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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용 위임목사 주일 오전예배 설교
2020.1.12 - 마태복음의 말씀(2)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는가?
마태복음 3:11-17
작년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이 뭔지 아십니까? 세계적인 한류 가수인 방탄소년단, bts 도 아니고요, 예능계의 대통령인 유재석 요즘에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는데, 유산슬 그 분도 아닙니다. 칸느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고 지금 미국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에 유력한 기생충이라고 하는 영화도 아닙니다.
그런 유명한 것들을 다 제치고 작년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은 '팽수' 라고 하는 인형입니다. 팽수 보신 적 있으시죠?
팽수가 2019년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이유는 겉 모습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펭귄의 인형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하는 행동은 도리어 어른들이 좋아하는 엉뚱하고, 소탈하고, 솔직하게 행동하는 모습에 모든 세대들이 좋아하는 캐릭터가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다른 인형의 캐릭터들과는 다르게 당당하고 거침이 없고 위계질서에 상관없이 돌직구를 날리는 그런 모습에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게 되었다 라고 평가합니다. 그래서 요즘 팽수의 어록이 유명한데, 팽수의 어록 중에 하나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이겁니다.
'다 잘할 수는 없어요. 하나 잘 못한다고 너무 속상해하지 마세요. 잘하는 게 분명히 있을 겁니다. 그걸 더 잘하면 되요,'
제가 팽수를 흉내낸 건데 아무도 못 알아보시더라고요 (좌중 웃음).
새해 2주가 지났습니다. 잘 안되고 잘못한 것에 여러분, 너무 속상해 하지 마십시오. 더 열심히 훈련하고, 또 연습한다면 잘 되리라 믿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이제 2주 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잘못한 것을 너무 자책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고요, 지금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찾아서 기쁨 가운데 한해를 출발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옆에 있는 분과 이렇게 인사를 나누면 좋겠습니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당신은 특별합니다. 여러분이 못하는 것에 집중하지 마시고, 여러분,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그 재능을 더 찾아내서, 한 주 더욱더 기쁨과 복된 시작을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마태복음의 말씀 두 번째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는가'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눠보고자 합니다.
007 제임스본드 영화를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영국의 스파이 첩보 영화로 1962 년도부터 영화가 제작되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로 나오고 있는 유명한 것입니다. 그런데 할리우드에서 이 007 영국에서 제작하는 007 제임스 본드 영화를 쫓아가기 위해서 본 시리즈 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본 아이덴티티, 본 슈프리머시, 본 얼티메이텀 이라고 하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근데 이 세개의 영화는 우리 기독교인들이 유심히 지켜 볼만한 영화의 한 내용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영화의 주인공은 제이슨 본이라고 합니다. 영국의 007 제임스본드 영화를 대항하려고 이 헐리우드 영화에서도 주인공 이름을 제임스본드 라는 이름과 비슷한 '제이슨 본' 이라고 지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따서 본 시리즈 라고 하는데 바로 제이슨 본은 과거의 미국 특수정보요원이었습니다.
이 제이슨 본이 바다 또는 강물, 욕조에 빠지고 나서 그곳에서 건져내지면, 새로운 존재가 되어서 그 이후에 어떤 특별한 일들을 에피소드로 만들어내는 것이 영화에 나옵니다. 1편인 '본 아이덴티티' 라는 영화에서는 바다에 빠졌던 주인공이 건짐을 받고, 이후에 잃어버린 기억력을 찾아내는 영화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2 편, '본 슈프리머시' 에서는 총을 맞은 애인과 함께 강물에 빠졌다가, 그곳에서 나온 이후에 180도 다른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가 영화에 나옵니다. 3편도 매우 유사합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대강 이 영화의 이야기가 어떤 성경의 이야기와 연결되는지 감이 오시죠? 오겠습니까?
다름아닌 세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물로 세례를 받으신 것과 연결이 됩니다. 더 나아가 본 시리즈 영화에서도 도입부에 항상 주인공 제이슨 본은 물에 빠졌다가 나오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고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물이라고 하는 상징이 변화, 거듭남, 중생, 새롭게 됨을 보여주고, 이처럼 세상의 소설이나 영화는 성경의 오늘 본문에서 물로 세례를 주는 종교적인 이야기를 이미지와 상징으로 사용해서 영화를 만들고 스토리를 만들어내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많은 그 서양의 영화나 소설을 보면 이 물이 이런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전의 존재가 죽고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상징, 심볼로 자주 사용된다는 것인데, 성경의 것들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 본문도 바로 이런 물이 우리 인간을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만드는 상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3장 16절 앞부분에 보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라고 증거하는데 여기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곧 죄 많은 사람의 죄를 씻어 주고 깨끗게 하는 상징을 보여줍니다. 곧 첫 번째 세례의 의미는 죄 씻음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두 번째는 골로새서 2장 12절에서 말씀에 보면 물을 통해 우리 인간이 예수님처럼 다시 죽고, 다시 살게 되었다 라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런 영적 세례에 참여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례의 두 번째 그리고 하나 더 말씀드리면 고린도전서 12장 12절 13절 말씀을 보면,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목사가 성도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 세례 받은 자를 하나님의 자녀로 맞아주시고 그 하나님의 영적인 가족 공동체 한 일원으로 그를 삼아주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으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물로 행하는 세례가 죄사함을 위하고, 하나님의 자녀로 삼고자 하고,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라면,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자신에게 전혀 필요없는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다른 구체적인 의미를 차치하고서라도 종교적인 물의 의미가 이전의 존재가 죽고 새로운 존재가 탄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예수님이 세례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라는 것이지요. 죄사함의 필요가 없으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이미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이미 예수님께서 교회의 몸이십니다. 이 교회의 몸이신 분이 굳이 이 교회의 일원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전혀 이유가 없으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교회학교에선 이렇게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 안 받으셔도 되는데 세상 그리고 우리 인간에게 본을 보이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에 보시면, 하나님의 의에 의해서 세례 받으러 오신 예수님을 설명합니다. 먼저는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예배하는자 그리고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는 자로 그 성경의 예언을 확증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세례식은 하나님이 세우신 중요한 영적인 예식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우리 인간은 그 의식에 순종하고 참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완성할 수 있다 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학교 수준의 답입니다. 새가족 새신자들이 학습할 정도에 답변이지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는 이제 누가 숟가락에 밥을 떠서 반찬을 얹어준 밥을 먹어서는 안됩니다. 스스로 여러분이 숟가락을 뜨셔야 됩니다. 밥을 알아서 먹어야 합니다. 누가 이미 다 만들어 놓은 교리, 성경에 대한 판단, 이론에 대해, 예 알겠습니다 라고 떠먹여 주는 밥을 먹는 것, 그것은 이제 내려 놓으셔야 합니다.
직접 떠서, 직접 생각하고, 직접 고민하고, 직접 기도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답을 직접 찾아서 하나님의 말씀의 양식을 직접 떠먹는 자들이 되셔야 합니다. 그런 차원에서 저는 예수님을 예수님은 받지 않으셔도 되는 세례를 왜 받으셨습니까 라는 질문이 이번 한 주, 오늘 설교 25분, 30분 하는 설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번 한 주 여러분의 영성의 삶 가운데 계속 반문이 되고, 질문이 되고, 궁금하게 되는, 하나님의 질문이 되길 바랍니다.
설교자인 저는 여러분께 정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그저 여러분과 함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함께 읽고, 똑같이 고민을 하고, 똑같이 기도하고, 똑같은 마음으로 생각할 뿐입니다. 단지 저는 오늘 본문을 먼저 고민하고, 먼저 기도하고, 먼저 깊이 생각하여, 하나님께서 제게 깨닫게 해주신 여러가지 그 하나님의 답 가운데 하나를 여러분에게 나눌 뿐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제가 오늘 전하는 설교보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각자에게 주시는 또 다른 하나님의 해석, 또 다른 하나님의 메시지, 또 다른 하나님의 생각, 또 하나님의 진리에 더 가깝게 있으리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이 이 부족한 자의 설교를 듣고 그보다 더욱 제 설교 내용보다 더 하나님의 진리에 가까이 가게되는 것을 볼 때 설교자인 저는 기쁘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설교자는 말씀의 도구입니다. 메신저일 뿐입니다. 설교로 제 명성, 제 얼굴, 제 이름이 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이, 더욱더 하나님 가까이 가는 것에 설교자는 더 기뻐해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몇주 동안 먼저 이 말씀을 읽고 묵상 가운데 예수님은 받을 필요가 없는 왜 세례를 받으셨을가에 대한 영적 물음에 하나님이 주신, 제게 주신 그 답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 저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저에게 뜻을 주셨습니다. 세례 받을 수 있는 수많은 이유보다 그 세례 그 자체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세례 받을 이유를 따지면 예수님은 절대로 세례를 받을 이유가 없으십니다. 죄인도 아니시고요, 거듭날 대상도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독생자이신데 세례받고 하나님의 가족이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셨다면, 그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이유를 넘어 그 세례의 중요한 영적인 가치를 예수님이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알베르트 까뮈는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어떤 것을 위해 살아갈 가치가 있다면, 또한 그것을 위해 죽을 가치도 있다.'
제가 중보기도, 성경공부를 가르칠 때 중보기도를 왜 하는가를 생각할때, 믿는 자들은 해야 하니까, 신앙이니까, 좋은 것이니까, 예수님이 하라고 명령하셨으니까 라는 이유로 중보기도 하면 안된다 라고 항상 가르칩니다. 그러면서 항상 이 구절을 함께 읽고 결단합니다.
출애굽기 32장 31절에서 32절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백성들이 자신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버려 주옵소서."
모세는 형식적으로 겉으로만 중보 기도하는 자가 아니었습니다. 목숨을 걸고, 생명을 걸고, 32절에 말씀대로 내 이름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져도 좋습니다. 대신에 내가 중보기도 한 그 백성들을 구원해 주십시오 라는 절실함과 간절함으로 중보기도 했습니다.
여러분 그것이 진정한 중보기도 입니다. 왜 모세가 그렇게 기도했습니까? 그는 중보기도의 영원한 가치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숨을 내놓고 중보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세례를 받아야 할 이유가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받으셨다면 그 안에는 분명한 영적인 가치를 찾아내신 것입니다.
그것이 뭘까? 그것은 십자가의 가치를 더 분명하게 하는 것이 바로 세례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공생애의 첫 단추를, 세례받는 것으로 시작하시면서, 이미 공생애의 바로 마지막에 있는 십자가를 생각하십니다. 예수님의 세례받는 장면과 또한 예수님께서 마지막에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그 장면을 다 같이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는 새로운 생명이 재 탄생함을 의미하죠. 십자가는 그 생명의 마지막 죽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그 세례 가운데 우리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하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늘에서 문이 열리고 비둘기가 내려와 하늘의 소리를 들려줍니다.
17절에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그런데 여러분 이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애가 마지막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의 어떤 음성을 듣게 합니까?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둘기가 임재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가 기뻐하는 자라' 라고 분명히 세례받을때, 새로운 생명이 다시 태어날 때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는데, 마지막에 그 십자가 위에서는 하나님이 어떻게 얘기하십니까?
하나님은 침묵하십니다. 아무 얘기도 안하십니다. 여러분, 아이러니하지 않으십니까? 진짜 하나님의 나라를 더 확장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세례의 때가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십자가 위에 예수님이 달리실 때, 진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야 하는데, 그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둘기가 임재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들이 뭐하고 있는 거냐?' 라는 음성만 들리면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었을텐데,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은 예수의 세례식에만 말씀하시고 십자가 위에서는 아무 말씀도 안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 사실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진정한 세례의 의미와 가치였다 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세례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더욱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신앙이 최대의 감격, 처음 주를 만났을 때의 그 초심의 감동, 그때 받은 영적인 체험, 신비로움으로 여러분의 신앙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매순간 나타나는 여러분 인생의 매번 나타나는 그 십자가의 경험들 속에서 우리는 매번 쓰러지고, 넘어지고, 포기하는 인생이 되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생의 십자가를 경험할 때마다 하나님은 늘 침묵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만약에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지 않으셨다면 그리고 그때 하늘의 문이 열리지 아니하고 성령 비둘기도 내려오지 아니하였더라면, 또한 그 때 하나님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라고 말하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의 침묵으로 일관된 그 십자가는 허무와 공허 그 자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 가치와 의미가 허무와 공허가 절대로 아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받지 않아도 될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례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아무 말씀 하지 않으시는 것이 하나님 없음이 아니라, 하나님이 침묵하시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의 세례 때 하나님이 함께 하신 것을 그의 음성으로, 비둘기로, 하늘의 문이 열리는 것으로 확증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잘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처럼 여러분도 자주 하늘의 문이 열리고, 기도할 때마다 비둘기가 내려오고, 천사를 보고,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면 그런 영적 체험이 계속 반복된다면 그분 신앙 참으로 좋다 라고 얘기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런 분들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좋은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의 문이 열리고, 성령의 비둘기가 성령의 비둘기 임재가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음성까지 듣게 되는 신비와 특별함이 있었지만, 여러분 아시는 것처럼 그 이후로는 이러한 특별함과 신비로움은 반복되지 않습니다.
세례받은 이후에 40일 동안 예수님은 광야에 나가기도 하셨지만 예수님의 세례처럼 비둘기는 나오지 않았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공생애를 살아갈 때도 세례받을때 같은 특별한 현상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 이 잔을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라고 그렇게 간절히 예수님이 기도하셨는데, 하나님은 침묵하셨습니다. 하늘의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았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처절하게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그렇게 외쳤는데도, 우리 주님은 침묵하셨습니다. 그럼 하나님이 없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하나님은 예수님의 수세 때에 항상 함께 계신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니 그 이전부터 주님은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 확신 때문에 십자가 위에서 하나님은 침묵하셨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침묵하신 것이지 없는 것이다 라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세례 때 임하신 그 하나님을 우리 예수님은 끝까지 기억하셨습니다.
저는 모태 신앙인으로 어린 시절에 제 기억이 생기기 전에 유아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세례를 통해 어떤 신앙적인 체험, 신비로운 영적인 경험, 이런 거를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실 제가 설교의 힘을 얻으려면 중간에 예수를 믿고, 정말 특별한 체험 가운데 세례도 받고, 안수도 받으면서 저는 이런 신비적인 체험했습니다 라고 설교할 수 있어야 더 설득력이 있고 이해를 더 도울 수 있을 텐데, 하나님은 그런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목사 안수를 중간에 받았습니다. 그래서 목사 안수를 준비할 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요번 안수 받을 때 예수님 세례받을 때처럼 뭔가 되게 특별한 걸 보여주세요.' '비둘기도 좋습니다. 음성도 좋습니다.' 그렇게 안수식을 준비했습니다.
저는 2005년도에 목사안수를 받았습니다. 사실 목사안수를 받을 때 여러분이 생각하기에는 그 안수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아주 결단에 차서 나는 참 특별해 나는 정말 특별한 부름을 받았어 라고 확신하면서 목사 안수식을 준비하는 줄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다른 목사님들은 모르겠는데, 저는 그 안수식을 앞두고 굉장히 고민에 빠졌습니다.
내가 목회자로서 소명이 있는가? 물론 10년 가까이 공부를 해봤지만 정말 안수식을 앞두고 내가 목회자의 소명자로서 서있는 가를 굉장히 고민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니 목사님 어떻게 설교 가운데 목사안수식을 앞두고 그런 고민을 얘기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니까, 제가 솔직하게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가 안수를 앞두고 있을 때, 박지성 이란 선수가 영국 프로축구에 막 진출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경기하는 건 항상 새벽 세시, 네시에 방송을 합니다. 거의 끝날 때쯤 새벽 기도를 가야하는데, 고민에 빠집니다. 저는 다음 주에 목사 안수를 받는데, 새벽 기도를 갈 것인지 박지성 선수의 축구 경기를 볼 것인지 또 청년들 하고 밖에 나가서 식사를 합니다.
저한테 목사님, 목사님, 이리로 오세요. 이쪽 자리로 오세요 하면 제가 우리 청년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야, 밖에 나와서는 부장님이라고 불러 줘 (좌중 웃음).
제게는 목사라는 타이틀이 너무나 불편하고 어색했습니다. 그런데 목사 안수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그런 고민을 하니까, 한 선배 목사님이 안수 받기 전에 금식을 좀 해봐라, 그리고 성경을 일독해봐라 라고 권면해주면서, 그러면 안수식 때에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일주일 금식 했습니다. 성경은 전체를 다 읽지 못하고, 요한복음을 6번 통독했습니다. 그리고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가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릅니다. 금식도 하고, 성경도 여러번 읽었는데, 목사 안수식 때 예수님의 세례받을 때처럼 목사님들이 손을 얹고, 저희 아버님도 손을 얹고서 기도하셨는데, 그러면 하늘의 문이 열리고, 비둘기가 내려와서 너는 내 사랑하는 종이다 너의 목회를 내가 인도하겠다 이런 음성을 들으면 좋겠는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느낌도 받지 못했습니다.
옆에 같은 다른 목사님이 여자 목사님이 안수를 받았는데, 그분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안수식을 받았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왜 나는 저런 감동과 감격이 없지? 혹시 내가 좀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 바로 겁이나기도 했습니다. 소명없는 위선자의 목회자가 되는 것이 아닌가? 안수식 때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야 되지않을까?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습니다.
실망스럽고 한편으론 두렵고 또 다른 마음으로 하나님이 원망스러웠습니다. 안수 받을 때 신비적 체험을 주시면, 세례받는 성도들에게 여러분, 저는 안수 받을 때 이런 체험이 있습니다. 이런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런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세례받고, 안수 받을 때, 그렇게 여러분에게 특별한 것을 체험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 라고 설교할 수 있었을 텐데. 저는 자랑할게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딱 안수만 받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것이 제게는 오히려 목회하는 데 큰 자산이 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세례 받을 때, 안수 받을 때 그런 신비적 체험, 특별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하고 자랑하는 대신에,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하는 목회자가 됐습니다. 또한 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환상을 보았습니다 라고 자랑하는 것 대신에 더 겸손히 더 낮은 자로 하나님의 침묵을 기도하는 자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제게도 때론 예수님의 세례식 때처럼 영적인 체험, 종교적 체험이 저도 있습니다. 어린 시절 방언을 받았습니다. 신비롭게 예언을 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비둘기까지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의 임재를 뜨겁게 느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저는 그 특별한 체험들을 자랑하고 다녔습니다. 훈장처럼 사람들에게 보이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목회자로서 명을 받고 사명자의 길을 걸으면서 연단받고 훈련 받으며 닦아지고 또 닦아지고, 낮아지고 또 낮아지니 어떠한 영적 신비와 특별함을 경험하고 체험을 해도, 저는 항상 십자가로 돌아가는 신앙을 살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느끼는 것을 경험합니다. 때론 하나님께서 예언과 같은 말씀을 주실 때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놓지 않습니다.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저는 다시 십자가로 돌아갑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설교가 끝나면 461장 부릅이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입니다. 그 가사 첫구절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질 수 있나 주가 물어 보실 때 죽기까지 따르오리 성도 대답하였다'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실 것입니다. 콜링 하실 것입니다. 어디로 부르실까요? 요단강으로 환상과 비둘기가 내리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는 곳으로?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십자가로 부르실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자랑하며 살아가겠습니까? 오직 주님의 십자가 오직 주님의 십자가만을 사랑하며 예수로 죽고, 예수로 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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