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정명여자중고등학교 (구)목포정명여학교> 안내판 문구
목포정명여학교는 1903년 9월 미국 남장로교 여선교사 스트레퍼가 정명여자학교로 설립했다. 당시, 건물은 현재의 학교 위치에 있던 선교부 건물을 사용했고, 윤리적 규범과 종교적 내용을 가르치는 사숙의 형태였다.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스트레퍼는 1911년에 석조 2층의 독립된 교사를 마련했고, 1914년 6월에 보통과 4년, 고등과 4년의 사립학교로 인가 받아 교육기관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3.1운동 목포에서는 4월 8일에 시위가 일어나 당시 많은 학생과 교직원들이 항일 운동에 참여했고, 김정애, 천귀례 등 12명의 재학생은 선언문과 태극기를 싸서 등에 업거나 물동이에 감춰 머리에 이고 운반하기도 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 사건을 발단으로 하여 광주에서 벌어진 대규모 항일 시위가 벌어지자 이를 먼저 접한 목포공립상업학교 가 시위대를 3개로 나누어 송도신사와 정명여학교 앞에 모여 시위대를 이끌었다. 약 30명의 학생들이 깃발을 들고 '피감금 학생 즉시 탈환','총독 폭압 정치 절대 반대'를 외치며 시위를 시작하였다. 이에 영향을 받은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즉흥적으로 시위에 동조하였다. 평소 여러 시위에 참여하며 사회에 대한 비판 능력을 키운 정명여학교 학생들은 1차 만세 시위 이후 목포공립상업학교 학생들이 수감되자 남은 상업학교의 학생들과 함께 2차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최이선과 서금복이 주도하여 계획된 2차 만세 시위는 1930년 2월 7일에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하지만, 시위가 사전에 발각되고, 시위를 주도한 학생들이 수감되었는데 마땅한 증거가 없어 같은 해 2월 11일 학생들이 석방되며 사건이 종결되었다.
이후 일제의 신사 참배 강요와 민족교육, 종교교육 말살정책에 대한 항거를 지속하다가 1937년 9월에 이르러 강제 폐교를 당하였고, 광복 후 1947년 5월에 다시 개교하였으며, 1950년 3월 목포정명여자중학교 인가받았다.
1962년 12월에는 목포정명여자중학교와 목포정명여자고등학교로 분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