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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아비담심론 제8권
9. 수다라품(修多羅品)[3], 진리, 도(道)와 수정(修定)의 모습
[진리]
【문】진리[諦]에는 어떤 모습이 있는가?
【답】
성품의 과보인 모든 행이
유루인 것은 고(苦)라 말하고
인의 성품을 집(集)으로 삼으며
멸제(滅諦)는 온갖 고의 다함이다.
‘성품의 과보인 모든 행이 유루인 것은 고(苦)이다’라고 한 것은 일체의 유루행에는 원인과 결박의 성품이 있는 까닭에 고(苦)라 말한다는 것이다.
‘인의 성품을 집(集)으로 삼는다’라고 한 것은 이 유루행이 인의 성품을 지닌다면 집제라 말한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고제와 집제는 일물(一物)이지만 인과(因果)인 까닭에71) 두 가지 진리로 나누어 세운 것이다.
‘멸제(滅諦)는 온갖 고의 다함이다’라고 한 것은 일체의 유루법이 종극에 이르러서 적멸하니, 이것을 멸제라 말한다는 것이다.
가령 무루의 모든 행은
이를 도제(道諦)라 말한다.
이것은 두 인연 때문이니
거칠고 미세한 차례로 나타난다.
‘무루의 모든 행위 이를 도제라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일체의 무루행을 도제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루행과는] 서로 어긋나기 때문이다.
【문】무엇 때문에 제(諦)라고 부르는가?
【답】이것은 두 인연 때문이다. 즉 두 가지 인연이 있어서 이를 제(諦)라 하는 것이다. 곧, 자성이 헛되지 않다는 것과 본다는 것[見]이 그것이다. 그로써 전도되지 않은 깨달음을 얻게 되는 것이다.
허공과 비수연멸(非數緣滅)72) 역시 비록 그 자성은 허망하지 않지만 무기(無記)이고 무루(無漏)인 까닭에 제(諦)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령 법(法)은 고(苦)이고 고의 원인[苦因]이고 고를 여의고[離苦] 고를 대치하는[苦對治]하는 까닭에 제(諦)라고 내세우는 것이다.
하지만, 허공은 무루인 까닭에 고도 아니며 고의 원인도 아니다. 무기인 까닭에 고에서 벗어나는 것도 아니며, 무위(無爲)인 까닭에 고의 대치도 아닌 것이다.
그런 까닭에 사제(四諦)만을 설하니, 이것은 또한 병(病)과 병인(病因)과 무병(無病)과 약(藥)의 관계와도 같이 말하는 것이다.
【문】성스런 진리에는 어떤 내용이 있는가?
【답】성인이 이 모든 진리에서 진실한 깨달음을 일으키고 다시 남에게 현시하는 까닭에 성제(聖諦)라고 말한다.
이 핍박당하는 모습을 고라 하고, 생겨나는 모습을 집이라 하고, 고요히 멎은 모습을 멸이라 하고, 벗어나는 모습을 도라 하는 것이다.
【문】마땅히 원인이 앞서고 결과가 뒤따라야 할 것인데, 왜 세존께서는 결과를 앞세워 말씀하셨는가?
【답】거칠고 미세한 차례로 나타낸다면 비록 그와 같이 설명해야 하지만, 무간등(無間等)73)에 수순하는 까닭에 앞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고는 거칠기 때문에 먼저 무간등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설명하면 멸제(滅諦)는 미세하여 도(道)가 아니라 해도 먼저 시설해서 제(諦)라고 말하는 것이니, 멸을 구하는 것은 거칠면서 도가 아니라는 것이 된다.
또한 [번뇌의 강물을] 용이하게 건너가게 하기 위한 까닭에 거친 것부터 차례로 내세운 것이다.
거친 것은 욕계의 고이며, 따라서 그것을 먼저 무간등으로 삼고 그 후에 색계와 무색계의 고를 세우는 것이다.
색계의 고통은 비록 거칠고 무색계는 그렇지 않다고 해도 삼매의 상태[定]인 까닭에 [무간등이며], 삼매의 상태가 아닌[不定] 까닭에 하나의 무간등인 것이다.74)
【문】진제의 무간등은 어떠한가? 자상인가, 공상인가?
【답】제(諦)인 까닭에 자상이고, 음(陰)인 까닭에 공상이다.
[사문사과(沙門四果)]
【문】세존께서는 사문사과(沙門四果)를 말씀하셨는데, 거기에는 몇 가지 것이 있는가?
【답】
성인의 과에 관한 일은 여섯 가지가 있고
가장 뛰어난 것은 아홉 경지에 있다.
세 번째는 여섯 경지에 있고
두 종류는 미래에 의지한다.
‘성인의 과에 관한 일은 여섯 가지가 있다’라고 했는데, 여섯 가지 일을 사문의 과(果)75)라 말한다. 즉 무루의 5음과 수멸(數滅)이 그것이다.
성인의 도를 사문(沙門)이라고 말하니, 그것이 곧 이 과보다.
사문의 과에 대해서는 택품(擇品)에서 곧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문】이 과는 어떤 경지를 거두어들이는가?
【답】최상의 것은 아홉 경지에 있다. 즉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아홉 경지를 거두어들이니, 미래선ㆍ중간선ㆍ근본 4선 및 세 가지 무색정이 그것이다.
‘세 번째는 여섯 경지에 있다’라고 한 것은 아나함과(阿那含果)는 무색정을 제외한 여섯 경지를 거두어들임을 말한 것이다.
‘두 과는 미래에 의지한다’라고 한 것은 수다원과(須陀洹果)와 사다함과(斯陀含果)는 미래의 세계에 의지함을 말한 것이니, 아직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까닭이다.
[도(道)의 모습]
【문】도(道)에는 어떤 모습이 있는가?
【답】
수신행의 행법에는
번뇌를 벗어남에 더딘 모습이 있고
수법행의 수행법에는
번뇌를 벗어남에 빠른 모습이 있다.
‘수신행의 행법에는 번뇌를 벗어남에 더딘 모습이 있다’라고 했는데,
수신행으로 행하는 무루법(無漏法)은 약한 근기(根機)의 품계에 속하기 때문에 그 진도가 더딤을 알아야 한다.
수신행으로 받는 경지는 신해탈(信解脫)과 시해탈(時解脫)이니, 역시 마찬가지로 약한 근기를 받게 되는 까닭이다.
‘수법행의 행법에는 번뇌를 벗어남에 빠른 모습이 있다’라고 했는데,
수법행으로 행하는 무루법은 예리한 근기의 품계에 속하기 때문에 이는 빠른 길임을 알아야 한다.
수법행으로 받는 경지는 견도(見到)ㆍ불시해탈(不時解脫)임을 알아야 하니, 예리한 근기를 받게 되는 까닭이다.
근본선의 경지 가운데 중간인 것은
낙도(樂道)임을 알아야 하고
감해지고 얻기 어려운 까닭에
고(苦)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
‘근본선의 경지 가운데 중간인 것은 낙도임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은
근본 4선(根本四禪)의 경지 가운데 약한 근기에 의한 법과 날카로운 근기에 의한 법을 즐거운 길[樂道]이라 한다는 것이다.
지관(止觀)76)이 동등한 까닭에 그 경지의 길은 즐거운 행이 되는 것이다.
‘감해지고 얻기 어려운 까닭에 이것을 고도라고 함을 알아야 한다’라고 한 것은
이밖에 다른 경지에 의거하는 도는 이를 괴로운 길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곧, 줄어들기 때문이니, 미래선과 중간선에서는 지(止)의 도가 줄고, 무색정(無色定)에서는 관(觀)의 도가 줄어든다. 따라서 방편을 얻기 어렵고, 그런 까닭에 이를 고(苦)라 말하는 것이다.
성인의 도는 괴로운 느낌의 성격이 아니며, 또한 괴로운 느낌과 상응하지도 않는다. 비
록 괴로움이 다하는 길에도 무량한 분별이 있기는 해도, 이것은 경지와 근기의 건립인 까닭에 네 가지를 말하는 것이다.
즉 근본 4선의 경지에서 만약 예리한 근기를 지니고 있을 경우 그것은 즐겁고 빠른 길[樂道ㆍ速道]이라 하고, 둔한 근기를 지니고 있을 경우 즐겁지만 빠르지 못한 길[樂道ㆍ非速道]이라 말하게 된다.
나머지 다른 경지의 도에 있어서는
만약 예리한 근기를 지니고 있을 경우 그것은 괴롭지만 빠른 길[苦道ㆍ速道]이라 하고,
만약 둔한 근기를 지니고 있을 경우 그것은 괴롭고 빠르지 못한 길[苦道ㆍ非速道]이라 말하게 된다.
바르게 높은 경지로 오르는 까닭에 도(道)라고 하며, 바르게 해탈로 향하는 길인 까닭에 도라고 하는 것이다.
[불괴정(不壞淨)]
【문】무엇이 불괴정(不壞淨)77)인가?
【답】
불(佛)과 성문(聲聞)의 법과
해탈과 또한 나머지 인(因)에 대한
청정하고 때 없는 믿음과
성인의 계율이니, 즉 결정된 것이다.
‘불(佛)과 성문(聲聞)의 법과 해탈과 또한 다른 인(因)에 대한 청정하고 때 없는 믿음’이라 한 것은
가령 부처님께서 얻으신 무학법(無學法)에 대해서 무루의 믿음이 일어난다면, 이를 부처님에 대한 불괴정[佛不壞淨]이라고 부른다.
만약 가령 승려가 행하는 학ㆍ무학법에 대해 무루의 믿음이 일어난다면, 이를 승에 대한 순수한 믿음[僧不壞淨]이라 부른다.
만약 열반에 대해서 무루의 믿음을 일으키고, 앞에서 말한 법을 제외한 이른바 그 나머지 고제ㆍ집제 및 보살의 무루공덕ㆍ벽지불(辟支佛)의 무루공덕에 대해서 무루의 믿음을 일으킨다면 이것을 불괴연법불괴정(不壞緣法不壞淨)78)이라 부른다. 달리 법보(法寶)를 연하는 까닭에 결정코 불괴연인 것이다.
만약 불법ㆍ벽지불법ㆍ성문법에 대해서 무루의 믿음을 일으켰다면, 이를 괴연법불괴정(壞緣法不壞淨)이라 부른다. 뒤섞여 삼보(三寶)에 연하는 까닭에 괴연이라 일컫는다.
성계(聖戒)란 무루계(無漏戒)를 말하니, 이것은 4대(四大)의 청정을 뜻한다. 믿음은 마음의 청정이며, 계는 4대의 청정이다.
【문】왜 무루를 허물어지지 아니하는 청정이라 하는가?
【답】결정된 마음이기 때문이다. 진실한 지혜와 함께 생하는 무루의 믿음과 계율은 결정된 것이다.
유루의 믿음은 불신 때문에 허물어지고, 유루(有漏)의 계는 악계 때문에 허물어지지만, 무루는 생(生)을 겪어도 허물어지지 아니한다.
결정적인 믿음인 까닭에 무루를 불괴정이라 세우는 것이다. 이 내용은 다음 택품(擇品)에서 곧 자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수정(修定)의 모습]
【문】수정(修定)에는 어떤 모습이 있는가?
【답】
초선이 가령 선(善)하다면
현법의 즐거움이라 말하고
생사의 지(智)를 얻으면
이를 지견(知見)이라 한다.
‘초선이 가령 선(善)하다면 현법의 즐거움이라 말한다’라고 한 것은
이른바 맑고 샘이없는[無漏] 초선의 경지는 현법안락주(現法安樂住)79)인데 이것을 정을 닦아 얻는 현법락[現法樂]이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4선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
초선은 또한 후세락주(後世樂住)라고도 말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니, 혹은 물러서는 경우도 있고 혹은 더 높은 경지에 태어나는 경우도 있고 혹은 반열반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곧, 후세의 즐거움은 일정하지 않은 까닭에 세존께서는 현법안락주(現法安樂住)를 말씀하신 것이다.
‘생사의 지를 얻으면 이를 지견이라 한다’라고 했는데,
생사지통(生死智通)은 정을 닦아 얻는 지견이라고 부른다.
생사지통에 관해서는 힘을 설명한 곳[力處]80)에서 이미 다 설명하였으니, 빠짐없이 알아야만 할 것이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분별의 혜(慧)는
방편에서 생긴 공덕이니
금강에 비유되는 4선(禪)을
이름하여 누진(漏盡)이라 한다.
‘알아야 한다. 분별하는 혜는 방편에서 생긴 공덕이다’라고 했는데,
방편으로 생긴 공덕은 선한 법에 대한 욕구를 따라 듣고 생각하고 닦는 삼계의 선함과 무루의 경지이다.
이 모든 것을 선정을 닦아 얻은 분별하는 혜(慧)라 부른다.
‘금강에 비유되는 4선(禪)을 누진(漏盡)이라 한다’라고 했는데,
금강에 비유되는 선정을 최후의 학심(學心)의 상응이라 부르고 제4선의 경지에 의거하는 경우 이것을 선정을 닦아 얻는 진지(盡智)라 부른다.
세존께서 몸소 말씀하시기를
“제4선에서 모든 보살의 무소유처(無所有處)에 대한 애착이 다하며, 제4선에 의거해 더 높이 뛰어올라 생사를 벗어나게 되고 마침내 번뇌가 다하게 된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4여의족(如意足)]
【문】여의족(如意足)에는 어떤 자성이 있는가?
【답】
선한 유위(有爲)의 모든 법은
방편에서 일어남을
부처님은 여의족으로 말씀하셨으니
이것을 또한 정단(正斷)이라고도 한다.
‘선한 유위(有爲)의 모든 법은 방편에서 일어남을 부처님은 여의족으로 말씀하셨다’라고 했는데,
앞에서 말한 방편으로 낳는 공덕, 그 일체는 여의(如意)의 그릇인 까닭에 이를 여의족이라 한다.
자기 마음에서 자재로이 종종의 공덕을 일으키는 까닭에 여의(如意)라고 하며,
그 여의의 지분[足]인 까닭에 여의족이라 하는 것이다.
족(足)과 지(支)는 모두 동일한 뜻이다.
【문】어떤 것이 여기에 해당되는가?
【답】이른바 삼매가 그것이다.
여기에 다시 네 가지의 증상분별(增上分別)이 있다.
만약 욕(欲)81)이 불어나서 삼매가 일어났다면 그것은 욕삼매(欲三昧)라 부른다.
정진ㆍ마음ㆍ지혜가 불어나서 삼매를 일으키는 경우 역시 이와 같다. 그것은 먼저 욕망이 있기 때문이다.
욕증상(欲增上)이 그것이니, 욕망이 생기고 난 뒤에는 성취를 구하는 까닭이다.
정진증상(精進增上)이 그것이니, 정진방편하고 나서는 그 순서를 따라서 구하는 까닭이다.
심증상(心增上)이니, 욕구와 정진과 마음에 대해서 올바로 향해 여의족(如意足)이 궁극에 이르는 까닭이다.
증상혜(增上慧)가 그것이니, 만약 지혜가 없다면 그 나머지도 잃게 된다.
【문】어떤 것이 ‘여의(如意)’이며 어떤 것이 ‘족’인가?
【답】선정이 ‘여의’이며 욕망 등이 ‘족’이다.
비록 수(受) 등의 여러 법이 생기더라도 다만 이것을 취하여 선정이 생기는 까닭에 이것을 족(足)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은 「잡품(雜品)」에서 곧 자세하게 설명하게 될 것이다.
[4정단]
‘이것을 또한 정단(正斷)이라고도 한다’라고 한 것은 이 여러 공덕을 정단(正斷)82)이라 한다는 것이다.
즉 바른 지혜의 불로 모든 번뇌의 풀을 태워버리는 까닭에 이것은 정소(正燒)라고 하며,
이것은 또한 모든 번뇌를 끊는 까닭에 정단(正斷)이라 한다.
또한 번뇌를 소멸시키는 데 가장 뛰어난 까닭에 이를 정승(正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과오를 버리고 여의며 공덕을 장양하니, 혹은 방어하고 혹은 늘리는 일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까닭에 정단(正斷)이라 한 것이다.
그 사정단은 다시 네 종류가 있다.
일이 구별되기 때문이니, 마치 한 순간에 등불이 네 가지 일을 만드는 것과 같다.
즉 심지를 태우는 일[燒炷]과 기름이 다하는 일과 그릇이 뜨거워지는 일과 어둠을 깨트리는 일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한 순간에 정진이 눈앞에 나타나 네 가지 일을 짓는 것이다.
이미 생한 악법 등은 수다라(修多羅)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으니,
번뇌를 그치게 하고 도근(道根)을 내려 과거ㆍ미래의 번뇌득(煩惱得)을 끊게 되는 것이다.
번뇌득(煩惱得)을 끊는다는 것은 과거의 번뇌가 멸하고 미래의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비록 일체의 유루를 끊기는 해도 악법은 지극히 삿되고 성인의 도와는 상위하는 까닭에 오직 악법은 끊는 일을 말하는 것이다.
한 가지 과[一果]83)를 낳는 까닭에 악이라고 하고,
두 가지 과[二果]84)를 낳는 까닭에 불선(不善)이라고 한다.
이미 생한 선한 법이 상속되어 머무는 까닭에 주(住)라고 말하고
상ㆍ중ㆍ하의 근기가 증장하는 까닭에 중수(重修)ㆍ증광(增廣)이라 말하는 것이다.
아라한의 경우는 비록 불선법과 단멸의 대치(對治)는 없지만 허물어서 대치하고꾸짖고(毁呰) 가책(呵責)함이 허물어 대치하는 일이다.
간직하면서 대치하고 멀리 분리시켜서 대치하는 까닭에 또한 네 가지 정단(正斷)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85)
[4념처]
이것을 네 가지 염처(念處)라 하니
사성종(四聖種) 역시 이와 같다.
그 보다 더 증상(增上)된 것과 같은 것은
모두 이름 따라 설명된다.
‘이것을 네 가지 염처(念處)86)라고 한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공덕을 또한 염처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신ㆍ수ㆍ심ㆍ법이 그것이다.
안과 밖과 안팎의 자상과 공상을 수순해서 관찰하는 까닭에 염처라 말하니, 그 내용은 현성품(賢聖品)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4성종(四聖種)]
‘사성종(四聖種) 역시 이와 같다’라고 한 것은 앞에서 말한 공덕을 또한 사성종(四聖種)이라 말한다는 것이다. 성인이 이것을 종자로 삼는 까닭에 성종이라 말하며, 성인이 그로부터 태어나는 까닭에 성종이라 말하는 것이다.
【문】성종이란 어떤 성품을 말하는가?
【답】탐욕 없는 선근의 성품이다. 그러나 그에 부수된 권속87)들은 5음(陰)의 성품을 지니고 있다.
네 종류의 애ㆍ취를 대치하는 까닭에 네 가지 인(因)을 말하게 된다.
즉 옷에 대한 애착과 걸식에 대한 애착, 잠자리에 대한 애착, 존재ㆍ비존재[無有]에 의해 생하는 애착이 그것이다.
비존재[無有]에 대한 애착이란 단멸에 대한 애착이다.
그리고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애착심과 그 외 다른 것에 대한 애착을 유애(有愛)라 한다.
그것들을 차례로 대치함을 따라 네 가지 성인의 종자[四聖種]88)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옷과 걸식(乞食)에 약이 포함되는 까닭이며,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필요하거나 모든 시절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이 될 종자란 현재의 경계에서 일어나는 까닭에 지족(知足)을 성인의 종자로 세우며, 욕망이 적은 것을 종자로 세우지는 않는다.
만족할 줄 아는 것은 현재처에서 일어나며, 욕심이 적다는 것은 미래처에서 일어난다. 현재에서 한 푼도 취하지 않는 일이 어려운 일이지 미래에 전륜왕(轉輪王)이 되는 것이 어려운 일은 아니다.
성인이 될 종자란 출가자에게 있어서는 두 가지 뛰어난 것이 있으니, 즉 희망과 수용(受用)이 그것이다.
재가자는 단지 희망만이 해당한다. 따라서 종자란 지니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 까닭에 별해탈율의(別解脫律儀)에서는 무작(無作)을 성인이 될 종자로 삼지 작(作)은 아닌 것이다.
색계와 무색계에는 비록 옷과 음식이 없더라도 그러나 성인이 될 종자는 있으니, 즉 무루율의(無漏律儀)가 그것이다.
【문】왜 이 여러 공덕을 여의족 내지 성종이라 말하는가?
【답】그것의 증상이 생하는 대로 이는 모두 이름을 따라서 말한다. 곧,
이 모든 공덕은 선정의 증상을 낳는 까닭에 여의족이라 하고,
정진의 증상을 낳는 까닭에 정단(正斷)이라 하고,
염의 증상을 낳는 까닭에 염처라 하고,
지족(知足족)의 증상을 낳는 까닭에 성종이라 말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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