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탐방]
그때 그 길을 달리며
해담 조남승
[국제문단문인협회]자문위원
온 천지를 뒤덮은 양명(陽明)한 달빛과 도란거리는 별들의 속삭임에 밤새 깊이 잠들었던 산과 들이 산들바람에 실려 온 아침햇살에 차가운 이슬을 훌훌 털어내고 해맑은 모습으로 또 하루의 새날을 희망으로 맞이한다. 푸르렀던 나뭇잎들 또한 밤하늘을 수놓은 별빛과 영롱한 이슬로 말끔히 세수하고 맑고 파란 하늘을 이고 내려쬐는 한낮의 따사로운 햇볕과 청량한 갈바람에 형형색색으로 곱게 단장을 하고 마지막 정열을 불태운다. 높은 산에서부터 붉게 타오르더니 이젠 인근 공원의 나무들도 울긋불긋 화려한 옷차림으로 너울너울 춤을 추고 있다. 이맘때 국도를 따라 시골길을 달리다보면 황금물결이 일렁이던 들녘엔 추수가 모두 끝나고 소의 사료를 하고자 하얀 비닐로 갈무리한 짚 뭉치만 휑한 들판에 이리저리 흩어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또 탐스럽게 익은 감과 사과가 빨간 꽃밭을 이루어 감탄사를 자아내게 한다. 시절이 이렇게 좋은 때이고 보니 전국적으로 각 지방마다 여러 문화축제가 열리고 결혼식도 많이 있어 주말만 되면 이리저리 나들이 준비에 부산을 떤다.
이번 주에도 어제와 오늘 연거푸 강남에 있는 예식장엘 가게 되었다. 내가 사는 곳이 성북구 장위동이기 때문에 한강을 건너 강남에 가기위해선 으레 내부순환도로를 이용한다. 그러나 오늘은 좀 돌아가더라도 일찍 출발하여 중랑천을 따라 이어진 동부간선도로로 가기로 했다. 중랑천과 동부간선도로에서의 추억을 더듬어보고 싶어서였다. 내가 한창 젊었을 때 서초구 우면산 기슭에 있는 서울시소방학교에서 몇 년 동안 교수로 근무를 했다. 그때 살던 곳이 도봉구 창동이었기에 동부간선도로와 성수대교를 통하여 출퇴근을 하였다. 몇 년 동안이나 아침저녁으로 같은 길을 수없이 오갔다. 그렇게 매일 다니는 도로였건만 주변의 분위기는 항상 다른 빛깔과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오늘 모처럼 그때 그 길을 달리며 차창으로 스쳐지나가는 만추(晩秋)의 중랑천을 훔쳐보고 싶어서였다.
일요일이어서인지 도로가 하나도 막히질 않아 차들이 쌩쌩 달렸다. 난 일차 선으로 가면서도 매너 없이 60키로 정도의 저속으로 달리며 가을빛에 젖어든 중랑천을 곁눈질하였다. 백미러로 후방을 살펴보니 내 뒤에 따라오는 차들이 계속 차선을 바꾸어 추월해나갔다.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도로가 아주 한산하여 큰 불편을 끼치는 것은 아니었기에 계속 서행을 했다. 천천히 달리며 봐도 무슨 꽃인지 알아볼 수 없는 노란 꽃밭이 언뜻 지나가버리고 만다. 꽃 이름의 궁금함이 나의 차량을 도로변 비상주차공간으로 이끈다. 차에서 내려 둔치의 공원을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뛰는 사람, 운동기구에서 운동을 하는 사람 등등 많은 사람들이 짙어가는 가을정취에 젖어들어 한껏 즐기고 있었다. 좌우로 공원과 동부간선도로를 거느리고 흐르는 중랑천의 물은 급히 내달리는 차량들과는 대조적으로 조금도 재촉하지 않고 유유(悠悠)하기만 하다. 중랑천은 양주에서 의정부를 거쳐 서울에 이르게 되면서 여러 지류의 물들과 만나 수량을 늘리며 함께 흘러간다.
특히 수락산과 불암산에서 흘러드는 계곡물과 도봉산과 북한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을 맞이하고 하류에 이르러서는 중랑물재생센터에서 방류하는 물과 청계천이 합류하여 서울시민의 젖줄인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이러한 중랑천은 70년대까지만 해도 오폐수로 인하여 한여름이면 코를 막고 지나쳐야 할 정도로 악취가 심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환경 정화사업으로 맑은 물이 흐르면서 시민들의 공원 산책로와 자전거길이 조성되고 사철 새들이 찾는 철새도래지가 되었다. 둔치엔 생활체육을 하는데 필요한 각종시설과 기구들이 갖춰져 있고 꽃밭이 잘 조성되어 있는가하면, 천변(川邊)엔 다양한 야생화들이 중랑천에 나온 사람들의 눈길을 붙잡는다. 한여름 무더위를 이기며 무성하게 자란 갈대와 억새의 꽃들이 청명한 가을햇살에 반짝이며 바람에 한들거린다. 가을장미꽃이 화사하면서도 수줍은 미소를 짓는다. 자전거길옆엔 수크령, 까실쑥부쟁이, 둥근잎유홍초, 가을망초의 꽃들이 티 없이 맑은 눈빛으로 나를 매혹시킨다. 더 머무르면 예식장의 도착이 늦어질 것 같아 다시 차에 올랐다. 다른 차량들과 같이 좀 빨리 달렸다. 하류에 있는 다리를 건너니 좌측에 있던 중랑천이 우측으로 바뀌었다. 나는 자연스레 일 차선에서 가변차선으로 차선을 바꿔 개울을 스쳐보며 달렸다.
살 곶이다리 북단 끝에 ‘태조 이성계 축제’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었다. 살 곶이란 이름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조선시대 살 곶이다리가 있던 뚝섬일대는 들판이 넓고 풀과 버들이 무성하여 조선 초부터 나라의 말을 먹이는 마장(馬場)과 군대의 열무장(閱武場)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군사훈련의 일종인 활쏘기 장소로 사용되어 화살곶이 들(箭串坪/전관평)이라고 불렸던 것에서 유래됐다는 설이 있다. 또 한강물과 중랑천이 합수(合水)되는 아우라지에 살 곶이다리가 있는데, 이곳의 물살이 세다하여 물살의 '살'과 합수머리의 가변에 쌓인 흙의 턱이 뾰족이 나왔으므로, 그 흙의 턱을 '곶'이라 하여 물살이 센 곳의 뾰족한 땅이라는 뜻으로 ‘살 곶이’란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그리고 조선의 태조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 둘과 정도전을 제거하고 결국 태종이 된데 대한 노여움으로 태조는 함경도에 있는 본궁(별궁)에 칩거하면서 그 유명한 ‘함흥차사’란 말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종국엔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태조가 함흥에서 돌아온다고 하자 태종이 전관평(箭串坪)에 나와 장막을 설치하고 환영 준비를 하였다. 태조를 영접하러 나온 태종을 본 태조 이성계는 화가 치밀어 올라 노기 띤 얼굴로 아들인 태종을 향하여 강궁(强弓)에 화살을 메워 쏘아버렸다. 그러나 아버지의 성품을 잘 아는 태종은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였던지라 장막의 나무 기둥에 몸을 숨겨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이후 이 사건이 일어난 전관평(箭串坪)을 가리켜 화살이 꽂힌 자리라는 뜻으로「살 곶이」라고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전설에 따라 살 곶이다리에서 ‘태조 이성계축제’를 하는 것 같다.
조선의 태조와 그의 아들 태종을 생각하면 자연히 정도전이 떠오르고 정몽주의 곧은 충절이 그려진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목은(牧隱) 이색(李穡)을 스승으로 모시고 동문수학한 친한 벗이었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가고자하는 길이 달랐으며, 같은 사람에게 죽음을 당하여 생을 마감하게 되는 기이한 인연이었다. 포은 정몽주는 조선의 개국에 동조치 않고 고려의 왕조를 끝까지 지키려 하였고, 정도전은 이성계를 도와 조선개국에 공을 세워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지만, 왕자 중에서 개국에 쏟은 힘이 제일 크고 후에 세종대왕을 탄생시킨 이방원이 아닌 태조의 계비소생을 세자로 내세움으로서 두 사람 모두 이방원(태종)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자 포은 정몽주는 오히려 고려의 충신으로 신원(伸寃)되었고, 정도전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난신(亂臣)이라 여기는 죄인신분이 되어 자손들까지 숨어살게 되었다. 이러한 정도전의 신분이 복권된 건 조선말의 신정왕후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신정왕후가 살아온 조선 후기의 실상을 살펴보면, 외척의 세력에 의한 세도정치가 극에 달하여 왕권이 약화되었고 정치상황이 문란하여만 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조판서와 평안도관찰사를 지냈으며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을 방문하여 애민정신으로 고구마를 들여온 문익공(文翼公) 조엄(趙曮)의 증손이며 풍은 부원군 조만영의 딸로서 불과 12살의 나이에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빈이 되어 헌종을 낳은 신정황후 조대비가 종묘사직을 걱정하며 은인자중하고 있었다. 그 당시 순조는 총명하고 영특한 19세의 효명세자를 대리청정 시켰다. 조선후기의 마지막개혁군주로 평가받고 있는 효명세자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를 탈피해가면서 왕권의 확립과 개혁정책을 강력히 펼쳐나갔다. 그러나 불과 3년 만인 22세의 나이로 요절함으로서 조선의 개혁과 변화의 꿈이 무너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 되었다.
따라서 조대비는 왕실외척의 세도정치세력에 짓눌린 채 숨죽이며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때 순조가 붕어(崩御)하자 당시 8세의 헌종이 왕위에 올랐다. 이때 효명세자가 익종으로 추봉됨에 따라 조대비 또한 왕대비가 되었다. 하지만 헌종 또한 후사도 없이 23세의 나이에 세상을 뜨고, 외척의 세력에 이끌려 왕위에 오른 철종마저 후사 없이 죽게 되자 궁의 최고어른인 조대비가 대왕대비가 되어 대원군의 둘째아들을 양자로 삼아 고종을 보위에 오르게 하였다.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조대비는 대원군을 내세워 부군인 효명세자가 펼치고자 했던 개혁정책을 적극 추진하도록 했다. 문란한 과거제도정비, 비변사혁파, 서얼허통, 호포법시행, 양반에 세금부과, 부패의 근원지인 서원철폐와 왕권회복을 위한 경복궁복원 등 실로 많은 개혁을 실현시키는데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특히 관리의 뇌물수수죄인 장오죄(臟汚罪)에 대한 엄격한 형정의 시행으로 국가기강을 확립해나갔다.
실로 조대비는 당대의 여걸로서 역사를 새로 쓰기 시작한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내용은 2015년 7월 26일 KBS “역사저널 그날”이란 프로그램에서도 방영된 바 있다. 조대비는 경복궁(景福宮)이 복원되자 궁의 이름을 지은 정도전의 신분을 회복시키라는 전교를 내리면서 삼봉의 후손에게 건원릉참봉(健元陵參奉)을 제수하였다. 무려 500여년 만에 삼봉 정도전의 관작이 회복되고 봉화정씨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아울러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의 제사도 봉행케 하였다. 하지만 차차 대원군의 정치적 입지가 높아짐에 따라 조대비는 자연히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게 되고, 대원군 역시 명성황후의 세력에 밀려나고 말았으니 예나 지금이나 역사란 돌고 돈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중랑천하류를 지나다보니 오래전 잉어구출작전을 펼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 당시 난 서울시119특수구조대장으로 근무를 했다. 서울시 전체를 관할하는 기관이었기에 항상 긴장된 생활을 하였다. 대원들도 전원이 군 특수부대의 하사관출신들로서 한마디로 대단한 친구들이었다. 2000년 4월 21일 점심식사 후, 차 한 잔을 하고 있는데 중랑천잉어구출을 위한 출동명령이 떨어졌다. 내용인즉 낮 1시쯤 중랑천하류 수백 미터의 거리에 잉어 수십만 마리가 떼를 지어 호흡곤란 증세를 보이며 물위로 머리를 내밀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것이었다. 어제 갑자기 봄비가 많이 내려 중랑하수종말처리장에 빗물의 과다한 유입으로 용량이 초과되어 오폐수가 넘쳐흐르게 되었거나, 공장 등에서 폭우를 기회삼아 폐수를 방류시켜 물속의 산소가 부족하게 됨으로써 산란기를 맞아 한강에서 새물을 따라 중랑천에 올라온 잉어들이 죽기 직전이 되었을 거란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대원들과 함께 현장으로 급히 달려가면서 무전으로 각소방서의 화물차들을 현장으로 긴급 출동하도록 했다. 그리고 일선소방서 구조대의 지원출동도 요구했다. 불과 몇 분 만에 현장에 도착해보니 중랑하수종말처리장 아래부터 한강입구까지의 물위엔 잉어들의 뻐끔대는 입만이 가득차보였다.
이십 여대의 트럭이 동원되었지만 역부족일 것 같아 바로 소방헬기까지 출동시켰다. 현장에 출동된 전 대원들이 중랑천에 들어가 화물차와 헬기를 활용하여 잉어를 급히 한강으로 수송하는 잉어구출작전을 숨 가쁘게 펼쳤다. 사찰에서 신도들이 물고기방생행사를 하는 것에 비하면 정말 대단한 방생작전이었다. 내 생전에 그렇게 큰 잉어는 처음 보았으며 앞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힘께 나 쓰는 구조대원들도 눈알이 꼭 소눈깔처럼 큰 잉어를 혼자 들기란 그리 쉽질 않았다. 잉어구조작전이 100% 만족스럽진 못했지만 그런대로 최선을 다한 보람 있는 작전이었다. 이를 두고 해외토픽에서 한국은 소방헬기를 동원하여 잉어를 구조 할 정도로 자연보호정책이 대단한 나라라고 극찬을 했다는 후문이 들려왔다. 그 뒤로도 중랑천에 인접된 소방서에서의 중랑천 물고기 구출작전과 물고기떼죽음의 뉴스가 여러 차례 보도되었다. 그런 뉴스를 듣거나 중랑천을 지날 때마다 제발 한강으로 빨리 보내달라는 애원의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던 잉어들의 모습이 아롱거렸다. 커다란 입을 뻐끔거리며 내 눈을 빤히 쳐다보았던 그때 그 잉어들은 지금도 한강을 헤엄치며 잘 살아가고 있을까?
예로부터 사람과 잉어 간에 얽힌 내용의 설화들이 많다. 따라서 잉어를 소재로 한 민화나 동양화도 꽤 많은 편이다. 옛날에는 늙은 잉어가 변하여 용이 된다고 믿으면서 잉어같이 생긴 어룡(魚龍)을 그리거나 만들기까지 하였다. 어룡의 몸은 큰 잉어 같이 생기고 머리만 용머리로 나타나 있는데, 사찰에 가면 어룡모양으로 만들어진 목어(木魚)가 매달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또 아침에 해가 떠오를 때 물속에서 커다란 잉어가 물결을 치며 공중으로 뛰어오르는 모습의 약리도(躍鯉圖)를 많이 그렸다. 중국의 삼진기(三秦記)란 책에 “용문(龍門)은 황하(黃河)의 상류에 있는 협곡인데 물살이 폭포 같으며 큰 고기들도 쉽게 오르지 못한다. 일단 위에 오르는데 성공한 잉어는 소미성룡(燒尾成龍/우뢰와 번개가 쳐서 잉어의 꼬리를 불태워 용이 됨)하고, 떨어진 놈은 이마에 점이 찍혀 점액(點額)이 생긴다.”라는 전설이 있다. 이를 두고 등용문(登龍門)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후한서(後漢書) 이응전(李膺傳)에 나온다. 이에 따라 잉어그림은 과거에 급제하여 입신출세한다는 뜻을 담고 있어 과거 시험을 앞두고 있거나 관직을 얻고자 하는 사람에게 약리도(躍鯉圖)를 선물하였다.
또한 다산(多産)과 사업번창으로 부(富)와 명예를 얻어 높은 자리에서 지휘를 하고 무병장수를 하라는 뜻으로 잉어 아홉 마리를 그린 구여도(九如圖)를 선물하기도 하였다. 물고기 아홉 마리를 그린 그림을 물고기 어(魚)자와 발음이 비슷한 같을 여(如)자를 넣어 구여도(九如圖)라고 한다. 구여도(九如圖)는 시경(詩經) 소아편(小雅篇)의 천보(天保)라는 시에 아홉 번의 여(如)자가 나오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원래 이 시는 왕의 장수다복(長壽多福)과 나라의 기업(基業)이 장구하고 공고하여 왕조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기원하는 뜻이 담긴 시이다. 이 시에 나오는 것들을 모두 그린 그림을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라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궁궐 정전의 어좌 뒤편에 펼쳐있는 일월오봉병(日月五峯屛)이다. 천보(天保)라는 시의 내용 중에 여(如)자가 들어간 구절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늘이 뒤에서 받쳐주시니(天保定爾/천보정이)
흥성하지 않음이 없으시네(以莫不興/이막불흥).
높은 산 같고, 넓은 대륙과 같으며(如山如阜/여산여부)
치솟은 산등성이와 큰 언덕과 같고(如岡如陵/여강여릉)
넘실넘실 흘러드는 개울과 같아(如川之方至/여천지방지)
나날이 더하는 복 한이 없도다(以莫不增/이막부증).
언제나 변함없는 달과도 같고(如月之恒/여월지항)
나날이 떠오르는 밝은 해와 같으시니(如日之升/여일지승)
저기 저 남산과 같으신 수명(如南山之壽/여남산지수)
무너지고 이지러짐 다시없으리(不騫不崩/불건불붕).
소나무와 측백나무 무성히 자라듯(如松柏之茂/여송백지무)
나라의 기업(基業)이 무궁히 이어가오리(無不爾或承/무불이혹승)
이와 같은 축송(祝頌)의 뜻이 담긴 천보구여도(天保九如圖)나 물고기 아홉 마리가 노니는 구여도(九如圖)를 그려 시의 내용을 은유적으로 표현하였다.
어느덧 동부간선도로를 벗어나 성수대교의 진입로에 들어서게 되면서 오래전에 있었던 성수대교의 붕괴사고가 떠올랐다. 서초동 소방학교 교수로 근무할 당시 요즘같이 늦가을이었던 1994년10월 21일, 아침을 먹는데 어머님께서 ‘간밤의 꿈에 출근길이 많이 막히는 꿈을 꾸었으니 좀 서둘러 나가는 게 좋겠다.’라고 하셨다. 난 어머님의 말씀대로 평소보다 약 십여 분정도 일찍 출발하였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동부간선도로를 거쳐 성수대교를 막 건너 압구정동쯤 갔을 때였다. 라디오방송에서 조금 전 7:38경에 성수대교의 일부가 붕괴되었다는 아나운서의 격앙된 목소리가 가슴을 쿵하고 내리쳤다. 난 정말 아찔하였다. 불과 몇 분전에 내가 건너온 다리가 아니던가! 그날 아침 내가 좀 일찍 서두르지 않고 평소처럼 출발하였다면 어찌되었을까? 어머니와 자식 간엔 영적으로 통하는 것이 있기에 출근길의 사고에 대하여 어머니의 꿈에 예시되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성수대교를 건너며 무심히 흐르는 한강물을 쳐다보았다. 맑은 가을햇살이 강물에 미끄러져 한강은 윤슬로 가득 차 눈이 부셨다.
한강을 건너 조금 달리자 역삼동에 이르렀다. 사거리에 접해있던 특급호텔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시 신축을 하느라 터파기 공사가 한창이었다. 전 호텔주인이 종친의 형님으로 가깝게 지내던 터라 가끔씩 들르던 호텔이었다. 호텔의 모기업인 건설회사의 경영난으로 호텔까지 매각하게 된 것이다. 공사 부지를 차로 한 바퀴 돌아보니 호텔이 있을 때 보다 면적이 훨씬 더 넓게 느껴졌다. 참으로 허망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양심막선어과욕(養心莫善於寡欲)이요, 과욕초화필망(過慾招禍必亡)이란 말이 견금여석(見金如石)이란 글자와 뒤섞이어 긴 한숨으로 새어나왔다. 인근에 있는 예식장에 도착하여 지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점심식사를 하고난 뒤 집에 돌아오기 위해 또다시 성수대교를 건너 ‘서울 숲 공원’을 끼고 동부간선도로로 진입을 하였다. 예식장에 갈 때처럼 서행을 하면서 슬쩍슬쩍 주변을 쳐다보며 달렸다. 중랑구를 지나 노원구에 접어들 무렵 중랑천공원의 둔치로 들어가 주차해 놓고 개울가를 걸으며 주위를 살펴보았다. 내가 서있는 곳이 바로 지하철 6호선이 중랑천을 통과하는 지점이었다. 노원소방서에서 근무할 때의 추억이 떠올랐다. 벌써 20년이 지난 1998년 5월 2일이었다. 아침을 먹는데 전날 밤부터 내리기 시작한 봄비가 전국적으로 1백 미리 안팎이 되도록 쏟아 부어 피해가 속출하였다는 뉴스가 나왔다. 수해걱정을 하며 막 출근을 하려는데 지하철 7호선이 침수되었다는 비상연락이 왔다.
출근을 재촉하여 현장에 출동해보니 의정부와 동두천 등 중랑천 상류지역에 내린 집중호우로 중랑천의 수위가 급격히 상승하여 지하철6호선의 공사를 위해 흙을 쌓아 설치한 중랑천의 임시제방이 붕괴되면서 6호선의 본선굴착구간을 통해 7호선 태릉입구역으로 다량의 물이 유입된 사고였다. 7호선으로 유입되는 물살과 물의양이 대단하였다. 유입된물은 정오도 채 안 돼 지상으로 연결되는 지하철입구계단까지 차올라 전 층이 물로 뒤덮였다. 또 태릉입구역을 좌우로 하여 11개구간이 물로 잠식되어버린 심각한 상황이었다. 따라서 서울소방본부장이 직접 현장에 출동하여 지휘를 하였다. 그러나 화재사건이 아니고 토목과 건설사항이라서인지 서울시에서 나온 관계관이 지휘권을 잡고 있었다. 그런데 서울시의 현장지휘권자가 지하철공사로 설치한 복공판을 열고 덤프트럭으로 다량의 흙을 부어 중랑천에서 유입되는 물을 막으라는 명령을 하는 것이었다. 난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일을 크게 그르치고 있다는 생각에 아찔하였다. 급히 소방지휘본부로 달려가 본부장에게 그 사실을 보고하면서 ‘저렇게 세차게 흐르는 중랑천의 급류가 다량으로 유입되고 있는데 흙을 투입하면 그 흙이 전부 7호선으로 밀려들어 갈뿐, 유입되는 물길은 막지 못하게 됩니다. 물길이 약할 때는 물이 산을 돌아가지만, 물의 유속이 빠르고 강하게 흐를 땐 산도 밀고 가는 게 물의 무서운 힘인 것입니다. 현대 정주영 회장이 서산간척지 공사를 할 때 가물막이를 어떻게 했습니까?’우선 중랑천의 제방이 무너진 부분에 대형 H형강을 투입하여 큰 물살을 먼저 받아쳐 돌린 다음, 그 사이로 물이 약하게 스며들게 되면 그때 흙을 붓도록 해야 합니다.’라고 나는 숨도 쉬지 않고 목청을 높였다. 그러나 작전은 서울시에서 나온 관계관의 주장대로 이루어져 복공판을 열고 진종일 흙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물길이 막히질 않자 하는 수 없이 저녁때가 돼서야 내가 주장한 대로의 작전이 전개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진종일 쏟아 부은 흙들은 7호선 역내로 모두 흘러들어가고 말았다. 따라서 묽은 죽이 되어버린 흙을 마대로 담아 반출하느라 많은 환경미화원들만 며칠 동안 큰 고생을 시켰다. 사고로 인한 피해가 막대하였고 복구 작업 기간 동안 극심한 교통체증을 빚었다. 수많은 사고 현장의 작전지휘를 하면서 절실히 느낀 것은 경험의 중요성이었다. 그래서 난 항상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기보다 백문천견이불여일습(百聞千見而不如一習)이라고 주장을 한다. 이는 비단 사고현장의 일만은 아니다. 정치, 경제, 행정, 문화 등 세상의 모든 일들에 있어 깊고 폭넓은 이론이 갖춰져야 되겠지만, 아무리 이론이 풍부하다 하더라도 실전경험이 뒷받침되지 못한다면 낭패가 따를 수밖에 없음을 잊지 말아야한다.
중랑천을 바라보니 이제껏 몇 마리씩 보이던 백로들이 상당히 많은 수로 떼지어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침에 하류 쪽에서 많이 보았던 검은색의 민물가마우지도 눈에 띄었다. 천변의 자전거 길을 천천히 걷다가 서다가를 반복하면서 중랑천의 가을 경치에 흠뻑 빠져들었다. 옛날 농촌에서 비를 맞으며 늦모를 심거나 밭일을 할 때 비를 피해보고자 짚이나 갈대 잎으로 만든 도롱이를 어깨에 걸치고 일을 하다가, 힘이 들면 빗물이 몸속으로 스며들지 않게 어깨를 꾸부정하게 숙이고 서서 잠시 허리를 펴고 있는 농부의 모양새와 같은 왜가리가, 집단으로 노니는 해오리(白鷺/백로)들의 옆으로 다가서질 못하고 멀찌감치 쓸쓸히 서있는 모습이 안쓰럽고 측은해 보였다. ‘그러게 백로들처럼 밝고 따뜻한 생명의 근원인 햇빛과 어둠을 감싸 안은 희고 맑은 달빛에 순백의 몸이 되도록 씻고 또 씻어내지 그랬어?’ 라고 왜가리에게 혼잣말을 하였다. 개울가로 다가가 자세히 보니 원앙과 깝작도요도 보였다. 둔치에 날아든 비둘기 떼들이 괜히 내 눈치를 보면서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풀씨를 정신없이 쪼아 먹는 모습이 꽤 흥미롭게 보였다. 이제 날씨가 추워지면 더 많은 겨울새들이 중랑천을 화려하게해줄 것이다. 청둥오리, 흰뺨검둥오리, 큰기러기, 쇠오리, 고방오리, 넓적부리, 댕기흰죽지, 물닭, 재갈매기, 백할미새, 댕기물떼새 등 다양한 철새들이 사진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의 발길을 끌어들일 것이다. 난 많은 종류의 새들 중에서 학이나 황새나 백로 등을 좋아한다. 어릴 적에도 들판의 무논에 고고히 서있는 황새를 신비스럽게 쳐다보곤 했었다.
논두렁에서 황새를 쳐다보는 어린 나에게 아버지께서 ‘황새는 우렁이를 대 여섯 개 이상은 먹어야 양이 찰 텐데도 그저 두세 개만 먹고는 더 먹질 않는다.’ 라고 말씀하셨다. 난 ‘우렁이가 논에 많이 깔려있는데 왜 더 먹질 않아요?’ 라고 여쭙자, 아버지께선 ‘논어 학이편에 보면 공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식무구포(君子食無求飽)하고 거무구안(居無求安)한다고 하셨느니라.’ ‘그 뜻인즉 군자는 먹는 것에 배부름이나, 거처함에 있어 편안함을 구하지 않는다는 뜻이야.’ ‘저 황새도 겉만 하얀 것이 아니라 마음속까지 깨끗하여 사람으로 말하면 군자와 같이 식탐을 하지 않는 거지.’ ‘너도 음식을 먹을 땐 입에 단것만 먹거나 과식할 때까지 먹으면 아니 된다. 알겠니?’ 라고 말씀하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검소한 생활로 소욕지족(小欲知足)을 할 줄 알아야 상락(常樂)의 삶을 살수 있다는 말씀이셨다. 정말 황새는 무논에서 먹이를 찾는데 힘쓰기 보다는 다리하나를 들고 외다리로 몸을 지탱한 채 진종일 흘러가는 구름과 먼 산을 바라보며 사색을 즐겼다. 그리곤 날이 저물면 청산의 솔숲으로 날아가 고요히 내려앉은 달빛에 잠을 청한다. 나도 황새나 백로처럼 나무 중에서 소나무를 좋아하고, 꽃 중에선 목단과 매화를 제일 좋아한다. 추광(秋光)이 짙어가는 중랑천 모래밭에서 온몸이 하얀 해오리들이 떼 지어 노는 모습이 그리 정겨워 보일수가 없어 한참이나 발길을 떼지 못하고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옛 부터 학의 고고한 기상(氣像)은 선비의 이상적인 성품과 장수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존재로 인식되어 왔다.
따라서 학을 그림이나 시의 소재로 한 경우가 아주 많다. 조선조에 백로를 소재로 한 시조 몇 편을 소개해 본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 마라/ 희고 흰 깃에 검은 때 묻힐세라/ 진실로 검은 때 묻히면 씻을 길이 없으리라.” 이 시조는 조선 중기의 학자 이시(李蒔)의 작품이다. 이시(李蒔)의 자는 중립(中立)이요, 호는 선오당(善迕堂)이며. 본관은 영천(永川)이다. “도(道)를 굽혀서까지 명예를 따르지 않는다.”는 아버지 이덕홍(李德弘)의 가르침을 받들어 벼슬을 단념하고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조선시대 어지러운 광해군시절에 동생이 북인들과 어울려 조정에서 벼슬을 하려하자 이를 말리며 지은 오로가(烏鷺歌)라는 시조이다. 동생은 이러한 형의 경고를 듣지 않음으로서 결국 인조반정으로 참화를 입게 되었다. 또 그 화가 선오당(善迕堂)에게까지 미치게 되자, 주변에서 오로가(烏鷺歌)의 시를 증거로 형의 억울함을 상소하여 큰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또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 마라/ 겉이 검은들 속조차 검을 소냐?/ 아마도 겉 희고 속 검은 것은 너뿐인가 하노라.” 라는 시는 여말선초에 고려에서 조선의 개국 공신이 된 이직(李稷)이 불사이군(不事二君)하지 않은 자신을 변론이라도 하듯 고려의 충신들을 향하여 읊은 시조이다. 그리고 고려의 충신 중에 충신으로 삼은(三隱)중의 한 사람인 포은(圃隱) 정몽주가 이성계의 문병을 가고자 할 때 팔순의 노모가 꿈이 흉하니 가지 말라며 “까마귀 싸우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낸 까마귀들이 너의 흰빛을 시샘하나니/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라는 시를 읊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성계의 문병을 갔다가 이방원으로부터 하여가(何如歌)를 듣고, 이에 대한 답으로 단심가(丹心歌)를 읊어 결국 돌아오는 길에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자객에게 피살되고 말았다. 자식인 정몽주의 죽음에 대한 피맺힌 슬픔의 한은 세상을 하직한 후에도 달랠 길이 없었음인지 노모의 비석은 눈물을 흘리듯 늘 물기에 젖어 있었다고 전한다.
이렇게 백로와 관련된 시만 있는 게 아니라, 그림으로 표현해내기도 하였다. 그림은 대부분 아홉 마리의 해오리를 그린 구사도(九思圖)를 많이 그렸다. 그 이유는 백로를 원래 사(鷥/해오라기)라고 하였기에 사(鷥)의 음이 사(思)와 같아서였다. 구사도(九思圖)는 논어(論語) 계씨(季氏)편에 실려 있는 다음의 글에서 유래된 것이다. "군자(君子)에게는 구사(九思)가 있어야 하니, 볼 때는 밝게 볼 것을 생각하며(視思明/시사명), 들을 때는 밝게 들을 것을 생각하고(聽思聰/청사총), 안색은 온화할 것을 생각하며(色思溫/색사온), 모습은 공손할 것을 생각하고(貌思恭/모사공), 말은 충실할 것을 생각하며(言思忠/언사충), 일은 신중히 할 것을 생각하고(事思敬/사사경), 의심나면 물을 것을 생각하며(疑思問/의사문), 분할 때는 어려울 것을 생각하고(忿思難/분사난), 이득을 보면 옳은 것인가를 생각하여야 한다(見得思義/견득사의)“라는 공자의 말이 있다. 조선의 율곡선생도 격몽요결에서 이 구사(九思)의 중요성에 대한 말을 하였다. 옛사람들은 이 구사(九思)의 내용을 글로 쓰거나 구사도(九思圖)를 그려 잘 보이는 벽에 걸어놓고 늘 기억하고 실천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또 공자가 말한 구사(九思)의 정신으로 살아야 평탄하고 행복한 삶을 살수 있다는 뜻으로 아홉 마리의 학을 그린 연하장도 있었다. 이러한 선조들의 삶이야말로 현대적 가치로 논할 수 없는 고고한 선비정신이 아니겠는가? 현대를 사는 우리들도 선조의 선비다운 정신이 면면히 이어지도록 실천해 가는데 노력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실천이 아닌 얄팍한 지식과 값싼 물질로 맞바꾸려하는가 하면 올바른 삶의 깊은 철학과 성찰이 없이 그저 임기응변적 삶을 추구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기만 하다.
따사로운 가을햇살아래 서로 우정과 사랑을 나누며 노니는 백로들의 모습이 갈대꽃과 어우러져 평화스럽고 아름다워 보였다. 지나는 사람들이 발길을 멈추고 백로들에게 사랑스런 미소를 보낸다. 또 백로들의 아름다운 몸짓을 사진에 담아내고자 사진가들이 카메라의 셔터를 연신 눌러댄다. 난 생면부지의 사진가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구사도(九思圖)에 대한 얘기를대로인데 물만 쉼 없이 흘러가고 있다. 물같이 흐르는 세월과 함께 나도 짙어가는 인생의 가을을 맞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 몸에 맑고 고운 가을빛이 내려앉았다하여 모두가 다 아름답게 보일 수 있겠는가? 저 백로들은 욕심과 시샘의 세파에 거무튀튀하게 물들지 않고 순백(純白)의 도(道)를 닦은 공으로 백광(白光)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것이다. 그 아름다움에 사람들의 발길이 찾아들고, 뭇사람들이 찬사를 보내며, 멋지고 평화스런 모습을 사진에 담아 마음의 안정과 행복을 찾으려하는 것이다. 인생의 가을을 맞은 나도 저 백로들처럼 주변 사람들에게 나의 삶이 아름답게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을이 겨울을 달고 오듯, 인생의 가을에도 머잖아 겨울이 따라올 텐데.... 라는 생각을 하면서 나의 애마(愛馬)에 올라 핸들을 잡는다.
*사진은 가을호 53쪽 참조
조남승: 충남 부여 출생, 아호-해담(海淡), 동국대학교 경영학과 졸업,서울 성북소방서장 등 역임, <국제문예>수필부문 신인상 수상 등단, [국제문단문인협회]자문위원
시집:『매화 향에 취해서』, 수필집:『만남 뒤엔 헤어짐이 올 수밖에』外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