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유년 4월 초하룻날 서울 의금부에서 풀려났다. 내가 받은 문초의 내용은 무의미했다. …(중략)… 나는 장독으로 쑤시는 허리를 시골 아전들의 행랑방 구들에 지져가며 남쪽으로 내려와 한 달 만에 순천 권율 도원수부에 당도했다. 내 백의종군(白衣從軍)의 시작이었다.' -김훈의 '칼의 노래' 중.
본시 '걷기'란 지극히 '반(反)'자본주의적 운동이다. 웬만한 중소기업 사장도, 가난한 우리 아버지도 길 위에선 평등하다. 멀쩡한 두 다리로 그 길 위에 서있을 뿐이다. 가진 것이 오히려 거추장스럽다. 그래서 우리는 길 위에서 '비움'을 배운다. 그러나 '백의종군'의 길 위에선 마음을 비울 수 없다. '더해지는 슬픈 마음을 이길 길이 없다'던 충무공의 비통함이 400년이 훌쩍 넘는 세월의 켜 속에서도 오롯이 우리네 마음 가득 채워져 오기 때문이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1597년 음력 2월 25일 왜군을 적극 공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도수군통제사 직에서 해임돼 한성으로 압송, 음력 3월 4일 투옥됐다. 이후 결백이 증명돼 음력 4월 1일 사면됐고, 권율 장군을 찾아가 그 아래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했다. '백의종군로(路)'는 충무공이 사면 후 음력 8월 삼군수군통제사로 재수임 받을 때까지 4개월여의 여정을 일컫는다.
지난 5월 문화체육관광부는 경남도가 복원 중인 '백의종군로'를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선정했다. 백의종군로의 경남 구간인 하동~진주~산청~합천에 이르는 161㎞의 코스를 '걷기 상품'으로 개발하겠다는 것. 경남도는 이미 역사학자를 동원해 이 구간의 고증도 마친 상태다.
한창 정비 중인 백의종군로를 중심으로 경남 일대의 충무공 흔적을 따라 여름 여행을 떠났다. 때마침 찌는 듯한 '대서(大暑)'였다. 더운데 무슨 '백의종군로'냐고? '이열치열'이라는 말도 있지 않나. 게다가 때마침 '같이 한 번 가보자'는 (경남)도청의 권유도 있었다.
그렇다고 160㎞가 넘는 전 구간을 돌아볼 수는 없는 노릇. 그중 산청군 남사예담촌에서 하동군, 진주시의 경계를 넘나드는 18㎞ 구간의 도보탐방로를 다녀왔다. 충무공이 유숙했던 박호원의 집(산청군 단성면 남사리), 이홍훈의 집(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을 비롯해 선조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의 재수임 교서를 받는 손경례의 집(진주시 수곡면 원계리) 등이 모여있는 구간이다.
산청 박호원의 집에서 차를 내렸다. 비탈을 따라 지어진 건물은 언뜻 기와지붕 위에 다시 기와지붕이 얹힌 것처럼 보인다. '이사재(尼泗齋)'라는 재실 옆으로 난 우물 속 연꽃 잎을 바라본다. 그윽한 그 색깔에 잠시 마음이 팔린다. 하동을 떠나 산청으로 온 충무공은 1597년 음력 6월 1일 이곳에 도착했다. 난중일기에 따르면 마침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고 한다.
박호원의 집에서 손경례의 집으로 향한다. 고개를 넘는다. 들판에 벼가 푸르다. 하늘도 푸르다. 충무공은 손경례의 집에서 음력 7월 27일부터 8월 3일까지 머물렀다. 그 마지막 날, 충무공은 선조 임금으로부터 삼도수군통제사의 재수임 교서를 받는다. 백의종군이 끝나는 순간. 손경례의 집은 그래서 여느 유숙지보다 더 의미가 깊다. 집 안 사랑채 앞에는 재수임기념비가 서있다. 그러나 현재 이곳은 비어있는 듯 어수선한 분위기. 집 주인은 다른 곳에 산다는 데 개인 가옥이라 경남도청에서도 마음대로 정비를 하는 것이 어렵다고 했다.
다음 목적지는 하동 이홍훈의 집. 시간의 흐름으로 보자면 손경례의 집보다 앞서 머물렀던 곳이다. 충무공은 음력 7월 18일 도원수의 진(陣)에서 원균의 패전 소식을 듣는다. 권율의 명으로 남쪽으로 내려와 전황을 살피던 충무공은 음력 7월 24~26일 이홍훈의 집에 머문다. 이홍훈의 집은 넓은 밭 한가운데 외롭게 서 있다. 낡은 외형만으로도 빈집임을 알 수 있다. 조만간 이곳 역시 도청에서 깨끗하게 정비할 계획이라고.
이곳뿐만이 아니라 많은 유적지들이 현재 정비 중이거나, 혹은 복원 중이다. 사천의 '응취루(凝翠樓)'가 대표적인 복원 사례. 응취루는 이순신 장군의 유숙지였던 곤양읍성의 객사 문루였다. 원래는 지금의 곤양초등학교 내 병설유치원 부근에 있었으나, 복원될 응취루는 학교 안 건립이 어려워 조금 떨어진 곤양면 성내리 일명 '성뜰'에 자리잡았다. 지난해부터 공사를 시작해 조만간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컴백'할 예정.
여러 유적들뿐만 아니라 탐방로도 아직 완전히 정비되지 않았다. 국도를 걷기도 하고, 때론 길을 헤맬 때도 많다. 아무래도 아직은 혼자 걷기엔 무리다. 그러나 걱정은 이르다. 사단법인 한국역사문화관광개발원에서는 백의종군로를 걷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차량과 해설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한다. 흥미 있으신 분들은 전화(055-251-4517)로 신청하면 된다. 단, 10명 이상의 단체만 신청 가능하다.
충무공의 고뇌와 기백은 비단 백의종군로 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천 응취루를 뒤로 한 일행은 백의종군로를 벗어나 남해대교를 건넜다. 아직도 걷고 있느냐고? 설마…. 벌써부터 차에 올랐다. 이해하시라. 앞서도 말했듯이 '처서'라 하지 않았던가.
'보물섬'이라 부르는 남해는 한국 역사의 가장 큰 보물이 쓰러져간 곳이기도 하다. 노량해전 중 관음포 앞바다에서 순국한 충무공의 시신을 임시로 모셔놓은 곳 '이락사(李落祠)'. 최근 그 옆으로 당시 해전의 상황을 최첨단 3D 입체 영상으로 만날 수 있는 '이순신 영상관'이 개관됐다. 20분가량의 영상은 할리우드 3D 영화 '아바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실감 백 배. 평일과 주말, 상영 시간이 조금씩 다르니 미리 확인하고 가는 것이 좋다. 문의 055-864-8023.
이번 여정의 마지막 종착지는 통영. 한때 충무공의 호를 따 '충무시'라 불렸을 정도로 충무공의 흔적이 많은 도시다. 한산섬이야 다들 한 번씩은 들어가 보셨을 테고, 이번엔 지난해 개관한 통영 거북선모형연구소로 향했다. 거북선에 대한 자료들이 모여있는 곳. 폐교가 되어버린 산양읍 산양초등학교 회양분교를 리모델링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러 형태의 거북선들. 어라? 어느 것이 진짜야? '앞쪽에 용의 머리를 붙였고 입으로 대포를 쐈으며 등엔 쇠못을 꽂았다.' 충무공이 육필로 집필한 전황 기록 '임진장초'에 묘사된 거북선의 모습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거북선의 원형을 복원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여전히 거북선 원형에 대한 '진실게임'은 진행 중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익숙한 '대가리를 곧추세운' 형태로는 입 속에서 대포를 쏘기가 쉽지 않다는 주장이 최근 힘을 얻고 있다.
이곳에서는 직접 거북선 모형을 만들어 볼 수도 있다. 경남도에서 실시하는 '상설문화마당'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공짜로 거북선 모형 만들기 체험을 즐길 수 있다. 프로그램은 올해까지만 진행된다고 하니 공짜일 때 빨리 신청하자. 경남도청 문화진흥과로 전화 한 통이면 신청이 가능하다. 문의 055-648-7977.
이것저것 둘러보다 허기가 진다면 '이순신 밥상'을 먹어보는 것은 어떨까? 통영이라면 아무래도 '충무김밥'이겠지만 이왕 충무공을 테마로 떠난 나들이니 만큼 먹을거리도 충무공이 먹었던 것을 흉내내 맛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이순신 밥상'은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과 조선 수군이 즐겨 먹었던 음식을 현대인의 입맛에 맞게 재현한 것. 통영 용남면 화삼리의 식당 '통선재'에서 먹을 수 있다. 3만 5천 원짜리 정찬부터 8천 원짜리 일품요리까지 다양하다. 문의 055-645-6336. 글·사진=김종열 기자 bell10@busan.com
백의종군로, 어디서 어디까지?
백의종군로는 한성(지금의 서울)~아산~구례~하동~진주~산청~합천~진주~사천~구례로 이어진다. 흔히들 충무공이 합천으로 권율 도원수의 진영을 찾아간 여정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후 권율 장군의 명을 받고 전황을 살피기 위해 다시 진주, 사천 등지를 돌아다니던 여정 또한 백의종군로에 포함된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선정한 '백의종군로'는 그중 경남 지역에 한한다. 하동에서 진주~산청을 거쳐 합천으로 이어지는 길과 다시 산청과 하동, 진주의 경계 지역에서 남해대교 앞으로 이르는 약 161㎞의 길이다. 경남도는 그중 산청 남사예담촌 박호원의 집에서 하동 이홍훈의 집에 이르는 약 18㎞의 구간을 도보 코스로 우선 개발키로 하고, 탐방로를 조성 중이다. 김종열 기자
충무공 발자취 따라 '터벅터벅'… 풍경과 역사 한눈에
백의종군로를 걸으면 길 위로 충무공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은 충무공이 묵었던 산청 박호원의 집.
충무공 발자취 따라 '터벅터벅'… 풍경과 역사 한눈에
백의종군로를 걸으면 길 위로 충무공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은 하동 이홍훈의 집.
충무공 발자취 따라 '터벅터벅'… 풍경과 역사 한눈에
백의종군로를 걸으면 길 위로 충무공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은 삼도수군통제사 재수임 교서를 받은 진주 손경례의 집 내 재수임기념비.
충무공 발자취 따라 '터벅터벅'… 풍경과 역사 한눈에
백의종군로를 걸으면 길 위로 충무공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은 복원 중인 사천 응취루.
충무공 발자취 따라 '터벅터벅'… 풍경과 역사 한눈에
백의종군로를 걸으면 길 위로 충무공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사진은 경남도청이 만든 백의종군로 표지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