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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돌자연학교 중고등부의 네 가지 핵심 교육 목표
1) 성경적 세계관 확립
2) 인문 고전 독서를 통한 지성의 함양
3) 진화론 대신 창조과학에 입문하기
4) 학창시절에 영어 끝내기
※ 4가지 목표에 대해 한 가지씩 글로 올려드릴 예정입니다.
<성경적 세계관의 확립>
교과서 없는 중고등부는 어떻게 가능한가, 라는 글을 쓴 게 벌써 이태 전인 것 같습니다. 그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저의 외침은 광야의 외침처럼 고독하고 허공에 외치는 것 같은 힘겨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세상이 조금 바뀌었습니다. AI 기반의 챗지피티라는 것이 생겨나면서 이에 대한 경각심이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챗지피티에 대해서는 다른 지면을 통해 고찰해보기로 하고 이 글에서는 사람의 지적 영역을 깊숙이 침투해오고 있는 챗 지피티라는 새로운 기술이 저의 광야의 외침을 더 이상 공허하게 만들고 있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만 언급하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겠습니다.
사람들, 특히 우리나라의 학부모님들은 ‘교과서 없이’ 공부한다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과서가 모든 ‘시험’의 기준이고 좁게는 ‘내신’ 최종적으로는 ‘대입’이란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수능은 교과서의 자리를 상당히 멀리 밀어내고 있긴 합니다만 ‘내신’까지는 어쩔 수 없이 교과서를 기준으로 하다 보니 여전히 교과서는 우리 학부모님들의 뇌리에서 밀려날 수 없는 견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쳇 지피티의 등장으로, 그랬던 부모님들의 뇌리 속에 드디어 교과서에 대한 의심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교과서로 공부해서 좋은 내신을 딴다고 하더라도 과연 우리 아이가 대학을 가거나 혹은 그 이후의 삶을 살아갈 때 ‘이렇게’ 공부한 것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라는 새로운 불안이 싹트기 시작한 것입니다.
교과서 없이 공부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 이제는 교과서로 공부한 것에 대한 불안으로, 일부 부모님들에게는 아주 살짝, 부모님들의 의식 수준에 따라서 매우 심각하게 전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적인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교과서’ 사용 그 자체를 넘어서는 교육에 대한 보다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중고등부, 다시 말해 청소년기 시기에 우리가 우리 아이들에게 제시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적 이슈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즉 우리는 청소년기의 시기에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서 무엇을 전하고 가르쳐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학교에서 교과서 없이 공부한다는 것은 단순히 ‘교과서를 쓰지 않는다’는 차원을 넘어섭니다. 우리 학교는 청소년기 시기에 마땅히 배우고 익히며 훈련해야 할 가장 중요한 교육의 주제를 네 가지로 정리하여 이 네 가지 목표를 향해 전진해갈 것입니다. 교과서를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육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중요한 방편일 뿐입니다.
교육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편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그 목표 자체를 들여다보는 일이 참으로 필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적 세계관의 확립, 인문 고전 독서, 창조 과학 입문, 그리고 학창시절에 영어 끝내기 이렇게 네 가지로 제시하고자 합니다.
그 네 가지의 첫 번째는 ‘성경적 세계관의 확립’입니다. 우리 산돌자연학교 아이들은 초등 1학년 때부터(유아학교에서는 유아부터) 말씀을 배우고 암송해왔습니다. 초등 과정까지 예배와 성경공부 시간을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을 듣고 기도하는 훈련을 꾸준히 해온 친구들이 이제 청소년기에 이르러서는 보다 명확한 ‘성경적 세계관의 확립’이라는 과제 앞에 서게 됩니다.
네 가지의 목표에 대해 하나 하나 별도의 글을 통해 상세한 설명을 해나가려고 합니다. 우선 그 첫 번째 목표인 ‘성경적 세계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독교학교교육연구소 박상진 소장님의 강연에 따르면 일반 학교를 12년 다닌 아이들은 90%의 아이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게 된다고 합니다. 실제로 대학생의 복음화율은 3% 정도라고 하는데, 그 전까지 교회를 다니던 아이들도 대학에 들어간 이후로는 믿음을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 원인은 12년간 배운 교과서 지식에 있다고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는데, 이때 들음을 ‘지식’이란 말로 바꿔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매일 듣고 배운 대로 믿게 됩니다. 믿는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믿는 대로 보게 됩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도 있지만 이는 곧 아는 것이 믿음이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세계관이란 세상을 보는 눈을 말합니다. 12년간 매일 교과서로 배운 아이는 세상을 그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부정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지식은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예를 들어 교과서를 통해 결혼은 남녀가 하지 않고 같은 성도 할 수 있고 법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고 배우면 아이들은 그렇게 믿게 되고, 그 믿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것은 세속 가치의 보편화라는 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크리스천들이 결코 따라서는 안되는 마르크스로부터 비롯된 유물론적 세계관, 다윈에게서 시작한 진화론적 세계관, 그리고 프로이트에서 기원한 쾌락주의적인 세계관이 12년이라는 긴 학창시절을 통해 자기도 모르게 형성되어간다는 것입니다.
학교에서 12년간 배운 아이들은 하나님이 없고 세상은 물질, 혹은 돈이 지배한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원숭이에서 진화한 것이고 이 세상은 우연히 진화해서 형성되었다고 믿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자신의 쾌락을 추구할 권리와 자유가 있기에 모든 ‘사랑’은 다 존중받아야 한다는 ‘쿨’한 생각들을 갖게 됩니다.
기독교 학교는 아이들이 세상을 이러한 반 성경적인 세계관이 아니라, 성경적인 세계관으로 바라보도록 교육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특히 청소년기 시기에 성경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교육하고 훈련하는 일은 기독학교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입니다.
여기서 잠깐 어떻게 청소년기 시기에 세계관 확립이 가능한가 하는 질문을 하시는 분도 계실 줄 압니다. 보통 청소년기는 대학을 가기 위한 기초 학문을 익히는 곳이고 세계관 확립은 대개 대학에 가서 이뤄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흔히 질풍노도라고 표현하는 청소년기의 시기는 그야말로 자아 정체성의 혼란기이기에 더더욱 세계관 확립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냐고 반문을 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만약 이 세상이 ‘정상적’이라면 여전히 유효할 수도 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이렇게 여유 있는 성장 방식을 허락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청년의 때가 아니라 청소년의 때에 여호와를 기억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저는 청소년기에 성경적 세계관을 확립해야 한다는 과제를 ‘영적 조기교육’이라고 부르고자 합니다. 대학에 가서 깊이 있는 학문과 신앙 훈련을 통해 성경적 세계관을 확립한다고 하는 생각은 이제 너무 낭만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이 아직 부모님의 슬하에 있을 때, 그리고 기독학교의 울타리 안에 있을 때 세계관이 확립되어야 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미 확립된 세계관을 가지고 대학, 혹은 사회라는 곳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영적 조기교육은 일반적 의미의 조기교육과는 궤를 달리합니다. 일반적 의미의 조기교육은 너무 이른 영유아기부터 앞으로의 대학과 직업을 위해 필요하다고 인식되는 영어, 한글, 수학 등의 인지적 교육을, 아직 수용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많이 시킬수록 인성을 망가뜨림에도 불구하고 욕심껏 시키는 교육을 말합니다.
하지만 영적 조기교육은 오히려 일찍 시작해도 충분히 수용이 가능하고 제대로 많이 하면 할수록 인성을 함양하고 아이들을 겸손하게 만들 뿐 아니라 대학 이후 평생의 삶에 든든한 기초가 되어주는 교육입니다. 영적인 환경이 극악해지면 질수록 영적 조기교육의 필요성은 더더욱 확고해집니다.
아이들은 언제부터 말씀 교육을 시작해야 할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라 말하며 그 말씀대로 순종하는 교육은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이제 겨우 말문을 여는 영아기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이것은 흔히들 말하는 ‘종교’를 강요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님이 아이들에게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영아기부터인데, 이것을 가지고 부모님이 아이들을 권위적으로 기른다고 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권위주의가 아닌 권위, 종교가 아닌 참 믿음을 어린시절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이렇게 말문을 여는 순간부터 시작된 말씀 교육은 청소년기에 이르러, 스스로 그 말씀에 입각하여 생각하고 상황을 분석하고 말씀을 적용하여 실천할 수 있는 데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한 사람이 어떤 상황 앞에서 말씀에 입각하여 스스로 생각하고 적용하여 실천할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세계관이 형성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의할 점은 세계관이란, 그럴듯한 이론을 머릿속에 장착하여 말로써 표현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세계관이 있다는 것은 생각도 그렇게 하고 행동도 그렇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관이 없는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일관된 세계관을 가진 사람은 드물고 더욱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고 하겠습니다.
스스로 크리스천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세계관이 성경적,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바르게 형성되어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무서운 것은 예수님이 분명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적다고 하셨는데, 우리 주변에 보면 성경을 읽으면서도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생각도 하지 않고 행동은 더더욱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처치키즈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 말은 교회를 엄청 자주 다니는데, 겉모습만 그럴 듯한 신앙인인 경우에 쓰는 말입니다. 저도 그 처치키즈 중의 하나였습니다. 일주일에 학교 가는 시간을 빼면 거의 교회에서 살다시피 했기 때문에, 교회적인 언어, 교회적인 문화, 교회적인 외양들은 모두 갖추고 있는데, 실상 내가 생각하는 것, 느끼는 것, 따라서 실제로 행동하는 것은 성경과는 무관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요? 이것을 학교 교육과 연관지어 분석을 해보았습니다. 제가 그렇게 된 원인은 우선 교회는 ‘다니고’, 교과서는 ‘배웠기’ 때문이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것과 교회를 다니며 들은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학교에서 배운 것이 진리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머리로는 교회에서 배운 것이 옳다고 우기고 있었지만 실제로 믿는 것은 세상의 지식과 문화, 분위기였습니다.
교회는 정말 열심히 다니고 수련회 문학의 밤, 집회에 참여하며 처치키즈로는 살았지만 세계관은 완전히 세상적인 그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이중화된 크리스천은 실제로 세상에 나가서 절대 영향력 있는 크리스천이 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아마도 대략 1990년대 이후, 21세기 초부터라고 여겨집니다만, 교회의 양적 부흥이 정점을 찍고 조금씩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던 무렵부터일 것입니다. 교회내외적으로 겉모습은 완전히 크리스천이지만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은 크리스천이 아닌 크리스천들에 대한 자각과 비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세계관에 대한 관심도 그 이후로부터 서서히 태동하다가 근래 들어 상당히 고취된 것 같습니다. 앞선 글에서도 말씀드렸지만 바로 이 시기가 기독교대안학교 운동이 일어난 시기와도 일치합니다.
영향력이 없는 크리스천, 겉과 속이 다른 크리스천, 삶과 신앙이 분리된 크리스천 등으로 비판받기 시작한 기독교에 대해 많은 반성과 성찰이 이루어져왔습니다. 세계관이라는 말은 바로 그러한 성찰에 대한 하나의 매우 유의미한 답변으로 존재한다고 하겠습니다.
겉과 속이 다르고 삶과 신앙이 분리되고, 그래서 아무런 선한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된 원인이 무엇일까요. 바로 우리들이 교회는 오래 다녔지만 우리 안에 성경적인 세계관이 확립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말씀도 읽고 예배도 참석하고 기도도 하는데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과 현상을 해석하는 방법, 그리고 그에 따르는 행동은 세상 사람들과 거반 다를 바 없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결국 교회를 오래 출석하고 예배를 많이 드린다고 해서 그 사람의 속, 생각과 판단과 ‘관’까지 바뀌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요. 그리고 그것은 언제 형성되는 것일까요.
우리는 이 근본적인 질문 앞에서 청소년기와 유년기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성경적 세계관이 아니라면 우리는 분명 다른 세계관, 아니 세계관들을 뒤죽박죽 가지고 있습니다. 일관되지도 못한 비성경적인 세계관들이 내 안에서 형성된 것은 사실 오랜 시간 다녔던 학교, 오래 동안 노출되었던 언론과 미디어, 오래 교제해온 관계들 때문입니다.
교육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자리이므로 그 중에서 학창시절 12년에 대해서만 고찰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사실은 일주일에 한두번 가는 것이 고작입니다. 가서도 한두 시간 보내고 오면 다입니다. 매일 성경을 읽는다고 해도 하루에 30분입니다.
한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형성하는 기본이 되는 앎과 배움에 있어서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의 시간을 ‘학교’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매일 학교에서 최소 6~7시간, 학원공부까지 합치면 매일 10시간도 넘는 시간 동안 세상의 지식을 읽고, 외우고, 시험 칩니다.
잘하건 못하건에 상관없이, 흔히 ‘중립적’일 것이라고 생각되는 지식들을 12년이라는 긴 세월(시간이라기보다 세월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동안 배우고 익히고 시험을 치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어떻게 성경적인 ‘세계관’이, 아무리 중고등부 예배를 잘 드린다고 해도 형성될 수 있겠습니까. 천만 크리스천 시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사실 속까지, 그 마음과 생각, 세상을 보는 눈까지 크리스천인 사람이 많지 않은 진짜 이유가 아닐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기독교학교의 사명이 분명해집니다. 우리는 처치키즈를 양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교회 잘 다니고, 학교 공부도 열심히 하는, 겉보기로 반듯해 ‘보이는’ 사람을 기르자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생각과 관점, 그래서 행위조차 그 관점과 일관되게 하나님 편에 선 아이를 길러내자는 것입니다. ‘세계관’이 성경적으로 형성된 아이들을 대학과 세상으로 내보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 성경적 세계관은 어떻게 형성될 수 있을까요. 세계관 형성이라고 해서 특별한 방법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예배가 기본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고 기도하고 찬양을 올려드리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기독학생의 도리입니다. 성령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지 않으면 성경적 지식조차 자만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아이, 예배자로서 설 수 있는 아이들을 길러야 합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예배만으로는 성경적 세계관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과 진리이시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하심과 더불어 진리의 탐구, 지적 영역의 궁구가 필요합니다. 흔히 영성과 지성이라는 두 가지 영역은 바로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하기에 두 가지 영역 모두에서의 성장이 필요합니다.
세계관의 형성은 이 중에서 지성의 영역이며 영성에 의해서 인도되되 별도의 탐구가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적 세계관 형성을 위해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면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실제로 삶을 살아낸 인물을 배우는 일입니다. 우리 학교에서 신앙의 인물을 ‘살아있는 책’을 통해 탐구하는 수업이 모든 학년들에 있는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모델을 보고 따라하는 것 이상의 좋은 교육법은 없습니다.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님이 있다면 그 자녀는 거의 100% 성경적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 방법은 탁월한 기독교 고전을 읽어내는 일입니다. 예컨대 [천로역정]은 청소년기에 읽어야 할 필수 고전에 속합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 존 밀턴의 [실낙원] 등등 셀 수 없이 많은 귀한 책들이 있습니다. 깊은 통찰과 영감을 주는 기독교 고전들을 통해 세상을 보는 그리스도인의 눈이 열리게 되기에 우리 학교는 중고등부 시기에 이런 책들을 읽게 합니다.
고등학생 정도는 모르겠는데 중학생 정도의 아이들에게는 이런 고전 교육이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초등에서 고등으로 넘어가는 중등 과정에서는 기독교 인물을 중심으로 탐구를 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우리 학교에서도 그런 방법을 활용합니다. 샬롯 메이슨이 말한 것처럼 인물이나 역사를 따라가는 것은 비교적 어린 아이들에게도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도 진지하게 깊은 물음에 다가갈 수 있게 하는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방법이 있다면 필드트립, 비전트립을 통한 실제 세계와의 만남이겠습니다. 가난한 나라에도 가보고 잘 살지만 믿지 않는 나라, 믿음의 전통을 지키고 있는 선진국에도 가보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세상 가운데 실제로 역사하시는지를 바라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방법들을 통해 참되고 깊이 있게 성경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고 행동할 수 있도록 우리 아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아이들은 대학에 가기 전, 사회로 나가기 전 청소년기에 성경적 세계관을 든든하게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독교 학교에서 아이들의 세계관이 바르게 세워질(정립) 수 있도록 세심하고 깊이 있게 ‘긴 시간’을 들여서 도와줘야 합니다.
청소년기 시기에 필요한 여러 가지들이 있겠지만 그 어떤 것도 ‘성경적 세계관의 확립’보다 우선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이 세계관이 아이들에게 형성되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방해하는 사단의 계략을 갈파하고 이를 대적하며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하겠습니다. 스마트폰과 ‘친구’라는 핑계로 파고들어오는 ‘수평적 세계관’을 경계하며 가장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하여 묵묵히 걸어가는 기독학교, 기독학부모, 기독학생이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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