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면피 졸업생들 사은회를 끝내고 나오는데 두수 녀석이 팔소매를 잡았다. "한잔 더할래?" "딱 한잔이면 사양 않겠다." "내가 긋는 집 있으니까 가자." 나는 두수 녀석을 남겨두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녀석은 삼수생 노릇해서 겨우 입학한 녀석인데 학점 미달로 졸업장을 받지 못하게 되어 코가 빠져 있었다. "임마, 나 같은 놈도 졸업하는데 넌 뭘했니? 하라는 공부는 않고 쐈쐈거리며 돌아다니드니 그 꼬라지 아니냐. 정신 좀 차려라." 내 말에 녀석은 피시시 웃었다. 제가 딱 한잔 하자던 녀석은 마음대로 그을 수 있다며 몇 병을 더 시켰다. "너 돈벌이 괜찮다는 소문이 사실였구나." "지랄마. 등록금 버느라고 허리가 휘었다. 집에단 졸업한다고 사기쳤지. 등록금은 더럽게 비싸지. 어쩌겄냐." "그럼 술타령이라도 때려치워라." "할 얘기가 있다잖아, 임마." "해봐. 귀 열어놨으니까." 두수는 전집 외판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나도 녀석의 떼쓰는 고집 때문에 필요 없는 줄 빤히 알면서 한질을 샀었다. "이거 더러워서 못해 먹겠더라." "지랄말고 경험으로 해봐." "너, H출판사라고 알지?" "그 집 책 좀 많이 팔아줬니?" 출판하는 곳이었다. 대학교 일학년 때부터 그 출판사 책을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되어 있었다. "출판사 영업부에게 목 매달고 살다 보니 별의별 걸 다 알게 되드라. 네가 안 나서면 나라도 때려부술 작정이다. 참 치사한 자식들 많더라. 교수라는 작자들도 그렇고." "뭔데 그래? 말해 봐." 나는 갑자기 구미가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그쪽에 친해진 녀석이 생겨서 우연히 알게 된 건데...... 희한하더라." 두수는 여간해서 흥분하는 법이 없던 애였다. 나이도 다른 애들보다 많았고 삼수생이었기 때문에 그런지 퍽 점잖은 편에 속했다. "말해 봐. 답답해 이 자식아. 끙끙대지 말고." 내가 채근하자 녀석은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채택료라는 거 아냐?" "그게 뭔데?" "우리가 대학교재를 비싸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았다 이거야. 예를 들어 우리 교수가 칠천원짜리 교재를 사라고 하면 그 교수는 최저 천원에서 이천오백원까지 먹는 거 말이다." "임마, 우리가 책을 샀는지 안 샀는지 어떻게 알아?" "학교 앞 책방에서 없어지는 부수대로 봉투가 건너가게 되어 있어." "네가 봤냐?" "봉투를 돌리러 다니는 놈하고 같이 다녔으니까 확실한 거야." 녀석이 흥분하는 이유가 명백해졌다. 대학교에 등록금 내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책값으로 바가지 쓰는 건 견딜 수 없다는 뜻이었다. "그래서 더럽게도 책값이 비싼 이유를 알았다. 그뿐인 줄 아냐? 방학 때만 되면 영업부 직원들이 돌아다니며 교수들에게 향응을 베푸는데 보통으로 대접하는 게 아니라는 거야. 몫이 큰 친구라면 여자도 붙여주고 그러는 모양이드라." "좋은 꼴만 보구 다녔구나. 너처럼 썩은 동태눈깔엔 그런 것밖에 안 보이는 거겠지만." "임마, 넌 졸업하니까 책을 더 살 필요 없겠지만 나는 죽겠다. 생각해 봐라. 대학생들이 무슨 밥이냐? 교수의 채택료와 대학생이냐 말이다. 이거 더러워서 참고 견디겠냐?" "안 참으면 어쩔래?" "씨팔, 너도 별 수 없는 놈이구나." 두수는 꽤 드센 녀석 중에 하나였다. 비록 학점이 모자라 졸업을 한 학기나 연기할 수밖에 없는 녀석이었지만 의식만은 대학생다운 데가 있었다. "네가 증거를 만들어 줄 수 있겠지? 영업부 친구하고 향응과 채택료 장부를 찾아내야 돼. 대상 교수 명단도 말이다." 내가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녀석의 눈빛은 빛나기 시작했다. "한 놈만 잡으면 나오겠지." 두수는 확실히 흥분해 있었다. H출판사 영업부에서 오년간이나 있었다는 사내의 "쉽게 나불거리진 않을 거다." "조지란 말이냐?" 내가 반문했다. "수단껏 해봐야지. 내가 그걸 알면 이 지랄하겠니?" "이게 내 졸업축하 선물이니?" "그렇게 생각해라. 모든 대학생들 주머니를 위하여...... ." "너 같은 녀석은 대학교 일년만 다니고 졸업시켜 버려야 하는 건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게걸스럽게 술을 마시며 그런 출판사와 그런 채택료를 받아먹는 교수들 욕을 직사하게 했다. 몇년 전엔가 교과서 부정사건이 터졌던 기억이 새로웠다. 어린 학생들을 상대로 교과서를 팔아먹던 출판사가 어마어마한 부정을 저질러 학부모들을 깜짝 놀라게 한 적이 있었다. 그것들은 이 땅의 문화풍토와 출판사 보호라는 명목으로 아직까지도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다. 어린 학생들을 농락하면 마땅히 죄를 크게 받는 게 상식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유해식품을 배우는 학생들에게 먹인 공해식품 생산업자와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교과서 생산업체는 일반 출판사들보다 재무구조도 좋았고 먹고 살기도 윤택했다. 욕심이 지나쳐서 그런 끔찍한 사건을 야기하고도 재벌들이 부정사건을 저지르고 꿈쩍않듯 아직도 문화를 창조하고 정신문화를 꽃피운다는 입심 좋은 소리를 지껄이고 있다. 용서해 주고 관용을 베풀 일이 따로 있는 호주머니를 노리는 교수들의 작태는 마땅히 놀부가 곤장 맞듯 치도곤을 내야 하는 것이다. 교과서 부정사건의 장본인들은 세금 몇푼씩 추징당하는 정도로 용서를 받았다. 진정으로 뉘우쳤다면 그 중에 한 개 출판사쯤은 자멸을 선언했어야 했다. 하기야 그럴 양심이 있었다면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을 할 수야 없었겠지. 하나님. 그때 하나님은 잠자코 있었습니다. 배우는 학생들을 등쳐먹거나 십수년이 넘게 대학생들의 호주머니를 등쳐먹은 출판사와 대학교수들을 두고 보기만 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관용이란 말입니까? 하나님. 생각해 보세요. 지난 교과서 부정을 저지른 출판사 사장들은 똥친 안에 제자의 호주머니를 털어먹는 교수가 있다는 걸 용서하실 참입니까? 차라리 소매치기 기술을 배워서 제자들의 지갑을 털어다 쓰라고 하세요. 그 편이 훨씬 떳떳할 겁니다. 인격체이며 최고의 지성인을 가르치는 교수니까 쉬쉬 하란 말입니까? 그래서 도대체 무엇을 노리는 겁니까? 그들이 죽은 뒤에 지옥에 데려다가 혼줄을 빼놓을 계획이란 말씀입니까? 하나님. 정신 좀 차리세요. 눈을 크게 뜨고 그런 식으로 책값을 비싸게 책정한 뒤에 교수를 매수하고 대학생을 우롱하는 얄팍한 출판사들을 그냥 두시렵니까? 남보다 여유가 있어 대학에 들어갔으니 조금 뜯어먹는 건 죄가 안 된다 이 말입니까? 며칠 동안 두수와 나는 자료가 될 만한 것을 찾으러 돌아다녔다. 대학교재가 보통 책보다 비쌀 수밖에 없는 요인을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양심적인 대학교재 출판사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H출판사 등 몇개의 전통 깊은 대학교재 출판업자들은 본전과 이득을 충분히 본 뒤에도 악착같이 책값을 올려 교수들에게 줄 채택료와 향응비를 그 교재값 속에 첨부시킨다는 윤곽을 잡을 수 있었다. 두수가 데리고 온 H출판사 영업부의 서과장은 비쩍 마른 체질에 심한 곱슬머리여서 첫눈에도 퍽 날카롭게 보였다. "내 손으로 고발할 순 없지요. 오년간이나 이 출판사에서 밥 먹은 놈입니다. 장형 하길래 그렇다면 얘기를 해줄 수는 있다고 했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 생각하기 어려운 세상에 말입니다." 나는 서과장의 정의감이 부럽도록 고마웠다. "몇년 동안 이 짓을 하면서 내가 계속 이런 짓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내가 뭐 정의감이 투철해서라거나 사람 놈 되려고 그러는 건 아니었고...... 일선에서 뛰다보니 정말 구역질나서 못봐 주겠더군요. 책 팔아 달라고 교수들 계집질 시켜주고 술 처먹여야 하는 게 내 팔자인가도 생각해 봤죠. 내가 대학교 다닐 때 이런 짓이나 해서 밥 먹자고 공부했나 싶기도 하고 말입니다." "그러셨겠네요. 그러나 보통 사람은 그 고맙습니다." 나는 갑자기 이 사내가 좋아졌다. 이런 사내들만 있다면 세상 살 맛이 날 것 같았다. 다니던 회사의 경리부정을 폭로하겠다고 위협해서 돈이나 알겨내는 그런 얼간이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사내였다. "나도 대학교 다닐 때 교제를 사면서 더럽게 비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물론 다른 책보다 비쌀 수밖에 없는 요인은 많습니다. 기본 제작비나 판촉비가 많고 항상 잘 팔린다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러나 일부 대학교재 출판사들은 내가 생각해도 지나칩니다. 제자를 우롱해서 돈을 챙기고 그 책으로 공부 가르치는 교수들 상판대기에 침을 뱉어주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저도 힘이 얼마나 닿을지는 모릅니다만, 모르면 몰라도 이왕 알았는데 그냥 둘 순 없습니다. 서과장님은 모르는 걸로 하겠습니다. 저만 알고 한번 들쑤셔 보겠습니다. 저도 아직 졸업장을 받지 않았으니 대학생이나 마찬가집니다. 이건 우리들 자신의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는 데까진 다 얘길 하겠습니다. "충분하진 않지만 자료도 있습니다." "그럼 서과장님은 앞으로 어쩌실 겁니까?" "글쎄요. 아직 장가도 안 갔으니 먹고 사는 거야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제가 주선해도 괜찮겠습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이런 핑계로 취직 걱정까진 끼쳐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사내다웠다. 그만한 배짱없이 살 사람 "그것과 이건 별개의 것입니다. 제가 꼭 신세를 져야 할 데가 있어서 그럽니다. 서과장님 같은 분이라면 내가 형처럼 사귀고 싶어서 그럽니다." "나중에라면 몰라도...... ." "신경 쓸 거 없습니다. 이것도 인연이라고 생각하세요. 이 친구는 그런 친구가 아닙니다." 옆에서 두수가 거들었다. 서과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서과장님 같은 분은 좀 더 큰 물에 가서 놀아야 합니다." 나는 김갑산 회장의 기획실 생각을 했다. 내 부탁을 거절할 사람도 아니었지만 이 정도의 사내라면 기꺼이 받아주리라는 확신이 섰다. 존경할 만한 교수들도 많습니다. 채택료 갖다주면 따귀 때리는 분도 있고 그렇다면 그 교재 안 쓰겠다고 책을 팽개치는 분도 많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럴때 얼마나 부끄러웠나를. 쥐구멍이 있으면 당장 들어가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세상은 언제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서과장이 당황할 정도로 향응을 거부하고 채택료 봉투를 내던지는 교수들과 자청해서 채택료를 올려주면 몇 권을 더 팔아주겠다거나 근사한 곳에 가서 술 사라고 떼쓰는 교수는 도대체 어떤 양심의 차이를 가졌을까? "그런데 어떤 교수들은 출판사까지 찾아와서 채택료를 올려달라고 흥정하고는 선수금으로 받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자를 안 데려다 준다고 채택을 거절하고 다른 회사 책을 채택하는 교수도 있습니다. 말도 안 나와요." 우리는 서과장이 가져온 명단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꽤 이름 난 교수들 명단도 많았다. H출판사의 고객명단 속엔 놀랍게도 나를 가르친 교수의 명단도 버젓하게 들어 있었다. 제법 이름난 교수들만 찾아다니기로 결심했다. 채택료 받는 교수들을 다 찾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찾아가 면박을 주어야 할 교수 명단만 빼놓고 나머지 교수들에겐 협박편지 한통씩을 부칠 생각이었다. 다음 신학기부터 채택료를 받으면 대학교 안에 소문을 내거나 사직당국에 고발장을 제자를 우롱하지 못하도록 하고 싶었다. 신문의 기고나 방송에 나와서 철학이 어떻고 인생이 어떠며 사람답게 살라고 떠드는 철면피한 교수들 명단 위에 붉은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그렸다. 강의를 끝내고 돌아오는 강교수를 붙잡았다. "긴히 들릴 말씀이 있어서 왔습니다." 강교수는 근엄한 얼굴로 잔디밭에 앉았다. "우리 학교 학생인가?" "아닙니다. 이런 좋은 대학 다닐 주제가 못됩니다. 선생님같이 훌륭한 교수 밑에서 저같은 게 어떻게 배울 수가 있겠습니까?" "어허, 이 사람이...... ." 갑자기 난처한 얼굴이 되었다. "선생님, 혹시 H출판사 아시나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건 왜 묻나?" "설마 선생님도 채택료 받고 외판원 노릇해 주신 건 아니시겠죠? 이렇게 고매한 인격자가 그러실 순 없을 테니까요." 강교수가 나를 노려보고 옷을 털며 일어섰다. 나는 재빨리 허리를 잡아 앉혔다. "말 안 끝났습니다. 나는 목청이 본래 큰 놈입니다." 워낙 다부지게 당기니까 꼼짝 못하고 주저앉았다. "설마 그런 교재로 학생들을 가르치시진 않으시겠죠?" "학생, 도대체 무슨 소리 하는 건가? 감히 어디라고." "어디긴 어딥니까. H출판사한테 여자 고매하신 인격자 앞이죠." "어허, 이 사람 이거 큰일 내겠네." "그러지 않아도 큰일 내려고 왔습니다. 정신 번쩍 나게 귀싸대기라도 갈기러 왔습니다. 어때요, 학생들이 많은 여기서 맞아 보실랍니까? 아니면 연구실에 가서 무릎 꿇고 조용히 맞을 겁니까? 빨리 걱정하십쇼." 강교수는 어쩔 줄 몰라 두리번거렸다. "채택료 받았습니까?" "이봐, 학생. 나하고 얘기 좀 하세. 도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이러나? 말이나 되는 소리를 해얄 거 아닌가." "여기서 낱낱이 밝히란 말입니까? 좋아요. 웅변연습할 곳이 없던 참인데 잘됐군요." 내가 벌떡 일어서자 강교수가 내 어깨를 잡았다. "진작 그렇게 나오실 일이지." 나는 주춤거리는 강교수를 따라 강교수의 교수 연구실로 들어갔다. 조교를 내보내고 난 강교수가 돌아서서 흰 사각봉투에 돈을 넣는 게 보였다. "제발 웃기지 마슈. 교수 체면 좀 지키슈." 나는 멱살을 잡아 시멘트 바닥에 팽개쳤다. "방송에 나가서 옳게 살라고 떠들지나 마실 일이지. 나를 또 돈가지고 해결하려고 하슈? 에이, 썩어빠진 양반아. 무슨 할 짓이 없어서 그 따위로 먹고 사슈. 차라리 동냥질해다 먹고 사슈. 그리고도 양심적으로 살라고 아가리 놀려대다니...... ." "여봐, 학생." 강교수는 내 팔목을 잡았다. 나는 그를 뿌리쳤다. "아닐세, 다시는...... ." "마누라 속곳 내다 팔더라도 제자 벗겨 먹지 좀 마슈." "알았네, 그러니 제발...... ." "그럼 각서 한장 쓰슈. 내가 부르는 대로 쓰고 도장 팍 찍으슈." 강교수가 엉거주춤 앉아서 내가 부르는 대로 받아 썼다. "내가 공갈친 거요? 사실이 아니라면 찢으슈." 강교수는 도장을 힘주어 찍었다. 나는 각서를 받아 주머니에 넣고 강교수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강교수가 덜썩 주저앉아 죽는 시늉을 했다. "며칠 절룩거리며 다녀보슈. 당신 제자들을 더 이상 우롱하거나 출판사 장난에 놀아나면 나는 연구실 문을 소리나게 닫고 내려왔다. 잔디밭 쪽으로 걸어가다 말고 연구실을 올려다보았다. 강교수가 얼른 비켜서는 게 보였다. 나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H출판사에서 찾아갈 테니 기다려 달라는 전화를 하고 박교수를 찾아갔다. 나는 얌전하게 앉아서 흰 봉투를 내밀었다. 그 속엔 현금이 들어 있지 않았다. 박교수가 봉투를 빼보았다. 낯색깔이 변했다. "내 얘기가 틀렸습니까?" "당신, 누구요?" "학생입니다." "...... ." 고개를 떨어뜨린 채 담배를 피워 물었다. 생각보다 대범하게 나왔다. "몇 대 맞아 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그런 짓 않겠다는 각서를 쓰셔야 하겠습니다." "그러지요. 입이 열 개라도 할말이 없소. 맘대로 하쇼." 박교수는 눈을 질끈 감고 소파에 앉았다. 나는 주먹을 들었다. 차마 칠 수가 없었다. 비굴하지 않고 떳떳한 사내에게 손이 올라갈 만큼 내가 좀스럽긴 싫었다. "눈 뜨세요." 박교수는 눈을 떴다. 꽉 다문 입술이 고집깨나 있게 보였다. "각서는 어떻게 쓰면 되는 거요?" 거칠 게 없는 말투였다. "선생님 같은 분이라면 안 써도 됩니다. 나는 일어서서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박교수가 내 손을 잡았다. "다시는 그런 일 없을 거요. 변명이나 듣고 가쇼." 나는 주저앉았다. 밉던 마음이 싹 가셔 버렸다. 적어도 사내로 태어났다면 이 정도의 여유는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강교수 같은 무리와는 너무 대조적이었다. "듣겠습니다." "난 학생이 누군지 모릅니다. 그러나 난 제자들에게 학생처럼 굴라고 가르쳤습니다. 아무리 내가 옹졸하기로서니 내가 가르친 대로 하는 학생을 욕하진 않아요." "그러실 것 같애서 저도 그냥 가려는 거였습니다." "부득이 받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있다는 회사에 붙어 있게 도와주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채택료를 군소리없이 받는 겁니다. 내 제자가 직접 들고온 돈 봉투를 말입니다. 내 제자에게 차라리 내가 보통 사내라는 걸 확인시켜줄 수밖에 없을 때도 있소. 물론 이건 변명이오." 박교수는 몇가지 재미있는 사례를 설명해 주기도 했다. 출판사의 판매작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박교수 방을 나오며 나는 차라리 귀중한 경험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길로 내가 점찍었던 교수들을 찾아다니며 비굴한 교수는 더 비굴하게, 떳떳하게 잘못을 시인하는 교수에겐 인생공부를 하며 돌아다녔다. 오후 늦게 H출판사에 들어갔다. H출판사 건물은 웬만한 중소기업체의 건물보다 크고 H출판사 고객 교수의 심부름인 것처럼 꾸미고 사장실로 들어섰다. 늙은 신사가 회전의자에 앉았다가 소파로 내려왔다. "어느 교수님이 보냈소?" "채택료 받으로 왔습니다. 전국 대학교수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뭐라구?" 나는 다짜고짜 책상을 둘러엎었다. 사람들이 뛰어 들어왔다. 사장이 나를 경찰서에 잡아 넣으라고 큰소리를 쳤다. "빨리 신고해!" 사장의 격앙된 목소리였다. "신고하시지요. 이만한 증거면 당신이 감옥에 가서 재미있는 향응을 받으실 겁니다." 나는 복사한 자료를 어지러진 방바닥에 젊은애들이 달려들어 한참 난장판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걸 경찰서에 넘기기 전에 해결하려면 나를 보다 융숭하게 대접하는 게 나을 거 같소." 소파에 깊숙하게 기대앉아 건방지게 담배를 꼬 나물었다. "담뱃불 좀 붙이슈." 사장은 직원들을 모두 나가라고 한 뒤에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뭘로 흥정하시겠소? 이 출판사는 여자 잘 대주고 돈봉투 부지런히 준답디다. 그래서 한 건 하러 왔소." "말씀해 보쇼." 퉁명스러운 대꾸였다. "책 팔아먹듯 고분고분할 수 없소? 내가 거요? 이 양반아, 나도 이 담에 교수될지 모른다구. 사람 팔자 모르는 거 아뇨. 그때 가서 알랑방귀 뀌지 말고 지금부터 연습해 보슈." "뭘 어떻게 원하는 거요?" "진작 그렇게 나오실 일이지. 난 한 번 말하면 한치의 양보도 없는 놈이오. 시작합시다." 나는 뜸 들이지 않고 시작했다. "여자가 삼백육십오 명 필요합니다. 일년치요. 그리고 한달에 일억원씩 내 통장에 넣어주쇼. 이게 내 요구 조건올시다." "이봐요, 얘길 하려면 되게 해얄 거 아니오. 그러니 차근차근합시다." "난 성질이 급해요. 번갯불에 콩 구워먹는 놈이오. 내 요구가 너무 작아서 이럽니까?" "그게 아니고...... ." "그러면 계약서 씁시다." "이봐요, 일이 되게 하자는 거 아뇨. 현실적으로 말요."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거요?" "내 성의껏 하리다. 섭섭하지 않게 말이오." "얼마나 낼 수 있소?" "다시 찾아오거나 뒤탈 없게 한다면 천만원에 얘길 끝냅시다." "웃기시네." "그 이상이라면 맘대로 하쇼. 경찰서에 가겠소. 요즘 법이 바뀌어서 회사 부정을 폭로하는 공갈단은 신고하면 처벌을 않기로 한 걸 아쇼." "가볍게 한단 말은 들었소. 그럼 경찰서로 갑시다." 사장이 한사코 나를 잡고 놔주지 않았다. 나는 사장의 멱살을 잡아 엎어진 책상 위에 내던졌다. "이 더러운 영감탱이야. 내가 돈 처먹는 공갈단인 줄 알아! 교수 꼬드겨서 대학생들 울궈먹는 당신 수법을 그냥 눈감고 볼 놈인 줄 알아? 빌어 처먹어도 더럽게는 빌어 처먹지 말아야 할 거 아냐." 골병이 들 만큼 다부지게 다루었다. 사장은 못 견디고 회사의 비밀장부를 내놓았다. "당신, 출판사 더 해 처먹고 싶거든 책값 내리고 채택료 없애슈. 향응이고 나발이고도 없애고. 만약 단 한 건이라도 채택료를 주거나 향응을 베풀면 그땐 끝장인 줄 아쇼. 이 서류를 몽땅 경찰에 제공하겠소. 여기 각서 쓰쇼." "교수가 찾아와서 채택료 달라거든 귀싸대기를 때릴 수 있는 자세로 책을 만드슈. 책을 개떡같이 만드니까 채택료 들고 추접스럽게 향응 베푸는 거란 말요. 책만 알차게 만들어 보슈. 채택료도 필요 없고 향응도 필요 없소. 안 사고는 못 배기게 만들 궁리나 하쇼. 내 말 명심하슈." "알겠소." "당신, 내가 이 자료만 터뜨리면 생매장된다는 걸 아슈?" "알지요, 알구말구요." "그럼 알아서 기쇼." "명심하겠소." 나는 서류뭉치를 들고 돌아섰다. 사장이 쫓아나오며 굽신굽신 절을 했다. "난 독종요. 한번 물고 들어가면 끝장 보지 명단을 공개하겠다는 편지를 보낼 거요. 이게 그 사본이니까 당신도 읽어보슈. 다시는 채택료 주고 싶어도 받을 만큼 뱃심좋은 친구는 없을 거요." 나는 교수들에게 보낼 편지의 사본 한 장을 내밀었다. 황송한 듯 두 손으로 받아 쥐고 또 꾸벅꾸벅 절을 했다. H출판사 건물을 나섰다. 어두워진 시내의 불빛들이 강렬했다. H출판사 나무간판을 떼어 발길질로 부수어 버렸다.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이층에서 사장이 내 행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씨익 웃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밤늦게 집에 돌아오자 은주 누나는 "형사가 다녀갔다. 너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나만큼만 무슨 일 없게 살라고 해." 나는 꼬치꼬치 캐묻는 누나의 말을 피해 내 방으로 건너갔다. 쪽지 속에는 형사의 연락처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무슨 일인지 궁금했지만 이렇게 늦은 밤에 연락해 봤자 서로 불편할 것 같았다. 특별한 일이라면 밤늦게라도 기다렸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형사가 나를 찾을 만한 일은 없었다. 도치 일은 엊그제 밤의 일이었고 다른 일로 형사가 나를 만나야 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왠지 꺼림칙했다. 자꾸 마음에 걸렸다. 뒤를 돌아다보면서 내 행동을 조심스럽게 짚어 보았다. 왜 찾을까? 궁금증은 가시지 않았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
즐감합니다
즐감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