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마가복음 15강
말씀/ 마가복음 9:30-50
요절/ 마가복음 9:35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채상병 특검법으로 여당과 야당이 힘겨루기를 했던 한 주입니다. 정치적 결론이 어떻게 나느냐를 떠나, 한 청년의 죽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는 모습 자체는 한국사회의 건강함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회, 그것이 참다운 선진 사회로 가는 모습일 것입니다. 정쟁의 도구로 끝나지 아니하고 한국 사회를 보다 투명하고 보다 안전한 사회로 나아가게 하는 통로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3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아무도 모르게 갈릴리 가운데로 지나가십니다. 소문이 나면 병자나 귀신들린 자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집중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 사역의 핵심은 몇몇 제자들에게 예수님과 예수님의 사역을 제대로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가르침의 핵심은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31)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제자들은 귀를 막고 듣기를 거부하는데도 예수님은 반복하여 가르치고 또 가르치십니다. 막힌 귀를 뚫고 파내서라도 알아듣게 가르치실 태세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여전히 깨닫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32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묻기도 무서워하더라” 십자가와 부활의 진리를 깨달아버리면 그 길을 가야 할 것 같고, 그 길을 가게 되면 망하고 죽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예 묻기조차 두려워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가버나움에 이르렀을 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길에서 무엇을 토론했는지를 물었습니다. 흐름상으로 보면, 당연히 ‘십자가와 부활’이 토론의 중심 주제여야 마땅했습니다. 하지만 34절을 보면 제자들은 유구무언입니다. 십자가 진리가 아닌 ‘누가 크냐’, ‘서열’을 주제로 쟁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크고 강대한 나라를 세울 때, 다른 제자들보다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쟁론이 일었다는 것은 제자들마다 내세우는 큰 자의 기준이 달랐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반석발언을 서열1위의 근거로 주장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피는 물보다 진하다’, 혈연관계를 ‘예핵관’의 근거로 제시했습니다. 안드레는 오병이어 역사의 주역임을 근거로 주장했습니다. 그러면 나머지 제자들은 가만히 있었겠습니까! 나다나엘은 순수한 성품을, 가룟 유다는 재정 담당을 리더의 근거로 제시했을 것입니다. 스스로를 작은 자로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을 멈추고 앉으사 제자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3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예수님은 첫째가 되고 싶은 제자들의 열정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열두 명밖에 안되는 작은 모임에서 무슨 첫째를 따져? 다 똑같아!’, 그리 말씀하지 않습니다. 일류인생, 빛나는 인생을 살고 싶은 열망 때문에 제자로 사는 것입니다.
다만 열망이 문제가 아니라 방향이 문제였습니다. 제자들은 자리가 일류인생으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이 어머니를 동원하여 예수님 좌우편의 자리를 청탁했던 이유도 그러했습니다. 첫째 자리에 앉아야 주목을 받고 파워를 갖습니다. 어찌하든지 일류대학에 가고 일류기업에 들어가려는 이유입니다. 정치인들이 권력의 자리에 오르려는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리가 높을수록 더 많은 사람을 움직일 수 있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최고 자리를 차지하는데 모든 에너지를 집중합니다.
그러나 첫째 자리가 일류인생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정신과 의사 김정일씨가 “강남은 거대한 정신병동이다”라는 책을 썼습니다. 그는 강남에서 정신건강센타를 운영하는데, 프로포폴로 불면을 해결받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다는데 놀랐습니다. 대한민국 첫째 동네가 빛나는 삶을 보장해주지 않았습니다. 몇 년 전 어떤 스텝목자가 자녀의 정신과 상담을 받고난 후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목자님, 혹시 ooo의사 알아요? 경성에서 성경공부 했었다던데...”, 그는 정신과 의사의 인생소감을 물어왔습니다. TV에도 제법 출연하는 의사여서 기대하고 찾아갔는데, 기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부모로서 아이에 대한 나름의 생각을 말했을 뿐인데, 정신과 의사는 ‘극대노’로 반응했던 것입니다. ‘정신과 의사가 어릴 적 부모에게 받은 상처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정신과 의사의 정신 상태를 우리끼리 진단하며 같이 웃었던 기억이 납니다. 탁월한 정신과 의사라고 해서 첫째 멘탈을 가지는 것이 아닌 것처럼, 최고의 자리가 최고의 인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뭇 사람의 끝이 된다는 것은 일등하지 말고 꼴등해야 한다는 말씀이 아니지요? 자리가 아닌 마음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는 것은 뭇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하찮아 보이는 인간조건을 가진 사람에게도 충분히 존중할 모습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뭇 사람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도록 돕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겸손한 마음, 심정으로 충만한 마음입니다. 사람을 도울 수 있는 자리에 있어도 사람을 존중하며 도와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누군가의 끝이 되어 그를 도와주려면 돕는 사람의 마음부터 건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tvN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요’라는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얼마 전 ‘전교 1등의 모친 살해 이야기’를 방영했습니다. 아들은 ‘전국 62등’까지 성적을 올렸는데, 엄마는 더욱 노력하라며 아들을 무섭게 체벌했습니다. 첫째 자리를 차지하는 최고의 아들을 만들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에게는 기대만큼의 능력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그런 아들을 인정하지 못하고 더 심한 체벌로 다그쳤습니다. 아들의 멘탈은 점점 무너져내렸고 결국 엄마를 죽이고야 맙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했던 엄마와 아들의 관계가 끔찍하게 끝나고 말았습니다. 엄마의 마음이 건강했다면 어떠했을까! 안타까웠습니다. 1등을 시키려는 엄마의 열망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나 상처나 탐욕에서 비롯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에 따라 섬겼다면 엄마의 열정과 사랑은 빛으로 역사했을 것입니다.
뭇 사람의 끝이 되고 뭇 사람을 섬기려면 탁월한 마음을 준비해야 합니다. 과거의 상처나 열등감, 비교의식이나 욕심 같은 어둠을 넘어서야 합니다. 때로는 세상 분위기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는 담대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며 사람을 살리는 거기에 올인할 수 있는 영성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붙들며 위기의 시간을 견딜 수 있는 인내도 갖추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떠오르는 인물은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조카 롯과 목장 문제로 다툼을 겪었습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리라’, 양보하자, 롯은 여호와 신앙보다 돈을 좇아 소돔과 고모라를 택했습니다. 그런데도 조카 롯이 포로로 잡혀가자, 자기 집 모든 사람을 동원하여 전쟁에 뛰어들어 구출해 옵니다. 조카사랑만 특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그네가 그의 집을 방문하면, 송아지를 잡고 빵을 구워 전심으로 대접했습니다. 신약에서는 바울이 떠오릅니다. 그는 바리새인중의 바리새인으로서 이방인이라면 치를 떠는 문화에서 자랐습니다. 이방인 혐오주의자가 되어야 마땅한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이방인들을 영접합니다. 고기 먹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면 함께 고기를 먹고, 고기 먹기를 싫어하는 사람이면 함께 채식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동족에게 오해도 받고 핍박도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이방인 돕기를 멈추지 않았고 그것을 기뻐하고 자랑했습니다. 정말 빛나는 마음, 정말 위대한 영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성경이 아브라함이나 바울을 기록해 놓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지, 당시 세상은 아브라함이나 바울에게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뭇 사람의 끝이 되어 뭇 사람을 섬기는 사람들은 사회 곳곳에 있습니다. 목자가 양을 섬기는 것도 그러합니다.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봉사활동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돈 쓰고 시간 쓰고 때로는 극심한 감정 소모도 겪습니다. 세상의 존경을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목자는 양 섬김을 기쁨으로 압니다. 섬길 양이 없어 슬퍼하고 제대로 섬기지 못해서 미안해합니다. 그런 목자들은 진짜 빛나는 영혼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주목이 없기에 가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주목받지 못하는 자리인 줄 알면서도 섬기는 사람이 있다면, 첫째 되는 영혼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그렇게 보십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을 주사 첫째 되는 인생길을 갈 수 있길 기도합니다.
예수님은 뭇 사람의 끝이 되며 뭇 사람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적용해주십니다.(36) 37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오늘날이야 어린이 세상이지만, 고대 세계에서 어린 아이는 숫자에도 치지 않을 정도로 무시하는 대상이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어린 아이처럼 무시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성숙하지 못한 사람,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그렇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때로는 그냥 마음이 가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사람처럼 흘려버리고 싶은데, 예수님은 그렇지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어린 아이를 영접해야 당신을 영접하는 것이며, 성부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해인이를 귀하게 섬기는 것이 성수목자를 귀히 대접하는 것이며, 성수 목자로부터 대접을 받으려면 해인이를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말씀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찾아와서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어린 양을 치라”(요21:15), 우리에게 보내신 사람들을 영접하고 섬기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본적으로 캠퍼스 양들이 그러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할 가족들도 내게 보내신 사람들입니다. 그들 중에는 양으로 삼고 싶은 사람도 있지만, 양으로 삼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인간은 하나같이 죄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목자를 거부하기도 하고, 반대로 어떤 목자는 양 삼기를 거부합니다. 그런 마음을 넘어서서 영접하고 섬겨나가는 거기에서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고 예수님 사랑에 대해 눈을 뜹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얻는 축복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 말씀을 제대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요한이 예수님을 찾아가 말합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함으로 금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은혜의 체험을 했다면 당연히 제자로 살겠다고 결단해야 할 터인데, 왜 은혜만 체험하고 결단이 없는가!’ 은혜에 걸맞는 결단이 없으니 예수님의 이름 사용금지 명령을 내렸다는 것입니다. 요한의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제자로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배와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도 버렸습니다. 그런데 버린 것 없는 사람들이 제자들과 동일하게 예수님 이름 권세를 누리고 있으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금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 권세는 특정인들에게만 허용된 면허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또한 제자들 입장에서 보면 금해야 할 일이지만, 하나님 편에서 보면 격려해야 할 일입니다. 당시는 핍박과 비방이 난무했던 시대입니다. 그런 시대에 살면서도 예수님을 반대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것입니다.(40)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며 물 한그릇 대접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기뻐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사람입니다.(41)
실제 현실에서는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인 것을 알면서도 겨우 물 한 그릇 가져오냐’ 핀잔줄 수 있습니다. 작은 사랑을 무시함으로 작은 사람을 실족시킬 수 있습니다. 그것을 왜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까! 4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실족하는 것을 그 사람의 문제로 떠넘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상처받고 힘들어질 사람이었어’,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자이지만, 하나님에게는 천하보다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연자맷돌을 비유로 들었습니다. 연자맷돌을 아십니까!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에 뛰어들면 세계적인 수영선수라도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이 비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경고이면서 지옥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에 대한 경고입니다.
43절을 보십시오. 만일 손이 범죄하게 하면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을 가지고 지옥 곧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손가락을 조심해야 할 인터넷 시대에서 정말 필요한 말씀입니다. 마우스나 키보드로 악플을 달거나 가짜 뉴스를 퍼뜨려 사람을 공격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45절을 보십시오. 발이 범죄하게 하거든 발도 찍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리 저는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강조하며 일탈의 자리, 선을 넘는 자리로 이동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47절을 보십시오. 만일 눈이 범죄하게 하면 눈을 빼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두 눈으로 죄를 짓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한 눈을 빼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습니다. 예수님 말씀은 정말 과격하십니다. 예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우리 몸 가운데 성한 부분이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부인한 베드로는 자기 혀를 뽑아냈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리 부담스럽고 거친 말씀을 쏟아내는 것입니까! 그만큼 하나님의 심판이 무섭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손이 찍히고 발이 찍히고 눈이 뽑히는 것을 가장 끔직하게 여기지만, 지옥의 형벌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작은 자 하나를 영접하고 섬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의 본성은 교만하여 본능적으로 작은 자를 영접하고 섬기기를 거부합니다. 자기를 높이고 남을 낮추는 데 익숙합니다. 아무런 각오 없이 어린 아이같은 사람을 영접할 수 없으며, 연약한 자가 실족하지 않도록 차원 높은 섬김을 할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언행을 부인하고자 치열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자기 손을 자르고 자기 발을 자르고 자기 눈을 뽑는 것 같은 처절한 싸움을 해야 합니다. 48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경험삼아서라도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곳이 있는데, 지옥입니다. 거기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영원한 고통을 의미합니다. 그곳에 던져지는 사람은 불에 톡톡 튀어오르는 소금처럼 처절한 고통을 당합니다.(49) 영원한 생명이 있듯이, 영원한 형벌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의 날을 맞이하기 전에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고자 힘써야 합니다.
한마디로 소금같은 인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50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제자들을 세상의 빛과 소금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가치가 없어집니다. 제자들이 갖추어야 할 소금의 맛은 겸손과 희생입니다. 그것은 제자들 스스로의 인성이나 노력만으로 갖추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 서로 다투는 제자들에게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말씀했습니다.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라면, 예수님은 제자들의 소금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섬김과 희생을 바라보고 받아들일 때 서로 화목할 수 있습니다. 누군가 섬기기 어렵다는 한계에 부딪힐 때마다 예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더이상 희생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올 때,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예수님의 섬김과 희생이 내 안에 들어와서 다시금 소금으로서 맛을 잃지 않게 합니다. 서로 화목할 수 있고 뭇 사람의 끝이 되어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