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하여
2015. 8. 9(주일낮예배) 고린도후서 1:4-6
여러분은 언제 가장 행복한가? 이재철목사님이 암수술을 받은 후 홍천에서 요양할 때였다. 그때 한 모임에 참석하였는데, 강사 앞에 앉은 사람은 청년 남녀와 중년부인 그리고 이재철목사님 이렇게 4명이 전부였다. 이렇게 4명을 앉혀두고 강사는 언제 가장 행복했느냐?는 질문을 했다. 아무도 대답을 하지 않자 강사는 제일 앞에 앉은 남자청년에게 다시 물었다. 그러자 남자청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때 강사는 이번에 한번 생각해 보라고 하자, 청년은 1분 정도 생각한 후에 하는 일이 잘될 때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그 후 강사는 옆에 앉아 있는 여자 청년에게 물었다. 그러자 여자 청년은 맛있는 것을 먹을 때 행복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년부인에게 묻자 중년부인은 공기 좋은 산속을 걸을 때 더 없이 행복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뒷자리에 앉은 이재철목사님께도 물었다. 이재철 목사는 제 삶에 대하여 절대적인 의미와 보람을 느낄 때 행복하다고 답을 하였다.
그날 작은 모임에서 목사님은 행복에 대한 현대인의 생각을 알 수 있었다. 현대인은 정말 바쁘게 살고 또 많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 많은 일을 하고 바쁘게 살면서 행복에 대하여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남자 청년은 자기가 하는 일이 잘 될 때 행복하다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삶 속에서 일이 잘된다고 할 때보다 일이 잘되지 않는다고 할 때가 더 많이 있다. 맛있는 것을 먹을 때가 행복하다고 하는 여청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교회 강석현목사님은 지난 1월에 신장이식수술을 하였다. 그리고 난 후에 저염식음식을 먹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건강의 문제로 소금이 없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만약 그 여청년이 건강상의 문제로 맛있는 음식을 먹지 못한다면 그 청년의 행복은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중년부인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건강해서 산과 들로 마음껏 다닐 수 있어서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몸이 약해지면서 걷는 것이 힘들어 지는 순간 부인의 모든 행복은 다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부인은 시간이 흐를 수록 행복은 사라지고 불행만 가득한 삶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면 여러분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가? 사도행전 18장은 바울이 고린도지역의 사역을 기록하고 있다. 고린도에서 18개월동안 말씀을 가르쳤던 바울은 헐벗고 굶주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천막을 제조하면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복음을 전해야 했기 때문에 한가로운 여유를 즐길 시간적 여유도 없었다. 그러니 맛있는 것을 마음껏 먹지도 못하고, 또 여유를 즐기며 등산할 수 있는 시간은 전혀 없었다. 그렇게 바쁘고 힘든 사역을 감당하는데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고린도는 대적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 있었던 바울이 데살로니가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항상 기뻐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바울이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할 수 있었다는 것은 바울이 자신의 삶에 기쁨이 넘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지금 바울이 처한 상황은 사역이 형통하지도 않았고, 또 경제적인 여유나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는 형편도 못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바울이 기쁨과 감사가 넘치는 행복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그 이유를 사도행전 18:9-10 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행 18:9-10) 밤에 주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시되 두려워하지 말며 침묵하지 말고 말하라 10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어떤 사람도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 하시더라
이 성중에 내 백성이 많음이라는 이 말씀은 고린도 지역에 바울을 위하여 기도하고 동역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바울이 전도하여 구원해야 할 하나님의 백성이 많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고 힘든 사역에 할 일이 많은 바울이 행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고린도에 오기 전에 아덴에서 복음을 전하였다. 종교심이 강한 아덴 사람들은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바울은 고린도를 떠나 아덴으로 온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에서 바울이 복음을 전하였을 때 사람들은 바울을 대적하고 비방한 것이다. 그때 바울은 그러한 사람들 앞에서 옷을 털면서 너희의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갈 것이다고 하면서 이 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고 아주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지금 이 부분은 바울의 전도여행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기점이 된다. 왜냐하면 바울은 고린도전도 이후에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을 위한 전문사역자가 되기 때문이다.
왜 바울이 이렇게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이제 3개월이 지나면 수능시험이 있다. 올 해 우리교회는 고 3인 공주혜와 고 4인 한석욱 이렇게 2명이 수능시험을 치루어야 한다. 여러분 생각에 고 3인 주혜와 고 4인 석욱이 중에 누가 수능시험 앞에서 더 긴장하겠는가? 개인적인 차이가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보면 석욱이가 훨씬 더 긴장할 것이다. 왜냐하면 석욱이는 한번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번 실패한 사람이 동일한 일을 만난다는 것은 훨씬 더 큰 두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바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❶아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조롱을 받았던 바울이 고린도에서 똑같은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❷유대인을 위하여 전심전력하여 사역하였던 바울이 이제는 이방인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역의 방향을 바꾸는 그 일에도 큰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바울에게 와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신 위로는 내가 너와 함께 있으매(10절) 였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주시는 위로와 소망은 하나님이 바울과 함께하여 주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바울이 이방인을 위한 사역자로 나갈 때 두려워했겠는가? 한 선교사님이 선교훈련을 마치고 아내와 아들을 데리고 선교지에 파송받았다. 교회에서 파송예배를 드릴 때만 해도 그래 이제 선교지에서 뼈를 묻는거야! 하고 결단하고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선교지에 도착해서 선교지를 둘러보니 막막하기만 하였다. 주일저녁이 되어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두려움 가운데 그 선교사님은 그렇게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들이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교사님은 아들을 데리고 화장실에 갔다. 수세식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던 아들이 캄캄한 밤중에 재래식 화장실에 들어가니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그래서 아빠 멀리가지 말고 거기 있어! 하고 말하였다. 선교사님은 그래 아빠 여기 있을게 하고 문밖에서 기다렸다. 그런데 조금 시간이 지나자 화장실에서 소리가 들렸다. 아빠 거기 있어? 그래 아빠 여기 있어! 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또 몇 분 지나서 아빠 거기 있어? 하고 아들이 묻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래 아빠 있어! 하고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또 조금 지나서 아빠 거기 있어? 하고 묻는 것이었다. 그래 아빠 여기 있으니 걱정하지 마! 조금은 귀챦은 마음으로 아들에게 대답한 선교사님은 그 순간 머리 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신데 내가 왜 이렇게 두려워 하고 있지! 하나님 거기 계시죠.
아마 선교사님은 그 이후로 두려워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때때로 두려움이 생길 때마다 이렇게 고함쳤을 것이다. 하나님 거기 계시죠!
그런데 왜 하나님이 선교사님과 함께하고 있는 것인가? 팝칼럼리스트 김태훈씨가 세바시 강사로 나와서 이성에 대한 환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다 이상형이 있다. 특히 여성들은 남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는데, 주로 내용은 이렇다.
❍ 키 182Cm, 몸무게 75Kg
❍ 활발한 성격
❍ 스포츠맨
❍ 원만한 교우관계
❍ 연인에게 순종적
이것이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소박한 꿈이다. 그런데 실제로 들어가면 이런 사람은 만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원만한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친구와 선후배가 아주 많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들을 만나면 아주 재미나게 하고, 또 선후배의 전화가 오면 언제든지 달려나가는 것이다. 이런 활발한 성격과 원만한 교우관계를 가지고 있는 젊은 총각에게는 많은 여자친구와 또 선후배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있는 여자 분들 중에 내 남자친구가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하여 내가 아닌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남자친구라도 매일 만나러 간다면 싫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순종적으로 바뀌는 그 순간 원만한 대인관계를 가질 수가 없는 것이다.
스포츠도 마찬가지이다. 암벽을 타려하면 산으로 가야하고, 수상스키를 타려면 바다로 가야하는 것이다. 그런데 직장다니는 사람이 산으로, 들로 운동을 하러 다니면 당연히 여자친구와 만나는 시간은 줄어들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여자친구의 말을 잘 들어서 여자친구와 찻집에 오래 앉아있는 순간 스포츠맨이었던 남자는 다방맨으로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태훈씨는 내게 순종적인 남자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쾌활하고, 대인관계가 좋은 남자가 아니라, 내성적이고 조금은 편협적인 남자를 선택하던지, 아니면 쾌활하고 대인관계가 좋은 사람을 선택하기 위해서 내 말을 잘 듣지 않는 남자를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무슨 말인가? 정말 결혼을 하려면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내 이상에 맞는 남자를 찾으면 결코 결혼은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하려면 하나님과 맞추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차원에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고후 1:4)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있는 사도 바울을 위로하여 주었다. 이렇게 하나님이 바울을 위로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맡긴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하나님 바울을 위로하신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환난 받는 성도를 더 잘 위로하기 위함이다는 것이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1:4의 주석이다. 쉽게 설명하면 하나님께서 저를 위로하심은 자여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게 하기 위함이고, 또 자여교회에 속한 성도들을 더 잘 위로하게 하기 위함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이 주신 위로로 사역과 또 다른 위로에 사용하는 일이 어렵고 힘들다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가운데 하나님의 위로로 사역에 형통을 가지면 그때부터 허리띠를 풀고 그 위로를 내가 누리며 살려고 할 때가 정말 많이 있다.
그러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위로로 사역에 열심을 내고, 또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에 힘쓰는가? 당시 고린도는 60만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였다. 로마, 알렉산드리아, 에베소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정치와 문화와 경제의 중심지였다. 그런데 고린도는 항구도시로서 로마가 전략적 요충지로 세운 신흥도시였다. 그러므로 고린도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사는 도시였고, 정치와 문화적인 면에서는 굉장히 취약한 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정치와 문화에 전통이 없었던 고린도는 산위에 아프로디테 신전을 짓고 거기에 1천여명의 여사제를 두어서 매춘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도시 중심에 큰 광장이 있었는데 그 광장에는 신전, 상점, 공공건물과 목욕탕이 있었는데, 발굴단을 통하여 발굴된 유물을 보면 주사위와 화폐, 그리고 술병과 술잔이 많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이 당시 고린도의 모습이었다. 바울은 그러한 고린도에 1년 6개월을 머물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바울이 떠난 후에 다시 방탕한 문화와 세상의 쾌락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예배가 무너지고 교회는 많은 혼란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더 심각한 것은 고린도교회에 거짓교사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더 어지럽혔던 것이다. 그때 바울은 디도편으로 눈물의 편지를 써서 보내었고, 그 후에 회개하고 교회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고린도후서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거짓교사를 통하여 혼란에 빠졌던 사람들이 다시 바른 신앙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사람이 향략과 방탕의 문화가 팽배해져 있는 고린도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는가?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곧 그들에게 아픔과 고통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하여 나올 때 모범과 위로가 되는 사역자를 볼 수 있었다. 그가 바로 사도바울인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많은 환난을 당하였고 그 환난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던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로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바울을 통하여 위로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그 다음에 어떤 모습을 가질 수 있었겠는가? 바울을 통하여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또 다른 성도들을 위로하는 위로자로 서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것이 참된 교회의 모습이다. 참된 교회 안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위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위로를 하나님은 위로를 받은 저와 여러분이 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고, 또 그 위로를 전하는 자의 삶을 살고 있는가? 동영상을 보기 바란다.
<수능 100일, 너무 힘든데 안아주세요 3' 10">
우리가 사는 세상에 고 3학생이 힘든데 안아주세요 하고 말할 때 사람들이 이 학생을 꼭 안아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힘든 고 3시간을 보내었던지, 아니면 자기 자녀들 중에 고 3으로 고생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 3의 아픔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안아주고, 또 어깨를 도닥거려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영상을 보면 나는 고 3시기를 이겨내었다고 너도 이겨야 한다고 자랑하듯이 말하는 사람은 없다. 그냥 힘들지! 하며 공감하고 안아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습이 교회 안에도 그대로 있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있었다. ❶불의와 타협하지 않아서 억울한 일을 당해야 했고, 또 ❷주일을 성수하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손해를 본 일도 있었을 것이다. 또 ❸음주와 흡연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고통을 겪은 분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고난을 이겨낸 저와 여러분은 나도 이겼으니 너도 당연히 이겨야 해!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어려움을 이겨낸 성도는 이제 그 문제 앞에서 힘들어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고 하면서 어깨를 토닥거려 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는 우리교회에 어렵고 힘든 일을 경험하는 사람들이 그 어려움을 교회 성도들에게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그런 관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움을 이야기 할 때 안아주고 함께 울 수 있는 그런 성도가 많은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우리가 서로를 안아주고 위로해 줄 때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우리 자여교회가 이렇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또 그 위로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어서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