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경찰연혁사>>(1951)를 통해 본 공주의 한국전쟁
엊그제 국가기록원에 가서 단기4284년(1951년) 6월 20일자로 공주경찰서가 충남도경에 작성해 올린 <<경찰연혁사 -공주경찰서>>(공문번호: 公警警第256號, 국가기록원 문서관리번호: BA0411773)를 복사해 왔습니다. 첨부된 공문에 따르면 위 연혁사는 충남도경의 명령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충남도경에 접수된 날짜는 7월 25일입니다. 위 문서철에는 동일시기에 작성된 충남 각군의 경찰연혁사가 수록되어 있는데, 전쟁 당시 지방경찰의 활동실태를 보여주는 좋은 자료라 여겨집니다.
집에 와서 차분히 읽어봤는데, 그동안 구술 등을 통해 모호하게 알고 있었던 부분을 문헌기록을 바탕으로 다시 재구성할수 있었습니다. 다른 지역 분들이 보면 좀 지리하다 여길수도 있으나 공주사람들의 경우, 귀에 익은 지명들이 많아 찬찬히 읽어보면 나름대로 재미가 있을 겁니다. 특히 우리 까페의 <공주의 한국전쟁과 전쟁피해>에 올려놓은 관련 글과 아래의 인용문들을 대조하며 읽어보면, 당시 공주 경찰들의 활동상은 물론이고 전쟁 전후 시기 공주사정을 나름대로 재현해 보실수 있을 겁니다.
1. 6·25사변 중 중요 경찰사항
<625사변 중 중요 경찰사항>
단기4283(1950년 -필자)년 6월 25일 불의에 북한 괴뢰군이 불법 남침하여 수도 서울이 후퇴하게 되며 연일 연야 피난민이 복박(覆迫) 남하케 되자 일시에 민심이 동요되여 수습키 난(難)하여 급속 비상시국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피난민 수용과 각방(各方)으로 선전 보도(報導)를 실시하는 일방(一方) 당시 당지 파견 현병대와 협의하에 형무소 수인(囚人)의 처치(處置)와 보도연맹원의 조치(措置) 등 민심 수습에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부득이 남하하여 당서원(当署員)의 전투사 전술(前述)과 여(如)하거니와 감격의 수복(收復)으로 학수고대하든 자양(子羊)과 같은 군민(郡民)의 인명 피해 또는 일시 가산을 피탈당하고 보복(報復) 신청이 쇄도하여 지방인사와 휴수(携手)하여 부역(附逆) 악질 분자 무량(無量) 삼천여명을 검거 의법처분(依法處分)하고 난마(亂麻)과 갖치 혼잡된 약탈 물품을 회수하여 사,오차(四,五次)에 긍(亘)하여(걸쳐 -필자) 공개 환부(公開 還付)하여 다대(多大)한 군민(郡民)의 기대에 기여한바 유(有)하며, 소백산맥을 승(乘)하야 북상하는 잔비(殘匪)를 관내 각지에서 계속 소탕하여 일반민에 피해를 미연에 방지하였으며, 현재에 대둔산에 본거를 둔 공비(共匪)의 관내 계룡산에 침입한바 유(有)하여 수차 일제 토벌 색적(索敵)함과 자체 경비에 만전을 경주하고 있는 차제(此際)임
요즘과 달리 문단 나누기나 끊어쓰기도 안하고 죽 이어쓴 문장, 읽기 어렵죠. 위의 인용에서 확인할수 있는 주요 사실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째는 전쟁 발발 직후 공주에 비상시국대책위원회가 조직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내용은 서덕순의 <<피난실기>>에 자세히 나와있는데 위원장은 경찰서장이었으며, 위원은 지역내 각급 기관장들이었습니다. 위 사료는 공주 형무소 좌익수와 공주 보도연맹원 학살에 공주의 시국대책위원들도 일정 역할을 담당했다는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위의 사료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공주경찰서장을 위원장으로 한 비상시국대책위원회가 ‘당지 파견 헌병대와의 협의’ 가운데 살구쟁이 학살을 집행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학살명령은 중앙정부(치안본부, 육군본부)가 내린 것이며, 학살을 주도한 것도 군인(CIC와 헌병)과 경찰, 형무소 간수, 청년방위대원 등입니다. 하지만 위 문서는 군수나 읍장, 지원판사와 지청검사 등도 학살 책임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둘째는 수복후 ‘인공 시기’ 피해자들의 ‘보복 신청’에 의거하여 삼천여명의 ‘부역혐의자’를 체포하였을 뿐만 아니라 약탈된 물품을 되찾아 4-5차례에 걸쳐 공개적으로 주인들에게 돌려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위의 인용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대목은 ‘피난에서 돌아온’ 이들의 ‘보복 신청’이 쇄도하였다는 부분입니다. 인공시기 공주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막연한 추측만 가능할 뿐입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공주지역에서도 인민위원 선거, 토지 개혁, 전쟁 동원(병력과 물자 징발) 등이 진행되었을 겁니다. 서덕순의 <<피난실기>>에도, “인공의 정치가 시작되자 동리(반포 죽곡리)의 몇 놈이 나를 반역자로 취급하고 나의 가족이라 하야 갖은 학대를 자행하였”다든가, “여러 대를 세전하여 자신의 토지를 경작하던 마름이 세상이 바뀌었다고 안면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내용이 보이는데, 이는 피난에서 돌아온 이들의 일반적인 정서였을 겁니다. 수복후 모든 지역에서 발생한 ‘부역자 학살사건’은 위의 인용문을 보아도 알수 있듯이, 범법자에 대한 공적인 ‘처벌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사적인 ‘보복 행위’였다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경찰과 우익청년단에 의해 ‘사적 보복행위’가 얼마나 심했는가는, 1950년 10월 4일 헌병사령관이 “부역자를 불법 구속하여 구타(실재는 학살)할 경우 그 책임자는 물론 담당자를 엄벌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다는 것, 이승만 정부에 의해 ‘부역행위특별처리법’과 동시에 ‘사형(私刑) 금지법’이 제정되었다(1950년 12월 1일부터 발효됨)는 것 등을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2. 개전 초기 공주 경찰의 활동
이 외에도 <<공주경찰연혁사>>에는, 그동안 구술 등을 통해 막연하게만 알고 있었던 사실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들이 여럿 보입니다. 그 가운데 가장 주목되는 것이 개전 초기 공주경찰의 활약상을 서술한 대목입니다. 문서상의 내용의 다 소개하는 것은 불필요할 듯하여 연표식으로 간추려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 1950년 7월 9일 천안을 거쳐 유구지서 관내로 적군 약 70여명이 침투하여 유구지서를 습격 점거 하였다. 이에 공주경찰 30명과 경기도 청단 경찰서원 120명은 공주경찰서 수사주임 윤모 경위(이후 전북 전주에서 ‘피살’됨)의 지휘로 당일 오후 4시부터 밤 9시까지 교전하여 적 1명을 사살하는 등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 7월 8일 밤 미제34연대에 배속된 기갑연대(연대장 유흥수) 기병대대는 트럭을 타고 9일 아침 연대본부가 있었던 공주고등학교에 도착했다. 배속신고 때 기병 제6중대는 와링턴 중령(연대장)으로부터 예산-청양 일대의 적정 탐색 임무를 부여받고 10일 아침 예산방면으로 진출했다. 뒤이어 7월 11일 07시 중대장의 명령으로 나머지 기병소대(소대장 조돈철)가 예산으로 향하던 중 12시경 유구에서 인민군(인민군 제6사단 유격부대 2개 중대)과 조우하여 전투를 벌였다. 국방군사연구소 편, <<한국전쟁전투사 -오산대전전투(서부지역 지연전)>>, 1993)에 따르면 11일 12시경 유구초등학교에서는 이른바 ‘인민군 환영식’이 벌어지고 있었다고 한다(106-1088쪽). 예산읍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기병 제6중대는 적이 유구까지 진출한 것을 알고 12일 아침 예산을 출발하여 23시경 금강 북안에 도착했으나 다리가 폭파되어 말을 타고 도강을 감행한뒤, 13일 새벽 미제34연대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 7월 9일 야간부터 임시 주둔국군 제17연대(일명 옹진부대, 연대장 백인엽) 8중대와 공동작전이 시작되었다.
☞ 살구쟁이 학살에 제17연대 병력이 일부 동원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수 없다. 7월 8일 21시 45분에 하달된 미제24단의 작전명령 3호(금강방어전 관련 명령: <공주의 한국전쟁과 전쟁 피해> 참조)에 따라 미제34연대 연대지휘본부가 공주고등학교에 설치된 것은 9일 아침 무렵이었다.
○ 7월 12일 공주경찰 30명과 후퇴한 경기도 경찰 100명은 천안 광덕 방면에서 광정지서를 거쳐 의당면 덕학리로 200여명이 적군이 침투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교전하고자 했으나 병기부족과 미군부대장(34연대장 - 필자)의 철수 명령 때문에 부득이 접전도 못하고 퇴각하였다.
☞ 7월 11일 17시경 수촌리를 방어하던 미군과 인민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졌다. 이날 밤 미군은 금강 북쪽 500미터지점까지 후퇴하였다가 다음날 06시에 금강 남안으로 철수했다. 12일 21시 40분경 금강 북쪽에 남아 있던 미군은 모두 남쪽으로 퇴각했다. 금강교가 폭파된 것은 그날 23시경이었다. 하지만 완전히 절단되지는 않아 13일 새벽 다시 폭파했다.
○ 7월 12일 밤 금강 불티(火峙)나루 부근에서 강을 건너던 적 척후소대장 육군 소위 1명과 전사(병졸) 1명을 생포하여 미군 연대에 인계하였다.
☞ 앞의 <<한국전쟁전투사 -오산대전전투(서부지역 지연전)>>에 따르면 인민군 제4사단 제16연대 소속 정찰대원(배준팔 소위)을 심문한 결과 인민군 제4사단이 정안 방면, 인민군 제3사단이 대평리 방면에 진출해 있었다는 사실, 양사단이 보유하고 있었던 탱크수가 약 50여대라는 사실, 양 사단의 편제인원이 오산전투부터 천안.전의전투 등을 치르는 과정에서 60-80%의 병력이 손실되었다는 사실 등을 확인할수 있었다고 한다(134쪽).
○ 7월 13일 오전 12시경 읍 주변에 접근한 적군이 중화기를 동원한 포격을 개시하여 읍내에 화재가 발생하자 읍민들이 극도로 동요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자 미군의 지시에 따라 공주경찰은 경천지서에 임시경찰서를 설치하고 결사대 약 30여명을 선발하여 기동대를 조직하고 읍내 치안을 유지하고자 했으나 미군의 강경한 제지로 7월 13일 오후 10시경 강경서로 이동했다. 이후 전세가 불리해지자 다시 전북 춘포, 전주 등지로 이동하다가 이리, 완주 등지에서 전투를 치룬뒤, 7월 25일 경 ‘충남경찰 집결지’인 대구에 도착했다. 이후 단기4283년 10월 7일 공주로 돌아왔다.
☞ 미군 선발대가 논산을 거쳐 계룡면 지역으로 들어온 것은 추석(9월 26일) 다음날 정도였다고 한다.
3. 전쟁 전후 시기 공주지역 사건 사고
첫째로 주목되는 것은 공주형무소 죄수들의 집단 탈옥사건에 대한 기술입니다. 위 문서의 해당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단기4281년 8월 2일 여순사건을 뒤이여 동년(이는 명백한 오류이다. 사건이 발생한 정확 연도는 단기 4280년 그러니까 서기로 1947년이다 - 필자) 8월 10일 공주형무소에 직원의 (남로당 - 필자) 직장세포조직에 기인한 탈옥사건이 돌발하야 탈옥수인 187명 중 113명을 체포하고 74명의 도주 미체포사건 외 별사고 無히 경과하여 오든 중...
당시 <<동아일보>>는 사건 발생 사실만 간단히 보도하고 있으나, 위의 문서는 74명이 체포되지 않고 도주하였다는 사실, 형무소 간수 가운데 남로당 세포가 있었다는 사실 등을 잘 보여줍니다. 당시 신문들은 위 사건을, “공주형무소 좌익수들이 형무소 간수들의 장총과 탄약을 탈취한 뒤 인근 야산 등지로 도주했으나, 인근 야산에서 대부분 체포되었다”고만 짧게 보도하였습니다.(<200여 죄수 탈옥, 공주 형무소의 불상사>, <<동아일보>>, 1947년 8월 31일) 공주지청의 <<受刑人名簿>>(국가기록원 소장자료)에 따르면, 위 사건으로 20여명의 공주형무소 간수들이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아마도 주동자였던 간수는 체포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두 번째로 주목되는 것은 해방공간에서 있었던 각종 사건 사고, 즉 <중대 분요, 쟁의, 범죄 기타 사회의 이목을 끈 경찰사항>에 대해 정리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흥미로운 사건들인 만큼 위 문서의 내용을 그대로 전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문장에 오류가 있는 부분도 더러 있으나 그대로 두었습니다.
* 단기 4278년(1945년) 8월 17일 신풍면민의 해방감격과 흥분 끝에 신풍지서를 습격 청사 일부를 불태운 사건
* 단기 4279년(1946년) 3월 18일 장기면 신관리 소재 공주농업학교의 교사 화재 사건
* 단기 4281년(4280년의 오류임 -필자) 8월 공산분자의 책동으로 공주형무소 직원이 직장세포 조직으로 인한 탈옥 사건
* 단기 4281년 10월 실화(失火)로 인한 공주여자사범학교 교사 기숙사 2동 소실사건
* 단기 4281년 6월 미증유의 임우(瀮雨: 장마)로 인하여 공주제방이 붕괴되어 읍내 침수 50여호, 파괴 전답 등 막대한 피해가 유(有)하였으며, 연(連)하여 강저(江底)의 사적(砂積)으로(강바닥에 모래가 쌓여 - 필자) 4282년 7월 전년(前年) 정도의 침수가 유(有)하였음
* 단기 4280년 2월 13일 우성면 죽당리 살인강도사건, 같은해 7월 발견된 정안면 석송리 살인사건, 단시 4279년 5월 20일 계룡면 신기리 살인사건, 단시 4282년 11월 5일 탄천면복흥리 가족살해사건
* 단기 4282년 5월 13일 검거된 공주군청 식량사건
* 단기 4282년 8월 20일 검거한 무진업자(無盡業者: 일종의 전당포 주인) 횡령사건
* 단기 4282년 10월 공주사대의 창립으로 인한 (공주여고와의 -필자) 교사(校舍)교환 문제
* 625사변 중 여사범, 중학, 소학 등 교사가 전부 소실되어 교시도시(교육도시의 오자임 -필자)로서의 면모를 상실케 하였음
셋째는 해방공간은 물론이고 전쟁중에도 주민들에도 많은 피해를 입힌 ‘전염병’ 관련 기술들이 주목됩니다. 위 문서에 따르면, 1946년 6월 전국적으로 유행한 호열자 피해, 1949년 10월 뇌염 피해, 전란 뒤끝인 1951년 1월의 장질부사 피해 등으로 많은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합니다. 당시 장티프스 피해는 거의 모든 읍면지역에서 발생했는데, 가장 심각했던 지역은 유구, 신풍, 사곡지역이었던 모양입니다.
첫댓글 자료 잘 읽어 보았습니다. 문장을 쭉 이어쓰기는 아직도 법원의 판결문을 그렇게 합니다. 전쟁이 났는데 적을 막는 일보다 형무소 수인(囚人)의 처치(處置)와 보도연맹원의 조치(措置)가 민심 수습에 노력을 경주한 것으로 되어있습니다. 좌익수라는 말은 없고 단지 형무소 수인이라고 하는 것과 '처지'와 '조치'라는 구분이 눈에 띄네요. 살구쟁이에서 발굴된 탄피와 탄두가 M1 소총의 것이라면 당시에 주로 군인들만 사용하던 총인지라 살구쟁이 학살의 주역은 17연대 였을 가능설이 높아 보입니다. 전투를 하러 주둔 한 것이 아니라 학살이 목적인 것 같습니다.
6.25 당시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를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 못내 걸렸던 것 같습니다.
좋은자료 찾으셨군요...입수하느라 고생 하셨겠습니다 잘읽고 가슴에 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