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중 최대의 폐사지 석남사지는 치밭목 능선 자락 해발 750~800m 사이에 남서향으로 자리 잡은 석남사는 신라 때 조성된 절로 밝혀졌는데, 장당골 지류인 보살나무골 최상류부 반경 150여m 이내에 산재한 절터의 흔적으로 볼 때 상당한 규모의 절로 추정된다. 주변을 살펴보니 석탑의 흔적을 비롯해 기와조각, 주춧돌, 우물터, 석축 등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특히 미려한 석탑의 잔해물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전해져오는 말로는 법계사 석탑을 닮은 3층 석탑이 근세까지 건재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도굴꾼에 의해 파괴된 듯 기단석과 옥개석, 탑신 등은 부서져 여기저기 나뒹군다. 사리함을 보관했던 탑신 홈에는 사리함 대신 물만 가득 고였다. 제대로 보존돼 있다면 최소 보물급인데, 지금이라도 주변 파편들을 모아 복원할 수는 없을까. 안타까운 마음으로 주변을 살펴본다. 천수백 년 전, 이 산골에 돌 다듬는 소리로 온 계곡이 울렸을 것이고, 많은 석공들이 정성을 다해 정을 쪼고 탑을 만들었을 것이다. 계곡 건너편에는 돌로 쌓아올린 돌탑도 여러 기 목격된다. 물론 지금은 무너져 있지만, 탐방팀은 돌탑지 우측의 지능선으로 올라서서 위쪽으로 잠시 향하다가 다시 우측으로 10여분 사면길을 걸어 관음암 불상터에 도착한다. 해발 850m, 양지바른 단애의 암반 위에 위치한 불상터, 보는 사람마다 탄성을 지를 정도로 예사롭지 않은 곳이다. 지능선이 장당골을 향해 뻗어 내리다가 절벽을 이루는 능선 끝머리 거대한 암반 위에 불상터가 자리하고 있다. 정면으로 천왕봉을 마주보고 있고, 발아래 장당골을 품고, 뒤로는 병풍처럼 치밭목 능선이 흐른다. 주변 암반은 30여㎡ 정도의 좁은 공간이지만 아주 강한 기세가 느껴지는 명당이다. 이곳에 천년을 지켜온 석불이 있었고, 국가보물이 되었다. 석불이 놓였던 자리에 서서 천왕봉을 마주하니 감개무량하다.
천년을 지켜온 관음암 석불(국보 제233-1호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은 석불의 좌대에서 나온 사리함 명문에는 석불 조성 경위가 밝혀져 있다. 신라 혜공왕 2년(서기 766년)에 법승과 법연이라는 두 승려가 죽은 ‘두온애랑’ 화랑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불상을 조성하고 무구정광다리니경과 함께 석남암수 관음암(觀音巖)에 봉안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1250년 전, 신라인들은 낭도 무리를 이끌고 지리산 산중훈련이나 인근 전장에서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그를 화랑의 표상으로 삼아 이곳에 불상을 세우고 넋을 기렸던 모양이다. 주변 정황을 살펴볼 때 관음암(觀音巖)은 암자가 아니라 불상이 앉았던 거대한 바위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이고 불상은 노천에 안치했던 것 같다. 불상은 1947년 이씨 형제가 발견할 때까지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벼랑 끝에서 노천풍상을 견뎌내며 굳건히 자리를 지켜왔다. 발견 이후 한동안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데, 우여곡절 끝에 불상은 산청군 삼장면 내원사에 안치됐고 석불좌대에서 나온 사리함은 부산시립박물관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납석제호로 명명된 사리함은 골동품상을 거쳐 부산시립박물관으로 흘러들자마자 그 가치가 인정돼 1986년에 국보 제233호로 지정됐고, 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으로 명명된 석불은 1990년 보물로 지정됐다가 금년 1월 8일 ‘국보 제233-1호’로 승격됐다. 오랜 세월 동안 찬란한 문화유산이 자리했던 관음암 불상터, 이제는 휑한 모습으로 작은 돌 하나 꽂혀 그 자리를 표시하고 있다. 대를 이을 손자 불상이라도 하나 세워두면 또 다른 천년의 인연을 이어가지 않을까?
첫댓글 일어버린 암자터 탐구산행 같네요 저는 가보지 못하였지만 사진과 자료로 참고하겟습니다.
저또한 지리산에 가보지 못한곳이 많습니다.
코스가 짧지만 석남사터와 불상터를 둘러보면서 의미있는 산행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