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나의 ‘고도’는 ‘기다림’이다.
기다리는 것은 우리 일상 어디든 존재한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찻집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때로는 사랑을 기다리기도 한다. 우리 삶의 일부다.
아직 오지 않는 뭔가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 내면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감정의 흐름은 깊은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잠깐이지만 불행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희망과 연결되기도 한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 언니(우리 집 일을 도와주러 온 친척 언니)가 집을 나갔다. 그녀를 종일 기다리며 난 불행한 아이가 되었다. 학교 가는 길이 쓸쓸했고 친구들과 조잘대기도 싫었다. 머릿속에는 오직 언니 생각만 가득했고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며 불쑥 나타날 것만 같았다. 몇 년 후 그 언니가 애인이라는 남성과 나타났을 때 가족들은 모두 반가워했지만 나는 쓸쓸했다. 낯선 남자와 사이좋게 온 언니의 달라진 모습이 서운했다.
피난 시절, 숲 속 반공호에 숨어 지낼 때 가끔 엄마가 마을 소식이 궁금하여 산을 내려가 돌아올 때까지 난 걱정 많은 아이가 되어 불안하고 불행했다. 그래서 기다림이 싫었고 무서웠다. 부스럭 소리만 나도 누군가가 반공호 속으로 들어와 나와 동생을 잡아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마가 언제 오나 하는 궁금증이 싫어 투덜댔다. 그러다 보니 ‘기다림’ 안에 공포가 공존하는 것이 늘 트라우마였다.
그런 감정을 경험하며 성장한 나는 그 후로도 수없이 많은 ‘기다림’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행복하지 않은 기분을 경험했다. ‘기다림’이란 불확실성과 싸워야 한다는 게 싫었고, 두려움과 초조함이 나를 슬프게 하는 게 싫었다.
내가 <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연극을 접한 것은 1969년 12월이다. 한창 지적 욕구가 강하게 차오를 때다. 화제가 되는 것은 뭐든지 하고야 마는 호기심이 발동하던 그 시절, 1968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그 작품을 꼭 접하고 싶었다. 그때 관심 있는 많은 관객이 몰려와 표가 매진될 만큼 인기가 있어서 어렵게 연극 표를 구해 한국일보 소극장으로 달려갔다. 지금은 작고했지만 연극 연출의 대가 임영웅 선생님과 불문학자인 부인 오증자 선생님이 번역한 사무엘 베게트의 작품이다.
연극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공포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추운 줄도 모르고 마냥 걸었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조명이 꺼진 깜깜한 무대에 기괴한 나무 한 그루, 하늘에는 하얀 달이 밤인지 새벽인지 구분할 수 없는 상태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그게 무대 배경의 전부다. 정지된 풍경화를 감상하듯 관중들의 시선이 무대에서 벌어질 스토리를 예감한다. 추상화 같기도 하고 풍경화 같기도 한 이 그림 앞에 인간의 궁극적인 갈망이 과연 무엇일까를 관중에게 묻는다.
두 방랑자 에스트라공(고고)과 블라디미르(디디)가 알 수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아직도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뭘까?
이 작품의 저자 사무엘 베케트는 2차 대전 후, 나치 독일 치하에서 ‘자유와 해방’만을 그리워하는 무기력한 프랑스 지식인들을 보면서 이 작품을 썼다고 한다. 처음에는 부조리한 글이라 해서 외면당하던 작품이었다가 1968년 노벨문학상을 받으면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고도>를 자유라고도 하고, 평화, 사랑, 구원, 신이라고도 한다.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는 언제 올지 알 수 없지만 ‘고고’와 ‘디디’가 나무 그루터기에 서서 아직도 기다리는 그 모습은 많은 여운을 남긴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희망을 품고 끊임없이 성장하며 진정한 삶의 의미를 찾으면서 사는 게 아닐까.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하는 시간이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희망과 절망, 성찰과 성장, 불확실성과 싸우며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간다. 우리는 아직도 ‘고도’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세월이 흘러 2024년이 되었다. 새로 기획하여 무대에 올린 <고도를 기다리며>는 원로 연극인 신구, 박근형, 박정자, 김학철, 김리안이 출현하여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서울 공연은 이미 끝났다고 하니 그 작품을 못 본 게 못내 아쉽다.
(2024.6.11)
첫댓글 엄 안젤라 선생님~^^ 저는 살면서 '기다림'의 의미를 위 수필을 읽으며, 이렇게 곰곰히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기다림이라는 단어에, 아예 별 의미를 두지 않고 있었습니다. 엄 선생님의 글--- " ‘기다림’은 시간이 흐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우리의 존재를 다시 인식하게 하는 시간이다. 그 기다림 속에서 우리는 희망과 절망, 성찰과 성장, 불확실성과 싸우며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간다" 이 구절을 다시 반복하면서, 기다림이 갖는 의미를 다시 생각하고 삶의 깊은 철학적 의미를 갖기로 했습니다. 기다림! 가다림! 멋지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아름다운 단어 같습니다. 안젤라 선생님의 수필을 읽으며 큰 보람과 가쁨을 얻고 갑니다.~^^
안젤라 선생님,
선생님의 '기다림'에 대한 글에 깊은 성찰의 의미가 담겨 있네요. 일 도와주던 언니를 기다린 마음이 어떤 건지,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잘 알지요. 기다림은 불확실성, 두려움, 초조함을 겪게 된다는 것에 공감해요. 선생님의 글에서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를 다시 만나게 되니 반갑네요. 기다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해주신 좋은 글, 잘 감상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