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1월 1일 병술 2번째기사 / 남전에 모신 어진이 희미해진 경우 종친부의 관할하에 다시 그려넣게 하다모신 어진(御眞)이 모사(摹寫)한 지 오래되어 영정(影幀)이 희미해졌으니 금년에 다시 모사하는 것이 인정과 예법에 부합된다. 이전에 다시 모사할 때면 언제나 도감(都監)을 설치하였으니, 이번에도 사체에 있어서 다르게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우리 왕조에 근거할 만한 고사가 있으니, 이제부터 어진을 모사하는 등의 일을 종친부(宗親府)로 하여금 택일
257.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1월 1일 병술 3번째기사 / 경기전의 희미해진 어진도 다시 그리게 하다전교하기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奉安)한 어진(御眞)도 햇수가 오래되어 영정(影幀)이 희미해지고 있으니 금년에 다시 모사하는 것이 역시 인정(人情)과 예법(禮法)에 부합되는 만큼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봉심(奉審)한 후 장계로 보고하게 하라." 하였다.
258.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8월 25일 정축 2번째기사 / 경기전에 어진을 모신 후 승지로 하여금 남연군의 묘에 간심하게 하다전교하기를, "경기전(慶基殿)에 영정(影幀)을 환봉(還奉)한 후 배종 승지(陪從承旨)는 돌아올 때 남연군(南延君)의 묘에 가서 간심(看審)하고 오라." 하였다.
259.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9월 20일 신축 1번째기사 / 모사한 태조의 어진을 경기전에 모셔가다모사한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영정(影幀)을 경기전(慶基殿)으로 받들고 나아갈 때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서 전알(展謁)하고, 이어 숭례문(崇禮門) 안으로 나아가서 영정을 실은 신연(神輦)을 공경히 전송하였다. 막차(幕次)에서 영정을 모셔가는 대신인 홍순목(洪淳穆)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보(李承輔)를 소견(召見)하고 하교하기를, "어진(御眞) 2본을 모사하여...
260.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10월 1일 임자 2번째기사 / 영의정과 우의정이 정무를 담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원임 대신과 의논하게 하다전교하기를, "묘당(廟堂)의 사무가 지체되는 만큼 우의정(右議政)의 복명(復命)을 기다릴 수 없다. 공사 당상(公事堂上)이 원임 대신(原任大臣)에게 나아가 의논하여 재결하도록 정부(政府)와 무부(武府)에 분부하라." 하였다. 【 영의정(領議政) 김병학(金炳學)은 부모의 상(喪)을 당하였고, 우의정 홍순목(洪淳穆)은 경기전(慶基殿)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전주(全州)에 갔다.】
261.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10월 7일 무오 1번째기사 / 어진을 전주에 모셔놓고 온 홍순목과 이승보를 인견하다영정(影幀)을 배종(陪從)하고 돌아온 대신(大臣) 홍순목(洪淳穆)과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보(李承輔)를 인견(引見)하였다. 하교하기를, "영정이 편안히 봉안되었으니 참으로 경사스럽고 다행한 일이다. 그리고 대신이 거쳐 온 여러 고을들은 특별히 말할 만한 민폐가 없던가? 그리고 수령들의 장부(臧否)는 어떠하던가?" 하니, 홍순목이 아뢰기를, "농사가 아주 풍년이 들...
262. 고종실록 9권, 고종 9년 10월 7일 무오 2번째기사 / 영정 배진한 대신 이하에게 시상하다영정(影幀) 배진(陪進)한 대신(大臣) 이하에게 차등있게 시상(施賞)하였다.
263. 고종실록 14권, 고종 14년 1월 7일 계해 1번째기사 / 근정전에 나아가 대왕대비전의 가상 존호 책문과 금보 등을 올리고 대사령을 반포하다을 세웠고 선원전(璿源殿)에 모신 선대 임금들의 영정(影幀)을 우러러 보고 아침저녁으로 문안을 올리면서 귀중한 유훈(遺訓)을 마치 아침저녁으로 가르침을 받들듯이 하였다. 그 가르침을 명심하여 대를 이어 신주를 모시었고 뛰어난 지략과 업적을 받들고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여 훌륭한 존호를 올렸다. 효유 헌성 ...
264.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4월 3일 기유 1번째기사 / 진전에 나아가 고유제를 지내고 다례를 별도로 행하다진전(眞殿)에 나아가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다례(茶禮)를 별도로 행하였다. 이어 광화문(光化門) 내의 선원전(璿源殿)에 가서 6실(室)의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에 지영(祗迎)한 뒤에 배봉(陪奉)하였다. 창덕궁(昌德宮)에 이어(移御)하였는데 왕대비전(王大妃殿), 중궁전(中宮殿), 왕세자, 세자빈(世子嬪)이 함께 이어하였다.
265.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4월 3일 기유 2번째기사 / 6실의 영정을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하고 작헌례를 행하다6실(室)의 영정(影幀)을 창덕궁(昌德宮) 선원전(璿源殿)에 봉안(奉安)하고 나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266.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4월 27일 계유 5번째기사 / 전라 감영이 동학 무리에게 함락되다라 적절하게 대처하게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이날 전라 감영(全羅監營)이 함락되었는데 감사(監司)는 체차되어 성에서 나와 서울로 피하여 올라오고 전주 판관(全州判官)이 두 전(殿)의 영정(影幀)을 위봉 산성(威鳳山城)에 옮겨 모셨다. 적(賊)은 먼저 전신국(電信局)을 부수어 서울과의 통신을 끊고 성첩(城堞)을 나누어 지켜 관군을 막았다.】
267.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5월 12일 무자 1번째기사 / 호서와 호남 백성들에게 윤음을 내리다경묘(肇慶廟)와 경기전(慶基殿)의 신주(神主)와 영정(影幀) 을 이안(移安)하게 되고 백성들도 휘말리게 되었다. 아! 너희들은 모두 나라에서 길러주고 살려준 백성인데 어찌하여 오늘 만고에 없는 이런 큰 변란을 일으킬 줄이야 생각했겠는가? 이들은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이 힘을 합쳐 함께 처단하여야 할 자이니 나라의 법에서 반드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이에 ...
268.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5월 24일 경자 1번째기사 / 진전에 나아가 고유별다례를 지내다진전(眞殿)에 나아가 고유별다례(告由別茶禮)를 지내고 이어 돈화문(敦化門) 안의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6실(室)의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에 삼가 맞이하여 배봉(陪奉)하고 임금이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였다. 왕대비 전하(王大妃殿下)와 중궁 전하(中宮殿下), 세자, 세자빈(世子嬪)도 함께 이어하였다.
269. 고종실록 31권, 고종 31년 5월 24일 경자 2번째기사 / 6실의 영정을 경복궁 선원전에 봉안하고 작헌례를 행하다6실(室)의 영정(影幀)을 경복궁(景福宮) 선원전(璿源殿)에 봉안(奉安)하고 나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270. 고종실록 35권, 고종 34년 6월 26일 양력 1번째기사 / 진전에 나아가 고유제를 지내다진전(眞殿)에 나아가 고유제(告由祭)를 지내고 나서 인화문(仁化門) 내에 이르러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 지영(祗迎)하였다.
271.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2월 31일 양력 2번째기사 / 태릉의 석물을 수리할 때에 갔던 대신 이하를 인견하다제대로 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번에 고황제의 영정(影幀)을 모사할 때 보완하는 것이 마땅하겠다." "제대로 되지 못한 곳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으나 보완하여 봉안한다면 폐하의 효성이 더욱 빛날 것입니다." "종 묘(宗廟)에는 다섯 번의 대제(大祭)가 있는데 추존한 이후에 역대의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해 본 결과 세모제(歲暮祭)는 있으나 납향(臘享)은 없었다. ...
272.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2월 31일 양력 3번째기사 / 고황제의 어진을 선원전에 모실 것을 명하다하여 들이라. 사체가 중대한 만큼 도감은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이라고 부르고 당상과 낭청은 궁내부(宮內府)에서 차출하도록 하라." "선원전에 모신 익황제(翼皇帝) 경인본(庚寅本) 어진 상축(上軸)에 제대로 되지 못한 곳이 있으니, 이번에 영정을 모사할 때 함께 보완하도록 도감에서 잘 알아 거행하게 하라." "영희 전 영건도감(永禧殿營建都監)을 영정모사도...
273. 고종실록 39권, 고종 36년 12월 31일 양력 4번째기사 / 윤용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의정(議政) 윤용선(尹容善)을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영희전 영건도감 도제조(永禧殿營建都監都提調)에, 특진관(特進官) 민영환(閔泳煥), 장례원 경(掌禮院卿) 김석진(金奭鎭), 정3품 이헌영(李𨯶永)을 제조(提調)에 임용하였다. 특진관 오정근(吳正根)을 시강원 첨사(侍講院詹事)에 임용하였으며 칙임관(勅任官) 4등에 서임(敍任)하였다.
274.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3월 6일 양력 1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흥덕전으로 봉안하는 봉안제를 작헌례로 대신 하기로 하다장례원 경(掌禮院卿) 민영환(閔泳煥)이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에 있는 영정(影幀)을 흥덕전(興德殿)으로 모셔오니 봉안일(奉安日)에는 마땅히 봉안제(奉安祭)가 있어야 합니다. 상황에 맞게 설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봉안제는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여 마련하고 제문(祭文)은 마땅히 친히 지어서 내리겠다." 하였다.
275.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3월 10일 양력 1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모사하는 것 등에 필요한 비용을 지급하게 하다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 영희전 영건도감 도제조(永禧殿營建都監都提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 영정(影幀)을 모사(摹寫)하는 것과 영희전(永禧殿)을 영건하는 것은 사체(事體)가 매우 중대하므로 기일을 엄격히 지켜서 거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용이 막대하여 얼마나 들지 예산할 수 없습니다. 우선 은화(銀貨) 8만원(圓)을 탁지부...
276.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3월 13일 양력 2번째기사 / 이용직과 이주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영희전영건도감 제조(永禧殿營建都監提調)를 겸임하도록 명하였다. 종1품 김석진(金奭鎭)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 2등에 서임하였으며, 특진관 김만수(金晩秀)를 장례원 소경(掌禮院少卿)에 임용하고 칙임관 4등에 서임하였다. 특진관 이승우(李勝宇)를 선원보략속수교정 당상(璿源譜略續修校正堂上)에 임용하였다.
277.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3월 14일 양력 1번째기사 / 함흥과 영흥의 본궁으로 떠나는 윤용선과 이용직을 소견하다에 떠나고자 하여 신들도 정탈할 일이 있습니다. 영정(影幀)을 모사(摹寫)하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므로 털끝만 큼이라도 영정과 틀리게 모사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지금 솜씨있는 화사(畵師)를 얻기가 어렵고 또 화사의 솜씨를 보고서 재주있는 사람을 취해야 하나 영정의 진본(眞本)을 직접 놓고 본뜨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공신(功臣)과 기신(耆臣)의 화상...
278.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3월 31일 양력 1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옮기는 날짜가 가까워 김종한을 보내기로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옮겨 봉안(奉安)하는 일이 가까워졌으니, 함경남도 관찰사(咸鏡南道觀察使) 김종한(金宗漢)은 모레 길을 떠나게 하라." 하였다.
279.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14일 양력 1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서울로 모셔올 때 도성문 밖에서 지영하고 위내에서 배봉하게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서울로 모셔올 때, 도성문(都城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봉(陪奉)할 것이다." 하였다.
280.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14일 양력 2번째기사 / 궁내부 특진관 조병세에게 칙유하다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받들고 올 날짜가 가까워 오므로 경이 반열(班列)에 참석하는 것은 인정으로나 예절로 보아 그만둘 수 없을 것이며, 또 경에게 약을 맛보는 책임을 주었으니 또한 시골집에 그대로 있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응당 짐의 마음을 알 것이니, 경은 이해하고 즉시 올라올 것을 도모하여 나의 지극한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281.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19일 양력 1번째기사 / 준원전 영정의 동가소에 민영환을 보내어 봉심하게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 영정(影幀)의 동가소(動駕所)에 원임 제학(原任提學) 민영환(閔泳煥)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오게 하라." 하였다.
282.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20일 양력 1번째기사 / 도성문 밖에서 준원전의 영정을 지영하다도성문(都城門) 밖에 나가서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받들고 올 때에 지영(祗迎)하고 이어 모시고 돌아와서 흥덕전(興德殿)에 봉안(奉安)하고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황태자(皇太子)도 따라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283.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20일 양력 2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봉안한 후 모든 대신이 들어와 봉심할 것을 명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받들고 와서 흥덕전(興德殿)에 봉안(奉安)한 후 직접 봉심(奉審)할 때에는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은 입참(入參)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오는 음력 3월 24일에 건원릉(健元陵)과 수릉(綏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직접 제사를 지내고, 이어 홍릉(洪陵)에 나아 가 전배(展拜)하고 직접...
284.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20일 양력 3번째기사 / 영정을 모신 후 윤용선 등에게 함흥과 영흥의 사정에 대해 논의하다장례원 경(掌禮院卿) 이용직(李容稙)이다.】 "영정(影幀)을 아주 안전하게 받들어 왔고 작헌례(酌獻禮)를 순조롭게 마쳤으니 참으로 경사 스럽고 다행스럽다." 하니,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영정을 모시고 출발한 지 3일 동안은 계속 단비가 내리다가 14일 이후로는 날씨가 화창해져 영정을 안전하게 봉안할 수 있었고 신들 일행의 많은 인원도 무사히 다녀왔으니,...
285.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4월 20일 양력 5번째기사 / 이건하가 거둥할 길을 잘못 관리한 토목 국장 윤진석을 파면할 것을 청하다거둥할 길을 닦는 일을 신중히 하지 않았으므로 폐하께서 하문하시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황공한 일입니다. 이 때문에 본관을 면직하는 것입니다. 신도 황공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응당 엄하게 처결해야 하겠으나 영정(影幀)을 모셔오는 것을 안전하게 하였으니 참작하지 않을 수 없다. 2개월 감봉(減俸)하라. 경은 견책(譴責)하겠다." 하였다.
286.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1일 양력 2번째기사 / 경효전의 제사는 태자가 적접 거행하다밖의 의절(儀節)은 모두 그만두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내일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다음 영정(影幀)을 본떠 그린 초본을 봉심(奉審)하겠다. 동궁이 따라가서 참여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종친(宗親), 참정(參政), 찬정(贊政), 각 부(府)와 부(部)의 대신과 의장(議長)은 찰석하라." 하였다.
287.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3일 양력 1번째기사 / 함녕전에서 영정을 봉심한 대신과 장례원 당상을 소견하다함녕전(咸寧殿)에서 영정(影幀)을 봉심(奉審)한 대신(大臣)과 장례원 당상(掌隷院堂上)을 소견(召見)하였다.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 모사도감 제조(摹寫都監提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이근수(李根秀)이다.】 "신들이 명을 받들고 급히 흥덕전(興德殿)에 가서 열성조(列聖朝)의 어진(御眞)을 봉심하니, 안녕하였습니다. 어진을 본떠 그리는 일이 점차...
288.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3일 양력 2번째기사 / 영희전, 선원전의 각 실의 표제를 직접 쓸 것을 알리다하는데 아직까지 실행에 옮기지 못하여 항상 매우 황송하였다. 지금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영정(影幀)을 봉안할 때에 짐(朕)이 옛 표제의 오른쪽에다 친히 쓸 것이니, 장소는 따로 설치할 필요 없이 모두 전내(殿內)에다 하고, 도감(都監)은 모사도감(摹寫都監)과 합설(合設)하라. 영희전에 봉안하는 날과 선원전에 이안(移安)하는 날에 거행하겠다." 하였다.
289.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7일 양력 2번째기사 / 영정모사도감 등에서 필요한 비용을 내어주도록 하다영정모사도감 영희전영건도감 도제조(影幀摹寫都監永禧殿營建都監都提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본 도감(都監)에서 경비에 대해서는 되도록 절약하여 쓰도록 이미 아뢰어 재결을 받았으나 지금 영정을 본떠 그리는 일과 토목 공사가 한창 벌어지고 있으니, 사체(事體)에 있어 매우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탁지부(度支部)에서 이미 획급(劃給)해 준 돈으로는 완공...
290.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10일 양력 2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환안할 때에 조병세가 나가게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환안(還安)할 때에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나아가라." 하였다.
291.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11일 양력 1번째기사 / 태조 고황제의 어진을 모사하는 등의 일을 빨리 끝낼 것을 명하다"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도로 봉안(奉安)할 때, 선고사유제(先告事由祭)를 음력 15일에 작헌례와 겸하여 설행하고, 고동가제(告動駕祭)는 친히 행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제문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준원전의 영정을 도로 봉안할 때는 마땅히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봉(陪奉)하다가 도성문 밖에서 지송(祗送)겠다." 하였다.
292.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13일 양력 2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도로 봉안할 때 지송한 후 정릉에서 친제하기로 하다리기를, "이달 음력 19일에 준원전(濬源殿)에 영정(影幀)을 도로 봉안(奉安)할 때 지송(祗送)하고서 곧바로 정릉(貞陵)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친히 제사를 지내며, 그 다음 홍릉(洪陵)에 나아가 전배(展拜)하고 친히 제사를 지내겠다. 제문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동궁(東宮)이 홍릉에 나아가 전알할 것인데 이것은 그의 효성스러운 ...
293.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13일 양력 4번째기사 / 특진관 조병세가 영정을 모시고 가라는 명령을 취소해 줄 것을 청하다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가 차자를 올려, ‘영정(影幀)을 모시고 가라는 명을 거두어 주소서.’라고 하니, 비답하기를, "접때 조정에 나온 것은 3년 동안 계속 바라던 끝이었으므로 정말 만족하게 여기었는데 갑자기 또 돌아갔으니 매우 섭섭하였다. 이번에 영정을 모시고 가도록 명한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그러나 병이 이러하다니 매우 염려스럽...
294.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14일 양력 2번째기사 / 준원전에 영정을 환안할 때에 의정이 배진하도록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에 영정(影幀)을 환안(還安)할 때에 의정(議政)이 배진(陪進)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준원전의 영정을 본떠 그리는 일이 끝나서 준원전에 도로 봉안할 길일(吉日)을 정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나라에 더없는 경사이다. 그런데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나라를 세우던 거룩한 마음을 추억하면 마땅히 뜻을...
295.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17일 양력 1번째기사 / 흥덕전에 나가 전알하고 고동가제를 행하다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고 이어 고동가제(告動駕祭)를 행하였다. 준원전(濬源殿)에 영정(影幀)을 도로 봉안(奉安)할 때 도성문(都城門) 밖으로 나아가 지송(祗送)하고 이어 정릉(貞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나서 차례로 홍릉(洪陵)에 나아가 친히 제사를 지냈다. 황태자(皇太子)도 모두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고, 홍릉에서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296.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19일 양력 1번째기사 / 영희전의 각 실에 영정을 옮겨 모실 때 종각 앞길에서 지영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영희전(永禧殿) 각실(各室)에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 종각(鍾閣) 앞길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봉(陪奉)할 것이다. 봉안한 다음 봉안제(奉安祭)는 작헌례(酌獻禮)를 친히 행하는 것으로 마련하고, 제문(祭文)은 친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297.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26일 양력 2번째기사 / 중추원 의장 신기선이 역적 안경수와 권형진을 빨리 처벌할 것을 청하다源殿)에 새로 봉안(奉安)하고 익황제(翼皇帝)의 영정(影幀)을 보완하여 환안(還安)하고, 작헌례(酌獻禮)를 마침으로써 폐하의 효성이 크게 빛나니 신하와 백성들이 찬양하고 축하하는 것이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신은 외람되게도 중추원 의장 의 자리에 올라 정사를 의논하는 직책을 맡은 처지로서 마침 본원(本院)에서 연명 상소(聯名上疏)에 대해 비지(批旨)를 받지 못한 ...
298.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28일 양력 4번째기사 / 조병세가 날씨가 고르지 못한 사정을 들어 직접 작헌례를 하지 말 것을 청하다대략에, "‘내일 영희전(永禧殿) 각실(各室)의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에 법가(法駕)가 지영(祗迎)하고 이어 위내(衛內)에서 배진(陪進)하고서 봉안(奉安)한 다음 작헌례(酌獻禮)를 직접 행하겠다.’라는 명이 이미 있었으니 선대 임금을 추모하는 폐하의 한없는 효성에 대하여 심히 우러르지 않겠 습니까? 그러나 요즘 날씨가 고르지 않아 무더...
299.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28일 양력 5번째기사 / 영희전에 영정을 이봉할 때 지영하는 절차 등을 섭행하게 하다)을 내리기를, "영희전(永禧殿) 각실(各室)의 영정(影幀)을 이봉(移奉)할 때에 지영(祗迎)하고 배봉(陪奉)하는 절차는 대신(大臣)이 차자를 올려 간절하게 아뢰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따르겠다. 봉안(奉安)한 후에 봉안제(奉安祭)는 대신을 보내어 섭행(攝行)하라. 제문(祭文)은 직접 지어서 내리겠다."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영정을 이봉한 다음 조 특진관(趙特進官...
300.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28일 양력 7번째기사 / 영정을 봉심하고 온 대신 이하를 소견하다영정(影幀)을 봉심(奉審)하고 온 대신(大臣)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조병세(趙秉世)가 문안하였다. 이어 영희전(永禧殿) 각실(各室)에 영정을 봉안(奉安)한 후에 봉심한 결과 안녕(安寧)하였다는 뜻으로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특진관(特進官) 조병세(趙秉世), 비서원 경(祕書院卿) 윤덕영(尹德榮)이다.】 "비단 날씨가 좋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 경의 차자로 인하여 ...
301.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5월 29일 양력 1번째기사 / 영정모사도감, 영희전영건도감의 도제조 이하에게 시상하다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영희전영건도감 도제조(永禧殿營建都監都提調) 이하와 세 차례에 걸쳐 흥덕전(興德殿) 작헌례(酌獻禮)와 선원전(璿源殿) 작헌례 때의 찬례(贊禮) 이하, 영정(影幀)을 배진(陪進)한 대신(大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제조(提調) 민영환(閔泳煥)·이헌영(李𨯶永)·이용직(李容稙), 도청(都廳) 김덕한(金德漢)·신양균(申養均) , 겸장례...
302.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6월 4일 양력 1번째기사 / 준원전에 영정을 다시 봉안하고 돌아온 대신 이하를 소견하다) 이하를 소견(召見)하였다.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다시 봉안(奉安)한 후 복명(復命)하였기 때문이다. 상이 이르기를, 【 의정부 의정(議政府議政) 윤용선(尹容善), 장례원 경(掌禮院卿) 서상조(徐相祖)이다.】 "영정을 다시 봉안하는 일이 잘 되고 경들도 무사히 갔다 왔으니 짐(朕)의 마음이 매우 기쁘다." 하니, 윤용선(尹容善) 이 아뢰기를, "신들이 영정을 배...
303.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6월 4일 양력 2번째기사 / 영정배진 대신 이하에게 시상하다영정배진 대신(影幀陪進大臣) 이하에게 차등 있게 시상하였다. 비서원 승(祕書院丞) 윤덕영(尹德榮)은 가자(加資)하였다.
304.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9월 24일 양력 1번째기사 / 예조의 관리를 보내 경기전과 화녕전의 제사를 거행하게 하다영정모사도감 도제조(影幀摹寫都監都提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경기전(慶基殿)에 봉안할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어진 표제(御眞標題)와 화녕전(華寧殿)에 봉안할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어진 표제는 대내(大內)에서 친히 써서 규장각(奎章閣)에 봉안해 두었습니다. 지금 가을이 깊어가고 있으니 곧 예(禮)를 맡은 신하를 보내어 봉안하는 것이 좋을 듯합...
305.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14일 양력 4번째기사 / 영정모사도감과 진전중건도감에게 빨리 일을 시작하라고 하다으니 기막힌 짐의 마음이야 어찌 끝이 있겠는가? 영정(影幀)을 모사하여 봉안하고 진전(眞殿)을 중건하는 일은 하루라도 헛되이 보낼 수 없으니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을 합쳐서 설치하여 시행하고 도감(都監)의 당상(堂上)과 낭청(郞 廳)은 궁내부(宮內府)로 하여금 차출해서 며칠 내로 역사를 시작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
306.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14일 양력 8번째기사 / 심순택을 영정모사도감과 진전중건도감의 도제조에, 민영환과 김석진 등을 제조에 임명하다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의 도제조(都提調)에 임용하고 원수부 회계국 총장(元帥府會計局總長) 민영환(閔泳煥),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김석진(金奭鎭), 정2품 조희일(趙熙一)을 영정모사도감과 진전중건도감의 제조(提調)에 임용하였으며, 종2품 민영철(閔泳喆)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3등에 서임(敍任)하였다.
307.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23일 양력 1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떠나는 날을 정하다"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떠나보내는 날을 음력 9월 18일로 추택(推擇)하였습니다. 먼저 고유제(告由祭)는 같은 달 16일에 지내고 동가(動駕)를 고하는 제사는 떠나는 날 첫 새벽에 설행하며 축문(祝文)은 시독(侍讀)으로 하여금 찬출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되 제문(祭文)은 내가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308.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26일 양력 1번째기사 / 심순택이 어진의 이봉에 대해 아뢰다영정모사도감 제조(影幀摹寫都監提調) 심순택(沈舜澤)이 아뢰기를, "영희전(永禧殿)에 봉안(奉安)한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어진(御眞), 냉천정(冷泉亭)에 봉안한 영조 대왕(英祖大王)의 어진, 평락정(平樂亭)에 봉안한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의 어진, 영희전에 봉안한 순조 숙황제(純祖肅皇帝)의 어진, 평락정에 봉안한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어진과 헌종 ...
309.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26일 양력 2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을 흥덕전으로 모셔오는 날을 정하다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이 아뢰기를, "준원전(濬源殿)의 영정(影幀)을 흥덕전(興德殿)에 모셔 와서 봉안(奉安)하는 날을 음력 9월 28일로 정하고 봉안제(奉安祭)는 당일에 지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작헌례(酌獻禮)를 친행(親行)하는 것으로 마련하라. 제문(祭文)도 내가 직접 짓겠다." 하였다.
310.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27일 양력 1번째기사 / 신기선이 준원전의 어진을 모셔오기 위해 하직 인사를 하다정묘조(正廟祖)에 지은 것으로서 공자(孔子)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고 봄가을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경오년(1870)에 서원(書院)을 철훼(撤毁)하 라는 명령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선현들과 선유(先儒)들의 사당이 지나치게 중첩되었기 때문에 재감(裁減)하려고 한 것이었고 애초에 선성(先聖)의 영당(影堂)까지 모두 포함한 것은 아니었으나 그때의 수령(守...
311.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0월 27일 양력 3번째기사 / 조병식을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하다정1품 조병식(趙秉式)을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에 임용하고 칙임관(勅任官) 1등에 서임(敍任)하였으며, 장례원 경(掌禮院卿) 신기선(申箕善)을 영정모사도감 진전중건도감 제조(影幀摹寫都監眞殿重建都監提調)에 더 차하(差下)하였으며, 천릉도감 제조(遷陵都監提調) 이근명(李根命)과 산릉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 조정희(趙定熙)를 서로 바꾸었다.
312.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1월 18일 양력 1번째기사 / 준원전의 영정이 오는 곳에 민병한을 보내 봉심하고 오게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준원전(濬源殿) 영정(影幀)의 동가소(動駕所)에 원임 대교(原任待敎) 민병한(閔丙漢)을 보내서 봉심(奉審)하고 오도록 하라." 하였다.
313.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1월 20일 양력 1번째기사 / 심순택을 체차하고 영정모사도감 진전중건도감 도제조에 윤용선을 대신하다영정모사도감 진전중건도감 도제조(影幀摹寫都監眞殿重建都監都提調) 심순택(沈舜澤)을 상소로 체차하고 윤용선(尹容善)으로 대신하였다.
314.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1월 28일 양력 1번째기사 / 태조 고황제의 탄신일에 흥덕전에서 작헌례를 직접 진행할 것을 알리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오는 음력 10월 11일은 곧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탄신일이다. 진전(眞殿)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한 뒤에 불행하게도 화재의 변고가 났으므로 인정과 예절을 펴지 못한 짐의 슬픈 마음은 어찌 끝이 있겠는가? 그날에 흥덕전(興德殿)에 작헌례(酌獻禮)를 친행(親行)하겠으며 제문(祭文)도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315.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1월 28일 양력 3번째기사 / 심상훈이 개성부의 목청전을 복구할 것을 청하다있던 옛 집에 목청전(穆淸殿)을 세우고 태조의 영정(影幀)을 모신 것은 바로 우리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효성으로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훌륭한 처사로서 경기전(慶基殿), 준원전(濬 源殿)과 똑같이 높이 모셔야 할 것입니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전각이 황폐해지고 섬돌과 주춧돌은 흙에 묻혀 만년토록 우러러보면서 의지할 곳이 없게 되고 백 대를 내려오는 원한이 ...
316.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1월 30일 양력 2번째기사 / 동향 대제는 대신을 보내 섭행하도록 하다德殿) 작헌례(酌獻禮)를 행한 다음 옮겨 모사한 영정(影幀)의 초본(初本)을 봉심(奉審)하겠다. 동궁이 배참(陪參)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라.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종친(宗親), 참정(參政), 찬정(贊政),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대신(大臣)과 의장(議長)은 들어와 보도록 하라." 하였다. 또 조령을 내리기를, "경효전(景孝殿) 동향 ...
317.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2월 1일 양력 1번째기사 / 목청전에 영정을 모시는 의식 절차를 정하게 하다모여서 목청전(穆淸殿)에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하는 의식 절차에 대하여 의견을 모아서 올리므로 삼가 상주(上奏)합니다."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의견을 모은 것이 이와 같으니 온 나라의 논의가 대체로 같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영정을 목청전에 봉안하는 의식 절차에 대하여 장례원(掌禮院)에서 규례에 맞게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318.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2월 1일 양력 2번째기사 / 목청전에 모실 태조의 영정은 선원전본을 모사하게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목청전(穆淸殿)에 모실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영정(影幀)은 선원전본(璿源殿本)을 옮겨 모사하여 거행할 것을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319.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2월 12일 양력 1번째기사 / 흥덕전에 영정을 모셔오기 전 절향에 대한 규례를 마련하게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흥덕전(興德殿)에 임시로 모신 열성조(列聖朝)의 영정(影幀)을 도로 봉안(奉安)하기 전에 절향(節享)을 맞게 되면 장례원(掌禮院)에서 규례에 따라 마련하여 설행하게 하라." 하였다.
320.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2월 15일 양력 1번째기사 / 태조 고황제와 숙종 대왕의 영정이 완성되는데 직접 작헌례를 행하게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의 영정(影幀)과 숙종 대왕(肅宗大王)의 영정을 옮겨 모사하는 일이 모두 오늘로 완성된다. 음력 10월 30일에 내가 친히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것이며 제문(祭文)도 직접 지어서 내려 보내겠다." 하였다.
321. 고종실록 40권, 고종 37년 12월 25일 양력 1번째기사 / 모레 직접 흥덕전에 나가 전배하고 영정의 어진 초본을 봉심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모레 내가 직접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다음 영정(影幀)을 옮겨 모사한 어진(御眞) 초본(初本)을 봉심(奉審)하겠다. 동궁이 배참(陪參)하는 절차는 규례대로 마련하고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 종친(宗親), 참정(參政), 찬정(贊政),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대신(大臣)과 의장(議長)은 들어와 보라." 하였다.
322.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1월 20일 양력 2번째기사 / 흥덕전에 전알하고 모사한 영정을 봉심하기로 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모레 자내(自內)의 예(例)로 흥덕전(興德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한 뒤에 모사(摹寫)한 영정(影幀) 초본을 봉심(奉審)하겠다. 동궁이 배참(陪參)하는 절차를 전례대로 마련하며 시임 대신(時任大臣)과 원임 대신(原任大臣), 각신(閣臣)과 종친(宗親), 참정(參政)과 찬정(贊政), 각부(各府)와 각부(各部)의 대신과 의장(議長)은 들어와 보라." 하였다.
323.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1월 21일 양력 1번째기사 / 영정을 모시는 날짜를 받도록 하다며칠 안으로 끝나게 되었다. 준원전(濬源殿)에 영정(影幀)을 도로 봉안(奉安)하는 일이 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날씨가 몹시 추운 때에 먼 길을 모시고 가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잠시 흥덕전(興德殿)에 그대로 봉안해 두고 도로 봉안할 날짜는 오는 음력 3월 열흘께로 날짜를 받아서 들여 오며 영희전(永禧殿), 냉천정(冷泉亭), 평락정(平樂亭)에 영정을 도로 ...
324.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1월 22일 양력 2번째기사 / 헌종 대왕의 어진을 고치도록 명하다조령(詔令)을 내리기를, "헌종 대왕(憲宗大王) 어진(御眞)의 후배(後褙) 부분에 잘못된 곳이 있으니 이번 신본 영정(新本影幀)을 장축(粧軸) 할 때 함께 보완하라고 모사도감(摹寫都監)에 분부하라." 하였다.
325.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6월 26일 양력 1번째기사 / 진전에 나아가 각실의 영정을 이안하는 데에 따른 고유 별다례를 행하다진전(眞殿)에 나아가 각실(各室)의 영정(影幀)을 이안(移安)하는 데에 따른 고유 별다례(告由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이어 대안문(大安門)안에 나아가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와 수원진위대(水原鎭衛隊)의 조련을 행하였다.
326.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7월 9일 양력 2번째기사 / 제사를 올릴 때 수고한 관리들에게 시상하다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의 제조(提調) 이하 및 선원전(璿源殿) 각실(各室)의 영정을 봉안(奉安)할 때, 흥덕전(興德殿)에 다섯 차례의 작헌례를 행할 때, 경운당(慶運堂)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할 때, 진전(眞殿)에 작헌례를 행할 때의 찬례(贊禮) 이하, 목청전(穆淸殿)에 고유제(告由祭)와 작헌례를 행할 때 헌관(獻官) 이하, 목청전에...
327. 고종실록 41권, 고종 38년 7월 11일 양력 1번째기사 / 진전에 나아가 별다례를 지내다진전(眞殿)에 나아가 각실(各室)의 영정(影幀)을 도로 모신 다음 별다례(別茶禮)를 행하였다. 황태자가 따라 나아가 예를 행하였다.
328.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7월 2일 양력 1번째기사 / 이용익 등이 선대의 사적을 이어나가는 일에 대하여 건의하다겠습니까? 경자년(1900) 봄에 태조 고황제의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할 때 본도의 벼슬 아치와 유생(儒生)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아뢴 결과 우리 황상(皇上) 폐하는 특별히 국가의 발상지(發祥地)를 중히 여기고 내부(內部)에 칙령(勅令)을 내려 규정을 반포하게 하였으니 성상께서 계술(繼述)하는 덕이 다시 환히 빛났으며 향촌의 여론도 모두 동의하였습니다. 장차...
329. 고종실록 42권, 고종 39년 8월 20일 양력 3번째기사 / 영정모사 도감과 진전중건 도감 등 제반 재정 비용의 지출에 대하여 아뢰다(度支部)의 청의(請議)한 것으로 인하여 영정모사도감(影幀摹寫都監)과 진전중건도감(眞殿重建都監)의 비용으로 28만 8,696원, 상호도감(上號都監)의 비용으로 1만 5,184원, 관왕묘(關王廟)를 높이는 비용으로 5,277원, 경운궁(慶運宮) 공사비 증가액으로 7만 33원, 법전(法殿) 건축비 증가액으로 20만원, 광무(光武) 5년 내진연(內進宴) 연회비 증가액으로 5만 2,353원, 경축 행사 ...
330. 고종실록 44권, 고종 41년 4월 27일 양력 2번째기사 / 숭의묘를 세울 때와 진전을 모실 때의 각 차비관 이하에게 시상하다숭의묘(崇義廟)를 세울 때와 영정(影幀)을 봉안(奉安)할 때의 각 차비관(差備官) 이하와 제사를 봉안할 때의 초헌관(初獻官) 이하에게 차등을 두어 시상(施賞)하였다. 대축(大祝) 신성균(申性均), 영선사장(營繕司長) 이근교(李根敎), 감동관(監董官) 농상공부 상공국장(農商工部商工局長) 홍순찬(洪淳瓚), 정3품(正三品) 이면상(李冕相)·안종덕(安鍾悳), 4품(四品) 오형근(吳衡...
331. 순종실록부록 4권, 순종 부록 6년 4월 18일 양력 2번째기사 / 태왕 전하를 모시고 선원전에서 작헌례를 하고 숙종, 영조, 정조, 문조의 영정을 수리하여 봉안하다태왕 전하(太王殿下)를 모시고 선원전(璿源殿)에 나아가 작헌례(酌獻禮)를 행하였다. 숙종 대왕(肅宗大王), 영조 대왕(英祖大王), 정조 선황제(正祖宣皇帝), 문조 익황제(文祖翼皇帝)의 영정(影幀)을 수리하여 환안(還安)하였기 때문이다.
332. 순종실록부록 4권, 순종 부록 6년 5월 17일 양력 1번째기사 / 선원전의 영정을 수리할 때 수고한 한응엽 등 3인에게 상금을 주다선원전(璿源殿)의 영정(影幀) 수개(修改) 때 거행한 인원 한응엽(韓應曄) 등 3인(人)에게 상금(賞金)을 차등 있게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