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시집 『시간의 빛깔, 시간의 향기』
삶의 역전 현상을 믿는 한 자판주의자의 꿈
李 尙 鎬
(시인. 한양대 교수)
1.
요즘 학계에서 '인문학의 위기'에 대한 담론이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면. 문학계에서는 문학의 위기를 넘어 이제는 '문학의 죽음'을 선고하는 책까지 나올 정도로 위기의식이 더욱 팽만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그러한 진단을 수용하든 수용하지 않든 간에 여하튼 기존의 문학적 관점이나 위상이 흔들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현실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까라는 문제에 대하여 문학인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시대가 빠르게 변하고 있으니 문학의 위상에도 전에 없는 변화가 올 것이라는 점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할 것이나,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극단적인 논자들이 성급하게 진단하고 있는 것처럼 문학의 위상이나 존재 의미가 그렇게 허망하게 하루아침에 추락하지는 않으리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어떤 분야보다도 강력한 신축성과 적응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문학이고, 그리하여 유사 이래로 항상 인류의 삶에 밀착되어 면면히 존속해 왔듯이 문학은 앞으로도 여전히 가치 있는 생명체로서 세상에 존속하리라 확신한다.
아니다. 그보다는 물질문명의 짙은 그늘로 하여 인류의 생존 자체에 크나큰 위기가 닥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문학은 더욱 절실하게 인간에게 필요한 존재로 격상되고 빛을 발할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오늘날 인간의 마음 속에서 한없이 빠져나가기만 하는 인간성과 온기를 되찾아 줄 수 있는 가장 믿음직하고 확실한 매개체가 바로 문학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적어도 문학이 아니고는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 대안은 없는 듯이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렇다면 문학. 또는 특히 시가 지닌 어떤 요소가 그런 역할을 수행한다는 것인가?
주지하듯이 세기말의 전환기에 사는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지금 무엇보다도 시급하고 절실한 일은 위기에 처한 세계를, 그리고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 인간에 대하여 진지하게 되돌아보는 것이라 한다면, 그러한 성찰에 계기를 만들어 주고 자기를 새롭게 일으켜 세우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으로서 문학을 내세우는 데 대하여 부정할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예로부터 시는 삶의 근본을 지키고 일깨우며 나아가서 사물과 언어에 대한 경험의 폭을 확장해 주는 것으로 보아 왔듯이 정서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본질로 하는 시야말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그 효용성이 높을 수밖에 없다. 특히 인간에게 있어서 내발적이고 자율적인 감흥에 의해 일어나는 변화가 무엇보다 클 수 있음을 생각하면 시를 통해서 도달하는 감동은 실로 남다른 데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시가 그 어떤 장르보다도 현대인들에게 친근한 대상이 되고 또 되어야 할 당위적 장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시가 갖는 이러한 의미와 가치는 김송배의 시의식을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된다. 문학이 위기에 직면하고 시의 독자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 이토록 황량한 시대에도 한 시인으로서 그가 누구보다 왕성하고도 치열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도 그렇거니와 특히 그가 시집의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는 詩作의 의미나 시 의식을 통해서도 그 점을 분명히 살필 수 있다. 참고로 그 머리말의 주요 대목을 여기에 인용해 보기로 한다.
어쩐 일인지 시간에 대한 사유의 집착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불투명한 변주곡이기에 무엇을 속단하기 어려운 칠흑 어둠 속 어느 날 내가 서 있음을 알았다.
---(중략)---
시간의 자아 성찰과 희망을 제공하는 마력에 공감한다.
옛말 '무정세월 약류파(無情歲月 若流波)'니 '일촌광음 불가경(一寸光陰 不可輕)'도 시간의 허비를 경계하고 있다.
존재의 확인을 퉁해 진실의 향방을 유추하는 일은 시간과 비례한다.
불감증 시대에 이러한 시간의 화두는 약간 어눌하지만 진지하다.
소멸과 재생과 창조가 진정한 시적 구도로써 시간이 계시하는 무한으로 합일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눈물겹게 갈망하는 구원과 화해가 성취되어야 한다.
-- '시인의 말 - 시간에 대한 화두'에서
짧은 머리말인지만 그야말로 화두처럼 툭툭 던지고 있는 구절들에서 우리는 최근에 김송배가 견지하고 있는 시 의식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즉 '불감증 시대'로 규정되는 현대 사회에 대한 인식, 시간 인식과 존재 인식, 자기 성찰로부터 구원과 화해에 이르는 길을 찾는 것이 시의 길이라고 생각하기에 그것은 '시적 구도'일 수 있다는 인식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니까 그에게 있어서 시를 쓰는 일은 화해로 온 세계로 나아가는 통로를 탐색하는 작업이자 존재를 확인하고 진실을 유추하여 궁극의 세계에 이르는 길을 발견하는 구도자의 길이기도 하다.
이렇듯 김송배에게 있어서 시는 어쩌면 삶의 전부를 떠받치는 더없이 중요한 대상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시에 대한 그의 열정과 또 그 열정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자기 성찰과 더불어 현실과 삶에 대한 진지한 탐색 등과 같은 것이야말로 아무리 시대가 변해도 아니, 그럴수록 더욱 시는 현대인들에게 가까이 남아 있어야 할 이유가 된다. 그러니까 시대적, 사회적 위기는 있을지언정 시의 존재 가치에 위기는 있을 수가 없다. 오히려 사회적 위기에 반비례하여 시의 위상은 더욱 또렷해지게 되는데, 그 점은 김송배의 시 의식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되는 바이다. 이런 점에 비추어 볼 때 문학의 위기를 운운하는 담론들 가운데 많은 부분은 피상적이거나 관념적 인식애서 나온 지나친 기우로서 필요 이상으로 부풀린 허상일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2.
사실, 오늘날의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으로만 접근할 때, 직접적으로 현실을 개조하거나 물질적 결핍을 개선하는 차원에서는 어쩔 수 없이 문학의 몫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의 한 속성인 물질적 교환가치라는 차원에서는 문학이 절대적으로 열세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물질적 교환가치에서는 상대적으로 문학이 열세일지 모르지만, 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이 따로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결코 문학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자본주의의 토대가 흔들리고 그리하여 현대성이 강력한 비판의 대상으로 도마 위에 올라 있는 주요 원인이 결국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물질에 예속되어 교환가치를 중요하게 여겨 온 역리 현상 때문임을 감안하면, 문학은 그 반대로 현대성의 위기를 구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즉 문학(시)에 내재한 자기 성찰적 요소야말로 파경으로 치닫는 현대 사회를 구원할 수 있는 근원적 요소가 될 수 있다. 어차피 세상을 일시에 개혁할 수 없다면 개인으로부터 변화의 시원을 만들어가야 할 텐데, 이 점에서 오늘날 문학(시)의 가치는 점점 높아지고 있다.
김송배의 시세계에 들어가기 위해 길을 돌아온 느낌이 들지만, 사실 오늘날 문학(시)의 정체성이나 그 의미를 분명히 이해하지 않고 문학 외적인 것으로 문학을 재단하려고 하는 불합리한 태도에서 문학에 대한 위기의식이 필요 이상으로 조장되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에 짐짓 길을 에둘러오게 되었다. 또한 그것은 결국 김송배의 시세계에 좀더 깊이 들어가고 좀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는 요체가 된다고 보기에 다소 장황함을 무릅쓰고 논의를 길게 이끌어 왔다. 위와 같은 기본 생각을 염두에 두고 김송배의 시세계로 들어가면, 그의 시 도처에 깔려 있는 시간 인식과 더불어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과 허무와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좀더 절실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더러는 발걸음 휘청이며
삼백 예순 닷새
기다림의 기억을 삼키고 내뱉지만
육신보다 먼저 지워지는 아픈 흔적들
1998년 7월 25일 새벽
가슴 철렁한 형님의 부음이 전해지고
시간은 먼동으로 둥둥 떠 있었다
죽음의 순간
그래서 시간은
멈춘 시계를 멀리 피해 가고 있었다.
--「시간에 대하여 · 4」 부분
이 시는 최근의 김송배가 지닌 시심의 큰 줄기가 무엇인가를 가늠하게 한다. 즉 필자가 개관한 바에 의하면, 형님의 죽음이 그로 하여금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도록 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에도 시간에 대한 인식이 가장 절실하게 그의 심중에 자리를 잡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이미 '시인의 말'에서도 살핀 바이거니와 작품에서도 도처에서 시간에 관련된 질료나 표현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까 '1998년 7월 29일 새벽 / 가슴 철렁한 형님의 부음'이 전해지는 그 순간 그의 놀라움과 슬픔은 그에게 시간에 대한, 그리고 그 시간에 철저히 노출될 수밖에 없는 존재에 대하여 깊은 인식을 갖게 했던 것이다. 그런 인식이 바로 「시간에 대하여」 연작을 낳게 하였고, 나아가서 인간에게 드리워진 어둠과 죽음과 허무와 사랑에 대하여 고통스러운 성찰을 하도록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간 존재와 시간의 관계, 그것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아주 단순하게 말하더라도 그것은 한 존재를 태어나게 하고 성장하게 하며 꽃 괴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가 하면, 그 반대로 변하게 하고 병들게 하며 궁극에는 소멸하게도 만드는 힘을 갖고 있기에 극단적으로 대립되는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이렇듯 다양한 의미를 지니기에 '시간'에 대한 의문은 부피를 더하고 그 의문의 부피가 두꺼울수록 그것을 탐색하고 싶은 욕구도 커지게 마련이다. 「시간에 대하여」 연작은 우리에게 그런 의미를 던져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그가 시간에 대한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없다고 한다는 점에서 그것은 탐색자에게 고통만을 가중시킨다. 가령,
그대는 물이다 아니 조용히 흐르다가
획획 흔적 없이 사라지는 한낱 바람이다
물소리 바람소리 지워진 빈 자리
가끔은 아아로운 추억더미 아픔으로 메워지고
그대 남긴 굴레의 끝자락에는
나의 작은 뜰 안으로 뒹구는 낙화가 안쓰럽다
-- 「시간에 대하여 · 10」 부분
라는 대목에서 그 점이 잘 드러난다. 물로 보이는가 하면 '조용히 흐르다가 / 휙휙 흔적 없이 사라지는 한낱 바람'으로 보이기도 하는 것이 시간이요, 그 시간이 스치고 지나간 빈 자리를 아픈 추억이 메우는가 하면, 그나마 결국엔 낙화처럼 소멸되어야 할 존재의 끝을 내다보게도 하는 것이기에 뜰아래 꽃이 지는 모습을 통해서도 안쓰러움을 느끼게 된다.
이렇듯 시간이란 도무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면서도 우리의 존재를 소멸이라는 종착점으로 끌고 가는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는 생각은 곧 그에게 안타까움과 더불어 존재에 대하여 허무한 인식을 갖게 한다. 많은 작품에 드러나는 상실 의식에 의하면 그에게 그것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로 인식되는가를 엿볼 수 있다. 가령, '저리 곱던 햇살 / 어둠으로 지워지고 / 달무리 속에 감춰진 별빛 / 또다시 동녘 하늘에서 모습을 잃었다' (「시간에 대하여 · l2」)라고 하는 구절에 드러나는 상실 의식이라든가,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나무 위
때가 되면
새들 모두 떠난다
구름 가르며
길게, 높게 날아가는 영혼
허공 속 하얗다
누군가 어설픈 몸짓으로
잠시 지나간 공터에서
아직 떠도는 울음 섧다
-- 「시간에 대하여 · 14」 부분
고 하는 구절에 드러나는 소멸과 그로 인한 슬픔 등을 통해서 그것을 여실히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렇게 곱던 햇살도 어둠 속에서 한 순간에 흔적 없이 사라지고 나무가 흔들리지 않더라도 그 위에 앉아 있는 새는 때가 되면 모두 떠나가 버리는 것처럼 그는 그런 자연의 이치를 통하여 인간의 존재도 그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음을 인식한다. 특히 새가 떠나는 하늘에서 '구름 가르며/ 길게, 높게 날아가는 영혼'을 바라보고 있는 대목에서 우리는 그의 존재 인식을 엿볼 수 있다. 즉 나뭇가지에 앉아 있던 새가 하늘 저 멀러 사라져 가듯이 우리의 존재 역시 우주에 와서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 가는 것임을 그는 새를 통하여 새삼 확인한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존재 인식의 밑바닥에 짙은 비극성이 깔려 있다는 점이다. 새가 날아가는 하늘에서 하얀 영혼을 떠올리고, 또 그 영혼을 떠나보내는 사랑의 섧은 울음을 생각하고 있는 대목에 잘 드러나고 있듯, 그는 이별이란 일단 슬픔을 주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그가 한 사람의 일상인으로서 '형님'의 죽음을 통하여 느끼는 아쉬움이자 슬픔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아주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느껴야 했던 슬픔이 그의 가슴에 뼈저리게 사무칠 때, 일차적으로 그의 심중에는 짙은 허무감과 무력감이 자리를 잡게 되는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런 비극적 감정들이 단순하게 비극적으로만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억겁의 어둠을 꿈꿀거나
내 초라한 눈빛으로
싸늘해진 이 대지를 밝힐 수가 없구나
---(중략)---
무한 허공 손짓하는
가녀린 한 줄기 생명
늘 깨어 있어 그대 초췌한 얼굴
힘겹게 그 어둠을 걷어내고 있구나.
-- 「겨울 시 몇 편 (2) - 겨울달(冬月)」 부분
위에서 보듯 김송배 시에서 비극적 존재 인식은 겨울 상황이라는 현실 인식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 '싸늘해진 이 대지'라는 구절에 드러나는바 그는 비정한 현실에 대한 매우 안타까운 심정을 갖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부정적 상황이 너무나 깊기 때문에 극복 가능성이 너무나 희박한 것으로 다가온다는 점이다. 이런 극악한 현실 인식이 곧 그에게 좌절감과 허무감을 안겨 줌은 물론이거니와 '억겁의 어둠을 꿈꿀거나'라는 표현에서 보는 것처럼 심지어는 부정적 아이덴티티를 선택하고 싶은 욕구까지 자아내게 한다. 말하자면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되기에 희망을 꿈꾸기보다는 오히려 더욱 철저히 어둠 속으로 잠행하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띠러한 정황은 어쩌면 비극적인 현실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서 흔히 있을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김송배는 그런 일상적 상황을 상기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그와 같은 상황에 함몰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지를 간직한다. 즉 그는 '내 초라한 눈빛으로 / 싸늘해진 이 대지를 밝힐 수가 없구나'라고 하여 일단 한계 인식을 가지면서도 궁극적으로는 그것을 극복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짐으로써 차가운 하늘에 걸려 있는 '겨울달'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는 '겨울달'의 의미를 심중에 간직함으로써 겨울과 어둠으로 상징되는 부정적 현실과 또 달로 상징되는 그런 현실을 개선할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치 있는 삶의 상관성을 성찰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그의 성찰은 그에게 더욱 커다란 고통을 부가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 왜냐하면 가치 있는 삶일수록 실현성은 낮아지고 또 그런 만큼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 부가되는 인내와 고통도 커질 수밖에 얼음은 당연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그 점은 '가녀린 한 줄기 생명'으로서 '늘 깨어 있어 그대 초췌한 얼굴 / 힘겹게 그 어둠을 걷어 내고 있구나'라는 표현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처럼 그에게 겨울 상황은, 연약한 생명체로서 힘겹기는 하지만, 항상 깨어 있음으로 하여 세계에 드리워진 어둠을 걷어 낼 수 있는 존재로서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명감을 인식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비극적 존재 인식으로부터 전이된 비극적 상봉 인식이 결국엔 존재 가치에 대한 적극적 인식으로 발전되어가는 김송배의 세계 인식의 긍정적 사고 체계를 만나게 된다.
3.
새로운 존재로 나아가야 한다는 적극적 사고는 김송배에게 더욱 치열한 자기 인식을 갖도록 한다. 세계에 드리워진 어둠을 걷어 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인식한 적극적 존재로서 그는 더욱 자신에게 채찍질을 함으로써 어두운 세계에 대항하여 좀 더 강인한 존재로 맞서기 위해 더욱 깊이 자기 속으로 들어가 懷疑한다. 이를테면 스스로 시련에 들어 치열하게 자아를 성찰함으로써 좀더 가치 있고 확고한 자아를 확립하려고 한다.
어느 날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무엇일까 무엇일까
황량한 서울 어느 골목길을 접어들며
무엇일까, 비웃는 바람바람 사이
몰골 사나운 나를 보고 있다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삶의 잔해들
그것이 무엇일까, 아직도 해법이 없는
우울한 그 지점에서
---(중략)---
스스로의 사유가 높게 혹은 낮게
내 발자국 따라 흩어지고
언제나 비틀거리는 허깨비 하나
비 젖은 골목길을
무엇일까, 이젠 초점이 흐려진 동공
화려한 울음 하나씩을 위하여
항상 되뇌이는 그 처절한 모습
어느 날 그대여
과연 그것이 나에게서 무엇일까,
-- 「응시 · 2」 부분
그에게 '이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이 / 무엇일까 무엇일까'를 탐색하게 하는 것이 '황량한 서울'의 정황 때문이라고 한다면. '황량한 서울'은 또 자신을 부정하고 스스로 비웃도록 만든다. ‘비웃는 바람바람 사이 / 몰골 사나운 나를 보고 있다' 거나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삶의 잔해들' , 그리고 '언제나 비틀거리는 허깨비 하나' '그것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하고 있는 대목에서 우리는 김송배의 또 다른 무력감과 자괴감을 엿볼 수 있다. 다시 말해서 '황량한 서울'이 되어 버린 정황에 대해서 그는 나름대로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그를 더욱 아프게 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일까', '과연 그것이 나에게서 무엇일까' 의문을 품으며 '항상 되뇌이는 그 처절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으면서 '아직도 해법이 없는 / 우울한 그 지점'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니까 어두운 현실에 대한 인식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고 그런 의문이 깊어질수록 무력감이 강화됨으로써 자괴감의 부피만 커지게 된다. 말하자면 또 다른 고통의 악순환이 그의 마음에서 소용돌이를 치고 있는 셈이다. 이에 자기 자신을 향한 응시는 눈이 아프도록 지속될 수밖에 없다.
위에서 보면 그의 아픔은 개인적인 것이기보다는 자기를 초월하는 자리에서 불거지는 것이다. 다소 딱딱한 말로 해서 사회적 자아(초자아)가 팽창함으로써 어두운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그것이 곧 자기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도록 한다. 그러나 자기를 깊이 인식했을 때 그에게 다가오는 자아상이 '언제나 비틀거리는 허깨비 하나'로서 '이젠 초점이 흐려진 동공'의 '그 처절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아픔의 농도는 더욱 짙어진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그 아픔이 그야말로 단순한 아픔이지 않다는 점이다. 즉 그 아픔이 그에게 삶에 대한 逆轉的 인식을 갖게 하는 토대가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희망의 싹을 배려한 아픔이다. 다시 말해서 무기력하고 초라한 자기 모습이 그에게 견딜 수 없는 아픔으로 다가올 때, 그리하여 그 아픔에 함몰하고 만다면 더 이상 자기 존재를 지탱하기 어렵다는 극점에 이르러 돌연 그는 그것을 딛고 일어서야 한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된다.
날 샐 무렵
아직 풀리지 못한 무슨 응어리들
가슴 속 깊이 시커멓게 누워 있다
후후후 어떤 찌꺼기를 토해내듯
두 팔 들어 어둠 가르는 저 편 어디쯤
하나 둘 창문에 마침내
이 세상 숨결이 다시 살아나는데
참으로 고요로워라, 미명의 향기
밤 내내 풀어 녹인 우리들의 사랑
상쾌한 찬바람으로 떠돈다
이것이 나와 함께 헉헉 오르고 있는
뒷산 어느 지점 정지된 무심한 메아리일지라도
저기 막 솟으려는 태양, 그 환희의 신비
그 뜨거운 사랑으로 옹찬
어제의 피멍을 모두 풀어내고 있었다
그렇게 살아 있으므로 또한 젖어 있는
차라리 촘촘한 인간들의 감춰진 그 욕망이
이슬 받은 길섶 풀잎의 고즈넉함 그 품으로
날 샐 무렵 이 모두를 들을 수 있는
지상의 영원한 사랑의 화음이리
오늘을 예비하는 長空의 황홀한
그 새벽 가득 찬 그 사랑이리
--「새벽산을 오르며」 전문
이 시에서 우리는 김송배에게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게 한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즉 미명에 새벽산을 올라 바라보는 일출의 광경이 바로 그의 인식을 바꾸어 놓고 있다. '저기 막 솟으려는 태양. 그 환희의 신비 / 그 뜨거운 사랑으로 옹찬 / 어제의 피멍을 모두 풀어내고 있었다'는 표현에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바, 그는 이 세계의 어둠을 몰아낼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곧 '뜨거운 사랑'이라는 사실을 이제 막 떠오르는 태양의 위력을 통해서 새삼 확인하고 있다. 그러니까 그는 새벽산에 올라 일출 광경을 바라보면서 어둠에 묻힌 세계일지라도 사랑에 의해서 '어제 피멍'으로서의 과거사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김송배에게 일출의 진정한 의미를 인식하게 한 새벽 등산은 매우 상징적으로 다가온다. 즉 그것은 단순한 새벽 등산이 아니라 소멸로 달려가는 존재 인식으로 인한 허무와 자괴감을 극복하고 의미 있는 존재로 거듭 태어나야 한다는 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좀더 직설적으로 말해서 그에게 새벽 등산이란 마음에 희망을 품고 그 희망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오직 옹골찬 사랑을 세상으로 풀어내는 것이라는 점을 마음 속에 깊이깊이 다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어쩌면 새벽 등산은 스스로 자신 마음의 높은 곳을 향하여 오르는 것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는 것 이다.
주지하듯이 우리 존재와 삶이란 항상 어느 한 방향으로만 열려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무한한 변수를 지니고 있다. 아주 단순히 말하더라도 오르막과 내리막이 항상 교차하는 것이 우리네 삶의 본질이다. 말하자면 영원한 행복도 영원한 불행도 없는 것이 존재의 본질이기에 항상 삶의 逆轉 현상은 가능태로 우리 주위에 머물고 있다. 다만 그것은 주체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실현 가능성의 높낮이가 결정된다는 점에서 누구에게나 일률적으로만 작용하지 않을 따름이다. 여기서 곧 모든 것은 주체의 관점으로 돌아오게 됨을 알 수 있는데, 이 때 문제되는 것이 바로 지향 의식과 실천성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꿈을 목표로 갖고 있으며 그것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하는 것이 항상 관건이 된다.
그렇다면 김송배에게 있어서 어두운 현실이 역전된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이미 앞에서도 부분적으로 제기된 바 있지만, 좀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사랑으로 넘치는 화해로운 세계라 할 수 있다. 즉 화해로운 세계가 그의 꿈의 열매라면 그 열매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그는 갖고 있다. 다음 시는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사랑이 없는 꽃들은
열매를 맺지 못하리라
--- (중략)---
별이 뜨지 않는 하늘에는
사랑의 속삭임을 듣지 못하리라.
-- 「응시 . 8」부분
우리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고이 묻어 둔 서로의 순수를 하나씩
확인하는 일일 것입니다
---(중략)---
우리가 더욱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젖어 버린 가슴 사이사이
너와 나의 영롱한 무지개를
영원히 뜨게 하는 일일 것입니다
아아, 사랑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일일 것입니다.
-- 「확인되는 사랑」 부분
위의 시에서 보면 김송배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 확연히 드러난다. 다소 직접적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더 설명할 것도 없지만, 굳이 몇 마디 덧붙인다면 사랑은 꽃들에게 열매를 맺게 하고 사람들의 젖은 가슴에 '영롱한 무지개'를 뜨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사랑이란 꽃에게 열매를 맺게 하는 것과 같이 우리들 삶에 결실의 근원을 이루는 것이요, 너와 나의 사이를 아름다움으로 채우는 일이기도 하다. 즉 사랑의 가치는 미적인 동시에 현실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러니까 그에 의하면 이 세계는 사랑에 의해서 무한히 화해롭고 행복해질 수 낀다.
위의 시애서 우리가 또 한 가지 눈여겨볼 것은 사랑이라는 것이 별 것이 아니라, 순수한 마음을 갖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사실 그렇다. 진실은 언제나 우리들 가까이에 있다고 하는 것처럼 이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사랑이 지닌 힘이면서도 그것은 개개인이 제 마음에 있는 순수를 그대로 간직하기만 하면 되는, 어떻게 보면 아주 사소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하는 점을 「확인되는 사랑」은 우리에게 깨우쳐 준다. 이를테면 사랑이란 아주 사소한 것이기에 우리는 늘 그것을 지나쳐 버림으로써 스스로 싸늘한 세계를 만들고 그 속에서 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4.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으로 충만된 세계, 그 화해로운 세계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김송배의 시적 여정을 동행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임을 보았다. 그는 그런 세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을 것을 경험하고 사유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때로는 슬픔을, 때로는 좌절감올, 또 어느 때에는 무력감과 허무감을 그에게 안겨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그가 그것들 때문에 아주 쓰러지거나 드러눕지 않는다는 점도 확인하였다. 오히려 그런 아픈 것들이 그로 하여금 궁극적 세계를 더욱 뚜렷이 인식하게 하고 그것을 털고 일어서게 하는 근본 토대가 되었음 보았다. 그러기에 그는 우리 삶에 드리워지는 슬프고 아픈 것들까지 또 모두 껴안고 가야 할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한다. 이와 같이 적극적으로 삶을 생각할 때 우리가 때때로 좌절하고 슬퍼하는 것은 도리어 삶의 활력소가 될지언정 그로 하여 삶을 도피하거나 포기할 이유는 되지 못한다.
어쨌든 김송배는 이번 시집을 통해서 '형님의 죽음'이라는 매우 개인적 경험으로부터 출발하여 너와 나의 사이에 무지개로 채울 수 있는 길이란 사랑밖에 없다는 지극히 보편적인 이상에 도달하는 과정을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러한 탐색의 길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그리 새로울 것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많은 경험을 통해서 사랑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김송배의 시를 관심 있게 바라보게 되는 것은 그 특유의 인식과 시법을 가지고 그 길을 탐색하고 있다는 점에 있다. 위에서 본 바 그는 우리가 염원하는 이상향이란 무슨 거창한 논리나 철학적 사유나 구호가 아니라 개개인의 가슴에 저마다 순수를 간직하는 것으로 완성될 수 있다고 보는, 너무도 당연하면서도 지극히 사소하여 흔히 놓치기 쉬운 점을 되새기고 있는데, 이것이 곧 김송배 시의 특색이자 강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오늘날 무엇이든 거대하고 거창하고 화려하며, 그리하여 왜곡하고 가식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거품으로 가득 찬 시대에 그가 추구하는 세계 인식과 존재 인식과 시적 사유는 새삼 음미해 볼 가치가 다분하다. 말하자면, 좀 적극적으로 말해서, 그의 시에는 오늘날 무성하게 논의되는 문학의 위기와 사회의 위기를 완화할 수 있는 요소들이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은 결국 이 세계를 낙관적이고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이 전제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고 한다면, 김송배의 시는 그 점을 잘 보여준다. 그는 세계는 근본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어느 한 방향으로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그 믿음이 바로 삶의 역전 현상을 발견하고 순환하는 세계라는 인식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이는 아주 단순히 그의 시에 드러나는 계절 인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그는 봄-여름-가을-겨울이라는 계절의 순환처럼 우리의 현실과 삶도 그런 자연의 이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믿는다.
주지하다시피 자연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육체적인 의미에서도 무한한 재생과 순환이 가능하다. 그런 자연의 이치가 인간에게도 통한다는 믿음을 보여주는 것이 곧 슬픔으로부터 삶의 의욕을 부추기고 싸늘한 대지로부터 사랑의 위력과 그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 김송배의 역설적 인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사유 체계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보이는 역설적 인식은 그가 삶의 역전 현상을 굳게 믿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의 인식 속에는 '봄볕 뜨락'과 같은 화해로운 세계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다음 시에서 우리는 그러한 세계의 전형을 엿볼 수 있다.
한 자락 봄볕 뜨락에
앉거나
서서
겨우내 감춰 둔 비밀 한 웅큼씩만
모락모락
피워 올려
풀꽃은 풀꽃으로 피어나는
벌레는 벌레로 태어나는
따스움
저 넘치는 대지 위
넘치는 산들바람
-- 「봄 詩 - 봄볕 뜨락에 내려」 부분
이 시는 김송배가 그리워하고 그리는 화해로운 세계가 어떤 것인지 잘 보여준다. 그가 꿈꾸는 세계가 '따스움' 넘치는 '봄볕 위해서는 지극한 사랑이 필요하다는 믿음을 그는 갖고 있다. 다음 시는 그가 생각하는 사랑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분명히 드러난다.
뜨락'과 같은 곳이라면 그 곳은 '풀꽃은 풀꽃으로 피어나'고 '벌레는 벌레로 태어나는' 대지이다. 이를테면 그 곳은 삼라만상이 제 모습대로 태어날 수 있는 순리의 세계요, 화해로움이 넘치는 세계이다. 물론 이러한 세계는 직접 현실을 노래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의 봄을 맞이한 시인의 계절 인식에 가깝다. 따라서 자연의 봄에 대한 탐미는 그의 의식 속애서 자리한 이상적 현실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겨우내 감춰 둔 비밀 한 웅큼씩만 / 모락모락 / 피워 올'린다는 표현이다. 즉 그는 봄과 겨울의 밀접한 상관성애 대하여 깊은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의하면 봄은 그저 오지 않고 만물도 저절로 제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즉 겨울을 견디며 그 속에서 준비한 만큼만 제 존재를 현현할 수 있는 원천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을 통해서 우리는 김송배의 인식체계의 심층을 좀더 분명히 들여다볼 수 있다. 즉 그의 세계관은 근본적으로 주체의 노력에 따라서는 이상세계가 도래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에 닿아 있다. 이런 점에서 위의 시에 드러나는 화해로운 세계로서의 '봄볕 뜨락'은 우리의 노력에 의해 이룩될 수 있는 어느 미래의, 따라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선취된 이상향이 되는 셈이다. 그의 시는 궁극적으로 이러한 세계를 지향하여 현실의 어둠을 뚫는 굴착기와 같은 구실을 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김송배의 시가 위기의 시대와 문학의 위기를 넘어 의미 있는 것으로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궁극적 의미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야 할 것으로 믿는다. (’99. 7. 『예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