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속의 인물
오종락
존경하는 인물들이 얼굴을 맞대고 고이 잠들어 있다. 그곳은 바로 나의 지갑 속. 그 모습이 예전과 달리 새로운 관심으로 다가온다. 그 까닭은 아마 얼마 전에 읽은 『퇴계선생일대기』의 영향 때문인지 모른다.
각 지폐 단위마다 퇴계 선생을 비롯하여 훌륭한 인물의 초상을 새겨 놓은 까닭이 과연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그건 아마 그분들의 훌륭한 가르침과 고마움을 평소에도 잊지 말고 되새겨 보라는 뜻이 아닐까.
존경해야 할 인물의 초상을 일상에서 늘 마주하면서도 무심했던 나였다. 단순히 금전거래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데 그쳤기 때문이다. 특히 액면 가치에만 치중한 것 같아 송구한 마음이 앞선다. 비록 천원권이라 할지라도 단순히 액면가만 봐서는 안 됨을 깨닫게 된 건 얼마 전의 일이다. 미국 화폐 1달러에는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초상이 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걸까. 지폐의 초상과 액면 가치는 분리해서 생각해야 함을 잘 말해 주는 게 아닐까. 지폐 한 장을 마주할 때도 액면가에 한정하여 봐서는 안될 것이다. 지폐 한 장은 초상 주인공의 정신과 사상 등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그릇과 같은 것이 아닐까. 천원권 한 장 속에는 수천만 냥을 매겨도 부족한 퇴계 선생의 깊은 사상과 정신세계가 그대로 녹아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사람은 가도 그분의 흔적과 정신은 남는 법. 선생의 고결한 숨결은 500년 긴 세월을 무색하게 한다. 오늘날까지 곳곳에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그의 정신세계와 생활 태도는 하나같이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그럼에도 항상 몸에 지닌 지갑 속에서 울려 나오는 그의 숨결을 눈치 채지 못했다. 무척 아둔한 나는 선생의 훌륭한 가르침의 기회를 놓치고 살아온 게 아닌가 싶다.
선생의 사상과 인품을 필설로 모두 다 형언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퇴계선생일대기』의 저자는 책 제목 위에 ‘가을하늘 밝은 달처럼’ 이란 소제목을 달아 놓았다. 책이 선생을 이해하는데 주석註釋이라는 의미 같기도 하다. 내겐 언뜻 선생의 인품을 나타내는 의미로 다가온다. 한밤중에 길을 환희 밝혀 주는 달님 같은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금 덧붙이면 매화나무 가지 사이로 높이 떠서 사계절 변함없이 온 세상을 환희 비추는 보름달이라 하고 싶다.
흔히들 인품의 크고 넓음을 ‘인향 만리’로 표현하기도 한다. 선생은 고결한 인품에다 심오한 사상까지 겸비한 분이다. 그러니 ‘퇴계사상 수억 만리’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웃 일본, 중국, 대만 등 아시아 국가들뿐만 아니라 미국과 유럽의 학자들까지 그의 사상을 연구하고 본받고자 한다니, 어찌 온 세상을 비추는 환한 보름달 같은 분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인품이나 학덕에 관해선 누구나 조금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 그의 심오한 사상과 인간적인 면모를 자세히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리라.
퇴계 선생 수양론의 두 축은 심(心)과 경(敬)으로 이루어져 있다. 심(心)은 수양이 이루어지는 근본 바탕이요, 경(敬)은 수양을 실천하는 방법이다. 퇴계 선생의 학문적 관심은 항상 인간의 도덕적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수양론으로 귀결되고 있다. 경(敬)이야말로 퇴계 사상의 핵심이다. 퇴계 선생이 존경받는 이유도 이러한 경(敬)의 태도를 일생 동안 몸소 실천한 인격자의 모범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살아오면서 평소 그가 남긴 편지 글의 내용을 보면 자상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임을 느낄 수 있다. 아랫사람과 격의 없이 소통하며 마음을 전하는 일에는 소홀함이 없었다. 형제나 자식 및 조카들과 진솔하게 털어놓으며 주고받은 편지 글에서는 따듯한 인간애가 느껴지며 진한 감동을 주고 있다. 아랫사람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경우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고 작은 답례라도 하며 고마움을 전하는 모습은 참으로 본받아할 대목이다.
모든 사람들을 하나같이 존경과 사랑으로 대하는 생활태도는 동서양을 넘어 그 누구도 그렇게 살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성덕군자라는 칭호까지 얻었는지 모른다. 그럼에도 가족들의 입단속이나 유가의 법도에 대한 가르침은 매우 엄격하였다.
가정 형편은 그리 넉넉한 편은 아니었고 평소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다. 집안의 대소사가 쉬이 이루어지지 않을 땐 모두 자신의 잘못이며 죄라고 여겼다. 남을 탓하기 좋아하고 책임을 회피하려는 사고가 팽배한 오늘날 선생의 사고방식과 생활태도는 크게 본받아야 할 모습이 아닌가 한다.
자신을 낮추고 남을 높이는 경(敬)사상을 비롯해 인성중심의 인간교육,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는 평등사상은 오늘날까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퇴계학 가운데 주목받고 있는 평등, 배려, 합리성, 청렴 등의 철학은 오늘날까지 큰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온갖 반칙과 부조리가 만연한 혼탁한 이 시대에 선생의 가르침은 더욱 빛을 발한다.
지갑을 열다 눈에 들어온 초상을 통해 얻게 된 작은 깨달음! 이건 선생의 거룩한 영혼이 아직 곳곳에 존재하고 있음이 아니던가. 그 순간 ‘진작 천원권에 새겨진 주인공의 진면목을 살펴보고 본보기로 삼을 걸’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그러했다면, 내 인생의 내면도 보다 알찬 결실로 인생 후반기를 맞이했을 터. 인생도 이젠 가을 절기인지라 더욱 아쉬움이 남는다.
남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세상이 그리운 세태다. 선생의 가르침을 십 분의 일이라도 실천하는 그런 세상을 꿈꿔 본다. 사람 냄새 풍기며 살맛나는 세상도 바로 이 세상 안에 존재할 터. 한 순간 깨닫고 실천만 따른다면 조금씩 변화를 기대할 수 있으리라.
늦은 밤 중천에 뜬 가을 달에서 선생의 얼굴을 그려본다. 달빛에 실려오는 선생의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떠올려 보며. 먼저 이런 가르침을 주시지 않을까. “염치와 분수를 알아야 하며, 무엇보다 인간성을 회복해야만 참된 인간세상이 되느니라.”라고. 밝은 가을 달빛은 묵묵히 선생의 가르침을 대신 전해주고 있는 듯하다.
감사 변색렌즈
오종락
그윽한 커피 향이 아침부터 후각에다 먼저 인사를 건넨다. 그 향내의 마력에 이끌렸는지 금세 귀 둘레 같은 커피잔을 살그머니 훑으며 잡는다. 손끝에 전해오는 따스한 온기가 오늘따라 감사한 마음을 자아낸다. 커피를 한 모금 천천히 삼키자 어디선가 행복감도 잔잔히 밀려온다. 순간, 이런 느낌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며 어디서 오는 것인지 궁금했다. 검붉고 따스한 커피 속에 감사와 행복도 녹아 몰래 숨어 있었단 말인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난 그동안 왜, ‘이런 소소한 감사함과 행복감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지!’ 하는 생각이 언뜻언뜻 스쳐 지나간다. 커피를 한 모금씩 천천히 음미하는 동안 머릿속은 그 원인을 찾느라 분주하다.
커피가 절반쯤 줄어들 즈음, 아~, 내 눈엔 아직 ‘감사’ 거리를 발견하는 ‘감사 변색렌즈’를 착용하지 않았음을 느끼게 된다. 이는 결국 내 가슴속엔 ‘감사’라는 씨앗이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 원인인 듯했다.
얼마 전부터 나의 이런 무딘 감각도 조금씩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계기가 된 것은 낙엽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저녁 귀갓길에 동네서점에 들렀다. 시집과 에세이를 뒤졌는데 감사의 내용이 담긴 글들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그 글들을 몇 번이나 집중하여 읽자, 하나의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내 눈에도 ‘감사’ 거리를 발견하는 ‘감사 변색렌즈’가 생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마음 속의 렌즈는 내 마음에 따라 색깔이 변했다. 그 후부터는 감사할 일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일상에서도 점차 감사할 일들이 참 많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감사 변색렌즈’로 사물을 바라보게 되니, 작은 것도 감사하게 생각되고 세상도 점차 달리 보이기 시작했다.
이런 감사함과 행복함을 느끼는 에너지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착한 에너지이다. 모든 사람에게 골고루 부여된 조물주의 선물 같은 것이 아닐까. 그 에너지는 누구에게나 무궁무진하며 총량이 한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주 평범한 에너지이며 제때 활용하지 않으면 그대로 사라지고 만다. 순간순간 존재하며 개인 소유물과는 달라서 한 곳에 오랫동안 머물러 있지 않으므로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되는 그런 에너지이다.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이 에너지는 느끼는 자의 몫이며 그가 바로 주인이 되는 셈이다.
나의 감사와 행복에 대한 농사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아직 완전 초보 농사꾼 수준이다. 유용한 에너지를 잘 활용하지 못하고 아까운 세월만 흘려보낸 게 아닌가. 뒤늦은 후회가 갈바람처럼 몰려온다. 내 인생도 이제 가을 절기라 더욱 아쉽게 느껴진다. 하지만 뒤늦게라도 노후에 힘이 될 새로운 에너지를 발견한 것 같아 위안이 된다.
지난달엔 마음속에다 ‘감사’ 씨앗을 심기 위한 작은 시도도 해보았다. 카카오톡 갤러리 ‘상태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설정했다. “얼굴엔 미소, 가슴엔 사랑, 작은 일에도 늘 감사하며 살자!”라고. 실천을 위한 작은 다짐이었다.
이런 작은 노력과 ‘감사 변색렌즈’를 착용한 덕분인지, 이제 나의 눈길도 점점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 성에 차지 않은 일도 너그럽게 이해하며 좋게 보게 된다. 가급적 초점을 ‘불평’보다는 ‘감사’ 방향 쪽으로 자꾸 움직이려는 나의 마음 속 그림자를 본다.
가령 지하철에서 젊은이들이 좌석을 모두 차지하고 앉아 조잘조잘거려도 그저 즐거운 새소리 마냥 여긴다. 좌석이 없어 서서 가는 시간은 다리 근력 강화 시간으로 활용하면 그리 힘도 들지 않고 감사한 시간이 된다. 또 고층 아파트의 특성상 승강기 대기 시간이 지루하고 짜증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이젠 이런 자투리 대기 시간을 가벼운 목 운동이나 발뒤꿈치를 들고 종아리 근력 운동 시간으로 활용한다. 그러면 지루함도 사라지고 금세 승강기 문이 활짝 열리며 반긴다.생각과 마음을 좋은 방향으로 맞추니, 기다리는 시간조차도 감사한 시간이 되어 내게 화답하는 듯하다.
내일은 서점과 시장에 들러 감사의 씨앗을 추가로 구해 볼 요량이다. 서점에선 감사 글의 씨앗을, 시장에선 민들레 씨앗을 구입하여 마음의 텃밭과 화분에다 뿌려 보리라. 정성을 다해 부지런히 가꾸다 보면 무딘 나의 마음도 새로운 감각을 익히게 되리라. 내년 새봄이 오면 가슴속 텃밭에도 행복이 소담하게 피어나리라.
진한 커피 향이 후각, 미각을 즐겁게 하고 가슴까지 따뜻이 데워 주듯, 그런 향기처럼, 감사함이 짙게 배인 미소를 만나는 사람마다 전하고 싶다. 푸근한 미소를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도 하나의 작은 기쁨이며 서로에게 좋은 에너지로 작용하지 않을까. 삶이 아무리 힘들고 고달파도 감사할 일도 함께 깃들어 있다고 믿고 싶다. 그런 생각이 삶에 활력소가 되는 것이 아닐까. 감사는 행복을 만드는 에너지원으로 나를 늘 위로해주는 든든한 친구 같은 존재가 되리라.
내 맘속 감사의 씨앗이 밀알이 되어 두루두루 향내를 풍기는 넉넉한 한 그루의 행복 나무로 자라나길 고대한다.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하고 행복하다. ‘감사’가 주렁주렁 달린 그런 모습은 바로 ‘행복’ 열매가 가득 달려 있는 모습이 아닐까. 나도 이제 그런 모습을 닮아 갔으면 한다.
존 템플턴의 행복론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감사하는 삶은 우리가 원하는 일을 이루어 낼 수 있도록 도와준다.”라고 했다. 감사하는 마음의 힘은 눈에 띄지 않으나 이처럼 성공 에너지로 작용하는 모양이다.
작은 일에도 늘 감사함을 느끼는 ‘감사 변색렌즈’를 끼고 세상을 바라 보고자 한다. 그렇게 살다 보면 그 감사의 씨앗이 크나큰 행복의 열매로 화답할지 누가 아는가?
그물
오종락
조그만 그물 한 조각이 생명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 역할을 담당하고 있네. 이젠 이런 그물을 얼굴에다 내 걸지 않으면 이웃집이 먼저 싫어하고 외면하네. 버스와 지하철은 아예 태워 주지도 않고, 사람들이 많은 곳은 얼씬도 못하게 하는 세상으로 변했네. 이 그물로 인해 들숨날숨 균형이 깨지니 온몸이 속박된 기분이 들어 몹시 힘이 든다네. 그래도 하루하루 참고 살다보니, 이젠 제법 익숙해져 입마개도 나와 한몸이 되어 가고 있다네.
요즈음 외출 시, 가장 먼저 챙겨야 하는 필수 애장품 제1호가 '입마개'가 아닌가. 지갑이나 휴대폰보다 서열이 앞섰다. 이는 촘촘한 그물로 내 생명을 지키는 작은 수호천사이기 때문이다.
그물 하면 흔히들 물고기를 잡는 어망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농촌 출신인 나는 누렁이 암소의 입마개가 언뜻 떠오른다. 유년시절 누렁이를 몰고 들판을 지나갈 때면 먹성이 좋은 누렁이는 잠시도 쉬지 않고 길섶 농작물의 푸른 잎들을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외양간을 나서기 전 미리 입마개부터 채웠다. 입마개가 채워진 누렁이는 아무리 혀를 날름거려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사람들의 몰골이 들판을 걸어가는 누렁이 신세보다 더 딱한 처지로 변했다. 누렁이는 일시적으로 풀을 먹는 것만 제약을 받았으나 공기는 코로 마음껏 들어마실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숨 쉬는 것조차 제약을 받으며 촘촘한 그물을 얼굴에 내다 걸어야만 밖으로 외출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닌가. 이런 환경이다 보니 세상이 온통 그물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입마개는 보통 3중, 4중 입체구조로 되어 있다. KF80, KF94, KF99와 같이 숫자가 높은 입마개는 숨쉬기조차 몹시 거북하다. 3중, 4중 입체구조의 조밀한 그물 앞에선 바람이나 공기마저도 쉽게 넘나들지 못한다. 그러니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나 세균 등 미생물인들 어찌 쉽게 침투할 수 있겠는가.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이런 조그만 입마개. 난 ‘마법의 그물’이라 명명하고 싶다.
이처럼 조밀한 입마개 그물을 만든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그건 아마 그만큼 미세한 공격 대상으로부터 인체를 방어할 필요성이 커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점점 진화하여 호시탐탐 인간들을 노리는 바이러스의 공격으로부터 호흡기를 방어할 땐 입마개 그물은 간편하면서도 최고의 방패가 아닌가. 가장 기본적이고 손쉬운 방어 전략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를 착용 시 일상생활엔 많은 불편함이 따른다. 특히 온종일 말을 해야 하는 직장인들은 얼마나 힘이 들까. 생각만 해도 내 가슴마저 답답하다.
입마개에 의존하여 홀로 거리를 걸을 때면, 그물에 걸린 한 마리 물고기의 처지나 다름없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큰 도시는 거대한 그물에 덮여 모든 활동이 원활하지 못한 모습이다. 물고기가 그물 안에서 쉽게 움직일 수 없듯, 시민들의 일상도 각종 제약을 받으며 허우적대며 살아가고 있다.
지금 인류는 지구촌의 거대한 어망에 갇힌 물고기 형국으로 변한 듯하다. 이런 거대한 그물은 과연 누가 무엇 때문에 쳐 놓았을까. 아마 우주 대자연이 심한 몸살을 하는 과정에서 던진 그물이 아닐까. 그물은 그물을 치는 입장에선 분명 공격용 도구일 것이다. 대자연이 인간들을 꾸짖으며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참으로 야속한 세월이다. 이에 맞서 인간들도 살아남기 위해 또 다른 형태의 방어용 그물로 대응하고 있다. 방어를 해야 하는 인간의 입장에선 입마개는 방패와 같은 그물이다.
지금 거리의 사람들을 보라. 입마개를 얼굴에다 걸어 놓아야만 일단 안심하는 모습이다.행인들은 얼굴에 제각기 다른 형태의 입마개를 단단히 걸치고 남들을 경계하며 유해 환경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힘쓰고 있다.
성능이 좋은 입마개를 걸치고 외출할 때면, 묵언 수행자가 따로 없는 것 같다. 내가 바로 수행자임을 느낀다. 콧등에 걸린 그물이 나를 이끌며 구도자의 길로 안내하고 있는 듯. 그동안 말을 함부로 많이 한데 대한 과보를 받는 것 같기도 하고, 대기 환경을 오염시킨 것에 대해 질책하며 공기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는 것 같기도 하다. 보이지 않는 자연의 그물에 걸린 나. 이처럼 온갖 생각을 하며 참회의 순간에 젖어든다. 입마개에 가린 코와 입은 끊임없이 자유를 갈망하지만, 함부로 벗어날 수도 없는 처지이다.
그물에 걸린 물고기가 펄떡펄떡거리듯, 터벅터벅 무거운 발걸음을 옮긴다. 외출 시간도 단축하고 아파트 현관문을 들어선다. 물고기가 어부의 손에 의해 그물에서 수족관으로 옮겨지는 순간 몸을 퍼덕이며 활기를 찾듯, 수족관이나 다름없는 집안에 들어서는 순간, 입마개를 벗어던지며 후~하며 긴 한숨을 내신다. 비로소 안도감에 젖는다.
겸손에 관한 격언에는 “영안으로 온 세상을 보니 마귀가 온 땅에 그물을 편 것을 보고 두려워 탄식하기를 누가 능히 이 그물을 벗어나겠는가? 하니 한 천사가 대답하기를 겸손한 자 만이 능히 이 마귀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있다.” 고 대답했다. 또 안토니는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겸손이요.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것은 교만이다.”라고 했다.
작금의 상황은 인간들의 교만으로 인해 그물에 갇혀 과보를 받고 있는 모습 그 자체이다. 난생처음 접해보는 눈에 보이지 않는 촘촘한 그물의 출구를 찾기란 아직 오리무중이다. 이를 벗어나려면 겸손한 마음자세가 선행되어야 함을 잘 일깨워 주고 있다. 지구촌 사람들 모두가 겸손한 자세로 방어용 무기인 입마개를 제대로 착용한다면, 세상이 과연 어떻게 변할지를 상상해 본다. 코비드-19 바이러스도 우왕좌왕하다 그만 갈 길을 잃고 어느 순간 사라질지도 모른다.
코비드-19의 그물은 무척 질기고 촘촘하여 빠져나오기도 힘겹다. 과학자들은 물론 전 세계가 코비드-19 백신에 목을 매고 있다. 지금으로선 이 고난의 강을 건너는 징검다리는 안갯속이다. 대책은 어쩌면 단순한 것이 효과적인지 모른다. 매사 조심하는 겸손한 태도가 방역의 기본이요. 각자 입마개 그물로 코비드-19 바이러스를 잘 걸러 내는 게 최상의 비책이 아닐까.
첫댓글 2편의 글은 아직 미완성 입니다.
앞으로 30번 이상, 조탁을 하여 완성도를 높일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