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박병수 외
■대상
도서관을 걸어 나간 책 / 박병수
도서관 서가書架의 오래된 책들은 하루가 지루하다
사람들의 손끝이 닿지 않는 곳에서 백 년을 기다렸다
심심한 날들은 서로를 읽는다
책 속의 구름은 나무를 읽고
새들은 하늘을 읽었다
신약의 예수는 나귀를 타고 반야심경 갈피에서 한나절 낮잠이 들기도 했다
도감 속 물고기들은 나뭇가지에 거꾸로 매달려 나뭇잎으로 흔들렸다
소설 속 상심한 남자가 이웃 시집으로 걸어가 시 한 편으로 살기도 했다
가끔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에 시집이 화들짝 부풀어지기도 했다
오래된 죽음이 어린 삶을 읽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두 강물이 서로에게 스며드는 소리가 들렸다
서로를 읽어가다 마지막 구절을 읽지 못하고
침묵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누구도 침묵 다음을 묻지 않았다
가끔 새벽이면 오래된 기침 소리가 들렸다
서가 끝에 굽은 등을 보이며
결가부좌의 자세로 꽂혀 있던 책
겉표지가 사라지고
책 속의 글자들은 지루한 의미의 그물에서 빠져나와
가까운 교회의 종소리로 흩어지거나
강물의 바람자국으로 사라지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얘기를 묶어 놓은 도서관
검색기로 검색되지 않는
소문처럼 떠돌던 책
노을이 햇빛을 끌고 하루의 뒤쪽으로 사라지고
검은 물감이 번지듯 책들 사이로 오래된 불면이 뒤척일 때
서재 밑 깊은 바닥으로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이제는 책이 아닌 그가 일어나
도서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빈 의자 / 권경자
엄마는 침묵하는 의자를 닮았다.
의자는 거실창가에 있어서
밖을 더 가까이 볼 수 있었다.
엄마의 부은 발목이 앉아서 쉬었던곳
그곳에서 간식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질주하는 자동차를 보며
흰 구름 속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도 세었다.
흔들의자에 몸을 맡기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채
하루종일 앉아 있던 곳
의자는 엄마의 삶을 고스란히 받아 주었다.
따사로운 햇살에 부드럽게 흔들리다가
스르르 낮잠이 들기도 했다.
때로는 의자 위의 잠이 평화로워 보였다.
어느날, 의자의 품에 안겨 먼곳으로 떠났다.
다시, 엄마를 앉힐 수 없는 의자
이제 가만히 제 몸을 들여다보며
긴 한숨을 몰아쉬는 엄마의 흔들의자
빈 의자엔 허기진 날들이 차곡차곡 앉는다.
소리가 사라지다 / 소영미
아버지 통로가 끊겼다
전화가 답답해 찾아가도 여전이 멍한 눈빛
읍내 금강보청기에 모셔갔다
전직 유도선수였다는 사장 무뚝뚝하게
노청입니다
노안과 같은데 안경은 당연하게 쓰고 보청기엔 인색하지요
귀가 안경 쓴 거와 마찬가지랍니다
삼백이 넘는다는 말에 입을 벌린 어머니와 나를 무심한 눈으로 쳐다본다
손을 내저으며 자꾸 나가시려는 아버지
무슨 일이 급한 듯
문밖이 바로 논인 듯 바깥으로 나가신다
그렇게 우렁차던 아버지가 소리하나 잡지 못하다니
소도 잡던 그 힘
가수보다 목청도 좋았는데
신바람도 잡아서 휘파람으로 날려 보내던 아버지
귀도 잘생겨 오래 살 거라고 흐뭇해하던 할머니
그런 귀가 사라졌다
대화가 달아난 아버지 늘 혼자다
어머니도 동네사람도
어떤 소리도 잡아다 주지 않는다
있어도 없는 듯 통로가 끊긴 채
남이 웃어도 눈치만 보며 너털웃음도 사라졌다
이명이 생기면 나중에 청력이 손상 된다
귀 먹이의 전조증상을 어쩌지 못한 채
시들어버린 음성
이명은 침묵보다 무섭다
귀 바퀴에 사는 벌레들의 노래를 방심하다
어둠겹겹 텅 빈 속
소가 되어버린 아버지
무거운 귀를 달고 논둑길을 혼자 걷는다
옥수수 수염 / 이용호(경남)
옥수수는
수염이 늙었는데도
이 하나 빠지지 않은 걸 보면
굉장한 비법이 숨어 있는 것 같다.
안테나처럼 치켜 선 수염은
아무도 손대지 않은 것들을 제일 먼저 챙겨
링거처럼 꾸준히 공급한 모양인데
옥수수수염이
혈관에도 좋고 뼈도 튼실하게 만드는 특효약이라고 하니
아마도 제 수염을 꾸준히 달여 마신 게 분명해 보인다
나는 매일 옥수수 수염차 티백을 우려 마시고
수염을 자르고 다듬어 염치도 챙기며 사는데
벌써 몇 번이나 치과에 들락거리며
이가 빠지는 것에 대하여 걱정하며 살고 있다
이참에 물구나무를 자주 서서
수염을 하늘로 솟구치게 해 볼까
아니면 아예 내 수염을 달여 먹어 볼까도 고민 중이다
폐경閉經 / 이용호(전남)
밤새도록 내린 봄-비에 잠을 설치고,
홍매화 지고 백목련白木蓮 활짝 피어나는 날,
존귀하신 손님이 찾아오셨네, 아무런 기별도 없이.
‘경經’께서, 「폐경閉經」께서 나를 찾아오셨네.
가슴속에선 검붉은 파문이 일고,
그 지명知命의 ‘만경홍파萬頃紅波’에,
잠자던 추억 하나-하나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고
움켜쥔 양쪽 손엔 땀이 흥건하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지난 삶을 복기復棋해 보네.
‘2남男-2녀女 키우느라, 내 꿈은 접어야만 했었지.’
‘가난했지만,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은 없었군.’
순간, 가슴속에서 짙푸른 한마디가 솟구치네.
“아~, 이 폐경閉經도, 하늘天의 뜻이겠구나.”
눈에선 눈물이 핑 돌고, 몸이 휘청하는 순간,
바로 옆에 서 있는 백목련白木蓮을 껴안아 버렸고,
목련-나무는 내 머리 위로 새하얀 꽃잎 한 장을, 마치
경전經典의 한 페이지처럼 내려주고 있네.
한복 고이 차려입고,
하늘天 앞에 합장한 채 서서
깊이 고개 숙여, 지천명知天命의 예禮를 갖춘 다음,
가슴의 문을 열고 ‘폐경閉經’-님을 맞이하는 순간, 나의
자궁子宮 속의 붉던 ‘월경月經’은 사라지고, 어느새
내 가슴속으로는 새 ‘경전經典’이 들어오네.
새하얀 <경經>이 들어오시네.
빗방울이 만드는 동그라미는 / 이호영
입을 벌리고 아 하는 발음이다
빗방울은 아 를 무수히 발음해 보지만 소리가 나지 않고
아 의 생각을 끊어낼 수가 없다
동그라미들에게서 이야기가 태어난다
동그라미는 계속 생겼다 없어지며 아 라고 입을 벌렸다가 오므린다
동그라미에서는 왜 구석기의 거친 돌 냄새가 날까
동그라미에서 몇 개의 말로 소통하는 구석기 사람들의 혀의 감촉이 건너 온다
옛사람들은 오랜 궁리 끝에 아 에서 하늘과 하느님과 환함과 새로움을 발견해냈지만*
지금은 수만 개도 넘는 말에 파묻혀 뿌리조차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
아 를 발견한 사람들의 후손은 동그라미에서 네모와 세모를 만들고 그 사이에서 무한 번식을 했다
아 의 뿌리와 줄기를 고민하는 동안은 이미 한참이나 증식해온 넓이다
잘못된 가계도라고 동그라미를 매도하는 이도 있겠지만 동그라미는 모두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
세상의 수많은 언어에 가지를 펼치고 잎이 흔들리는 동그라미와 네모와 세모
어떤 이에겐 이미 지워졌거나 어눌해진 아 가 줄줄이 새서 흘러내리고
어떤 이에겐 심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빨간 피가 될 수도 있다
지금도 이것들을 그림이라거나 기호라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을테고
백성을 지극히 사랑한 어진 대왕이 천재 학자들을 모아 손수 만들어 낸 거라고 박박 우길 수도 있지만
새로운 후대는 조용하거나 억센 아 를 계속 개발하고 있는지 모른다
빗방울의 차가운 동그라미가 계속 내 생각을 탈출하고 있다
* 구길수 <진본천부경> : 재야국어학자 구길수는 최치원이 지었다는 천부경 81자를 신비주의적 사상으로 해석하지 않고 이두로 해석하여 진짜 천부경의 찬가라고 함
2024 글로벌경제신문 시니어 신춘문예 대전 시부문 심사평
시 부문 응모작들의 주제는 다양했으나, 아무래도 인생의 가을, 겨울에 접어든 이의 마음 풍경이 주류를 이뤘다. 부모, 자식, 손자 등 가족에 대한 생각과 더불어 자연에 대한 애정이 그 풍경의 고갱이였다. 공동체를 함께 이루는 이웃에 대한 다양한 시각도 엿볼 수 있었다.
작품들을 읽는 내내 즐거웠다. 그만큼 수상작을 뽑는 일은 어려웠다. 상을 주고 싶은 작품이 넘쳤기 때문이었다.
수상하신 분들께 정말 큰 축하를 드린다. 아쉽게 뽑히지 못한 분들도 계속 정진하시길 바란다.
수상작 <폐경>은 신체 노화의 현상을 새 세계로 받아들이도록 이끄는 수작이다. 약간 능청스러운 표현으로 읽는 이를 미소 짓게 하는 경지가 돌올하다. 수상자의 다른 작품들도 한자어의 유희를 활용하고 있는데, 단순한 유희에 그치지 않고 삶의 비의에 접근하게 해 준다.
수상작 <옥수수 수염>은 동심이 노년을 지키는 힘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노화로 인한 근심을 시적 상상이 주는 익살로 다스린다. 수상자의 또 다른 작품 <바지에서>와 <다행이다>도 일상의 도(道)를 잘 전한다. 시어와 표현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것이 미덥다.
수상작 <소리가 사라지다>는 청력을 잃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상황을 담담히 전하는데, 읽는 이는 가슴이 먹먹해진다. 수상자의 또 다른 작품 <굴피 집 노인>, <고비사막>도 서경을 서정으로 이끄는 힘이 있다. 단단한 구성력은 오랜 시작(詩作)의 결과일 것이다.
수상작 <빗방울이 만드는 동그라미>는 발상과 구성이 독창적이다. 활달한 상상 덕분에 시적 시공간이 길고 넓다. 자신만만하게 언어를 부리는 것이 돋보인다. 수상자의 또 다른 작품 <세종호수 뒤집기>도 개성이 빼어나다. 시니어 문예상에서 이런 작품을 자주 봤으면 좋겠다.
수상작 <빈의자>는 정제된 표현의 격이 장점이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심상을 의자에 기대어서 은유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여운을 선사한다. 수상자의 다른 작품 <감자>, <아파트 공사장>도 은은한 울림을 준다. 앞으로 시의 위의를 지키며 독창적 영토를 만들어나가리라 믿는다.
시부문 심사위원 장재선
첫댓글 시니어 수준이 전년에 비해 상당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