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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윤회(輪廻)
성낙제.
그 또한 고려인이었다.
이국만리 머나먼 이곳까지 와서 고려의 부흥이라는 염원(念願) 하나로 살아온 사람인 것이다.
만금전장의 주요인사들은 그렇게 고려와 관련이 있었고, 성낙제는 만금전장의 서쪽 방면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니만큼 당연히 고려인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일가가 이성계 일파에 멸족(滅族)을 당한 혈한(血恨)을 가진.
삼일 후.
백포인은 다시 만금전장 개봉지부에 나타났다.
그의 앞에는 봉투 하나가 놓여졌다.
결혼 축하금을 넣는 것 같은 붉은 봉투.
『이게 뭔가?』
『현물 보관증서… 쉽게 말해서 본장 발행의 전표(錢票)입니다』
백포인이 미간을 찡그렸다.
『전표라니? 내가 요구한 것은 전표가 아니라…』
『오십만냥의 문은(紋銀)이라면 너무 부피가 큽니다. 그리고 그것을 운반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이 아니지요. 이 전표는 이 오백리 이내라면 어디서든 바로 문은과 교환할 수 있는 신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야 그래도 현물이 필요하시다면 한시진내로 현물을 준비해드릴 수 있습니다』
『……』
백포인은 묵묵히 성낙제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생각에서라면 받아두도록 하지』
그는 전표 봉투를 품안으로 넣으면서 누그러진 음성으로 말했다.
『수고했소』
『아닙니다. 능력이 닿는 한 명을 받들어야지요』
성낙제가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백포인은 나직이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실제로는 불만이 많은 걸 잘 알고 있소』
『어찌 감히…』
『무리한 요구는 이번이 마지막일 거요. 제대로 말하자면 이번 일은 성지부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한 것에 불과했으니까. 계속 전과 같이 열심히 한다면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을게요. 그럼!』
그가 몸을 일으켰다.
성낙제가 엉거주춤 따라 몸을 일으켰다.
『버, 벌써 가십니까?』
『내가 더 있기를 바라오?』
『그, 그건…』
성낙제가 주춤하자 백포인은 그를 보면서 음산히 웃고는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자 성낙제는 나무토막처럼 굳어져 그를 전송하고는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무너지듯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쩌시려는 것인가?」
그는 걱정스러운 듯 어둔 하늘을,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백포인은 읊봉?흐르듯 몸을 날리고 있었다.
그의 신법은 대단히 빨라 거대한 백학이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는 삽시간에 개봉성을 가로질러 높다랗게 솟은 개봉성의 성벽을 날아넘었다. 깊은 밤이니 이미 성문이 닫힌 탓이다.
얼마 가지 않아 도관 하나가 나타났다.
현도관.
눈에 익은 곳이었다.
바로 지난날 귀왕혈이 은신하고 있었던 바로 그 도관과 같은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현도관으로 들어섰다. 이름은 같지만 도관은 퇴락하여 사방에 잡초가 무성하고 여기저기에서 들짐승들이 뛰어다니는 폐허였다.
그가 들어선 곳은 현도관의 정전이다.
불이 꺼진 정전은 그야말로 귀신이 자리하고 있는 듯했지만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그 정전인 옥황전으로 들어섰다.
아무도 없는 듯했던 그 옥황전 안에는 뜻밖에도 그보다 먼저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백의인들이 열명도 넘었다.
대략 흘러드는 달빛에 드러난 그들의 수효는 모두 스무명 가량.
『은령(銀令), 돌아왔습니다』
그가 무릎을 꿇으며 퇴락한 옥황의 신상을 향해서 입을 열었다.
『일은?』
신상에게서 낮은 음성이 흘러나왔다.
『예정대로입니다. 성낙제는 명령받은 금액을 모두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미 조사한 바대로 반항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음을 확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이걸로 만금전장의 금력은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있게 된 셈이로군』
신상이 다시 중얼거렸다. 어둠 속. 신상 뒤쪽은 그야말로 칠흑과 같아서 그 뒤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아본다는 것은 그야말로 지난(至難)한 일이었다.
『그렇습니다. 각지의 점졔?중, 성낙제가 가장 강직한 인물이었으니까요. 근일 중에 그를 보좌할 사람 하나를 보내면 모든 게 마무리가 될 것입니다』
『좋아. 모두 예정대로 출발한다. 지금!』
어둠 속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옥황신상을 향해서 무릎을 꿇고 있던 백포인들은 아무런 기척도 없이 그 자리를 떠났다.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아주 가벼운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가 잠시 일었을 뿐이다.
옥황전의 뒤쪽 문을 나서던 흑의인은 문득 굳어졌다.
앞선 사람들이 모두 백의였던 것에 반하여 그는 흑회색의 옷을 입어 철저히 어둠에 동화된 상태였고, 얼굴에도 흑건을 뒤집어써 드러난 것은 어둠 속에서 빛나는 두 눈뿐이었다.
『누구냐?』
그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차갑게 소리쳤다.
그가 그렇게 소리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의 곁에는 늘 그를 호위하는 수신호위가 넷 있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그가 움직이고 있음에도 전혀 기척이 없었던 것이다.
그림자와 같은 그들이니, 어디가서 쉬고 있을 까닭도 없고, 자신이 옥황전에 들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를 호위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
그러나 교교(皎皎)한 달빛이 흐를 뿐.
그의 외침에 대한 답변은 들리지 않는다.
『내 수하들을 건드렸다면, 숨어 있을 작정은 아닐 터인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까닭은?』
그가 다시 소리쳤다. 대답은 여전히 없었다.
차가운 눈빛으로 주위를 훑어보던 그의 눈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서 발을 굴러 그 자리를 떠났다. 그의 신형은 시위를 떠난 화살과도 같이 빠르게 현도관을 벗어났다.
『도대체?』
현도관 뒤쪽으로 달리던 그는 점점 미간을 찡그렸다. 그가 현도관을 떠난다면 그를 건드린 자가 분명히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생각했었는데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반쳅?가량이나 몸을 날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뒤따르는 사람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주도면밀한 사람이라 뒤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면 결코 그의 눈을 벗어나지 못할 것임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방향을 바꾸어 이번에는 강쪽을 향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약속이 있어 어쩔 수가 없는 것이다.
무성한 갈대는 이미 말라버린 껍질만 남아 강변은 스산하기만 했다.
철썩이는 물소리에 부는 바람이 그 갈대들을 흔들어대면 마치 쇠스랑을 부비듯 절로 옷깃이 여며질 정도였다.
강변에는 조각배 한 척이 있다.
그를 기다리기라도 하듯이 사공 한 사람이 거기에 앉아 있었다. 달려온 길을 힐끗 돌아본 그는 냉소를 떠올린채 몸을 날려 단숨에 칠팔장의 거리를 가로질러 그 조각배 위에 몸을 세웠다.
『강을 건너라』
그가 말했다.
『지금 말입니까?』
『지금』
그는 겁을 주려는 듯 내공을 드러내어 어둠 속에서 무서운 안광을 뿜어냈다.
안광이 마치 형체가 있는 비수와 같이 무서운 빛을 머금고서 사공을 향해서 쏟아졌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기세에 오금이 저려 전신을 떨었을 터이다.
그런데, 나이도 별로 많아 보이지 않는 사공은 놀랍게도 그의 눈길을 그대로 받아낼 뿐 아니라, 조금도 흐트러진 기색 없이 태연하게 그를 쳐다보면서 웃는 것이 아닌가.
무림고수의 눈빛을 마주하고도 웃을 수 있다니, 결코 일개 사공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너는 누구냐?』
흑건복면인이 차갑게 소리쳤다.
『보다시피 사공이오』
『감히 나를 놀릴 작정이냐?』
흑건복면인의 눈빛이 싸늘히 가라앉았다. 상대가 녹록해 보였다면 그는 이미 손을 썼을 터였다. 하지만 이 허름한 옷을 입은 사공에게는 뭔가 만만치 않은 기운이 있었다.
『당신을 놀릴 생각이라면 이곳에서 당신을 기다리지도 않았다』
사공이 퓰? 웃었다.
그 말에 흑건복면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네가… 나를 따라온 자냐?』
말과 함께 강바람에 흩날린 듯 그의 흑포가 절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따라왔다면 좀 이상하지만, 그 도관에서부터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분명하지』
『누가 네놈을 사주했는지 알아보겠다!』
순간, 흑건복면인이 고함치면서 사공을 향해 일장을 쳐갔다.
조각배 위다.
넓어야 얼마나 넓겠는가.
손을 내밀면 상대에게 닿을 거리.
하지만 일장을 쳐가던 그는 눈빛이 돌변했다.
사공이 어깨를 슬쩍 비틀며 손을 쳐드는 것을 보는가 했는데, 그의 손이 이미 자신의 가슴을 가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후발선제(後發先制)!」
그는 내심 부르짖으며 변초(變招)를 하고자 했지만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펑!
가죽북 터지는 소리가 나며 그는 일장여나 허공으로 훌쩍 떠올랐다가 강변으로 날아갔다.
『크으윽…』
흑건복면인은 비틀거리며 신형을 추슬렀다.
그의 앞에는 사공이 오래전부터 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서서 침착한 태도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를 향해서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조금도 서두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기이한 기세를 이젠 느낄 수 있었다. 무겁게 상대를 압박하는 어떤 힘. 그가 다가올수록 그 힘은 점점 더 강해져서 흑건복면인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머, 멈춰라! 너, 너는 누구냐?』
흑건복면인이 주춤 물러나면서 소리쳤다.
그의 흑건은 그가 토해낸 피로 물들어 그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그는 단 일장에 이미 엄중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광명회에서 너의 신분이 무엇이냐?』
순간, 흑건복면인이 그를 향해서 손을 쳐들었다.
어둠을 뚫고서 뭔가가 사공을 향해 날아들었다. 돕첼?흑건복면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채 사오장을 나가지 못하고 우뚝, 굳어지고 말았다.
그의 앞에 사공이 땅에서 솟아나오듯이 불쑥 나타났던 것이다.
다급한 소리 외침이 흑건복면인의 입에서 터져나오는가 싶더니 그는 고함과 함께 전력을 기울여 사공을 덮쳐갔다.
팡!
폭음이 일며 흑건복면인이 퉁겨지듯이 뒤로 나가떨어졌다.
『이런!』
사공이 탄성을 토해냈다.
그는 다급히 쓰러진 흑건복면인에게 덮쳐가서 그의 복면을 벗겼다. 광대뼈가 나오고 강퍅한 인상을 한 50대의 중늙은이. 그의 입에서는 검은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무엇때문에 독을 삼킨 건가?』
『크윽… 아,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사공, 왕승고는 무거운 얼굴로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는 분명히 상대를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목숨을 끊어버린 것이다.
잠시 묵묵히 서 있던 그는 죽은 복면인의 품을 뒤졌다. 암기와 몇가지…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지난날 자의후가 자신에게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광명천하」라는 글자가 새겨진 동패.
역시 자의후가 쫓았던 신비세력은 광명회였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은 지금에 이르러 무슨 의미로서 작용하고 있는 것일까?
석상이라도 된 듯 잠시 그 자리에 서 있던 그는 문득 무슨 생각을 떠올린 듯 빠른 속도로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남은 것은 뜻밖의 주검 한구뿐.
찬 강바람이 스산히 일어 강물을 출렁였다.
겨울이었다.
* * *
전쟁의 바람은 매섭게 대륙을 휩쓸고 있었다.
제남은 전략상의 요충이라 다른 곳과는 달리 언제라도 전쟁?피바람에 휩쓸릴 수가 있어서 긴장감에 싸여 있음이 역력했다.
전쟁의 공방에는 적아가 없다. 칼에는 눈이 없는 까닭이다. 왕승고가 제남성으로 들어선 것은 개봉을 떠난 지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경인할 속도였지만 그의 능력으로 본다면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떠들썩하던 산동성의 도회(都會)인 제남의 분위기는 전과 별 다름이 없는 듯했다. 하지만 왔다갔다 하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전과 달리 바빠 보였다.
주의를 끌지 않기 위해서 그는 허름했던 옷차림을 평민들이 즐겨입는 청포(靑袍)로 바꾸었다. 그가 한 그 옷차림은 이미 포의신검협이란 이름으로 강호에 알려져 있어서 다른 사람의 주의를 끌는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거기에 피풍을 두르고 조백건(早白巾)을 눌러쓰니 떠돌이 장사꾼이 따로 없었다.
와아, 와아아…
아이들이 우르르 그의 앞에서 몰려갔다. 그런가 했더니 이번에는 앞쪽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요란했다. 길가에 만두와 국수 등을 파는 이동식 가게가 있었다. 주루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은 그런 곳에서 뜨거운 국물로 속을 푸는 법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거지 하나가 청년 두엇에게 몰매를 얻어맞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재수없게 아침부터 지랄이야?』
『이 늙은이 어제도 빌붙더니 아주 붙어서 살라구 들어? 죽여버리기 전에 꺼지지 못해?』
까치머리, 땟국물이 절어 이 겨울에 맨살이 드러난 그 거지는 그렇게 몰매를 맞으면서도 손에 쥔 것을 손으로 허겁지겁 주워먹고 있었다.
『야! 저기 있다아…』
꼬마들의 탄성이 일었다.
그리곤 청년들에 의해서 참혹히 구겨져 한쪽 구석에 처박힌 산발의 거지를 향해 그 꼬마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거지는 자라처럼 웅크린채 몸으로 그 돌을 견디면서 한손으로 머리를 가렸다. 금세 피가 터져나왔다. 그가 한손으로 머리를 가린 이유는 바람이 불면서 금방 드러났다. 헐렁한 소매, 찢겨진 그 소매가 바람에 흔들리는 것은 그의 팔이 하나 없기 때문이다.
『그럼 못쓴다. 그만 해』
왕승고가 나서서 아이들을 말렸다.
『왜 그래요?』
『저 거지는 도둑놈이란 말이에요! 우리집에서도 만두를 훔쳐갔어요』
아이들이 항의했다.
『힘없는 노인, 더구나 저렇게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을 괴롭히는 것은 올바른 사람이 할 일이 아니란다. 나중에 네가 늙고 힘없어 저런 모양이 되었을 때, 너희들처럼 어린애들이 돌을 던지면 좋겠니?』
왕승고가 잠시 시간을 두고 타이르자 아이들은 웅성거리며 흩어졌다.
『노인장…』
『어, 어버버!』
거지는 놀라 머리를 땅에다 처박으면서 고슴도치처럼 웅크렸다.
사람들의 눈길을 느낀 왕승고는 내심 한숨을 쉬고는 그의 손에다 문은(紋銀) 한조각을 놓아주고는 그 자리를 떠났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을 바랄 상태가 아닌 까닭이다.
가슴이 무거웠다.
그가 아이들을 말린 것은 그 자체로 목불인견이기도 했지만, 지난날 그의 사부인 한호국이 당했던 고초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그가 사람들의 틈으로 사라지자, 고슴도치처럼 웅크리고 있던 거지는 슬그머니 머리를 들었다. 산발이 된 까치집 머리카락 사이로 그의 눈빛이 문득 빛났다.
만금전장.
천하의 3대 전장(錢莊)중 하나로 알려진 곳.
제남의 상권은 지난 10년이래 이 만금전장에서 비롯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만금전장의 금력(金力)은 막강했다.
만금전장에 도착한 왕승고는 세심히 주변을 살핀 결과, 전과 별 다름이 없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상당한 무공을 지닌 고수들이 만금전장을 경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시 망설인 그는 부근에 자리를 잡고 밤을 기다리기로 했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탐문하는 따위의 서툰 생각은 처음부터 하지?않았다. 어차피 모든 것은 어머니를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것이기에.
제남에는 원래 두군데 가 볼 곳이 있었다.
하나는 금곡별서.
바로 금곡노야가 이따금 거처하는 곳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왕승고가 목적한 만금전장의 총호. 그의 어머니가 있는 곳이었다. 일단 어머니부터 만나 보는 것이 일의 순서라고 생각하고 만금전장의 총호로 온 것이다.
하지만 밤까지 기다리기로 작정하자, 한나절이란 시간이 남았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만금전장을 떠나 금곡별서를 향했다.
지난 일년간은 전혀 무익하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었다. 땅을 파내고 바위를 부수는 일을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해내야 했기에 내력이 원래 수준으로 회복됨은 물론이고, 깊고 두텁게 변해 대단한 지구력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지구력이라는 것은 먼 길을 갈 때, 싸움을 길게 할 때 드러나게 된다.
왕승고는 하루만에 천여리를 주파하여 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흐트러지지 않는 신법으로 교외를 가로질러 금곡별서를 향해 몸을 날렸다.
폐허(廢墟).
금곡별서가 그러했다.
늘 온화한 분위기에 싸여있던 금곡별서는 마치 다른 곳을 보는 듯하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일이 ?
왕승고는 주위를 둘러보면서 신음했다.
늘 그와 어머니를 맞아주던 후원의 참혹함은 더해 사방이 심한 지진에 부서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던 그의 신형이 갑자기 연기처럼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가 있던 자리 좌우에서 회색빛 그림자 둘이 나타났다.
『봤나?』
『……』
물음에 다른 회의인이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들은 서로를 마주보고 미간을 찡그리더니 이내 바람처럼 일대를 수색하기 시작했다.
하늘이 회색빛으로 어두워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하늘은 더욱 어두워졌고 이윽고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면서 세상은 회색빛으로 잠겨들었다. 조금씩 내리기 시작한 눈발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굵어져 석양이 깃들이기 시작할 때가 되면서 함박눈이 되었다.
왕승고는 소리도 없이 그 자리를 빠져나와 기다리다가 밤이 되자 만금전장으로 스며들었다.
그가 금곡별서를 그냥 떠나온 것은 그들이 무서워서라든가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과연 그들이 누구기에 그곳에서 감시를 하고 있었는지, 금곡별서가 왜 그처럼 폐허로 변했는지를 알고 난 다음에 다음일을 생각해야 할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감시를 하는 자들이라면 그 자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기에.
어둠이 깃들이기 시작할 즈음, 만금전장의 대전. 구대부인은 한 사람을 대전에서 만나고 있었다. 그의 앞에서 머리를 숙인 화복의 대한. 태도는 깍듯하지만 밝혀진 촛불에 드러난 그의 눈빛은 당당해 보였다.
『수총관(帥總管)이 알아서 하면 될 일을 내게 굳이 보고하는 이유가 뭐요?』
구대부인이 입을 떼었다.
『만금전장의 주인은 대부인이십니다. 직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한정이 있는 법이니, 이런 일은 재가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대부인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재가를 했으니, 알아서 하시오』
『알겠습니다. 그럼 말씀하신 대로 처리하지요…』
화복 중년인의 대답에 구대부인은 자리를 떴다. 그녀를 보는 그의 눈빛은 싸늘히 웃고 있었다.
대전을 나온 구대부인은 길게 이어진 낭하(廊下)를 따라 후전으로 향했다.
전장(錢莊)은 넓었다.
그 후전에 도달한 그녀는 낭하의 난간을 잡고 잠시 하늘을 덮으며 떨어지고 있는 눈발을 바라보았다. 차갑게 굳은 그녀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입술을 즈려무는 순간에 뚝! 하는 소리가 들리며 그녀가 쥔 난간 한쪽이 바스러졌다.
후전 한쪽에는 정사(精舍) 하나가 마련되어 있었다. 눈을 맞으며 효坪?가로질러 정사에 이른 그녀는 눈으로 하얗게 덮인 정사를 바라보고 있다가 안으로 들어가면서 말했다.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해라』
『예, 대부인!』
시녀들이 허리를 굽혔다.
그녀를 따르는 시녀 넷은 모두 만만치 않은 무공을 익혔다.
『들었죠? 후원을 봉쇄해요』
시녀 유향이 눈을 빛내면서 소리쳤다.
『알았소』
조금 떨어진 곳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구대부인의 곁을 떠나지 않는 그녀의 수신호위인 중앙위(中央衛)였다. 원래 대도 정규가 이끌고 있던 중앙위는 그가 왕승고와 함께 떠났다가 돌아오지 않게 되자 새로 인선이 된 상태.
흰옷을 입은 무사들이 후원의 구석구석으로 흩어지는 것을 본 유향이 눈짓을 하고는 정사의 문을 가로막고 섰다.
정사의 내부는 정갈했다.
그리고 그 배치는 다른 곳과 달랐다. 처음 건축 자체가 달랐다. 중국식이 아니라, 고려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정사의 대청에는 불당이 마련되어 있었다.
향연(香煙) 가운데 관세음보살이 그윽한 미소로 거기 자리했다. 그 앞에 오체투지한 그녀는 낮은 소리로 기원을 하기 시작하였다. 하루도 빠짐이 없는 기원이었다.
그렇게 오체투지하여 절을 하던 그녀는 문득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는 전신이 굳어졌다.
하지만 고개를 들던 그녀의 전신은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렇게 떨렸다.
한 사람이 그녀의 옆쪽에 앉아 있었다.
두 무릎을 단정히 꿇고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의 눈빛은 맑고 조용했지만 감회로 일렁이고 있었다.
『늦었습니다』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왕승고였다.
『너, 너…』
너무도 뜻밖의 상황.
구대부인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라고 입이 열리지를 않는 것이다.
그처럼 살아있기를, 제발 숨이라도 붙어 있기를 염원했?하나뿐인 아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아들이 아무 일도 없었던 양,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 수가 없었다.
『진작 돌아왔어야 했는데, 사정이 여의치를 못했습니다. 심려를 끼쳐드려서 죄송합니다』
왕승고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저, 정말 너란 말이냐? 정말 네가 살아 돌아왔다는 말이냐?』
구대부인이 아랫입술을 덜덜 떨면서 믿어지지 않는 듯 물었다.
『예, 접니다. 어머님』
어머니!
세상에 그녀를 그렇게 부를 사람은 한사람뿐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정말 바라고 또 바랐던 그 소원이 이루어져 그녀의 눈앞에 있었다.
『어, 어디 보자! 저, 정말…』
그녀는 무릎걸음으로 다가가 왕승고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떨리는 손에 느껴지는 감촉은 분명히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수척해진 듯하지만 분명히 아들의 얼굴이다.
『저, 정말 너란 말이냐? 네가 돌아온 거란 말이냐? 대체 그간 어디에 있다가 이제야… 노야의 말씀을 믿지 않았더니 정말 네가 이렇게 살아…』
왕승고를 더듬던 그녀의 눈앞이 부옇게 흐려왔다.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를 않았다. 거리낌만 아니라면 아들을 얼싸안고 꺼이꺼이 울음이라도 터뜨렸을 것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
그녀는 왕승고를 부둥켜안고서 입술을 물었다. 뜨거운 눈물이 참지 못하고 그녀의 창백한 뺨을 타고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격동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두 모자는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 까닭이다.
하지만 구대부인은 그래도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 듯 왕승고의 손을 놓지 못했다. 만져보고 또 쓰다듬어 보고 하는 것이 혹시라도 손에서 놓으면 눈 앞에서 사라져 버리기라도 하는게 아닌가, 걱정스러운 듯한 모습이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느냐? 같이 갔던 사람들은 다 어떻게 되고…』
구대부인의 당연한 질문이었다.
『그건…』
입을 열려던 왕승고는 생각을 바꿨다.
『그 전에 제가 먼저 몇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뭘 말이냐?』
『어머님이 광명회의 동방영주라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까?』
그녀의 전신에 가는 떨림이 이는 것을 왕승고는 느꼈다.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느냐?』
『광명회주에게서 들었습니다』
왕승고의 대답에 구대부인의 눈에서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의 빛이 튀어 올랐다.
『그… 그를 만났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어디서? 언제?』
『그를 만난 것은…』
왕승고의 지난 일을 간추려 들은 그녀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런 일이…』
신음하던 그녀는 왕승고의 다음 물음에 전신이 굳어졌다.
『금곡노야는 지금 어디 있습니까?』
왕승고의 얼굴이 굳어 있음을 그녀는 볼 수 있었다.
『그의 이 행동을 소자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그가 지금 만금전장에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 분명히 그 이유를 들어봐야겠습니다. 대체 광명회는 무엇이고, 광명교는 또 무엇인지…』
왕승고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어머니 구대부인의 대답 때문이었다.
『지금… 그 분의 행방은 누구도 모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구대부인은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설마, 그 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오다가 금곡별서에 들렀더니 폐허가 되어 있던데… 그렇습니까?』
『말을 하자면 길다』
구대부인은 길게 탄식하고는 지난 일을 간추렸다.
『그럼 반역이 일어났다는 겁니까? 그래서 만금전장도 광명회의 산하로 들어가게 되었다는, 그런 말씀이십니까?』
『대충 그런 듯하다』
『……』
왕승고는 신음한다.
상황이 이런 식으로 되어 있을 줄은 몰랐던 것이다.
『노야는? 그 분의 행방은 그 뒤로 전혀 모르십니까?』
『그렇다. 사람을 풀어서 알아봤지만…』
그녀는 입술을 즈려 물었다.
『그가 누굽니까? 지금 광명회의 주인인 회주.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머님은 아십니까?』
『아니, 가까운 관계라는 것만 안다. 언젠가 한번 지나가는 말로 노야가 하신 적이 있다. 자신의 후계자로 수업을 시키고 있노라고. 더 이상은 알지 못한다』
뜻밖의 일이다. 모든 것이 금곡노야가 시킨 일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아니라는 것인가. 하긴 쿠빌라이의 능에서 본 그 회주. 그의 성품이라면 충분히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사람일 듯했다.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습니까?』
『무슨 소리냐?』
구대부인이 놀라 물었다.
『그를 만나보겠습니다. 그…!』
말을 하던 왕승고의 안색이 돌연 굳어졌다.
『대부인…!』
낮은 음성,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밖에서 다급히 터져나오려던 그 음성은 무엇에 억눌린 듯 잦아들었고 침묵이 불당 안으로 엄습해 들어왔다.
『누가 왔느냐?』
구대부인이 긴장된 빛으로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 누구 없느냐?』
구대부인이 다시 소리쳤다.
『여기 있소』
대답은 뜻밖에 바깥이 아니라 안쪽에서 들려왔다.
이 정사는 두채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면의 불당과 거기에 이어진 쉴 수 있는 방. 그런데 대답이 그 방으로 통하는 곳에서 들려온 것이다.
청수한 얼굴의 백의인, 중년으로 보이는 그 백의인은 천천히 그 문으로부터 걸어나오고 있었다.
『사명존자(司命尊者)…?』
그녀가 부지간에 나직이 중얼거렸다.
『아드님이 돌아온 것을 경하드리오. 영주』
사명사자라 불린 백의인이 싸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가, 감사합니다』
구대부인이 주춤거렸다.
『회주께서 아드님을 보기 원하시오』
『그, 그건…』
『회주께서 기다리고 계시오. 갑시다』
중년인이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자, 잠시만… 잠시만 말미를 주시면 어떨지, 이 아이는 방금 돌아와서…』
『회포는 나중에 풀 수 있을 것이오』
사명사자의 말은 단호했다.
『회주는 어디 있소?』
왕승고가 물었다.
사명사자가 왕승고를 바라보았다.
『가면 알게 될 것이오』
『……』
왕승고는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온 것을 어떻게 알았소?』
사명사자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광명회의 신안(神眼)은 천하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소. 누구라도 찾고자 들면 찾지 못할 사람이 없으니, 왕소주도 예외일 수는 없는 일이오』
『내가 가자면 순순히 따라갈 것으로 생각하오?』
왕승고는 조용히 앉은 채로 물었다.
그의 말은 뜻밖인 듯 사명사자는 흠칫, 왕승고를 바라보다가 희미하게 웃었다.
『설마 거역하겠다는 말은…?』
『글쎄, 거역이란 말은 듣기가 좀 이상한 것 같군. 가서 전하시오. 내가 필요할 때 만나겠다고』
『얘야! 그건…』
구대부인이 놀라 그를 불렀다.
『아니면 그가 어디 있는지 내게 알려주시오. 내 스스로 그를 찾아가 만날 테니까』
『그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건가?』
사명존자의 안색이 싸늘히 굳어졌다.
『왜 가능치 않은 일인지 모르겠군. 나나 이분은 당신이 이래라 저래라 할 신분이 아니다. 더 이상 무례를 범한다면 낭패를 당할지도 모르니 여기서 물러가도록 하라』
왕승고가 싸늘히 말했다.
『감히…』
사명존자가 발을 굴렀다.
그것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이 돌연 불당의 문짝이 산산조각으로 터져나가면서 바깥에서 검은 그림자가 쇄도해 들어왔다.
그 인영은 문밖에서부터 왕승고가 어디 있음을 알기라도 한 듯이 그렇게 무서운 기세로 왕승고를 향해 날아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문이 열릴 것으로 생각을 한다. 더더구나 그의 앞에는 사명존자가 있으니 신경이 그쪽으로 가 있을 것은 자명한 일.
하지만 왕승고는 조금도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한쪽 무릎을 세운채 몸을 조금 비트는가 싶더니 일어서지도 않고서 한손을 들었다.
단지 그 한 동작에서 장대하기 이를 데 없는 기세가 일어났다.
쾅!
좌우의 문짝을 부수며 날아든 인영은 모두 두 명. 그들은 왕승고의 장세와 맞부딪히자 마치 철벽에 부딪힌 듯한 충격을 받고 답답한 신음을 흘리며 힘없이 바깥으로 퉁겨져 나갔다.
『윽?』
사명사자의 눈에 경악과 불신이 튀어 일어났다.
그는 왕승고가 그들과 맞닥뜨리는 순간에 그를 덮치려 했었다. 그런데 앞으로 한걸음을 내딛는 순간에 서릿발 같은 검기를 흘리는 검날이 그의 목젖에 닿아 있음을 경각한 것이다.
만에 하나 그가 앞으로 나서는 기세를 찰나적으로 멈추지 않았다면 그의 목은 그대로 그 검에 꿰뚫리고 말았을 터였다.
식은땀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등골이 서늘하다는 말은 바로 지금을 일러 그렇게 사용되는 듯 했다.
『이 자리에서 당신을 죽이고 싶진 않다』
왕승고가 그의 눈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입을 열었다.
검끝이 살짝 목젖을 파고들었다.
주춤, 사명사자는 목을 조금 치켜든 채로 몸을 조금 뒤로 물려야 했다. 그렇지만 더 이상의 몸짓은 할 수 없었다.
기세(氣勢)!
형용하기 힘든, 어떤 아지랑이와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전신을 강철 그물처럼 조이는 그런 기세가 왕승고에게서 느껴지고 있는 까닭이다.
『회주는 어디 있나?』
왕승고가 물었다.
간단한 물음이다.
하지만 그 한마디 한마디는 마치 망치로 심금을 두들겨패는 것만 같았다.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믿기 힘든 심적 공제(控制)! 마치 막 선잠에 들다가 무엇에 놀라 허공에서 뚝 떨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
청수했던 중년인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런다고… 내게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 것 같으냐? 감히 명을 거역한다면… 만금전장은 멸문지화의…』
그의 신음과도 같은 말소리는 왕승고의 냉랭한 웃음소리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런가? 만금전장을 무너뜨린다면 당장 재정에 문제가 생길텐데… 그 책임을 네가 지겠나?』
송곳을 갈아놓은 듯 날카로운 어조.
감히 그런 말에 마음대로 대답을 할 수는 없다.
하지만…
『어떤 일이라 할지라도, 회주님의 명을 거역한다면 존재가치가 없다. 만금전장보다 더 한 것이라 할지라도 마찬가지』
뜻밖에도 대답은 밖에서 들려왔다.
『으악!』
왕승고의 검에 공제되어 있던 사명사자가 비명과 함께 누가 패대기를 친 듯이 사납게 벽으로 날아가 처박혔다.
본신의 진기를 뿜어내어 그를 날려보낸 왕승고는 검을 거두고는 천천히 일어섰다.
『스, 승고야!』
문을 나서려는 그를 구대부인이 잡았다.
『회에서 온 사자에게 반항하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를 보는 왕승고의 얼굴은 언제나처럼 그렇게 거대한 바위와 같았다. 아니 웅장한 산악을 보는 듯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눈은 훈훈한 온기를 담았다.
『어머님, 저는 제가 누군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민족의 한과 왕실의 숙원, 그리고 어머님의 염원까지… 어느 것 하나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작은 것 하나에서 비굴해지면 큰 뜻은 결코 세울 수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노야는 우리의 친구일 수는 있었어도 상전이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광명회주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강하거나 큰 소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의 말은 참으로 강렬하게 구대부인의 가슴을 쳤다.
그녀는 조용히 자신의 손을 두드리고는 등을 돌린 아들의 그 넓은 등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범상한 아들은 분명히 아니었다.
하지만 이 아들은 참으로 기이하였다.
한번 나갔다 돌아오기만 하면 점점 커져서 이젠 그녀로서도 측량키 어려운 그릇이 되어 있었다.
아들이되, 아들이라고 부르기 힘든 거대함.
구대부인은 말을 잊고서 방을 나서는 아들의 너른 등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불당을 나선 왕승고는 눈을 들어 앞을 보았다.
정사의 좌우로는 유향을 비롯한 시비들이 이리저리 쓰러져 있었다. 피가 보이지 않고 가는 숨결이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죽은 것은 아니고 제압을 당한 모양이었다.
담요처럼 눈[雪]을 덮고 있는 뜰에는 한 사람이 우뚝 서서 그를 보고 있었다. 백의에 흰털옷을 걸쳐 눈과 일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보이는 그는 왕승고가 나섬을 보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오. 공자』
눈에 익은 사람이었다.
지난날 대한지릉에서 노야가 보낸 사람이라고 광명회주와 함께 나타났던 중년인. 이름이 종유라고 했던가.
『설마했더니 정말 그 지옥에서 살아나왔군요… 생환을 축하하오!』
『당신이었군…』
『회주께서 공자를 만나고자 하시오』
『광명회에서 당신의 신분은 무엇이오?』
『사명존자(司命尊者). 회주님의 유시를 전달하는 책임을 맡고 있소』
『이름으로 보아 사명사자를 관장하는 신분인 듯하니 당신은 알고 있겠군. 회주가 지금 어디 있는지…』
『공자가 나를 따라가기만 하면 자연히 회주님을 만나뵐 수 있을 것이오』
『그를 만나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라, 내 뜻에 따른다. 내가 만나고 싶을 때, 그를 만날테니 어디로 가면 그를 만날 수 있는지만 알려주면 된다』
갑자기 왕승고가 어조를 바꾸어 말했다.
사명존자의 눈빛이 조금 흔들렸다.
왕승고에게서 문득 위엄이 느껴졌던 것이다. 회주를 제외하고는 누구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아직 이해하지 못하는군! 회주께서 말씀하신 이상, 그 뜻을 어길 수는 없는 일. 공자가 쓸데없는 고집을 피운다면 이 자리에서 만금전장이 잿더미로 화하고, 자당이 피를 뿌리고 쓰러지는 참상을 보게 될는지도 모르오』
그 느낌을 털어버리려는 듯 사명존자가 싸늘히 소리쳤다.
왕승고가 차갑게 웃었다.
『그러자면 막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텐데, 과연 자신이 있나?』
『물론』
『같이 온 자들을 믿고 하는 말인가?』
그 말에 대한 대답인 듯 사명존자의 좌우로 백의무사들이 소리도 없이 모습을 드러냈다.
한 둘이 아니었다.
마치 흰구름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날렵한 무복에 제각기 검을 가진 그들의 수효는 언뜻 보아도 삼사십명은 족했다.
그들의 기세를 본 왕승고의 미간이 굳어졌다.
『설마했더니… 여기서 나를 기다린 것인가?』
『오래 되었소. 공자가 몽고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부터였으니까』
사명존자가 침착하게 말을 받았다.
『몽고?』
왕승고가 그 말을 되뇌었다.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을 그들이 바로 알아냈다는 뜻이며, 자신을 잡기 위해서 이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면 그만한 준비를 했을 것이 분명한 까닭이다.
홀가적이 죽기 전, 체내에 남은 마성으로 그의 출현을 광명회에 알렸을 것임을 왕승고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러한 일은 상식적으로는 믿기 힘든 불가사의에 속하기 때문이다.
『공자가 조용히 따라나선다면, 아무 일이 없을 거요. 하지만 반항한다면 만금전장은 정말 잿더미가 될 수도 있소』
『이들로서 가능할 걸로 생각하나?』
『그들은 총단의 유성검대(流星劒隊)다』
왕승고의 뒤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구대부인이 굳은 얼굴로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이 아이가 회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짓을 한단 말이오? 이 아이는 사지에서 이제 겨우 살아 돌아온 참인데…』
『영주가 나설 자리가 아니오』
『내가 나설 자리가 아니라니?』
구대부인이 눈을 매섭게 부릅떴다.
『회주께서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반드시 아드님을 잡아오도록 명하셨소. 만약, 반항한다면 영주는 만금전장을 다시 보지 못할 수도 있소』
협박이다.
하지만 그들에게 그러한 힘이 있음을 구대부인은 알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할지라도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다.
『잠시 시간을… 내가 설득해보겠소』
『그럴 필요는 없소!』
사명존자가 그녀를 바라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그 눈은 음산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럴 필요가 없다니… 없…!』
괴이함을 느껴 막 입을 열던 구대부인은 문득 땅바닥이 흔들거림을 느끼고 부지중에 옆에 있는 기둥을 짚었다. 정신이 아득하게 가라앉는 것 같았다.
『무, 무슨… 무슨 짓을 한…』
그녀는 기둥을 짚고서도 모자란 듯 몸을 흔들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모습.
『어머님!』
왕승고가 놀라 그녀를 부축했다.
『무슨 짓을 한건가?』
구대부인을 부축한 왕승고가 미간을 찡그린채 사명존자를 바라보았다.
그도 머리가 띵한 것을 느끼고 있었다. 뭔가 수작을 부린 것이 분명했다.
『독이로군…』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왕승고가 중얼거렸다.
『생각을 잘못한다면 다시는 어머니의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오. 공자!』
사명존자가 차갑게 말했다. 그의 말은 정중했지만 그 어조는 얼음과 같았다.
왕승고는 구대부인을 부축한 채로 우뚝 서 자신을 둘러싼 유성검대 서른여덟 명을 둘러보았다.
『이들로서도 부족하여 독이라… 내가 그렇게 중(重)한가?』
『내가 받은 명령은 공자를 모셔오라는 것. 최선을 다할 뿐이오』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더라도?』
왕승고의 얼굴이 싸늘히 굳어졌다.
『그것이 광명(光明)의 뜻인가? 그러고도 밝고 떳떳하다는 광명이란 이름을 쓸 수가 있다는 것인가?』
준엄한 꾸짖음. 사명존자의 얼굴이 일순 무색해졌다. 그런 그를 향해서 왕승고는 손을 내밀었다.
『해약을 가져오라!』
사명존자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이 마당에 그런 요구가 통할 걸로 생각하시오?』
왕승고의 안색이 얼음처럼 차갑게 굳어졌다.
『가져오지 않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피를 뿌리고 쓰러지게 될 것이다』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강력한 힘이 깃들여 있었다. 마치 폭풍이 일 듯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를 따라 그의 주변에서 흙먼지가 일었고, 일장 반 정도의 거리를 둔 사명존자의 주위에서도 진동과 함께 흙먼지가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사명존자는 가공할 살기가 자신을 덮어옴을 느낄 수 있었다.
숨조차 쉬기 힘든 압도적인 기운!
「회주께서 그토록 신중하셨던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사명존자는 암중으로 숨을 들이켜야 했다.
그때였다.
『네 어미가 입은 독은 천뢰지독(天牢之毒)! 본왕이… 근년에 들어 새로 만들어낸 절세기독이다. 너 또한 천뢰지독 입었으니 함부로 진기 운용하면 반식경내에 한줌 핏물… 화한다』
어딘지 어색하고 딱딱한 어조의 말소리가 왕승고의 좌측에서 들려왔다.
검은 옷을 입은 오척단구의 대머리 노인 하나가 어둠 가운데 푸른 빛을 흘려내는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면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걸음, 한걸음 천천히 걷고 있는 듯한 그의 걸음걸이는 실제로는 비할 바 없이 빨라 십여장의 거리를 불과 서너 걸음만에 지척으로 좁혀놓았다.
마치 미끄러지는 듯한 걸음걸이였다.
그를 본 왕승고의 안색이 조금 달라졌다.
그가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자 그와 자신과의 사이 땅에 쌓여 있던 눈이 마치 불길에 닿은 듯 스르르 녹으면서 자신을 향해서 무섭게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음을 보았던 것이다.
그가 미간을 찡그리는 순간.
팍!
그의 앞 일척 되는 곳에서 격한 폭음이 일며 사방으로 눈송이가 흩어지며 시야를 가렸다.
『제법이군… 본왕 천독기공, 그 자리에서 받아… 내다니…』
대머리노인이 음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독왕 우잠! 본회의 공봉중 한분이시니… 그 명성이야 공자도 알고 있을 터. 공자를 위해서 특별히 이곳에 오셨소』
사명존자가 희미하게 웃으며 그를 소개했다.
왕승고의 안색이 돌변하였다.
독왕 우잠! 너무도 귀에 익숙한 이름이었다.
정말 너무나도 익숙하게 듣던 그 이름의 주인공이 마침내 그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츠츠츠…
방금 한번의 부딪힘에 흩어진 눈들이 주위로 흩어져 검게 변하는가 싶더니 기이한 열기를 동반한 채 녹아들었다. 고약한 냄새가 확 풍겨왔다. 눈속에 묻혀있던 풀들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지난날 내가 독인이었을 때를 보는 것 같군」
왕승고는 내심 놀라 속으로 운기하면서 독왕 우잠을 바라보았다.
『놀랍군… 하지만 억지로 버티는 것, 오히려 죽음 재촉하는 일, 그렇다!』
독왕 우잠이 음침한 음성으로 다시 말했다. 그의 말투는 여전히 어색하고 딱딱했다. 묘강에서 살던 사람이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그 어둔한 말속에 세상을 공포로 떨게 할 힘이 깃들여 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의 주변에 아지랑이와 같은 검은 기운이 어려 있음을 본 왕승고는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사명존자를 바라보았다.
『어머님을 먼저 해독하시오』
그 말에 사명존자의 얼굴에 냉소가 떠올랐다.
『지금 공자가 그런 요구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시험해보고 싶소?』
왕승고가 침착하게 물었다.
「음…」
왕승고와 눈을 마주한 사명존자는 그의 고요하지만 차가운 눈빛을 대하자 허실을 측량할 수가 없었다.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독왕의 독에 이미 당한 상태. 그의 말에 기죽을 일은 전혀 없었다.
『고집을 부린다면, 영당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소, 공자…!』
그러나 막 입을 열던 그는 놀라 다급히 옆으로 몸을 날려야 했다. 왕승고가 느닷없이 그에게 일검을 쳐왔던 것이다.
그 일검은 창졸지간일 뿐만 아니라, 그 기세 또한 비할 바 없이 빠르고 무서워서 마치 번갯불이 어둠을 뚫고서 날아드는 것만 같아, 번쩍 하는 순간에 이미 그의 미간에 도달해 있었다.
혼비백산하여 눈바닥에서 몸을 뒹군 그는 선뜻한 느낌과 함게 눈앞에서 피를 뿌리며 퉁겨져 나가고 있는 팔 하나를 보았다.
그것이 자신의 팔임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그리 오래 필요하지 않았다.
『크으윽!』
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몸을 일으키지도 못하고서 피가 뿜어져 나오는 어깨를 움켜쥔 채로 전신을 떨었다.
『더 필요한가?』
차가운 음성이 앞에서 들려왔다.
왕승고가 그의 앞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검을 비스듬히 땅을 향해 늘어뜨리고 있는데 그 검끝에서는 붉은 피가 방울방울 눈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너무 갑작스러운 일에 독왕 우잠조차도 일시지간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더 시험해보겠다면, 여기 있는 사람 모두를 죽일 수도 있다. 확인하겠나?』
『주, 중독되지 않았단 말이오?』
사명존자는 이를 악물고서 외쳐 물었다. 그 음성에는 불신이 가득차 있었다.
『해약은?』
왕승고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
일시지간, 가슴이 터질듯한 침묵이 장내를 내리눌렀다.
『고, 공봉… 해약을 주시오』
마침내 사명존자가 입을 열었다.
왕승고가 해약을 받아 구대부인에게 복용시키는 것을 본 독왕 우잠은 미간을 찡그렸다.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중독되지 않았다는 건가…』
그가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는 일이 그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가 어찌 왕승고의 그 고난을 짐작이라도 할 수 있을까.
그때, 해약을 먹은 구대부인이 검은 가래침을 뱉어내면서 전신을 떨었다.
『사흘 정도 요양을 하면 회복될 것이다』
독왕 우잠이 말을 하는 순간, 왕승고가 수중의 검을 떨어뜨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얘야!』
그가 무릎을 꿇는 순간, 겨우 숨을 돌리고 있던 구대부인이 놀라 그를 부축했다.
『괜찮습니다』
왕승고가 창백한 얼굴에 미소를 띠었다. 그가 무릎을 꿇는 걸 보자 독왕 우잠의 눈에 미미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
『공자를 모셔라』
어깨를 움켜쥔 채로 소리치던 사명존자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왕승고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물럿거라. 내 스스로 가겠다』
유성검대가 다가와 자신을 제압하려 하자 왕승고는 눈을 부릅뜨면서 꾸짖었다. 창백한 안색이었지만 거기에는 무형의 위엄이 있어 좌우에서 손을 내밀었던 유성검대원 두 명은 주춤, 사명존자를 보았다.
『괜찮으니 그대로 시행해라』
사명존자가 미간을 찡그리며 소리쳤다. 유성검대가 왕승고의 혈도를 짚고 그를 자신에게서 떼어내자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던 구대부인이 사명존자를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존자! 이렇듯 무력으로 일을 처리하려 한다면 나도 그냥 있지 않겠소!』
사명존자의 얼굴이 음침히 굳어졌다.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거요?』
『내 아들을 위해서라면』
그녀의 말에 사명존자의 얼굴에 어이없다는 빛이 흘렀다.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시오? 영주는 이미 독을 입어 항거할 능력이 없소. 설마… 회주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은 고하를 막론하고 회멸(灰滅)의 중벌을 받는 걸 잊어버렸단 말이오?』
『하지만 이 아이는…』
『자중하시오. 영주! 회주님은 공자를 모셔오도록 했을 뿐이오. 현재로서는 만나고자 하실 뿐이지, 죄를 주기 위해서가 아니란 말씀이오』
『그렇다면, 그렇다면… 해독이라도 해주시오』
구대부인이 왕승고의 앞을 가로막고 선 채로 소리쳤다. 어머니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해독?』
『그렇소. 이제 회주를 뵈러 가기로 했으니 해독을 시켜야 할 것이 아니오?』
『데려가라』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는 듯 사명존자는 몸을 돌렸다.
유성검대가 달려들어서 구대부인을 왕승고에게서 떼어놓았다. 반항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중독에서 회복되지 않아 그들과 사생결단을 내고자 해도 그럴 힘이 없는 것이다. 유성검대의 대원들은 신속하게 왕승고의 혈도를 짚고, 그도 모자라 준비한 금빛 밧줄을 꺼내 그의 손목을 묶었다. 이미 만반의 준비를 하고 그들은 왕승고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승고야!』
그들에게 밀려 쓰러진 구대부인이 눈바닥을 짚고서 피를 토하듯이 소리쳤다. 그녀로서는 정말 피를 토하고 죽고만 싶었다. 사지에서 겨우 살아돌아온 아들이 이런 꼴을 당하다니, 그것도 자신을 찾아왔다가 이런….
『어머님, 걱정마십시오. 다시 오겠습니다』
유성검대에게 끌려가면서 왕승고는 구대부인을 위로했다.
『승고…』
구대부인이 뭐라고 말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으악!』
참혹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검은 그림자가 마치 유령과 같이 장내로 날아듦과 동시에 왕승고를 끌고 가려던 유성검대원 둘이 단숨에 피떡이 되어 오장여 밖으로 날아갔다.
뿐만 아니라, 그의 옆으로 몰려 있던 유성검대원들 대여섯명이 채 손도 써보지 못하고 피를 뿌리며 나가떨어졌다.
『으아악…』
그들의 입에서 합창하듯이 비명이 터져나왔다.
『무, 무슨 일이냐?』
몸을 돌려 앞서나가던 사명존자가 놀라 고개를 돌렸다.
『으악!』
『으아악!』
그 순간에도 검도가 어지러히 흩어지면서 유성검대원들이 마치 지푸라기처럼 사방으로 퉁겨져 나갔다. 마치 폭풍이 장내에 휘몰아친 것만 같았다.
『가자!』
나타난 검은 그림자가 손을 내밀어 왕승고의 손을 잡으며 다급히 소리쳤다. 그의 출현은 너무도 갑작스러워 그가 누군지조차 제대로 알아볼 수 없었다. 갑작스러울 뿐만 아니라 그 신법의 놀라움은 가히 경세(驚世)적이라 누구도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으악!』
그에게 검을 휘두르며 달려오던 유성검대원 하나가 그의 발길질에 머리가 두부처럼 부서져 흩어졌다. 피보라가 설원(雪原)을 붉게 물들였다.
『누구요?』
자신의 손목을 잡는 그를 바라보던 왕승고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비로소 상대를 보니 봉두난발에 상거지 꼴인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제남에 들어서면서 보았던 그 길가의 거지노인이라는 점이었다.
『이야기는 나중에, 우선 이곳을…』
거지는 봉두난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번쩍이는 눈빛에 다급한 빛을 드러내면서 소리쳤다.
『으악!』
그가 손을 쳐들자 웅장한 경기가 일어나면서 유성검대원 세명이 한꺼번에 뭉개져서 나가떨어졌다.
가공할 위세였다.
동시에 그는 왕승고를 잡아채서 장내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은 가히 질풍(疾風)!
『저, 저…』
구대부인은 채 말을 하지 못하고 발만 굴렀다.
이 돌변한 상황을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타난 사람이 적인지 벗인지조차 알 수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막아라!』
사명존자가 대경실색해서 고함치면서 몸을 날렸다.
『흥!』
냉소가 장중을 울렸다.
한갓 웃음소리의 위력은 실로 작지 않아서 나뭇가지 위에 쌓였던 눈송이들이 일제히 우수수 무너져내린 것뿐만 아니라 지붕 위에 쌓였던 눈마저 폭풍에 휘말린 듯 이리저리 흩어졌다.
독왕 우잠이 어느새 그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비켜라!』
거지노인이 냉엄히 소리쳤다.
그는 손이 하나뿐이라, 왕승고를 잡았던 손을 놓음과 동시에 앞을 가로막은 독왕 우잠을 향해서 일장을 쳐갔다.
그 움직임은 실로 바람과 같아서 손을 놓았음에도 왕승고는 그대로 그를 따라가는 것 같았고 손을 쳐듦과 함께 그 일장의 위세는 이미 독왕의 전신을 덮었다.
그 장세를 본 독왕의 안색이 돌변했다.
「이럴 수가! 단 일장에 전신 36개 대혈이 모두 노출되다니…」
사람의 몸에는 기경팔맥이 있고 십이정경이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잇는 36개 대혈이 있다. 그것들은 전신에 퍼져 있어서 앞에도 있고 등을 비롯한 뒤쪽에도 있어 한사람이 다른 사람의 전신 36개 대혈을 한꺼번에 노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거지노인의 일장은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그의 일장에 노출된 것은 전면의 12개 대혈이었다.
그러나 그 공세를 피하고자 한다면 다른 대혈이 자연히 그 공세의 사정권에 들어가게 되어 결국 어디로 몸을 피한다 할지라도 그 공격을 피하지 못하고 다른 대혈이 공격을 받게 될 것임을 독왕 우잠은 알아보았던 것이다.
당연히 그의 무공이 낮다면 알아보지도 못하고 피를 토하고 거꾸러질 일이었다.
그의 일장을 보자, 독왕 우잠은 유성검대가 마치 허수아비처럼 그의 일장에 무너진 이유를 대번에 알 수가 있었다.
『카악! 물러가랏!』
독왕 우잠은 기성을 토하면서 양손을 쳐들어 독보(獨步)의 천독기공을 전력을 다해 쳐냈다.
피할 수가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펑!
거지노인은 그의 독공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장세를 쳐내 일장의 격돌이 일어났다.
고막을 치는 굉음이 일며 회오리바람이 일며 사방으로 눈송이들이 미친 듯이 휘말려 오르는 가운데 답답한 신음이 터져나왔다.
가공할 대결.
고수의 격돌은 그 자체로 이미 하수들과는 차이가 있다. 독왕 우잠은 상대와 일장을 맞닥뜨리는 순간 세상에 나온 이래, 한번도 보지 못한 강적을 만난 것을 직감했다.
마치 철벽에다 전신을 세차게 들이박은 듯한 느낌.
『크으…』
억제하려 해도 할 수 없도록 절로 신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그는 쿵쿵거리면서 연달아 뒤로 물러나야 했다.
쿵, 쿵… 땅을 딛는 발자국마다 눈보라가 폭죽처럼 피어올랐다. 어깨가 춤을 추듯이 흔들렸다. 단 한번의 격돌로서 그는 세 걸음이나 물러나야 했다. 그러한 그를 노려보는 거지노인의 흩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뜩이는 눈빛이 무섭게 빛났다.
『독왕… 네 목을 거두겠다!』
살기가 가득한 음성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 말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그는 손을 쳐들었고, 그 손짓에 따라 유성검대원 하나가 떨어뜨린 장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아니, 빨려드는가 싶더니 그것은 그대로 그의 손짓에 따라서 가공할 위세로서 독왕을 향해서 날아갔다.
쏴아앙!
귀청을 찢는 굉음이 거기에서 터져나왔다.
이 놀라운 광경에 독왕 우잠은 일장 격돌을 했을 때보다 더욱 놀라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가 상대와 부딪힌 충격으로 주춤거리면서 물러나다가 겨우 신형을 바로잡고 있을 때, 상대는 이미 검을 날려보내고 있었던 까닭이다.
『어, 어검술(馭劒術)!』
다급히 부르짖은 그는 옆으로 몸을 날려 검세를 피하면서 잇달아 줄에 꿴 듯이 삼장을 쳐내어 그 검세를 저지하려 했다.
어검술이란 일반 비도(飛刀)나 탈수검(脫手劒)과는 달리 검이 손을 떠난 다음에도 주인의 뜻에 따라 검이 그 조종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 날아든 비도를 피하는 것처럼 단순히 몸을 피한다고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라 독왕 우잠은 신형을 날림과 동시에 그 검세를 저지하기 위해서 삼장을 쳐낸 것이다.
『가자!』
하지만 그 순간에 검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그의 저지에 밀려 날아가버렸고 거지노인은 왕승고의 손목을 잡고 다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원래 그가 일격을 쳐낸 것은 시간을 벌기 위한 허장성세였던 것이다.
이 후원은 비록 넓었지만 그와 같은 고수가 몸을 날릴 때에는 결코 넓다고 할 수가 없었다.
그는 왕승고의 손목을 잡은 채로 눈덮인 정원을 바람처럼 가로질렀다.
『쫓아라!』
잔뜩 힘을 쓰다가 헛물을 켠 꼴이 된 독왕 우잠은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발을 굴렀다. 주변의 눈이 그의 몸짓에 따라 불길에 그을린 듯이 검게 녹아내렸다.
그런데 막 왕승고의 손을 잡고서 눈앞으로 닥쳐든 담장을 날아 넘으려던 거지노인의 신형이 갑자기 누가 밀어내기라도 한 듯이 주춤거리는 것이 아닌가.
『크으윽…』
노인이 이를 악무는 것을 왕승고는 볼 수 있었다. 그의 무섭게 번뜩이던 눈빛이 괴이하게 흔들렸다. 빛을 뿜었다가 흐려졌다가, 마치 꺼져가는 불꽃처럼 심하게 요동했다.
『너, 혼자… 혼자 가거라』
그 찰나간의 순간에 이미 독왕과 사명존자, 그리고 나머지 유성검대가 그 자리에 당도함을 본 그는 이를 악물더니 문득 왕승고의 손을 묶고 있는 금빛밧줄을 잡았다. 그의 손이 투명하게 변하는가 싶더니 그 금빛밧줄이 툭! 끊어졌다.
『맙소사! 금선삭(禁仙索)이…』
그 광경을 보고 사명존자가 경악해 입을 벌렸다.
『물러나지 못할까! 감히…』
이를 악물었던 거지노인이 고함치면서 달려드는 유성검대의 검세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으악…』
다시 비명이 일며 유성검대원 하나가 퉁겨져 나갔다. 같이 달려들던 유성검대원 둘이 비칠거리며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그 위세는 처음과 같지 않았다. 처음의 위세였다면 그들도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순간에 무서운 잠경(潛勁)이 날아들었다. 독왕 우잠이 기회를 노려 달려든 것이다.
『감히…』
노인이 신음하면서 그를 향해 일장을 쳐냈다.
그 일장의 기묘함은 상상을 절할 정도라 독왕 우잠은 감히 맞부딪히지 못하고 장세를 쳐내고 말았다. 그 일장에는 그의 일생 공부가 깃들여 있어 그가 평생을 두고 수련한 천독기공이 일종의 강기화(강氣化)하여 검은 구름과 같이 그를 덮쳤다.
펑!
격돌이 일며 주위의 눈이 휘말려 오르고 나무 위에 쌓여 있던 눈이 하늘을 메우며 날았다.
『크윽…』
이번에는 노인이 주춤거리며 뒤로 한걸음 물러났다. 그는 비틀, 뒤로 물러나면서 한손으로 머리를 움켜잡았다. 그러면서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 가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고통에 겨운 외눈.
눈이 하나밖에 없는 그 얼굴에는 흉한 상처가 반쪽 얼굴을 덮고 있었다.
그때, 그를 향해서 유성검대원들이 검진을 이루며 덮쳐왔다. 이미 좌우를 에워싸고 포위하고 있던 그들이니 달려드는 것은 거의 동시라 해도 좋았다. 왕승고를 막아선 채로 주춤거리던 그 거지노인은 검세가 날아드는 것을 채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머리를 움켜쥔 그의 입매는 고통으로 심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바로 그 순간이다.
『물러나라!』
다급한 외침과 함께 가냘픈 인영이 그 사이로 날아들었다.
챙챙…
날카로운 음향이 일며 덮쳐오던 유성검대원의 검 셋이 인영이 휘두른 검세에 막혀 뒤로 퉁겨져나갔다.
『노, 노야?』
그들을 물리친 인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그 거지노인을 바라보면서 소리쳤다. 그 인영은 뜻밖에도 구대부인이었다.
수중에 한자루의 연검(軟劒)을 들고 있는 그녀의 얼굴은 온통 경악으로 가득차 있었다.
『어, 어서 승고를 데리고 여기를… 빠져…』
구대부인을 본 거지노인은 일그러진 얼굴로 그녀의 앞을 막아서다가 머리를 움켜쥐면서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노야!』
구대부인이 놀라 소리치면서 그를 부축했다.
『크으으…』
거지노인은 머리를 감싸쥐고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데 이미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같았다. 입에서 허연 거품이 밀려나오고 있었다.
방금까지 그러한 신위를 보이던 사람이라는 것을 전혀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다가오지 마라! 누구든, 그 자리에서 한걸음만 나서는 자가 있다면 나의 검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유성검대가 다가오는 것을 본 구대부인이 그 앞을 가로막으며 매섭게 외쳤다.
『무슨 짓이오? 감히, 항명하겠다는 것이오?』
『항명이 아니오, 이 분은…』
『잡아라!』
사명존자가 고함쳤다.
구대부인이 전면에 나서자 일시지간 머뭇거리던 유성검대는 그의 명이 떨어지자 일제히 앞으로 나섰다. 노인의 신위가 워낙 만부부당의 막강한 것이라 무너지기는 했지만, 그들은 결코 약자가 아니었다.
쨍쨍!
검광이 일고 불똥이 튀었다.
연검이란 검 자체에는 힘이 없다. 그러한 검을 쓰기 위해서는 본신의 진기를 검에 주입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하니, 일반인이라면 그 검을 쓸 수가 없다. 자칫 잘못하면 휘청거리는 검에 자신이 다칠 수가 있는 까닭이다. 구대부인이 그것을 무기로 쓴다는 것은 그녀의 본신공력이 범상치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중독에서 풀리지 않은 그녀가 제대로 힘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유성검대의 검진은 철벽과 같아 마치 검의 파도가 몰아쳐오는 것 같았다.
단숨에 그녀는 손발이 어지러워지고 여기저기에서 피가 솟았다. 그렇듯 난리가 났음에도 아무도 후원에 나타나는 사람이 없었다. 이곳이 그녀의 기업인 만금전장의 총호임에도 불구하고.
『악!』
그녀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피가 튀면서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나갔다.
억지로 버틴다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아들을, 또 다른 한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그야말로 젖먹던 힘까지 다 끌어올려 겨우겨우 버텼지만 상대가 너무 많았고 힘은 모자랐다.
검을 떨어뜨린 그녀를 향해서 검이 날아들었다.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녀의 뒤에는 그녀가 지켜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검에는 눈이 없다.
절망의 빛이 구대부인의 눈에 떠올랐다.
쨍그랑!
『으악!』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비명이 터졌다.
바로 그 순간, 그녀의 손에서 퉁겨져 나간 그 연검이 마치 살아있는 듯 퉁겨오르며 구대부인을 공격하는 유성검대원을 베어버린 것이다.
경악한 구대부인을 막아서는 그림자 하나가 있었다.
들판과 같이 너른 등을 보이는 사람.
그것이야 말로 그녀의 아들인 왕승고였다.
왕승고는 날아가던 검을 잡아끌어 어머니를 공격하던 유성검대원을 베어버림은 물론이고 이내 검을 휘저어 덮쳐오던 유성검대를 향해 덮쳐갔다.
쨍! 쨍그렁…
고막을 찌르는 금속성이 잇달아 터지면서 그처럼 철벽과 같던 유성검대의 검진이, 그 검들이 왕승고의 검에 의해 마치 수수깡처럼 부서져나갔다.
『으악!』
『으아아…』
그리고 뒤를 잇는 비명.
비명을 따라 피보라가 일었다.
왕승고가 검을 쥐면서 구대부인을 공격하던 유성검대원을 쓰러뜨리고 질풍처럼 앞으로 전진하면서 앞선 두 명의 검을 두동강 내면서 그들을 쓰러뜨리고 다시 검을 휘둘러 좌우에서 그를 맞아나오던 유성검대원 둘의 가슴을 갈라낸 것은 거의 동시라 해도 좋았다.
가슴이 갈라지고도 살아날 사람은 없는 법이다.
거의 대항도 하지 못하고 잇달아 다섯명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자 유성검대는 주춤, 뒤로 물러나고 말았다.
『주, 중독되지 않았단 말인가?』
사명존자가 귀신에 홀린 듯 일그러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괜찮으십니까?』
왕승고는 그의 말에는 대꾸조차 하지 않고서 구대부인을 돌아보면서 물었다.
『어, 어떻게 된 거냐? 괜찮다는 말이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심하라는 듯 그녀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보인 왕승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거지노인을 일별했다.
『정말 저 분이 노야입니까?』
전음입밀의 수법으로 그가 물었다.
『그, 그렇다. 저 분이…』
그녀가 가슴을 움켜쥔 채로 말했다.
백옥 같은 손가락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많이 다치셨습니까?』
왕승고가 미간을 찡그리면 그녀에게 몸을 돌렸다.
순간.
『위험…』
구대부인이 놀라 소리쳤다.
『으악!』
왕승고의 뒤에서 비명이 터져나왔다.
그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서 검을 뒤로 찔러내자, 그 검에 가슴이 꿰뚫린 유성검대원이 단말마의 비명을 터뜨린 것이다.
왕승고는 언제나 과하게 손을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이렇듯 참혹하게 당함을 보자 그는 이미 살기가 동한 상태가 되어 조금도 사정없이 손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 순간, 왕승고는 가공할 위세의 잠경(潛勁)이 자신을 향해서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직감적으로 그것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독왕 우잠이 공격해오고 있는 것이다. 절대로 간단히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왕승고는 몸을 돌리면서 천천히 검을 세워 앞으로 찔러 들어갔다.
그를 향해서 독왕이 손을 쳐오고 있었다.
구구구…
그가 쳐든 그 손에서는 가히 먹물과 같은 기운이 아지랑이와 같이 일어나 주위를 뒤덮으면서 밀려오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대체로 독을 쓰는 사람은 독물(毒物)을 많이 가지고 다닌다. 그것은 독약일 수도 있고, 그 독을 바른 암기일 수도 있다. 또는 독사나 지네 같은 극독한 독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독왕은 이미 그런 외부 독물의 한계를 넘어서 전신이 독인화된 경지에 이른 사람이라 그런 외물(外物)이 필요가 없었다. 그의 한동작 한동작이 바로 가공할 독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 지난날 왕승고의 경지를 뛰어넘는 수련에 의해 얻은 공력이었다.
그런 그임에도 왕승고가 천천히 찔러오는 일검을 보자 안색이 돌변해 급격하게 손을 흔들었다.
윙윙…
수많은 벌떼가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리가 강하게 일면서 검은 안개와 같은 강기가 무서운 위력을 발하며 밀려들었다.
그것을 본 왕승고의 안색이 달라졌다.
정면으로 맞닥뜨리거나, 그를 공격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임을 직감한 것이다.
정면으로 부딪힐 수 없음은 그의 뒤에 있는 어머니와 거지노인 때문이었다. 그가 독왕의 공세에 그냥 맞닥뜨리면 그 여파로 인하여 두 사람이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왕승고는 찔러가던 검을 멈칫, 멈추는가 싶더니 다른 한손으로 쥐고 있던 연검의 손잡이[劒柄]를 탁 쳤다.
그러자 검이 갑자기 무서운 파공음을 동반한 채로 천독강기를 뚫고서 날았다.
『이런!』
독왕 우잠이 그것을 보고는 경호성을 발했다.
상대가 설마 자신의 앞에서 검을 던져버릴 것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더구나 그것이 검도상승의 어검술(馭劒術)일 것은!
그는 고함과 함께 양손을 한꺼번에 밀어냈다.
쨍쨍! 쨍그렁…
맹렬한 부딪힘 소리가 미친 듯이 터져나오더니 검은 안개와 같은 기운이 씻은 듯 사라지며 독왕 우잠이 비틀, 두어 걸음을 물러났다.
그의 왼쪽 배와 오른쪽 어깨에는 부서진 검조각이 박혀 있었다. 그럼에도 괴이하게 피는 보이지 않았다.
『크으… 설마 중독되지 않았더란 말이냐?』
독왕 우잠은 피투성이가 된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씹어뱉듯이 외쳤다.
그의 앞에는 방금의 가공할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서져 버린 연검이 떨어져 있었다.
피하려면 피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공력으로 조종받는 어검술에다 목을 내밀고 잘라달라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기에 어쩔 수 없이 손해를 감수하고 전력으로 거기에 맞섰던 것이다. 왕승고의 앞에서는 일진 회오리가 일면서 눈보라가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가 닥쳐오는 압력을 힘으로 흩어버렸기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다시 시험해보시지?』
말과 함께 그가 손을 쳐들자 쓰러진 유성검대원이 떨어뜨린 검이 그의 손으로 빨려들었다. 바로 그때였다.
피유우우…!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신호탄이 밤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것을 본 왕승고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어서, 어서 여기를 떠나거라. 곧 그들의 원군이 들이닥칠 것이다! 그들은 결코 노야를 살려두지 않을 것이니…』
왕승고의 귀에 다급한 전음이 들려왔다.
그가 고개를 돌려보자 어머니 구대부인이 그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있었다.
『같이 가셔야 합니다』
『나는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나는…』
『그를 엄호한다면 정말 반역이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회주께서는 결코 용서치 않으실 거요. 영주!』
사명존자가 소리쳤다.
『빨리 이곳을 떠나야… 빨리 이곳을 벗어…』
거지노인이 흉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안간힘을 다해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다가 다시 눈을 까뒤집었다.
그가 금곡노야란 말인가?
왕승고는 그를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처럼 고아하고 품위 있던 그 노인이 어떻게 이렇게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할 수가 있을까. 대체 어떤 일을, 어떻게 당했기에 이처럼 참혹하게 변할 수가 있는 것일까.
구대부인의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으되, 그의 이 참혹한 형상을 목도하자 믿기지를 않았다. 오죽하면 길에서 그를 보고서도 전혀 알아보지를 못했을까.
하지만 생각을 오래할 시간은 없었다.
그가 시선을 돌린 틈을 타서 유성검대원 한사람이 소리도 없이 그의 배후를 공격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번개처럼 빠르고 안개처럼 은밀하다 할지라도 지금의 왕승고를 위해(危害)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왕승고가 몸을 비틀며 검을 후리는 순간에 날카로운 금속성이 들리며 그가 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그의 눈에 투영되는 격렬한 고통!
왕승고는 그의 심장을 꿰뚫었던 검을 비틀어 옆으로 갈라냈다.
스파앗!
그의 가슴에서 피분수가 길게 무지개를 뿌리며 그 옆에 있던 유성검대원의 목을 찔렀다.
『흑?』
그가 눈을 부릅떴다.
왕승고가 검을 뽑자, 그의 목에서 피분수가 솟구치며 그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그가 쓰러지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간에 가슴이 찔렸던 자가 가슴을 움켜쥐고서 얼굴을 눈속에다 처박았다.
부릅뜬 그의 눈에는 불신의 빛이 가득했다.
그것은 목을 부여잡고 쓰러진 다른 대원도 마찬가지였다.
대체 자신의 검과 부딪힌 왕승고의 검이 어떻게 해서 자신의 가슴을 꿰뚫을 수 있었는지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왕승고의 몸짓이 죽음을 부르는 춤사위로 돌변한 것은.
쨍! 쨍그렁…
날카로운 금속성이 고막을 찢었다.
그리고 뒤를 잇는 단말마의 비명소리.
『저럴 수가?』
사명존자가 눈을 부릅떴다.
왕승고의 앞을 막을 것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그의 공격을 막던 검이 그와 부딪히면 그대로 두동강이 나고 피가 솟구쳤다. 그것은 그나마 다행이고 나머지는 거의 검을 마주치지도 못하고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마치 양떼 속에 뛰어든 성난 호랑이와 같았다.
그의 검은 평소의 그와는 전혀 달랐다.
조금도 사정이 없었다.
늘 대인의 풍도를 보이던 그의 검은 지금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일검 일검이 살인검이었다.
『으아악!』
왕승고가 후린 검에 검이 부러지면서 양미간이 갈라진 유성검대원이 비명을 질렀다.
피분수가 뿌려지면서 그가 쓰러짐을 끝으로 유성검대는 전멸했다.
왕승고가 든 검에서 선혈이 조용히 흘렀다.
그는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무, 무섭게 강해졌군…』
그의 시선을 받은 사명존자가 신음을 흘렸다.
기세등등하여 나타났던 그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그와 경악을 감추지 못하고 있는 독왕 우잠뿐이었다.
사태의 진전은 거의 정신을 차릴 사이가 없도록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왕승고는 말없이 그를 향해서 검을 세웠다.
『더 이상 반항한다면, 광명회의 적이 된다!』
그것을 보자 사명존자가 주춤, 물러나면서 고함쳤다.
왕승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이미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을 죽여 없애기로 작정을 하고 전력을 다 일으키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야만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느닷없이 금곡노야로 추정되는 거지노인이 나타나는 바람에 그의 원래 계획은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피유우우…
어둠을 뚫고서 날카로운 소성이 들려왔다.
사명존자의 얼굴에 희색이 떠올랐다.
『원군이 당도했다! 어서…』
구대부인이 뒤에서 다급히 소리쳤다.
왕승고의 검이 그 소리에 놀란 듯 사명존자를 향해서 발동했다. 하지만 그의 검은 사명존자를 향해 날아가다가 급히 방향을 틀어야 했다.
『악!』
그의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던 것이다.
구대부인이었다.
왕승고가 사명존자를 향해서 검세를 발동하자 그 틈을 노려 독왕이 구대부인을 덮쳤고, 그를 막아내려던 구대부인이 비명을 지른 것이다.
비록 독왕이 상처를 입었다 할지라도 구대부인이 그의 상대가 될 수는 없었다.
왕승고가 몸을 돌리는 순간에 구대부인은 이미 외마디 비명과 함께 쓰러지고 있었다.
『물러나지 못할까?』
왕승고의 검이 빛살과 같이 날아 독왕을 엄습했다.
독왕은 구대부인을 날려보내고 이미 거지노인의 앞에 도달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감히 왕승고의 검을 경시할 수 없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한번 뜨거운 맛을 본 다음인 것이다.
『감히 이, 이…』
괴이한 억양으로 독왕이 분통을 터뜨리면서 연달아 칠장을 후려패듯이 쏟아냈다.
검은 기운이 무섭게 다시 일었다.
하지만 그 기세는 처음과는 비교할 수 없어 보였다. 강하다는 것이 아니라, 갑자기 힘이 떨어지기라도 한 것 같다는 느낌.
그의 천독기공을 운용한 독장은 무림의 그 누구라도 한발 양보할 수밖에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무공이 아무리 강해도 독기(毒氣) 앞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는 일인 까닭이다.
그런데 왕승고는 달랐다.
그는 그 가공할 독기가 서린 그의 연환칠장(連環七掌)의 공세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그대로 그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칙칙!
왕승고의 검 끝에서 눈부신 광망이 마치 빛줄기와 같이 쭉쭉 뻗어나가면서 그 가공할 독장을 뚫고 들어갔다.
『검강(劒●)?』
경호성이 독왕의 입에서 터져나왔다.
하지만 그는 다음 순간에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크으윽! 나, 나는 믿지 못하겠다! 네가 설마 만독불침(萬毒不侵), 도저히 안믿는다!』
고함소리에는 묘어(苗語;묘강어)까지 뒤섞여 나왔다. 그만큼 다급하고도 자신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노했다는 의미였다.
웅웅웅---
자흑색 독기가 크게 일었다.
그리고 뒤를 잇는 비명.
『크악!』
……
천천히 독기가 가라앉는다.
그러면서 시야가 다시 틔어 사물이 드러났다.
가공할 광경이었다.
사방의 눈이 독기에 검게 녹아 땅바닥이 뭉클뭉클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었다. 그 연기를 마시는 것만으로도 황소가 단숨에 죽어넘어질 독기.
『크으으…』
독왕 우잠은 이를 악물고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그의 오른손에서 검은 독혈(毒血)이 땅바닥으로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조금전까지 멀쩡했던 그 손은 엄지를 제외한 나머지 네 손가락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왕승고의 검강이 그 손을 잘라버린 것이다.
그것도 모자라 그 검강은 그의 가슴까지 갈랐다.
『공봉!』
사명존자가 그를 불렀다.
왕승고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구대부인과 거지노인까지 없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까?』
천천히 독왕 우잠이 그를 돌아보았다.
『놈은 갔소. 하지만 나의 천독장… 가슴에 맞았으니 무사하지 못할거요. 제아무리 독에 강하다 해도… 나는… 세상에 만독불침지신이 있다고는 믿지 못해』
그가 중얼거렸다.
그 말과 함께 담을 넘어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날아들기 시작했다.
원군이 도착한 것이다.
"으악!"
빛살처럼 날아든 검광에 백의인은 가슴을 움켜쥐었다. 부릅뜬 눈으로 그는 눈속에 얼굴을 처박았다. 자신의 가슴을 꿰뚫은 검을 움켜잡은 채.
천천히 선혈이 눈위로 번져갔다.
"잠시…… 시간을 벌 수 있겠군."
왕승고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죽어 넘어진 그 백의인의 손에는 반 자 가량의 막대기 비슷한 것이 쥐어져 있었다.
신호탄이었다.
왕승고를 발견한 그가 신호탄을 터뜨리려는 것을 보고 왕승고는 좌우에서 달려드는 두 사람을 처리하면서 그에게 검을 던져냈던 것이다.
제남 교외.
눈덮인 숲에는 방금 그의 손에 죽은 백의인을 마지막으로 세 명의 백의인이 죽어 넘어져 있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숫자일 뿐, 실제로 그가 여기까지 오면서 죽인 사람의 숫자는 이미 수십 명이 넘었다.
그의 품에는 거지노인이 안겨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에는 구대부인이 창백한 얼굴로 나무에 기대 서 있음이 보인다.
"많이 힘드십니까?"
왕승고가 거지노인을 옆에다 내려놓으면서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아니다. 견딜 수……"
말을 하던 그녀의 얼굴로 문득 검은빛이 치밀어 올랐다.
전신이 검게 물들어갔다.
"어머님!"
"소, 손을 대지마라! 나는 이미 중독……"
구대부인이 황급히 머리를 흔들었다.
"걱정마십시오. 저는 중독되지 않습니다."
"그, 그는 다른 사람이 아닌 독왕이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공력으로 그의 독에 항거할 수는 없……"
왕승고는 어머니 구대부인을 향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제가 중독된 것처럼 보이십니까?"
"그건……"
그녀는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말 중독된 흔적은 찾기 힘들었다.
더구나 여기까지 오면서 아들이 보인 신위(神威)는 가히 용과 같고 범과 같았다.
"저들의 수뇌…… 광명회의 회주를 만나보기 위해서 중독된 것처럼 가장했었을 따름입니다. 잊으셨습니까? 그때의 일 이후로 저를 중독시킬 독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과연 그런 독이 없을지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까지는 그랬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어머니를 안심시키기 위해서는 당연한 말이기도 하였다.
"우선 이걸 드십시오."
왕승고는 품속에서 작은 옥병을 꺼내 밀봉된 것을 뜯었다.
청량한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그건?"
"쿠빌라이의 능에서 가지고 온 공청석유(空淸石乳)입니다."
"공청……?"
그 가치를 아는 구대부인이 눈을 크게 떴다.
공청석유라고 하는 것은 땅의 영기가 모여 그것이 바위 속에서 말 그대로 돌의 젖과 같이 형성이 되는 것이다. 말로는 백년에 한방울이 만들어진다고도 하고 천년에 한방울이 형성된다고도 하였다.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 다음에야 범상치 않은 효력이 있을 것은 자명한 일.
도가(道家)에서 이르기는 인간세의 선품(仙品)이라 한방울만 마셔도 속기(俗氣)를 씻어낼 수 있고 체내의 노폐물을 배출하며 만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다. 무가(武家)의 사람이 그것을 복용하면 수십년간 연공한 공력을 얻을 수 있다 하였으니 그 효능은 실로 무궁하다 할 것이었다.
"어서 드십시오. 공기와 접촉하면 순간적으로 영기가 사라져버립니다."
왕승고가 옥병을 내밀었다.
"이건 네가 마시는게……"
구대부인이 어머니답게 자식걱정부터 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어머님은 독왕의 천독장력을 그대로 맞았습니다. 중독은 물론이고 내상조차 보통 사람이라면 이미 기식이 엄엄할 정도로 중합니다. 여길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드셔야 합니다."
그의 간곡한 말에 구대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구대부인은 공청석유가 든 옥병을 바라보았다.
향기를 맡는 것만으로도 희미하게 꺼져가던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그녀는 독왕과 맞서면서 그의 일격에 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었다. 지독하다고 할 정도였지만 왕승고가 걱정할까 봐서 억지로 내색을 하지 않았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것을 돌볼 여가가 없도록 그 자리를 벗어난 다음의 상황은 급박했었다.
게다가 왕승고는 한손으로는 거지노인을 안고, 혈로를 뚫었으니 그 뒤를 따르면서 무슨 말을 할 수가 있었을까.
그녀는 이미 견디기 힘든 상황에 이르러 있었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정신이 맑아지는 것 같음을 느낀 그녀는 그것을 마시려다가 문득 생각이 동한 듯 정신을 잃고 있는 거지노인을 부축하여 그의 입에다 옥병을 기울였다.
맑은 젖과 같은 액체가 또르르 굴러 그의 조금 벌어진 입술을 통해 입안으로 들어갔다.
마치 누가 숟가락으로 한방울 떠넣은 듯한 모양.
아무리 영약이라고 해도 그게 무슨 효과를 발휘할까 싶은 소량(少量)이었다.
그러나 그 병에 든 공청석유의 양 또한 겨우 네 방울에 불과했다.
나머지 공청석유를 그녀가 마시는 것을 바라보던 왕승고는 다시 한번 그 거지노인을 바라보았다.
정말 그가 금곡노야일까?
그는 만금전장의 후원에서 정신을 잃은 다음에는 마치 간질환자처럼 정신을 놓고 있었다. 흩어진 쑥대밭과 같은 머리카락….
그는 정말 금곡노야인 듯했다.
그러나 그 형상은 너무도 참혹해 보였다.
금곡노야를 보는 것이 아니라, 사부 한호국을 보는 것만 같았다.
윤회(輪廻).
왕승고의 뇌리에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쳤다.
지난날 사부 한호국을 그렇게 핍박할 때 그는 과연 자신의 이러한 모습을 상상이라도 해본 적이 있었을까.
암암리에탄식한왕승고는구대부인과노인을뒤로하고앞에서서조용한눈으로좌우를살폈다.
구대부인은 공청석유를 마시고는 운기조식에 들어가서 그를 지키기 위하여 호법을 서는 것이다.
우뚝 선 그는 바위와 같다.
하지만 그 상태에서 그는 조용히 운기하여 조식을 하고 있었다. 상황이 이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그는 정말 만부막적,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절대적인 고수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곳까지 이르기 위해서 그가 쏟아낸 힘은 정말 간단한 것이 아니라서 그 또한 이미 지쳐 있었다. 평범한 고수라면 능히 상대할 수 있겠지만 절대고수를 만나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될는지는 장담할 수가 없어 힘을 비축하려는 것이다.
어둠이 짙었다.
어두운 하늘의 달이 구름 사이로 왔다갔다 하긴 하지만 주위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어둠이 과연 누구에게 유리할는지 알 수가 없다.
여기까지 이르면서 경험했듯이 상대는 이미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다만 그 준비가 철저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것은 그를 쿠빌라이의 능에서 보았던 그 왕승고로 생각하고 있기에 기인(起因)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왕승고가 전과 달라졌다는 것을 이젠 알고 있었다.
금곡노야를 이렇게 만들 능력을 가진 자들이라면, 더더구나 지금의 그는 보호해야 할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되었다.
거기에 더해 그의 무공은 쿠빌라이의 무덤에 들기 전보다 실제로는 그렇게 강해져 있지 않았다. 무공이라는 것이 어느 일정한 경지에 이르면 한치 전진한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에 도달한다.
무슨 공식처럼 한단계 한단계를 쉽게 밟아 올라가지 못한다는 의미다.
다만 그가 전보다 강해졌다는 것은 무덤을 파고 나오기 위하여 끊임없이 내공을 쓰다보니 일심으로 내공을 수련하여 그 공력이 대단히 심후면장(深厚綿長)하게 변했다는 데 있었다.
힘이 오래 지속된다는 뜻이다.
문득 눈을 감고 있던 왕승고가 번쩍 눈을 떴다.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긴장된 얼굴.
왕승고는 수중의 검을 조용히 힘주어 잡았다.
구대부인은 아직 조식중이고 금곡노야 또한 정신을 차리지 못한 상태다.
사각사각, 눈을 헤치는 아주 가벼운 발자국 소리가 정적을 뚫고 점점 다가왔다.
그리고 새파란 불빛이 어둠 속에서 드러났다.
그것을 보고 있던 왕승고가 어이없다는 듯 픽, 소리없이 웃었다.
눈덮인 풀숲에서 고개를 내민 것은 한 마리의 여우였던 것이다.
그것도 새끼인 듯 싶었다. 여우는 고개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왕승고와 눈이 마주치자 깜짝 놀라서 고개를 움츠렸다가 풀숲 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부지중에 왕승고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때, 길게 휘파람 소리와 같은 야조(夜鳥)의 울음소리가 숲 저쪽에서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은 왕승고의 안색이 문득 굳어졌다.
뭔가 이상했던 것이다.
여우 또한 이상한지 귀를 쫑긋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잠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좀더 먼 곳에서 야조의 울음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순간, 급한 호흡이 뒤에서 느껴졌다.
『어머님!』
왕승고의 안색이 돌변했다.
조식에 들어있던 그녀가 갑자기 미간에 조급한 빛을 떠올리고는 급한 숨을 몰아쉬고 있었던 것이다. 진땀이 비오듯 이마에 떠오르고 있었다.
이미 무공이 경지에 오른 그였다.
그 상태가 운기조식 중에 심마(心魔)가 끼어 주화입마에 들어가는 것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는 천부신공을 운기하여 그녀의 영대(靈臺)를 짚었다.
그런가 싶은 순간에 그는 다시 번개처럼 손을 써서 그녀의 등을 짚어내렸다. 그리고 명문(命門)에 손을 붙인 그는 체내의 진기로서 그녀를 돕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그녀의 체내진기가 난마(亂馬)와 같이 뒤엉켜 마구 흩어지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이를 뻔했다.
왕승고는 낮은 음성으로 그녀에게 말하였다.
『진기를 제가 도인하는대로 맡겨주시고 마음을 편히 가라앉히십시오』
그녀의 체내 진기를 다잡는 일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뭔 일인가, 눈을 꿈벅이며 왕승고 쪽을 바라보고 있던 여우는 문득 무엇에 놀란 듯 화들짝 몸을 돌려 풀숲으로 사라져버렸다.
옆에 있던 눈송이가 흩날렸다.
『이제 되었습니다』
왕승고는 그녀에게서 손을 떼면서 말했다.
『저 소리는… 광명회의 연락신호다!』
구대부인은 진기를 단전에 되돌리고 나자 눈을 뜨면서 다급히 입을 열었다.
그 때문이었다.
야조의 울음소리와 같은 그 소리를 듣자 구대부인은 다급하여 운기조식을 멈추려 했지만 절세의 영약인 공청석유를 복용한 그녀의 진기는 예상보다 거세어 그녀가 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영약이 그녀가 입은 독상까지 해소함에는 더더욱… 그대로 운기조식을 계속하여 진기를 십이주천(十二週天)할 수 있었다면 그녀는 독상을 치유함은 물론이고 공력까지 배증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 또한 세상사이고 사람의 삶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가 말을 하는 순간에 예의 소리가 좌우에서 호응하듯이 들려왔다. 좀 전과는 달리 아주 가까웠다.
왕승고가 머리를 들어 숲쪽을 보자, 구대부인은 촉급히 말했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자!』
그녀가 일어서는 것을 보자 왕승고가 물었다.
『어디로 가시려는 겁니까?』
『천불산에 내가 다니던 절이 있다. 일단 그곳으로 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불가하네』
나지막한 음성이 옆에서 들려왔다.
『노야!』
구대부인이 탄성을 흘렸다.
그 거지노인, 금곡노야가 나무에 등을 기댄채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폐를 끼쳤네』
그가 말했다.
『노, 노야…』
눈을 뜬 그를 보자 구대부인은 목에 메었다.
철의 여인과 같은 삶을 살아온 그녀였다. 하지만 저 금곡노야의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지난 세월 동안 마음의 의지가 되었던 존재가 바로 그인 까닭이다.
『시간이 별로 없어. 놈들이 다가오는 속도로 보건대 반각 이내에 이곳에 당도할걸세…』
금곡노야가 다시 말했다.
『왜 천불산이 안된다는…』
『놈들이 아는,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곳은 안되네. 이미 그 놈에게 파악된 곳으로 간다면 말 그대로 그물 속으로 뛰어드는 고기가 될 뿐…』
『그곳이 아니라면 지금 당장…』
『승고야, 나를 조금 부축해주겠느냐?』
금곡노야가 손을 내밀었다.
왕승고는 말없이 그를 부축했다.
뼈만 남은 듯한 손이었다.
그간의 고초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을 아픔이 그 손과 앙상하게 말라버린 그의 몸에서 느낄 수 있었다.
『가실 곳이 있으십니까?』
『태산으로 가자』
『태산?』
『그래, 그곳으로 가면 몸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의 시선이 부지중에 동쪽으로 향했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둘러쓰고서 거대한 몸체 하나가 동쪽에서 불끈 솟아 있음이 보인다.
제남 일대의 산은 모두 태산의 지류(支流)이다. 태산이 제남에서 보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일진 가벼운 바람이 일면서 그들의 신형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뒤를 따르듯 예의 새울음소리가 급촉히 들리더니 이내 그들이 있던 자리에 검은 그림자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 *
태산(泰山)!
중원오악(中原五嶽) 중 하나로서 동악(東嶽)이라 불리는 명산중의 명산이다.
그리하여 산중의 산이라 하여 대종(岱宗)이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실제로 이 산은 생각처럼 그렇게 높거나 수백 수천리에 걸쳐 위용을 자랑하는 덩치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산이 오악중에서도 특별한 의미로서 역사에 남게 된 것은 지리적인 위치 때문이다.
너른 화북평야에 위치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홀로 우뚝하니 다른 곳보다 더 상대적으로 높아 보이는 것이다. 공자(孔子)가 「태산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 보니 천하가 작아만 보인다」고 감탄을 한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태산이 의미를 가진 것은 그런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며, 그런 의미로 말미암아 동해의 해가 떠오르는 위치에 자리한 태산은 고래로부터 역대의 제왕들이 이곳에서 봉선(封禪)을 행함으로써 좀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제천배지(祭天拜地)라 하여 하늘에 제사지내고 땅에 절하면서 천지신명에게 스스로가 천하의 주인이 되었음을 고(告)하는 의식이 바로 봉선이다.
천천히 천지가 밝아지고 있었다.
세상을 가득 메운 구름과 안개를 밀어젖히면서 아득한 빛 한줄기가 점점 힘을 더한다.
장관(壯觀)이다.
시야를 가득 메우면서 환경(幻境)을 연출하고 있던 구름과 안개 속에서 붉은 빛 한줄기가 떠오르더니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그도 모자라 이내 하늘을 온통 뒤집어엎으면서 찬란한 광구(光球)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오악지수(五嶽之首)라는 태산의 일출.
왕승고는 전신을 안개에 묻은 채로 조용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여기에 이른 것은 어제 밤.
금곡노야가 태산으로 가자고 했던 것은 공연한 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이 이른 관일암(觀日庵)에는 60대의 노승 한 사람이 암자를 지키고 있었고 그는 혹시라도 금곡노야가 찾아올 때를 대비하여 그를 기다리도록 안배된 사람이었다.
안배되었다 함은 만에 하나라도 금곡노야에게 무슨 일이 있을 때, 그를 위하여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그는 지난 10여년간을 오로지 금곡노야가 찾아올 때를 위해서 이곳에서 살았다.
그런 준비까지…
감탄을 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잠시 정신을 차렸던 금곡노야는 다시 정신을 잃었고, 그를 업고 태산에 오른 왕승고는 그를 암자에 눕히고 살펴보다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가 잠시 정신을 차렸던 것은 구대부인이 그에게 먹인 공청석유의 효능 탓임을 알았던 것이다.
그의 내부는 실로 엉망이었다.
겉으로 입은 상처도 제대로 치료하지 못해서 제멋대로 뒤틀려 있었다. 정말 예전의 그가 그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
어떻게 당장 손을 쓸 방법이 없었다.
할 수 없이 어머니인 구대부인에게 간호를 맡기고 그는 밖으로 나와 밤새 보초를 섰다.
혹시라도 저들이 쫓아올까 하여….
비록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극도로 조심했다고는 하지만 언제 어떻게 될는지 알 수 없는 일인 데다가 저들의 추격이 너무도 급박하여 정말 언제 어떻게 그들이 들이닥칠 것인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긴장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아오자 태산의 일출을 일러 장관이라 한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정말 가슴이 벅차오를 광경.
천지가 불타오르고 그 가운데 선 자신마저 불길에 휩싸인 것만 같이 느껴졌다. 불길이되, 전혀 뜨겁지 않은 상화(祥和)로운 느낌.
구름 사이로 까마득히 남천문(南天門)으로 오르는 수많은 계단이 흐르는 물처럼 아득하다.
문득 묘한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느꼈던 것과 같은 감각.
무엇이었던가?
그랬다.
지난날 밤, 국화 가지를 들고 황창랑무를 연습하다가 느꼈던 그 느낌.
천지지교가 용암 속에 빠진 듯 뜨거워지고 전신의 진기가 갑자기 무한대로 불어나버린 듯 차오르기 시작했다.
피부가 호흡을 하면서 태산의 구름과 안개에 서린 기운을 받아들인다.
구름을, 안개를, 산자락을 온통 붉게 물들인 그 떠오르는 해의 황금빛 사슬들이 그의 전신을 향해서 물밀 듯이 그렇게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사부로부터 들었던 그 천부신공의 오묘무비한 비오(秘奧)함이 마치 두루마리가 펼쳐지듯이 그의 뇌리에서 떠올랐다.
그날 이후, 그렇게 다시 해보고자 해도 할 수 없었던 그 기회. 무림인들뿐만 아니라, 수련을 하는 모든 사람들이 꿈에서라도 바라는 천지지교를 운통(運通)할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온 것이다.
정말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그처럼 애를 써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수련만 하면서 지낸 쿠빌라이의 묘에서도 찾아오지 않았던 그 느낌이 이렇게 느닷없이 찾아올 줄이야!
앉을 수도 없었다.
그랬다가는 그 느낌이 그대로 날아가버릴 것이기에.
다행히 천부신공은 자세에 구애를 받지 않는다.
왕승고는 길게 숨을 불어내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다 할지라도 정작 감은 것은 아니고 감은 듯 만 듯 반개(半開)한 모습.
휘, 휘이이…
그의 몸 주위에서 문득 조용한 바람이 분다.
안개가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그 바람을 따라 그를 휘감았다.
둥둥둥!!
뇌리에서, 내부에서 북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는 느끼지 못하지만 그의 주위를 둘러싼 안개들이 그 내부의 북소리를 따라 공명(共鳴)하고 있었다. 그 파장에 따라 안개가 춤을 추듯이 그렇게 움직이고 있는 모습은 신기하기조차 했다.
그의 전신은 그렇게 태양빛을 받아들이면서 천지와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게 깨어졌다.
바스락…
뭔가 풀잎을 밟으면서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아주 은밀해서 평소라면 거의 들을 수 없을 정도의 소리였다.
금곡노야였다. 그는 왕승고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굳은 표정으로 서 있었다. 왕승고가 눈을 뜸을 보자 그는 나직이 탄식했다.
『보아하니, 내가 아주 좋지 않을 때에 나타난 것 같구나…』
눈을 떴다가 잠시 눈을 다시 내려감았던 왕승고는 희미하게 웃음을 머금고 눈을 떴다.
『제 수련이 거기까지가 한계인 듯하군요. 아직은 더 이상을 허용하지 않겠다는 것이 하늘의 뜻인 것 같기도 하고…』
말은 그렇지만 아쉬움은 남았다. 평생에 한번 오기 힘들다는 그 기회가 이렇게 두번씩이나 찾아왔다가 어이없이 사라져 버리다니….
『괜찮으십니까? 아직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좋으실텐데요?』
하지만 그는 아무런 내색없이 물었다.
『어차피 망가진 몸. 쉬고 있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지겠느냐? 너를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없었다면 이런 욕됨을 참고 살아 남지도 않았을 터이다』
금곡노야는 떠오르는 태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탄식을 흘리며 말했다. 나를?
하지만 왕승고는 묻기보다는 묵묵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묻지 않아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햇살이 강렬해지면서 안개가 힘을 잃고 흩어져갔다. 그러자 저 멀리에서 웅장한 형체를 갖추고 있는 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동악묘(東嶽廟).
태산을 상징하는, 역대 제왕들이 봉선을 행한 바로 그 건물이다.
『태산의 유래를 아느냐?』
구름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낸 동악묘를 바라보고 있던 금곡노야가 문득 입을 열었다.
『……』
『고대의 제왕들이 이곳에 와서 봉선하며 자신이 천자가 되었음을 고한 그 까닭을 너는 아느냐? 왜 하필이면 그 자리가 이곳이어야 했는지…』
왕승고는 말하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계속할 것임을 아는 터이다.
『그들은 높은 곳이 필요했다. 동쪽을 바라보면서 절 할 수 있는… 그래야 동쪽에 있는 천제에게 제(祭)를 올릴 수 있을 터이고, 저렇듯 빛나는 태양을 보면서 빛의 나라를 연상할 수도 있었을 터이다』
빛의 나라.
그것이 한[桓]임을 왕승고는 안다.
그 위대한 민족은 빛을 숭상했으며, 나라 이름 또한 대한(大桓)이라 하였었다. 뒤에 그들은 천재지변으로 대이동을 시작하여 천하로 흩어졌으되, 지난날의 근본을 잊지 않아 얕은 곳으로 흘러간 사람들은 단(檀)을 쌓았고, 탑(塔)을 쌓았으며, 더 나아가서는 지구랏과 피라밋과 같은 거대 구조물까지 건축했다.
태산은 거대한 화북평원에서 올연(兀然)히 우뚝한 거산이다. 높이에 비해 더욱 그 험하고 웅위함이 더하니 사람들의 기림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하여 이곳은 제단(祭壇) 대신 중국의 제왕들에게 선택되었다.
동방의 천제에게 스스로가 지배자가 되었음을 고하고 책봉을 받는다는 의미로서….
그 유래는 중국에서 이르기를 봉선은 진한(秦漢)이전부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더 거슬러 올라간다. 전설의 삼황오제라고 일컫는 제순(帝舜)으로부터 그 일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흔적은 사서삼경 중의 하나로 숭앙받아 상서(尙書)라고도 불리는 서경(書經)의 우서(虞書) 순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상기의 번역중 문제가 되는 구절은 사근동후(肆覲東后)라는 부분이다.
그 구절은 논란거리를 제공한다.
대개의 경우 사근동후라는 글귀는 『동쪽의 제후를 만나보고』라는 말로 번역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의 문제는 사근이라는 글자다. 그중 근(覲)이란 글자의 의미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찾아뵙는다는 뜻이다.
중국의 제왕이 동쪽의 제후를 찾아뵙는다?
세살 먹은 아이라도 말이 이상함은 알 수 있다.
---書經 虞書 舜典
상기의 글은 우서의 순전에 있는 것으로서 대개의 경우는 아래와 같이 번역한다.
그해 이월에 동쪽으로 순수하다.
태산에 이르러 제사 지내고[柴] 차례로 산천에 제사하였다[望].
동쪽의 제후들을 만나보고 시월을 협의하시고 날짜를 맞추어본 다음, 음률과 도량형을 통일하시다.
오례를 세우고……. 얼핏 보면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바로 천자로서 제후를 만난 것과 자신보다 윗사람인 상제를 만났다는 점이다.
혹자는 말한다.
글자 한자의 뜻으로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느냐고.
당연히 그럴 수가 있다.
이제 상기 부분의 위에 있는 글들을 한번 살펴보자.
在璿璣玉衡, 以齊七政, 肆類于上帝, 于六宗, 望于山川, 于群神…….
구슬로 된 혼천의를 살펴보고 천체의 운행을 바로잡다. 하늘에 제사지내며[類] 천지와 사시(四時)에 제사하고 산천에 제하는 등 여러 신에게 두루 제사를 지냈다…….
상기의 글을 읽어보면 문제의 사(肆)자가 다시 사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상제(上帝)라는 글자를 수식하기 위해서다.
그렇게 까다로운 글자의 선택에 있어서 상제에게 제를 지낼 때에는 사라고 하는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그 글자가 아랫사람에게 사용될 수 없는 것임을 의미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요·순 시대까지 중원의 판도는 동이, 우리민족에게 있었음은 이미 전술(前述)한 바 있다.
그러니 그가 무엇을 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동쪽의 천자에게 가서 그것을 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했고 후일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일이 관습화되어 천하의 주인된 자는 태산에 이르러 동쪽의 천자 대신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으로 그 일을 대신하기에 이르러 그를 봉선이라 이름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의 역사서라고 할 수 있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중국역사의 시작을 황제(黃帝) 헌원으로부터 잡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주된 것은 그가 진정 한 서방 서장족, 한족의 시조라고 믿는 까닭이다.
그러나 그 또한 동이의 한 갈래라는 것은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보인 바 있다.
황제 헌원의 뒤를 이은 요·순이 동이족이며 하(夏)와 은(殷), 주(周)를 거치며 이어지는 중국의 역사의 출발은 바로 그렇게 그들이 동이라 부르는 위대한 민족으로 비롯하였다.
『나는 그 옛날의 위대함을 기리기 위해서 시간이 날 때마다 이곳에 올라왔었다…』
금곡노야의 눈이 꿈꾸듯 가늘어졌다.
해는 이제 완전히 구름 위로 떠올랐다.
찬란한 태양빛은 구름을 붉게 물들이다 못해 천지를 온통 금빛으로 휘감았다.
두 사람은 구름 속에서 태양을 타고서 그 빛을 밟고 하늘 위에 둥둥 떠 있는 듯하였다.
『공자도 아마 여기에 올라 이런 느낌을 받았기에 등태산이소천하(登泰山而小天下)라고 하였겠지…』
금곡노야가 중얼거렸다.
태산에 오르니 천하가 작아보인다.
그의 이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태산에는 공자등림처(孔子登臨處)라는 문이 하나 세워져 있다. 공자가 올랐던 곳이라는 의미다.
『어쩌면 여기에 올라 자신이 이야기했던 구이(九夷)에 살고자 했던 말을 생각했을는지도 모르지요』
왕승고의 말에 금곡노야는 왕승고를 바라보면서 희미하게 웃었다.
『그럴 수도 있겠지. 그러하기에 그는 예기(禮記)를 편찬하면서 그렇게 적었었다. 「동방은 어진 사람들이라, 그들의 풍속은 만인을 좋아하고 만물 살리기를 또한 좋아한다…」』
『예기 왕제편(王制篇)에 있는 말이군요』
『그렇다』
그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러하기에, 후한서(後漢書)에서도 「동방을 이(夷)라 한다. 이(夷)는 뿌리다」라고 하였던 것이지…』
문득 금곡노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의 삶은 그러한 위대함을, 우리 조상의 위대함을 오늘에 되살려보기 위해서였었다. 그런데…』
그의 얼굴에 문득 격동의 빛이 일었다.
괴로운 빛이 얼굴 가득 퍼지며 창백한 그의 얼굴에 걷잡을 수 없는 경련이 번져갔다.
파삭!
그의 하나밖에 남지 않은 팔이 누른 바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며 부서진 잔해를 흘려냈다.
그의 손이 바위를 부수며 파고들어가 있었다.
순간.
『크으윽…!』
금곡노야가 머리를 움켜쥐면서 무릎을 꿇었다.
『노야!』
『크흐으… 놈의 독이… 이미 골수에 파고들어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나, 나는 너를 기다리기 위해서 여기에…』
노야가 일그러진 얼굴로 진저리를 쳤다.
『독이라면?』
그의 체내에서 독의 징후를 발견하지 못했던 왕승고는 의아하여 되물었다.
『나, 나는… 오래 버틸 수 없다. 노, 놈을 막아야 한다. 놈을… 그래서… 너를…』
금곡노야는 미친 듯이 머리를 흔들며 이를 갈아대면서 말을 뱉어냈다. 하나밖에 남지 않은 눈이 허옇게 뒤집어지고 있었다. 또 거품이 입 밖으로 밀려나오고 있음이 보인다.
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왕승고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그의 등에다 손을 대었다.
천부신공으로 운용된 진기가 장강대하와 같이 금곡노야의 몸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노, 놈이 나를 허수아비로… 만들기 위해서 우잠을 시켜서 망혼지독(亡魂之毒)을 썼다… 그것은 사람을 백치로 만든… 크으윽!』
금곡노야는 전신을 떨면서 몸서리를 쳤다.
그제야 왕승고는 그의 상태를 알 수 있었다.
그가 입은 독상(毒傷)은 사람을 죽이는 독이 아니었다.
바보로 만드는,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것이라 뇌에 작용을 하게 되니 몸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어서 왕승고가 알아내지를 못했던 것이다.
『너, 너를 기다리기 위해서… 나는… 제남을 떠나지 못했… 못했…』
금곡노야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피가 흘렀다. 이제 그가 그렇게 괴로워하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을 백치로 만들려는 독기에 저항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몸에 번지는 독과는 차원이 달랐다. 신경을 갉아먹는… 사고(思考)의 능력을 앗아가는 무서운 것이라 아무리 무공이 놀랍다 해도 그것을 견뎌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웠다.
금곡노야는 새우처럼 구부린 채 한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떨고 있었다.
윤회(輪廻)!
문득 왕승고의 뇌리에 그 생각이 스쳐간다.
그의 모습은 정말 지난날 그의 사부였던 한호국과 너무도 흡사했다.
심지어 그가 당했던 상황까지도… 한호국이 머리를 다치고 금곡노야가 독에 당한 것이라는 것을 제외한다면 너무도 같았다.
그런 고통을 견디며 대체 그는 무엇 때문에 왕승고를 기다린 것일까.
왕승고는 진기를 도인하여 그의 내부를 끊임없이 다스렸고 금곡노야는 조금씩 고통에서 벗어나고 있는 듯하였다.
『후우우…』
이윽고 금곡노야가 길게 숨을 불어내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추한 모습을 보였구나』
금곡노야는 일그러진 웃음을 보였다.
『노야…』
금곡노야가 왕승고의 손을 잡았다.
『말할 것 없다. 응보(應報)를 받고 있는 것이겠지. 내가 저지른 만큼… 하지만 해야 할 일을 두고 그대로 쓰러질 수는 없었다』
깡마른 손으로 왕승고의 손을 쓰다듬으며 금곡노야는 말했다.
『네가 아니면 누구도 놈을 막을 수 없다!』
의혹의 빛이 왕승고의 눈에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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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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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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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잘보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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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싸,쵝오 항상 감사~♡♥♡~
감사합니다.잘 봤습니다.
즐감~~^*^
고맙습니다
노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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