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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정원?? 스크랩 깃털 꽂은 사람들 / 송 기 호 (Ki-Ho Song)
유수/백재성 추천 0 조회 53 18.12.12 01:3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



깃털 꽂은 사람들
People with Feathers on Their Heads


송 기 호 (Ki-Ho Song)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

| 약 력 |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문학 박사
한림대학교 사학과 교수 역임



한 조선족 학자와 연변 지역을 답사할 때였다. 목이 말라 어느 한 집에 들어서면서 우리 말로 “계십니까?" 하고 사람을 불렀다. 그에게 어찌 조선족 집인 걸 아느냐고 물었더니 집에 걸린 물건이나 분위기를 보면 안다고 했다. 이 조선족 학자는 용케 상대방이 한족인지, 만족인지, 조선족인지를 구별해냈다.

고구려 수도에서는 조선족 가이드가 물어보지도 않고 조선족 행상을 찾아내서 물건을 팔아주었다. 만족은 우리보다 얼굴이 조금 더 새까맣다고 알려주었으나 나는 도저히 구별이 되지 않았다.


발해 유적을 답사할 때에도 현지 학자가 용케 조선족을 찾아내는 것을 보았다. 한 번은 머리에 빨래를 이고 강가로 가는 여인이었고, 또 한 번은 머리에 수건을 쓰고 물가에서 빨래하는 할머니였다. 머리에 빨래를 이거나 수건을 쓰는 것은 조선족밖에 없다는 설명이었다. 이를 목격하면서 우리는 다른 민족과 섞여 산 경험이 없어서 민족 구별에 익숙하지 못하다는 걸 깨달았다.


외국에 나가면 저 사람은 한국사람 같은데 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있다. 뭔가 이유를 댈 수는 없지만 행동거지와 표정 등에서 그런 생각을 갖게 한다. 일본 나라지방을 여행하면서 우연히 마주친 여학생이 한국인처럼 보였는데 말을 건네지 못하고 지나쳤다.
얼마 뒤 지하철역에서 다시 조우하자마자 서로 한국 말이 튀어나왔다. 일본어를 한 마디도 못하면서 혼자 일본을 여행하고 있던 한국 여학생이었다. 한 번은 일본 규슈의 시골 전철역에서 일군의 남자들이 시끄럽게 떠들며 올라오기에 경상도 사람들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일본인들이었다. 말투만 보면 비슷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이처럼 오해를 하는 경우도 물론 있기는 하다.


100년 전으로 올라가면 해외에서 한인을 보기란 쉽지 않았겠지만, 흰옷은 해외에서 한인의 지표였다.


"고국을 떠나 아무리 먼 나라로 이주해도 한민족은 항상 흰옷차림을 하고 있다. 헤이룽 강가에 채소밭이라도 하나 보이고, 밀가루라도 뒤집어 쓴 듯이 흰 옷을 입은 농부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은 틀림없는 조선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도 중국인의 어두운 색 겉옷과 러시아인의 누빈 외투들 사이에 한민족의 경쾌한 흰 의복은 눈에 띈다(조르주 뒤크로,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눈빛, 78쪽)."


그런데 시간을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또 다른 한인의 표지가 보인다. 문헌 기록에는 별로 나타나지 않고, 머리에 깃털을 꽂은 모습으로 그림에 많이 나타날 뿐이다. 그러기에 이번에는 역사 기록이 아니라 그림 여행을 해보아야 할 것 같다.


우선 처음으로 볼 것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농경 그림의 청동기이다. 우연히 대전의 한 고물상에서 구입한 것인데, 지금은 청동기시대 유물을 대표하고 있다. 전체 크기는 7.3㎝ × 12.8㎝ 정도로서, 한쪽 면에 농사를 짓는 장면이 표현되어 있다.


이 그림(그림 1 참조)은 그 일부로서 따비라는 농기구를 들고서 왼쪽 아래의 밭고랑을 경작하고 있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농부의 옷차림을 보면, 윗도리는 입은 것 같은데 아랫도리는 가운데의 남근 모습으로 보아 벗고 있다. 고래로 땅은 여성으로 상징되어 왔다.


이리하여 음양의 조화를 통해 풍년을 기원하는 의식으로 남성이 옷을 벗고 경작을 하는 풍습이 우리나라에 있었다. 이를 나경(裸耕)이라 한다. 조선시대에 함경도에서는 입춘날 옷을 벗고 밭을 가는 풍습이 전해져왔다고 한다.


그림 1. 농경문 청동기 인물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있다.
머리 오른쪽으로 길다란 것이 뻗어 두 가닥으로 갈라지고 있으니, 이것은 깃털을 머리에 달고 있는 모습이다. 대전시 괴정동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이 유물은 청동기시대에 깃털을 꽂았던 풍습이 있었던 사실을 잘 보여준다.


그러한 선사시대의 풍습은 삼국시대에 와서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먼저, 고구려 벽화에서 그런 그림들을 찾을 수 있으니, 쌍영총 벽화의 기마 인물을 보면 알 수 있다(그림 2 참조).


이 사람은 머리에 관모를 쓰고 두 가닥의 깃털을 꽂았다. 이런 관을 조우관(鳥羽冠)이라 부른다.

무용총 벽화에 나오는 유명한 호랑이 사냥 장면에서도 조우관을 쓴 두 사람이 보이는데, 한 사람은 깃털 두 개를 꽂았고 다른 한 사람은 여러 가닥의 깃털을 꽂아서 조금 달리 표현되어 있다.


그림 2. 쌍영총 기마 인물


백제에서도 이런 전통이 있었을 것이나, 실물로 확인되지 않고 문헌 기록에만 나온다.


"그 나라 의복의 경우 남자는 고구려와 거의 같다.
조회할 때나 제사지낼 때에 관모 양쪽에 날개를 꽂지만, 전쟁 때에는 그러지 않는다『( 주서』백제전)."


10여년 전에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실을 들렸다가 탁자 위에 놓인 탁본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토기를 굽기 전에 선으로 스케치한 것인데, 말을 타고 있는 사람 머리에 두 가닥의 선이 나와 있었다. 이미 고인이 된 한영희 부장은 경주 출토품으로서 5세기 경으로 추정된다고 설명해 주었다. 당시까지 신라 조우관은 알려져 있지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관심을 표명했더니 책상에서 꺼내서 선물로 건네주었다. 이 그림(그림 3 참조)이 바로 그 탁본이다.


그 뒤 경주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전돌에서도 조우관 인물도가 확인되었다. 스케치하듯이 선으로 그린 것인데, 문인 한 사람과 그 뒤를 따르는 무인 두 사람이 표현되어 있다. 무인은 갑옷을 입었고, 문인은 머리에 뿔처럼 생긴 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처럼 삼국 모두에서 조우관이 확인된다. 더구나 외국에서는 이런 풍습이 없었기에 고대 한국인의 표징처럼 되었다. 다음은 가야 사람에 대한 일본측 기록이다.


그림 3. 신라 토기 인물상


"스진천황 때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한 척의 배에 타고 월국 사반포에 도착했기 때문에 그곳을 각록(角鹿)이라 이름하였다.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 물으니, “의부 가야 국왕의 아들로, … ” 라고 대답하였다(『일본서기』스이닌천황 2년)."


일본에 건너간 가야 국왕의 아들을 두고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라고 적었다. 이 기록을 통해서 다음 사실이 연상된다. 뿔이 났다고 한 것으로 보아서, 깃털을 꽂기보다는 쇠뿔 같은 것을 매달았을 것이다. 신라나 가야의 관모를 보면 새 날개나 쇠뿔 모양 장식이 달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라 김유신에게 내렸던 태대각간(太大角干) 벼슬에서 알 수 있듯이, 각간벼슬은 혹시 뿔 장식을 달았기 때문
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무튼 가야에서도 깃털을 다는 풍습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뿔 같은 것을 장식한 풍습은 분명히 있었던 것 같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일본에서는 그를 뿔이 난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생소하게 생각했다는 점이다.


1996년 2월에 일본 오사카 부립 센호쿠고고자료관(泉北考古資料館) 전시실에 들렸다가 거기서도 조우관 인물을 만났다(그림 4 참조).

가난초(河南町)의 석실무덤에서 출토된 것이란 설명이 붙어 있었지만, 자세한 발견 경위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가운데 사람 머리에 깃털이 수직으로 꽂혀 있어, 한반도 계통의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1992년 국내 일간지에서는 일본에서 발견된 그림하나가 소개되었다(그림 5 참조).

나라 지방의 호류지(法隆寺) 금당에 있던 아미타여래상 대좌를 분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것으로서, 7세기 중반에 해당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인물의 머리에도 깃털로 장식된 모자가 씌워 있어서 한반도 계통의 인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V자 모양의 옷깃도 고려해서 발견 당시에 고구려인으로 추정하였다. 호류지 금당벽화도 고구려 승려인 담징이 그린 것이니, 그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이 그림은 다카마쓰 고분 벽화보다 반세기나 올라가는 것이라서 일본에서는 가장 오랜 인물화가 되었다.


그림 4. 일본 고분 출토 조우관 인물도


그림 5. 호류지 발견


중국에서도 고대 한국인의 활동 흔적이 보인다. 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당나라 이현(李賢, 654~684)의 무덤 벽화로 먼저 가보겠다. 이현은 중국 유일의 여자 황제였던 측천무후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에 장회태자에 봉해졌지만 5년 뒤에 쫓겨나 지방에 거주했다. 그러나 정권을 잡은 측천무후가 그의 반란을 두려워해서 강제로 자살하게 하였다. 권력을 위해서 자기 자식마저 죽인 것이다. 706년에 그의 무덤을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2002년 중국 시안(西安)을 답사할 때에 근교의 건릉에 배장되어 있는 그의 무덤을 들렸다.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 양쪽에 6명씩 그려진 손님맞이 그림이 있는데, 동쪽 벽에 문제의 인물이 보인다. 머리에 뿔 달린 사람이다(그림 6 참조). 앞의 세 사람은 홍로시의 관리로서 외빈 접대를 담당했다.

뒤의 세 사람은 외국에서 온 사신들인데, 첫번째는 이목구비로 보아 서양에서 온 사람인 것을 금방 알 수 있고, 맨 뒤는 털모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북방의 추운 나라에서 왔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있는 사람은 복장과 머리 장식으로 보아서 한반도에서 간 사신이 분명하다.


그림 6. 장회태자묘 동쪽 예빈도


그 동안 학계에서는 신라 사신이냐 고구려 사신이냐를 두고 논쟁을 해왔다. 신라 사신으로 보는 견해는 이 그림이 조문객을 표현한 것이고 무덤을 만든 시기도 고구려가 멸망한 뒤라는 이유를 들고 있고, 고구려 사신으로 보는 견해는 장회태자가 고구려 멸망 전, 즉 생전에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이유를 들고 있다.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지만, 한반도에서 파견된 사신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사신은 머리 장식만 특징적인 것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울 정도로 큰 소매에 펑퍼짐한 옷차림을 하고 있기도 하다. 활동성과 실용성이 배제된 느낌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고대 복식의 특색이기도 한데, 조선시대까지도 그런 전통이 내려왔다. 땅에 끌릴 정도로 길다란 옷자락, 넓은 소매 등은 이따금 중국인들의 웃음거리가 될 정도였다. 더구나 전쟁이 일어나자 비실용적인 관료 복장이 문제가 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기에 선조는 다음과 같이 지시하였다.


" 왕이 분부하였다. “ … 중국인들은 매번 넓은 옷자락과 큰 소매, 머리에 쓴 큰 모자를 웃음거리로 삼았고, 유 원외(劉員外: 명에서 파견된 원외랑 유황상(劉黃裳))는 심지어 이를 개혁하라는 공문까지 보내왔다. 이제 중국 제도를 따라 상하 관리의 관복 이외에 군복과 속옷은 모두 소매를 좁게 하고, 금군(禁軍: 궁궐 및 왕 호위 담당 군사) 이하 공·사 노비는 모두 작은 모자를 쓰고 … ”(선조실록, 26년 <1593> 6월 1일)"


간편해야 할 무사들도 넓은 소매에 품이 큰 옷을 입어 선조가 개혁을 명한 적도 있다. 이런 모습은 근대에 서양인의 눈에도 독특하게 보여서 ‘부피가 큰 옷’ ,‘ 높다란 갓’ 으로표현되었다.


역시 시안에서 발굴된 은합(銀盒)의 그림도 주목된다.

높이 5cm, 직경 7.5cm, 무게 121g 밖에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은합인데, 뚜껑을 7개 구획으로 나누어 7개국의 모습을 조각해 넣었다. 그 중 하나가 ‘고려국’ 사람들이다(그림 7 참조).

왼쪽에 높은 사람이 앉아 있고, 그 앞으로 4명이 서 있어 무언가 회의를 하는 듯한 모습이다. 역시 긴 옷에 소매가 넓은 옷을 입고 있을 뿐 아니라, 머리에는 토끼의 두 귀처럼 깃털을 꽂았다. 은합에 고려국이라 써 있으므로 고구려 사람들일 것이다.


시안보다 서쪽에 있는 둔황(敦煌)으로 가도 한국인을 만날 수 있다. 둔황 석굴 가운데 220호와 335호 등의 벽화 그림에 깃털 꽂은 사람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335호를 예로 들겠다.

이 그림은 유마거사가 아플 때에 국왕과 대신들이 문병하였다는『유마힐경』을 표현한 것으로서, 중국 황제를 비롯하여 그 아래 대신 및 외국 왕과 사절들이 나타나 있다. 그러한 외국 사절도 가운데 머리에 조우관을 쓴 인물 두 사람이 끼어있는 것을 볼 수 있다(그림 8 참조).

깃털 두 개를 꽂은 조우관 양쪽으로 흰 끈이 나와서 턱 아래에서 묶었고, 끈 사이로 귀가 드러나 있다. 옷차림은 이현묘에 보이는 조우관 인물과 비슷하다. 이 벽화의 연대가 686년이니 고구려 멸망 직후의 그림이다.


그림 7. 당나라 은합


그림 8. 둔황 335호 벽화


그림 9. 아프라시압 궁전지 사절도


중국에는 이러한 사례가 몇 개 더 보인다. 그런데 고대 한국인의 활동 흔적이 일본과 중국을 넘어서 중앙아시아에서까지 나타나는 것이 주목된다. 중앙아시아에서 큰 세력을 떨쳤던 소그드(Sogd)인의 유적지에서도 그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소그드인들은 경제 활동에 뛰어나 실크로드를 이용하여 동서양의 교역을 담당하였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소그드인의 자취가 많이 나타난다. 당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던 안녹산도 아버지가 소그드인이었다.


현재 우즈베키스탄에 속하는 사마르칸드에 아프라시압 궁전지가 있는데, 이것은 소그드인이 세운 강국(康國)의 유적지이다. 이 궁전지 벽화에는 7세기 후반 바르후만 왕이 사절들을 맞이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가운데에도 머리에 두 가닥의 깃털을 꽂고 허리에는 둥근 고리가 달린 큰 칼을 찬 사람이 두 명 등장한다(그림 9 참조). 이들은 종래에 신라 사절로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고구려 사절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고구려는 수·당의 압력에 대응하기 위해서 내륙아시아 세력들과 연계를 맺었다. 지금 몽골에 남아 있는 돌궐 비문에도 고구려 사절이 파견된 기록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지금까지 본 것처럼 고대 삼국인과 가야인을 하나로 묶어주는 패션이 바로 머리 깃털이었다. 다음은 당시 중국인에 비친 고구려인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 술자리가 무르익었을 때에 희롱하여“공의 얼굴이 고구려인과 같다”고 하니, 양재사가 흔연히 일어나 비단을 잘라 두건 위에 붙이고 자주색 포를 뒤집어 쓰고 고려춤을 절조에 맞추어 추니, 참석자들이 모두 비웃었다(『신당서』양재사 전기)."


이 기록은 측천무후의 총신이 고관들을 초청하여 베푼 연회에서 발생했던 일이다.


그러면 왜 깃털을 꽂았을까? 고대에 새는 중요한 존재였다. 샤머니즘에서 새는 하늘과 지상을 연결하는 매개자로 이해한다. 삼한에서는 장례시에 큰 깃털을 함께 묻어 죽은 자가 하늘로 날아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박혁거세, 김알지 등 고대 건국자들이 알에서 태어난 것으로 묘사되어 있을 정도로, 고대 신화에 새와 관련된 내용이 상당수 나온다. 지금도 무당집에 세워둔 장대에 새를 달거나, 동구 밖에 세워둔 솟대에도 새를 올려놓는다. 앞에서 언급한 농경문 청동기에도 나무에 앉아 있는 새가 표현되어 있고(그림 10 참조), 유럽의 후기 구석기 동굴 벽화에도 쓰러진 사람 옆에 나무에 앉은 새 한 마리가 표현되어 있다(그림 11 참조).


그러나 이러한 깃털 장식도 중국 복식제도를 받아 들이면서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공식적으로는 648년에 김춘추의 건의를 받아들여 당나라 복식으로 바꾼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이미 이러한 변화가 나타났고, 이에 따라 하나둘씩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현재 타이완 고궁박물원에 소장되어 있는 ‘왕회도(王會圖)’란 그림에 등장하는 삼국 사신 가운데 고구려 사신만 깃털을 꽂은 것으로 그려져 있는 것은 고구려에서 가장 늦게 개혁된 사실을 반영한다(그림 12 참조).


지금까지 깃털을 따라 여행하였다. 새 숭배 관념은 세계에 보편적인 것인데, 유독 삼국과 가야인 사이에서만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그렇지만 고대 한인과 타국인을 가르는 주요한 기준이될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옷차림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런 점에서 삼국민이 고대 한국인으로서 점차 동질성을 형성해가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림 10. 농경문 청동기 새


그림 11. Franco-Cantabrian 동굴 벽화


그림 12. 염립본(閻立本, 600~673)이 그린 왕회도


기획 : 남경필 편집간사



대한토목학회

THE MAGAZINE OF THE KOREAN SOCIETY OF CIVIL ENGINE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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