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낙양에는 이르렀건만
낙양으로 돌아온 동탁은
문무백관을 조당에 모아 놓고 도읍 옮기는 일을 상의했다.
"동도 낙양은 제실이 옮겨온 지 2백여 년, 이미 그 기운과 천수가 쇠했다.
내가 보기에 이제 왕기는 서쪽 장안에 있으니 어가를 모시고 서쪽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대들은 각기 떠날 채비를 서두르라."
동탁이 백관에게 상의라기보다는
일방적인 통고를 하자 먼저 사도 양표가 반대하고 나섰다.
"장안이 있는 관중 지방은 부서지고 무너져 폐허에 가깝습니다.
이제 까닭 없이 종묘를 그곳으로 옮기고 이곳의 황릉을 버리신다면
틀림없이 백성들이 두렵고 놀라 소동을 일으킬 것입니다.
천하가 동요하기는 매우 쉬우나, 다시 안정시키기는 지극히 어렵습니다.
바라건대 승상께서는 깊이 헤아리고 살펴 행하십시오."
"너는 나라의 큰 계책을 훼방하려 드느냐?"
동탁이 성난 목소리로 양표를 꾸짖었다.
그러나 다시
태위 황완이 일어나 양표를 거들었다.
"양사도의 말이 옳습니다.
지난날 왕망이 나라를 도적질할 때와 적미가 왕망을 내고 다시 한을 일으킬 무렵
세력을 떨쳤던 유관들과 분탕을 칠 때 장안을 불태워 지금은 기와 조각과 주춧돌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거기다가 백성들도 모두 그곳을 버리고 떠나 백에 한둘도 남아 있지 않은 폐도입니다.
이제 이곳의 궁실을 버리고 황폐한 그 땅으로 옮기는 일은 결코 사리에 맞지 않습니다."
"관동에 근왕을 내세우는 도적들이 일어나 난리가 천하에 번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실정이다.
장안은 효산과 함곡관 같은 험한 요해가 가로막고 있어 도적을 막아내기 좋은 땅이다.
다소 황폐했다 하나
농우지방이 가까워 나무와 돌과 기와와 벽돌 따위를 구하기 쉬우니
몇 달 안가 궁실을 지을 수가 있다.
그대들은 더 이상 어지러운 말을 늘어놓지 말라."
동탁은 황완을 엄하게 꾸짖을 뿐만 아니라
다른 대신들까지 험한 눈으로 흩어보며 그 입을 막으려 들었다.
그런 동탁의 심기를 사도 순상이 다시 건드렸다.
"승상께서 만약 도읍을 옮기신다면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켜 결코 나라가 평안치 못할 것입니다.
다시 한번 헤아려 주십시오."
그러자 동탁도 더는 참지 못했다.
얼굴이 벌겋게 성을 내며 소리 높여 꾸짖었다.
"나는 천하를 위해 이 계책을 세웠다.
어찌 작은 백성들에 구애될까 보냐!"
그러고는 양표 황완 순상 등을
그날로 벼슬에서 내몰아 서민으로 만들었다.
동탁이 그토록 엄하게 천도를 강행하려드니
가뜩이나 사람다운 사람이 없는 조정이라 더 반대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모두가 말없이 동탁이 정한대로 따를 뿐이었다.
☆☆☆
그런데 겨우 도읍 옮기는 일을 알았는지
동탁이 조당을 나와 수레로 오르려 할 때였다.
젊은 벼슬아치 둘이 수레를 향해 손을 모으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상서 주비와 성문교위 오경이었다.
전날 원소가 동탁에게 항거하여 낙양을 떠났을 때
원소에게 태수 자리를 주어 달래라고 진언한 사람들이었다.
평소에는 그 제주와 학식을 아껴 두텁게 대하던 동탁이었으나
원소가 주동이 돼 근왕병을 일으킨 뒤에는 둘을 은근히 미워하기 시작했다.
그런데다 이제 그 원소가 이끄는 제후들에게 쫓기어
도읍까지 옮기게 되자 더욱 심사가 틀어졌다.
"무슨 일이 있는가?"
수레를 멈추고 묻는 동탁의 어조에는 이미 역정이 배어 있었다.
하지만 자기 생각에 젖어 남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하는 게
또한 재주 있고 학식 많은 이들의 단점이다.
오경과 주비도 그와 같아서
동탁의 마음속은 헤아려 보지도 않고 제 생각만 드러내기에 바빴다.
"승상께서 도읍을 옮기시려 한다기에 그 그릇됨을 간 하고자 왔습니다."
그 말에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동탁의 분통이 일시에 터졌다.
"내가 너희 둘의 말을 듣고 원소를 살려 쓴 게 오늘 이 화를 불렀다.
이제 원소가 반역을 꾀했으나 그놈을 두둔한 너희 둘도 한 패거리임에 틀림없다.
그런 놈들이 무슨 소리를 하려느냐?"
그렇게 꾸짖은 후
무사를 불러 두 사람을 끌어낸 뒤 목을 베어 성문에 걸게 했다.
바른 소리를 하려던 게 오히려 동탁에게 자기들을 죽일 구실을 주어 버린 셈이었다.
갸륵한 뜻에 비해 지나치게 허술한 그들의 살핌이었다.
양표 황완 순상 세 사람을 벼슬에서 내쫓고
오경 주비를 목베어 더욱 엄하게 영을 세운 동탁은
즉시 천도를 단행하여 이튿날 안으로 떠날 준비를 하게 했다.
영을 받은 이유가 가만히 동탁에게 와서 말했다.
"이제 떠나려 해도 중도에 쓸 돈과 곡식이 적어 쉽지가 않습니다.
낙양에는 부호가 많으니 그 재산을 몰수해 쓰는 게 좋겠습니다.
원소와 한패로 몰아 그 족당을 죽이고 가산을 몰수한다면
남의 이목도 피하고 수만 금은 쉽게 모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것 낸 이유의 못된 꾀 가운데서도 가장 못된 꾀였다.
하지만 그 나물에 그 밥이라 동탁 또한 이유의 주인 노릇에는 모자람이었었다.
그 자리에서 한번 망설임도 없이 이유의 말을 받아들였다.
"철기 5천을 거느리고 가 그 말대로 시행하라."
이에 이유는 수천 호가 넘는 낙양의 부호들을 모조리 잡아들이고
그 집에는 반신 역당이라고 크게 쓴 기를 꽂아 두게 했다.
그리고 잡아온 부호들은 모조리 성밖으로 끌어내 목을 벤 뒤
그 재산을 거두니 실로 거만이 넘었다.
그 다음은 일찍이 유례가 없을 만큼 끔찍한 강제 천도였다.
이각과 곽사를 시켜 수백만 낙양 인구를 장안으로 끌고 가는데,
백성 일대마다 군사 일대를 붙여 감시케 했다.
제후들의 추격이 두려 우니 길을 재촉할 수밖에 없고,
길을 재촉하니 먼길에 익숙하지 않은 백성들이 배겨낼 도리가 없었다.
늙고 병든 자나 어린아이와 힘없는 부녀자들의 시체로
도중의 구덩이란 구덩이는 모두 메워질 지경이었다.
끔찍한 일은 그뿐이 아니었다.
동탁의 군사들이란 게 태반은 강인이나 변방의 부랑자들이라
기강이 서 있지 못했다.
백성들의 아내와 딸을 겁탈하고, 가진 재물을 빼앗으니
애처로운 비명과 구슬픈 통곡소리가 하늘과 땅에 가득했다.
또 동탁은 낙양을 떠나기에 앞서
도성의 여러 문과 종묘며 궁궐에 불을 지르게 했다.
불길이 어찌나 맹렬한지 남쪽과 북쪽 두 궁궐의 불길이 서로 잇닿았다.
거기다가 제후들의 군사들이 거처로 사용함을 꺼려 민가에까지 불을 지르니
하루만에 낙양은 잿더미로 변했다.
동탁의 흉악한 짓은
여포를 시켜 여러 황제와 후비들의 무덤을 파헤치게 함으로써 절정에 달했다.
여포가 능침을 파헤쳐 거기 묻힌 금은보화를 꺼내는 틈을 타
군사들은 백성들의 무덤까지 파헤쳐 값나갈 것은 모조리 꺼냈다.
그렇게 해서 모은 금은과 명주 비단 등의 보화가 천 수레를 넘었다.
동탁은 그 수레를 앞세우고
어린 황제와 후비들을 낀 채 장안을 바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든 일이 하루 사이에 일어났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철저한 파괴였고,
수백만 백성이 살던 낙양이라고는 짐작도 안될 만큼 남김 없는 강제 이주였다.
사수관 밖의 제후들이 동탁의 장안 천도를 안 것은
그 길로 조잠이 스스로 관문을 열고 항복한 뒤였다.
동탁이 낙양을 불사르고
황제와 백성들을 이끈 채 장안으로 가 버렸다는 소식을 들은 조잠은
미씸관 아래까지 와 있던 손견에게 항복해 버린 것이었다.
☆☆☆
손견의 군사들이 사수관을 거쳐 낙양으로 들어갈 즈음
유비와 관 장 형제도 사기를 잃은 동탁의 잔병을 쳐부수고 호로관으로 들어갔다.
그 뒤를 8로의 제후들도 분분히 군사를 끌고 따랐다.
사수관이 보다 가까워 가장 먼저 낙양으로 입성한 것은 손견이었다.
말 위에서 사방을 돌아보니 불꽃은 하늘을 찌르고 검은 연기는 땅을 가득 덮고 있는데,
부근 백 리에는 사람의 그림자는 물론 개나 닭조차 보이지 않았다.
손견은 군사들을 풀어 불부터 끄게 했다.
손견의 군사들이 간신히 불길을 잡았을 무렵하여
다른 제후들도 각기 군사를 이끌고 낙양에 이르렀다.
그러나 바람을 피할 민가 한 채 성한 게 없음을 보자
각기 낙담한 얼굴로 폐허에다 군마를 주둔시켰다.
변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동탁의 그 같은 도주에 모두 망연할 뿐이었다.
그때 다시 나선 것이 조조였다.
이끄는 군사를 둔병시키지도 않고 똑바로 원소를 찾아온 조조는
진영을 베풀고 있는 원소에게 나무라듯 물었다.
"이제 역적 동탁이 서쪽으로 도망치고 있으니 승세를 타고 추격해야 할 것이오.
그런데 본초는 어찌하여 군사를 세워 두고 움직이지 않소?"
마음이 급하다 보니
맹주에 대한 예마저 많이 줄어든 듯한 조조의 말투였다.
원소가 심드렁한 얼굴로 대답했다.
"제후들의 군사들이 모두 지쳐 있으니,
움직여도 아무런 이득이었을까 두려워서 외다."
"동탁이 궁실을 불태우고 천자를 잡아가니
나라가 흔들리고 민심은 의지할 바를 모르고 있소.
비하여 하늘이 무너진 것과 같소.
이때 한 싸움으로 천하를 안정시켜야 할 것인데,
제후들은 무엇이 두려워 망설이기만 하고 움직이지 않으시오?"
조조는 다시 그 자리에 있는 제후들을 충동해 보았다.
그러나 대답은 원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지금은 가볍게 움직여서 아니 되오."
겉으로 보기에는 무슨 깊은 생각이라도 있는 것 같았지만
실은 모두 갑작스런 변화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에게는 아직 그 변화의 처음과 끝이
조조처럼 요연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조조는 두 번 세 번 그들을 깨우쳤으나
그들은 얼른 그 망연함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이 더벅머리 덜 자란 아이놈 같은 자들과
무슨 일을 함께 할 수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