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장 쌍극천효(雙極天梟)의 최후(最後)
쐐애애! 스스! 녹림옥봉은 궁장여인에 의하여 곧장 높직한 산봉 위로 이끌려 올라갔다. 한데,
(저분…)
산봉 위를 바라보던 진예빈의 안색이 일변했다. 산봉 위에는 한 명의 황삼문사가 등을 돌리고 서 있었다.
한 자루 방천화극을 짚은 채 표표 히 산봉 위에 선 청년문사, 그의 뒷모습을 본 진예빈의 두 눈이 뿌옇게 적셔졌다.
황삼의 청년문사가 누구인지 알아본 때문이다.
스스스슥! 그때 궁장미인이 진예빈과 함께 청년의 뒤로 내려섰다.
{지존(至尊)!}
지면에 내려서자마자 진예빈은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녀의 봉목이 그렁그렁해지다가 주르르 눈물이 흘러 내렸다.
녹림옥봉 진예빈으로부터 지존이라 불릴 수 있는 단 한 명, 바로 능천한 외에 또 누가 있겠는가?
{예빈…}
능천한은 천천히 돌아섰다. 몸을 돌린 능천한은 온화한 시선으로 진예빈을 내려다보았다. 그런 능천한의 모습은 한없이 부드러웠고 그 부드러움 속에는 그 끝을 알 수 없는 웅장한 기도가 서려 있었다.
(하늘이 되셨다.)
진예빈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감돌았다. 마음 속의 정랑이 하늘같이 되었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흠… 많이 여위었구나 예빈!}
능천한이 부드러운 어조로 진예빈에게 말했다. 능천한의 관심있는 말을 들은 진예빈은 날아갈 듯한 기분이 되었다.
{지존… 어찌 몇 달씩이나 연락조차 없으셨사옵니까? 여러 언니들의 걱정이 태산같았사옵니다.}
진예빈이 눈가를 적시며 말했다.
{지체해야만 했던 일이 있었다. 그래 벽라누님 등은 어찌 지내시느냐?}
능천한의 물음에 진예빈은 함초롬히 미소를 지었다.
{심려들이 크셨으나 모두 무고하세요. 다만… 벽라언니에게…} 진예빈은 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끝을 흐렸다.
능천한은 흠칫했다.
{벽라누님에게 무슨 일이 있었느냐?}
능천한의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그의 표정에는 진한 관심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궁장미인, 즉 환몽천후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우리들 중 상공의 가장 깊은 사랑을 받는 사람은 역시 벽라(碧羅)동생이야.)
환몽천후뿐만이 아니고 진예빈의 표정에도 일말의 부러운 기색이 떠올랐다. 진예빈은 고혹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생각해보니… 천첩의 미리 말씀드리면 벽라언니에게 야단을 맞을 거예요. 지존께서 직접 자허천부(紫虛天府)로 가셔서 벽라언니를 만나보시와요.} {으음!}
진예빈의 미온한 대답에 능천한은 속이 타들어갔다.
(누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이미 신인지경(神c難休?에 이를 금벽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다. 금벽라라는 한 여인의 신상에 일어났을 일 때문에 천인(天人)의 능력을 지닌 그가 안절부절 못하는 것이었다.
{안 되겠군! 지금 당장 자부로 가보아야지!}
능천한이 중얼거릴 때였다.
우어어억! 돌연 동천으로부터 거창한 봉황음(鳳凰音)이 터졌다.
{금봉(金鳳)!}
능천한의 안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동천일각(東天一角). 그곳에 한 점이 나타나더니 급속도로 그 형태가 커져왔다. 그것은 바로 구천금봉황(九天金鳳凰)이었다.
우워억!
구천금봉황은 멀리서도 주인을 알아보고 기뻐 크게 봉황음을 내었다.
{금봉! 오너라!}
쉬아아악! 능천한은 벼락같이 외치며 지면을 박차고 허공으로 치솟았다. {무엇을 하시려고!}
그 모습에 진예빈은 깜짝 놀랐다. 구천금봉황은 천 수백 장 밖에 있는 때문이다.
{두고 보아요!}
그러나 환몽천후가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때,
{우우우!}
능천한의 입에서 웅장한 창룡후가 터져 나왔다.
쉬이이잉!
그리고 단번에 삼백 장을 치솟는 능천한은 허공에서 몸을 휘둘렀으며, 다음 순간,
스스스스슥!
그의 신형은 일천 장을 날아 곧바로 구천금봉황의 등 위로 날아 내렸다. {저… 저럴 수가… 어찌 인간의 몸으로 날을 수가…}
진에빈이 입을 딱 벌렸다. 이에 환몽천후가 조용히 말했다.
{저 분은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신 분이에요!}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셨다고요?}
진예빈의 물음에 환몽천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반인반신(半人半神)이라 해야 옳겠지…}
중얼거리는 환몽천후의 시선은 저 멀리로 사라지는 구천금봉황(九天金鳳凰)의 뒷모습을 따르고 있었다. 그런 환몽천후의 봉목이 다소 쓸쓸하게 변했다.
(지난 몇 달을 모셨어도… 내겐 무정하기만 하셨던 분이 벽라동생의 소식에 저토록 애가 타시다니…!)
환몽천후는 진예빈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벽라동생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것이지?}
그녀의 물음에 진예빈은 미소를 지었다.
{벽라언니는 배가 이만해요?}
진예빈은 두 손으로 아랫배를 둥글게 해보였다.
{벽라동생이 상공의 아기를…}
환몽천후도 깜짝 놀랐다.
{호호! 그래요. 이미 육 개월째예요.}
환몽천후는 망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로는 내가 가장 연장이나… 결국 정실(定室)의 자리는 벽라에게 양보를 해야겠구나.)
그녀의 시선에 고소가 떠올랐다. 어찌되었든 아무리 친한 여인들이라 해도 한 남자의 사랑을 나누어 갖게 된다면 양보고 무엇이고 없는 법이다.
{상공!}
구천금봉황의 등 위로 날아 들어간 능천한에게 뭉클한 동체가 안겨왔다. 그렁그렁한 커다란 눈망울, 터질 듯이 무르익은 동체. 그녀는 바로 천검미후 나설련이었다.
{설련(雪蓮)!}
능천한은 미소를 지으며 나설련의 세류요를 꼬옥 끌어안았다.
{천마총에서 변을 당하셨다는 소문에 설련이 얼마나 울었는지 아시옵니까?}
나설련은 능천한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천향지기(天香之氣)가 사그러든 이후 그녀는 마치 어린 소녀같이 순진한 성격으로 변해 있었다.
{설련… 미안!}
능천한은 나설련의 풍만한 둔부를 다독여 주었다.
우워어억!
오랜만에 주인을 태운 구천금봉황은 거창한 봉황음을 토하며 남쪽으로 날아갔다.
약왕곡의 깊은 곳에 자리한 자허천부(紫虛天府)의 제 구 층이 최근 규방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한 명의 아랫배가 불룩한 미인이 한시도 남천(南天)에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그 구층에 서 기거하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구 층의 창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다소 여윈 모습의 절세미소부(絶世美少婦)가 난간을 짚고 서서 남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오시나? 벌써 봄이거늘…
그 분은 아직도 아니 오시는구나!}
미소부는 처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야위어서 더욱 크고 아름답게 보이는 미소부의 두 눈이 그렁그렁 물기로 가득차 있었다.
{아가… 네 아빠는 엄마와 네가 보고 싶지도 않으신 모양인가 보구나!}
미소부는 자신의 하복부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녀는 바로 철혈서시(廣陽尊后) 금벽라였다. 그녀는 능천한이 모르는 사이에 또 하나의 능천한을 자기 속에 기르고 있었던 것이다.
{네 아빠가 오시기만 하면… 엄마는 강짜를 놓아줄 거란다. 다시는 엄마 손도 못 잡게 할 거야!}
금벽라는 아랫배를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녀는 이미 무림을 호령하던 여걸이 아니었다. 다만 이제 곧 큰 고통 후에 또 하나의 생명 을 열어놓을 어머니일 따름이다. 그때,
{언니…! 너무 서 있으면 아기에게 좋지 않아요.}
한 명의 차분한 미모의 여인이 다가왔다. 바로 천약관음 교옥진이었다. {자… 여기에 앉으세요.}
천약관은 금벽라를 안락의자에 앉혀주었다.
{언니, 오늘은 기분이 좋아보이시는군요!}
천약관음의 말에 금벽라는 미소로 답했다.
{그래 아기가 오늘따라 장난이 심하기는 하지만…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기분이야.}
{아마도 좋은 소식이 있으려는 모양이지요.}
천약관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였다.
우워어억!
돌연 자허천부의 상공에서 구천금봉황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설련동생이 벌써 돌아왔군요.}
{글쎄… 어쩐지 금봉의 기분이 좋은 듯하구나.}
두 여인이 중얼거렸다. 그 때였다.
스스스슥! 한 가닥 유령같은 인영이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누구… 어멋!}
발딱 일어나 교갈을 치려던 천약관음의 얼굴이 환하게 변했다. 나타난 인물, 그는 여인들이 너무도 애타게 그리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상…상공!}
금벽라도 깜짝 놀라 일어났다.
돌연 나타난 인물은 바로 능천한이었다.
{누… 누님…!}
능천한은 멍청한 표정으로 입을 딱 벌렸다. 그의 시선은 불룩하게 솟은 금벽라의 아랫배를 주시하고 있었다. 너무도 뜻밖의 일인지라 능천한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누님… 누님이 아기를…!}
{상공! 흐윽!}
금벽라는 눈물을 흘리며 능천한에게 달려들었다. 그제야 능천한의 안색이 뜻밖의 경사로 환하게 밝아졌다.
{누님! 하하! 고맙습니다!}
능천한은 안겨 든 금벽라를 반짝 안아들었다. 그리고 그는 금벽라의 입술을 덮어 누르며 열렬 한 입맞춤을 퍼부었다.
{음!}
능천한에게 입술을 탐닉하면서 금벽라는 능천한의 목에 팔을 걸고 매달렸다. 두 사람의 그런 열열한 정열에 천약관음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천약관음이 얼른 구층, 금벽라의 규방에서 나갔다.
{하하! 장하십니다!}
능천한은 껄껄 웃으며 금벽라를 안고 침상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금벽라를 침상에 누이고 그녀의 아랫배로 손을 집어넣었다.
{상…상공!}
금벽라는 발갛게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피하지는 않았다. 피하기는커녕, 그녀는 남편의 손길을 잡아 하복부로 가져갔다.
{보아요. 아기가… 막 잠에서 깨었어요. 아빠가 오신 줄 알고 있는 모양이에요!}
금벽라가 자랑과 사랑이 듬뿍 담긴 시선으로 능천한을 올려다보았다.
{장하십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능천한은 환하게 웃으며 금벽라의 하의를 벗겨 내렸다. 금벽라는 얼굴을 붉혔으나 능천한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너무도 오랫만에 접해보는 남편의 손길이었다. 이윽고 부드럽게 부푼 금벽라의 하복부가 드러났다.
{하하! 녀석이 발길질을 하는군!}
금벽라의 하복부에 귀을 갖다 댄 능천한은 신기하여 웃었다. 미약하나마 금벽라의 몸속에 또 하나의 자신이 숨을 쉬고 있는 것이다.
{벽라!}
능천한은 불타오르는 사랑의 감정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는 금벽라의 몸을 쓰다듬으며 그 녀의 귓볼에 뜨거운 숨결을 불어넣었다.
능천한의 손길 아래서 금벽라는 몸을 떨었다. 곧 뜨거운 사랑과 열정은 자허천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만들어갔다.
뜨거운 열풍, 그것은 평소와는 달리 아주 부드럽고도 길게 이어져 갔다. 마치 끝이 없을 듯이…!
{휴…!}
{음! 큰언니가 부러워…!}
그 자허천부로 여러 쌍의 눈길이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있었다.
천약관음(天藥觀音) 교옥진, 천헤선자(天慧仙子) 제갈영라, 유령신녀(幽靈神女), 홍예선희(紅霓仙姬) 등등의…,
자허소축(紫虛少築)의 대전(大殿).
{…!}
무거운 분위기가 대전 가득 흐르고 있었다. 대전의 상좌에는 능천한이 앉아 있다. 그는 자색의 장포를 걸치고 있는데 그의 등 뒤로 혼 돈대정신극(天皇大正神戟)을 받쳐든 환몽천후가 시립하고 있었다.
능천한의 우측에는 금벽라가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으며 능천한의 좌측에는 취존개와 광양대제가 배석하고 있었다.
장내에는 여러 명의 인물들이 더 있었다. 커다란 지도 앞에 서 있는 제갈영라가 있고 녹림대제(綠林大帝), 황금대공(黃金大公), 자부성수(紫府聖手), 대력천패(大力天覇) 등의 자부오공(紫府五公)이 있었다.
그 외에 거령패왕(巨靈覇王) 등의 패천팔걸과 천검미후(天劍美后) 나설련, 유령신녀(幽靈神女) 등의 능천한의 여인이 있었다.
문득 제영라가 입을 열었다.
{혈종문으로 침투한 녹림부(綠林府)의 제자에 의하면 혈종문은 이곳 기련산(祁蓮山) 지옥애 (地獄崖)에 그 총단이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사옵니다.] 그녀는 벽면에 걸린 지도를 가리켰다. 지도는 기련산 북방을 가로지르는 천인단애를 나타내고 있었다.
{기련산 지옥애…}
능천한은 중얼거렸다.
-기련산(祁蓮山) 지옥애(地獄崖).
그곳은 일전에 능천한이 읽은 패천자의 기록에도 나와 있던 지명이다. 즉, 이백 년 전 패천자(覇天子)와 제왕천신(帝王天神)이 혈마지존(血魔至尊)을 베어 넘긴 곳이 그곳이다.
(혈마지존! 그가 지옥애에 총단을 세웠다 함은… 그 자가 이백 년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이 그 안에 있음을 의미한다.)
능천한의 분석은 치밀했다. 실상 지옥애에 저주의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이 있었고, 그로 인하여 혈마지존은 과거의 천마(天魔) 이상이 될 수 있었다.
{지금 우리측의 힘과 혈종측의 힘을 비교하여 보오!}
능천한의 말에 제갈영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그동안 길러온 아군의 힘(力)입니다. 자부의 정화를 이용하여 기른 오천(五千)의 자령천위대(紫靈天衛隊)와 일백의 천병밀사(天兵密士)들이 있고…}
제갈영라는 혈종문도들과 싸울 수 있는 정파 쪽의 총력을 설명했다.
-자령천위대(紫靈天a賠?.
-천병밀사(天兵密士). 이들은 자부에서 나온 정예들로 모두 제갈영라가 길러낸 힘들이다. 백만의 자부문도에서 선발된 그들은 영약의 도움과 제갈영라의 훈련으로 최강자들이 되어 있다.
이들은 개개인의 힘이 결정일 뿐더러 더욱이 제갈영라의 탁월한 기문진학에 바탕을 둔 병진(兵陣)들을 익혀 십만의 적을 상대할 수 있다.
특히 천병밀사(天兵密士) 오백(五百)은 하나같이 병기보 천병일천좌에 드는 신병들을 지니고 있었다.
본래 자허천부에는 천병일천좌 중 삼백여 개밖에 없었다. 그런 것을 거액을 뿌려 이백여 종의 신병을 추가로 수집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정검신영대(正劍神影隊).
금벽라가 훈련시킨 정파의 후예들이다. 대부분이 혈종일문에 철천지한을 지녀 유사시 천인의 능력을 발휘할 인재들이다. 그 수는 삼천(三千).
-광양신무대(廣陽神武隊).
-녹림일천웅(綠林一千雄).
-만화밀살수(萬花密煞手).
-벽력단(霹靂檀)과 패천팔걸(覇天八傑).
-여황교(女皇敎) 일백화강시(一百化疆屍).
-유령궁(幽靈宮) 구유유령위(九幽幽靈衛).
그리고 능천한의 최근에 거둔 독종철혈대(毒宗鐵血隊) 등이 혈종문과 싸울 수 있는 정예들이다. 그 수는 대략 일만 오천 정도였다.
제갈영라는 말을 이었다.
{혈종문도들은 총 이 십만이고,… 그중 절정의 경지에 이른 자가 삼만에 이르며, 초절정의 거마(巨魔)들만도 일천 이상입니다.}
{객관적으로는… 우리측의 열세군.}
능천한이 담담히 말했다.
제갈영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사옵니다. 하수들은 차치하고라도 절정고수들 만으로도 저들의 반 푼에 채 못 미치는 힘입니다. 더욱이 그들 중에는 고금오대마종(古今五大魔宗)에 이르는 네 명의 가공스런 고수들이 있다고 알려졌습니다.}
{흠… 그들이 누구요?}
{혈종사마천종(血宗四魔天宗)이라고 아시는지요?}
능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소. 이백 년 전 혈마지존의 가장 강한 하수자들이 그들 아니오?} 제갈영라가 대답했다.
{맞아요. 한데 놀랍게도 그들이 살아있어요. 마치 혈마지존 같이 말예요!} {아…}
{그 자들… 혈종사마천종들이…!}
중인들의 안색이 변했다. 능천한 등 몇몇 사람들만이 조용할 뿐,
{지금 상태로는 그 자들이 가장 큰 장애예요. 그 자들은 천지십병(天地十兵)으로나 죽일 수 있는 거흉(巨兇)들인데…}
제갈영라는 능천한과 금벽라, 천검미후 나설련을 바라보았다. 그들만이 천지십병 중의 신병들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상공께서는 혈마지존을 상대하셔야 하므로 그 자들은 결국… 상대할 사람이 없어요. 벽라 언니도 몸이 무겁고…}
중인들은 막막한 느낌이 들어 침묵을 지켰다. 제갈영라는 그런 중인들을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한 가지 계획을 세웠어요.}
{계획?}
{…?}
중인들은 제갈영라를 주시했다.
{지금, 지옥애의 지옥뇌(地獄牢)라는 곳에는 황실의 태상존황과 태양신존 등이 감금되어 있어요.}
능천한이 제갈영라의 말을 막았다.
{그분들을 구출하여 혈종사마천종을 상대케 할 계획이라면 찬성이오. 그분들의 구출은 내가 맡겠소!}
{음!}
중인들은 무거운 시선으로 능천한을 바라보았다. 중인들 중에 능천한과 관계가 없는 사람이 없다. 자연히 그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다.
제갈영라가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지금으로서는… 달리 상공을 능가하는 분이 없으니…! 상공께서 힘을 써주세요.}
능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 마시오, 그보다는 전체적인 열세는 어찌 만회하겠소?}
능천한의 물음에 제갈영라는 가볍게 대답했다.
{천하는 넓어요. 혈종문은 천하를 지배하기 위해 전력의 육할을 천하에 뿌려 놓았어요. 따라서 혈종문 총단의 힘은 실상 전력의 사할에 미치는 정도이고…}
{흠, 그렇군. 그 정도라면 아군과 대등한 전력 이상은 못 될 것이고…}
능천한의 중얼거림에 제갈영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물론, 혈종문이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기습을 하는 것이 필요하긴 하지만… 게다가 또 다른 세 개의 세력이 혈종을 치려하고 있으니 그들만 끌어들인다면 압독적으로 우리가 우세해져요.}
{또 다른 변수가 있소?}
{네, 먼저 태양신존을 구하기 위해 변황 태양성부(太陽聖府)에서 일만(一萬)의 풍운철기대(風雲鐵騎隊)가 중원으로 들어왔어요. 그들의 인솔자는 사란공주와 요지의 문주 환밀후(歡密后)이니…}
제갈영라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사란과 환밀후라…}
능천한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녀들은 염려마세요. 같은 여인들끼리이니… 신첩이 회유하겠어요.}
{좋소, 그건 그렇고, 또 다른 두 세력은…}
{황실의 십만어기군과 흑룡천신(黑龍天神)의 흑룡궁(黑龍宮)이에요.}
{황실은 그렇다 치고… 흑룡천신(黑龍天神)은 또, 어쩌다가 혈종과…}
{상공께서는 흑룡천신이 혈종의 괴뢰가 되었던 것을 기억하시지요?}
{물론이오!}
제갈영라는 신중히 대답했다.
{아마도 흑룡천신은 혈마지존에게 큰 모욕을 당했을 거예요.}
{흠, 결국 설욕전이란 얘기군!}
능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본부 수하가 전한 바로는 흑룡천신은 그동안 한 가지 초절기(超絶技)를 연마해 왔다는 거예요.}
{초절기라…!}
{그건 내가 알지!}
게슴츠레한 눈으로 꾸벅꾸벅 졸던 취존개가 말했다. 지금 순간만은 그의 눈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흑도사상 최강자였던 천외묵룡존(天外墨龍尊)이 남긴 최후 초절기가 흑룡궁에 있네.}
-천외묵룡존(天外墨龍尊).
구백 년 전, 흑도에서 나와 천하제일(天下第一)의 본좌에까지 올랐던 절대무종(絶代武宗)이다. 그의 무공은 패도적이며 기이신랄함이 특징이었다. 취존개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묵룡쇄강전(墨龍碎剛箭)이라는 절기로 백만 근의 압력을 강전(剛箭)에 실어 내치는 것이지. 그 위력은 가히 경천동지할 정도이지만 오백 년 내공을 바탕으로 하며 그 수련이 지극히 혹독하여 누구도 완성할 사람은 없네!}
{음!}
{묵룡쇄강전(墨龍碎剛箭)이라…!}
중인들은 탄성을 발했다.
{헤헤! 묵룡쇄강전을 연성했다면 그 위력은 천지십병의 위력에 버금간다.} 취존개는 말을 마치자 다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제갈영라는 미소를 띄우며 취존개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흑룡천신의 회유는 어려울 것이 없어요. 문제는 황실의 십만어기군(十萬御祁君)이 문제예요. 힘을 합치는 것은 물론, 자칫 혈종문을 자극하여 우리의 기습마저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어요.}
능천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점은 염려하지 않아도 되오. 내가 황상께 서신을 올릴 터이니…!}
제갈영라가 미소를 지었다.
{상공께서는 황상과 태상존황과 친분이 있으니…! 가능할 것이에요.}
능천한은 그 말을 듣는지 말는지 지옥대의 지도에 시선을 던졌다.
능천한 뒤에 서 있는 환몽천후는 그런 능천한의 태도에 빙긋이 미소를 지었다.
(태상존황께서 아버님이심을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은 괜한 번거로움을 자초하시지 않으시려는 때문이시고…)
{음! 지옥애…}
능천한은 지옥애의 지형도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곳에 과연 어떤 비밀이 있는가? 혈마지존에 영생을 준 그 무엇이 있을 터인데…}
중얼거리면서 능천한은 문득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을 뇌리에 떠올렸다. -혈정극마갱(血精極魔坑). 사마(邪魔)가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그 마도의 이상향을…!
-기련산(祁蓮山)! 만리장성(萬里長城)을 넘어 변황(邊荒)과 중원(中原)을 가름하고 있는 대산(大山)이다.
그 거친 산역의 광활함은 인간으로 하여금 본능적인 두려움을 갖게 만든다. 그중에서도 특히 음 b?陰散)하여 인적(人蹟)을 거부하는 곳이 있다. 이름하여, 지옥애(地獄崖).
대지가 갑자기 뚝 끊어진 마치 지옥(地獄)의 입구같이 보이는 절지를 일컬음이다.
삼경 무렵, 음침한 암운(暗雲)이 야천(夜天)을 뒤덮고 있다. 암운에 가려 별빛 한 점 없이 음산함을 더 해주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한 줄기 황영(黃影)이 지옥애(地獄崖)의 석벽 위에 오연히 서 있다.
스스스! 야풍에 황포가 나부낀다. 형형한 안광으로 암흑을 꿰뚫고 있는 인물, 그는 지옥애의 칙칙한 어둠을 바라다보고 있었다.
능천한(陵天漢)! 지옥애를 굽어보는 것은 바로 그였다. 지옥애 주위로 많은 시선들이 있으나 누구도 능천한을 발견하지 못했다. 은신술도 은신술이 거니와 그의 일신에서 풍기는 기도가 흡사 거석(巨石)과 같기 때문이다. {흠…} 문득 능천한은 나직하게 헛기침을 했다.
스스스! 이어 능천한은 몸이 둥실 떠올라 지옥애 아래로 날아 내렸다. 끝이 보이지 않는 수백 장 깊이의 지옥애다. 그럼에도 능천한은 마치 무게 없는 깃털인 양 곡풍에 부대끼며 유유히 절애로 날아 내렸다.
지옥애의 한쪽은 폭 수십 마장의 광활한 분지다. 그 분지 가득히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고루거각들이 들어차 있었다.
(영라가 알려준 대로라면 지옥뇌(地獄牢)는 저 북쪽 끝의 석벽에 연하여 있다.)
스스스스!
능천한은 마치 날개가 달린 듯이 수 마장을 수평으로 날아나갔다. 누가 있어 이런 경공을 꿈이라도 꾸어 보았겠는가?
혼돈지기를 얻은 능천한에게만 볼 수 있는 가공할 경공절기다.
스스스! 능천한은 무인지경(無人之境)인 듯이 북쪽의 석벽 끝으로 내려섰다.
{저곳이군.} 뒷짐을 짚고 주위를 둘러보던 능천한은 한 쪽의 석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석벽 밑에 시커먼 철문이 붙어 있음이 보였다. 그 칙칙한 철문 위로 섬칫한 핏빛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지옥뇌(地獄牢). 생자불퇴(生者不退).>
{살아있는 자는 나오지 못한다?}
능천한은 중얼거리며 지옥뇌로 걸어갔다. 적지에 들어왔음에도 능천한의 태도는 너무도 한가하지 않은가? 능천한은 주위를 경계하지도 않은 듯이 보였다. 그렇다고 남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로 급히 서두르는 것도 아니었다. 마치 자기 집의 뒤뜰을 거닐 듯이 여유롭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상상도 못한다. 능천한의 이목이 십 리 안에서 나뭇잎 구르는 소리까지 주의하고 있음을…
문득, 화르르!
{흐흐… 네놈은 누구냐?}
허공에서 돌연 일인이 날아 내렸다.앞을 가로막는 자는 시뻘건 적염(赤苒)을 기른 노인(老人)이었다. 두 눈에서 뇌전 같은 시뻘건 안광이 쏟아지고, 곤두선 모발은 흡사 아치를 연상시키는 인상이다.
{흠… 그대가 적발마뇌신(赤髮魔雷神)인가?}
능천한은 담담한 어조로 말하며 적염의 노인을 바라보았다.
부르르! 갑자기 적염노인은 부르르 몸을 떨었다. 능천한의 눈을 대하는 순간 그 자신의 모든 의지가 그 눈빛에 사그러들고 만 것이다. 이것이 어떤 사술 같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극도로 발현된 정신력의 한 부분이며 묘용이었다.
{그대가 적발마뢰신인가를 묻고 있다.}
능천한이 오히려 막아선 적염노인에게 호통을 치는 형세였다.
-적발마뢰신(赤髮魔雷神). 근 삼갑자 전에 천하에서 사라진 마뢰문(魔雷門)의 마두다. 성격이 열화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면 무엇이든 부수어 버리는 흉성을 지녔다.
한데 적염노인… 그 자 보고 적발마뢰신이 아니냐고 능천한이 묻고 있는 것이다.
{그… 그렇소. 노부가 바로 적발마뢰신…}
적염노인이 더듬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 그가 바로 적발마뢰신이었다. 죽었어도 아주 오래 전에 죽어야할 대마두 적발마뢰신, 한데 막상 대답을 해놓고도 적발마뢰신은 자신이 왜 대답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다만 능천한의 기도가 행하지 않음을 용서치 않을 것 같기에 대답한 것이다.
{지옥뢰로… 앞장서라!}
능천한이 적발마뢰신을 향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예옛!} 적발마뢰신은 질겁을 하며 급히 몸을 돌려 지옥뢰로 다가갔다. 지옥뢰로 다가가는 그의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런 적발마뢰신을 능천한은 뒷짐을 짚고 따라갔다.
이윽고 두 사람은 지옥뢰 앞으로 이르렀다.
{흠!}
능천한은 지옥뢰의 철문을 두들겨 보았다.
(안에서만 열린다. 막중한 기관장치가 되어 있는 절지(絶地)다.)
능천한은 힐끗 적발마뢰신을 돌아보았다.
{문을 열라고 명령해라!}
그의 말에 적발마뢰신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용… 용서하십시오. 집법각주(集法閣主)나 종주(宗主)의 명이 아니면…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그래?}
능천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석문을 향하여 장을 내밀었다.
{혼돈지존(混沌至尊)의 뜻(意)이다. 열려라!}
능천한이 묵직하게 외쳤다. 그러자, 우두두둑! 와지끈! 철문이 안에 장치된 기관과 빗장이 박살나는 소성이 들렸다.
{으으! 이… 이럴 수가…!}
적발마뢰신의 적안이 불신으로 휘둥그레졌다. 석 자 두께의 만년한철의 벽을 격하고 그 내 부를 부술 수 있는 공력? 그것은 혈마지존(血魔至尊)에게도 없는 무서운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으으! 태산이다.)
적발마뢰신의 몸에서 비 오듯이 땀이 쏟아졌다.
그때, 그그그긍!
십만 근 무게의 철문이 저절로 열렸다.
{누구냐!}
{빗장을 부수다니…!}
철문이 열리며 냉혹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뚜벅! 뚜벅! 능천한은 담담한 표정으로 걸어들어갔다.
{…!} 그 뒤를 적발마뢰신은 주춤주춤 따라 들어갔다. 능천한이 따르기를 강요한 것도 아닌데 왠지 따라가야만 할 것 같았다.
{너는 누구냐?}
{어느 단 소속이냐?}
능천한이 들어서자 사인(四人)의 중년인들이 쫙 벌려서며 가로막았다. 능천한은 그 자들을 돌아보았다. 언뜻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용모의 인물들이다. 그러나,
(반박귀진에 이른 자들이군!)
능천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이를 곳이 없어 평범하게 보이는 최절정의 내가고수들!
그 자들은 흑(黑), 백(白), 청(靑), 홍(紅)의 서로 다른 색의 의복을 걸친 자들이었다.
{적발마뢰신! 감히 지옥뢰를 들어오다니…!}
{크크!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군.}
능천한 뒤에 선 적발마뢰신을 발견한 그 자들의 눈에서 섬칫한 살광이 흘렀다. 그 자들의 시선을 받으며 적발마뢰신은 쓸쓸하게 웃었다.
{사수신황(四獸神皇)! 본마신을 욕하지 마라. 이 분은… 나 같은 자가 길을 막을 수 없는 분 이니…!}
적발마뢰신의 말에 사인은 흠칫했다.
{으으! 하늘같다니…!}
{음! 종주(宗主)에 못지않다!}
능천한을 자세히 살피던 사수신황이 부지불식간에 몸을 떨었다.
-사수신황(四獸神皇) 이들은 적발마뢰신과 같은 시대의 마종들이다. 사방(四方)을 지키는 신수(神獸)들로 대표되는 이들은 개개인의 오히려 적발마뢰신을 능가하는 강자들이다. 특히 그들 사인의 합격술은 그야말로 철벽이다.
-천마(天魔)라 해도 우리의 합공을 당하지는 못하리라 이렇게 호언할 정도로 그들의 합공은 무서운 것이다.
{혈마지존이 옥지기들은 제대로 세웠군!}
뚜벅! 뚜벅!
능천한이 고개를 끄덕이며 사수신황의 사이로 나갔다.
{음!}
지켜보던 적발마뢰신은 괜히 손에 땀을 쥐며 능천한을 걱정했다.
{가자! 형제들이여. 사신수(四神獸)는 무적이니…!}
청룡운황(靑龍雲皇)이 벼락같이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우르르! 그의 몸에서 폭풍이 일어났다.
{백호출기(白虎出起)!} 콰르르릉! 크킁!
백호무황(白虎武皇)이 즉시 그 뒤를 따랐다.
{주작래천남(朱雀來天南)!
뇌운진천(雷雲震天)!}
{현무제창천(玄武制蒼天)!
사수합기(四獸合起)!}
주작뢰황(朱雀雷皇),
현무천황(玄武天皇)의 흑적(黑赤) 쌍기가 뢰성을 일으켰다.
쿠콰콰쾅! 위이이잉!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흑홍백청(黑紅白靑)의 네 가지 기류가 그물망같이 뒤엉켜 일어났다. 그 사색신수강(四色神獸剛)은 뇌성벽력으로 능천한을 짓쳐갔다.
{조….조심하시오!] 적발마뢰신은 자신도 모르게 능천한을 향하여 외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때 담담한 기세로 서 있던 능천한의 손끝이 슬쩍 바람을 일으켰다.
{혼돈대정(混沌大正) 만상어생(萬象於生), 만류환일(萬流換一)!}
능천한은 장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음 순간, 쿠와아아앙! 푸 하아아악!
사색신수강이 한 무더기로 뒤엉켜 덩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대로 한 쪽의 석벽을 향해 튕겨져 나갔다.
{아… 안 돼!}
청룡운황(靑龍雲皇)이 처절하게 부르짖었다. 그러나.
쿠쿠쿵! 콰우웅! 사색신수강은 그대로 석벽을 통타했다.
카카카캉! 와작끈 꾸꾸꿍!
석벽 속에서 수만 근의 쇠붙이들이 산산이 부수어져 날아갔다. 한순간 지옥뢰 전체의 기관 함정이 단 일격으로 박살난 것이다. 그리고,
{크… 이렇게… 허무하다니…!}
{종… 종주(宗主)께서는… 너무 강한… 적을 두셨다.}
{천마(天魔)… 이상이다.}
쿠쿠쿵! 콰당! 뻣뻣이 서 있던 산수신황의 몸들이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어심즉살(御心卽殺)! 능천한의 무형기도가 살기로 일어난 것이고… 사수신황은 영문도 모른 채 내부가 박살이 나서 절명한 것이다.
{으음!}
적발마뢰신은 기묘한 기분이 되었다. 일종의 경외지심과 안도감이 그의 노구를 뒤흔들었다.
(저항했다면 저같이 되었으리라.) 적발마뢰신의 시선을 뒤로하고 능천한은 육중한 석문으로 다가갔다. 우우우웅! 적발마뢰신이 지켜보는 능천한의 몸에서 보이지 않는 막강한 기운이 일어났다. 그리고,
{혼돈무상심력(混沌無上力)! 천검만리어기뢰(天劍萬里御氣雷)!}
능천한은 장중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석문을 바라보았다.
쿠콰콰쾅!
그러자 능천한의 가슴에서 보이지 않는 일천 장(一千丈)의 검형(劍形)이 쏟아졌다.
-혼돈무상력(混沌無上力).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
-천검만리어기뢰(天劍萬里御氣雷).
더 이상 강할 수 없는 삼종의 절대기공이 하나로 쏟아진 것이다.
콰콰콰쾅! 콰자작!
가공스러웠다. 무형의 천형제왕검(天形帝王劍)이 일천 장을 내뻗쳤다. 그 앞에서는 무엇이든지 남아나지를 않았다. 일시에 폭 오장에 길이 일천 장에 이르는 통로가 생겼다. 가히, 신력(神力)이라 하리라.
인간의 힘으로 어찌 이같겠는가?
{으으으!}
적발마뢰신은 넋이 나가 입만 딱 벌렸다.
{일천 장 저쪽에 뇌옥이 있음을 안다!}
스윽! 능천한은 안개가 퍼지듯이 일시에 일천 장을 날아갔다.
{주… 주공(主公)!}
화르르! 적발마뢰신이 크게 외치며 능천한의 뒤를 따라갔다.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능천한을 주인(主人)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심령상에서 일어난 큰 변화로 그 자신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스슥! 화르르!
적발마뢰신은 능천한의 옆으로 내려섰다.
능천한은 무너진 뇌옥에 갇혀 있는 한 명의 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끔찍하게도 그 수인은 사지가 끊어지고 두 눈이 뽑힌 상태였다.
{쌍극천효(雙極天梟)…!}
능천한은 괴로운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처참하게 난도질당한 괴인, 그는 바로 마중제일효(魔中第一梟)라 불리던 쌍극천효였던 것이다.
능천한에게 장인이 되고 제갈영라에게는 아버지가 되는 인물…
{누… 누가… 나를 불렀소?}
쌍극천효가 퀭하게 뚫리고 진물이 줄줄 흐르는 눈으로 능천한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사지가 끊어진 그가 움직일 까닭이 없다.
능천한은 말없이 쌍극천효의 눈에서 흐르는 진물을 닦아 주었다.
{으으!}
갑자기 쌍극천효의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순간 너무도 따뜻하고 큼직한 손길… 보지는 못하도라도 쌍극천효는 마중제일효라고 불리던 인물이다.
천하의 정기가 영웅지수(英雄之手)를 알지 못할 리 없었다.
{으으! 능공자… 인가?}
쌍극천효가 부들부들 떨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천한(天漢)입니다.}
{으으! 어쩌자고… 이 지옥같은 곳에 들어왔는가?}
{말씀하지 마십시오. 몸이… 좋지를 않으십니다.}
쌍극천효의 처참한 얼굴에 경련이 일었다.
주르르…!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한 줄기 칙칙한 물줄기가 썩은 눈자위에서 흘렀다.
{용서하이, 이같이 훌륭한… 자네를 해하려고만… 하고…!}
능천한은 쌍극천효가 보지 못함을 알면서도 훈훈한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모두 지난 일이니…!}
{흐허허! 혈마지존… 네가… 죽을 날도 멀지 않았구나…!}
쌍극천효는 껄껄 웃었다. 그의 웃음에는 통한과 분노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그 자는… 천하를 제패했다고 생각하자 노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네. 노부의 지혜가… 마도(魔道)를 해한다는 명목이지만… 사실은… 더 이상 쓸모가 없다고 판단한 때문이지…!}
능천한은 흠칫했다. 쌍극천효의 안색에서 급격히 생기가 사그러들고 있음을 본 때문이다.
(스스로 잔생치 않으려 하신다. 영라가 뵙고 싶어 했는데…)
능천한은 깊이 탄식을 했다. 그때 쌍극천효는 빙그레 웃었다.
{영라는 신랑을… 잘 골랐어. 그 아이를… 부탁하네.}
쌍극천효의 고개가 서서히 옆으로 기울어졌다.
{이런… 모습을… 영라에게 보이고 싶지… 않으니 이곳에 그냥… 묻어주게!}
{알겠습니다. 빙장어른!}
능천한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빙장이라… 좋은…!}
쌍극천효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으음!}
능천한은 쌍극천효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적발마뢰신도 말없이 능천한의 뒤에 무릎을 꿇었다.
(혈마지존! 그대가 죽을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능천한은 형형하게 눈을 빛냈다.
{원하신 대로 해드리리다!}
능천한은 쌍극천효를 잘 뉘고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적발마뢰신과 뇌옥에서 물러섰다. 다음 순간, 우르르! 뇌옥이 절로 무너져 쌍극천효의 시신을 덮었다.
{흐음!}
능천한은 잠시 무너진 뇌옥 앞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그의 앞에 반쯤 무너진 두터운 석벽이 나타났다. 우르르! 우스스! 능천한이 나가자 석벽은 가루로 부숴져 나갔다.
부서지는 석벽 안으로 들어서던 능천한은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어두운 석실이었다. 습습한 습기가 얼굴로 확 끼쳐 왔는데 어둠 속에서 여러 줄기의 안광이 능천한에게 모여졌다.
{허허! 네가 올 줄 알았다!}
{천한(天漢)아!}
{능대공자님!}
{으드득! 바로 너였느냐?}
여러 마디의 음성이 동시에 터졌다. 어둠은 능천한의 시선을 가로막지 못한다, 습기 가득찬 석실에는 여러 명의 인물이 있었다. 제왕의 기품을 지닌 곤룡포의 중년인과 황 우의 품위를 지닌 미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아버님! 어머님!} 능천한은 두 부부를 향하여 큰절을 올렸다. 그들은 바로 능붕비와 천환여제였다.
{이제야 왔습니다. 용서하소서!}
{하하! 되었다. 네 건장한 모습을 보니 그동안 겪은 곤란이 모두 사라지는구나.}
능붕비가 껄껄 웃었다.
{아이야!}
천환여제는 눈물이 글썽글썽하여 능천한의 손을 꼬옥 쥐었다. 그리고,
{능대공자…!} 천환여제의 뒤에서 초췌한 인상의 미인이 옥루를 흘렸다.
홍하공주(紅霞公主) 주하령(珠霞靈)이었다.
{음! 네가 존황(尊皇)의 아들이었다니…!}
한 구석에서 홍의의 장한이 이글거리는 시선으로 능천한을 노려보았다. 그의 뒤로는 야수 같이 생긴 괴인과 백염의 날카로운 인상을 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태양신존(太陽神尊)! 그리고 해천신검제(海天神賄)와 남황야수신(南荒野獸神)이 그들이었다.
{이제 이곳을 나가셔야지요.}
능천한이 천환여제의 손을 쥔 채 능붕비를 바라보았다. 능붕비의 안면에 대견한 미소가 감돌았다.
{허허! 녀석… 어느 사이에 애비보다 더 강해졌구나. 훌륭하다!}
{아직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위이이잉!
능천한의 몸에서 지극히 광명정대한 기운이 일어났다. 그것은 만사(萬邪) 만마(萬魔)를 한 줌의 재로 사그라뜨릴 수 있는 성질인 것이었다. 바로 대정지기(大正之氣).
스스스! 츠츠! 대정지기가 뻗쳐나가자 석실을 메우고 있던 탁한 습기가 수증기로 사그라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스스스! 대정지기는 안개와 같이 변하여 중인들의 몸으로 스며들어갔다. {음!}
우드드두! 파스스! 대정지기(大正之氣)! 그 장대한 기운은 중인들의 몸에 가해진 사악한 금제를 얼음같이 깨쳐 버렸다.
{으음! 네가 은혜를 입다니…!}
태양신존은 잃었던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끼면서도 아주 괴로운 표정이 되었다. 자신의 하나뿐인 누이를 능천한이 능욕했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자신이 남몰래 마음에 두었던 여인마저 능천한에게 빼앗겼기 때문이다.
능천한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소생을 치시고 싶으시다면 밖으로 나가서 치십시오!}
{으으음!}
우두두두둑! 태양신존의 막혔던 기혈들이 확확 튕겨져 나갔다.
위이이잉! 능천한은 완전히 서기로 뒤덮여 갔고, 다른 육인들도 점차 망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
몰아지경으로 접어드는 태양신존의 귓전으로 능천한의 목소리가 웅웅 들려왔다.
{사란이… 곧 이곳에 도착할 것이오. 사란이 도착해서 신존의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실망이 클 것이외다.}
{사란이… 풍운철기대와…}
태양신존은 꿈속에서인 듯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이내 그는 무아지경으로 빠져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