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원
양명여자고등학교 2학년 이수인
가짜 향기
나는 13년 9개월 만에 죽었다. 3월 17일, 막 봄이 시작되던 때였다. 아직 살아있었다면 나는 꽃다운 중학교 2학년 소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죽은 지 11개월 만에 백골이 되어 말라 비틀어진 미라의 모습으로 발견되었다. 나를 죽인 사람은 내 아빠였다. 단 한 번도 삶을 꽃피워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야 했던 내 자신에게 애도를 표하며 내 이야기를 시작해보려 한다.
이불로 덮인 내 시신은 방향제와 향초, 습기 제거제 같은 것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빠는 내 죽음을 감추기 위해 매일같이 새벽에 몰래 환풍기를 돌렸다. 그것들 때문인지 그렇지 않아도 작았던 내 체구는 더욱 줄어들어 초등학생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나를 부천 여중생 사건이라고 기억한다. 내 나이의 여자아이에게 사람 이름이 아닌 사건으로 기억된다는 것이 얼마나 슬플 일일지 모를 것이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에 내가 오르내리고, 나를 추모하는 애도 물결이 이어지고, 나에 관한 기사가 하로에도 수십 개씩 올라왔지만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그저 ‘부천 여중생 A양’이었다.
죽음이 오래되면 모든 것이 무디어진다. 이제 내 죽음에 대해 떠오르는 것은 내 위에 뿌려진 방향제와 새벽마다 몰래 돌아가던 환기구 소리 뿐이다. 죽음은 그런 것이다. 구타와 학대, 상처입은 영혼조차도 가짜 향기와 환기구 소리 속에 사라지는 것.
어쩌면 나는 13년 9개월이라는 짧은 삶 내내 가짜 향기에 덮인 채로 살았는지도 모른다. 썩은 상처와 아픔이 내는 악취를 풍기는 진짜 냄새를 덮은 감짜 향기인 방향제 아래에서.
나는 초등학교 때부터 가정폭력과 아동 학대 속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용기를 내 담임에게 찾아가 학대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담임은 그저 조용히 나를 집으로 돌려보낼 뿐이었다. 학대를 당하는 아이에게 접은 지옥이나 다름없는 곳이다. 만약 그때 나와 상담을 해주었거나 학대여부를 알아보는 조치를 해 주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내 상처가 썩어가는 줄도 모르고 가짜 향으로 나를 덮기에만 급급했다.
어른들은 가출 청소년을 집으로 돌려보내려고만 하지 경찰서로 데려가 줄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집은 좋은 곳이고 집을 나온 아이들은 비행 청소년이 된다. 언제나 가출 청소년이란 말은 비행 청소년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가 된다. ‘행복한 가정’은 세상에 가득 뿌려진 방향제이다.
나는 학교가 좋았다. 학교에 있는 시간만큼은 무자비한 구타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나도 허벅지와 종아리, 팔뚝과 손목에 시퍼렇게 든 멍 자국만 가리면 다른 아이들과 똑같아 보였다. 교실 안에 아이들과 같이 앉아 있으면 나도 ‘보통’아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죽기 1주일 전부터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내 얼굴에 자리한 멍 자국을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집에서 나온 나는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의 집을 찾아갔다. 하지만 선생님은 외출중이었다. 어쩔 수 없이 경비실에 찾아가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경비원도 나를 가출청소년으로만 생각했는지 나를 이모에게 인계했고, 집으로 돌려보냈다. 나는 그 날, 아빠에게 맞아 죽었다.
아빠의 손에는 빗자루에서 뽑아낸 두꺼운 나무 막대기가 들려있었다. 아빠는 그것으로 내 온몸을 후려쳤다. 허리, 팔, 등, 다리, 어디라고 할 것도 없이 온몸에 매질이 가해졌다. 나는 ‘살려주세요.’라는 말만 계속해서 내뱉었다. 그러나 나를 때리는 아빠의 얼굴을 본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아빠의 얼굴은 이미 악마의 형상이 되어있었다. 매질을 가하는 아빠의 얼굴에는 그 어떤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새엄마는 내가 도망을 칠 수도 없게 내 옷을 벗겨버렸다. 아빠와 새엄마는 지치면 쉬었다가 나를 번갈아가면서 때렸다. 한참이 지나 내가 더 이상 움직이지도 앉자 그들은 나에게 방에 들어가 자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내 머릿속은 맞아서 터진 피로 가득 차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옥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끝없는 구타에 쓰러진 모습, 그게 내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빠는 난폭한 주먹질과 발길질로 나를 죽이고는 경찰서에 가출 신고를 했다. 내가 돈을 훔쳐 가출했다고. 그래서 내가 이불 속에서 11개월 동안 썩어가고 있었을 때, 세상은 나를 비행청소년으로 분류했다.
내 꿈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다. 어린 아이들이 웃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도 왠지 그 아이들처럼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내 롤 모델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었다. 항상 내게 따뜻하게 대해주셨던 선생님이 좋았고, 나도 꼭 그런 선생님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내 꿈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막 중학생이 되었을 때, 나는 몇 번의 봄만 더 견디면 어른이 되어 구타와 학대 속에서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첫 봄도 제대로 맞지 못했다.
벌써 봄이 가고 여름의 열기가 스멀스멀 몰려오고 있다. 거리에는 꽃내음이 가득하다. 나는 달콤하고 향기로운 장미꽃 향기를 들이킨다. 숨을 들이쉬는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숨이 턱 막힌다. 이 장미꽃 향기도 누군가의 아픈 상처를 덮고 있는 가짜 향기는 아닐까. 이 달콤한 향기 아래에서 누군가 또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나는 나와 같은 상황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 이름모를 그 아이들에게 애도를 표하며 달콤하게 퍼지는 장미꽃 내음 속에서 끄억끄억 눈물을 삼켰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상1
고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홍세현
분노를 해야 살 수 있는 사람
백일장 시제로 ‘분노’가 나왔다. 나는 분노한다. 너무나 광범위하다. 두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에 좋은 작품을 완성해야한다. 남들보다 신선하게, 뛰어나게 써야한다. 잘 쓰고 오라던 담임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 압박감에 나는 더욱 분노한다.
분노하는데만 귀중한 일 분을 써버렸다. 이제 마음을 가라앉히고 시제에 집중한다. 제일 먼저 떠오른 건 ‘분노를 해야 살 수 있는 사람’에 대해서 쓰자는 생각이다. 구체적으로 악역배우가 좋겠다. 조금 구상하다가 고개를 젓는다. 그들은 나보다 행복해 보인다. 그들의 분노는 희망이지만 분노한 상태로는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없다.
수 많은 백일장에 다니면서 수 많은 심사위원들의 평을 들었다. 진부하게 쓰지 말아라. 하지만 진솔하게 써야 한다. 마음을 담아 쓴다면 그 어떤 소재와 이야기도 특별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나는 상을 받지 못 했다. 아무리 진솔하게 써도 소설에는 체계적인 단계가 있기 때문에 문체, 묘사, 구성이 모두 갖추어져야 진솔함이 보이는가 보다.
진솔함을 다른 말로 하면 절박함일까. 그럼 이 세상에서 절박함과 분노를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나는 엑스트라 배우를 생각한다. (시간이 촉박하므로 처음 색각과 완전히 다르지 않다.) 그는 공룡탈을 쓰고 건물을 부시고 이유없이 지구를 파괴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해고 통보를 받는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또 너무 진부하다. 그래서 그가 타로까드 점집에서 점을 보고 점점 그의 정체와 사연이 드러나는 것으로 구성을 바꾼다. 또 계속 세부적인 것들을 연습장에 적다가 지우개로 지워버린다. 어렵다. 한 50매는 나올 것같다.
벌써 사십 분이 지나갔다. 앞에 놓은 원고지는 텅텅 비어있다. ‘분노’라고 적힌 시제를 뚫어져라 보다가 머리에 피가 쏠린다. 시계로 눈을 돌리다가 허공에 있는 먼지를 세보다가 주위를 둘러본다. 열심히 쓰고 있는 사람, 나처럼 구상에서 막힌 사람들이 있다. 이 좁은 교실에 전국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이들의 머리 속에서 나올 소설들을 기대한다. 분명 나보다 잘 썼을테니까.
나는 삼백이십일개의 대회에서 낙방했다. 처음엔 분노했지만 점점 체념과 해탈로 변해갔다. 그런데 오늘 시제를 보고 다시 분노의 경험을 떠올렸다. 너무 자질구레해서 쓰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들 말이다. 나는 내가 너무 평범한 생각을 하기에 분노한다. 소설을 잘 쓴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해서 분노한다. 내가 분노하는 방법은 체념이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책상에 엎드린다. 시험이 끝나고 버스를 타고 네시간 이상을 달려, 집에 와서 죽은 듯이 잠을 자고……. 이런 평범한 일상을 보내는데 어떻게 특별할 수 있을까. 매일이 체념으로 가득한데 왜 백일장에 와서 글쓰는 건가.
나는 다시 펜을 든다. 이제 정말 시간이 없다. 나는 가슴 속에서 분노의 감정을 끌어모은다. 글쓰는 것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으니까. 무기력함은 버리고 더 생산적인 ‘분노’라는 것을 해본다. 제목을 ‘제대로 화내는 법’이라 해놓고 화를 내고 싶지만 참아야 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다. 삭힌 분노가 얼마나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는가. 이것이 주제다.
나는 아파트 경비원인 아빠를 떠올린다. 내가 백일장에 갈 때마다 만 원 한장을 쥐어주는 사람이다. 사람들이 아무리 무시하더라도 분노하지 않았다. 언니가 엑스트라 행인 1역할에서 해고되었을 때도 말 없이 술을 권했던 사람이다.
나는 아빠의 서투른 분노에 대해 마음껏 묘사한다. 질질 끄는 서사이지만 괜찮다. 지금 이 순간 내가 글을 쓰고 있고 시제에 충실한 분노를 발산했다면 나름 만족하는 하루가 되지 않을까.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면 어떤가. 나는 지금 분명히 분노를 하고 있는데 말이다.
시곌르 볼 틈도 없이 이야기를 서술해나간다. 5분 남았다는 감독관의 목소리가 들린다. 글씨체가 엉망이다. 띄어쓰기가 잘 된건지 모르겠다. 손이 벌벌 떨린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완성하기 위해 이를 악문다. 식은 땀이 손바닥을 간지럽힌다. 마른 침을 삼킨다. 원고지가 땀으로 젖어간다. 분노하고 분노하며, 숨쉬고 있다는 것을 생각한다.
오늘도 참 짜증나는 하루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상2
동신여자고등학교 3학년 정지민
어느 소시민 보고서
야, 거기 초딩 이리와봐. 너 지금부터 이 엉아가 하는 얘기 잘 들어라. 네 인생을 길이길이 빛낼 초석을 닦아 줄 테니까. 초석이 뭔지는 아냐? 아무튼, 나 어릴 땐 이런 말 해주는 어른 아무도 없었다, 이거야. 너 그거 아냐? 요새 모든 사람들이 분노 조절 장애라는 거? 쉽게 말해서 진짜 화를 내야 될 데다 못 내고 만만한 데다 화풀이를 하는 거지. 약육강식, 먹이사슬, 오케이? 아, 됐다. 예를 들어줄게.
너 초딩, 반에서 덩치 크고 무서운 형들 많이 알고 그런 애 있지? 왜, 어쩌다 시비라도 붙으면 여자애들 앞에서 바지 까는 것보다 더 비참하고 처참하게 짓밟히게 될 거 같은 애 말이야. 너 걔가 소세지 반찬 뺏어가면 화낼 수 있냐? 못내지. 걔가 네 거 유희왕 카드 달라하면 안 줄거냐? 줘야지, 갖다 바쳐야지. 근데 너 집에서 엄마가 양말 뒤집어서 세탁기에 넣으라고 하면 뭐라하냐? 요 앞 슈퍼에서 두부 좀 사오라고 하면 뭐라하냐?
학교에서 사회 생활을 배운다는 명목으로 말이야, 실은 어렸을 때부터 철저한 먹이사슬의 연쇄에 길들여지는 거지. 그 중에서도 소위 범생이, 찌질이 같은 초식동물들은 언제ㅏ 친절해야하고 병신 마냥 착해야하고. 그러곤 집에 가서 엄마한테 먹이 피라미드의 윗층의 압박에 꾹꾹 눌려왔던 아랫층의 분노를 폭발 시키는 거야. 남들 다 있는 노스페이스 가방도 안 사줄 거면서 왜 날 낳았냐면서 말이야. 기억해 둬, 사랑은 최대의 약점이야. 널 사랑하는 엄마는 만만한 아래가 되는 거지. 왜 교수들은 교육이 점점 산으로 가는 이유가 등산복 브랜드 때문이란 걸 논문으로 안 쓰나 몰라? 대박이 날텐데. 뭐, 비단 애들만 그런 것도 아냐.
범생이가 수학 학원을 한 개 더 다니고 싶다고 해. 오, 근데 맙소사, 엄마는 돈이 없는 거야. 범생이는 가난한 집안에 분노해. 엄마는 찢어지는 가슴 대신 아빠의 가슴을 치며 왜 만년 승진을 못하냐고 분노해. 아빠는 왜 남들은 자기보다 적은 월급으로 저축이다 뭐다 다 하는 데 넌 왜 못하냐고 분노해. 모두 울그락불그락 얼굴을 붉히는 상황에서 누가 웃고 있게? 바로, 구조조정을 준비하는 악덕 고용주야. 진짜 분노해야 할 대상은 따로 있는데 어디다 분노를 돌려야 될 지 모르는 거지. 뭐, 알아도 달라질 건 없겠지만.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세상 사람 다 그래. 인터넷이나 SNS도 그 중 하나고. 아무튼 난 그런 분노 조절 장애인들이 한심하고 불쌍해. 난 걔네들이 뭐 때문에 그러는 지 알아. 뭐가 없기 때문이야.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고! 아무튼 요샌 다들 화가 너무 많아. 전체적으로 예민해. 아, 깜짝이야! 뭐야!
전화 진동이었네. 아, 씨…. 여보세요, 어 기호야. 응? 3만원? 저번주가 용돈 전부였는데…. 아니, 그게 아니라. 3분 내로 튀어갈게, 화내지 마…. 응. 이런, 젠장! 여보세요, 엄마? 나 3만원만 줘. 달라면 줄 것이지 말이 많아! 10시까지 공부하는 자식새끼 불쌍하지도 않냐? 어, 지금 간다. 끊어. 야, 초딩! 넌 아직까지 뭐 하고 있어. 얘기 다 끝났으니까 이제 꺼져. 아무튼 넌 그렇게 살지 말란 말이야. 문학시간에 배운 그 뭐였더라…. 소시민! 소시민이 되지 말고 이 엉아처럼 살란 말이야! 알았냐? 아! 이놈의 돌맹이는 또 왜 여기 있어, 젠장! 되는 일이 없어!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1
양명여자고등학교 2학년 장이진
분노
전화를 받은 아빠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그렇습니다. 아, 화성 경찰서요? 곧 가겠습니다.”
아빠가 전화를 끊자마자 밖으로 뛰쳐나갔다. 할아버지가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걱정이 먼저 앞섰다. 할아버지에게 질려서 엄마까지 떠난 뒤로 동네에서 소문난 효자 아빠는 더 힘들어 보였다. 할아버지를 볼 때마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할아버지가 예전에 몹쓸 사람들한테 붙잡혀 지옥 같은 생활을 한 적이 있으시단다. 우리가 이해해야지.”
아빠의 친절한 말에도 나는 할아버지가 이해되지 않았다. 젊었을 적에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던 할아버지가 지금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의사는 초기 치매가 의심된다고 했지만 아빠는 고개를 저었다.
“상처가 많아서 그러실 겁니다.”
오후에 경찰서에 간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할아버지의 외투를 가지고 경찰서로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버스를 타고 경찰서에 뒤늦게 도착한 나는 아빠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책상을 마주하고 앉은 사람들이 많았다. 구석에서 작업복을 입은 아저씨가 큰 소리로 화를 냈다.
“제기랄, 구제역 작업 끝날 때까지 저 노인네 붙들어놔요. 경찰 아저씨, 알겠어요? 돼지 다 잡기 전에 풀어주지 말라고!”
아저씨 앞에 서있던 아빠가 “죄송합니다,”를 나직히 읖조렸다. 구석에서는 할아버지가 떨고 있었다.
“늙은 사람이 그 힘은 다 어디에서 났대요? 노인네때매 인부들도 다치고 내 포크레인도 망가지고…….”
할아버지의 축 처진 어깨와 점점 바닥을 향하는 머리가 보였다. 대충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한숨이 나왔다.
오늘 아침, 나는 할아버지와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뉴스에서는 중부지방에 구제역이 창궐하여 약 3만 마리의 돼지를 묻어야 한다고 했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나왔지만 땅에 묻히는 돼지들이 보였다. 돼지들이 살려달라고 발버둥치는 것 같았다. 갑자기 할아버지가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딜 가느냐고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그리고 오후가 되어 경찰서에서 처음 만난 것이다.
“알겠습니다. 저기 의자에 앉아 기다리세요.”
경찰의 말에 물러난 우리는 경찰서 복도의 나무 의자에 앉았다. 한 시간 뒤, 할아버지가 나왔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오늘은 왜 그러셨어요.”
할아버지가 아빠를 쳐다 보았다. 한참 뒤 할아버지는 입을 열었다.
“땅 속에 묻히는 돼지들이 내 친구들 같아서 참을 수가 있어야지. 물에 떠밀려 죽은 아이들을 내가 묻었거든. 이 손으로.”
할아버지가 들어올린 양손이 공중에서 어정쩡하게 흔들렸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할아버지가 잠들었다. 쓰러지듯 자는 할아버지를 보니 덩달아 나도 맥이 풀렸다.
아빠가 혼자 술을 마셨다. 내가 아빠에게 다가가자 아빠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할아버지가 8살이 되던 1854년이었다. 제천장에서 삼촌을 기다리던 할아버지는 이유도 모른채 경찰들에게 붙잡혀 선감도라는 작은 섬에 끌려갔다. 그곳에는 이미 납치되어 온 아이들이 많았다. 그 뒤로 할아버지는 농장과 염전에서 노예처럼 일을 했다. 소금과 농작물은 어디론가 보내졌고 일의 속도가 느려지면 죽도록 매를 맞았다. 한 방에서 20명이 끼여 자기도 했다.
배고픔과 매질에 못 견딘 아이들이 지옥 같은 곳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은 딱 한가지였다.
아이들은 늦은 저녁에 탈출하기 위해 갯벌을 건너거나 거친 파도에 몸을 던졌다. 바다에 빠져 죽은 아이들과 목숨은 겨우 건졌지만 다시 경찰에 붙잡혀 온 아이들도 많았다고 했다.
아빠의 말을 들으니 나는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할아버지를 향한 분노가 아니였다. 이 땅에서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밥을 남기거나 헌 옷을 버릴 때마다 할아버지는 화를 냈다. 자신이 어렸을 적에는 밥도 잘 못 먹고 매일 헐벗었다고 했다. 나는 그런 할아버지가 너무 싫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해해 드리자.”
아빠는 취기가 오른 빨간 얼굴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아버지의 방으로 들어갔다. 할아버지가 이불도 덮지 않은 채 모로 자고 있었다. 아직도 탈출을 꿈꾸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를 바로 뉘어드리고 이불을 가슴께까지 덮어주었다. 할아버지에게 쌓아왔던 분노가 한순간에 사그라들었다.
방을 나오기 전, 나는 할아버지의 손을 잡아다. 처음 잡아본 할아버지의 손은 참 따뜻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2
안양예술고등학교 3학년 김성호
잉어
잉어 손질 중 가장 중요한 단계는 해감이다. 저수지에서 온갖 흙탕물을 뒤집어쓰며 오물을 들이삼켰을 잉어는 하루종일 수돗물에 갇혀 지금껏 쌓아왔던 모든 것들을 뱉어내야 한다. 그게 먹잇감이건, 더러운 찌꺼기건. 그런 것들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비릿한 맛을 제거하기 위해, 보다 시원하고 맑은 국물이 우러나올 수 있도록 잉어는 최선을 다해 뱉어내야 할 뿐이다. 쌓아봤자,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해가 된다.
아버지는 매운탕을 좋아한다. 간밤에 저수지에서 잉어를 낚은 이유도 매운탕을 먹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요리를 못한다. 기껏해야 라면 두어개를 간신히 끓일 수 있었다. 지금껏, 어머니에게만 요리를 시켰으니 못하는 게 당연했다.
술을 좋아하는 아버지를 위해, 어머니는 국물 요리를 자주했다.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국물 요리를 좋아하게 되었다. 정수기에서 나오는 물과 다른 맛이 나는 것을 재밌어 하며 종종 밥을 말아 한끼 식사를 때우기도 했다. 물론, 내 옆엔 항상 아버지가 앉아있었다. 병나발 채로 소주를 한모금 들이킬 때마다 크으- 좋다! 하는 아버지의 소리가 매번 정겨웠다. 비릿한 알콜내음 탓에 취기가 도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때면 아버지와 투닥거리며 장난을 쳤던 것이 새록 기억난다. 지금 생각해도, 그 때가 정말 좋았다.
갑작스레, 불황이 찾아왔다. 벼루고 벼루던 어머니의 가출이 하룻밤 사이에 이루어졌다. 편지도 남기지 않고, 아무 말 없이 떠나버렸다. 대체 이유가 뭘까? 이유가 궁금했다. 아버지 때문일 가능성이 컸다. 알코올 중독이라는 판정을 받고도 전날 밤 소주 5병을 들이마셨으니. 아직도 빈 소주병 여러개가 현관에서 나뒹굴고 있다. 괜스레 아버지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표출하지 않았다. 소가 되새김질을 하듯, 나는 아버지에 대한 화를 최대한 부드럽게 만들었고 끝내는 내 몸 구석 어딘가에 쌓아두었다. 그것은 점점 굳어 응어리가 되었다. 토해 버릴 수 없을 정도로, 커져 버렸다.
“오늘 저녁은 매운탕이다.”
아버지가 해감을 마친 잉어의 머리를 툭 썬다. 이상하리 만큼 한번에 잘려 보는 사람의 눈을 찌푸리게 했다. 더 이상 뱉어낼 것도 없으면서, 잉어는 싱크대 구석에서 계속 뻐끔거린다. 곧, 피가 아가미에서 흘러나온다. 뱉어내야 할 게 곧바로 생겨버렸다.
“기다려라, 맛있는 매운탕을 만들어 줄텐,”
고추장을 풀고, 손질한 채소와 잉어를 넣자 양이 많아졌다. 물이 끓기 시작한다. 조금씩 익어가는 잉어의 눈동자가 움푹 들어간다.
드디어, 식타겡 매운탕이 자리했다. 냄비 밖으로 툭 삐져나온 살점 하나를 집어 아버지는 나에게 내민다. 나는 그것을 마다한다. 늘 그랬듯, 아버지는 소주를 병나발 채로 들이마시며 크으- 좋다! 라는 말을 버릇처럼 해댔다. 입 안에 쓴 맛이 감돌았는지 매운탕의 시원한 국물을 마신다. 코 끝이 찡하게 울린다.
“엄마랑 연락은 돼냐?”
묵직한 구역질이 가슴 쪽에서 부터 밀려오기 시작한다. 나는 참는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야 한다. 나는 꼭 그래야만 했다. 여태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언젠가는 뱉어내야 할 것들이었다. 아버지가 잉어의 머리를 툭 건들이자 턱이 스윽 벌어졌다. 나는 잉어가 돼야 한다. 웁, 우웩. 단순한 응어리인 줄로만 알았던 큰 분노가 아버지에게로 던져진다.
“아버지가 바뀌지 않는 이상, 어머니는 돌아오지 않을 거에요.”
예상대로, 아버지의 매운탕은 맛이 없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3
동국대부속여자고등학교 2학년 박주은
누구를 위해 국기는 휘날리나
우리집은 동네에서 가장 큰 식당을 했다. 한식요리사 였던 할머니의 밑에서 온 가족은 열심히 재료를 썰고 그릇을 닦았다. 아직 어렸던 나는 방안에서 TV만 보고 있었다. 나이차가 큰 오빠보다 낯가림이 유독 많은 탓도 한몫했다.
나의 방은 주방 너머 깊은 곳에 있었는데, 가끔 어른들의 웃음소리가 들릴 때면 얼른 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매일 즐겁게 모든 걸 할 수 있는 어른이 되고 싶었다.
아빠가 나에게 핸드폰을 사준 건 중학생이 되고나서 였다. 항상 모으는 것만 좋아했지 쓰는 건 달가워하지 않는 아빠의 성격상, 다른 아이들에게는 늦은 것이었지만 나는 하늘을 날 듯 기뻤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아빠가 핸드폰을 사주지 않는 이유는 ‘네가 너무 어려서’였다.
학교에 가면 동아리 후배들이 나에게 인사를 했고 3학년은 급식도 제일 빨리 먹었다. 교실에선 선생님이 고등학교에 올라갈 준비를 하는 나에게 ‘이제 다 컸네.’라고 했다.
새로 산 휴대폰으로는 거의 SNS를 했다. 거기에는 나와 비슷한 나이를 가진 아이들이 즐겨하는 공간이었다. 우리는 아주 평화로웠다. 거기까지였다.
사건은 누구도 예상치 못하게 일어났다. 누구는 이렇게 될지 알았다지만 그래도 사태는 늦은 후였다. 대부분의 사상자는 고작 나보다 두 살 많은 학생들이었다. 하루종일 뉴스에서 어른들이 내뱉는 말은 ‘그 어린 애들을 누가 죽였나.’였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엄마는 매일 시위에 나갔다. 나흘간 삼시세끼로 카레만 먹자니 냄새만 맡았을 뿐인데 몸이 물리는 기분이었다. 내 SNS 프로필 사진에는 노란색 리본이 달려있었다.
뉴스 시간이 아닌 데도 TV에서는 속보만 전했다. 화면에 비치는 어른들은 모두 분노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핸드폰을 켰다. 아이들은 모두 애도했다. 누구 하나 웃지 못했다.
엄마를 기다리다보니 시간은 자정을 훌쩍 넘은 상태였다. 나는 내 키보다 살짝 짧은 베개를 끌어안고 감기는 눈을 자꾸만 떴다. TV에서는 애국가와 함께 무궁화를 띄웠다. 저 몇 분짜리 애국가가 끝나면 다시 분노하는 어른들과 애도하는 아이들이 보일 것이었다. 화면은 마지막으로 태극기를 비췄다. 누구를 위해 국기는 휘날리나.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4
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이희정
대신 화를 내드립니다
전단지에 나온 약도를 따라 도착한 곳은, 벽에 이끼가 몽글몽글 자라있는 음침한 가게였다. 나는 잘못 찾아왔나 싶어 몸을 돌리려 할 때 까만 매니큐어를 바른 손가락이 어깨를 붙잡았다. 깜짝 놀란 나는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녀가 내 손에 든 전단지를 가져가는 것을 마냥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대신 화를 내드립니다? 여기야, 잘 왔어. 그녀는 눈꼬리가 위로 찢어진 눈으로 눈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짜고짜 내 등을 가게 안으로 떠밀고선 문을 닫았다.
벽 곳곳에는 지푸라기로 만든 저주인형들이 걸려 있었다. 그녀는 천장에 쌓인 먼지를 털며 앞으로 쭉 걸어갔다. 어두운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아 무언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당신, 화가 엄청 쌓여있네? 그러면 속병 나. 당신같이 소심한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가 있는거지. 그녀는 낡은 천조각을 걷었다. 그곳엔 나와 똑 닮은 인형이 눈을 감은 채 진열돼 있었다. 신장오픈개업이벤트로 일주일 무료 체험권을 줄게. 그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한가지 주의사항은 절대 얘한테 화를 내면 안 된다는 거야.
다음날 학교에 나도 모르게 그 인형을 들고와버렸다. 그녀의 말은 100%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혹시나싶은 기대감이 있는 건 사실이었다. 어제는 화 나는 일이 산더미같았다. 단체숙제를 해야 하는데 한 명은 안 한다고 떼쓰지, 누구는 지나가는 길에 어깨를 부딪쳐놓고 사과도 안하지, 친구란 녀석은 계속 내 숙제를 배꼈다. 머리 끝까지 열이 뻗쳐서 금방이라도 소리를 내지르고 싶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열기는 입밖에 나가면 늘 식었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하고 과제를 안 하는 남자애를 가리켰다. 그러자 인형이 스스로 움직이더니 남자애 앞으로 가 욕설을 내뱉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당황했지만 남자애빼고는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인형은 내가 줄곧 하고싶던 말을 다 내뱉어주었다. 남자애는 새파랗게 질린 채 멍하니 있다가 숙제를 하러 프린트물을 황급히 챙겼다. 효과는 만족스러웠다.
누군가 내게 실수해도, 물건을 가져가놓고 안 돌려주고, 멋대로 숙제를 베끼면 인형이 바로 나타나 신랄한 욕설을 내뿜었다.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인형이 화를 낸거지 내가 낸 게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우습게도 그들은 여전히 나한테 이렇게 말했다. 너는 화도 한 번도 안 내고…… 참 착한 것같아. 하지만 인형의 강도는 날이 갈수록 세지고 있었다. 급기야는 누구를 울린 적도 있었다. 나는 우는 아이를 위로해주면서도, 차마 인형한테 그만하라고 말하지 못했다.
어느 날은 엄마가 내 방에 있던 연예인 브로마이드를 다 내다버린 사건이 있었다. 내가 직접 뭐라 그러려고 했는데 인형이 내 앞을 가로막았다. 나는 순간 불길한 예깜이 들어 멈추라고 다급히 말해씨만, 인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내가 언제 엄마보고 낳아달라했어요? 인형의 입에서 나온 말은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그만해, 난 이걸 원하지 않았어. 그 순간 인형이 나를 돌아보았다. 이건 네가 했던 말이잖아. 나는 변명하고 싶었지만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생각과 직접 내뱉은 건 차이가 컸다. 인형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넌 어차피 나 없었으면 생각만 할 거였잖아? 나는 인형의 멱살을 쥐었다. 넌 겁쟁이라서 화도 못 내고. 나는 중얼거렸다. 아냐, 그렇지않아. 인형이 말했다. 착하게만 살고싶은 겁쟁이. 나는 인형의 목을 졸랐다. 꺼져! 갑자기 인형은 다시 눈을 감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었고, 엄마는 아까전 인형의 말을 들어버린건지 다시 화난 상태로 날 바라보았다.
이런, 화내버리셨네. 그녀는 인형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웃었다. 이 인형은 주인을 닮아 겁쟁이라서 자기한테 화를 내면 전원이 꺼져버려요. 나는 가게 밖을 나서려다 뒤를 돌아보았다. 장난스럽게 웃고있는 그녀의 모습은 내 화를 돋구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나는 심호흡을 했다. 마음이 한층 차분해지면서 얼굴엔 다시 웃음기가 돌았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인생 그렇게 남 놀리는 데 살지 마세요. 아직까진 누군가한테 뭐라 하는 건 많이 어려웠다. 하지만, 겁쟁이로 남진 않을 것이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차하5
안양예술고등학교 2학년 나예빈
태태
태태는 내 손바닥에 놓인 딸기를 핥고 있었다. 흔들리는 태태의 꼬리를 만져주는 사람이 없었다. 태태는 마지막 딸기를 먹고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날아다니는 나비에게 장난을 걸었다.
태태를 처음 만난 날은 지난 여름이었다. 엄마를 잃어버린 것인지 길가에서 울고 있었다. 나는 누구든 찾으러 올 것이니 그만 가던 길을 가자고 했다. 사람도 아니고 고양이라 도와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태형이는 나와 달랐다. 누군가 찾으러 올 것 같지 않다며 데려 가자고 했다. 이야기를 주고 받다가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태형이의 고집을 꺾을 자신이 없었다.
태태는 우리집 마당에서 키우기로 정했다. 나는 어째서 우리집이냐며 반대를 했다. 태형이는 애굘ㄹ 부리다 떼를 쓰기도 했다. 자신의 집은 아파트라 곤란하다며 친한친구 소원도 못 들어 주냐며 말이다. 덕분에 태형이가 우리집을 찾는 날이 잦았다. 처음에는 고양이용 통조림을 사왔다. 먹어주기를 바라는 태형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인지 먹지 않았다. 사료도 마찬가지였다. 병원을 데려가려는 날 처음으로 음식을 입에 댔다. 태형이가 가장 좋아하는 딸기였다. 고양이가 딸기를 먹어도 괜찮은지 모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딸기를 사료와 섞어 겨우 먹이기는 했다.
태태라는 이름은 태형이가 지은 것이었다. 왜 태태냐고 물으니 고양이와 자신이 잘 맞는다는 이유라고 했다.
“나도 딸기를 좋아하는데 얘를 좋아하고 공놀이도 똑같이 좋아 하잖아. 너 움직이기 좋아하는 고양이 봤어? 못 봤을걸.” “순 억지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세상 모든 사람들 이름이 태태가 되겠다.”
우리 셋은 마당 평상에 눕는 것을 좋아했다. 가만히 누워 하늘을 보았다. 태형이는 항상 태태의 꼬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태태와 친하지 않아 둘을 바라만 보았다. 동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정이 가지도 않았다.
태형이가 다시 입원했다. 앓고있던 병이 재발한 탓이었다. 한참 아팠을때 쓰러진 것을 목격한 사람이 나였다. 그때 기억에 병실에서 엉엉 울었다.
“나 아픈거 하루이틀도 아니였잖아. 네가 이렇게 울면 내 마음이 어떻겠어. 뚝하고 오늘은 이만 집으로 가. 나 대신 태태가 지켜 줄 거야.”
태형이는 병원에서도 항상 태태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때마다 내다 버릴 것이라며 모진말을 내뱉었다. 힘없이 축 늘어진 손목이 태태를 쓰다듬는 것 같았다. 마지막 페이지 까지 태태를 적어넣은 태형이가 미웠다.
한동안 태태는 힘이 없었다. 시도때도 없이 울어대서 시끄럽기까지 했다. 처음에는 화를 냈지만 일주일이 넘도록 울어대니 불쌍하다는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처음엔 입을 열지 않더니 계속 가져다대니 핥기 시작했다. 먹는 것을 바라만보다 머리에 손을 올렷다. 처음 만져보는 것이었다. 몸통으로 손을 옮기다 꼬리가 눈에 들어왔다. 태형이가 늘 쓰다듬던 꼬리였다. 이제는 내가 그 꼬리를 쓰다듬었다.
“태태야, 이리와.”
냉장고에서 딸기를 더 가져와 내밀었다. 그릇에 주니 먹지 않아 손바닥에 올려 내밀었다. 태태가 핥기 시작했다. 내 손바닥이 빨갛게 물들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1
광주여자고등학교 3학년 양채리
거미
유리관에 있어야 할 역겨운 타란툴라 한 마리가 사라진 지 벌써 며칠째였다. 그동안 나는 불면에 시달려야만 했다. 거미가 내 발밑에 깔려 처참히 터져 죽은 모습을 상상하면 구역질이 났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그 털이 수북하게 난 새카만 몸뚱이를 잠든 내 입속에 담근 채 반신욕을 하는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에서 그려졌기 때문이다.
사라지기 전, 거미는 밤마다 빨간 눈을 번뜩이며 나를 쳐다봤다. 처음에는 단지 내가 너무 예민해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거미는 내가 움직이는 방향에 맞춰 몸을 틀어가며 분명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녹화가 시작된 카메라 같아 기분이 퍽 더럽기까지 했으나, 거미의 주인이었던 친구의 꼭 다시 데리러 오겠다는 말에 그냥 두었을 뿐이었다. 거미와 눈을 마주칠 때면 한여름 등골에 찬물이 흐르는 듯 오싹해져 늘 손길이 분주해지곤 했다.
거미를 가족처럼 아낀다던 친구는 여태까지도 거미를 데려가지 않아 골머리를 썩혔다. 친구가 가족을 버렸다면 거미는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것이니 화가 날 법도 했으나, 탈출로써 분노를 표출하는 건 영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오히려 나에게 분노를 심어 주는 일이었다. 애초에 친구가 남기고 간 짐에서 머그컵이나 칫솔 따위를 먼저 버릴 게 아니었다. 애물단지 같은 유리관을 먼저 버렸어야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텐데……. 중얼이던 나는 손에 휴지를 잔뜩 감은 채 문지방에 걸터앉았다.
거미의 새빨간 눈이 보일 때까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었다. 바닥에는 효과가 좋다던 벌레 잡는 약이 흥건하게 발려 있었다. 내 집에 모기 한 마리 들어오는 것도 싫어 창문을 열지 않은 탓에 잘 마르지 못한 빨래에서는 물때 냄새가 지독하게 났다. 약 냄새와 물때 냄새의 부조화는 거미만큼 역겹게 느껴졌다. 이 모든 게 거미의 탓이라는 생각 때문에 거미에 대한 증오가 한 층 더 커졌다.
마침내 거미를 본 순간에는 분노가 물 밀 듯이 터져나왔다. 부스럭대는 소리를 따라 부엌으로 발길을 옮기자, 식탈 위에 놓인 빵 봉지를 뒤적이고 있었다. 일순간 언젠가 뉴스에서 보았던 애완거미로 인해 해를 입은 남자의 사연이 떠올랐다. 거미의 털이 눈에 들어가 시력을 잃었다는 이야기는, 조명이 없는 곳에서도 거미의 다리에 박힌 흰 털이 더욱 선명하게 보이게끔 만들었다. 빈대처럼 기생하며 근본도 없는 거미에게 눈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곧 분노로 변했다. 나는 사냥감을 찾은 사냥꾼처럼 거미에게 달려들었다. 휴지더미의 겹겹을 뚫고 딱딱하면서 물컹한 느낌이 전해졌다.
변기속으료 유유히 빨려들어가는 휴지더미를 보며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렸다. 휴지진 휴지 사이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에 떨어뜨린 거지? 세면대 위에 달린 거울은 사색이 된 내 모습을 비췄다. 발등 위로는 무언가 무겁고도 압도적인 것이 지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순식간에 사냥꾼과 사냥감의 위치가 바뀐 상황에서 나는 수십 가지의 생각이 들었다. 아닐 거야. 바닥에 발라 놓은 약 위에 떨어졌겠지. 아니라면 모기약이라도 뿌려 죽이면 되고……. 바닥을 내려다본 순간 정교하고 끈끈하게 내 발목을 감싸고 있는 거미줄을 보고 숨이 턱 막혔다. 거미는 분노의 생명을 위협한 자에게 분노가 서린, 전보다 훨씬 붉어진 듯한 눈을 번뜩이며 거미줄을 뿜어냈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2
문정여자고등학교 3학년 나수완
고양이의 도시
창문엔 이미 초려음의 내음이 가득한 6월이 들어서 있었지만 나는 아직 5월달의 달력을 넘기지 모하고 있었다. 5월 12일, 달력엔 단 하나의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고, 나는 편의점에 손님이 없을 때면 그걸 들여다보곤 했었다. 고양이를 처음 만난 것도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처음부터 대야 속에서 만난 것일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고양이는 대야 속에 있었고, 나는 굳이 그 속에 계속 있으려는 고양이를 꺼내려 하지 않았다.
“어제는 새벽 2시가 넘어서 들어온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시간 때의 다른 손님들처럼 그 아저씨도 만취 상태였어. 숙취음료를 하나 들고 오는가 싶더니 내 옷에 토를 해버리더라고.”
고양이가 내 말을 듣고 있는 지는 알 수 없었지만, 조용히 내가 뜯어주는 유통기한이 지난 핫바를 받아 먹고 있는 고양이의 모습에 나는 다시 말을 이어갔다.
“그런 모습을 점장이 보면 내가 불쌍해서라도 월급을 빨리 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월급은 무슨 세탁비도 안 주더라고. 냄새가 너무 심해서 정말 토가 나올 것 같았는데 나는 점장이 갈 때까지 아무 말도 못 했어.”
고양이는 내 손에 있던 핫바가 바닥을 보이자 대야에 배를 깔고 누웠다. 상처가 나있는 다리가 아직도 아린듯 그 짧은 순간에도 다리를 절었다. 그 상처는 처음 목욕을 시키면서 발견한 상처였다. 잘은 모르지만 꽤 오래 전부터 나있는 상처 같았다.
“고양이는 목욕하는 거 싫어한다던데, 너는 아닌가보네….”
고양이는 대야 속에서 털을 쓸어내리는 내 손길과 떨어지는 물을 가만히 잊고 있었다. 상처가 쓰릴 법도 했지만 고양이는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점장은 내게 월급이라며 봉투를 내밀었지만, 봉투 속 액수는 내가 이곳에서 일을 한 날짜에 한창이나 모자랐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말들이 스쳐 지나갔지만 결국 그 중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봉투를 받아드는 손이 밉기만 했다. 나는 달력 속 동그라미와 봉투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그리고 한창이 지나 나는 결국 5월달의 페이지를 넘겨버리고 말았다. 나는 그날 고양이에게 해줄 말이 너무나도 많았지만 단 한 마디도 하지 못 했다.
그날, 고양이가 죽었다. 나는 대야 속에서 축 늘어진 고양이를 양손에 들고 한창이나 걸어 나가 고양이를 땅 속에 묻어주었다. 눈물이 나진 않았지만 더 이상 말을 들어줄 대상이 없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 슬펐다.
나는 더 이상 고양이가 없는 빈 대야에 물을 받기 시작했다. 물을 멈추자 대야엔 수평의 고요만이 남아있었다. 그 속에서 처음 대야에서 나를 바라보던 고양이가 떠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가만히 그 속에 발목을 담가보았다. 상처가 난 곳은 없었지만 물에 닿는 곳마다 쓰라렸다. 나는 두 발을 완전히 대야에 담근 채로 쪼그려 앉았다.
“어제 그 손님이 다시 편의점에 왔는데 커피를 하나 사서 나한테 내밀더라. 시발, 나 사실 그 자리에서 울뻔 했어.”
고양이를 애도할 어떠한 말도 생각나지 않아 나는 그날 하지 못 했던 말들을 쏟아내듯 말했다. 시간이 지날 수록 날이 밝아오기 보다는 방이 더욱 더 짙어져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발목의 쓰라림이 더욱 더 심해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야옹, 어디선가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와다. 어쩌면 내 입에서 나온 울음소리였을 수도 있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했다. 꼭 고양이처럼 내가 고앵이를 애도할 수 있는 방법은 그것 뿐이었다.
완벽한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편의점의 불빛만이 비추고 있었다. 죽어가는 도시를 애도하는 십자가의 불빛처럼. 야옹, 고양이의 울음소리가 희미해져 간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3
문성고등학교 3학년 김수완
착한 감금
최고의 병자를 뽑는 대회가 개최됐다. 요양원 앞, 산책로 육각 정자에 모인 노인들은 신할아버지를 중심으로 빽빽이 원을 그렸다. 신할아버지는 흐뭇한 미소를 짓고 왼손에 쥔 오만원 권 두 장을 모두가 볼 수 있게 높이 들었다.
“그니께 여그서 가장 아픈사람헌티 상금겸 위로금으로 내가, 이 신용팔이가 십만원을 준다 이말이여!”
사람들은 환호를 내지르며 다 올라가지 않은 팔과 지팡이를 흔들었다. 정자 중앙에 십만원을 턱, 놓는 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최고의 병자를 가리는 대회가 막을 올렸다.
하얀거품이 벚꽃처럼 흩날렸다. 노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늘어진 잇몸과 하다만 임플란트를 드러냈다. 박할아버지는 근육통에 골다공증, 임할머니는 요실금에 당뇨, 오할아버지는 공장에서 얻은 화상자국. 저마다 자신의 아픈곳을 자랑하듯 떠들어 댔다.
무리의 중심에 앉아 그들을 방관하는 신할아버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매달 스스로 요양원비를 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으며, 보호자의 동의 없이도 요양원 출입이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봉사단체의 기름진 약과나 초코파이가 질릴 때마다 사람들은 신할아버지를 찾았다.
분위기는 점점 과열되어 육각 정자는 콜로세움처럼 변했다. “어디 여자가 소리를 높여! 미쳤어?” “어린놈의 새끼가 내가 41년생이여 알어!” “나는 38년 범띠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게!” 모두가 상기된 얼굴로 서로를 헐뜯는 상황, 정자 중앙의 오만 원권 두 장이 도망치고 싶은듯 봄바람에 펄럭였다.
어느새 해가 머리 위를 지나간다. 노인들은 가쁜 숨을 내쉬며 신할아버지에게 시선을 모았다. 수상자 발표 전, 그 시선을 즐기며 신할아버지는 연신 헛기침을 해댔다. 입꼬리가 한껏 올라간 신할아버지가 수상자를 발표하려는 순간, 요양원 막내의 소매를 잡은 꽃님이 할머니가 불쑥 튀어나왔다. “우리아들 못 봤는가?” 꽃님이 할머니의 등장에 사람들은 “또 지랄이네.”, “병원에 있어야될 사람이.” “돈이 원수제 뭐.”라며 혀를 찼다.
“여기 있으면 금방 온다 그랬는디…….”
귀에 꽂은 진달래꽃을 만지작 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꽃님이 할머니가 땅에 주저앉아 훌쩍거리기 시작하자 막내 김할머니가 그녀를 달래기 시작했다. 그런 김할머니를 보며 누군가 질문을 던졌다.
“우리 막내는 아픈데 없나?”
“60에 어디가 아퍼! 돌도 씹을 나이구만.”
관심을 뺏겨 성이난 신할아버지가 퉁명스럽게 소리쳤다. 김할머니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느긋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전 아픈데 없어요. 그 흔한 수술한번 받은적 없는걸요.”
“머? 그럼 여기 왜 왔는가?”
어느새 시선은 모두 김할머니로 향했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 나미작하게 목소리를 내보냈다.
“그냥, 자식들이 이제 쉬라고…… 애들도 바쁘고…….”
정자 안엔 침묵이 흘렀고 부드러운 봄바람과 함게 아들을 찾는 꽃님이 할머니의 목소리만이 정적 속에 퍼져나갔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4
제주제일고등학교 2학년 장성녕
무제
선생님의 집 앞에는 쌓아둔 종잇장, 거무튀튀한 메주, 줄에 꿰여 있는 시래기들이 어질러져 있었다. 문을 여닫을 때 메주가 걸리고 시래기에서 소리가 나, 꽤나 불편할 것 같았는데도 오랫동안 방치된 것처럼 먼지가 수북히 쌓였다. 나는 노크를 하고 크게 소리쳤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옥색 철문에서는 쾅쾅쾅, 하는 소리가 났다. 선생님, 저 현철입니다. 안에 계십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잠옷 차림의 선생님이 얼굴을 내비쳤다. 낯이 많이 어두웠다. 이전의 자잘하던 주름들은 깊고 견고해졌으며, 머리카락도 정수리 부분을 중심으로 벗겨져 있었다. 그는 멀끔하게 자란 내 모습을 보더니 누구인지 가늠해 보려는 표정을 지었고, 곧 환한 웃음을 터뜨렸다. 들어 오너라. 나는 운동화를 벗고 들어가며, 선생님의 손에 선물을 쥐어드리고 말했다. 홍차입니다. 오다가 선생님 생각이 나서 샀습니다. 고마워, 자식새끼들도 하나 안사주던 추석 선물을 제자한테서 받네. 에라이, 뒤질 놈들. 선생님은 그것을 부엌 싱크대 아래 세워두더니 혼잣말을 했다. 나는 아려오는 가슴에 손을 얹고, 허허, 그친구들 요즘 저랑도 연락이 안 됩니다. 민우, 민수, 두놈 다 쌍둥이 아니랄까봐 여행을 그렇게 좋아해서, 한 달 전인가, 유럽으로 간다고 이메일 왔던 것이 마지막 연락이었습니다. 부엌에서는 물 끓는 소리가 났다. 집은 거실과 부엌, 안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들어올 때부터 물씬 풍기던 옛 것 냄새가 거실로 들어오니 고약해 졌고, 조금 지나자 무디어졌다. 선생님이 홍차 두 잔을 들고 왔다. 감사합니다. 짧게 대답한 나는 선생님의 눈치를 봤다. 그래, 여행을 갔단 말이지. 둘이, 여행을. 그는 낮게 으르렁거렸다.
선생님이 L고등학교의 선생님으로 계실 때, 나는 민우, 민수 쌍둥이와 친하게 지냈었다. 셋은 모두 같은 반이었고 선생님은 다른 반 담임을 맡고 계셨다. 둘에게서 자신의 아버지가 선생님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당황했었다. 전혀 몰랐을 뿐더러 오히려 더 엄하게 굴었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우리가 늦둥이기도 하고, 몰라, 학교에서 아는 척 하면 혼낸다고 했어. 민우가 말했다. 그들의 집에 놀러갔을 때 선생님은 제 자식들에게는 엄하게 구시면서, 나에게는 정말 친절하게 대해 주셨다. 나는 의아했다. 그러나 별 말 하지 못했고, 2년 뒤 우리는 졸업을 했다. 선생님은 학교에 1년 더 남아계시다가 정년퇴직을 한 걸로 기억한다. 나는 가까운 대학교에 다니게 된 쌍둥이와 꾸준히 연락하면서, 때로는 선생님을 찾아가 단절된 그들 부자사이의 연락망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고, 군대엘 다녀오자 쌍둥이와의 연락도 뜸해졌다. 취업을 하기 전에는 그래도 이 주에 한번은 얼굴을 봤는데, 직장이 생기니 그마저도 불가능하게 됐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왔던 이메일에 그들은 여행이 아니라 이민을 간다고 쓰여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추신에, 아버지한테는 말하지 마, 라고 적어두었다. 그것이 일 년 전의 일이다.
선생님은 홍차가 전부 시을 때까지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안절부절 못해 하다가 손목을 들어 시계를 보고, 저 약속이 있어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라고 말했다. 선생님은 문득 정신을 차렸고, 내가 신발을 신는 모습을 서서 지켜보았다. 문을 팍 열어젖히니 메주가 턱, 걸렸고, 시래기가 찰싹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걸린 메주는 움직이지 않았고 시래기는 떨어지지 않았다. 집 밖을 나오자, 선생님이 문을 세게 쾅 닫았다. 잘 가라는 말도, 다른 어떤 안부도 없이, 쾅 소리만 집 전체가 떠나갈 듯 울려퍼졌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제18회 전국 고교생 문예백일장 – 장려5
순천금당고등학교 3학년 정민석
농담이라고 말했더니 농담이 되었다
그 녀석의 이미지는 허상이에요. 해리포터 안경을 쓰고 수학문제를 풀고있는 녀석은 녀석이 아니에요. 녀석의 손이 제 치마 사이로 들어왔던 순간을 기억해요. 비명을 지르려다가도 녀석이 ‘쉿’하고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어요.
좀 저 귀를 가까이에 대주세요. 제가 농담하는 것을 아버지에게 들켜선 안 돼요. 그래도 제 얘기를 들어주시는 분이 있어서 좋네요. 다른 사람들은 제 눈빛만 봐도 피하거든요.
시험지가 갈기갈기 찢겨 제 얼굴에 부서지듯 던져졌어요. 아버지는 항상 제 앞에서 그 녀석을 들먹이셨어요. 녀석이 당신의 아들이었으면 좋겠다며 어찌나 한숨을 쉬시던지…….
유일하게 저를 믿어주시던 분이 있었다면 담임 선생님이었어요. 담임 선생님은 제게 항상 이유없이 웃어주셨으니까요. 선생님께 사실대로 털어놓았어요. 녀석이 제게 한 짓에 대해서.
“그 애는 그럴 리가 없는데.”
선생님은 단호하셨어요. 그 말 이후로 제게 어떤 말도 해주시지 않으셨어요. 저는 분노가 끓ㅇ올랐어요. 저도 모르게 소리쳤어요. 선생님께서 거짓말을 하고 계신다고. 다른 과목 선생님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느껴졌어요.
“선생님, 쟤 버르장머리를 고쳐주세요.”
한 선생님이 저를 쳐다보며 말하셨어요. 저는 그 날 교실을 모두 청소한 후에야 집에 돌아갈 수 있었어요.
“모두 농담이었다고 말하렴.”
집에 가기 전 선생님이 말씀하셨어요. 더 이상 선생님의 말에 화가 나지 않았어요. 이미 제가 하는 말이 정말로 있었던 일인지 저 조차도 헷갈리게 되었으니까요. 오히려 무덤덤했어요.
다음 날 아침, 녀석의 책상에는 애들이 몰려있었어요. 피우던 담뱃갑을 바치는 애도 있었지요. 녀석의 엄마가 입시 정보를 꿰차고 있는 돼지엄마라는 사실을 간파한 후부터 모두 녀석의 팬이었어요.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시고 모두가 자리에 앉았어요. 선생님은 제게 앞으로 나오라는 눈짓을 보냈어요. 결국 녀석의 앞에 섰어요. 녀석은 제게 씽긋 웃어보였어요. 녀석의 표정에서는 어떤 악의도 찾아볼 수 없었어요. 어디선가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어요. 녀석의 소리는 아니었어요. 곁눈질로 주위를 살폈어요. 모두가 저를 향해 날카로운 이빨들을 드러내고 있었어요. 그럴 만 하니까 그랬지, 공부도 못 하는 게. 녀석을 모두가 대변했어요.
“농담이었습니다. 녀석을 질투한 나머지 그런 농담을 했습니다.”
분노를 농담으로 바꾸는 것은 어렵지 않았어요.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박수를 쳤어요. 선생님도 박수를 치고 계셨어요. 몇몇은 저를 측은하다는 듯이 바라봤지만, 곧 고개를 돌려버렸어요.
저는 농담이 되어버린 기억들에 잡아먹혀요. 어렴풋이나마 기억나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요. 제 기억은 곧 완전히 소멸할지도 몰라요. 제 말들은 모두 농담이었던 걸까요. 지금 하는 말도 농담인 걸까요. 이젠 모르겠습니다.
농담이라고 말했더니 농담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