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창 시절과 6·25
내 나이 10세 때 해방이 되었다. 해방은 실로 ‘도둑같이’ 찾아왔다.
누구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해방이 될 줄 몰랐다. 하지만 해방 후 더
이상 일제의 교육은 없어지고 우리를 괴롭혔던 일본 순사들도 사라
졌다. 수탈의 상징이었던 철도도 이제는 이동과 물류의 수단으로 제
자리를 찾았다. 그때는 세상이 정말 좋아질 것 같았다.
강경 중앙초등학교를 41회로 졸업하고 강경중학교로 진학을 하였
다. 한창을 공부해야 할 중3 때 6·25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것이 우
리 가정의 고난의 시작이었다. 해방의 기쁨을 누린 것도 잠시 뿐, 다
시 동족상잔이라는 비극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정말 우리세대와 우
리보다 먼저 태어난 선배들은 참 기구한 운명을 많이 경험하였다.
6·25때 우리는 농사를 크게 짓고 있어 부르조아로 몰려 핍박을 많
이 받았다. 인민군이 마을로 들어와서 온 동네가 공산당에게 장악을
당했다. 당시에는 돈 많은 집안에는 머슴들이 있었다. 세상이 갑자기
바뀌어 머슴들이 완장을 차고 행세를 하게 된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는 미리 고지를 받아 생활하였다. 농번기 때 쌀 한말
로 따지면 세 배를 가져갔다. 쌀 한말이 8kg, 25,000원을 받으면 세
번 일을 해야 했다. 8시간씩 일했다. 가을철에 일을 많이 할 때 세 번
일을 해준다. 빚을 내 쌀 한가마를 가져가면 다음에 두가마를 가져와
야 했다. 그것을 곱장이라 했다. 농촌사회가 대부분 그랬듯이 지주들
은 부자가 되고 농민들은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세상
이 뒤바뀌니까 입장이 바뀌게 된 것이었다. 간접적으로 부자들은 농
민을 착취했다하여 숙청대상으로 올랐던 것이다. 숙청 1호는 군인,
2호는 경찰. 3호는 공무원. 4호는 지역유지가 숙청대상이었다. 우리
가족도 지역유지 집안으로 숙청대상이었다. 전투와 인민재판에 죽
은 이들로 금강줄기에 시체가 즐비하였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어디 있겠는가? 한 마을에서 함께 농사를 지
으며 행복하게 살던 이웃 주민들 간에 갑자기 계급투쟁이니 뭐니 하
며 서로를 죽이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6·25는 정말 우리 민족의 비
극이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우리에게 주었다. 전쟁은 많은 것을 빼앗아 간다.
재산은 물론이요 목숨도 앗아가고 가족도 뿔뿔이 흩어놓았다.
나보다 한 살 더 많은 선배들은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다행이 나는
의용군 차출을 받지 않고 소년단 생활을 하였다. 복불복이라 하였던
가? 내가 일 년만 더 빨리 태어났어도 오늘까지 살아 있지 못할 수도
있었다. 우리 사촌형도 의용군으로 끌려가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고
문과 협박에 의해 의용군에 입대한 뒤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사촌형 가족도 좀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 마을이 빨치산들에게 장악
되자 부농들은 부르주아라 지탄을 받아 고문과 숙청을 받았다. 작은
아버님도 그 중에서 고문을 많이 당하여 고생을 많이 하셨다. 결국,
사촌형은 아버님을 고문하는 것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의용군에 입
대한 것이다. 사촌형이 입대한 이후 고문은 그쳤다. 하지만 입대한
사촌형의 사망으로 인해 작은 아버님은 자기로 인해 자녀를 잃었다
고 매우 자책하시다 50대에 한 많은 삶을 마감하셨다. 정말 한 집안
이 무너지는 것이 순간인 것 같다. 그때 그런 집들이 어디 우리뿐이
겠는가? 혹여, 전쟁을 낭만이나 게임 정도로 여기는 이들이 있다면
결코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좀 더 전쟁 이야기를 하면, 당시 공군력을 장악한 유엔군은 B-29 폭
격기로 엄청 폭격을 하였다. 전쟁은 군인뿐 아니라 민간인도 죽인다.
도시가 거의 절반이 파괴되었다. 강경도 예외는 아니었다. 우리가 살
던 곳이 읍내라서 폭격과 공산당의 핍박을 벗어나기 위해 함열에 계
신 막내 고모님댁으로 피난을 갔다. 외가도 20리 떨어진 성동면으로
피난을 갔다. 폭격의 공포와 공산당이 도시를 장악하였기 때문에 외
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비상식량을 가지고 밤에 몰래 탈출하였고
부모님이 심야에 집에 숨겨둔 양식을 가져다가 공급해 주셨다. 참으
로 잡히면 죽을 수 있는 위태위태한 순간이었다.
9·28 수복 때까지 우리 가족은 몇 개월간 고생을 하였다. 다행히
우리는 9·28 수복이후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1년부터는 폭격
으로 파괴된 집을 수리하고 방공호를 파고 생활하였다. 마을에 있던
빨치산들은 양촌 대둔산쪽으로 도망을 갔다. 남쪽에는 지리산으로
갔고 대둔산으로 후퇴한 것이다. 북으로 못간 공산군 잔당들과 지역
빨치산과 결합하여 수많은 국지전투가 발생하였다. 그들은 심야에
는 양식을 구하러 민가를 습격하였다. 그렇기에 치안이 매우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읍내에서는 자체 치안대를 조직하여 빨치산들
이 밤에 불시에 습격하여 양식을 탈취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복이
후 마을이 다시 국군 치하가 되어 그간 행세했던 좌익들은 우익에게
많이 죽기도 하였다. 도시 곳곳이 폐허가 되었고 총소리에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참담한 동족상잔의 비극을 내 어린 시절 목도하였다.
짧은 피난 생활을 마치고 수복 이후에는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계
속 학교를 다닐 수 있었다. 우리 이전에는 중학교가 6년제였다. 요즘
에도 중학교, 고등학교를 합쳐 ‘중등교육’이라 하였다. 이전에는 중
학교가 곧 6년이었고 그 이후에 대학에 진학하였으니 초등교육과정,
중등교육과정은 일제시대의 학제의 잔재인 것이다. 우리 일년 선배
들은 그랬다. 그러던 학제가 나 때부터 3년, 3년제가 시작되었다. 그
래서 나는 강경중학교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원래대로 하면 강경중
학교 4,5,6학년이 강경상고 1,2,3학년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당시 강경상고는 명문고등학교로 부상하
고 있었다. 취업률이 매우 좋았기 때문이다. 취업률로 학교성적을 매
기던 시절, 요즘 대학들과 비슷하였다. 진학반 셋, 취업반 하나. 경
쟁률이 3:1이었다. 강경, 부여, 서천 일대에서 강경상고를 진학하려
애썼다.
53년도에 길고 힘겨웠던 전쟁이 끝나고 휴전이 되었다. 전쟁 후에
살기가 보통 어려웠던 것이 아니었다. 정말, 4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이십년은 우리민족에이십년은 우리민족에 있어서 극도의 환란기였다.
폐허 속에 이불이 없어서 동네 사람들은 가마니를 덮고 잤다. 나는 그러한
극한 어려움 속에서도 상대적으로 괜찮게 지낼 수 있었다. 부모님의 생존역량 덕
분이었다. 종전 이후 강경은 원래대로 회복되었다.
전쟁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던비결은 바로 농업이었다. 농업은
복원력이 빠르다. 땅은 회복력이 좋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땅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지만 우리 집안은
농지가 있었기 때문에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어른
들은 아들과 땅에 대한 집착이 매우 강하였다. 부자 기준을 땅으로
평가하였다. 돌이켜 보면 다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장사를 하던 이
들이나 서울 등 대도시에 살았던 사람들의 생활은 매우 어려웠다. 파
괴된 도시를 재건하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학교도 피해가 있었
다. 강경국민학교가 지역 문화재였다. 강당에 폭탄이 떨어져서 파괴
되었다. 내가 다니던 붉은 벽돌 건물의 학교가 파괴된 모습이 기억난
다. 하여간 이렇게 어수선한 전후 상황 속에서 나는 55년에 강경상고
를 졸업하고 대학진학을 준비하게 되었다.
대학시절, 50년대 서울(제4회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