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 방앗간 / 양선례
야구 모자를 눌러 쓴 딸이 나간다. 일주일 중 유일한 휴일인데 그조차 제대로 쉬지 못한다. 한가롭게 텔레비전이나 보고 있기가 미안해진다. 이럴 때마다 월급쟁이로 산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때 되면 월급 나오고, 정시에 퇴근하고, 또 조금은 여유를 찾을 수 있는 방학이 있는 직장인으로 살았으니 말이다.
큰딸은 본인의 뜻에 따라 화학을 전공했다. 꽤 좋아하는 데다 잘해서 대학만 졸업하면 어디든 들어가겠거니 했다. 그런데 3학년을 마치고는 갑자기 진로를 바꾸겠다며 공부를 더 해 보겠단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나인데 좀 늦으면 어떠랴. 흔쾌히 그러라며 뒷받침해 줬다. 시험은 일 년에 한 번 있었다. 기대와는 달리 몇 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엉덩이 평수만 늘려가고, 청춘의 가장 아름다운 때를 책상에 앉아서 벽만 쳐다보고 보내는 것도 안타까웠다.
몇 번 떨어지고 나니 서른이 코앞이었다. 방향을 바꿔서 이제는 취업을 준비한다고 했다. 그런데 책상 앞에서 한 가지 공부만 하다 보니 정착 취업에 필요한 스펙이 하나도 없었다. 흔한 컴퓨터 자격증 하나도 말이다. 때맞춰 터진 코로나19로 기업은 더 허리띠를 졸라맸고, 공채 인원을 줄였다는 소식만 들려왔다. 자신이 없어선지 이력서 한 장도 안 쓰고, 면접 한 번도 안 보며 무기력하게 지낸다는 말만 함께 사는 작은딸이 전해 왔다. 자랄 때는 세 아이 중 가장 영특했다. 이십 대를 맥없이 흘려 보내고 서른도 진즉 넘어선 큰딸을 보면 안쓰럽고 속상했다. 당사자 맘은 오죽하랴 싶어서 요즘 어떻게 지내고, 공부는 잘 되느냐고 제대로 묻지도 못했다. 어쩌다 내려오는 날에는 가족 모임에 나가기를 꺼렸다. 딸아이는 뾰족해지고 예민해져 갔다. 그즈음 다섯 살 차이가 나는 막내가 취업에 성공했다. 아들의 성취가 대견하면서도 딸의 눈치가 보였다.
13년의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내려와서 카페를 해 보는 게 어떠냐고 권했다. 손도 빠르고, 감각도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잘할 것 같았다. 지쳤던 걸까.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 우리 부부와 달리 흔쾌히 해 보겠단다. 커피의 맛과 향을 감별하는 센서리 과정과 카페 음료와 빵 만드는 학원에 바로 등록했다. 오전에는 커피, 오후에는 빵 만드는 방법을 배우는 강행군이었다. 또 일주일에 두 번씩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실전 경험도 쌓았다. 실내 인테리어가 잘 된 커피숍 순례도 빼먹지 않았다. 배워야 할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편으론 카페 공간 리모델링 업체를 알아 봤다. 내가 사는 지역의 두 군데 업체와 접촉하여 견적을 받았다. 한 군데는 여러 번 약속을 어겨서, 또 다른 데는 너무 높은 가격을 불러서 성사되지 못했다. 이번에는 타 지역에서 찾았다. 어느 날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자신을 데리러 나주까지 오라고 했다. 업체가 만든 시뮬레이션과 설계도 설명을 한 시간 가까이 함께 들었다. “네. 설명 잘 들었습니다. 생각해 보고 연락 드릴게요.” 그게 다였다. 미안해하는 나와는 달리 맺고 끊는 게 칼이었다. 다행히 네 번째 만난 광주의 업체와 연이 닿아 공사를 시작한 게 5월 초였다.
서른일곱 살의 젊은 사장은 지금까지 카페 인테리어를 주로 했단다. 언제 어떤 공사를 할 것인지를 표로 만들어 보여 주었다. 배관, 금속, 단열, 목, 도장공사가 일정대로 착착 진행되었다. 그런데 변수가 생겼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원하는 타일의 수입이 안 되어서 공사 마무리가 늦어졌다. 멀고 먼 나라의 전쟁이 이 작은 도시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니 지구촌이라는 말을 실감했다.
그사이 카페 이름을 정하고, 로고 디자인도 전문 업체에 맡겼다. 또 소파를 맞추고, 가구도 주문했는데 내가 알던 방식과는 완전히 달랐다. 기성 가구점에서 원하는 가구를 사는 게 아니었다. 70~80년대 유럽에서 쓰던 가구와 조명이 간간이 하나씩 배달되었다. 하늘색의 은은한 등은 스웨덴에서, 6인용 주황색 의자는 멀고 먼 독일에서 온 거라고 했다. 색이 바래고 칠이 다 벗겨진 둥근 모서리 6인용 탁자도 빈티지 가게에서 주문했다. 당시의 가구가 고풍스럽고 튼튼하여 손질하여 쓰면 훨씬 멋스럽다나 뭐라나. 중고라 하여 가격이 싼 것도 아니었다. 처음에 잡았던 예산을 초과한 지 오래였다. 그렇게 딸은 카페를 7년이나 운영하기도 했다는 젊은 사장의 조언을 받아 실내를 하나하나 채워 나갔다.
커피 기계, 냉장고, 오븐 등의 전자 제품과 소소한 용품도 하나씩 도착했다. 커피 하나만 해도 아메리카노와 카페라떼, 아인슈페너 등 음료의 종류에 따라 담는 그릇이 다 달랐다. 가게를 여는 데 이렇게나 많은 물건이 필요한지 예전엔 미처 몰랐다. 주변에 자영업 하는 사람이 없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다. 어느 날은 자몽과 레몬, 청귤차를 직접 담갔다. 그 모든 과정을 인스타그램에 올려 홍보했다. 원래 카페 자리가 아니라서 그 일은 필수라고 했다. 그렇게 딸은 복잡하고 힘든 일을 차근차근 해 나갔다.
카페를 연 지 두 달이 넘었다. 초기의 지인 찬스 기간이 지났는지 이제는 아는 얼굴을 보기 어렵다. 데이트를 하는 커플 손님이 많다. 일이 손에 익은 딸도 처음의 불안과 걱정을 내려놓고 꽤 즐겁게 일한다. 카페가 자리를 잡아 가는 걸 보면서 나도 한시름 놓는다. 그런데도 오늘처럼 빵을 굽느라고 자정이 넘도록 일하는 딸을 보면 또 맘이 좋지 않다.
퇴근하면 참새 방앗간처럼 ‘카페알록’에 들른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시킨다. 독서대를 펴서 어제 읽다 만 책을 읽는다. 쓴맛과 신맛이 적당히 조화를 이룬 커피가 부드럽다. 공짜라서 더 맛있다. 투자자의 특권이다. 진즉 이럴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