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은 길어올린다고 해서 길어올려지는 것이 아니에요. 달빛을 그대로 두고 마음으로 그 빛을 보듬을 때 비로소 한가득 길어올려지는 거에요. - 영화 [달빛길어오르기] 대사 중
시간과 더불어 스며 배이는 한지 미학
“견오백 지천년”이라는 말이 있다. 500년을 가는 비단에 비해 한지는 그 곱절에 해당하는 1,000년을 견딘다는 뜻이다. 한지는 닥나무와 황촉규를 주재료로 하여 고도의 숙련된 기술과 장인의 오랜 경험을 바탕으로 완성된다. 닥나무를 베고, 찌고, 삶고, 말리고, 벗기고, 다시 삶고, 두들기고, 고르게 섞고, 뜨고, 말리는 아흔 아홉 번의 손질을 거친 후 마지막 사람이 백 번째로 만진다 하여 옛사람들은 한지를 ‘백지(百紙)’라 부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의 한지는 고려 시대부터 그 명성이 높아 중국인들도 제일 좋은 종이를 ‘고려지(高麗紙)’라 불렀고, 손나라 손목은 [계림유사]에서 고려의 닥종이는 빛이 희고 윤이 나서 사랑스러울 정도라고 극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태종대부터 조지서(造紙署)를 설치해 원료 조달과 종이의 규격화, 품질 개량을 위해 국가적 관심사로 관리해오다가 근, 현대를 지나오면서 건축양식과 주거환경의 변화, 서양지의 수입으로 전통적인 한지의 명맥은 거의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에도 한지제작은 생산원가와 제작공정의 편의로 닥나무 껍질 대신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수입한 펄프를 사용하고, 황촉규 대신 화학약품인 팜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 숨김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이에 국가에서는 전통한지의 올바른 보존과 전승을 위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한지장 류행영
류행영 선생은 1932년 5월 10일 전북 완주군 삼례면 석전리에서 아버지 류흥태 선생과 어머니 이금례 여사 사이에 3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47년에 이리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이리농림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가정 형편이 어려워 1948년 중퇴하고 집안일을 돕기 시작하였다. 이후 류행영 선생은 전통한지 제조법을 부친에게 배워 한지를 제작하던 김갑종 선생에게 전통한지 제조법을 전수받아 55여년 동안 전통한지 제작에 몰두해 왔다. 김갑종 선생은 보유자 매형의 형님으로 일제 강점기 군용지를 제조하여 납품하던 장인이었으며 그 제조기술을 유일하게 류행영 선생에게만 전수하였다. 전통한지 제조법을 전수받고 1959년 전주제지공업사에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전남 장성군 장성읍 교정리에 위치한 제지공장과 마석 소재 주경환 선생이 경영하던 한지공장에서 일하다가 1973년에는 이 공장을 인수하여 간판을 영신제지로 바꾸고 자신의 주관으로 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잘 운영되던 공장이 운영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경남 의령으로 이주했다가 부산에 있던 닥나무 수출회사인 삼백물산에 입사해 한동안 근무했다.
1982년 안동대학교 권기운 교수의 지원으로 안동 소재 옹천제지를 경영하다가 1987년에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소재의 태봉암 아래에 전통한지 연구소 겸 공방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 동안 한국한지작가협회 회원, 기술표준원의 한지 표준화사업 자문위원, 한솔제지 전통한지 재현 자문위원, 한지문화연구회 감사 등으로 활발하게 활동하면서 전통한지의 정맥을 잇기 위해 애쓰고 있다. 또한 용인 송담대학 전통한지연구소 특별연구원, 충북대학교, 성신여자대학교, 전주대학교, 핀란드 헬싱키 공과대학 및 예술대학 등에서 전통한지 특강과 시연회를 개최하여 한지의 우월성과 전통의 가치를 알리는데도 활발하게 활동해 왔다. 더불어 각종 방송과 언론매체에도 여러 차례 출연하여 전통한지의 대중적 관심을 높이는데도 기여했다. 2005년 9월 23일 중요무형문화재 한지장으로 인정되었고 이후, 건강이 여의치 않아 더 이상 현장에서 활동하기는 어려워 명예보유자로 인정된 것이 2008년 12월 30일이다. 60여년을 오로지 전통한지의 복원과 전승이라는 외길에 종사하면서 온갖 어려움과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뜻을 굽힌 적이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