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장 매요신은 영리충을 보여주고 비불은 금강불괴를 들려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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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자앙은 주위의 환호에는 상관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비무대에서 내려왔다. 그는 아까 흑심투골장’이라고 외친 사람을 찾고 있었다.
거기 당하고 살아남은 사람이 거의 없다는 흑심투골장을 알아 본 것도 신기했지만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였다는 생각이 자꾸 뒤통수를 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극히 귀에 익은 목소리. 그러나 절대로 그 사람의 것일 리가 없는 목소리. 사부인 소삼중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그는 곧 목소리의 주인을 찾는 것을 단념해야 했다. 그보다 더 중요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훨씬 강력하게 그의 관심을 사로잡는 일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진자앙은 얼어붙은 것처럼 멈춰 서야 했다. 그리고 잠시 입을 떼지 못했다. 그렇게도 그리워하던 염정, 매불염이 눈앞에 서 있는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면사를 벗어 버리고 얼굴을 드러낸 채 그를 보고 있었다. 바로 몇 걸음 앞에서.
나이가 좀 더 들긴 했지만 그 얼굴에서는 분명 어릴 적 염정의 얼굴을 찾아볼 수 있었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그 용모 속에 예민함과 지혜, 그리고 어딘지 신비스런 느낌이 그대로 스며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목이 타오는 것을 느끼고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소리가 천둥처럼 귀에 울려서 그는 흠칫 놀랐다. 그래도 이렇게 아무 말도 않고 바라보고만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는 바짝 마른 입술에 침을 축이고 입을 벌리려 했다. 그때 매불염이 먼저 말했고, 진자앙은 다시 침묵했다.
매불염은 그에게 이렇게 말했을 뿐이었다.
“따라오세요.”
“왜 만나려 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그렇게 보고 싶다고 졸라서 여기까지 데려왔는데! 전 뭐 힘이 남아 돌아서 이러고 다니는 줄 아십니까?”
투덜거리는 유소림의 목소리에도 소삼중은 별로 화를 내지 않았다.
진자앙이 떠나던 그날, 소삼중은 조용히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한 그날, 유소림이 돌아왔고, 그 이후 그에게 의지하여 살아 온지도 이미 일 년이 다되어 가는 소삼중으로서는 그런 말투에 충분히 익숙해져 있었다.
신기한 것은 한번 나간 유소림이 돌아왔다는 것이요, 또 그냥 돌아온 것이 아니라 어디서 배웠는지 제법 신통한 의술까지 익히고 돌아와서 꺼져 가던 그의 생명을 지금까지 유지시켰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제자의 활약상을 두 눈으로 볼 수 있지 않았던가. 그가 자기 입으로‘금강당 오 대 당주’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을 수도 있지 않았던가.
고집과 어리석음으로 인한 슬픔, 그리고 한만이 전부였던 그의 삶에 진자앙은 한 점 빛으로 존재했다.
그리고 또 하나……!
지금 그를 업고 돌아다니는 유소림의 정은 자식에게서나 느낄 수 있을 것 같은 따스함을 느끼게 했다. 비록 툴툴거리고 있긴 하지만 유소림의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신을 진심으로 대하고 있다는 것을 소삼중은 느끼고 있는 것이다.
평생 살아 온 방식이 그런 것이라, 그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내색은 않지만……, 사실 그런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리라.
소삼중은 천천히 말했다.
“지금 앞에 나타나서 마음을 어지럽힐 이유가 없다. 나중에 봐도 늦지 않아!”
“쳇! 보챌 땐 언제고 갑자기 웬 여유래요? 사부님은 나중에 봐도 될지 모르지만 난 빨리 만나서 그 동안 쌓인 빚을 받아야 한단 말입니다. 그게 이제 얼마야……? 하여튼 은자 서른 냥은 넘을 걸요? 출세했다고 괄시하진 못하겠지. 그랬다간 소문을 쫙 퍼뜨려 버릴 테다. 빌린 돈도 갚지 않는 무신의한 작자라고.”
“도대체……!”
소삼중이 물었다.
“자앙이 네게 언제 돈을 빌렸다는 거냐? 산에서는 돈을 쓸 일도 없었을 텐데!”
유소림은 순간 흠칫했지만 곧 짜증을 내며 말을 돌려 버렸다.
“그런 게 있어요! 그보다 나중에 자앙을 데려간 여자는 누굴까요? 전날 단상에 앉아 있던 것으로 보아 분명 내력이 있는 여인인 듯한데……! 음…… 다시 봐도 정말 이쁘군!”
그는 매불염의 그 아름다운 자태를 생각하며 자기도 모르게 침을 흘리다가 이내 인상을 굳히고는 진자앙과 그녀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하고 생각에 잠겼다.
매불염이 진자앙을 데리고 간 곳은 장락궁의 후원에 자리한 한 독립된 전각이었다. 그 중 한 방에 진자앙은 안내되어 앉고 매불염은 어디론가 나갔다.
벽에는 간단한 서화(書畵)가 걸려 있었고, 탁자와 의자는 화려 했지만 난(亂)하지는 않았다. 고풍스러운 맛이 방안 전체에서 은은히 풍겨나고 있었다. 작은 향로에서 풍겨 오는 보이지 않는 향기처럼.
문이 열렸다.
누런 옷을 입은 두 동녀(童女)가 붉은 옻칠을 한 소반을 들고 들어왔다. 소반 위에는 자기그릇이 다섯 개 놓여 있고 그릇 마다에는 기이한 향로가 몇 가지 들어 있었다. 백철(白鐵)에 황동(黃銅)을 박은 찻주전자에서는 향내가 코를 찔렀다.
동녀들이 그렇게 탁자 위에 차려 놓고 벽에 가 서자 열려진 문으로 매불염이 한 노인을 부축하고 들어왔다.
노인은 명아주 지팡이를 손에 잡고 창포초신을 신고 검은 두건을 쓰고 하얀 옷을 입었는데 늙어 고부라져서 매불염의 키에 반도 못 미치게 작고 얼굴에는 수염은 물론, 눈썹도 남아 있지 않았다.
태생은 비천하지 않은지 원래는 하얀 살결이 보기 좋았으련만 지금은 그 살들이 번데기 주름처럼 겹쳐져서 얼굴 윤곽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고, 치아도 모두 빠졌는지 합죽이였다.
늙었다, 늙었다 하지만 이렇게 늙어 보이는 사람을 진자앙은 처음 보는 것이다.
노인은 매불염의 부축을 받고 있으면서도 다리에 힘이 없는지 의자에 앉으려다 휘청, 옆으로 쓰러지려 했다. 진자앙은 얼른 손을 내밀어 노인을 부축했다. 팔에 닿는 노인의 살결이 너무 부드러우면서도 생기가 느껴지지 않아 어딘지 불쾌한 느낌이 들었다.
“미안하이. 나이가 들면 육신이 말을 듣지 않아.”
노인은 자리에 앉고 나서 그렇게 말을 꺼내었다.
“사람들은 날 보고 배울 점이 많을 것이야. 한때의 영화와 한 때의 재능이 모두 소용없는 것이라고. 그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늙어서 죽을 때를 아는 것이라고 말이야.”
매불염이 붉은 입술을 열어 짧게 책망했다.
“불길한 말씀을!”
“그래, 그래! 귀한 손님을 모셔 두고 쓸데없는 말만 했구나. 그럼 어디……!”
노인은 진자앙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개를 않았네만 자넨 내가 누군지 알겠나?”
진자앙이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했다.
“저야말로 인사를 않아 예의를 잃었습니다. 광동 출신 진자앙입니다. 제가 감히 짐작하건대 귀인께선 황사 어르신이신 걸로 생각됩니다만, 틀렸으면 용서해 주십시오.”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즐거워했다.
“전혀 틀리지 않았네. 내가 바로 황사라는 과분한 직책을 맡은 적이 있는 매요신일세. 이젠 그나마 그 자리도 내놓았으니 그냥 아무것도 아닌 폐물에 불과하지.”
그리고는 매불염을 보며 가볍게 나무랬다.
“봐라! 내가 분명히 이 젊은이는 영민해서 사람을 금방 알아볼 거라고 하지 않았니. 어디가 둔하고 미욱하단 말이냐?”
그의 말대로라면 매불염이 진자앙을 소개할 때 둔하고 미욱하다고 말했다는 뜻이 된다. 매불염은 얼굴에 홍조를 지으며 얼른 부정했다.
“소녀가 언제 그런 말을……! 아버님께서 자꾸 놀리시면 전 자리를 비키겠어요.”
그러면서 짐짓 일어서려 하자 매요신이 손을 흔들었다.
“아니다. 이 아비가 잘못했다. 네가 없으면 난 어떻게 움직이랴? 실언했으니 용서하려무나.”
그렇게 한참이나 농을 주고받는 모습이 진자앙이 보기에는 조금도 지루하거나 어색하지 않았다. 그는 그 광경에서 매요신이 매불염을 진심으로 아끼고 있다는 것, 그리고 매불염 또한 매요신을 진심으로 따른다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말과 행동은 꾸밀 수 있지만 오고가는 눈빛과 손끝에 맺히는 정은 억지로 꾸미기 어려운 것이었다.
매요신이 진자앙을 보며 말했다.
“나는 다 늙어 이렇게 귀여운 딸을 얻었네. 하늘이 말년에 내린 복이지. 하지만 이제 딸이 장성하고 보니 걱정거리가 생겨 버렸어. 누구에게 이 아이를 맡길까, 하는 것이지. 자네가 내 딸아이와 어릴 적에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는 것은 알지만 단지 그걸 이유로 딸을 내주기에는 충분치 않지. 어렸을 땐 영민하다가도 나이가 들면 들수록 모자라지는 경우를 한두 번 봤어야지. 하나 지금 자넬 보니 다행히 헌앙한 장부요, 오관이 단정하고 삼정(三停)이 고르니 뛰어난 인물일 것일세. 하지만 나는 그것도 조금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네. 이해할지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나 자기 자식은 사실보다 대단해 보이기 마련이거든. 또 우스갯말에 모든 아버지들은 딸이 행여나 젊은 시절 자신과 똑같은 사내를 만나지나 않을까 전전 긍긍하며 살아간다고도 하지 않던가. 혹시나 중매도 증인도 없이, 납채도 안 받고 딸을 강탈당하지나 않을까 해서 두려워하는 것이지. 그래서 이번 기회를 나는 속으로 크게 기꺼워하고 있네. 내가 모시는 삼황야께서 여신 어전시합이 있고, 자네도 참가하지 않았나. 그래서 생각한 것이지. 우승자에게 내 딸을 주리라고. 자네가 진정 내 딸을 갖고 싶다면 반드시 우승해야 할 걸세.”
진자앙은 갑자기 웬 결혼얘긴가 해서 잔뜩 의아해 하다가 마지막의 어전시합 우승 얘기가 나오자 그제서야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와 똑같은 얘기를 그는 이미 들은 바가 있는 것이다.
그날 달밤에 금장사에서 가휘섭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우승하여 매불염을 차지하겠노라고. 이러니저러니 말을 돌리고 차를 대접하며 장광설을 늘어놓은 목적이 바로 그것인 모양이었다.
그를 떼어 버리고 가휘섭을 사위로 삼고 싶은 욕심을 드러낸 것이다.
진자앙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유 없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이 자꾸 들어 매요신과 매불염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아무 관계도 아니었던 것을 이제 와서 그녀가 다른 곳에 시집간다고 한들 그가 무어라 말할 수 있으랴. 더구나 그녀의 아버지가 그렇게 결정했다는데 또 무어라 말할 수 있으랴.
단지 우스운 것은 가휘섭이 꼭 우승할 거라고 믿고 있는 그들 생각이었다.
진자앙은 자신이 보란 듯이 우승한 다음에는 이들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상상하며 약간의 잔인한 기쁨을 맛보았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황사 매요신쯤 되는 인물, 단적으로 말해 천하제일고수가 우승은 가휘섭의 것이라고 말한다면 거기에는 충분히 타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었다. 어쩌면 가휘섭에게는 그가 알지 못하는 대단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는 지게 될 것이고 사문의 영광, 가문의 부흥은 고사하고 매불염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한참이나 이런 맥락없는 생각에 빠져 있던 진자앙은 다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고개를 빳빳이 들고 매요신을 보았다. 무엇 때문인지 잔뜩 부끄러워하며 홍조를 띠고 있는 매불염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매 소저는 천하의 가인이시니 절세영웅에게 시집을 보내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불초는 능력도 없거니와 그럴 마음도 없으니 심하시기 바랍니다.”
매불염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이 방금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또 진자앙이 진심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의심스러운 듯 쳐다보다가 얼굴을 가리고는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진자앙은 표정의 변화 없이 그저 묵묵히 앉아 있을 뿐이었다.
매요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무렇게나 손을 흔들었다.
“나는 자네가 내 딸에 대해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는 줄 알았더니 아니었군그래. 어쨌든 좋네. 그럼 그 일에 대해서는 그만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 자네를 부른 진짜 이유를 말하기로 하세.”
진자앙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하교하실 일이 있으시면 듣겠습니다.
“하교랄 것은 없고, 소개해 드릴 분이 있어서 그러네.”
매요신도 짧게 얘기하고는 대기하고 있는 동녀에게 손짓을 했다. 동녀가 얼른 밖으로 나갔다.
방안에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동안 진자앙은 도대체 누굴 소개시켜주겠다는 것인지 궁금해 했지만, 그 사람이 누구일지는 곧 짐작할 수 있었다. 천하의 매요신이 그분이라고 호칭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왜 자신을 ‘그분’에게 소개하겠다는 것이냐는 점이었다.
그는 문득 불길한 예감을 느꼈고, 문제의 그 사람이 들어왔을 때 그 불길한 예감은 확신으로 변했다.
진자앙은 일어나 무릎을 꿇고 절하면서도 이 난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천한 백성 진자앙이 삼황야를 뵙습니다.”
삼황야.
전대 황제의 동생이며 당금 황제의 숙부인 삼황야가 손수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오 대에 걸친 명문인 광동 진가장의 자손이 천하면, 천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겸손이 지나치군.”
삼황야는 올해 대충 오십여 세쯤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지금 보니 붉은 얼굴에 굵은 눈썹과 빛나는 눈 등은 사십대라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게다가 몸에서 풍기는 위엄과 기세는 단순히 그가 황족이라 몸에 갖추게 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이러니 반역을 꿈꾸겠지!’
진자앙은 이제 모든 것을 알 것 같았다.
등천비룡문과 영리충, 그리고 황사 매요신. 이 모든 요소들이 바로 이 삼황야에 의해 연결된 것이라고 하면 그 동안의 모든 의문이 풀린다.
삼황야에게는 힘이 필요한 이유가 있고, 매요신과 영리충에게는 그 힘을 꾸릴 능력이 있다. 화륜맹, 광풍사, 운리무를 처치하면 가장 이득을 보는 단체는 등천비룡문이었지만, 그것은 삼황야의 일을 쉽게 하기 위한 것일 터였다.
얼굴 보기가 불가능에 가깝다 할 무림쌍성을 참관인이라고 비무대 옆에까지 불러들일 힘도 삼황야에겐 있는 것이다.
단지 궁금한 것은 그런 삼황야가 왜 그를 불러서 만나는 것이냐는 점이었다. 그것을 질문하려는데 삼황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가 듣기에 자네가 후기지수 중에는 무공으로 보나 인품으로 보나 최고라고들 하기에 한번 만나려 했네. 얘기를 하고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
“천한 백성을 지나치게 놀리시는군요. 불초가 어찌 최고가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밖에서 비무하는 모든 사람들이 저보다는 위라고 불초는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매요신이 손을 저었다.
“지나친 겸손! 방금 내가 자네 팔을 만졌을 때 나는 알 수 있었지. 자넨 족히 여기 모인 후기지수들 중에 최고일 뿐 아니라, 두세 명을 제외한다면 무림최강이라고 할 정도의 경지에 올라 있네. 신체는 극도로 단련되어 있고, 내공은 불순물 하나 섞이지 않은 온전한 상태로 넘쳐 흐르고 있지. 단지 내부의 기운과 신체의 그것이 아직은 서로 조화가 되지 않고 있어 내외겸수(內外兼修)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것이 문제인데,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 것일세. 내가 알기로 외가에서 시작해서 자네 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왜냐하면 그건 정도(正道)가 아니기 때문이지.”
삼황야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진자앙도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황사의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우연이든 아니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외가기공을 익히는 사람들의 꿈은 금강불괴겠지? 그러나 사실은 내가의 사람들에게도 그건 마찬가지라네. 그리고 길은 내가에 더 가깝게 있네.”
그의 말에 따르면 내가심법을 어느 경지에 이른 후에야 외공을 익히고 금강불괴가 되기 위한 몇 가지 단련을 거치는 쪽이 외공을 익히다가 어려움을 알고 내공을 더불어 익힌 것보다 정도라는 것이다.
“사실은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봐야겠지. 외공 다음에 내공의 조합은 무리란 말일세. 내공 혹은 외공만으로도 물론 안 되고. 그러나 자넨 거의 근접했네. 그건 자네가 배운 외공이 단지 외공만은 아니었기 때문이고, 다른 인연, 예를 들어 영약을 먹었다던가 하는 것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야.”
진자앙은 식은땀을 흘렸다. 황사의 말대로라면 그도, 그의 사부 전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일까? 심지어는 대력금강 사조도……!
황사는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잘못된 길을 걸었다고 후회하고 있나? 그럴 필요도 없네. 내 이 전적으로 옳다면 무수한 내가고수들 중에서 왜 금강불괴가 나오지 않았겠나? 그들은 자네와는 반대의 길을 걸었기 때문에 오히려 실패한 것일세. 무림의 유수한 문파들 중에서 이렇다 할 신체 단련법 하나 행하고 있는 곳이 얼마나 될까? 내공과 더불어 외공도 익혀야 한다고 훈도하는 스승이 얼마나 될까? 무공은 근본적으로 몸을 통해 발현되는 것이니 몸을 소중히 여기라고 충고해 주는 선배는 또 얼마나 될까? 이렇게 몸을 하찮게 여기고 정신만 고도로 강조하는 풍토에서는 제대로 된 고수가 나오기 어렵지. 가끔 나오는 자들이라고 해야 원굉도니, 운리무니, 쾌여풍, 급여화같이 하나만 할 줄 아는 기형적인 아이들, 또는 쌍성과 같이 공부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던 것 같은 창백한 고수들이 고작이란 말일세. 그에 비해 자넨 제대로 되었지. 자네 할아버지와 같이……!”
“저도 외공만 익혔으니 기형적이긴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누가 자네에게 외공만 익혔다고 하던가?”
“그게 사실……!”
“처음 예선에 나타날 때 사용한 경공술이 궁서생의 창랑보였지?”
“예……!”
“비발동자를 죽일 때 손을 뻗은 수법은 뇌정추이기도 했지만 맹방평의 천망월인에 더 가깝다더군. 사실인가?”
“그럴지도 모르겠군요.”
“방금은 뇌정추로 비무대를 부숴 버렸다면서?”
“예.”
“할아버지에게 오칠비결을 배웠겠지? 몸속에 흐르는 기운이 그것과 같던 것을……?”
“음…… 예!”
“그럼 뭘 더 배워야 하나? 삼공의 진전을 다 익혔는데 그래도 부족하다면 욕심이 아니던가?”
진자앙은 말이 그렇게 될 수도 있구나, 생각하고는 해연히 놀라 버렸다.
“천초(千抄)를 아는 자를 두려워하지 않고, 일 초(一抄)를 숙련한 자를 두려워한다는 무언(武言)이 있지. 요즘 사람들은 말의만 취하지, 그 뼈까지 푹 고아 먹으려 하지는 않는 것이 큰 문제거든. 이 말을 알면 자네도 알고 있는 것이 적어서 걱정이 아니라 제대로 익히지 못해서 걱정이라고 생각하게 될 걸세.”
진자앙은 고개를 끄덕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과연 그러합니다.”
“그래도 지금의 자네가 원굉도나 운리무보다는 낫다고 나는 보네. 그것은 자네가 바탕이 되어 있기 때문이야. 안으로나 밖으로나 최고가 될 터전을 꾸며 놓았다는 것이지. 이제 문제는 안을 골라서 집을 짓기 쉽게 하고, 밖을 다듬어 보기에도 좋게 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깨달음이 필요하다네. 그래서 한 사람을 만나게 해주겠네. 그가 아마 깨달음의 계기를 마련해 줄 걸세! 그때 자넨 진짜 금강불괴가 될지도 모르지.”
진자앙은 들으면 들을수록 말이 이상하게 되어 간다는 생각을 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도대체 제게 이런 친절을 베푸시는 이유가 뭡니까? 무얼 바라시고……!”
“물론 바라는 게 있지!”
황사 매요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진자앙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키는 매불염에게도 반이 겨우 되니 진자앙에게는 무릎을 겨우 넘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눈빛을 빛내며 뒷짐을 지자 한 순간 진자앙은 태산 앞에 선 듯한 위압감을 맛보았다.
“천하의 안위를 생각하고 국조의 성덕을 잇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근래 수십 년 동안 밤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을 것이네. 밖으로는 오랑캐와 왜구가 발호하고 안으로는 부패한 관리들이 국가의 근간(根幹)을 갉아먹는데 강호의 무도한 무리들은 저희들끼리 죽고 죽이며 노닥거리는 것도 부족해 죄 없는 백성을 핍박하고 그 고혈을 빨아먹고 있네. 이 모든 것이 힘없는 성상(聖上) 때문에 국가 기강이 바로잡히지 않아서 그런 것이야. 뜻있는 자들이면 마땅히 궐기하여 이러한 현상을 타파하고자 하여야 하지 않을까?”
이쯤 되니 진자앙도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 했던 모든 말이 역모를 정당화하고 그를 그 도당으로 끌어들이려는 것에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슨 말로도 역모를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황사께서 누구보다 잘 아실 텐데, 역모의 무리에 가장 앞장서다니 정말 실망이 크지 않을 수가 없군요.”
매요신은 그 반박에 잠시 말을 중단하고 그를 멀뚱멀뚱 쳐다보았다. 삼황야가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를 향해 매요신도 미소를 보내었다.
그러나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매요신의 눈빛은 추상 같은 엄격함만을 담고 있었다.
“하늘이 하는 일을 범인이 알게 되면 득보다는 실이 크지. 기왕에 자네가 그것까지 짐작했다면 이 사람을 보아도 놀라지 않겠군!”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걸어 들어왔다. 단아한 청삼에 영웅건, 손에 장검 대신 섭선 하나를 들고 있다는 것만 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청년협사의 모습인데 특이한 것은 놀라울 정도로 영준다는 것이었다.
상관 공자, 영리충이 나타난 것이다.
동시에 진자앙의 눈앞이 흐려졌다. 그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바라보이는 사물이 모두 비틀어져 보이는 것을 보고 문득 말했다.
“독?”
황사가 비틀어진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극락향을 맡아도 안 쓰러지지만 그걸 마시고는 안 쓰러질 수 없겠지. 이것도 아직 내외의 조화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자면서 반성이나 하게! 지금 자네가 설치면 곤란해!”
진자앙은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주전자를 잡아 영리충을 향해 던졌다. 그리고는 창이 있는 쪽을 향해 한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이 그의 한계였다.
진자앙은 고목이 쓰러지는 것처럼 길게 바닥에 쓰러져 뒹굴었다.
“체력 하나는 정말 좋은 놈이군요!”
영리충은 가볍게 감탄하고는 빙글빙글 웃었다.
황사가 함께 웃었다.
“영생뢰에서는 그게 많이 필요할 걸세!”
“죽여서 후환을 끊지 않으시고요?”
“난 일흔이 넘으면서부터 살인을 한 적이 없어. 영생뢰에 가두면 결과는 마찬가지니까 토 달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게!”
“그렇군요. 결과는 마찬가지겠지요.”
영리충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밖의 비무대에서는 하나하나 결과가 맺어지고 있었다.
진자앙의 바로 다음 시합에서 아미파의 비구니 공심이‘강기로 독을 이긴다’는 놀라운 경지를 보이며 사천 당문의 당대붕을 눌러 이겼다. 하늘을 가릴 듯한 암기의 폭풍도, 땅을 뒤엎는 독의 안개도 공심의 몸 주변 한 자 이내를 범접치 못했던 것이다.
마지막 시합에서 강시당주 고웅풍은 전날 대황봉을 쳐죽이는 데 너무 힘을 썼던지 의외로 별 이름도 없는 등천비룡문의 옥룡 가휘섭에게 져버렸다. 장장 일천여 초를 교환하는 대혈투 끝에 매듭 지어진 결과였다. 고웅풍은 시합이 끝나자 당삼고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버렸는데 소문에 의하면 이것으로 강호에서 은퇴하고 결혼할 것이라고 했다.
이래서 내일 있을 삼차전은 광동 진가곤의 사문기와 금강당의 진자앙, 그리고 아미 공심과 옥룡 가휘섭의 대결로 결정되었다.
2
정신을 차렸을 때 진자앙은 자신이 완벽하게 구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강철로 만들어진 사각형의 관 같은 것에 박혀서 벽에 세워져 있었는데, 그 강철관은 다시 벽에 박혀 있었다. 한마디로 벽장과 같은 곳에 그대로 박혀 있는 셈이었다.
그 상태에서 다시 오른손은 등 뒤로 돌려져 있고, 왼손은 배 위에 올려져 있는데 대접 굵기 만한 강철 띠로 동여져 있어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또 다리는 꼿꼿이 펴진 채 두 발이 한데 묶여 있었다. 역시 대접 굵기 만한 강철 띠로 결박되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끝이 아니라 강철의 관을 두 부분으로 나눈 듯한 강철판이 정확하게 그의 목 부위에서 가로질러져 있어서 머리를 그 사이에 밀어넣고 결박된 상태에서만이 서 있을 수 있었다. 붙박이 항쇄(項鎖:목을 묶은 쇠고랑, 칼)인 셈이었다.
그대로는 목을 돌리기도, 숙이기도 어려워 정면을 똑바로 주시하는 것 외에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몸의 상태를 아는가?
그의 정면으로 보이는 벽에 그와 똑같은 자세로 한 사람이 묶여 있기 때문에 겨우 알 수 있었던 사실이었다.
진자앙 앞에 있는 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그런 자세로 서 있었는지 옷은 낡아 부스러져서 흔적도 없고, 강철관과 강철 띠는 붉게 녹이 슬어 있었으며 몸 또한 말라 비틀어져서, 말린 지 오래되는 생선 조각처럼 보였다.
팔과 발을 결박하고 있는 강철의 띠가 더 이상 결박이 아니라 그 마른 몸을 지탱해 주고 있는 것 같이 생긴 사내. 옷이 부스러져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사내인 것은 분명히 알 수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것을 진자앙은 그 사람이 움직여서 그의 정면으로 다가왔을 때에야 겨우 알 수 있었다. 이 방안에 구속되어 있지 않은 한 사람.
슬픈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매불염이었다.
진자앙의 기억 속에는 그런 눈빛은 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매불염이 그런 눈빛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진자앙은 가슴이 아려 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그가 잘못한 것은 단 하나도 없지 않은가. 그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왜 여기 있소?”
매불염의 눈빛이 더욱 슬퍼졌다. 순간적으로 진자앙은 그녀의 눈 속에 수정 같은 눈물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녀가 눈을 잠시 감았다가 뜨자 슬픔도, 눈물도,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품속을 뒤지더니 비수 한 자루를 꺼내었다.
어딘지 낯이 익은 비수. 진자앙은 그것이 예전에 그가 누나에게서 받아, 다시 염정에게 주었던 단룡비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떤 물건은 특정한 시간을 그것에 비끄러매어 두기도 하는 모양이었다. 진자앙은 단룡비를 보는 순간, 그가 그것을 염정에게 주었던 그 순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착각에 빠졌다.
비가 내리고, 하늘이 뚫린 것처럼 쏟아지는 비가 대지와 강물 위로 퍼부었고, 뿌연 우막이 천지를 메우고 있었던 그때에. 염정의 작은 모습이 두터운 우막 속으로 사라져 갔던 그때에. 그는 그녀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진자앙은 잠시 눈을 감았다 다시 떠서 매불염을 보았다.
그때의 염정은 사라지고 이제 그의 앞에는 매불염만이 남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한 번 염정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염정아!”
매불염이 가만히 그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갯짓을 따라 속눈썹에 은빛 구슬이 맺히고, 땅바닥에 떨어졌다.
“염정아!”
진자앙은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몰라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는 쥐어짜듯 한마디 했다.
“행복하게 살아야 해!”
매불염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번쩍 손을 치켜 들어 비수를 꽂았다. 진자앙의 허리 옆, 강철의 관. 그리고는 돌아서서 걸어갔다.
진자앙의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는 외치듯 불렀다.
“염정아!”
매불염이 멈추어 섰다. 그러나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진자앙은 터질 것 같은 답답함을 해소하려고 충동적으로 소리쳤다.
“왜 가휘섭 같은 자를 좋아하는 거지?”
죽어도 하고 싶지 않은 말을 결국에는 내뱉고야 만 것이다. 진자앙은 눈을 감아 버렸다. 차라리 이 순간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그런 그에게 매불염이 다가왔다. 이 순간 눈을 떴으면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도 웃고 있는 매불염의 얼굴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귓가에 향기로운 숨결이 닿았다.
“바보!”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매불염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진자앙은 혼란한 생각에 가득 차 있었다. 도대체 매불염의 마지막 말이 무슨 의미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가 왜 여기에 있는지, 여기는 어떤 곳인지도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영겁같이 느껴지는 긴 시간이 흘러갔다.
매불염이 떠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다시 한 사람이 나타났을 때 그는 배가 고파 오는 것을 느끼고, 영겁이라 생각한 시간이 사실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음을 알았다. 나타난 사람이 커다란 물통 같은 것에 죽과 만두를 잔뜩 가져 왔기 때문에 배가 고팠던 것임도 또한 깨달았다.
갇혀 있는 사람도 무언가를 먹어야 산다. 꼼짝도 못 하는 사람이 무엇을 먹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무엇인가를 먹여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런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야 깨닫고 진자앙은 놀랐고, 음식을 가져 온 사람이 만두를 입에 물려 줄 때 또 한 번 놀랐다.
진자앙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자기보다 큰 사람은 여기에서 처음 보았기 때문이었다.
음식을 날라 온 사람은 정말 집채만큼이나 컸다. 원래 그런지 아니면 천장이 낮아서인지는 몰라도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고 있는데도 뒤통수가 천장에 닿을락말락했고, 만두를 쥔 손은 진자앙의 머리통과 비슷한 크기였다.
온통 털로 가득한 그 얼굴에 깊이 박힌 눈이 한없이 순해 보이는 것이 또 이상했다. 마치 백치의 그것을 보는 듯한 막연함이 거기 있었다.
집채만 한 사내는 진자앙이 그를 바라만 볼 뿐, 만두를 먹지 않자 턱을 몇 번 주억거렸다. 엄마가 아이에게 음식을 권하는 것처럼.
진자앙은 받아먹었다. 그렇게 몇 개인가를 먹자 이번에는 죽이었다. 커다란 주걱에 가득 담아 조금씩 입에 흘려 넣어 주는 것이었다.
그것까지 진자앙이 아무 소리 않고 받아먹자 집채는 기쁜 듯 히죽거리더니 이번엔 맞은편에 박혀 있는 생선꼬다리에게 다가갔다. 생선꼬다리는 집채가 주는 음식을 거절하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죽어 버린 시체일지도 몰랐다.
집채는 몇 번이나 생선꼬다리의 입에 만두를 넣어 주려 하다가 안 되자 강아지가 우는 듯한 신음을 내고는 물러섰다.
그때 생선꼬다리가 입을 열어 말했다.
“나는 되었으니 다른 중생을 보살피게나, 철우!”
철우라 불린 집채가 다시 신음 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생선꼬다리는 만두를 먹을 생각은 않고 이해가 가지 않는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색은 색이지만 원래는 색이 아니고 공은 공이지만 또 공이 아니다. 조용한 것과 떠들썩한 것, 말하는 것과 말하지 않는 것도 본래는 같은 것. 꿈속에서 어찌 해몽을 할까? 유용한 용(用) 가운데 용이 없고 무공(無功)의 공 가운데 공을 베풀다. 과일이 익으면 자연히 붉어지는 것과 같다. 묻지 말지어다, 어떻게 수행하는 가를.”
그것이 완강한 거절의 표현이었던 모양, 철우라 불린 집채는 조용히 물러나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진자앙은 눈을 부릅뜨고 생선꼬다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물었다.
“설마 방금 그분이 대력금강 철우는 아니겠지요?”
묻고도 말이 안 되는 일이라 생각해 혼자 웃는데 생선꼬다리가 갑자기 눈을 뜨더니 그를 마주보았다.
“그를 아는 중생은 누군가?”
진자앙은 머리가 멍해지는 것 같아서 입을 벌리고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겨우 정신을 수습하고 대답했다.
“저는 진자앙이라고 하는데 방금 그분의 사대손뻘 되는 제자 입니다.”
생선꼬다리가 그 말을 듣더니 다시 이상한 말을 읊조렸다. 자세히 듣고서야 진자앙은 그것이 불경을 인용한 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만 가지의 인연을 끊고 성(性)을 깨닫는 자에게 있어서는 제법(諸法)이다 공인 것. 큰 지혜가 있는 자는 담박(淡泊)함이 불생(不生)하는 속에 있고 천기(天機)를 아는 자는 묵묵히 적멸(寂滅) 가운데에 소요한다. 삼계는 공연(空然)해서 백단(百端)이 다스려지고 육근(六根)은 정결해서 천종(千種)이 궁극(窮極)한다. 사대니 오 대니 다 부질없는 것이니 잊는 것이 좋으리라!”
신화 속의 인물을 보고, 그것도 까마득한 조사를 보고 어떻게 잊을 것인가.
진자앙은 소리치기 시작했다.
“조사님! 조사님! 소손(少孫) 금강당 오 대 제자 진자앙입니다. 대력금강 철우 조사님 한번만 더 존안을 보여 주십시오!”
방이 쩌렁쩌렁 울릴 정도의 큰 고함이었지만 대답은 없었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진자앙은 문득 생각이 나 다시 외쳤다.
“조사님, 반선 진양 도인께서 전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번만 더 존안을 보여 주십시오!”
이번 말에는 대응이 있었다. 그러나 철우가 아니라 생선꼬다리에게서였다.
“반선이라고? 네가 그를 보았느냐? 무어라 말하더냐?”
“반선을 아십니까?”
생선꼬다리는 잠시 침묵하더니 짧게 대답했다.
“내가 비불이라 불리는 고불화상이다!”
진자앙은 다시 기절할 뻔했다.
이로써 그는 전설 속의 삼선을 현실에서 다 만나 보는 셈이었다.
“사천왕(四天王) 중에는 천대받는 왕이 하나 있으니 다른 누군가의 발 아래 깔려 있는 왕이 그것이다. 그러나 그 왕은 불사신이다.”
비불, 고불화상은 그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당년에 삼선이 모여 논쟁을 벌일 때, 그도 다른 두 명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는 금강불괴는 불경에 나온 바 그대로 견고한 지덕(至德)으로 일체(一切)의 번뇌(煩惱)를 깨뜨린 후에야 도달하는 정신(精神)의 지고(至高)한 경지를 의미하는 것이지, 육체적인 단단함이 절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육체적으로 그런 경지에 도달한다고 해도 정신의 동일한 수준으로의 발전이 없다면 그것 또한 진정한 금강불괴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한 것이 고행이었다.
“나는 심원한 지혜로 삼계를 두루 살펴보았다. 근본의 성원(性原)은 필경은 적멸(寂滅)이어라. 허공은 상(相)과 마찬가지로 하나라도 있는 것이 없다. 삶과 죽음, 애욕의 정리는 내가 알 바 아니다. 이름이 생기면 죽음이 시작되는 법, 법상(法相)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른바 천 가지 번뇌와 만 가지 인연을 끊어 적멸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부처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금강불괴라고 하는 것이었다.
“지나치게 영리함은 어리석음과 같으니 매사를 다 할 수 없는 것을 알아야 하고, 좋은 계획은 짐짓 마련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어느것이나 저절로 맞아야 되느니. 다만 한마음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만 가지 행동이 저절로 온전해진다. 티끌과 같은 속된 인연을 모조리 다 버린다면 모든 물건의 색은 죄다 공이 되고 소소순순(素素純純)하여 애욕이 적어지면 그것이 부처이니 무궁할 것이다.”
진자앙은 그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한참 듣다가 문득 물었다.
“그럼 지금 여기 갇혀 있는 것이 스스로의 뜻에 의한 것이란 말씀이십니까? 물경 백수십여 년을요?”
비불은 그렇다고 했다.
“제 사조님은요? 그분은 어떻게 여기 오시게 되었습니까?”
비불의 말은 놀라운 것이었다.
철우가 어떻게 여기 영생뢰에 갇히게 되었는지는 그도 모른다. 단지 어느 날 그는 갇혀 있던 상태를 풀고 나오더니 일을 시작했다. 영생뢰를 관리하는 그 누구도 그를 이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다시 갇히지 않았고, 나중에는 가둘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는 스스로 나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때 그는 이미 백치나 다름없는 상태였고, 여기 영생뢰에 갇힌 모든 죄수들의 수발을 그가 들게 되었다. 세월이 흘러 수십 년이 지나자 철우는 영생뢰의 항쇄나 쇠사슬과도 같이 여기 당연히 존재하는 일부분처럼 받아들여졌다.
진자앙은 놀라 외쳤다.
“그럼 여기가 영생뢰입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진자앙은 북천사흉과 매요신에 얽힌 이야기를 생각하고는 더 이상 그 점에 대해 의문을 품지 않았다.
다시 영겁과 같은 시간이 흘렀다. 철우가 한 번 더 왔지만 그를 아는 척도 하지 않았고, 그의 말에 대꾸하지도 않았다.
진자앙은 점차 모든 것을 포기하고 깊은 생각에 잠겨들게 되었다.
쇠를 끊는 비수가 옆에 있어도 손을 움직일 수 없으니 소용이 없고, 살아 있다고 해도 움직일 수 없으니 산 것이 아니었다. 과연 비불이 고행을 택했다면 제대로 택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곳에서 어떻게 수십 년을 살아간단 말인가.
하지만 이렇게 고행을 하고, 그리하여 인간의 정을 모두 끊어버려 차가운 재같이 마음을 식혀야만 금강불괴가 되는 것일까?
진자앙은 만약 금강불괴가 그런 것이라면 자신은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비불이 그 얘기를 듣더니 고개를 가로젓다가 다시 끄덕였다.
“감정을 죽여야만 부처가 된다. 이것은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네 말대로 금강불괴가 꼭 될 필요도 없다. 부처는 완전한 인간이지만 모든 인간이 완전한 인간이 될 수는 없다. 완전해지는 그 순간부터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침묵하다가 문득 몸을 뒤척였다. 그 순간 그는 강철의 띠도, 족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몸으로 진자앙의 앞에 섰다.
“마음이 자유로우면 강철의 띠로 묶여 있으나 맨몸으로 장강 물에 떠 있으나 마찬가지로 자유로운 것이다. 하나, 마음이 얽매여 있으면 설사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가 된다 해도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만사가 이와 같으니 저기 음식을 들고 바닥을 기어 다니는 철우나 여기 벽 속에 박혀 백여 년을 갇힌 나나 자유롭고 또한 부자유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린 아직도 금강불괴라는 네 글자에 매여 있기 때문이다.”
“금……, 강……, 불……, 괴……!”
어느새 철우가 나타나 비불의 옆에 섰다. 그의 순한 눈에서 묘한 빛이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비불이 손을 들어 철우의 머리를 만졌다.
“보라! 미망은 길고 인연의 끈은 질기다. 맺힌 것 온전히 풀고, 엮인 것 온전히 벗어나지 않고서는 부처가 될 수 없으니 육신은 가도 정신은 일만겁을 더 헤맬 것이다.”
그는 고개를 숙여 깊이 슬퍼하는 듯하다가 문득 진자앙을 보았다.
“떠나거라!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다. 긴 세월을 미망 속에 잠겨 살아 온 뜻이 여기 있으니, 우린 널 기다리기 위해 여기 매여 있었던 모양이다. 인연의 끈이 끊어지면 일체가 함께 끊기는 법. 우리는 온 곳으로 다시 가리라. 너도 네가 온 곳으로 다시 떠나라!”
진자앙은 자기도 모르게 그 말에 따라 앞으로 나서려다가 그대로 꼬꾸라졌다. 배와 팔을 같이 결박한 쇠고리가 그대로 떨어졌지만 발목을 묶은 쇠고리는 그대로였기 때문이었다.
진자앙은 잘려진 쇠고리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날카롭게 끊어진 자국은 자연히 그렇게 되었다고는 도저히 볼 수 없었다. 그는 쇠고리 옆에 박혀 있는 단룡비를 보고 다시 쇠고리를 내려다보고서야 원인을 알아차렸다. 매불염이 왔다가 떠나가는 그때에 그의 결박은 이미 풀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결박이라 생각하는 그 동안 그것은 분명히 결박이었지만 자유로이 움직이는 그 순간에는 그것은 결박이 아님이 밝혀졌다.
‘만사가 이런 것인가?’
그는 종잡을 수 없었던 비불의 이야기가 비로소 조금은 이해되는 듯이 느꼈다.
따지고 보면 그의 내공이라는 것도 자유로이 놔둘 때 아무 문제가 없지 않았던가. 그가 가장 상처를 입었을 때는 내공을 쓰지 않았을 때가 아니라 억지로 움직여 경공을 하고자 했을 때였다.
‘그냥 두면 몸에 따라 줄 것이니 굳이 움직일 이유가 없지!
그의 눈앞이 갑자기 밝아지는 듯했다. 그는 이 작은 깨달음을 전하려고 비불과 철우를 보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얘기도 하지 못했다. 두 사람은 이미 죽어 있었다. 원인도 증상도 없이 갑자기 싸늘한 두 구의 시체로 변해버린 두 사람을 보며 진자앙은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비불의 말처럼 그들은 그를 기다린 것일까?
철우도, 반선도 그랬던 것일까?
그는 문득 비불의 손가락이 벽면의 한곳을 가리키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거기에는 깨알 같은 작은 글씨들이 가득 새겨져 있었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거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마모되어 있었지만 진자앙은 그것을 읽는 데 거의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금강백팔로연혼지보(金剛百八路練魂之步)라고 커다란 표제가 달려 있는 그 밑에는 금강칠십삼로(金剛七十三路)부터 금강백팔로(金剛百八路)까지의 제목만 나열되어 있고 내용은 전부 공란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텅 빈 공간을 쳐다보며 진자앙의 마음속도 같이 비어 버리는 듯했다. 무엇인가가 거기 있을 거라 믿고 온갖 고난을 겪으며 간신히 도달한 길의 끝에는 비어 버린 공간만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씁쓸한 미소를 짓고 돌아서서 이제는 시체가 되어 버린 두 사람, 비불과 철우를 향해 절을 했다.
“애써 온 곳에 아무것도 없지만 제자는 만족합니다. 이 길을 걷지 않았으면 제자는 그저 바보 금강두일 뿐이었겠지요. 지금도 저는 금강두이지만 적어도 바보는 아니잖습니까. 길 끝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소림의 대보 선사는 아무래도 믿어지지 않는 듯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사 시주, 진정으로 하는 말씀이시겠지요? 지금 기권을 하면 승리는 이 자리에 나오지도 않은 진 시주에게 돌아가는 것이오. 그것을 원하시오?”
사문기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그리고는 더 이상의 말은 필요없다는 듯 비무대 아래로 걸어 내려갔다.
어전시합 본선 사흘째, 시간이 되도록 나오지 않은 진자앙의 실격이 눈앞에 보이는 순간에 사문기가 기권을 함으로써 나오지도 않은 진자앙이 마지막 대결에 나설 자격을 갖게 되었다.
사문기는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걸어 나오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의 눈앞에 학성 사가장의 장주, 그의 아버지 사방득이 서 있었다.
사문기는 그 자리에 엎드려 절을 했다.
“불초 자식을 용서해 주십시오!”
사방득이 그 손을 잡아 일으켰다.
“아니다! 잘했다! 여태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그 고통을 참느라고 정말 수고했지만 나는 그보다 오늘 네가 스승의 은혜를 잊지 않고 스스로를 희생한 것이 더욱 자랑스럽구나!”
“그렇게 된 것이었소?”
진삼산이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을 하고 옆에 나타났다. 진자룡도, 고대랑도, 그리고 눈물이 글썽한 진청아도 거기 있었다.
“우리 광동 진가장, 나 광마 진삼산이 고육계(苦肉計)에 항장지계(降將之計)까지 써야 된다고 판단한 것이 바로 사 장주였소?”
사방득이 깊이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진 장주! 적은 깊이 감추어져 있고, 우리는 백일하에 드러나 있으니 그런 하책(下策)이라도 쓰지 않고는 어쩔 수 없다고 소제가 판단했었소이다.”
진삼산이 사방득의 손을 꽉 움켜잡았다. 그의 손은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분노 때문이 아니라 감동 때문이었다.
“그걸 책망하자는 것이 아니오! 내가, 이 진삼산이 사형에게 빚진 것이 너무 많은 듯해서 부끄러워 이러하오! 제자가 다섯이나 있었는데 결국 기아 하나만이 진짜구려!”
진자룡이 문득 사문기를 향해 말했다.
“그래도 기권할 필요까지는 없었을 것을……! 흔치 않은 기회였을 텐데……? 자앙이 나가서 우승한다는 보장도 없고. 오늘 나오지 않았는데 내일은 나오겠느냐?”
사문기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생각해 두었던 일이고, 전적으로 혼자서 결정한 일입니다. 진형에게서 진가곤을 가져 오는 대가가 이 정도라면 저는 헐값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진자룡이 미소를 지었다.
“내가 네게 의해서 값이 올라가는 셈인가……? 허허!”
그는 가볍게 웃고는 비무대로 시선을 돌렸다.
“내일은 자앙이 나올 수 있을까? 나온다 해도 이길 수는 있을까?”
손자가 원인도 모르는 행방불명이 되었는데도 한가롭게 읊조리듯 말하던 그의 신색이 갑자기 굳었다. 비무대 위에서는 아미 공심과 가휘섭이 최종전에 나갈 승자를 결정하기 위해 대결을 벌이고 있었는데 가휘섭의 눈과 그의 눈이 마주쳤던 것이다. 단 한번 보았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영리충……!”
“분명 그가 영리충이지?”
황사 매요신이 오늘 처음으로 단상에 나와 앉아 있다가 매불염에게 말했다. 매불염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제의 가휘섭은 그냥 가휘섭이었지만 지금의 가휘섭은 분명 영리충이에요. 제가 가휘섭을 가까이 하면서 관찰한 것과 지금의 그와는 너무 달라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게 사실이겠지. 네 눈을 누가 속이랴!”
그는 단상 위의 가휘섭을 유심히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사람의 욕심이란 끝이 없는 것이야. 천하제일의 기공을 익혀 장생을 보장받고, 주안과를 먹어 불로까지 하는 데다 천하제일의 세력까지 손에 거머쥐었으면서도 이제 부끄러운 이름과 얼굴을 버리고 제대로 된 얼굴을 갖기를 원한단 말인가? 그래 봤자 어차피 남의 인생인 것을……”
옆에 앉아 있던 대보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빈승은 아직도 믿을 수 없습니다. 왕년의 영웅십자도 혁련휘도가 영리충이라니……! 인심은 세월 따라 변한다지만 어떻게 대 영웅이 대 색마가 될 수도 있는 것일까요?”
맹방평의 추리는 맞았다. 영리충이 바로 혁련휘도요, 혁련휘도가 바로 영리충이었던 것이다.
당년에 중원이 중원삼흉의 공포에 떨고 있을 때 갓 강호출두를 한 혁련세가의 소가주 혁련휘도는 삼흉을 잡아 죽이는 것으로 이름을 떨치고자 했다. 결국 성공은 했지만 마지막 옥면수라와의 결에서 얼굴에 십 자의 큰 칼자국이 생기고 내장이 거의 파열되는 치명상을 입고 집으로 실려 가게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죽었다는 소문이 강호에 돌았고, 강호인들은 그의 칭호에‘영웅’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 주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그런데 사실은 그는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숨긴 것은 그를 살리는 데 강호무림인들이 알면 안 되는 방법, 즉 채음보양술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그 사도의 치료술을 통해 몸이 나은 혁련휘도가 색공에 깊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혁련휘도는 색공에 빠져 여인의 숲에 탐닉하는 그를 제지하고자 한 가문의 굴레를 벗어 던지고 얼굴을 변용한 채 강호를 떠돌았다. 그것이 영리충의 탄생이었다.
한편으로 운리무 또한 혁련세가의 인물이었다. 혁련휘도를 고치기 위해 무수히 사들인 영약과 여인들 때문에 탕진한 주인의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전궁을 들고 자객의 길로 나갔으니 혁련휘도 한 사람으로 인해 두 명의 거마가 탄생한 셈이었다.
무당의 육수정 진인이 말을 거들었다.
“그 운리무를 부추긴 것이 양양 제갈가의 전전대 가주였고요!”
매요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등천비룡문의 탄생과 영리충에 얽힌 모든 비사의 주인공은 혁련세가와 제갈세가에 귀착되는 것이지요. 다행히 지금 혁련천조가 마음을 고쳐먹고 제갈사도를 숙청했을 뿐 아니라 등천비룡문마저 해체하겠다고 했으니 모든 일은 끝난 것이오. 저기 저 영리충만 제거하면……!
대보가 혀를 찼다.
“혁련 가주도 고심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할아버지가 영리충이고 보면 말을 따를 수도, 안 따를 수도 없었겠지요.”
“어쨌든 일은 반이 해결된 셈이고, 거기에는 팔대세가의 힘이 컸소. 특히 당문과 서문가는 하기 싫은 일일 텐데도 내 부탁 때문에 억지로 허리를 굽혔었지요.”
잠자코 듣고 있던 삼황야가 매요신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물론 황사께서 말씀하시는 대로 여러 사람이 활약을 했기 때문에 일이 해결을 바라볼 수 있었지만, 이 모든 것이 황사의 신묘한 계략이 아니었으면 어찌 가능했겠소? 강호가 어지럽고 백성이 도탄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려는 위기를 황사 덕택에 바로잡게 되었으니 나도 황상께 얼굴이 서게 되었소!”
“삼황야께서야말로 오해를 사서 그 이름이 진흙탕에 뒹구는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고 직접 나서서 강호 분란의 소지를 제거하셨으니 그야말로 주공(周公)의 공을 능가하실 것입니다.”
일은 그렇게 진행되고, 그렇게 매듭지어진 것이었다. 어린 조카 황제의 주변을 정리하고자 가면을 쓰고 칼을 든 삼황야, 그를 돕기 위해 영리충을 끌어들이고 자신의 힘과 영리충의 욕심을 이용해 팔대세가를 등천비룡문으로 묶은 황사, 삼황야와 황사의 의도를 야심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세력 결성과 확대에 이용하려 한 영리충. 이러한 제반요소가 작용하여 결성된 것이 등천비룡문이었고, 그것은 곧 어지러운 무림세력들을 정리하는 작업에 이용되었던 것이다.
거기 맹방평의 중원행은 생각지도 않던 행운이었다. 가장 껄끄러운 상대인 운리무, 쾌여풍, 급여화가 그의 손에 처단되지 않았던가.
그들은 맹방평을 암중으로 후원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제 모든 일이 끝나고, 모든 것이 얻어졌다고 각자가 믿게 되었을 때, 영리충이 얻은 것은 영리충도 모르는 사이에 부스러져 버리고 만다. 그도 모르는 사이에 등천비룡문은 해체되고, 최후의 승자는 삼황야와 황사가 되는 것이다.
승리의 주인공, 삼황야가 대보를 향해 손을 저었다.
“그런 말로 공연히 사람 얼굴에 금칠하지 마시오. 대사와 진인께서야말로 청정도량(淸淨道場)을 벗어나 피비린내 자욱한 곳에 와 구경하게 했으니 제 죄가 크고 두 분의 공이 막대하다고 아니할 수 없소이다!”
매불염이 그때 말했다.
“소녀가 소견이 좁사오나 아직 일은 끝나지 않은 줄로 아룁니다. 원흉은 아직도 건재하고, 만약 저 흉적이 이번 시합에서 우승이라도 하면 잡아 죽이기가 적잖이 곤란해질 것입니다. 그게 흉적이 노리는 바이기도 하겠구요. 그는 아마도 이번 시합에서 우승한 위광을 뒤에 업고 결국에는 등천비룡문의 차기 문주가 되려는 속셈이겠지요. 그땐 가휘섭의 이름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칠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영리충이 아니라 가휘섭으로!”
매요신과 대보, 육수정이 그 말에 근심 어린 빛으로 비무대를 바라보았다.
가휘섭이 아미 공심을 간단히 이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시간을 끌며 겨우 이긴 것처럼 연극을 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눈에 분명히 들어왔다.
대보가 중얼거렸다.
“과연 저 괴물을 누가 이길 수 있을까요?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젊어지는 저 괴물을.”
육수정이 그 말을 받았다.
“황사 어른이시라면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매요신이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늙었소. 관에 들어가지 않고 여기 나와 앉아 있는 것만 해도 스스로 믿어지지 않을 정도요. 저기 관람석에 있는 천기공이 나선다면 몰라도!”
천기공 진자룡은 이때 의외의 손님을 맞고 있었다.
중자릉, 그리고 그가 억지로 끌고 오다시피 한 소삼중과 유소림이었다.
“여기 다 모였군! 아니 문제의 두 사람만 빼고……! 애들은 어디 갔지?”
고대랑은 이를 갈고, 진삼산은 인상을 썼다. 그러나 진자룡은 희미하게 웃으며 중자릉을 달랬다.
“이 사람아 차근차근 얘기하세! 뭐가 다 모였고, 뭐가 문제란 말인가?”
중자릉은 눈을 때굴때굴 굴려 가며 사람들을 보았다.
“아니, 그럼 아직도 모르고 있었단 말인가?”
물론 아무도 영문을 모르고 있었다.
“이상하군! 자앙이 와서 자기와 바뀌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아이가 저기 저 단상에 있는 황사의 양녀라는 얘길 않던가? 그리고 두 아이 중 하나의 아버지가 여기 소 대협이라는 것도?”
번개가 그들이 선 자리 한가운데에 떨어졌어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대랑은 거품을 뿜으며 쓰러졌고, 소삼중의 검은 얼굴도 충격 때문에 하얗게 바래져 버렸다. 진자룡은 짐작한 바가 있었기 때문에 아무렇지도 않았고, 진삼산은 자기가 방금 무슨 소릴 들었는지 이해를 못 해 눈만 굴리고 있었다.
4
폭음이 울리고, 관중들의 함성이 하늘로 치솟았다. 비무대 위에서는 아미 공심이 무릎을 꿇고 가휘섭은 그와 반대로 우뚝 서서 손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태양이 그의 뒤에서 비쳐 사실 이상으로 그를 빛나게 하고 있었다.
가휘섭이 단상을 향해 공수하며 말했다.
“공심 사태께서 불초 소생에게 양보하셔서 다행히 이겼습니다. 소생은 이제 다음 결승전을 굳이 내일을 기다릴 것 없이 바로 시작했으면 하는데 어떻습니까?”
단상 위에 앉은 사람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보가 일어나 말했다.
“이미 정해진 시간이고, 또 가 시주께서는 한판 격전을 벌이느라 피곤하실 테니 예정대로 진행함이 어떠하오?”
가휘섭은 고개를 저었다.
“소생이 성질이 급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 그것을 재촉하여 그러는 것입니다. 오늘 진자앙 진 당주는 참석하지 않았지요. 규정 대로라면 당연히 실격입니다만 사문기 사 호법이 양보하여 실격을 막았습니다. 이 편법을 비난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소생은 내일도 그냥 나와 기다리다가 여기 계신 무림동도분들을 실망시켜 드릴까 저어하여 드리는 말씀입니다.”
중인들이 그 말에 환호성을 질렀다. 이왕 본 싸움이니 계속 이어 보는 것이 낫지 하루를 더 기다릴 필요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기분이기도 했기 때문이었다.
가휘섭이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키고 계속 말했다.
“괜찮다면 소생은 여기서 일각을 기다려 진 당주가 나올 기회를 주고 싶습니다. 첫 시합에 참석했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미 두 시진의 기회를 준 셈이니 제가 불공평한 것은 아니겠지요!”
매불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요신이 그 소매를 잡았다.
“너는 상대가 못 된다. 안타깝지만 지금은 그가 우승이라고 인정하는 수밖에 없구나! 자칫 그를 핍박한다는 인상을 주면 중인들이 분노할 것이고 그는 더욱 신망을 얻게 될 것이다. 일단 손발을 잘라 놓은 셈이니 나중 기회를 기다려 보자!”
매불염이 고개를 저었다.
“아버님! 우린 아직 그들의 손발을 완전히 자르지 못했음을 말씀드립니다. 등천비룡문이 해체되었다고 하지만 그건 수뇌부에서만 아는 이야기지, 각자의 조직은 건재하고, 그들은 가휘섭의 명에 따를 확률이 높지요. 비밀리에 감추어진 문주보다는 그들 중에 가장 유명한 향주를 따르는 것이 훨씬 구미에 맞을 테니까요. 지금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기회는 우리 손을 벗어날지도 모릅니다!”
깊은 고민에 빠져 있던 매요신의 눈이 그때 번뜩였다.
“우리에게도 아직 기회가 남아 있는 모양이다. 그가 나왔구나!”
무수한 구경꾼들을 헤치며 진자앙이 비무대를 향해 나오고 있었다. 영생뢰를 나오는 그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영생뢰의 출구에 가자 비무대로 안내하기 위해 북천사흉이 기다리고 있었다. 황사 매요신이 진자앙에게 만나게 해준다던 사람은 원래 영리충이 아니라 비불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금강불괴의 완성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진자앙은 비무대에 올라가 먼저 단상을 향해 공수했다.
“소생 진자앙 늦어서 죄송합니다. 원래 이 자리에 나와 가 향주와 겨루려 한다는 것은 양심을 찾아볼 수 없이 파렴치한 짓이겠지만 반드시 이루어야 할 소망이 있으니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단상을 향해 공수했다.
이번 인사는 특히 매불염을 향한 것이었다. 그는 아직 매불염의 마음과 그녀가 가휘섭에게 접근한 이유를 모르고 있었다.
그는 매불염을 바라보며 말했다.
“염정! 내가 이러는 것을 어떻게 생각할지는 모르겠소. 하지만 난 당신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도저히 그냥 흘려 보낼 수 없소. 물론 내가 이긴다고 꼭 당신이 나와 혼인해야 하는 것은 아니오. 나는 단지 내 마음을 보이고 싶을 뿐이오. 당신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그는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붉어진 얼굴을 돌리고 가휘섭을 보았다.
“시작합시다!”
가휘섭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더니 피식 웃었다. 그 순간 진자앙의 귓속으로 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젊다는 건 좋은 거군, 애송이! 원하지도, 생각지도 않던 일이지만 염정을 두고 두 번이나 너 같은 어린애와 싸우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네 뜻대로 되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만 아쉽게도 기회가 좋지 않구나! 저승에 가서라도 날 원망하지 말아라!”
진자앙의 안색이 변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을 그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설마 그가 여기 서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의 귓속에 다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바보! 난 당신이 우승을 하든 못 하든 이미 당신 것이에요. 예전에 당신이 단룡비를 내게 준 그 순간부터! 가휘섭에게는 알아 낼 것이 있어서 접근했던 것이고, 지금 앞에 있는 사람은 영리충이니 당신이 처리해요! 그 손에 오히려 죽기라도 한다면 용서치 않겠어요. 저승까지라도 따라가 혼을 내줄 테니까!”
진자앙의 얼굴이 우는 듯 웃는 듯 묘하게 변했다. 그의 인생에 최대의 적을 앞에 두고, 이제 죽을지 살지도 모르는 생사의 격전을 벌이려는 그 찰나에 그가 가장 사랑하는 한 사람의 고백을 들은 것이다.
그는 머리를 흔들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 그는 죽을 수 없는 것이다. 그 하나의 목숨은 이제 그 하나의 목숨만이 아니게 되어 버렸다.
그는 죽어도 좋지만 그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어찌 죽일 수 있을 것인가!
진자앙은 영리충의 장력을 가슴으로 맞는 동시에 자신의 주먹을 뻗어 뇌정추를 내지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제 27 장 금강탁(金剛鐸)은 금강신(金剛身)을 깨고
광마는 노호를 누르다.
콰앙`─`!
진자앙은 누구와 맞서 싸워 본 이래 처음으로 뒤로 물러서야 했다. 그것도 세 걸음씩이나.
‘영리충은……?’
영리충은 끄덕도 없었다. 가슴팍의 타버린 옷자락을 보면 분명 뇌정추가 격중되었을 텐데도 전혀 타격을 받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진자앙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내어 말했다.
“금강불괴?”
영리충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진자앙의 귓가로 다시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금강불괴가 너희 금강당만의 전유물인 줄 아느냐? 나는 이미 오래 전에 그 경지에 다다랐더니라! 꿈에도 그리던 것을 봤으면 그만 죽어라!”
영리충의 손에서 둥근 공 같은 것이 형성되더니 진자앙을 향해 날아 왔다. 이기생형의 절정기공이었다.
진자앙은 숨을 멈추고 진기는 단전에 모아 둔 채 그 자리에 버티고 섰다.
따앙`─`!
진자앙의 가슴팍에서 빛이 일그러지는 듯한 광경이 순간적으로 보이더니 장내를 흔드는 충격이 사방으로 퍼졌다. 중인들은 귀를 막으며 괴로워해야 했다. 소리가 커서가 아니라 공기가 순간적으로 각자의 귀를 때리는 듯한 충격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구경은 구경, 중인들은 눈을 두리번거리며 비무대 위에서 진자앙의 시체를 찾으려고 했다. 저런 가공할 위력의 강기에 얻어맞으면 누군들 살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진자앙의 시체는 없었다. 대신 온전한 진자앙만이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철탑처럼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는 가휘섭, 영리충이 놀라 외쳤다.
“금강불괴?”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모르겠소!”
그는 말과 함께 두 손을 모아 쥐었다가 앞으로 내밀었다.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갑자기 뇌성이 터져 나와 공기를 찢어 발겼다.
콰아앙`─`!
뇌공 원굉도가 시전해 보였던 자오뇌정추가 제 위력을 발휘되며 날아가 그대로 영리충을 두들겼다.
영리충은 휘청 뒤로 밀릴 듯하다가 다시 중심을 잡고 섰다. 그와 동시에 그의 손이 두 배로 길어져서 진자앙의 가슴팍을 때렸다.
밀종대수인(密宗大手印)에 흑심투골장의 침투경을 응용한 공격이었다.
팍`─`!
작은 소리가 나며 진자앙의 가슴팍에 손바닥 자국이 생겼다.
그러나 이내 사라져 버렸다. 최악의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살인적인 공격이 진자앙에게는 벌레가 문 것보다도 효과가 없었다.
진자앙이 다시 일격을 가했다. 이미 소용없음이 드러난, 그러나 그것 외에는 달리 아는 것이 없는 유일한 공격수인 자오뇌정추였다.
콰아아앙`─`!
두 사람은 상대의 공격을 피할 마음이 전혀 없는지 그대로 꼿꼿이 버티고 선 채 서로 일장씩을 교환했다. 그 하나하나가 동장철벽이라도 무너뜨릴 수 있는 강력한 장공이라는 것도 같았고, 서로 상대의 강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도 똑같았다.
유일하게 다른 것이라면 진자앙이 자오뇌정추만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데 반해 영리충, 가휘섭은 매번 다른 기공들을 사용한다는 것만이 달랐다. 무림에 존재하는 악랄하고 가공할 위력의 장공들이 그의 손에서 이 순간 모두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았다.
연신 폭음이 울리고 충격파가 공기를 갈랐다.
폭우가 몰아치는 밤, 연속적으로 대지를 두들겨대는 뇌전과 우레처럼 하늘과 땅을 가를 듯한 기공강기들이 비무대 위에서 오가고 있었다.
중인들은 그 빛에 눈을 감고, 그 소리에 귀를 막으면서 다리를 떨고 있었다. 이렇게 처절하고 또 이렇게 격렬한 싸움은 그들의 생애에 본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다시 보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공포에 질려 있으면서도 도망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비무대 위의 두 사람은 이미 갈기갈기 찢겨진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그들의 금강신(金剛身)은 아직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이대로 수십, 수백 장이라도 더 때려 낼 수 있을 것 같은 그때에 진자앙의 눈빛이 번뜩였다. 가휘섭의 얼굴이 한꺼풀 벗겨지는 듯하더니 십 자의 칼자국이 전면에 그어진 또 하나의 얼굴이 나타났다.
“앗!”
“아니……!”
놀란 중인들 사이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드러난 영리충의 얼굴은 맹방평이 묘사해 준 한 사람의 용모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굵은 뱀이 기어간 자국처럼 또렷이 얼굴에 그어진 네 줄기 흉터. 원래는 영준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천하의 추물이 된 영리충, 영웅십자도 혁련휘도의 본색이었다.
“영웅십자도 혁련휘도! 과연 당신이었군!”
진자앙이 소리친 순간, 그의 가슴팍에 응축된 장력이 터졌고, 진자앙은 피를 뿌리면서 뒤로 날려가 뒹굴었다.
이 순간, 진자앙의 머릿속을 사로잡은 것은 ‘입을 벌리면 신기가 흐트러진다’는 산노인 반선의 말뿐이었다.
‘바보같이!’
쓰러진 그를 향해 영리충의 장공이 연속적으로 밀려와 두들겼다. 그는 정체가 발각된 것을 알고 광분 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대로 진자앙을 두들겨 죽이지 못한다면 납작하게 눌러 놓기라도 할 태세였다.
매불염이 하얗게 질려 일어서고, 진삼산과 소삼중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자룡은 그들을 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에 어두운 그늘이 깔렸다. 사태는 결코 밝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지 않았다.
그때 기적이 일어났다.
바닥에 뒹굴고 있던 진자앙의 손에서 밝은 빛이 번뜩이는가 하더니 한 순간 모든 것이 멈추고, 영리충의 등 뒤로 붉은 선혈이 폭풍같이 뿜어져 나왔다.
모두가 놀랐다. 거기에는 진자앙도 예외가 아니었다.
방금 자신이 바닥에서 잡아 던진 것이 무엇인지 그 자신도 몰랐다.
“너……, 너……! 이 애숭이가……!”
영리충이 가슴을 쥐어뜯었다. 가슴팍에 난 구멍을 파고 들던 손에, 피에 물든 한 물체가 잡혀 나왔다. 진자앙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뇌전도, 혹은 금강저라 불리는 그것, 벽력당의 것으로 짐작되는 양날의 창이었다. 어느새 그의 가슴팍에서 빠져 나와 바닥에 뒹굴고 있었던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잡아 던진 것이다.
영리충이 손을 들었다. 그는 뇌전도를 들어 진자앙에게 던지려는 듯 손을 떨더니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금강탁(金剛鐸) 아냐? 저게 어떻게 자앙의 손에 들어갔지?”
중자릉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자룡이 그에게 물었다.
“저게 뭔지 자넨 아나?”
“금강탁이잖아. 서유기에 나오지, 왜…… 손오공을 잡으려고 태상노군이 던졌다는 무기 말야. 저게 바로 그건 아니겠지만 포달랍궁에서 그것을 보관하고 있다는 전설은 있었지. 근데 저게 어떻게 자앙의 손에 들어간 거야?”
탁(鐸)은 목탁의 탁이라는 뜻도 있지만 ‘양날이 달린 창’이라는 뜻도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양날의 창이 금강신을 이루었다 믿고 있던 영리충의 가슴을 꿰뚫어 버린 것이다.
진자앙은 쓰러져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는 영리충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당신도 결국 금강불괴는 아니었군요. 내가 아닌 것처럼. 어쩌면 금강불괴는 영원히 완성할 수 없는 목표인지도 모르겠소!”
진자앙은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이제 그것은 그의 목표가 아니었다. 삼선과 스승의 예에서 배웠듯이 인간을 버리고, 정마저 끊어야 되는 것이 금강불괴라면 그는 차라리 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매불염, 염정이 그의 옆에 있는 한 그는 인간이기를 포기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지금 남의 눈도 의식하지 않고 그의 품에 안겨 오는 그녀가 있는 한은……!
진자앙과 매불염의 혼례식은 삼황야가 지켜보는 가운데 장락궁에서 열렸다.
매요신이 투덜거린 대로 납채(納彩:혼례 예단)도 없고, 문명(問名:신랑이 신부측에 사람을 보내 신부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물어보는 것)도 않고, 납길(納吉:신랑측에서 신부측에게 혼례 날짜를 알리는 것)도 생략하고, 납징(納徵:신랑이 신부에게 주는 갖가지 선물)은 당장 구해지는 것으로 대충 하고, 청기(請期:신랑이 신부 측에 혼례 날짜를 알리고 허락을 받는 일)는 아예 생각도 않은 혼례식이었다.
그래도 마지막에 친영(親迎: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이하여 혼례를 거행하는 일)을 하는 것을 보면 신부가 필요하긴 한 모양이라고 투덜거렸지만 그 하나를 제외하곤 격식 때문에 문제를 삼는 사람은 없었고, 실은 매요신 자신도 즐거워 어찌할 바를 모르는 가운데 한 소리였다.
두 사람은 소삼중과 진삼산 둘 다를 부모로 생각하고 광동 진가장에서 신혼 살림을 꾸몄다. 누가 누구의 자식인지를 알아 낼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래서 모든 일은 제자리를 찾고, 모두가 행복해진 것 같았지만 한 사람은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떨 땐 얘가 내 애 같고 다른 땐 얘가 내 애 같으니 갈피를 못 잡겠네. 여보, 당신은 누가 진짜 우리 애인 것 같소?”
고대랑은 그 질문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좋은 일을 치르는 김에 간신히 눌러 참고 있던 진삼산의 분노가 이 순간에 대폭발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는 고대랑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채를 휘감아 땅에 내동댕이 치며 소리쳤다.
“이놈의 여편네야! 다 네가 초래한 일인데 이제 와서 그걸 따져 뭘 하겠다는 거야? 애초에 용단 일만 없었으면 이런 일이 일어나기나 했겠어? 네가 제대로 말만 했으면 자앙이가 어찌 이십 년이나 구박을 받고, 불염이가 강호를 떠돌았겠느냐구! 그러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이년이 하는 말이라고는…!”
하는 말마다 옳은 말이니 천하의 노호 고대랑도 오늘은 광마에게 꼼짝없이 두들겨 맞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진삼산이 몽둥이를 집어 드는 것을 본 사람은 몇 있었지만 고대랑이 맞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비명이 울리고 집기가 깨어졌다고는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비명인지 아는 사람도 없었다.
끝.
첫댓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