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고 전합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할 수 없었다’)라는 말이 하느님의 경우에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대해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할 수 없었다’)라는 말의 뜻 가운데 하나는 단순히 인간의 자유의지의 한계를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서 나자렛에서 어떠한 기적도 행하실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의 불신 때문이었습니다(참조: 마태 13,58; 마르 6,5). 치유의 기적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쪽 모두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습니다. 환자에게는 믿음이고, 치유자에게는 치유할 수 있는 신적 능력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동의, 믿음 없이는 일방적으로는 ‘하실 수 없었습니다.’ 즉, 상대방의 믿음 없이는 기적들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치유의 기적의 경우에만 그런 것이 아니라, 윤리적인 삶의 변화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본인이 변하겠다는 의지가 없으면, 옆에서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고, 아무리 기적을 일으켜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 『성자』(연설 30) 10-11.)
참고로, 그레고리우스는 326년경에 아리안주스에서 태어나 알렉산드리아와 아테네에서 공부한 폰투스의 광야에서 은둔 수도생활을 하던 친구, 유학시절에 만났던 친구, 바실리우스를 찾아가 은둔 수도생활을 같이 했습니다.
그런 다음 고향으로 가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레고리우스의 아버지는 나지안주스의 주교였습니다. 동방 교회에서는 사제가 결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사제가 되어 자신을 도와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그레고리우스한테 사제품을 주었습니다. 사제품을 받고 다음날 그레고리우스는 바실리우스가 있는 폰투스로 도망갔다가 몇 개월을 지내다가, 362년 부활절에 돌아와 사제로서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어쩔 수 없이 얼마동안 나지안주스의 주교직을 맡았습니다. 그러다가 나지안주스 주교직을 사임하고 은둔 수도생활에 전념했습니다.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총대주교가 되었으나, 이 직무를 맡은 지 몇 주 뒤에 주교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 수도생활을 했습니다. 나지안주스는 오늘날 터키(튀르키예)의 카파도키아 지역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의 기적을 일으키시기 전에 먼저 믿음을 요구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의 치유 기적의 힘은 인간의 불신을 이겨내며, 믿는 이들 가운데에서는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의지는 하느님의 은총과 선물을 거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비를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저항한다고 해도, 하느님의 자비는 끝내 가로막히는 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한테는 불가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속박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거슬러서 치유의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당신께 반항하고 저항하는 인간의 자유마저도 존중해주십니다. 바로 이것이 하느님의 위대하신 사랑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느님의 크신 사랑마저 거부하고 반대하는 요상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음의 극치인 불신과 교만을 우리 모두 떨쳐버립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