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장편 소설
대은 변안열(大隱 邊安㤠)의 소설 불굴가(不屈歌)
김용채
3. 세 바퀴
섬돌 위에 떨어진 나뭇잎 위에 초승달이 내려앉는다. 소소리바람이 불어와 낙엽을 공중 부양시킨 채로 몇 바퀴 돌리다가 죽담 밑에다 내려놓는다. 달빛 싸라기가 그 낙엽 위에서 부서진다. 그리고 한 무더기 바람이 불어온다. 낙엽이 떼굴떼굴 구르면서 도망친다. 심양의 가을밤은 그렇게 깊어 가고 있었다.
“아버님, 자리에 드셨습니까? 소자 충가이옵니다.”
“아니다, 무슨 일이냐?”
“여쭐 말씀이 있사옵니다.”
“들어오너라.”
충가의 아버지 변양은 지금 막 자리를 깔려던 참이다. 마침, 둘째 아들 충가가 찾아와서 다시 이부자리를 개어 한쪽으로 밀어 놓으며 대답한다.
“자리에 드셔야 할 시간인데 불쑥 찾아와 송구합니다. 긴히 여쭐 말씀이 있어서요.”
“그리 앉아라. 그래 무슨 말이냐?”
“지금, 황실에 고려 왕세자가 숙위 생활을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충가는 원나라 황실에 볼모로 잡혀 와서 숙위 생활을 하는 고려 왕세자를 만나고 싶고, 가능하다면 그분 곁으로 다가가고 싶다고 말씀드린다.
“아버님께서 저를 그분과 인사시켜 주시면 좋겠습니다.”
“고려 왕세자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고…, 그 연유는 무엇이냐?”
충가는 평소에 할아버지의 나라, 고려를 동경해 왔다. 마침 고려 왕세자가 원나라 황실에 입조해 숙위 중에 있다고 한다. 이 틈에 가까이 다가가서 친분을 맺고, 신뢰를 쌓아 두고 싶다. 그러면 그 왕세자가 고려왕이 되어 환국할 때 따라갈 수 있을 것이다. 충가는 자신의 속셈을 털어놓고 도와주기를 청했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데 네가 굳이 고려로 가려는 연유는 무엇이냐?”
“우리 변 씨의 뿌리를 찾아 그곳에서 저의 뜻을 펼쳐 보고 싶습니다. 이곳 원나라에서는 아무래도 출신으로 인한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요. 이것은 아버님께서도 늘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래 알았다. 정녕 네 뜻이 그렇다면 내 언제 기회를 잡아보마. 다른 할 말은 더 없느냐?”
“더 없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걷었던 잠자리를 다시 살펴 드린 뒤에 충가는 아버지 침소에서 물러 나왔다. 충가의 말이 맞았다. 원나라에 와 있는 고려 왕세자는 언젠가는 고려로 돌아가 고려국 왕이 될 것이다. 그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충가도 할아버지의 고향 나라로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로부터 며칠 후, 충가는 아버지를 따라 황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고려의 왕세자를 만나게 된다. 아버지가 심양후라는 자리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무리 부마국에서 인질로 잡혀 왔다고는 할지라도 상대방은 일국의 왕세자가 아닌가?
“소신의 자식이옵니다. 이 아이의 할아버지는 고려 황주에서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늘 고려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고려에 대한 동경심이 큰아이이옵니다. 왕세자님을 뵙고 싶어 하기에 소신이 황공하옵게도 알현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물리치지 않으시고 알현을 허락해 주시니 그 은혜가 크옵니다. 소신은 이만 물러나 있겠사오니, 많이 귀여워해 주시면 그 은혜 고이 간직하겠습니다.”
심양후는 왕세자에게 예를 올린 후, 충가에게 잠시 후에 데리러 오겠으니 왕세자를 잘 모시라고 당부하고 알현 장을 먼저 빠져나갔다.
“소신, 변자 성(姓)을 쓰는 충가라 하옵니다. 왕세자님을 처음 뵙습니다.”
열 살 된 아이답지 않게 예를 잘 차린다. 왕세자는 주위를 물리친다. 한결 분위기가 부드러워진다. 왕세자가 충가를 위하여 배려하는 것이 틀림없다.
“지금 나이가 몇이나 되느냐?”
“열 살이옵니다.”
“그래? 나보다 네 살이 어리구나. 나는 올해 열네 살이고, 강릉부원대군이라 한다. 이곳에서 부르는 이름은 바얀 테무르(Bayan Temur)이다. 그런데 나를 만나고 싶은 연유가 무엇이냐?”
“네, 소신의 할아버지 고향 나라인 고려국의 왕세자님을 꼭 뵙고 싶었습니다. 외람되게 알현을 청하여 송구하옵니다.”
“아니다, 나도 너를 이렇게 만나고 보니 무척 반갑구나.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 자주 보았으면 좋겠구나. 그래 요즘은 무엇을 하고 지내느냐? 무예를 닦는다든가, 글을 익힌다든가….”
“예, 무술을 익히면서 틈틈이 글을 읽고 있습니다. 별로 신통치 않사옵니다.”
“그렇구나, 그래, 네 생각은 어떠하냐? 나와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겠느냐?”
“자주 뵐 수있는 기회를 허락하신다면 저로서는 다시없는 영광이겠습니다.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언제든지 하명만 하시옵소서.”
왕세자와의 만남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1344년 왕세자가 열네 살, 충가가 열 살 때였다. 두 사람 모두 고려국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고 있다. 대화가 쉽게 통하고 서로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고려국 왕세자와의 만남은 무척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하면서 충가는 아버지 심양후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강릉부원대군과의 만남은 어떠했느냐? 혹시, 예를 그르치는 일이라도 있지 않았느냐?”
심양후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조심스럽게 묻는다.
“걱정하실 일은 없었으니 안심하십시오. 왕세자께서는 자주 만나기를 바라셨고, 저는 흔쾌히 동의하였습니다. 물론 예를 갖추어 말씀을 나누었으니 아버지께서는 안심하시고 자리에 드시옵소서. 소자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오늘 많이 긴장을 한 탓인지 좀 피곤하군요.”
충가는 지금도 가슴이 뛰는 것을 느낀다. 징검다리를 건너면서 첫 번째 돌을 밟은 셈이다. 충가는 고려로 가기 위해 무예와 글쓰기에 더욱더 매진한다. 공주와의 약속을 지켜가면서 한편으로는 왕세자와의 신뢰를 쌓고,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고 인정받아가는 가운데 빈 가지에 눈꽃을 피우며 한 철 겨울을 보냈다.
충가는 부다시리와 한 약속을 충실히 지키려고 무척 많은 노력을 했다. 예전 같으면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부다시리를 만났지만, 왕세자를 만나기 시작한 뒤부터는 그렇지 못했다. 왕세자가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했고 그 횟수가 점점 더 많아졌다. 왕세자와 같이 보내는 시간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충가가 고려로 갈 수 있는 확률은 그만큼 더 커지는 것이다. 그러나, 부다시리를 만나는 일도 충가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다. 한꺼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니 여간 힘이 드는 게 아니다. 무슨 뾰족한 수가 없을까? 충가는 행복한 고민에 빠진다.
“부다시리, 할 말이 있어.”
충가가 왕세자를 처음 만나고 보름 정도 지나, 부다시리와 오랜만에 말타기 연습을 했는데, 자주 들리던 선녀탕 가에서 잠시 숨을 돌리고 있을 때, 충가는 머뭇거리면서 말을 꺼낸다.
“할 말? 해봐.”
부다시리는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 충가의 표정을 보고 웃으면서 대답한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충가가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나, 고려국 왕세자님과 만났어.”
툭, 내뱉듯이 말을 해 버리고 부다시리의 표정을 살핀다.
“뭐라고? 금방 너 뭐라고 했어?”
이번에는 부다시리의 두 눈이 똥그래진다. 놀란 토끼 눈이다.
“그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단숨에, 육하원칙을 나열하며 부다시리는 충가 옆으로 바짝 다가선다.
충가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며칠 전에 고려국 왕세자를 만났고, 요즈음은 만나는 횟수가 잦아진다는 말을 한다.
“어머, 잘됐네. 그러고 보니 충가, 너 정말 대단한 아이구나. 고려국 왕세자를 그렇게 자유자재로 만나다니…. 그래서, 왕세자는 어떻게 생겼는데? 마음씨는 어떨 것 같았어?”
부다시리는 숨 가쁘게 묻는다. 궁금한 보따리를 한꺼번에 확 풀어놓는 것 같다. 충가는 하나하나 자세하게 답변해 준다.
“그래서 말인데, 앞으로는 우리가 둘이서만 만날 수 있을 기회가 자주 올 것 같지 않아. 왕세자가 나를 찾으면 즉시 달려가야 하거든. 나, 어떻게 하지?”
“그럼, 우리가 못 만나게 될 수도 있겠네? 애, 그건 안돼. 절대 안 된다구!”
부다시리의 목소리가 갑자기 커진다.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는데, 너만 좋다면, 그리고 왕세자가 허락한다면 셋이 같이 만나면 어떨까? 글 쓰는 이야기나 고려국 이야기는 무척 재미있어. 다만, 무예는 능숙하지 못한 것 같애. 나보다 네 살이나 위인데도 형편없는 실력이야. 무예에 흥미를 가진 것 같지도 않고….”
“셋이 같이 만난다면? 에이 나는 좀 싫다. 나는 너하고만 같이 있고 싶어. 무슨 좋은 방법이 없을까?”
부다시리가 난처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면서 또박또박 분명하게 자기 생각을 밝힌다. 난처한 것은 오히려 충가 쪽이다. 왕세자와의 만남도, 부다시리와의 밀회도, 놓치고 싶지 않다. 한참 침묵이 흐른다.
“충가,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생각해 보니까, 너는 지금 왕세자를 계속 만나야만 할 것 같아. 너는 항상 말했지. 할아버지 나라에 꼭 가 보고 싶다고. 그러니까 네가 고려국 왕세자와 만남을 가지는 것은 너의 그 희망을 실현시키는 기회를 만드는 일이야. 너는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돼. 아니 네가 놓치기 싫어할 거야. 그런데, 너는 어떤지 모르지만, 나는 너와 못 만난다면 못 살 것 같아. 나는 항상 너와 같이 있고 싶거든. 그렇다고 내 욕심만 채우려고 너의 희망을 꺾을 수도 없잖아. 그것은 너를 위하는 일이 아니니까.”
“네 말이 맞아, 나도 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무척 소중해, 지금으로서는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보람이야. 나도, 너랑 같이 있을 수 없다면 못 살 것 같아. 그런데, 나에게는 지금 왕세자와 만나는 일도 중요해. 내가 오래도록 꿈꾸어 온 소원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물론, 나의 꿈을 접으면 되겠지만, 나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어. 어떻게 좋은 방법이 없을까? 아무리 머리를 짜내도 묘안이 떠오르질 않아. 부다시리, 너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 거야, 생각 좀 잘 해봐, 응?”
충가는 사뭇 애원하는 모습이다. 충가가 하는 말도, 부다시리가 하는 말도 모두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 것임이 틀림없다. 다시, 정적이 흐른다.
“그러면 충가. 네가 왕세자님께 양해를 구해보면 어떨까?”
“양해? 어떻게?”
“왕세자와 만나는 날짜를 미리 정하는 거야. 그러면, 나하고 만나는 날이 정해질 수 있겠지….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가, 세 사람이 함께 만나도 좋겠다는 판단이 설 때, 네가 말한 것처럼, 왕세자의 허락을 받으면 나도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애. 이것은 내가 너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최선이야. 그 이상은 안 돼, 절대로.”
“알았어, 다음에 왕세자를 만나면, 우선, 만나는 날짜를 미리 정하도록 허락을 받아 볼게. 일이 잘 풀렸으면 좋겠다.”
며칠 후 충가는 고려 왕세자의 허락을 받아 냈다. 정기적인 만남은 매월 초 열흘, 스무날 그리고 그믐날로 정하고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사흘 전에 미리 알려 주기로 했다.
“어머, 잘 됐다. 나 그럴 줄 알았지. 역시 너는 대단한 능력을 가졌어. 그러면 우리는 그날만 빼면 아무 때나 만날 수 있겠네, 정말 너무 좋다, 날아갈 것만 같애.”
“왕세자님께는 우리가 만나서 무예를 익히기 때문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어. 그렇게 알아.”
“걱정하지마, 내가 왕세자를 만날 일도 없고, 설령 만난다고 하더라도 그 말은 비밀로 할게.”
충가와 공주 그리고 왕세자는 자칫 혼선을 빚을 것 같던 일정을 깔끔하게 정리했다. 그 대신 충가는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서로 만나서 할 일을 미리 계획하고 빈틈없는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바쁜 일상이 충가를 더욱 힘 솟게 해 주었다.
충가와 부다시리는 무술의 수준을 점점 더 높여 갔다. 부다시리는 역시 징기스칸의 피를 이어받은 여걸이다. 징기스칸은 부다시리의 선조이면서 세계 최초로 유라시아 전역을 휩쓸고 통일된 몽골제국을 창건한 불세출의 영웅이다. 그분의 유명한 일화 중의 하나, 그분은 열두 명의 딸을 두었는데 그 열두 명 모두를 장군으로 길러냈다. 여자로 태어난 사람은 집안에서 살림과 육아를 도맡고 남자는 사냥을 해 오거나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체력과 전투력을 길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깨뜨려 버린 분이다. 그러니, 온몸을 돌고 도는 그 피가 어디로 가겠는가? 황야를 누비는 기마민족의 기질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부다시리였다
말타기, 칼 쓰기, 창 쓰기, 활쏘기 그리고 수박희까지 종목별로 고르게 실력을 길러 갔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하는 창검술과 궁술에도 능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원나라에서는 널리 보급되지 않은 수박희의 열네 가지 기초 동작을 거뜬히 소화해 냈을 뿐만 아니라, 여자의 핸디캡인 체력의 열세를 극복하고 눈부신 기술을 개발하기까지 부다시리가 흘린 땀은 몇 동이가 되는지 모른다. 충가의 입은 다물어질 줄 몰랐고, 때로는 부다시리가 무서워질 때도 있었다.
그렇게 보내는 세월 속에서 두 사람은 친구 그 이상의 신뢰를 구축하면서 둘도 없는 우정을 꽃 피워 가고 있었다. 친형제 같은, 가족과도 같은 사랑, 이 세상에 그런 사랑이 있다면, 부다시리와 충가의 사랑일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허물 수 없는 신분의 벽을…. 그래서 그 둘은 나이가 들수록 언행에 조심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주위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일하게 해방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은 그 선녀탕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그들만의 낙원이다. 둘은 가슴 깊은 곳에 그 선녀탕을 꼭꼭 감추어 둔다.
열두 살 어린 나이로 남의 나라에 볼모로 잡혀 와 기약 없는 귀환을 기다리며 보내야 하는 하루하루는 얼마나 지루하고 답답할까? 그때 친구가 되어 준 충가를 왕세자는 친동생처럼 아끼고 사랑했다. 그런데 충가는 무예 쪽에 관심이 더 많았고 왕세자는 그렇지 못했다. 왕세자는 충가의 무술연습을 구경하고 있거나 기껏해야 충가를 따라서 무술의 기본자세를 취해 보는 수준에서 그치고 만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충가가 고려국에 대하여 궁금한 것이 많았고 특히 고려국 민속과 민요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시간 가는 줄 몰라 한다는 점이었다.
“마마, 고려국에는 전래 민요라든가 민담과 설화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나도 겨우 열두 살 때 원나라로 왔기 때문에 많은 것을 알지는 못한다. 비록 들은 바가 있어 조금씩 기억을 더듬어 볼 수는 있지만, 그것이 맞는지 틀리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듣고 싶은 게냐?”
“네, 듣고 싶습니다. 듣고 있으면 고국 냄새가 나기도 한답니다. 소신은 그 고국 냄새를 좋아합니다.“
”그렇다면, 내가 알고 있는 시를 생각나는 대로 골라서 들려줄 테니 잘 들어라. 우선 노래 한 수를 먼저 들어 보아라. 마침 여기 그 노래가 적힌 책이 있구나.”
主乙完乎白乎(주을완호백호)
心聞際川乙及昆(심문제천을급곤)
魂是去賜矣中(혼시거사의중)
三烏賜敎職麻又欲(삼오사교직마우욕)
望彌阿里刺(망미아리자)
及彼可二功臣良(급피가이공신량)
久乃直隱(구내직은)
跡烏隱現乎賜丁(적오은현호사정)
님의 목숨을 온전하게 하신
마음은 하늘 가에 미치고
넋은 가셨지만
내려주신 벼슬은 또 대단하구나
바라보면 알리라
그때의 두 공신이여
오래되었으나
(거룩한) 자취는 나타나시도다.
“이 시는 고려 예종 15년에 지어진 향가 형식의 노래로서 향찰로 표
기되어 있다. 제목은 도이장가(悼二將歌)라고 한단다. 이 시의 배경은 고려 태조를 위해 죽은 김락, 신숭겸 두 장군을 추도하는 것이지. 향찰로 표기된 점에서 그 가치가 높이 평가된단다. 이 작품은 '정과정’과 함께 신라 향가의 맥을 잇고 있는 중요한 역할을 한단다.”
비록 짧은 시지만 고려국에서 전래하는 시 중에서 작자가 밝혀진 유일한 시로서 팔관회를 열 때는 꼭 불렀다는 것을 덧붙인다. 왕세자는 고려국의 시가와 이야기를 적어 놓은 책 몇 권을 가지고 있었다. 충가는 그 책이 무척 신기했다. 비단에 글을 쓴 것, 종이에 글을 쓴 것도 있는데 그것은 길이가 두 자(尺)씩이나 되는 두루마리였다. 왕세자께서 지금 읽어 주신 도이장가는 나무로 만들었다는 목독(木牘)에 적혀 있는데 모두 열 조각이다. 제일 첫째 조각에는 제목이, 마지막 조각에는 지은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것은 아주 귀한 것이란다. 내가 열두 살 때 원나라로 왔다고 했지? 그때 부왕(父王)께서 이 목독에다 쓴 도이장가, 비단에 쓴 황조가(黃鳥歌) 그리고 이 종이에다 쓴 청산별곡(靑山別曲)을 주시면서 부지런히 읽으라고 하셨단다.”
“그렇군요, 다음에 올 때는 종이를 가져와서 베껴 가고 싶습니다. 허락하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마마.”
충가는 두 눈을 반짝거리면서 간절히 청한다.
“그래라. 아니다, 네가 다음에 올 때는 내가 이 글을 필사해 두었다가 선물로 주마. 지금 목독과 종이는 구하기 어려우니, 비단에다가 써 주마.”
“고맙사옵니다, 마마.”
그다음 왕세자를 만날 때까지의 열흘 동안이 충가에게는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을 때까지는 비밀에 부쳐 두기로 했다.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해 드리고, 부다시리도 깜짝 놀래키며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열흘이 지루하고 느리게 흘러가면서 충가의 애를 태웠다. 드디어 왕세자로부터 그 선물을 받아 들고 충가는 뛸 듯이 기뻐하며, 무엄하게도, 왕세자를 덥석 껴안았다. 눈물까지 주르르 흘렸다. 칼을 휘두르고 말을 달리던 충가의 모습 이면에는 이런 점도 있었던 것이다.
“고맙습니다. 마마, 소신의 집 가보로 삼아 자손만대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충가는 감격에 겨워 목소리까지 떨었다. 왕세자는 그런 충가를 꼭 껴안아 주면서 묻는다.
“그렇게 좋으냐?”
“네, 한없이 좋습니다. 좋아서 하늘에라도 닿을 것 같습니다. 마마.”
“그래, 내가 더 고맙구나. 앞으로는 나를 보러 올 때마다 이 비단 책을 가지고 오너라. 같이 공부하기로 하자. 그렇게 하겠느냐?”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고 말고요. 가문의 영광이옵니다.”
그날 저녁 충가는 아버지 침소로 들어 왕세자로부터 받은 비단 책을 보여 드리고 자초지종을 말씀드리며 자랑에 자랑을 그치지 않았다.
“이거 가문의 경사로구나, 내일 당장 일가친척들을 모이라고 해야겠다. 이 영광을 그냥 보낼 수는 없지 않으냐? 그리고 왕세자께는 응분의 보답을 해 드려야겠다. 그것은 내일 다시 말해 줄테니 오늘은 그만 물러가거라. 밤이 깊었구나.”
충가는 그날 밤을 거의 뜬 눈으로 새웠다. 내일 날이 밝기가 무섭게 부다시리를 만나야지. 어떻게 자랑을 해야 좋을까.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깜빡 새벽잠이 들었다.
“충가는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느냐?”
아버지 심양후가 헛기침을 하면서 충가를 깨운다.
“어허, 늦게 잠이 든 게로구나, 하기는 그럴 만도 하지. 엊저녁에 잠인들 잘 수 있었을까? 충가가 깨거든 내 방에 들리라고 전하거라.”
심양후는 마당을 쓸고 있는 돌쇠에게 일러두고 안방으로 건너간다. 심양후는 아내에게 충가의 이야기를 전하면서 잔치 준비를 시킨다. 충가가 심양후를 뵙는다.
“찾으셨습니까, 아버님. 충가이옵니다.”
“들어오너라.”
심양후는 충가를 앉혀 놓고, 왕세자로부터 귀한 선물을 받아 온 일을 다시 한번 칭찬한다. 그리고 이 선물은 가보로 간직할 것이니 특히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덧붙여 너무 소란을 떨어서 외부 사람들로부터 눈총을 받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말도 잊지 않는다.
“왕세자께는 내가 직접 뵙고 답례를 올려야겠다. 기별을 넣어 뵐 수 있는 때를 알아보고 그때 너와 함께 입궐하자꾸나. 답례품은 아비가 알아서 준비하마.”
“그리하겠습니다, 아버님.”
충가는 아버지 앞을 나왔다. 좀이 쑤시는 것을 참느라고 혼이 났다. 부다시리를 만나야 한다. 촌각을 다투는 일이다.
“어머, 축하해, 네 말대로 이것은 큰 경사가 아닐 수 없구나.”
충가는 으쓱해진다. 목에 힘이 너무 들어가지나 않았나 걱정이 될 정도였다. 부다시리는 진심으로 축하했다.
“충가,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것 잘 알지? 이것은 너에게 두 번 오기 힘든 기회야. 이렇게 한층 한층 쌓아 올리다 보면 그 끝이 하늘에 닿을 거야, 반드시…. 너의 소원이 할아버지의 고향엘 가 보고 싶은 거랬지? 바로 그거야, 이제 그 소원이 이루어질 날도 멀지 않았을 거야 다시 한번 축하해.”
“오늘은 선녀탕으로 가 볼까? 가 본 지 너무 오래된 것 같애, 갑자기 가고 싶어지네. 선녀탕에 가면, 내가 왕세자님으로부터 배운 고려 노래를 하나 들려줄게.”
“그래, 그게 어떤 노래인데?”
“선녀탕에 가서 말해 줄게, 그때까지는 참아.”
“무슨 노래길래 그렇게 비싸게 구니?”
“꾹 참고 있어, 참는 자에게 복이 온다고 하더라.”
둘은 각자 자기 말을 이끌고 나오기로 했다. 그런데, 부다시리가 말을 끌고 나오지 않았다.
“왜, 말을 끌고 나오지 않았어? 말이 아프기라도 한 거야?”
충가는 갑자기 궁금해진다. 여태까지 이런 일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응, 내 말은 지금부터 조심해야 된대. 임신 후기에 들어섰기 때문이야.”
그 말을 듣고 보니, 지난 초여름에 말들이 은밀한 사랑을 나눈 것이 생각났다.
“벌써 새끼를 낳을 때가 된 거야? 새끼는 언제쯤 낳게 된대? 이제 겨우 여덟 달째 들어선 것 같은데…. 말은 열한 달 동안 뱃속에 새끼를 품는다던데.”
“그래, 아직 두어 달 남았기는 하지만, 지금이 임신 말기라서 무리한 운동은 시키지 말아야 된대. 내년 봄까지는 내 말을 타지 않는 게 좋대. 그래서 그냥 나왔어.”
“그래?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내 말을 같이 타자.”
“네 말이 고생하겠네. 하지만 곧 아빠가 될 테니까 그만한 대가는….”
두 소년 소녀는 까르르 웃었다. 경사는 충가에게만 온 것이 아니었다. 부다시리에게도 큰 경사가 눈앞으로 바짝 다가온 것이다. 충가와 부다시리는 선녀탕 앞에서 내리고 말은 풀이라도 뜯으면서 기다리라고 갈기를 빗겨주었다.
“어서 말해 봐, 그 비싼 노래에 대하여.”
“그래, 들려주고말고. 자, 잘 들어 봐. 고려국을 눈앞에서 보는 듯하고 고려국 냄새를 맡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거야.
충가는 소매 주머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면서 말했다.
“이것은 세자 저하께서 나에게 선물로 주신 것이야. 이것을 배우느라고 한 달 도 더 걸렸지. 그러니까 너는 횡재하는 거야. 남은 한 달씩이나 걸려서 배운 노래인데, 너는 불과 몇 식경 만에 배우게 될 테니까 말이야. 값은 후하게 쳐주어야겠어.
“값을 내놓으라고? 그래, 주고말고. 얼만데? 미리 말해. 너무 비싸면 안 살 수도 있어.
“나는 안 팔아도 손해 볼 게 없어, 그러나 너는 손해가 꽤 클걸. 평생에 이런 기회는 또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얼마냐니까?
“값은 다 끝나고 말할게, 우선 듣기나 해.
충가는 가지고 온 두루마리를 펼쳐 놓고, 그와는 별도로 깨알같이 적은 비단 꾸러미를 또 꺼낸다. 충가의 이야기는 대략 이러했다. 하긴, 이것은 이야기를 한다고 하기도 곤란한 것이었다. 이야기책을 읽는다는 표현이 오히려 맞을 것 같다.
“이 노래는 지은이를 알 수 없는 고려의 가요야. 백성들 사이에서 널리 불려지고 있대.
우선 가사부터 들어 봐. 제목은 청산별곡(靑山別曲)이라고 해.”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ᄃᆞ래랑 먹고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리노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잉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ᄒᆞ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ᄯᅩ 엇디 호리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치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ᄅᆞ래 살어리랏다
ᄂᆞᄆᆞ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ᄅᆞ래 살어리랏다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ᄉᆞ미 지ᇝ대에 올아셔 ᄒᆡ금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ᄇᆡ브론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ᄆᆡ와 잡ᄉᆞ와니 내 엇디 ᄒᆞ리잇고
얄리 얄리 얄라셩 얄라리 얄라
“이 노래는 모두 8연으로 되어 있어. 서경별곡(西京別曲), 만전춘별사(滿殿春別詞)라는 다른 고려 노래와 함께 고려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야. 그런데 이 노래 작가의 신분계층이나 제작 동기, 작품 성격, 작중 화자 등에 대해서는 이렇다 할 정설이 세워지지 않은 문제작이기도 하지. 특이한 점은 남녀간의 애정을 주로 다루었던 다른 고려국 가요에 비해, 삶의 비애와 고뇌가 주된 내용이라는 점이야.
충가가 청산별곡을 설명하기 시작하자 부다시리가 말을 자르고 불쑥 끼어든다.
“그래? 참 슬픈 노래겠네. 그런데 그 종이를 안 보면 안 돼?
“안 돼. 이 이야기는 사실상 보는 눈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갈라지고 있어. 통일된 감상문이 없다는 말이야. 그런데 이 노래를 이야기하다가 보면 이것저것 뒤죽박죽이 되는 경우가 많아. 그러니까 한 가지 견해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되게 지킬 필요가 있는 거야. 내가 이것저것 섞어서 뒤죽박죽 이야기해 주면 좋겠어?”
“그야 일목요연한 것이 좋기는 하지만….”
“그러니까 불쑥 끼어들지 말고 조용히 잘 듣기나 해.”
충가는 침을 한번 꼴깍 삼키고 나서 다시 청산별곡 해설에 열을 올리기 시작한다. 부다시리는 약간 불만스러웠지만, 꾹 참고 설명을 듣는다. 이야기의 내용이 무척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청산’으로 시작하는 연이 5연, ‘바다’로 시작하는 연이 3연으로 되어 있는데, 3·3·2의 기본 음수율을 바탕으로 병행법·반복법을 쓰고 있고, ‘청산’ 연과 ‘바다’ 연, 제3연과 제7연, 그리고 제4연과 제8연이 정확히 대응 관계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지. 그리고 이 작품의 제5연과 제6연이 교체되어 기사(記寫)되었으리라고 보는 견해도 있어. 이렇게 될, 경우에 총 8연 2장의 노래가 되고, 이는 4연 1장의 정형성을 지니게 되며, ‘청산’ 연과 ‘바다’ 연은 완전히 대응 관계를 이루게 되는 것을 알게 될 거야.
“이 가사가 밖으로는 거란·여진·몽고족 등 외족의 침입이 끊임없이 계속되고, 안으로는 이자겸(李資謙)의 난, 묘청(妙淸)의 난에 이어, 무인 정치가 계속되는 시기의 것이라는 인식과 깊이 관련 맺고 있어. 이와 같은 내우외환 속에서 고달픈 삶을 살아가는 민중 또는 지식인의 고뇌를 그리고 있다고 보는 것이야. 이 밖에도 이 노래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지만, 내가 그것을 다 기억할 수는 없어. 지금까지 말한 것도 사실은 왕세자께서 일러 주신 내용을 내가 받아 적은 것일 뿐이야. 나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야.
“잘 들었어. 고려 백성들은 모두 노래를 좋아 하나 봐.
“그럴 테지. 그러나 그보다는 외환과 내우로 백성들의 삶이 그만큼 핍박해졌다는 반증이 되기도 해. 내가 이 노래를 너에게 들려준 깊은 뜻을 알겠어?
“글쎄, 무슨 깊은 뜻이 있을까? 감이 쉽게 잡히지 않는데.
“그것은 말이야, 내 생각에는 네가 고려국 왕비가 될 것 같은 예감이 자꾸 들어. 한 나라의 국모가 되는 거 아니겠어? 국모라면 자기가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들에 대하여 잘 알고 있어야 할 거 아니야?
“… 국모는 무슨 …, 누가 고려국 왕비가 되겠대?
부다시리는 충가에게 눈을 흘기며 입을 비쭉 내민다. 그러나 부다시리도 자기에게로 다가오고 있는 어떤 운명의 그림자를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충가, 네가 나에게서 받고 싶은 청산별곡 설명 값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애,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가정일 뿐이야. 만일 그 가정이 현실이 된다면, 후한 값으로 보답할게.
충가와 부다시리는 더 이상 말이 없다. 손과 손이 살그머니 포개지더니 아무도 모르게 손깍지를 끼었다.
충가는 어릴 때부터 재기가 충만하여 촉망받는 젊은이였다. 특히 무술을 매개로 하여 부다시리와 사랑 같은 우정을 풋풋하고 아름답게 가꾸어 갔다. 고려국 왕세자 바얀 테무르와는 군신의 연을 맺어 내일을 향하여 힘차게 질주하고 있었다.
왕세자와 살을 맞대고 비비면서 고려국 관습을 익히고 풍물에 접했다. 할아버지 나라 고려국의 뜨거운 숨결을 그대로 느끼면서이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무릎 위에 앉아 배우던 고려나라 말, 이제는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 이보다 더 좋은 무기가 다시 있을까?
“충가야, 너 요즘 무얼 먹고 사니?”
부다시리가 충가에게 알쏭달쏭한 질문을 던진다.
“밥 먹고 살지 무얼 먹고 살아?”
별걸 다 묻는다고 생각하면서 충가는 건성으로 대답한다.
“어째 대답에 진정성이 없는 것 같다. 나는 진지한데…. 너는 이 몇 년 사이에 키도 부쩍 커진 데다가 근육에 알통도 나오고, 그 곱던 얼굴에 뾰족뾰족 빨갛게 튀어나오는 것은 또 뭐니? 그뿐이냐? 고려국 말도 잘하고, 시도 잘 외우고, 무예까지 잘하지 않니? 온통 잘하는 것뿐이니 나는 주눅이 들어서 살 수가 없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네가 미워지려고 해, 막 질투 같은 것도 나고…. 예전엔 네가 좋아 죽을 것 같았는데 요즘에는 안 그래. 그래서 걱정이야. 어느 날 갑자기 내 곁을 훌쩍 떠나버릴 것 같은 생각이 자꾸 들어. 때로는 네가 나의 오라버니라도 된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럼, 내가 오라버니가 아니었던가? 나는 네가 내 동생인 줄 알고 있는데….”
“까불고 있다. 얼마나 혼이 나야 정신을 차리겠니?”
“아이구, 무섭기도 해라, 네, 네, 잘 알겠습니다, 누이님.”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반가움을 이렇게 풀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너하고 말달리기 경주를 한 지도 꽤 오래되었구나. 참, 너의 말은 숫망아지를 낳았다면서? 꽤 자랐겠지? 뜀박질은 잘하니? 한번 보고 싶다.”
충가는 꿈 많은 소년답게 꿈결 같던 그 시절을 그리며 깊은 생각에 잠긴다.
“그런데, 부다시리, 섭섭한 소식이 하나 있어.”
“섭섭한 소식이라니? 이건 또 무슨 날벼락이야? 그게 뭔데? 빨리 말해 봐.”
“내가 탈탈(脫脫) 선생님의 사사를 받게 됐어. 무예를 더 익혀야 된대. 앞으로 너하고 자주 만나지 못할 것 같고, 왕세자 마마와도 마찬가지가 될 것 같애.”
“… 그렇구나,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네. 나도 섭섭해, 뭐가 뭔지 통 모르겠어….”
“지금 나는 내 정신이 아니야. 너도, 왕세자 마마와도 멀어지는 것은 정말 싫어.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
두 사람은 잠시 할 말을 잃는다. 부다시리의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툭! 떨어지는 눈물방울. 주루룩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충가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둘은 서로를 꼭 껴안는다. 긴 침묵 속에서 부다시리의 어깨가 가늘게 떨고 있다. 이럴 때는 멋있는 말 한마디쯤 생각이 나와줘야 하는데 … 말문이 막힌다. 침묵을 먼저 깬 것은 부다시리였다.
“충가, 섭섭하지만, 우리는 헤어져 멀리 떠나는 게 아니지? 생각해 보니까 이것은 축하해야 할 일인 것 같애. 눈물을 보여서 미안해.”
눈물이 미쳐 마르지도 않은 눈매가 전에 없이 예뻐 보인다.
“고마워, 그리고,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게 될 거야. 내 가슴 속에 네가 거처할 깨끗한 방 한 칸을 항상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게. 너는 언제든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어. 어쩌면 내가 너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고 영원히 가두어 버릴지도 모르지만….”
“그래, 나는 네 가슴 속이라면 그곳이 감옥이라도 좋아. 내게도 너를 가둬버릴 감옥이 있어. 그러니까 조심해야 할 거야. 평생 못 나올 수도 있는 아주 튼튼한 감옥이니까.”
두 사람이 나누는 밀어를 충가의 애마가 엿듣고 있다가 갑자기 긴 울음소리를 낸다. 어지간히들 하라는 투다. 바라보는 눈이 여느 때와 다른 것 같다. 앞발로 툭툭 땅을 찬다. 질투하는 모양이다.
왕세자 바얀 테무르는 1344년 그의 나이 열여섯 살에 강릉부원대군 칭호를 받는다. 그보다 한 해 앞에, 그러니까 고려국 왕세자가 열다섯 살, 부다시리가 열두 살이 되었을 때, 황실에서는 이 두 사람의 국혼을 선언했다.
이 소식은 충가에게도 전해졌다. 충가는 진심으로 이들의 만남과 부부로 맺어짐을 축하해 주었다. 어찌 아쉬운 마음이야 없었을까마는, 충가는 대범하고 사리에 밝으며 매듭이 분명한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그에게는 반드시 이루어 내야 할 책무가 있었다. 그 책무를 어찌 소홀히 할 수 있을 것인가? 충가는 공주를 부다시리라고 부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한다. 이제부터는 승의공주라고 불러야 될 터이다. 이렇게 세 젊은이는 각자의 역할을 가지고 각자의 길을 찾아서 자기가 딛고 선 자리를 지켰다. 삼각형을 가장 튼튼한 다각형이라고 한다. 두 개의 빗변과 한 개의 밑변, 그리고 세 개의 꼭지각이 제 몫을 다할 때 얻게 되는 안정감이다. 세간에는 어긋난 남녀관계를 삼각관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끝은 대개 비극으로 끝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길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고 다짐한다. 아름다운 다짐이다.
국혼이 있은 지 두 해가 되던 1351년 봄이었다. 충가가 17세 되던 해, 그러니까 고려의 연령 셈법으로는 18세 때, 원나라 무과 과거시험인 호방(虎榜)에서 일 등으로 합격했다. 요하강 깊은 물에 몸을 담그고 있던 용 한 마리가 드디어 승천하는 순간이다. 마침, 시험장에 참관하고 있던 강릉부원대군과 승의공주가 달려와서, 함께 찬사를 보낸다. 시험장 가득 모여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강릉부원대군은 충가를 와락 껴안았고 승의공주는 충가의 두 손을 꼭 잡아 주었다. 승의공주의 두 눈에는 눈물까지 핑 돌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이라서 치솟는 감정을 다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진심으로 축하에 축하를 거듭했다.
“황공하옵니다. 작은 재주를 높이 사 주신 황실의 은혜를 입은 덕이옵니다. 그리고 두 분 마마께옵서 항상 저를 아껴 주시고 채찍질해주신 은덕이옵니다. 은혜에 보답할 수 있도록 정진을 멈추지 않겠습니다.”
강릉부원대군과 승의공주가 이미 부부의 연을 맺었고, 이제 곧 상감마마와 왕비마마가 되어 만백성을 다스리게 되는 이때, 그리고 충가 자신도 이제는 어엿한 대장부의 길로 들어선 지금, 세 사람은 더 이상, 바얀 테무르도 부다시리도 충가도 아니었다. 오랜 세월을 캄캄한 땅속에서 애벌레로 살다가, 비로소 껍질을 벗고, 한 마리 매미가 되는 순간이다. 참매미, 애매미, 유지매미…, 이 세상에 살아 있는 1500종의 매미 중에서, 나만의 모습으로 나만의 사명을 띠고 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디는 순간이다. 그래서 호칭도 달라져야 할 것이었다. 언제까지나, 소년 소녀의 애틋한 가슴 속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변안열은 스승인 탈탈을 찾아뵈옵고 저녁 빛이 짙어진 다음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님.”
“오냐, 내 아들.”
아버지와 아들은 긴말이 필요 없었다. 아버지 변양은 아들을 와락 껴안고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약비가 소나기처럼 내려 먼지를 잠재운다.
“장하구나, 내 아들.”
아버지 변양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많은 친척과 가족들 앞에서 위엄도, 체면도 다 팽개치고 아들을 끌어안고 덩실덩실 춤까지 춘다. 충가는 일찌기 아버지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항상 근엄하고 작은 실수에도 호되게 질책하던 아버지가 눈물까지 흘리는 것을 언제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었던가? 충가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아버지 방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도 따라 들어왔다.
“아버님, 절 받으십시오.”
“그래, 그래. 절을 받아야지, 암 받아야 하고말고. 어디, 우리 아들 큰절 한번 받아 보자. ”
충가는 아버지에게 절을 올렸다.
“그래, 고맙구나. 그리 참 이제부터는 충가라는 이름은 쓰지 않도록 하여라. 한 사람의 어엿한 장군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안열(安烈)이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여라.”
“네, 잘 알겠습니다, 아버님.”
변안열은 아버지께 큰절을 올린 다음, 어머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께도 일일이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선영의 영전에 제를 올렸다.
변안열이 등과하여 황실을 드나든 지도 벌써 달포가 지났다. 관직에 나아간 지 얼마 되지 않은지라, 배우고 익혀야 할 것들이 많았다. 늦은 저녁까지 궁궐에 머물렀다가 귀가하는 일이 잦았다. 부드러운 바람결이 이제 막 돋아나기 시작한 풀잎 냄새를 싣고 춘심을 흔드는 어느 봄날 저녁이었다. 달빛은 조요하고 젊은 가슴에 조수 같은 시심이 밀려들었다가 밀려 나가기를 거듭하고 있었다.
지금쯤 두 분 마마께서는 한창 깨를 볶고 계시겠지. 까닭 모를 수심이 깃을 튼다. 우수에 젖어 드는 마음을 달래고 있을 때, 아스라한 노랫소리가 끊어질 듯 이어진다. 변안열은 그 소리에 이끌려 발길을 옮긴다. 연못이 있는 아담한 누각이었다. 생소한 복장을 한 여인이 처음 보는 악기를 연주하고 있었다. 변안열은 걸음을 멈추고 그 노래가 끝나기를 기다린다.
”어흠”
헛기침 소리를 내어 가까이에 사람이 와 있음을 알린다. 그 여인은 사뿐히 일어나서 곱게 허리를 숙여 예를 갖춘다.
“어인 사람이기에 이 밝은 달빛 아래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요?”
변안열이 고개를 들어 누각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소녀가 공의 발걸음을 어지럽게 해 드렸나 보군요. 송구하옵니다. 바쁘시지 않다면 잠시 누 위로 오르시지요.”
“소저가 방금 부른 노래에 대하여 나에게 말해 줄 수 있겠소?”
조요한 달빛이 작은 연못 위에 떨어져, 바람결에 일렁이는 물결에 부서지는데, 여인은 마치 하늘나라에서 금방 내려온 선녀와도 같았다. 그러나 정작 변안열의 관심을 끄는 것은 그 여인이 부른 노래와 반주를 한 악기에 있었다. 여인의 말이 이어진다.
“제가 부른 노래는 저의 할아버지가 이 세상에 남기신 고려국 말로 된 유일한 노래로서 고려국에서는 시조(時調)라고 부른답니다. 악기는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거문고인데 고구려인 왕산악이 발명하였다고 합니다.”
“그랬군요. 그러면, 이 노래를 지으신 분이 할아버님이라고 하셨는데 혹시 이씨 성을 가지시고 조(兆)자 년(年) 자를 쓰시는 시인이 아니십니까?”
“맞사옵니다.”
변안열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귀인을 만났다. 시조에 대해서는 강릉부원대군으로부터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자세한 내용을 알지는 못했다.
“괜찮으시다면, 그 노래를 한 번 더 들어 볼 수 있겠습니까? 그 노래가 품고 있는 이야기도 듣고 싶군요. 어렵겠지만 정중히 청을 드립니다.”
변안열의 말투가 금방 달라진다. 비록 공녀로 잡혀 와서 지금은 궁인으로 살고 있지만, 근본 있는 가문의 규수임을 알게 된 마당에, 더 이상 낮춤말을 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더군다나 이렇게 놀라운 시재까지 갖추고 있음에랴.
“그러면 다시 한번 불러올리겠습니다. 노래 속에 담긴 이야기도 곧 말씀해 올리지요.”
그 여인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거문고 소리에 얹힌 목소리가 청아하다.
이화(梨花)에 월백(月白)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아랴마,
다정(多情)도 병인 양 여 못 드러 노라.
“이 노래를 한시 형식으로 바꾸어 쓰면 이렇습니다. 시제는 자규제(子規啼)라고 하구요.”
梨花月白三更天(이화월백삼경천), 啼血聲聲怨杜鵑(제혈성성원두견)
儘覺多情原是病(진각다정원시병), 不關人事不成眠(불관인사불성면)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배꽃 위에 휘영청 달이 밝아 배꽃은 더욱 희고, 달빛은 환상적이다. 밤은 깊어 은하수도 기운 삼경, 온 천지가 깊이 잠들었다. 그 고요를 깨고 소쩍새가 구슬프게 울어댄다. 배 꽃가지에 서린 봄날의 애상을 소쩍새가 어찌 알까마는 이렇듯 다정다감한 내 마음도 병인 듯하여 전전반측, 잠을 이룰 수가 없구나.”
이 시를 한시(漢詩) 형태로 바꾸어 놓고 본다면 근체시의 7언절구 형식이 되겠지요. 그런데 고려국의 시조는 3장 6구로 되어 있답니다. 형식상의 특징과 주의할 점이 많이 있지마는 대략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첫 줄을 초장, 가운데 줄을 중장, 마지막 줄을 종장이라 하고, 초장과 중장에서는 눈에 비치는 사물이나 자연 경치를 묘사하여 형상화한 다음, 종장에서는 작자가 느낀 점이나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뜻을 새긴답니다.”
시조에 대한 상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변안열은 그 여인의 분위기 속으로 점점 휩쓸려 들어가고 있었다.
변안열과 이소저는 시가를 매개로 서로의 교감을 나누고, 이것을 다시 은은하게 울려오는 산사의 종소리처럼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다.
그해 겨울, 강릉부원대군과 숭의 공주는 드디어 고려로 돌아가는 길을 잡는다. 변안열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호위군배행수장(護衛軍陪行首將)이 된다.
지난해 봄 어느 날 연못가 누각에서 고려 시가 한 수가 맺어 준 인연으로 만나게 된, 고려국 시인 이조년의 손녀 이소저도 공주의 시중을 들면서 고향으로 가는 장도에 함께 오를 수 있었다.
“이 은혜 백골난망이옵니다. 어찌 갚아야 할지…”
시인의 손녀는 그녀 자신이 또한 훌륭한 시인이었다. 어린 나이에 겪어서는 안 될 일을 겪으면서 내면으로 성숙해진 감성미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높은 경지에까지 이르렀음을 변안열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주께 주청을 드려 시녀로 발탁하게 되었고 고운 심성을 인정받아 이번 환국 행렬에 끼일 수 있었다. 환국하는 길이 험하고 멀더라도 고향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벌써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