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정토보서(淨土寶書)와 징광사지(澄光寺址)
징광사에서 간행된 정토보서는 백암스님(柏庵:1631-1700)등이 만든 우리나라 차문화에 귀중한 자료로서 각광 받을만한 것이다. 정토보서는 茶를 부처님께 공양하는 법, 차를 놓고 혼례를 올리는 법 시신을 화장하여 묻거나 재를 뿌릴 때 차를 공양하는 의식 등 사찰에서 행하는 모든 의식에 차가 어떻게 공양되는가의 법도를 우리의 실정에 맞게 정리한 책이다. 다비식 구절에는 화장 하기전 茶를 올리고 나서 운구앞에서 방울을 울리며 다음과 같이 다게(茶偈)를 읊는다. “조주에 새로 딴 잎차를 절하며 올립니다. 애오라지 진한 정을 茶에 녹여 아뢰는 것은 그저 한 조각의 작은 정성입니다. 깨어있고 취하고 혼미함은 삼계의 꿈이오니 몸을 뒤집어 법왕성에 드소서.”
趙州茶芽親拜獻 耶表沖情一片誠 覺取昏迷三界夢 飜身直到法王城
.....한학자 장인용 역....
이 책에는 또 당나라때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이전에는 잎을 끓여 물을 마시거나 또는 데쳐서 나물로 무쳐먹으면 씁쓸하고 쓰다해서 차를 씀바귀 도( )자로 쓰다가 자를 최초로 茶자로 썼다고 적혀있다. 당시 징광사는 국내 최대의 출판사 역할을 했던 모양이다. 징광사에서 새겨진 수 많은 불서들이 송광사나 선암사 쌍계사등지에 진장되어 있음을 쉽게 볼 수 있다.
2.진주 청곡사( 晋州 靑谷寺)
진양군 금산면 갈전리 18번지에 자리잡은 월아산 청곡사(靑谷寺) 는 절 주위에 야생차가 군락을 이루고 있다. 신라 헌강왕 4년 도선국사(道先國師)가 창건해 고려 우왕 6년 실상대사(實相大師)가 중수하고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광해군 때 복원했다. 조선말엽 포우대사가 대웅전을 비롯 절 전체를 중수 했다는 청곡사는 해방전 까지만 해도 경내의 야생차로 한해 소비량을 채우고도 남았다고 한다.
대웅전 법당 왼편에는 창건주 도선국사와 실상대사 그리고 포우대사의 영정이 그려져 있고 그 영정 앞에는 월봉스님의 흑백 사진이 있다. 영정 앞에는 차주전자와 찻잔이 경전과 함께 놓여있다. 도선국사가 남강가에서 청학이 날아오른 서기를 보고 창건했다는 청곡사 입구에는 방학교(放鶴橋)라는 다리가 있고 경내에 한학루(閑鶴樓)라는 정자가 다리를 내려다 보고 있다. 한학루 아래에는 연못이 있고 거기에는 고니가 놀고 있다. 대웅전 뒤쪽에 야생차밭이 있는 청곡사는 진주의 차 유적지로서 잘 일구어져 있다. 원래 진주는 차향(茶鄕)이다. 5월 25일 차의 날이 제정 된것도 진주이고 차의 날 선언문도 진주서 만들어 졌다. 또 진주는 충절의 고향이다. 진주 대첩때 왜장의 몸을 껴안고 동반투신한 논개의 의절이 남강의 유구한 흐름속에 살아있고 강가의 촉석루와 의암은 아직도 많은 사람의 발길을 끈다.
고려말 포은 정몽주가 영남을 순시 할 때 머물러 갔다해서 22대손 정상진씨가 1939년에 비봉산 기슭에 비봉루(飛鳳樓)라는 정자가 있는데 진주의 유명한 서예가인 은초 정명수(隱樵 鄭命壽) 선생이 이곳을 서실로 꾸며 후학을 지도하며 서실과 다실로 쓰기도 했다.
3. 경주 기림사(祇林寺) 경주 함월산 기림사는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차 유적지라 할 수 있다. 1400여년 전 차와 더불어 창건됐다. 기림사 사적기에 나와있는 오종수(五種水)는 전단정( 檀 )과 더불어 차샘(茶泉)으로 유명하다. 또 조선의 생육신이며 차인이었던 매월당 김시습(梅月堂 金時習) 의 영정과 영정 채봉문 현판이 있는 곳이다. 오종수란 감로수(甘露水) 화정수(和靜水 또는 和 水) 장군수 (將軍水) 안명수(眼明水) 그리고 오탁수(烏啄水)라는 다섯가지 이름을 가진 우물인데 모두 특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첫째 감로수는 찻물로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석간수 인데 물위에 유천처럼 흰빛이 감돌고 있지만 막상 바가지로 떠 보면 그냥 물색인 음수중의 음수이다. 북암의 뒤켠 바위아래 있다. 둘째로 화정수는 기림사 경내 요사채 마당 가운데 자리한 우물로 젖처럼 우유처럼 달콤한 물맛으로 오래 마시면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 해진다고 한다. 셋째로 장군수 기림사 오백나한전 바로 앞 삼층석탑 밑에 위치 한다는데 왜 하필 석탑아래에 우물이 있는가 하겠지만 탑에 귀를 대보면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석탑이 있기전 우물이 있었다는 얘긴데 이물을 계속 마시면 물에 기운이 있어 장수가 된다하여 장군수라 한다. 또 장군수는 기림사에서 얼마 멀지 않은 감은사지의 지하연못 과 연결되어 있다고들 한다. 네 번째 안명수가 있는데 기림사 들어 가기전 왼쪽 담벼락에 있는 우물이다. 이 물은 맛도 그만이지만 이 물로 눈을 씻으면 10리 밖의 화살과녁을 넉넉히 볼 수 있는 눈이 된다고 한다. 다섯 번째로 오탁수라는 우물은 지금은 없어진 기림사 개울 건너에 있던 동암(東庵)에 자리하고 있었다는데 지금은 우물자리도 없지만 꼭 찾으려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까마귀가 쪼은자리에 물이 고여 있어 파보니 감로수가 나왔다고 해서 오탁수라 했다고 한다. 또 전단정이라는 오종수 보다 더 귀할지도 모르는 우물이 있는데 이 절의 사적기 창건설화에 천축국의 광유성인이 어느날 제자에게 서천국에서 400여 나라를 거느리고 있는 사라수 대왕 (沙羅樹 大王)에게 가서 차각(茶角)을 할 8궁녀를 구해 오라고 한다.제자는 사라수 대왕께 “임정사에서 500제자와 더불어 법요를 광설하여 중생을 교화함에 궁녀들을 데려가 급수전단(給水煎茶) 의 시봉을 할 것입니다.”고 광유성인의 말을 전하고 8궁녀를 모시고 왔다. “8궁녀를 데리고 오니 성인은 금관자(주전자)를 주어 전단정의 물을 긷게 하매 하루에 500순(巡)씩 급수케 해 3년에 이르매 8궁녀는 무상도(無上道)를 수료하였다.”고 적어 놓고 있다. 또 “광유성인은 바로 석가모니이고 사라수 대왕은 아미타불이며 8궁녀는 8대보살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곳 스님들 말로는 아마도 지장전 뒤에 있었던 우물이 바로 전단정이었던 것 같다고 추정을 하고 있다. 물이 고여 있을땐 시리도록 파란 색깔의 물인데 떠보면 파란 색이 없어지고 했다니 예사 우물이 아닌 것 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기록에 나타난 茶의 물로 유명한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속리산 삼타수(三陀水)와 더불어 기림사 전단정과 오종수는 차유적지로 그 성가를 높일것이 틀림없다. 기림사 왼쪽 숲속에 매월당 김시습의 사당이 있고 또 이곳의 스님이 작업하고 있는 함월요가 있다. 기림사 함월요 도자기 하면 꽤 유명하며 백자나 청자 분청이 아닌 매우 컬러풀하고 화려한 것이 특징이다.
4.효당스님과 사천 다솔사(泗川 多率寺)
남해 고속도로에서 광양 여수쪽으로 가다보면 사천시 곤양읍이 나온다. 곤양에서 다솔사역으로 가는 길에서 2km 정도 작은길을 따라가면 다솔사라는 절이 나오는데 다솔사는 사천이 자랑하는 자랑하는 차 유적지의 대표적인 곳이다.다솔사는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이다.
신라 지증왕 4년 화엄사를 창건한 인도스님 연기조사가 이 절을 창건 했는데 영악사(靈岳寺)라 불리다가 선덕왕 5년(636년)에 2동을 더 건립 다솔사라 개칭하고 문무왕 16년(676) 의상대사가 영봉사(靈鳳寺)라 부르다가 경문왕때 도선국사가 4동을 더 건립 다시 다솔사로 개칭했다. 연기조사 의상대사 도선국사가 모두 이름 난 차승들이다. 이때 차 씨앗을 심었는지는 알수 없으나 다솔사 뒤 봉이 운다는 봉명산(鳳鳴山) 주위에는 차나무가 즐비하다. 다솔사가 옛부터 차사(茶寺)로 이름을 굳힌 것은 효당 최범술(曉堂 崔凡述)스님 때 부터다.
1904년 다솔사 앞 마을에서 태어나 1979년 7월 9일 75세로 타계한 효당스님은 우리나라 차 문화에 끼친 영향은 실로 크다. 13세 때 다솔사에 머리를 깎고 해인사 환경(幻鏡)스님에게 수계했다. 16세때 일본으로 유학가 와세다 대학 불교학부를 나와 다솔사에 정착 하고부터 지난 77년 다솔사를 나올때까지 근 60년을 다솔사와 인연을 맺은 셈이다.
효당과 차와의 인연은 이 절에 머물러 차에 조예가 깊던 경북의 청송골 노인(당시66-67세)으로부터 어린나이에 차를 배웠고 그 후 일본에서 생활화 됐다고 보고 있다. 일제시대 때 한국인을 얕잡아 보던 일인 고관들이 다솔사를 자주 찾았던 것도 효당의 차에 대한 매력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효당을 아는 사람들은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모태는 바로 다솔사였다고 거침없이 말 하는데 한용운 김범부 김범린 변영만 수주변영노 변영태 응송박영희등 기라성 같은 독립 운동가들이 다솔사를 들락거렸다. 효당은 말년에 자신이 어렸을 때 나이 많은 스님으로부터 들은 구전(口傳)을 즐겨 얘기 했다.
다솔사 작설차의 풍미(風味)가 하동 화개차 보다도 나았고 구례 화엄사차 보다도 나았으며 심지어 그것을 실험까지 했다는 것이다. 똑같은 조건과 물에다가 쇠고기 조각을 각각의차에 넣어 달여 본 결과 화엄사차는 그 살점이 단단하고 화개차는 약간 부드러우며 다솔사차는 허물허물 물러 그 모양이 없어질 정도라는 것이다. 다솔사차의 우량함을 자랑함이다. 차의 질이 최고라는 점보다는 정약용의 음다흥국(飮茶興國) 을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 일 것이다. 스스로 다솔사의 상품차를 반야로(般若露)라 하고 다음 등급을 반야차(般若茶)라고 이름을 짓기도 했다.
『한국의 차문화』를 펴낸 김운학(82년 타계)박사는 “효당의 다통(茶統)을 일본식이라고 평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의 다통에 설사 그런 요소가 있다 하더라도 오늘 우리 차를 이만큼 인식 시키게 하는데 절대적인 공로가 있다.” 라 하고 “오늘날 우리차에 관심이 높아지고 국가에서 까지 전통차를 찾고 조사하게 된 것에 큰 힘을 준것도 효당 스님이었다.”라고 했다. 효당은 차의 전개자로 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 한 것만은 틀림없다
5.만우스님과 구례 화엄사(求禮 華嚴寺)
「화로에 香나무로 만든 숯을 넣고 불을 지핀다. 주전자를 올려놓고 불꽃이 올라 오는 것을 보면서 木香조각을 하나 둘 던져넣는다. 주위에 은은한 향이 풍기기 시작한다. 물이 끓으면서 물에 향내음까지 배게된다. 물이 다 끓었으면 화로에서 내려놓고 이 물로 화엄사 주위에서 딴 야생차를 우려낸다. 향내음 풍기는 찻잔을 부처님께 올린다.」
『화엄사 사적기』에 화엄사에 차가 처음 심어졌다고 적으면서 차계의 관심인 차의 시배지가 화엄사냐 쌍계사냐란 논란을 낳게 한 만우 정병헌 스님 (1890-1966)이 부처님께 차를 공양 하는 모습이다. 정병헌 스님이 남긴 일기장 메모집 저서등에서 스님이 얼마나 차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으며 차를 즐겼는지 알수있게한다.
스님이 쓴 화엄사적기(1930-1938 까지 화엄사 주지 시절에 펴낸 저서)에 “신라의 차는 연기조사가 화엄사(신라 진흥왕 5년 554년)를 창건하면서 인도에서 가져온 차종자를 절 뒤에있는 긴대나무밭(長竹田)에 심었다. 호남일대가 차향(茶鄕)인데 그 중에서도 제일 먼저 심은 곳은 화엄사”라 적고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선덕여왕(632-647)때 김대렴이 당에서 가져온 차씨를 심은 것이 최초라 했는데 정병헌스님 말대로라면 화엄사에 차씨를 심은 것이 약 100년 정도가 앞선다.
스님은 실제로 차에 많은 관심을 갖고 차생활을 했지만 겉으로는 전혀 차를 아는 것을 드러내지않았다. 그저 묵묵히 차를 즐긴 차인이었을 뿐이다. 아들인 정태준씨가 그의 유품을 정리하면서 발견한 정병헌스님의 다시(茶詩) 한구절을 보자.
「눈녹인 물로 차 끓이면 천상의 맛이요 계수나무 꽃으로 빚은 술은 달 가운데 향기롭다.」
정병헌스님에게는 차는 아주 일상적인 일이었지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의 부친 정사인(鄭士仁)은 동학에 가담했다가 지리산으로 숨을 때 아들 병헌을 데리고 가 화엄사에서 어린시절을 보내며 박보월 스님에게 사미계를 받고 총명하여 16세때 종무 행정 서기직을 맡아 보았다. 그후 불교계의 개혁을 시도했던 박한영 선생밑에서 공부를 한후 자신도 불교인들의 교육에 힘을 쏟기도 했다.
스님은 격식을 탈피한 자유스런 차생활을 했지만 예를 갖추어야 할 경우에는 예를 갖추었다. 스님의 글속에서 옛부터 전해오는 차구 10영(茶具十詠) 을 들고 있다. 10영이란 차를 심어 가꾸는 재배지, 차를 마시는 사람, 좋은차, 차를 마시는 집, 차를 만드는 부엌, 차를 만드는 기구, 차를 마시는 그릇, 차 끓이기등 차를 마시는데 갖추어야 할 조건 10 가지를 들고 있다. 이렇게 차를 아끼고 사랑한 사람들 덕분에 지금도 화엄사는 차사(茶寺)의 전통을 잇고 있다
6.허백련(許百鍊)과 춘설헌(春雪軒)
「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며 음다흥국을 외치다 간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이 광주 무등산에 일본인 오다끼 이찌조가 경영하다 버려둔 무등다원(無等茶園)을 정부로부터 불하받아 삼애다원(三愛茶園)이라 이름을 바꾸고 차 생산에 손을 댔다. 삼애란 하늘 땅 사람을 사랑한다는 뜻이다. 일본인 오자끼가 무등산 증심사 근처에 얼마든지 자생하고 있는 차를 보고 본격적인 다원을 경영한 것은 1911년이다. 오자끼 자신이 「자랑이 아니라 무등차(無等茶) 가 일본차에 결코 뒤지지않다」고 장담하면서 「조선의 차와 일본의 차가 잎의 생김새가 달라 조선차의 질이 떨어질 것 같이 생각하고 있지만 차는 조선이 본고장이라 할 수 있다.」 또 「일본차는 잎이 둥글고 조선차는 길쭉한데 일본도 길쭉한 차를 더 중시하기에 이르렀다.」하고 「차잎은 해마다 따는 것이어서 잎이 둥글어지고 마침내는 질이 나빠지기 때문에 잎이 긴쪽이 차 업자의 입장에서는 더 바람직 스럽다.」 는 의견을 밝힌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차를 산업화 했던 오자끼씨의 말을 깊이 음미해 볼만하다.(최계원씨의 우리차 재조명 발췌) 모처럼 의재는 차원을 일구어 차 이름을 春雪茶라 이름짓고 본격적으로 차를 보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후 미군과 함께 들어온 커피는 삽시간에 전국을 휩쓸어 버렸다. 순수한 우리차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차를 생산해서 내 놔도 팔리지도 않았고 오히려 적자를 메꾸려 그림을 팔아야 할 지경이었다. 허백련은 그림도 그리고 후학을 지도하는 일 외에 농업기술학교를 운영하고 차밭을 일구며 단군신앙에 광적으로 집착하고 있었다. 나라가 잘 살려면 농업이 부흥 되어야 한다고 하고 농촌 지도자들이 많이 양성 되어야 한다 고 믿어 농업기술학교를 만들었다. 물질의 타락 못지 않게 정신과 도덕의 타락을 통탄하고 땅에 떨어진 도의를 회복 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타락은 우리 민족이 조국 혼을 갖고있지 않기 때문이라 했다. 의재는 민족신앙이 조국혼이라 했고 민족신앙 그것은 바로 단군 시조신 사상의 부활이라고 했다.(문순태의 의재 허백련) 그래서 그는 1969년 노산 이은상을 추진위원장으로 하여 무등산 단군신전 건립위원회를 발족 시켰다. 동국여지승람권46 광산현에 보면 무등산에 단군신사가 있었다 는기록이 있다. 의재는 그 기록에 따라 그 자리에 천제단을 복원시켜 단군신전을 건립하기 위해 자금을 마련 하고자 개인전도 열고 1만여평의 땅도 기부 받았다. 기독교인들의 「단군신전 건립 결사반대」에 부딪히자 「종교는 한 나라안에 여럿이 있을수도 있지만 민족혼은 하나뿐이다. 민족혼은 종교가 아니며 민족의 정신을 되찾고 함양 하자는 것이다.」라며 설득했으나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허백련은 뜻을 굽히지 않고 돌로 제천단을 쌓고 해마다 개천절에 제사를 올렸다. 단군신전의 설계도까지 완성 기금을 늘리기 위해 화집(畵集)을 발간 하기도 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무등산 작설차를 곱돌솥에 달여내어 草衣의 茶法대로 한 잔 들어 맛을 보고 다시 한 잔 맛을 보고 茶道를 듣노라니 밤 깊은 줄 몰랐구나
<이은상의 전남 특산차 중에서>
의재와 차와의 인연은 그 뿌리가 깊다. 1891년 진도에서 태어난 의재는 조선조 후기의 차인(茶人) 초의 스님이나 추사 김정희 위당 신관호등의 총애를 받던 소치 허유(小癡 許維)의 아들 미산 허형(米山 許灐)으로부터 그림을 배웠다. 소치는 의재가 두 살때 세상을 떠나 직접 소치로부터 다도를 접할 기회가 없었으나 미산으로부터 그림과 함께 차의 맥을 이어받은 것이다. 지금은 미산의 아들 남농 허건(南農 許建)이 남화산수와 茶道를 이어받아 후학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7.잠곡 김육(潛谷 金堉)
초의의 「동다송(東茶頌)」이나 「다신전(茶神傳)」을 얘기하면 여느 차인들도 한 마디씩 하지만 김육의 「유원총보(類苑叢寶)」 는 좀 생소 할지도 모른다.
초의 스님의 「동다송」보다 200여 년이나 먼저 차 이야기를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를 처음 아는 사람들은 초의 스님의 「동다송」 이외는 차에 관한 옛 선조들의 저서가 거의 없는 줄 안다. 그리고는 「동다송」을 최고의 다서(茶書)로 꼽을 것이다. 초의 스님보다 20여년 앞서 살다간 서유구(1764-1845)가 펴낸 차에 관한 방대한 「기록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와 300여년전 인 한재 이목(寒齋 李穆1471-1498)의 「다부(茶賦)」등도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기록이다. 다만 이들 저서가 차인들의 눈에 뒤늦게 비쳐 충분한 연구가 부족한 데다 「東茶頌」의 그늘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유원총보」는 조선중엽에 나온 일종의 백과사전으로 60책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인데 그중 37책이 밥과 술 죽등 음식물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에 「차(茶)」편을 따로두어 여러 가지 茶에 얽힌 이야기를 적어 두었다. 차의 역사로부터 「다경(茶經)」을 저술한 중국 육우(育羽)의 이야기등 다양한 내용이 담겨있다. 「동다송」은 전체의 글자수가 2천 3백 30字인데 「유원총보」는 1천 7백 30여 字이다. 전체적인 구성은 「동다송」이 차의 전반에 관해 조리 정연하고 중국차보다 우리차에 대한 견해가 기술되어 있는 반면 「유원총보」는 육우의 「다경」을 근간으로 차얘기를 나열해 놓았다. 그러나 「동다송」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내용을 소상하게 전한 차 기록서로 평가되고 있다.
유원총보의 재미있는 茶 이야기 「유원총보」〈茶〉篇의 記述은 흥미롭다. 차나무에 대한 설명에 이어 차의 종류를 나열하고 있다. ‘이아(爾雅)에는 일찍따는 것을 茶라하고 늦게따는 것을 茗이라 하였다. 「다보(茶譜)」에 촉주(蜀州)에서는 雀舌 조취(鳥嘴) 또 맥과(麥顆)라 한다 하였다. 문헌에 있는 편갑(片甲:희소하다는뜻) 이란 것은 이른 봄의 황차(黃茶)이다. 선익(蟬翼)이란 것은 차잎을 연하고 얇게 매미 날개처럼 만든 것이다.’ 또〈 甘草癖〉編 에서는 차를 감초라 하고 그 감초벽에 걸린 사람으로는 육우를 들고 있다. 감초벽이란 하루라도 차를 마시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병이 들만큼 차를 좋아하는 사람을 일컷는 말이다.
〈消食茶〉編에서는 차 한사발을 끓여 쇠고기에 붇고 이튿날 아침에 그 고기를 보니 이미 물로 변해 있었다며 차의 효능을 설명하고 있다. 그 뿐만 아니라 차세(茶稅)에 관해서도 적고 있는데 과도한 차의 조세로 차나무를 뽑거나 불태우기도 했다고 적고 있다.
김육은 선조 38년(1605년)사마시를 거쳐 1624년(인조2년) 증광문과에 갑과로 급제 1636년(인조14년) 동지사로 청나라에 다녀 왔다. 1638년 충청도 관찰사 1643년(인조21년) 한승부 도승지가 되고 소현세자가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자 보양관으로 수행했다. 1649년(효종 즉위년) 우의정이 되고 사은겸 동지사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와서 1650년 대동법 실시 문제로 金集과 논쟁하고 퇴직했으나 영중추 부사로 전직되어 진향사로 또 청나라를 다녀왔다. 고령을 이유로 사직했다가 이듬해 실록청 총재관이 되어 「인조실록」의 편찬을 맡아 보았다. 다시 이해에 우의정, 1652년 좌의정, 1654년(효종5년) 영돈령 부사로 이듬해 영의정이 되었다. 경제정책에 탁월한 식견을 갖고있었다. 백성수탈의 방법이었던 공물법을 폐지하고 미포로 대납하는 대동법을 충청도에도 실시할 것을 주장했다가 실패했으나 1651년에는 충청도에 1657년에는 전라도 연안지방에 이를 실시케 했다. 수레의 제작 관개에 수차의이용 상평통보의 주조(1651년) 활자 제작등 그의 경제학은 실학의 원조인 유형원에게 큰 영향을 미쳐 실학의 선구적 역할을 하게했다. 「유원총보」「잠곡필담」「해동신명록」등 많은 저서와 편저가 있다.
8. 남원 실상사(南原 實相寺)
남원의 실상사는 차와는 별로 인연이 없는 것 같이 보이지만 조금 눈여겨 보면 남원은 남원대로 실상사는 실상사대로 1천년이 넘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상사는 신라 흥덕왕(興德王) 3년(서기828년) 증각국사 (證覺國師) 홍척(洪陟)이 흥덕왕의 도움으로 창건한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최초의 절이다.
흥덕왕 3년이면 당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온 김대렴이 당에서 가져온 차씨를 왕명에 의해 지리산에 심은 해다. 게다가 증각국사는 흥덕왕의 스승이었다. 실상사에는 또 증각국사의 대를 이은 수철화상(秀徹和尙)의 능가보월탑(능伽寶 月塔 보물33호)이 있고 이곳에는 「야명향(若茗香)」이란 금석문이 새겨져있다. 수철화상의 탑비명 말고도 가지산(迦智山) 보림사(寶林寺)를 창건한 보조선사 (普照禪師) 창성탑비(彰聖塔碑)의 「다락영(茶樂迎)」 등 신라 때의 금석문 중 차에 관한 기록이 구산(九山)에 많은 것은 선종(禪宗)이 그만큼 차를 귀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상사는 선종(禪宗)의 발상지이자 국력을 기울여 창건한 호국기도 도량으로 창건당시는 건물만 30여 동에 스님만도 500여 명이 상주했다고 한다. 조선 세조 때 불이나 전소된걸 숙종16년에 침허대사가 상소문을 올려 중창했다. 지리산 천왕봉을 정면으로 보고있는 실상사가 있는 곳은 해발 315m의 고원평야 지대로 주변의 산이 연꽃이 피어있는 형태인데 연꽃속에 절이 안치된 셈이다.
도선국사의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우리나라 땅의 정기가 지리산 천왕봉을 거쳐 일본으로 흘러들고 있어 이를 막기 위해 경내에 4천근이나 되는 약사여래불을 봉안했으며 3층 쌍석탑과 지금은 불에 타 주초만 남아있는 5층목탑을 세워 맥을 눌러 놓았다고 한다. 그래서 실상사가 흥하면 우리나라가 크게 발전하고 동시에 일본이 쇠하며 실상사가 쇠하면 일본이 크게 흥해서 일본으로부터 괴로움을 받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현재 보광전(寶光殿)에 있는 범종은 숙종 20년 에 주조된 것으로 종에 일본지도가 그려져 있어 동경쪽을 아침 저녁으로 쳐서 일본의 침략야욕을 저지하려는 호국의 염원을 지니고 있다.
남원은 우리나라 차역사에 있어 중요한 교훈을 주는 곳이다. 지금은 남원 근처에서 차를 보기 힘들지만 예전에는 이곳에서 차가 생산됐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지리지』나『동국여지승람』에는 나타나지 않지만 『신증 동국여지승람』이나 고산자(孤山子)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남원의 토산품으로 분명히 차가 들어있다.
9.승주 선암사(昇州 仙巖寺)
전남 승주군 쌍암면 죽학리 조계산(曹溪山) 남쪽기슭에 자리한 선암사는 조계산 너머 유명한 송광사(松廣寺)와는 등을 맞대고 있다.
선암사는 운암사(雲巖寺) 용암사(勇巖寺)와 더불어 호남三巖寺라 부른다. 백제 성왕 7년(서기529년)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창건하여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 했다. 그후 도선국사가 서기 742년에 다시 창건하여 조계산 선암사라 하였다고 전한다. 고려 선종 9년(서기 1092년)에 다시 대각국사가 삼창하였으며 임진왜란(서기 1597년) 때 모두 불탄 것을 다시 신축했다.
서기 1750년에도 불에 탄 것을 새로 신축했고 서기 1823년 또 불에 탔다. 현재 건물은 모두 32동이지만 전국 사찰 중에 터는 가장 크다고 한다. 선암사는 대처승(帶妻僧)인 태고종(太古宗)의 본산으로 30여 년이나 조계종과의 불편한 관계 때문에 개발이 늦어져 그만큼 원시림에 둘러 싸여있는 셈이다.
선암사의 자랑은 뭐니뭐니 해도 차와 꽂이다. 600년이 넘은 차나무, 300년생 철쭉, 300년생 영산홍, 고목동백, 왕벚꽃, 자목련 백목련, 설토, 구봉화, 부용, 수국 등 절 전체가 온통 꽃나무 일색이다. 특히 차잎이 움트는 봄에는 영산홍과 벚꽃이 필 무렵이면 꽃빛이 반사되어 사람 얼굴이 벌겋고 또 밤에는 등불이 필요없을 정도라고 자랑 할 정도다. 아치형의 화강암으로 만든 승선교(昇仙橋)를 지나 강선루(降仙樓) 뒤쪽의 선암사 입구 넓다란 언덕배기와 절 뒤편에는 모두가 차밭이다.
선암사에는 조왕단지를 모셔놓은 차부뚜막이 있다. 본당 뒤 응진당(應眞堂) 큰 부엌에 조왕( 王)을 모신 제단과 차부뚜막, 찻물을 받는 삼탕도 있다. 삼탕이란 부엌밖에 돌을 깎아 만든 물받이인데 상탕, 중탕, 하탕으로 흘러 받는데 석간수가 흘러와 제일 먼저 모이는 대형 돌그릇이 상탕 으로 이곳의 물로 이곳의 물은 찻물만으로 쓴다. 상탕에서 대나무를 연결해 흘러 모이는 곳이 중탕인데 이 물은 밥과 반찬 등 음식물을 만드는데 사용한다. 제일 아래있는 하탕은 허드렛물로 사용한다.
또 무우전(無憂殿)이라는 목조건물안에 차를 덖는 대형 쇠솥이 있는데 불을 지피는 바닥의 두께가 12∼13cm나 되고 솥의 주둥이와 테의 두께도 2∼3cm나 되는 전통적으로 선암사에서 차를 만들어 오던 쇠솥이다. 선암사에서 차를 만드는 사람은 이 절의 주지스님이었던 신씨가문의 후손들이다. 아무튼 선암사는 우리나라 차문화의 대표적이라 할 만한 곳이다
10.고창 선운사(高敞 禪雲寺)
5백40여 년 전인 서기1451년에 발간된 『세종실록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무장읍지(茂長邑誌:무장은 고창의 옛이름)』에 보면 하나같이 이곳의 특산물로 차를 들고 있다. 더욱이 고창에서 1처여 년 간을 면면히 전승 되어온 고수자기 (古水磁器)는 일본에서도 알아주는 도자기다. 차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그릇까지 이곳의 특산물로 되어있다면 고창이야 말로 우리나라 차의 본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선운사 입구에서부터 10여 리에 걸쳐 군락을 이루고 있는 차나무는 보살펴주는이 없어도 철마다 그 싱그런 싹을 틔운다. 선운사하면 미식가들은 절 입구 동네의 별미에 군침을 삼키리라. 절 앞을 흐르는 풍천(風川)에서 잡히는 장어구이 안주에 복분자(覆盆子)술로 거나하게 되면 그 유명한 작설차로 뒤를 깨끗이 씻는다. 선운사의 차나무는 동백나무 아래에서 자생한다. 선운사 동백이라면 천연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해 놓은 귀중한 것이다. 대웅전 뒤 다산(茶山) 기슭 5천여 평에 수천그루의 차나무가 자라고 있다. 선암사가 茶寺로 이름을 굳힌 것은 여기의 작설차도 작설차려니와 백파선사(白坡禪師)와 조선조 유명한 명필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와의 차에 얽힌 인연이 유명하다. 절입구 부도전에 추사가 백파스님의 비문을 짓고 써준 「화엄종주 백파대율사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 白坡大律師 大機代用之碑)」가 선암사 부도전에 서 있다. 추사와 백파는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추사가 제주도로 귀양을 갈 때 둘은 만나기로 전갈이 됐다. 백파가 먼저 나와 기다렸으나 추사가 일정이 늦어져 모처럼의 기회가 허사가 됐다. 서로 서신만 주고 받고 한 사이지만 추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둘의 사이를 플라토닉하게 보고 있다. 차철이 되면 백파의 손주 상좌인 동자승 설두(雪竇) 가 고창에서 한양까지 차심부름을 간다. 차를 지고 달랑달랑 걸어오는 설두의 생긴 모습이 꼭 바퀴가 굴러오는 것같았다고 추사는 쓰고 있다. 한양에서 선운 작설의 맛을 학수고대하고 있는 추사에게 설두는 동자승이지만 얼마나 반가운 진객이었을까. 그래서 호를 지어 주었는데 달랑달랑 차를 싣고오는 바퀴같다며 차륜(茶輪)으로 지어 주기도 했다. 차륜은 추사방에 걸린 달마상을 보고 꼭 백파스님 닮았다고 반가와하며 제 스님 갇다 주겠다고 하며 조르기도 한다. 다음해 차륜이 다시 백파의 차심부름으로 왔을 때 추사는 달마상과 똑같이 그려 주었는데 세상 사람들과 백파의 제자들은 달마화상을 영락없이 백파화상이라고 했다. 물론 추사가 백파를 만난일이 없으니 백파의 얼굴을 알리 없지만 추사가 달마를 묘사한 그림에다가 「백파상찬병서(白坡像贊竝序)」를 쓴다. ‘옛날부터 달마상을 받들고 있었는데 보는 사람마다 백파의 모습이라 하지 않는 이가 없으니 그 기연이 매우 기이하다. 왼쪽 신발로 서쪽으로 돌아갔으나 보신(報身)이 동쪽에 나타난 것인가.…(중략)…멀리서 보면 달마같고 가까이 보면 백파로다. 차별이 있는 것으로 둘이 아닌 경지로 들어갔구나. 흐르는 물은 오늘만 있으나 밝은 달은 전부터 있는걸세.’ 추사가 제주에서 귀양이 풀린지 4년후 백파선사는 85세로 입적하고 추사가 묘사한 백파상은 행적이 묘연 하다고 한다.
11.조선시대 차실의 원형-선교장 활래정
강원도 강릉 선교장(船橋莊)의 茶室인 활래정(活來亭)은 조선말 사대부의 차풍을 현 시점에서 살펴볼 수 있는 단 하나의 유적이다. 여기는 특히 물을 끓이고 차를 우리는 부속 차실이 있다는 건축양식과 8대를 전해 내려온 손때 묻은 야외용 차통 등 귀중한 茶具 97점도 볼 수 있다는데... 활래정의 나이 180년, 전국에 이만한 茶亭은 통털어도 하나 밖에 없는 소중한 유적이다.
가지마다 밝은 꽃과 빽빽한 대나무 들어 있는데 주인은 작은 연못 속의 정자에 있네 그름이 걷히니 푸르름이 산봉우리에서 그림처럼 드러나고 비가 내린 후 붉은 꽃은 젖어서인지 온갖 풀이 향기롭구나 느지막히 휘장치고 동자불러 차 한잔 얻으니 개인 난간에는 퉁소부는 객이 있어 차향속에 잠겨있네 그 중에서 신선의 풍류 얻을 수 있으니 아홉번이나 티끌 세상이 헛되이 긴 줄 알겠구나
활래정 지붕 안팎으로 걸려있는 빽빽한 현판 중 1850년께 판각된 오천 정희용(烏川 鄭熙鎔)의 칠언시다.
茶室로 쓰기 위해 오은거사 이후(鰲隱居士 李후:1773~1832)가 활래정을 지은 것이 순조16년인 1816년, 46세 때였다. 이 시기는 바로 근세의 대표적인 茶人 해거도인 홍현주,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초의 스님등이 차 한잔으로 청교를 맺던 조선조말 차문화의 전성시대였다. 당시만 해도 한양에서는 멀기만 한 험준한 대관령을 넘어 이곳 활래정을 추사가 다녀갔고 편액과 병풍, 추사가 남긴 차시등을 봐서 활래정 주인 오은과의 관계를 짐작케 한다.
추사뿐 아니라 순조 때 영상이었던 운석 조인영(雲石 趙寅永), 근대에 와서는 소남 이희수(少南 李喜秀), 무정 조만조, 규원 정병조, 성당 김돈희, 해강 김규진, 일주 김진우, 백련 지운영, 농천 이병희, 성재 김태석, 옥소 심형섭, 차강 박기정, 등과 신학문에 뛰어났던 성재 이시영, 몽양 여운형 등 수많은 거물급들이 이곳을 들러 詩畵를 남기고 갔다. 그야말로 신선의 풍류가 휘감아 도는 정자라 할 만하다.
선교장의 사계(四季)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단다. 강릉을 가리켜 사계의 고을이라 한다면 선교장은 사계의 장원이다. 활래정의 앞 논에 해빙의 물이 출렁이고 그 물 위로 봄바람이 파문을 일으키며 이곳의 봄은 시작된다. 연못에서 연잎이 솟고 烏竹荀이 얼굴을 내밀며 아지랭이가 춤추는 앞 냇가 버들가지와 더불어 이곳의 봄은 생동하는 아름다움으로 출렁인다. 여름은 뒤 솔밭에서 온다. 짙은 녹음을 이루는 노송, 고목 속에 온갖 새들의노래소리, 매미, 쓰르라미 소리로 한여름이 짙어간다. 이때 제철을 만나는 활래정의 연꽃은 아름다운 꽃봉오리를 뽑아 올리고 자태를 뽐낸다.
이런 사시사철의 아름다움으로 또 역대 주인들의 후덕함으로 선교장은 수많은 시인 묵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12.한송정(寒松亭)
강릉시 강동면 하시동에 자리한 한송정(寒松亭)은 동해가 한눈에 보이는 바닷가 언덕에 있다. 화랑의 차문화 유적으로 유명한 한송정에는 신라 때 부터 내려오는 우물과 차를 끓이는 돌부뚜막이 있어 중국과 일본의 차인들까지 한번쯤 찾아오고 싶어하는 곳이다.
경포대와 한송정은 신라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지어진 것으로 보이나 정확한 축조 연대는 알 수 없다 한다. 다만 사선(四仙) 즉 영랑, 술랑, 남석행, 안상 등 네 국선의 전성기인 진흥왕(眞興王.540~575) 전후로 추정하고 있다.
고려의 학자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그의 파한집에서
한송정
까마득한 옛적에 사선 노닌 곳 푸르른 소나무 우뚝 서 있네 차샘 속 달만이 그때 그 시절 어렴풋 하나마 생각케 하네
라고 노래해 한송정이 옛적에 사선이 놀던 곳으로 그를 따르던 무리 3천명이 심은 소나무가 지금도 창창하여 마치 구름같다고 했다. 지금 울울 창창한 소나무의 조상이 바로 옛 사선들인가?
이곡(李穀.1298~1351)이 쓴 동유기(東遊記)에는
...한송정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다. 이곳 또한 사선이 놀던 곳이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한송정에 유람오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 이를 귀찮게 여긴 나머지 집을 헐어 버렸다. 소나무 또한 들불로 타버리고 오직 석조, 석지와 두 개의 돌우물만이 그 옆에 남아있었는데 역시 사선의 다구(茶具)라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이제현(李齊賢.1287~1367)은 훗날 석지조의 이름만 듣고 두 돌덩이를 보지 못한 후세인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글을 쓴다고 덧붙힌 <묘련사 석지조기>에서
...그 길로 한송정을 구경하였는데 그 위에 석지조가 있었다. 그 고장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대개 옛사람들이 차를 달여 마시던 것인데 어느 시대에 만든 것인지는 모른다고 하였다. 돌덩이는 두 군데가 오목한데 둥근데는 불을 두는 곳이고 타원형은 그릇을 씻는 곳이다. 또 조금 크게 구멍을 내어 둥근데와 통하였으니 이는 바람이 들어오게 한 것인데 합하여 이름하기를 석지조라 하였다. 이에 인부 10명을 동원하여 처마 아래에 굴려다 놓고 손님들을 청하여 그 자리에 앉힌 다음 백설처럼 시원한 샘물을 길어다가 황금빛 움차를 달였다...
고 했다.
이 돌화덕과 돌못은 어느 나라에도 유래가 없는 독특한 우리만의 차 도구이다. 비슷한 것으로 중국의 육우가 <다경>을 저술한 해인 758년에 구리나 쇠를 부어 주조한 풍로라는 다구가 있으나 석지조 보다 200년 가량 뒤떨어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처럼 한송정은 아름다운 경치와 화랑들이 사용하던 돌화덕과 돌못이 남아있는 민족문화유산의 유서깊은 차 유적지이다
13.죽서루(竹西樓)
강원도 삼척 죽서루에 올라 차 한잔을 마셔보면 신선이 따로 없다는데... 눈앞에 펼쳐진 오십천(五十川) 푸른 물줄기는 나무가지에 설화(雪花)가 피는 겨울에도 신록이 눈부신 봄에도 죽서루에 오르면 차 한잔 생각이 절로 난다는데...
고려말 조선초까지만 해도 죽서루는 차 향기 그윽한 천하의 절경이었다. 동안거사 이승휴(動安居士 李承休), 제정 이달충(霽亭 李達衷), 가정 이곡(稼亭 李穀), 율곡 이이(栗谷 李珥), 송강 정철(松江 鄭澈), 미수 허목(眉수 許穆) 등 당대의 내노라 하는 차인들이 소매를 걷고 한숨에 써 붙인 서액도 즐비하다.
송강은 죽서루를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진주관(進珠館) 죽서루 오십천(五十川) 내린 물이 태백산 그림자를 동해로 담아가니 차라리 한강의 목멱(木覓:남산)에 닿고싶네.
죽서루는 툭 트인 바다를 내려다보는 다른 정자들과는 달리 오히려 바다를 등지고 두타산에서 굽이쳐 내려오는 오십천을 굽어보는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다. 높고 낮은 자연 암반 위에 17개의 각각 길이가 다른 기둥을 세웠다. 그 윗층에 20개의 기둥을 세운 독특한 양식이다.
죽서루는 언제 누구에 의해 세워졌는지는 모른다. 두타산에 은거하였던 이승휴의 문집에 죽서루 제영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고려 원종(1266년) 이전에 지어진 것일거라 추정만 할 뿐이다. <동국여지승람>에도 "죽서루는 객관 서쪽에 있다. 절벽이 천길이고 기이한 바위가 총총 섰다. 그 위에 날듯한 누각을 지었는데 아래로 오십천에 임하였고 냇물이 휘돌아서 못을 이루었다. 물이 맑아서 햇빛이 밑바닥가지 통하여 헤엄치는 물고기도 낱낱이 헤아릴 수 있어서 영동의 절경"이라고만 적혀있을 뿐 언제 세워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지금은 대숲이 별로 보이지 않지만 죽서루는 말 그대로 대숲의 서쪽에 있는 누각이었다. 이 대숲 바오 이웃, 서북쪽에 언제나 차 연기 풀풀 날리던 죽장사가 또 있다. 고려 충숙왕 때 경기체가인 관동별곡(關東別曲)으로 유명한 茶人 근재 안축(謹齋 安軸.1287~1348)이 대숲에 가리워진 죽장사의 모습을 한수 시에 이렇게 그렸다.
웅덩이에 솟은 누각 수부(水府)에 임하였고 담을 격한 선당 바위를 기댔네 스님을 좋아하는 참 뜻 아는 이 없고 10리에 뻗친 차 끓이는 연기 대숲에 이는 바람에 나부낀다...
대나무가 여러 해 되니 아람되었는데 손수 심던 스님은 지금은 아니로세 선탑(禪榻)과 다헌(茶軒)은 깊숙해 보이지 않고 숲을 뚫는 새만이 돌아 갈 줄 아는구나.
또 강원 관찰사였던 용재 성현(傭齋 成俔.1439~1504)도 순시 도중에 이곳에 들러 죽서8경의 연작시를 남겼다.
푸른 소나무 울창하게 봉우리를 감싸고 집을 사이하여 서로 부르니 스님이 돌아 나오는구나 차솥을 마주하여 종일토록 이냐기 나누니 문득 몸에 청정한 기운 느끼겠네.
수 많은 풍류객들이 죽서루에서 서성이다가 차향기를 쫒아 혹은 은은한 범종소리에 이끌려 대숲을 헤치며 올라왔을 오솔길만이 세월의 무상함을 지키고 있다
14.회암사 야회차석(檜巖寺 野外茶席)
경기도 양주군 천보산 기슭 화암사지는 90년대 들어서면서 새로운 차문화 유적지로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가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준 후 한때 머문 제 2의 궁궐로도 유명하지만 麗말 鮮초의 차문화 유적지로 손꼽히는 곳이다.
27만평의 대지에 건평 9만평, 2백62간의 크고 작은 건물이 즐비했던 웅장했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지금도 남아있는 대단한 규모의 석축과 당간지주, 거대한 돌맷돌, 수조 등을 볼 때 한눈에 웅장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손님에게 차를 올리던 동쪽과 서쪽에 객실을 둔 향적전, 마당에서 차를 끓였던 돌찻상 찻물로 썼던 돌우물터와 목욕시설 등 격조있는 차를 즐긴 곳으로 지표조사 결과 밝혀졌다. 여기가 지공선사, 나옹화상, 무학대사, 함허 득통, 허응 보우같은 거물급 차인들이 머물었던 곳이다.
특히 이곳에서 발굴된 돌찻상은 우리나라에서는 몇 안되는 야외차구(野外茶具)로 귀중한 차문화 유산으로 아낌을 받게 될 것이다. 가로 135cm, 세로 125cm, 높이 50cm크기의 이 석조물은 차를 끓이는 차관 받침대로 추넝되고 있지만 4~8명이 둘러앉아 편안하게 차를 마실 수 있는 야외 차상(茶床)으로도 훌륭한 것이다.
우리나라 차문화사에 나타난 야외용 차구는 신라 경덕왕 때 충담(忠談) 스님이 삼화령 미륵세존에게 차를 올리기 위해 매고 다니던 벗나무로 만든 차통(櫻筒)과 신라 화랑들이 쓰던 강릉 한송정에 있던 차부뚜막 등이 기록에 전할 뿐 현존하는 야외용 차구는 여기 밖에 없어 차문화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있다.
회암사는 조선왕조가 건국되면서 태조의 왕사였던 무학 대사가 바로 나옹 스님의 제자였으므로 그대로 태조의 원찰이 되어 더욱 번창한다. 무학대사는 이곳에서 1킬로미터 북쪽에 부도를 지키는 부도전인 회암사를 짓고 조사(祖師)인 지공 화상과 그 스승인 나옹스님의 부도를 이곳에 세운다
15.자재암 원효샘
동양 삼국 불교계의 거인인 원효(元曉) 스님은 차의 달인으로서도 차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스님은 전국 곳곳에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절을 세웠다. 원효 스님이 자리를 잡은 곳이라면 필연적으로 명수가 나오는 자리이며 찻물로는 으뜸인 석간수가 솟아 오르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경기도 동두천시 상봉암동 1번지 소요산 자재암의 원효샘. 1천3백년 전 원효가이 물로 차를 달여 마시며 수행하던 곳이다. 찻물로는 전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수로 이름 나 있는 곳이다.
이곳은 신라 고려 때는 물론 조선 중기까지도 시인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 말부터 차문화가 쇠퇴하기 시작한 탓인지 내노라 하는 차인들이 다녀간 기록을 찾을 수 없다.
조선조 숙종 때 학자이자 명필인 미수 허목(眉수 許穆.1595~1682)이 이곳을 다녀갔다. 허목의 문집인 <미수기언(眉수記言)> 소요산기(逍遙山記)는 "폭포 옆 높이 10여인(刃: 1刃은 8척으로약 2.4m)이나 되는 벽에 비스듬히 걸려있는 나무 사다리를 올라가면 원효대이고 원효대를 지나면 소요사가 있다."고 했다.
원효대에서 탄탄한 계단길을 얼마 오르지 않아 자재암이 나온다. 자재암의 동쪽 모퉁이의 암벽사이 돌구멍에서 샘물이 졸졸 흐르는데 이것이 원효정이다. 지금은 이 자재암 석굴속에 나한전이 차려져 있고 원효샘은 가운데 불상 뒤쪽의 바위틈에 있다. 엤날의 허미수가 본 원효샘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고려시대 시인인 백운 이규보가 이 물맛을 "젖같이 맛있는 차가운 물"이라 했다.
자재암은 원효 스님에 의해 창건된 후 고려 광종 25년 각규대사(覺圭大師)가 확장 신축했다. 고려 의종 7년에 불탄 것을 이듬해 각령(覺玲)대사가 중건했다. 그후로도 몇번 전란과 화재를 겪고 절 이름도 바뀌었다가 광무 11년(1907년)에 또 불이 난 것을 순종3년(1909)에 재차 복원하여 원이름대로 자재암이라 고쳤다. 6.25 때 불탄 것을 1961년 다시 재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요석 공주가 아들 설총을 안고 원효를 찾아 왔으나 만나주지 않아 원효를 만날 때 까지 절 밑에서 살았다는 별궁터, 원효가 바위위에 앉아 수도했다는 원효대와 백운암, 임란 때 김씨와 송씨가 난을 피했다는 금송굴, 태조 이성계의 행궁터, 의상대, 소요사터 등 서울 근교에서는 손꼽히는 차문화 유적지이다.
16.봉선사 다향실(奉先寺 茶香室)
경기도 남양주군 광릉 수목원에 있는 봉선사(奉先寺) 들머리, 오른쪽 비석골에 검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이십 몇년 째 서있다. 춘원 이광수(春園 李光洙.1892~?)는 해방이 되던 1945년부터 50년 북한 인민군에게 끌려가기까지 봉선사 *다경향실*에 은거하면서 작품활동을 계속했다. 지금까지도 친일 논쟁의 표적이 되고있는 그이지만 한국 현대문학의 틀을 다듬은 대문호로서의 발자취를 기리기 위해 후인들이 1975년에 비를 세웠다.
요즘 경향각지의 전통찻집은 다로경권(茶爐經卷)이니 다경향실(茶經香室)이니 또는 다향실(茶香室)이나 죽로지실(竹露之室) 등의 현판을 즐겨 달고있다. 찻물을 끓이는 화로(茶爐)와 경전이 있는, 차와 더불어 향까지 함께하는 곳이라는 격조 높은 이름이다.옛부터 노스님이나 주지 스님이 머문 요사채에 흔히 쓰였던 당호(堂號)이지만 봉선사의 *다로경권*이나 *다경향실*은 춘원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화로에 불 불어라 차 그릇도 닦았으라 바위샘 길어다가 차 달일 물 끓일 때다 산중에 외로 있으니 차맛인가 하노라
내 여기 숨은 줄을 알릴 곳도 없건마는 듣고 찾아오는 벗님네들 황송해라 구태여 숨으럄 아니라 이러거러 왔노라
찬바람 불어오니 서리인들 머다하리 풀잎에 우는 벌레 기 더욱 무상커다 저절로 되는 일이니 슲어 무삼 하리오
1946년 9월 18일자 춘원의 *산중일기*에 나오는 시조 한 대목이다.
그는 1919년 3.1 독립선언의 도화선이었던 2.8 독립선언을 주도했고 중국 상해 임시정부를 돕는 등 항일운동을 하다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창씨개명 때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이름을 고치고 일제에 협력한 전력 때문에 해방 후 친일파로 지탄받게 되자 서울근교의 외딴 산사인 봉선사로 숨어들어 다경향실에 머물렀다.
이때 봉성사에는 항일 운동을 하다가 왜경에 쫒겨 입산 출가한 운허(耘許.1892~1980) 스님이 당대의 교학을 펴고 있었다. 운허 스님은 춘원의 8촌 동생이기도 했다. 그런 인연 때문인지 운허 스님은 춘원을 따뜻이 감싸 주었다.
춘원은 이곳에서 틈틈이 큰 법당 뒤쪽 언덕 너머에 있는 옹달샘물을 길어다 차 끓여 마시기를 즐겨했다. 역사의 큰 흐름을 읽지못해 일제에 협력한 자신의 어두움과 나약함을 한탄하며 한 잔의 차로 위안을 삼았던 것일까? 9월 20일자 *산중일기*는 그의 심경을 그대로 담았다.
화로에 물을 끓여 미지근히 식힌 뒤에 한 집음 차를 넣어 김 안나게 봉해 놓고 가만히 마음 모아 2분 3분 지나거든 찻종에 따라내니 호박이 엉키인 듯 한 방울 입에 물어 혀 위에 굴러보니 달고 향기로움 있는 듯도 없는 듯도 두입 세입 넘길수록 마음은 더욱 맑아 미미한 맑은 기운 삼계에 두루 차니 화택 번뇌를 한동안 떠날러라 차 물고 오직 마음 없었으라 맛 알리라 하노라
봉선사는 춘원이 찻물로 썼던 바로 그 옹달샘 때문에 세워진 절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독한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는 전국에서 이름난 물을 찾아다니며 병을 고치려 했다. 그러던 그가 세상을 떠나자 정희왕후와 아들 예종은 물 좋기로 이름난 이곳에 능을 만들고 능을 수호하는 원찰(願刹)로 이 봉선사를 세웠다.
춘원이 5년여 은둔했던 *다경향실*은 1.4후퇴 때 폭격으로 폭삭 무너져 내려 한동안 흔적도 없었던 것을 76년에 다시 세워 *다향실*이란 현판을 달고 운경(雲鏡) 노스님이 거처했다. *다향실* 앞 꽃밭에는 6.25 이후 폐허가 된 이 자리가 *다경향실*이었던 자리라는 것을 알리는 80센티 높이의 돌에 *다경향실터*라는 글시를 음각해 놓은 지석이 기념으로 세워져 있다
17.오대산 신성굴(五臺山 神聖窟)
오대산 다섯 봉우리는 봉우리 마다 천년 차향이 깃들어 있다. 자장율사가 부처의 진신 사리를 가져와 모셨다는 중대(中臺)의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옛부터 해동 최고의 물로 손꼽혔다. 적멸보궁 아래서 지금도 솟아나는 용안수(龍眼水), 그리고 서대(西臺)의 우통수(于筒水) 등 오대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수천리를 가도 다른 물과 어울리지 않는 우중수(牛重水)로 지금도 으뜸을 자랑한다.
우통수와 용안수는 지금도 찾을 수 있지만 문제는 1천3백여년 전 신라의 보천(寶川), 효명(孝明) 두 태자가 오대산 골짜기의 물로 아침마다 다섯 봉우리의 5만 진신보살에게 차공양을 올렸다는 그 찻물, 또 보천태자가 50년 동안 차공양 후 득도했다는 신성굴 등 <삼국유사>가 가리키고 있는 차의 성지를 찾는다는 것은 오늘에 사는 차인들이 해결할 문제이다.
서산의 높은 봉우리 외롭게도 끊겼는데 우통(于筒)의 물은 기운이 맑고 차네 상인은 병가지고 손수 차를 달이고 서방의 극락세계 부처님께 예배하네
우통의 정화수는 깨끗함이 옥같은데 상서로운 향화(香花)는 바퀴같이 큼이라 희미한 여러 봉이 구름 속에 보이니 천녀가 옷깃 여미고 청신(淸晨)에게 공양하듯...
생육신이었던 매월당 김시습은 우통수를 이렇게 노래했다.
또, 홍길동전을 남긴 허균(許筠.1569~1618)은,
...물러나고자 할 때마다 임금님의 은혜로 해마다 머물렀는데 뉘라서 알았으리 늙어서 이렇듯 귀양을 살 줄을 헐뜯고 비웃는 것은 모두 원수진 사람들이 만든 것 마음따라 찾아 온 손님 몇은 우리 무리를 불쌍하게 본다네 봄 온 뒤 숲에 꽃이 피지만 눈은 병들어 술은 남았는데 산새는 그윽한 잠을 깨우고 차그릇에 차를 끓여서 목마름을 덜 하나니 어찌하면 천하 제일의 우통수를 얻을 수 있으리
라고 노래한 뒤 *우통수는 오대산 상원사 옆, 한강 상류에 있는 동국 제일의 샘* 이라고 註를 달아 놓았다.
많은 사람들은 <삼국유사>를 들먹이며 보천태자가 서대에서 우통수 물로 차를 올린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차 연구가인 茶丁 김규현(金圭鉉)씨는 고개를 흔든다. <삼국 유사>에는 서대와 수정사(水精寺)가 나오고 우동수(于洞水) 동중수(洞中水)우동영수(于洞靈水)는 나오지만 서대에 두 태자가 거처하며 이곳의 샘물로 차를 공양했다는 내용은 없다고 지적했다.
김씨는 "우통수라는 기록은 고려말 조선초 목은 이색이 지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양촌 권근(陽村 權近.1352~1409))이 지었다는 <서대수정암중창기(西臺水精庵重創記)>에 처음으로 보인다. 이때부터 서대의 샘물을 우통수로 불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있다.
또 오대산 서대밑의 샘물인 우통수는 한강의 시원(始原)이라고 <동국여지승람>에도 밝히고 있다. 조선 단종 2년에 간행된 <세종실록지리지>에도 "한강의 시원은 오대산 서대사에 위치한 우통수이며 한수(漢水)의 명칭도 우통수에서 비롯되었고 춘추로 관에서 제사를 올리었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우통수는 한강의 시원지로 또 특이한 물로, 도를 통하는 물로 모든 사람의 머리에 각인 되어 버렸다.
18.성주사(聖住寺)
달마(達磨.?~528)로부터 시작된 중국의 선불교는 8대 조사인 마조 도일(馬祖道一.707~786) 9대 조사 마곡 보철(麻谷 寶徹.? ~ ?)에 이어 10대는 신라의 무염국사(無染國師.801~888)로 그 맥이 이어진다. 무염은 중국의 선맥 뿐 아니라 차와 선이 둘이 아니라는 茶禪不二의 차풍도 이어와 이 땅에 뿌리내리게 하였다.
서기 845년 중국에서 선종의 법맥을 받아 귀국한 무염은 지금의 충남 보령 만수산 북쪽 기슭에 신라 구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산선문을 연다. 지금 성주사터에 남아있는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비(朗慧和尙碑)*나 동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는 김립지(金立之;무염국사와 동시대 신라의 학자)가 쓴 <성주사사적기>에는 차인들이 목마르게 찾고 있는 茶字가 나온다.
차는 향과 더불어 스님에게 올리는 최고의 예물이었다. 무염의 일생이 기록된 낭혜화상탑비에는 차와 향을 뜻하는 *명발*이라는 글자가 나온다. 당시 문성왕은 아직 임금이 되기 전이었던 헌안왕과 동생 김양을 중국에서 갓 귀국한 무염에게 보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차와 향을 올리도록 했다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성주사사적기>에는 성주사 낙성법회가 성대히 열릴 때 차와 향을 두 손으로 높이 받들어 올렸다는 *다향수(茶香手)*라는 글자가 또렷하다.
강남의 풍치는 승가에 있는데 바위위에서 마시는 죽리차(竹裡茶), 그 청향을 듣는다 탈속한 스님이면 이 운치를 더 깊이 아련마는 차 마시고 향에 젖을수록 옷깃에 차향만 가득하네
중국 고승전에 나오는 무염의 스승인 마곡 보철의 시다. 이 시에 나오는 탈속한 스님, 즉 무염명승(無染名僧)이라는 귀절은 세상을 초탈한 속세를 버린 탈속한 스님으로 도가 높은 고승을 지칭한 것이나 일각에서는 마곡이 제자인 무염을 염두에 두고 이런 표현을 남겼다는 해석도 있다.
마곡은 누구인가? 단순한 마실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차를 선(禪)에다 접목시켜 선의 화두(話頭)로 끌어 들인 8대 조사 마조 도일(馬祖道一)의 제자이다.
마조의 문하에는 걸출한 차의 달인들이 많이 배출됐다. 불전이나 사원의 각종 의식에 차를 올리게 하면서 사원 차례의 바탕이 된 <백장청규(百丈淸規)>를 남긴 백장 회해(百丈懷海.749~814), 또 *차나 한잔 하고 가게*라는 공안(公案)의 주인공인 조주(趙州.778~ 897) 등 무염은 당대의 걸출한 선배조사들의 차풍을 고스란히 신라로 가져와 그 뿌리를 내렸던 것이다. 중국의 당나라 서울 낙양(洛陽) 불광사에서 마조의 법손인 여만(如滿)이 무염을 처음보고 "내가 사람을 많이 보았지만 이 신라인과 같은 이는 드물다. 뒷날 중국이 선을 찾는다면 장차 동이(東夷)에게 묻게 될 것"이라고 했다.
성주사 대가람은 임진왜란 때 불탄 후 폐허로 남아있다. 국보로 지정된 낭혜화상탑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과 석탑3기, 돌미륵상은 을씨년스럽다. 입적하기 전 무염 국사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법문을 남겼다.
"마음이 비록 몸의 주인이지만 몸이 마음의 사표가 되어야 한다. ...저 사람이 마신 물로 내 목마름을 해소할 수 없고 저 사람이 먹은 밥으로 내 굶주림을 구하지 못한다. 어찌 스스로 마시고 먹지 아니 하느냐."
19.남해 보리암(南海 菩堤庵)
巖茶라는게 있다. 말 그대로 큰 바위 차다.깎아지른 절벽위에 자라는 이 차나무는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그 잎을 딸 수가 없어 잘 훈련된 원숭이를 시켜 차를 따게 하는데 중국의 무이암차(武夷巖茶)가 그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암차가 있는가?...있다. 바로 남해 보리암에 있다.
우리나라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진 이 암차가 바로 남해 금산(錦山) 보리암에 있었다. 깎아지른 절벽 바위틈에서 눈 아래 툭 트인 남해바다를 내려다 보고있는 보리암 절벽차. 한두그루가 절벽에 달랑달랑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군락을 이루고 있는 반가운 암차.
이 암차나무의 역사는 아무도 모른다. 어떤이는 김수로왕의 왕비인 허황후가 인도에서 김해로 갈 때 이 남해 금산에서 잠시 정박했었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이때 가지고 온 차씨를 이곳에 심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신라 때 원효 스님이 보리암을 세울 때부터 있었다는 구전이 아직도 내려 온다는 소리도 있다. 남해 금산이 해발 6백 81m이고 이 차나무가 자생하는 곳이 해발 6백 30m에 위치하고있다. 금산은 가파르기로 유명한 산이다. 정상 부근의 깎아지른 절벽위에 지은 듯한 보리암은 마치 제비집처럼 현기증이 나는 곳이다.
보리암 주지의 말을 들어 보면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를 데리고 온 장유화상도 지리산 칠불암에 가기 전까지 여기서 공부하며 이 차를 마셨다고 하데요. 원효 스님도 이 차를 마셨고 태조 이성계가 이 위에서 기도를 하면서도, 또 사명대사도 여기서 공부하며 이 차로 모두 득도를 했다고 하지요."라 하고 "기록이 없으니 믿을 수 없다고 하면 그만이지만 뭐, 직접 현장에 가서 뿌리를 보면 수백년이 넘은 것임은 초심자라도 쉽게 알 수 있지요."
김수로왕의 왕비 허황옥(許黃玉)이 인도에서 가져온 부처님의 사리를 모시기 위해 원효대사가 보리암을 창건할 때 세웠다는 삼층석탑이 아래로 보이는 보리암 요사채에서 왼쪽으로 가파르게 내려가면 절벽사이에서 흘러 나오는 물을 막아 만든 샘이 나온다. 그 주위는 울창한 대나무 숲이 에워싸고 있는데대낮이라도 초저녁 어둠이 깔린듯 하다.
서쪽 대나무숲 사이로보리암 가는 길이 있고 동쪽으로 북쪽으로 가로막힌 절벽의 갈라진 틈새에도 차나무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다. 차나무 뿌리는 굵기가 어른의 팔둑만큼이나 굵다. 절벽의 이 암차를 따기는 쉽지 않으리라. 이 차의 향은 무겁고 그윽한 것이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한다. 그곳 스님들 말로는 딸 때의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손이 떨려 주전자에 차잎을 넣을 수 없을 지경이란다. 남해 보리암 암차...그야말로 영산(靈山)인 금산 절벽사이에서 흐르는 석간수에 우려낸, 생각만 해도 목구멍이 화~ 해져 오는 보리암 암차 아닌가.
20.수류화개(水流花開) 화개골(花開洞)
지리산 자락이 남으로 뻗어내려 그 위용을 자랑하며 무릉도원을 이룬 곳이 바로 화개동천...예로부터 숱한 시인 묵객의 발길을 잡아 끌었고 지금도 어김없이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사로잡는 화개골. 화개에서 쌍계사까지의 10리 길은 화개천을 따라 벚꽃이 피면 그야말로 인산 인해를 이루고 산기슭의 야생차가 새순을 뽑아 올려 차향을 풍기면 화개천을 따라 섬진강까지 흘러드는 그 차향때문에 이번에는 전국의 차인들이 구름처럼 모여드는곳....화개골.
<삼국사기> 흥덕왕 3년(서기 828년)에 보면 ***겨울 12월 사신을 당나라에 들여 보내어 조공하니 당나라의 문종이 인덕전에 불러 만나보고 잔치를 베풀었는데 층하가 있었다.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사신 김대렴(金大廉)이 차씨를 가져오니 왕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이미 선덕왕(서기 632~646) 때 부터 있었으나 이때에 이르러 성행 되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인 대렴의 차를 지리산에 심었다는 구절을 두고 쌍계사쪽과 화엄사쪽은 서로가 고증을 대며 그 심은 장소가 자기네 쪽이라 주장하고 있다.
쌍계사 경내에 들어서면 국보 47호인 *진감국사(眞鑑國師)의 비석이 차인들에게는 귀중한 보물이다. 신라말 석학 고운(孤雲 최치원.857~ ?)이 교지를 받들어 지은 *진감국사대공탑비*에 "중국의 차를 공양하는 이가 있으면 섶나무로 돌솥에 불 때어 가루를 만들지 않고 차를 달여 말하기를, 나는 이 맛이 어떠한가를 가리지 않고 다만 배만 적실 뿐이라고 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다 이러한 등류다" 고 기록되어 있다 격식을 탈피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차생활을 한 진감국사의 차에 관한 이 몇줄의 비문 때문에 차인들에게는 쌍계사가 바로 차의 명소로 아낌을 받고 있다.
<다도학>의 저자 김명배 교수는 차소(茶所:차를 만들어 지정한 곳에 바치는곳)는 경남에서는 화개와 언양 등 2개소, 전라도에는 18개소나 있었는데 다만 화개는 화개부곡(花開部曲)이었으므로 신라시대부터 차소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 조선조 말 다성(茶聖)으로 추앙받고 있는 초의 스님의 <동다송>에도 화개는 전국 최대규모의 차밭으로 나타난다. *지리산 화개동에는 차나무가 40~50리나 잇따라 자라고 있는데 우리나라 차밭의 넓이로는 이보다 지나친 것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쓰고 있다.
우리나라 차나무의 유래에 관해서는 두가지 외래설이 있다. 하나는 <삼국유사>에 가락국 시조 김수로왕비 허황옥이 인도에서 차씨를 가져와 김해 백월산에 심고 죽로차라 했다는 설이고 다른 하나는 신라 때 당나라에 갔던 김대렴이 가져와서 지리산에 심었다는 설이다.
화개의 석한 하상연(河相演)선생(2000년.5월 작고)은 이같은 외래설은 과학적 근거에 의한 정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천 9백 50년 전 인도 차종자나 1천 2백년 전 중국의 차종자는 말하자면 수입품종으로 재배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뿐 우리나라 남부에는 원시 때부터 자생하는 차나무가 있다고 주장했다. 하상연 선생의 주장은 첫째 차나무의 생장 적지는 안개가 자주 끼고 산이 높고 골짜기가 깊은 데다 배수가 잘되며 가뭄을 이겨내는 난석토(欄石土:화강암 마사토)와 역석토(역석토:자갈이 섞인 땅)이다. 이같은 토질은 시생대나 원생대 고생대, 즉 중생대 이전의 부식질 토양으로 지구의 마지막 조산기(造山記)인 신생대, 즉 6천 5백만년 이후의 화산회토와 진흙땅에서는 자연생장이 부적합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환태평양 화산지대와 히말라야 중동 알프스지대에는 자생할 수 없다.
우리나라는 백두산 분화구 일대와 제주도 울릉도 등 화산지대와 일부 해안선의 수성암 지대를 제외하면 국토의 9할 이상이 중생대 이전 신생대에 이르는 수억년이 넘은 지구상 가장 오래된 화강암 지대이다. 둘째 차나무는 결코 열대와 아열대성 식물로는 볼 수 없다. 세계의 차나무 분포도를 보면 북위 45도선에서 남위 30도까지 북반구와 남반구의 폭넓은 온대지방에서 재배가능하다. 따라서 온대성 식물인 차나무는 지구상 식물 성장환경의 변천에 따라 남방으로 옮겨 가면서 중국 북부와 인도 등지는 홍차나 반발효차의 원료로 밖에 쓸 수 없는 거수(巨樹) 대엽종 차나무로 변환된 것으로 추정한다.
차나무는 냉해에 견딜 수 있는 한계선에서 가장 좋은 제품이 생산되며 이것을 원종으로 보고있다. 남방의 화산회토에 온난 다습한 지방에서 자라는 식물은 열매의 부피가 커지고 나무도 거대화 한다. 그러나 색과 향기와 맛이 질적으로 저하되고 토양이 함유하고 있는 희귀원소를 흡수하지 못하므로 우리나라와 같이 토질과 기후가 좋은 조건에서 생산된 농작물에 비해 질적 우수성을 견줄 수 없다. 현재 과일류인 사과 배 포도 감 밤 등 재배품종의 원종은 왜소하고 야생 하고배, 돌배, 산머루, 고염, 산밤 등이며 모든 작물은 인공을 가한 재배품종일수록 부피가 커지는 반면 성분 농도가 묽어지고 조직밀도가 낮아진다. 따라서 식물의 원종으로부터 재배품종에 이르는 과정과 북방에서 남방으로 옮아감에 따라 변하는 생태의 분석에 따라 중국 남부와 인도산 차의 대엽종을 원종이라 할 수 없다.
셋째 차에 대한 문헌이 대개 한문으로 되어 있어 다도나 다례, 차문화를 논하는 이들이 차문화의 발상지가 중국인 것처럼 여겨왔다. 육우의 <다경> 이전의 한자에 차(茶)자가 없는 것으로 보아 중국에 있어서의 차의 보급과 차생활의 일반화는 당(唐) 이후로 생각하고 있다. 이아(爾雅)는 유교경전에 있는 글자 중에서 뜻이 비슷하나 음이 다른 문자를 모아 해설한 자전(字典)으로 여기에 도자(도:씀바귀 도,字)가 있는데 그 해석이 고채(苦菜), 즉 씀바귀 풀이라고 했다. 육우가 <다경>을 지을 때 이 도(씀바귀 도)자를 따서 차(茶)라 했다. 따라서 차문화는 한족(漢族)으로 기원된 것이 아니고 그 실은 한족이 아시아 대륙의 중원을 점거하여 한문화를 형성하기 이전에 우랄 알타이계 어족(語族)인 몽고 퉁구스 터키 예맥 말갈 여진 한족(韓族) 버마 타이 월남 말레이시아 등 남만족, 그리고 인도북부의 산악족 등 한족(漢族)이 말하는 소위 중원을 둘러싸고 있는 4이(四夷), 즉 몽골리안이다.
차, 티, 차이, 테 등 발음은 몽고계어에서 유래했으며 한족어원(漢族語源)인 도(艸+余), 명(茗), 설(艸+設), 천, 가(木+賈)에서 나온 말이 아니다. 현재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티, 차, 테 등 차를 의미하는 낱말은 그 어원이 몽고계인 것이 틀림없으므로 옛날 황해가 바다로 되기 이전 한반도와 중국의 산동반도가 연결되어 있었던 때를 상기할 때 차의 본고장은 지질 및 기후적으로 보아 한반도로 추정하고 있다.
넷째 신라화랑이 차를 마신 유적이나 선도(仙道)의 도맥이 단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오랫동안 내려오는 차례(茶禮) 등 갖가지 관습과 풍습, 근래 가락 고분에서 출토된 차도구 등 모든 것을 비추어 현재 지리산에서 자생하고있는 차나무가 결코 외래종이 아니라고 하상연 선생은 주장하고 있다.
*화개에서 허가를 받고 처음으로 차를 만든 공장은 그 당시(1950년대 말∼1960년대 초)에 딱 두군데였다고 한다. 하나는 화개 입구에 있는 화개제다 홍소술(홍소술이)씨 공장이고 또 하나는 화개제다에서 4km 떨어진 쌍계사 입구의 조태연씨의 방산다장(方山茶庄-지금은 조태연家 죽로차로 바뀌었음)이었다. 지금이야 손꼽을 수 없을 만큼 많은 제다사가 자리잡고 각자의 노하우로 이름 있는 차를 제각기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만 해도 차가 너무도 안팔렸었던가 보다. 홍소술이씨는 59년 화개골에 자리를 잡고 처음 홍차를 만들다 녹차까지 만들고 있고 조태연씨 또한 비슷한 시기에 이곳에 자리를 잡고 녹차만을 고집해 왔다. 7, 80년대까지만 해도 차가 잘 팔리지 않아 고전을 면치 못했었는데 그래도 그 끈질긴 고집들이 오늘날 높이 평가받아 그런 대로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제다사들이다
21.진교 새미골 요(窯)
하동 진교의 사기촌(沙器村) 새미골(井戶鄕) 요(窯)의 주인인 도예가 최정간씨가 이도(井戶)의 고향을 새미골로 밝혀내고 확정짓기까지 4백년이란 긴 세월동안 진교는 도자기와 차를 잃어버린 남해안 바닷가 한적한 갯마을이었을 뿐이다. 역사의 장에서 밀려난 진교, 진교는 사실상 임진왜란이 있기 전까지는 기후나 지리적인 여건으로 봐 우리나라 다도문화를 꽃피웠던 곳이다. 진교를 중심으로 그 서북쪽은 신라 흥덕왕 때 당나라에서 차씨를 가져와 왕명으로 심게 했다는 차밭이 있는 지리산, 지리산 준령이 남으로 뻗어내려 낙남정맥(洛南正脈)의 시원지에 진교는 자리하고 있다. 2억 5천만년이나 나이를 먹어 화강암의 풍화작용으로 차완(茶碗)의 태토(胎土)로는 제일로 치는 철분이 듬뿍 섞인 백토를 무진장 만들어 놓은 곳이다.
차나무가 자라기에 안성맞춤인 기후와 토질에서 다기를 굽는데 둘도 없는 흙이 있다면 더이상 바랄 것이 없는 곳이다. 동쪽 8킬로 떨어진 곳에는 차사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사천(泗川)의 다솔사(茶率寺)가 있고 서쪽 또한 차의 고장이자 차사로 많은 차승(茶僧)을 배출한 순천(順川)의 송광사(松光寺)가 있는 땅이다. 남쪽 또한 코앞에 있는 노량해협을 건너면 지금도 다정리(茶丁里) 다천(茶川) 등 차의 옛 지명이 그대로 남아있는 남해군(南海郡)이 앞을 막고있다.
현재 진교면 버스정류장이 있는 시장은 일제시대 간척사업으로 매립되기 전에는진제포(辰梯浦)라는 도자기 무역항이었다. 진교에서 나오는 도자기가 진제포 선창에서 배에 실려 대마도로 또는 구주(九州) 등 일본 각지로 떠났고 임진란이 끝나 왜군이 철수할 때 안(安), 정(鄭), 이(李), 하(河)씨 등 22개의 성시를 가진 80여 도공이 진제포를 통해 강제로 끌려갔다. 한치의 틈도없이 주위를 빙둘러 싸고 있는 차의 고장이 이곳이다.
일본 교도(京都) 대덕사에 보존되어 있는 이도차완을 두고 오래전부터 日人들은 그 발생지를 "경남 김해나 진주일 것이다."란 추정을 해왔다. 일본에 현존하는 고라이(高麗)차완의 명칭이 대부분 생산지나 수출항의 지명이 붙어있다. 때문에 이도는 정(井)자나 호(戶)자만 붙어있는 지명이면 모두가 한번씩 이곳이 고향이라고들 했왔다. 새미골이 있는 자리는 이곳의 토박이 이성규씨가 오래점부터 살고 있는 집 뒤쪽 감나무밭과 산 언덕 주위인데 이곳에는 잡초와 더불어 온 비탈에 파편들이 흩어져 있다.
72년에 이곳을 답사한 야시모도(香本不苦治)씨가 쓴 <조선의 도자와 古도요지 답사기>란 책에는 "이곳 진교 도요지는 4세기~ 6세기~ 16세기로 추정된다.파편조각의 특징은 도자기 마디가 높고 외부와 내부 허리부분은 매화열매 껍질 색깔로 퍽 아름다웠으며 형태는 꼭 이도차완을 닮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이후 이곳을 찾는 일인들이 수십명씩 떼를 지어 이 파편을 가마니나 배낭에 넣어 마구 가져갔다. 처음에는 예사로 취급했으나 계속 가마니로 반출되자 마을 주민들의 신고로 출입을 제한했다. 급기야는 <경상남도 기념물 24호>로 지정 보호하게 됐다. 이곳이 이도차완의 고향이란 결정적인 단서를 얻어낸 이는 진주 대아고등학교 교장이었던 박종한씨였는데.....
이도(井戶)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학자들간의 주장이 서로 엇갈렸다. *당시 조선과 무역을 통해 가져간 정호삼랑(井戶三郞)의 성을 따 붙혔다는 설. *당시 일본서 열린 차회의 명칭이 이도차회였다는 설. *전북 정읍지방에 있는 요(窯)에서 나왔다는 설. *흙으로 만든 그릇에 유액을 바르니 흙에 옷을 입힌다하여 옷의(衣)자와 흙토(土)를 합하면 의토로 읽어지나 세월이 흐르며 본음이 변하여 이도로 됐다는 설. *그릇 표면벽의 짝짝 갈라진 균열의 모양이 꼭 새미정(우물정.井)자 형을 닮았다는 설. *조선 무역항구에 샘이 있어 이 샘의 이름을 따 이도라는 등 이도차완은 4백여 년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 베일을 최정간씨는 시원하게 풀어버렸다. 결론부터 먼저 얘기하면 진교는 가락(駕洛)시대부터 각종 토기를 구워온 도자기의 고향이었다. 현재 일본에서 국보로 대접받고 있는 이도 차완은 임진왜란 전에 이미 이곳에서 일본으로 건너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자 조선 도자기에 욕심난 일본은 소위<차완전쟁>이라는 임진 왜란을 일으켰다.
진교 새미골의 도자기는 물론 도공까지 수난을 당하며 진교의 도자기는 임진왜란과 함께 종말을 맞고 만다. 최씨는 우선 지명에 대한 한국과 일본의 고서를 통해 고증을 해냈다. 진교의 도자기와 무역을 한 일본 오사까 사까이항을 비롯 도쿄 구주 등옛 무역항을 찾아 도자기 파편을 수집했다. 국내 또한 경남북 전남북 등 옛 도요지를 전부 답사, 파편을 모아 흙의 성분을 분석 비교한 끝에 확실한 결론을 얻었다. 일본인 학자들 또한 *틀림없는 이도차완의 도요지*라고 결론을 내렸다.
지난 86년 1월과 2월호 일본의 도예전문잡지<도설(陶說)誌>는 이도차완에 관한 한 한국인의 글을 한번도 싣지 않다가 *이도차완 생산지에 관한 신연구*라는 제목의 최씨의 글을 소상하게 게재했다.
<동국여지승람>-진주목조(晋州牧條)에는 "새미골에 조선시대 초인 14세기 말에서 16세기까지 진주목 관하에 도기소를 두었다. 새미골은 진주목 곤양군에 속한다."고 쓰여있다. 곤양군에 속해있던 새미골은 1914년 한일합방 때 곤양군이 폐군되고 하동군에 소속되어 버렸다. <세종실록 지리지>-진주목조에는 "주(州)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도기소가 있는데 오로지 누런 용기만 만드는데 하품(下品)이다." 라고 쓰여있다. 여기의 반룡진이란 진교의 옛 지명이다. 진(辰)은 미리진자로 용이란 뜻이다. 1900년까지 사기촌에는 진제포(辰梯浦)란 포구가 있었고 한일합방 후 일인이 이 일대를 매립하여 간척지로 만드는 바람에 지금은 시장터가 되어 버렸다.
이 진제포 또한 <일본서기>-가락국기條에 "대마도에서 구주(九州) 평호(平戶) 대판(大阪)까지 연결되는 항로"로 기록되어 있고 조선시대에도 사기촌의 새미골요가 일본의 주문을 받고 그릇을 만들어 사(私)무역이 성행된 곳이었다. 이같은 증거는 또 사기촌에서 8km 떨어진 다솔사의 다솔사기에도 근거를 두고있다. 이렇게 해서 진교에 자기요가 있었다는 역사적 뒷받침은 됐고 여기다 진교면 사기촌의 속명이 새미골로 밝혀졌다.새미골의 샘은 한문으로 泉이고 샘을 일어로 이도(井戶)라고 표기한다. 골이란 골짜기 마을이니 곧 향(鄕)이라 새미골은 곧 이도향(井戶鄕)으로 밝혀낸 것이다.
이도차완의 인기가 높아지자 일본은 진제포를 통해 새미골 그릇을 많이 수입해 갔다. 현재 일본에 있는 차완의 명칭이 대부분 수출항 지명인 김해 웅천(진해) 보성 고창 무안 계룡산 등으로 되어 있다.
신비에 쌓인 이도차완의 베일을 벗겨낸 지금 진교는 우리나라의 새로운 차유적지로 부상하고 있다. 15세기 다도문화의 극치를 이루었던 진교 사기촌 새미골은 이제 젊은 최씨를 필두로 21세기 다도문화의 구심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차문화 유적지 발췌문헌-김대성의 <차문화 유적답사기 상,중,하>(도서출판 불교영상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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