15.석가족의 멸망 / 16.빠세나디왕의 부정행(不貞行) / 17.꼬까알리끄(깐다르꼬끄) / 18.우빨리완나-난다마나와까(욕망의 불길) / 19.빠따짜라 / 20.끼사 고따미 / 21.빠세나디왕의 득녀 / 22.앙굴리말라 / 23.찐짜마나 외도여인 / 24.오라자르(세 가지 신통력) / 25.제 1차 결집 / 26.제 3차 결집(아소까 황제) / 27.마힌다 장로와 상가미따 비구니가 스리랑카에 불법을 전함 / 28.밀린다왕문경(Bhikkhu Nagasena & Menandros I) / 29.아나가리까 다르마빨라(Anagarika Dharmapala) - 대각회 설립 / 30.아난다보디 소사이어티 설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