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심수행장-5
수유재학 무계행자(雖有才學 無戒行者)
비록 재주와 배움이 있으나 계행이 없는 사람. 계와 율은 혼용해서 쓰면서도 다음과 같이 구별하기도 한다. 계(戒)는 범어 시라(尸羅,확인)로써, 소극적인 뜻으로는 심신의 허물을 막고 악을 그치게 한다는 방비지악(防非止惡)이고, 적극적인 뜻으로는 만선발생(萬善發生)이다.
대승율의장에서는 말한다.
"시라는 청량(淸凉)의 이름이다. 3업(三業)의 뜨거운 불길은 수행인과 선행을 모조리 불태워버린다. 계는 이런 불길을 잡아서 시원하게 끄기 때문에 청량이라고 이름한다."
영락본업경에서는 말한다.
"처음 3보의 바다에 들어서는 중생들은 먼저 신심이 근본이다. 그런 후에 불가(佛家)에서 수행하고 지낼 때에는 계가 근본이다."
형식은 제1, 제2, 제3, 등 번호를 매겨서,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 하는 금계이다. 예를 들면, 율의 3취정계, 재가 5계, 재가 8관재, 사미 10계, 범망경 보살 10중 48경계,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 등이 있다.
율(律)은 우파라차(優婆羅叉, Uparksa)의 번역이며, 비니(毘尼, Vinaya, 신역으로는 비나야毘奈耶)의 의역. 비니의 직역은 멸(滅), 혹은 조복(調伏)이다. 율은 행위규범이다. 율의 해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취교론(就敎論)으로, 죄의 경중과 범하고 범하지 않음을 말한다. 둘째 비니의 취행변(就行辯)으로 조복(調伏)이다. 계(戒)는 실천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계행(戒行)이며, 율호(律虎)는 계율의 행이 맹렬한 호랑이 보다 용맹스럽다는 데서 나온 말이다.
여보소도 이불기행(如寶所導 而不起行)
보배가 있는 곳으로 인도하나 일어나 가려고 하지 않는 것과 같고. 계정혜(戒定慧) 3학(三學)은 하나이면서 셋이다. 먼저 계를 잘 지킴으로 해서 마음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선정삼매에 들어서 마음이 밝아지고, 밝아지면 반야 지혜로 정각을 성취한다.
수유근행 무지혜자(雖有勤行 無智慧者)
지혜가 없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사람, 이런 어리석은 사람은 애를 많이 쓰는 반면 실제로는 효과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성불이라는 목표 설정을 잘하여 지혜롭게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간다는 뜻.
유지인 소행 증미작반(有智人 所行 蒸米作飯)
지혜가 있는 사람의 소행은 쌀을 쪄서 밥을 짓는 것과 같다. 이 말은 가장 알기 쉬운 비유이지만, 너무 쉬워서 오히려 실천이 잘 안 된다. 과연 쌀로 밥을 짓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저마다 제 잘난 멋에 똑똑한 체 하지만 성인의 눈으로 보면, 대부분이 모래로 밥을 짓는 중생들이다. 상근기는 60일, 중근기와 하근기는 90일에서 120일이면 불도를 성취한다는 게 선지식의 의견이다. 우리가 하고 많은 세월동안 공부를 한다고 하지만 목적달성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데, 이 이유가 무엇인지 한번 돌아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공지끽식 이위기장(共知喫食 而慰飢 )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배움이 필요한 게 아니고 제 이름 석자만 쓸 줄 알면 된다는 단순한 가르침이 있다. 원효 스님의 표현을 빌면, 배고프면 밥 찾아 먹는 사람이면 된다는 참으로 간명한 말씀이다.
세존 재세시 주리반득(周利槃得, Cudapanthaka) 형제의 일화가 있다. 부모가 여행 중에 아들을 낳을 곳은 길가였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은 길이란 뜻으로 반득이라고 지었다. 다음에 둘째 아들을 낳을 때에도 길가에서였다. 역시나 이 아이의 이름은 작은 길이란 뜻으로 주리반득이라고 지었다.
주리반득은 제 형 주리와는 달리 기억력이 나빠서 돌아서면 잊어먹고 돌아서면 잊어먹고 했다. 형을 뒤쫓아서 출가는 하였으나 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때 출가 수도를 단념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었는데 부처님이 쓸고 닦자, 쓸고 닦자 하는 것으로 공부를 삼게 하셨다. 먼지를 털면서 쓸고 닦자, 쓸고 닦자, 하고 수심(修心) 공부를 한 것이다.
주리반득이 우직스럽게, 쓸고 닦자 하는 수심(修心) 공부를 잘하여 무상대도를 성취하였을 때였다. 어느 날 비구니 아란야께서 부처님께 법문을 청하는 일이 있을 때에, 부처님은 그를 대신 보냈을 정도로 당당한 스승 아라한이 되었다.
부지학법 이개치심(不知學法 而改癡心)
수년 전 교도소 안의 한 수형자(受刑者)의 경우이다. 그가 교도소 창틀 밖으로 빠져나오기 위해서 자기 체중을 30 키로 빼야 했다. 이 실화는 잘못된 경우이긴 하나 배울 만한 것이 하나가 있다. 수형자(受刑者)의 확고한 목적의식이다. 밖으로 나가면 광명의 세계다, 자유의 세계다, 하는 일념! 그는 자기 체중의 반에 가까운 감량에서도 견디어냈다. 체중은 피골이 상접하리 만큼 줄었다. 그리하여 좁은 창틀 사이로 성공적으로 탈출을 하였던 것이다. 나중에 다시 붙잡히기는 하였지만 시사하는 바는 크다.
행지구비 여거이륜(行智具備 如車二輪)
지혜의 상징인 문수 보살과 실행의 상징인 보현 보살, 이(理)와 사(事), 앎과 행은 수레의 두 바퀴처럼 한 짝이라는 뜻.
자리리타 여조양익(自利利他 如鳥兩翼)
대승 보살의 이상이다. 승만경에 따르면, 제 수행 시간을 따로 갖지 않고 남의 수행을 돕는 입장에서 살다보면 오히려 자기의 참 수행이 된다고 한다.
득죽축원하되 부해기의하면 역부단월에 응수치호며
得粥祝願하되 不解其意하면 亦不檀越에 應羞恥乎며
득식창패하되 부달기취하면 역부현성에 응참괴호아
得食唱唄하되 不達其趣하면 亦不賢聖에 應慚愧乎아
인악미충이 부변정예하야 성승사문이 부변정예이라
人惡尾蟲이 不辨淨穢하야 聖憎沙門이 不辨淨穢이라
시주 받고 축원하더라도 그 참뜻을 이해 못하면 시주자(단월)의 공양한 그 뜻에 부끄럽지 아니한가, 공양 받고 염불 범패하지만 깊은 이치 못 깨달으면 그 또한 성현에게 얼마나 죄스럽고 부끄러운 일인가.
사람이 구더기가 깨끗하고 더러운 것 가리지 못함을 싫어하듯이, 성현도 사문이 더러움(세속)과 깨끗함을 가리지 못하는 것 싫어하느니라.
득죽축원 불해기의 (得粥祝願 不解其意 亦不檀越 應羞恥乎)
아침에 죽을 먹는 것은 선가(禪家)의 풍습이라고 해서 마을에서도 요즘은 선식(禪食)이라고 이름한다. 죽을 먹으면 심신의 건강에 다 좋다는 말이다.
단월(檀越, Dnapati)은 보시를 행한 사람, 시주(施主), 시주자(施主者)를 말한다. 어떤 대가를 전혀 바라지 않고 남에게 준다는 범어 Dna는 단(檀), 단나(檀那) 타나(陀那) 또는 단월(檀越, Dnapati)이라고 번역한다. 탁발 제도가 지금은 사라졌지만 거리에 나가 탁발해서 공양물을 해결한다면 수행인의 자세에는 큰 변화가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탁발을 할 때만이라도 진지하게 겸손한 마음을 배워 시주 은혜를 더 생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득식창패 부달기취(得食唱唄 不達其趣)
밥을 얻어 범패하되 그 취지에 미치지 못하면, 자칫 타성에 빠지면 다만 습관적으로 5관게(五觀偈) 등 소심경(小心經) 식단 작법을 따라서 하게 된다. 매일 새롭게 자신을 추슬러 일으켜 세우고 삼보의 은혜와 시주의 은혜, 중생의 은혜 등을 생각한다는 뜻.
범패(梵唄)의 뜻을 여러 글의 해설에서 옮겨본다.
범패(梵唄)의 범은 범천(梵天)이며, 범패의 패는 범어 패닉에서 온 말로, 뜻은 찬송(讚頌) 또는 찬탄(讚歎)이다. 보통 경을 읽으면서 소리를 길게 뽑는 범영(梵詠)과 게송을 읊는 가영(歌詠) 등이 범패이다 범패의 내력은 부처님의 재세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부처님이 대각을 성취하셨을 때의 일이다. 그때에 선열(禪悅)에 잠긴 부처님의 장엄한 모습을 불전에서는 이렇게 묘사한다.
"대지(大地)가 18종으로 진동할 때에 하늘에서는 꽃비가 내리고(天雨妙花) 하늘에서 미묘한 음악이 연주되었다(天秦妙樂)."
이와 같이 천용8부(天龍八部)의 제신(諸神)들이 부처님께 꽃 공양과 음성 공양을 올렸다는 내용이다. 이 음성 공양이 바로 불교 음악 범패의 시초이다. 뒷날 역대 대덕 스님네는 청아한 범성으로 음률을 넣어 게송(偈頌) 등을 읊었다. 이것은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 예술의 꽃이 핀 한 예이다.
범패의 전래는 삼국시대. 불교의 전래와 자리를 같이 해온 범패는 예불송(禮佛頌)이 바로 범패이다. 구도자의 서원을 담은 음성 공양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서양에서는 불교의 예불송을 하나의 음악으로 간주한다. 어느 해에 열린 이탈리아 세계 음악제에서는 아예 예불송이 세계 음악 프로그램 속에 들어 있을 정도였다.
한편, 경전에서는 노래하고 춤을 추는 일, 가무(歌舞)를 금하고 있다. 장아함경(長阿含經) 제팔 선생경(善生經)에는 이렇게 말한다.
장자(長者)의 아들 선생(善生)에게, 여섯 가지로 재물에 손해 가는 업(業)이 있는데 그 중에 기악(伎樂)과 가무(歌舞)에 빠지는 일이라고 하였다. 율부(律部)에서는 비구(남자 출가자), 비구니(여자 출가자)는 물론 우파새(남자 신도), 우파이(여자 신도)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금하고 있다. 그럼, 범패는 해도 괜찮은가? 이것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을까.
법원주림(法苑珠林 第36 唄讚篇 音樂部)에서는 말한다.
부처님 재세시에 사위성의 사람들은 스스로 장엄한 범패를 지어 부처님께 음성공양을 하였다는 내용이다. 부처님은 이 공덕으로 미래 일백겁 중에 악도(惡道)에 빠지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
범패의 기능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찬불(讚佛), 찬탄(讚嘆), 발원(發願)이다. 범패는 청아(淸雅)한 음율을 통하여 스스로 환희심(歡喜心)을 일으키기 때문에 자기 수행의 뜻이 있다.
둘째, 불보살 명호를 낭송(郞誦) 예경(禮敬)할 때에 장엄한 형식을 갖추어서, 보고 듣는 사람들이 환희심을 내기 때문에 이웃 교화의 뜻이 있다.
기세간훤하고 승공천상은 계위선제니
棄世間喧하고 乘空天上은 戒爲善梯니
시고로 파계하고 위타복전은 여절익조가 부구상공이라
是故로 破戒하고 爲他福田은 如折翼鳥가 負龜翔空이라
자죄를 미탈하면 타죄를 부속이니라 연이어늘 개무계행하고
自罪를 未脫하면 他罪를 不贖이니라 然이어늘 豈無戒行하고
수타공급이리요
受他供給이리요
세간의 소란을 버리고 저 허공의 천상으로 오르는 데는 계율 지킴이 좋은 사다리가 되니
그러므로 계행을 깨뜨리고 남의 복밭이 된다는 것은(귀의 받는 대상이 된다 함은) 날개 부러진 새가 거북을 등에 업고 하늘을 나는 격이라,
자기 죄업 녹이지 못하면 남의 죄업 녹여줄 수 없느니라. 계행없이 어찌 다른 이의 공양을 어찌 받으리요.
자죄미탈 타죄불속(自罪未脫 他罪不贖)
지은 죄를 진정 참회하지 못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참회하도록 하여 그 죄를 덜어줄 수가 없다는 뜻. 자기 문제 해결이 안된 사람이 어찌 다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가 있느냐 하는 말이다.
기무계행 수타공급(豈無戒行 受他供給)
어찌 계행이 없이 다른 사람의 준 공양(供養)을 소화시키겠느냐. 도적은 따로 없고, 수행이 없이 시주의 공양을 녹여 먹는 것이 큰 도적이라는 말이니 무서운 경책이다.
계행과 관련하여 포살과 사원 청규 등 두 가지 문제를 생각한다.
첫째, 우리 한국 승가의 지계(持戒) 회복을 위한 방안으로, 보름마다 포살(布薩)을 실시하는 일이다. 계율에 대한 인식이 높아가고 있는 오늘날, 무엇보다 먼저 불제자 모두가 포살에 동참하도록 하는 일이다.
부처님 재세시부터 전해 내려오는 포살은 수계자가 한 자리에 모여서 계율을 낭송하고 참회하고 그 처리를 법다이 하는 법석이다.
비구계(혹은 비구니계) 포살은 비구계(혹은 비구니계) 수지자(受持者)만 따로 모여서 한다. 오대 총림에서는 결제 석 달 동안 실시하고 있다. 그 외 사찰에서는 한 곳도 있고 하지 않는 곳도 있다. 새로운 문제 제기로써 지계 정신을 새로 가다듬기 위해서는 포살이 꼭 필요하다.
초기불교에서 포살이 불자들에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의 윤리 의식을 심어주는 좋은 법회였다. 불자 생활의 근본은 계율의 실천이다.
둘째, 계초심학인문이나 백장 청규같은 사원 청규(淸規)의 발달을 가져와, 젊은 새 세대의 불제자들에게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일이다.
사장(死藏)된 계율이 많은데 언제까지 이대로 둘 것인지 모른다. 사원 청규의 제정은 한국 불교가 안고 있는 과제의 하나이다. 부처님의 근본 정신은 다치지 않고 오히려 이를 보다 잘 살려내기 위해서 필요하며, 이것은 바로
앞서가는 시대의 안목를 의미한다.
무행공신은 양무이익이요 무상부명은 애석부보이라
無行空身은 養無利益이요 無常浮命은 愛惜不保이라
망룡상덕하야 능인장고하고 기사자좌하야 영배욕낙이니라.
望龍象德하야 能忍長苦하고 期獅子座하야 永背欲樂이니라.
행자심정하면 제천이 공찬하고 도인이 연색하면 선신이 사리하나이라
行者心淨하면 諸天이 共讚하고 道人이 戀色하면 善神이 捨離하나이라
사대가 홀산하야 부보구주니 금일석의라 파항조재하고저
四大가 忽散하야 不保久住니 今日夕矣라 頗行朝哉하고저
수행없는 이 헛된 몸 길러 봤자 이익 될게 없고 부평초 같은 목숨 사랑하고 아껴 보았자 보전치 못하리라.
성현들의 덕을 바라거든 능히 오래 동안 수행의 고통을 잘 참고 부처님의 열반자리 기약하려거든 영원토록 욕락을 등지도록 할 것이니라.
수행자의 마음 자리 청정하면 모든 천신이 칭찬하고, 도 닦는 이가 탐색하면 여러 선신들이 버리고 떠나느니라.
사대육신은 홀연히 흩어져 오래도록 보전치 못하나니 어느덧 금생도 저녁나절(황혼)이고 자뭇 아침(내생)이 닥쳐오는 구나.
<해설/ 송광사 지묵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