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우리문화 4 한국의 사찰 수덕사
백제의 온화한 향취가 있는 수덕사
글, 사진│ 미술사
일주문을 지나면 바람에 몸을 맡긴 풍경 소리가 사찰 가득하다. 맑은 소리의 근원을 찾아 금강문 계단을 오르면 앞으로 또 하나의 계단이 펼쳐진다. 중심인 대웅전까지는 무려 네 개의 문과 계단을 올라야 한다. 계단을 하나하나 오르면서 속세에서 가지고 온 욕심과 허영을 떨어내라는 것일까?
백제의 고찰, 수덕사
백제의 사찰은 흥륜사(興輪寺), 왕흥사(王興寺), 칠악사(漆岳寺), 수덕사(修德寺), 사자사(師子寺), 미륵사(彌勒寺), 제석정사(帝釋精舍), 호암사(虎?寺), 오함사(烏含寺), 천왕사(天王寺), 도양사(道讓寺), 백석사(白石寺) 등이 있는데, 현재 수덕사를 제외하고는 모두 폐사(廢社)되어 절터만 남아 있다. 수덕사만이 유일하게 오늘까지 그 역사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수덕사는 위덕왕(威德王) 재위(554-597) 때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수덕사 경내에서 발견된 백제 와당(瓦當)에서 백제시대의 창건을 뒷받침 있다. 또 수덕사는 운허의 [불교사전]에 의하면 도선(道宣)의 [속고승전]과 일연의[삼국유사]등에 처음으로 ‘북부 수덕사’라고 기록되었다. 수덕사는 백제의 고승 지명(智名, 知命)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해진다. 이 수덕사가 바로 현존 사서(史書)류에 기록된 북부 수덕사이다. 수덕사 앞에 ‘북부’라는 수식어가 붙은 것은 성왕의 사비 천도 이후로 ,수덕사가 속해 있던 덕산현(德山縣)이 사비성의 북부 지역에 해당되었기 때문이다. 북부 수덕사와 다른 별개의 수덕사가 현존 자료에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북부 수덕사는 현재의 수덕사라고 말할 수 있다.
수덕사의 창건설화
수덕사 창건설화, [덕산향토지]에 실린 내용을 적어본다. ‘홍주마을에 사는 수덕이란 도령이 있었다. 수덕도령은 훌륭한 가문의 도령이었는데,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사냥터의 먼 발치에서 낭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집에 돌아와 곧 상사병에 걸린 도령은 수소문한 결과 그 낭자가 건너 마을에 혼자 사는 덕숭낭자라는 것을 알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여러 번 거절당한다. 수덕도령의 끈질긴 청혼으로 마침내 덕숭낭자는 자기 집 근처에 절을 하나 지어 줄 것을 조건으로 청혼을 허락하였다. 수덕도령은 기쁜 마음으로 절을 짓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탐욕스런 마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절을 완성하는 순간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 다시 목욕재개하고 예배 후 절을 지었으나 이따금 떠오르는 낭자의 생각 때문에 다시 불이 일어 완성하지 못했다. 세 번째는 오로지 부처님만을 생각하고 절을 다지었다. 그 후 낭자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했으나 수덕도령이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하지만 이를 참지 못한 수덕도령이 덕숭낭자를 강제로 끌어안는 순간 뇌성벽력이 일면서 낭자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한 쪽 버선만이 쥐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바위로 변하고 옆에는 버선모양의 하얀 꽃이 피어 있었다. 이 꽃을 버선꽃이라 한다. 낭자는 관음보살의 화신이었으며 , 이후 수덕사는 수덕도령의 이름을 따고 산을 덕숭낭자의 이름을 따서 덕숭산이라 하여 덕숭산 수덕사라 하였다.’
수덕사의 가람배치
예산 수덕사는 덕숭산(德崇山)에 자리한 백제의 고찰이다. 덕숭산은 서해를 향해 달려오던 차령산맥에서 떨어져 나온 줄기가 만들어낸 산이다. 이 산은 북쪽의 가야산(伽倻山)과 서쪽의 오서산, 동남쪽의 용봉산(龍鳳山)으로 둘러싸인 한복판에서 호령하고 있는 모습이다. 덕숭산 자락을 따라가다 보면 물이 흐르고, 야트막한 구릉과 넓은 벌판을 지나면 서해 바다가 펼쳐진다. 수덕사는 구릉 따라 몇 단의 석축을 쌓고 입구에서부터 가장 중심 건물인 대웅전까지 네 개의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대웅전을 마주하게 된다. 한 계단씩 오르면서 들러보라는 배려이자 교훈이 담겨 있으며 크게 3개의 영역으로 배치된 전형적인 산지가람이다.
사찰의 입구인 일주문(一柱門)에서부터, 금강문(金剛門), 사천왕문(四天王門), 7층석탑, 황하정루(黃河精樓)(근역성보관)까지 선형(線形)의 축을 이루며, 건물들을 통과하게 된다. 일주문은 사찰의 경내에 들어서서 만나는 가장 첫 번째 문으로 정면에서 볼 때 기둥이 좌우로 두 개만 세워지고 측면에서 볼 때 한 줄로 열을 이루고 있으며, 그 위로 공포와 지붕이 짜여지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건물이다. 일주문을 지나면 금강역사상을 안치한 문, 금강문과 사천왕상( 수미산의 중턱에 있는 주신으로 동방은 지국천왕, 남방은 증장천왕, 서방은 광목천왕, 그리고 북방은 다문천왕이 관장하여 악귀를 다스린다.)을 안치한 사천왕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관문들은 주불전인 대웅전에 이르는 도정(道程)에서 인간의 모든 번뇌와 욕심, 그리고 악한 생각들을 정화시키는 상징적인 역할을 한다.
앞뜰을 중심으로 주불전을 마주하고 있는 황하정루는 경내에서 행하는 제반 의식의 집전 장소로서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곳이다. 현재 이 누각의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성보관이 있고, 지상1층은 박물관 사무실로, 2층은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청련당 좌측 아래에 위치한 조인정사는 부처님의 혜맥(慧脈)을 판단하는 곳이라는 뜻으로 1916년에 만공선사가 건립한 건물이다. 현재 수덕사 승가대학 건물로 사용하고 있다.
이밖에 큰 법고와 목어가 법고각에 범종은 범종각 있는데, 법고는 축생의 무리를 향하여, 운판은 하늘을 나는 생명을 향하여, 목어는 물속의 생명에게 그리고 범종은 일체 중생에게 소리를 보낸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곧 소리를 통하여 부처님의 진리를 일체 중생에게 전파하고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 깨달음을 얻어 해탈 성불하고자 하는 교화적 염원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범종각과 법고각의 영역 안에는 3층 석탑과 7층 석탑이 서로 마주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황하정루 앞으로 옮겨져 있다.
사찰 경내의 가장 중심 공간인 대웅전 영역으로 대웅전 좌우측에 서로 마주보며 위치한 건물로 대중스님들이 수행하며 생활하는 주된 공간 청련당, 백련당이 있고, 지옥중생을 구제하고 이고득락(離苦得樂)을 중재하는 지장보살을 주존으로 안치하고 유명계(幽冥界)의 판관(判官)인 목조시왕상이 봉안된 명부전이 있다.
수덕사 대웅전과 벽화
한국전통건축 가운데 남한에 남아있는 가장 오랜 목조 건축물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영주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 조사당, 강릉 객사문, 수덕사 대웅전이다.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하나인 수덕사 대웅전은 국보 제 49호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우리나라 유일의 목조건축물로,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되었다.
대웅전은 정면3칸 측면 4칸으로 지붕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기둥의 중간부분이 부풀려진 배흘림기둥 위에만 공포를 올린 주심포 양식의 건물이다. 간단한 공포구조와 측면에 보이는 부재들의 아름다운 곡선을 대웅전의 건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데, 특히 소꼬리모양의 우미량은 그 중 백미로 꼽을 수 있다. 내부에는 천장을 가설하지 않은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고, 과거에는 바닥에 전돌이 깔렸으나 현재는 우물마루가 까려 있다.
외부에 그대로 노출된 가구에 새로 단청을 입히지 않아 나무가 간직하고 있는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는 수덕사 대웅전은 건물의 기능미와 조형미가 잘 조화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목조 건축물 중 하나이다. 그리고 특히 측면 맞배지붕의 선과 노출된 목부재가 만들어내는 구도는 수덕사 대웅전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형미와 역사적 가치로 인해 국보로 지정된 대웅전은 현존하는 건물 중 백제적 곡선을 보여주는 유일한 목조건축물이다.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에 건물이 퇴락되어 해체, 수리하였다고 하는데, 그 당시 장여와 화반의 밑 둥에서 발견된 묵서명을 통해 이 건물이 1308년에 건립되었으며, 그 뒤 조선시대에 몇 차례 보수한 것이 밝혀졌다. 수덕사 대웅전 내부에 그러져 있던 고려시대의 벽화,1937년부터 4년간 대웅전을 해체, 수리하던 중 발견되었다. 당시 단청과 벽화의 모사를 맡아 이 공사에 참여했던 임천(林泉)이 모사 중에 1528년 단청을 개채(改彩)했다는 기명을 발견하고, 모사하던 벽 내면에 있던 밑그림이 원래의 것임을 확인했다. 이들 벽화는 건물 결구 사이의 작은 공간에 그려진 것으로 모두 40점이며. 주로 소불삼체(小佛三體),주악비천, 나한도, 청,백 극락조, 수생화, 야생화 등을 그린 장엄용 벽화들이다. 이 작품은 고려말기 사원벽화의 대체적인 모습을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후기의 사찰 건축의 양식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라 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와 근대에 이르기까지 약 200여 년을 단위로 보수가 이루어져 왔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수덕사의 고승과 암자
현재의 수덕사 주변에는 정혜사의 능인선원, 소림초당, 금선대, 전월사, 선수암, 극락암, 운수암 등이 있다. 이들 암자에서는 한국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로 선의 혁명가이자 대승의 실천자였던 경허선사와 경허선사의 제자로 일제강점기 아래 치욕스러운 한국 불교 정책을 쇄신시키면서 불교계에 새로운 선풍을 일으킨 만공선사로부터 이어지는 혜암, 벽초, 등의 법자, 법손들이 머물면서 수도정진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잡지[신여자]를 간행하여 스스로 주간이 되었고, 평생동안 여성의 자유와 개방을 추구했으며 여성의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했고, 1933년 수덕사 견성암의 기강을 맡는 소임을 했던 김일엽스님의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선방 견성암에는 100여 명의 비구니들이 수도정진하고 있다. 김일엽스님이 입적한 환희대 역시 비구니들이 머물며 정진하고 있다.m
<사진설명>
1,수덕사 대웅전, 고려 후기 사찰 건축양식의 대표적인 건축물로 통일신라와 조선시대의 건축 형식의 맥을 이어 주며 고려시대의 건축을 정립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약 200여 년을 단위로 보수가 이루어졌다.
2,대웅전 초석과 기단석, 초석은 대부분 자연석 주초를 사용하였으나 대웅전 정면 열의 초석들은 주좌를 돋음하여 사용하였고, 기단석은 장대석을 곱게 다듬어 깐 다듬돌 바른 층 쌓기를 하였다.
3,대웅전 기둥과 창호, 전통 목조 건축의 대표적 의장 기법인 배흘림, 귀솟음, 안 쏠림 기법이 기둥에 사용되었으며 ,창틀은 전체로 연귀 맞춤하여 한 틀로 짜 맞추는 고식 구성을 보인다.
4,대웅전 측면 가구 및 공포, 공포는 지붕의 무게를 기둥으로 적절하게 전달해 주는 지지대 역할을 하며, 역학적 원리에 의해 중첩되는 부재들의 의장적 효과를 가장 잘 보여 주는 부분이다.
5,대웅전 측면, 기하학적이면서도 부드러운 곡선은 한국 전통 목조 건축의 가구미를 가장 잘 나타낸다.
6,관음바위와 관세음보살상, 수덕도령과 덕숭낭자의 전설이 깃든 곳으로 관세음보살의 자비를 기원하는 기도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7,경허선사 영정, 한국 근대 선불교의 중흥조로 선의 혁명가이자 대승의 실천자였다.
8,일주문, 이와 같은 관문들은 주불전에 이르는 길에서 인간의 모든 번뇌와 욕심, 그리고 악한생각들을 정화시키는 상징이 된다.
9,사천왕상, 수미산 중턱에 머물며 동서남북 사방을 지키고 불법을 수호하는 네 명의 대천왕상이다.
10,황하정루, 경내에서 행하는 제반의식의 집전 장소로, 지하에는 박물관인 근역성보관이 있고 1층은 박물관 사무실로, 2층은 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11,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지옥 중생의 천도와 영가의 극락왕생을 기원한다.
12,범종각, 범종을 보관한 곳으로 1973년에 건축하였다. 무게 6500근 높이 2,7미터 둘레 4,5미터의 청동제 대종으로 전통 범종 주조 기법을 따라 조성하였다.
13,법고각, 사물 가운데 목어, 운판, 법고가 봉안되어 있다. 축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 기쁨을 느끼게 하며 수행정진을 독려하는 법구이다.
14,금강보탑1999, 10년 전의 수덕사 풍경과 거리가 있다. 대웅전만이 중심에 틀어 앉아 있을 뿐 대다수의 건물들이 이건되거나 새로 건립되었다. 특히 금강보탑과 코끼리 석등은 백제의 향취가 가득한 대웅전과 조화를 이루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15,청련당과 백련당, 스님들이 거처하는 요사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보면 청련당은 좌청룡에, 백련당은 우백호에 해당한다.
16,수덕사 입구에는 국내 유일의 초가여관인 ‘수덕여관’이 명물처럼 자리하고 있다.
여류화가 라혜석과 이응로 화백의 예술향기가 담겨있기도 하다.
17,코끼리석등 2002
18,7층석탑 충청남도 지정문화재자료 181호로,1930년 만공선사가 건립하였다.
19,수덕사 대웅전은 건립 연대와 보수 시기가 명확하여 당대 건축 양식이나 기법을 추정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한 한국의 목조건축 건물이다.
20.현재 임천의 모사도 일부만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