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 아버지의 원수 ***
양과와 육무쌍은 풍대장장이가 정영의 사형(師兄)이란 소리를 듣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황약사의 제자라면 무공도 결코 약하지
않으리라 생각되었다. 뜻하지 않게 위기 중에 강력한 원조자를 만나자
그들은 기쁨을 금치 못했다.
이막수가 차갑게 말했다.
"너는 이미 사부에게 축출되었는데도 여전히 연연해 하고 있으니 어
찌 한심하지 않다 할 수 있겠느냐 ? 오늘 내가 어린 놈들 세 녀석과
바보 여자 하나를 처치할 것이니 너는 곁에서 구경이나 하여라."
풍묵풍이 느릿느릿 말했다.
"내 비록 무공을 익혔지만 평생토록 남들과 겨루어 본 적이 없소.
하물며 다리까지 잘린 이상 싸울래야 싸울 수 없는 것이지요."
"그래 ? 그것 참 잘된 일이군."
풍묵풍이 머리를 저으며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내 사매(師妹)의 털끝 하나도 건드리지 못하오. 게
다가 아분들은 사매의 친구들이니 당신이 함부로 대해선 안 되오."
이막수는 살기가 일어났다.
"너희 네 명이 함께 덤벼들어야 재미있겠는겄."
말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풍대장장이는 전혀 음색의 변화가 없이 쇠
를 내리치곤 몇 마디 하는 식으로 느긋하게 말했다.
"내 이미 사문을 떠난 지 삼십여 년이 지나 무예가 생소해졌으나 잘
생각해 보면 하나하나 생각이 나긴 하지."
이막수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반생 동안 강호를 유람하였지만, 너처럼 싸움에 임해 창을 갈
다가 급해지면 부처님을 찾는 사람은 일찌기 보지 했다. 풍묵풍 !
그대는 정말 일생 동안 남과 대결을 하지 않았느냐 !"
"나는 여태 남에게 죄를 짓지 않아 나를 괴롭히는 자가 없었으니 자
연 싸울 수가 없었지."
이막수가 차갑게 말했다.
"후훗, 황영감이 밥통을 제자로 거둬들여 세상의 웃음거리를 하나
만들었구나."
풍묵풍이 말했다.
"내 은사님께 욕된 말을 하지 마라."
"남들이 너를 그의 제자로 여기질 않는데 여전히 은사님을 찾다니.
사람들의 배꼽이 빠질까 두렵군."
풍묵풍이 여전히 철을 담금질해 대며 느릿느릿 말했다.
"내 일생은 혈혈단신으로, 이 세상에 은사님만이 나의 육친과 다름
없다. 그런데 내가 그를 존경치 않고 누구를 생각하겠는가 ? 사매,
은사님댁네 모두 안녕하시겠지 ?"
정영이 말했다.
"물론 안녕들 하세요."
풍묵풍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이막수는 그가 진정으로 그러는 것을 보자 속으로 생각했다.
(황영감은 일대의 종사답게 과연 놀라운 점이 있군. 제자가 이렇게
충 성스럽게 생각하도록 만들다니......)
이때 그 철조각이 점점 식어가 화로 속에 넣고 달구어야 했다. 그러
나 그는 화로 속에다 오른손에 들었던 철추를 집어넣었다. 이막수가
웃으며 말했다.
"대장장이 영감, 사부가 가르쳐 주신 무공을 좀 천천히 생각하시지.
그렇게 허둥거릴 필요가 없잖아."
풍묵풍은 묵묵히 시뻘건 화롯불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한참 있다가 왼쪽 어깻줄지를 지탱하고 있던 지팡이를 화로 속에다
집어넣었다. 양과와 육무쌍이 동시에 소리쳤다.
"어어. 그건 지팡이잖아요?"
정영도 고함을 질렀다.
"사형 !"
풍묵풍은 아랑곳없이 묵묵히 화롯불만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 지팡
이는 화롯불에도 타 버리지 않고 점점 붉게 변해 갔다. 알고보니 바로
철장이었다. 얼마가 더 지나자 철추도 빨갛게 달구어졌다. 그가 철추
손잡이와 지팡이를 움켜쥐었는데도 손이 멀쩡했다.
이막수는 경멸하는 마음에서 경계하는 마음으로 바뀌었다. 눈앞의
이 늙은 대장장이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갑자기 공격을 해 와 그의 암습에 당할까 겁이 나 이막수는 즉시 불진
을 들어 전신요혈을 보호하며 말했다.
"풍다장장이, 어서 나서라 !"
풍묵풍이 대답하며 나섰다. 재빠른 몸놀림이 전혀 불구자의 몸같지
않았다. 그는 빨갛게 달아오른 지팡이를 땅에 짚으며 말했다.
"이보시오. 제발 더 이상 은사님을 욕하지 말고 내 사매와 다투지
말아 주시오. 이 불쌍한 늙은 대장장이를 용서하시구랴 !"
이막수는 대단히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 싸움에 임박해서 용서해 달라는 것일까 ?)
"내가 너만은 용서해 주지. 만약 내가 두렵다면 깨끗하게 물러나 이
일에 끼여들지 마라."
풍묵풍이 이를 악물며 말했다.
"그렇다면 어디 나부터 처치해 봐라 !"
매우 흥분한 듯이 그는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이막수가 불진을 쳐들어 그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풍묵풍은 교묘하
게 급히 피해 냈다. 팔을 흔들었으나 감히 반격하지는 않았다. 이말수
가 연달아 3초를 공격했다. 그는 교묘한 신법으로 피했지만 끝내 반격
하지 않았다.
양과 등 세 사람은 옆에 서서 보면서 여자하면 뛰어들려고 했다. 보
아하니 이막수의 초식이 점점 조여져 왔으나 풍묵풍은 정말 남과 대결
한 적이 없는 것 같았다. 게다가 심성이 온화해 벌겋게 달아오른 철추
를 끝내 쳐내려가지 않았다. 양과가 생각해 보니 이 무림 이인(異人)
은 비록 고강한 무공을 지녔으나 싸우려는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를
자극시켜 화를 돋우기 위해 큰소리로 외쳤다.
"이막수, 너는 왜 도화도주를 불충불호하며 불의불인(不義不仁)하다
고 욕하는가 ?"
이막수가 생각했다.
(내가 언제 욕을 했담 ?)
그녀는 양과의 말을 묵살하고 묵묵히 계속 공격을 하려 했다. 양과
과 다시 외쳐 댔다.
"도화도주가 음탕하기 짝이 없으며 어린애들을 잡아갔다고 말하였는
데 네가 직접 보기라도 했느냐 ? 또 그가 친구를 사기치고 은인을 몰
라 봤다는데 정말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이냐 ? 너는 무슨 이유로 강호
에다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녀 황도주의 청렴한 이름에 먹칠을 한단
말이냐 ?"
정영은 깜짝 놀랐다. 풍묵풍도 이미 화가 치밀어올라 철추와 쇠지팡
이를 동시에 휘두르기 시작했다. 왼발로 서 있는 품이 금계독립(金鷄
獨立)식으로 마치 따에다 못을 박아 놓은 것허럼 안정되었다. 지팡이
와 추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이막수에게 달려들었다.
이막수는 그가 맹렬한 기세로 덤벼들자 감히 정면에서 맞서지를 못
하고 재빨리 피하며 반격을 하려 했다. 양과가 또 소리쳤다.
"이막수. 당신은 도화도주가 순사기꾼인 몰염치라고 욕을 해댔는데
지금 보니 너야말로 염치가 없구나 !"
풍묵풍은 들으면 들을수록 화가 뻗쳤다. 철추와 지팡이를 휘두르며
찔러 대는 기세가 사뭇 험악해졌다. 처음에는 그의 초식이 다소 어색
했으나 한바탕 겨루고 나자 점점 익숙해졌다.
두 사람의 공력은 본래 그리 차이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막수는
강호를 떠돌며 크고 작은 접전을 2백여 차례나 치러 견식이 그보다 백
배는 많았다. 이 30초가 지나자 이막수는 그의 무공이 매우 높다는 것
을 알았다. 그러나 경험이 너무 부족하였고 게다가 외발인지라 시간이
지나면 자연 그가 패할 것이었다. 과연 또 10여 합을 겨루고 나자 풍
묵풍은 노기가 사라지며 투지도 점차 없어졌다. 점점 힘들어 하는 것
같자 이막수는 좋아라 하며 불진을 들어 그의 가슴팍을 향해 휘둘렀
다.
풍축풍이 철추로 막아 냈다. 불진이 이미 스쳐 지나며 철추 끝을 감
아 쥐었다. 이것은 이막수가 남의 병기를 빼앗는 절묘한 초식으로, 한
번 잡아당기기만 하면 풍묵풍의 철추는 자기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
나 치지직, 하는 소리가 나러니 푸른 연기가 일어났다. 불진이 타는
고약한 냄새가 나더니 불진의 꼬리 부분이 완전히 타 버렸다.
이렇게 되가 이막수는 상대방의 병기를 빼앗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
의 병기를 잃게 되었다. 그러나 이막수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불진
을 내던지고서는 오독신장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이 장법은 비록 강한
것이지만 너무 가까운 거리에선시전하기가 불편했다. 이때 풍묵풍은
오른손에는 철추를, 왼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휙휙 춤추듯 대항했다.
그런데 이들 두 사람 사이에 파란 연기가 계속 피어올랐다. 이막수
가 걸친 도포자락이 벌겋게 달아오른 쇠지팡이에 닿아 조금씩조금씩
타 버렸던 것이다. 그녀는 매우 화가 났다. 분명히 승리를 얻을 수 있
으련만 이 대장장이가 무기에서 우세하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풍묵풍은 처음 대결하는 것이라 만약 계속 공격을 받았다면 곧 위축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유리한 입장에 서서 무기를 더욱 정교하게 격
출시켰다. 이막수가 그에게 일장을 가하려 했지만 하마터면 몇번이나
쇠지방이와 철추에 닿아 손바닥을 모두 델 뻔했다.
별안간 풍묵풍이 소리쳤다.
"아이고 맙소사. 이토록 체통이 없다니......"
하더니 외발로 펄쩍 뒤로 물러났다. 이막수는 순간 멍해졌다. 찬바람
이 불어오자 몸에 걸쳤던 의복 조각들이 날려갔다. 이막수의 팔, 어깻
죽지, 가슴, 허벅다리 등등 여러 군데의 피부가 노출되어 버렸다. 그
녀는 처녀의 몸으로 부끄러움을 감당해 내지 못하고선 몸을 돌려 도망
치려는 순간, 등뒤에서부터 도포 한 벌이 걸쳐졌다.
양과가 그녀의 꼴이 말이 아닌 것을 보고 즉시 외투를 벗어 내력을
심어 그녀의 등뒤로 던져 버린 것이다. 이 옷은 마치 사람처럼 그녀를
감싸안았다. 이막수는 황급히 옷을 챙겨 입었다. 평생 힘든 대전이 몇
번 있었으나 지금처럼 놀랍고 부끄러운 적은 일찌기 없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공격을 해야 할지 어떨지를 몰랐다. 순간 생각하
길,
(만약 재대결을 하여 이 옷마저 타 버리게 된다면 정말 낭패중의 낭
패지. 이번에는 그냥 꾹 참는 수 밖에......)
이막수는 고개를 끄덕여 양과에게 고마움을 표한 뒤, 고개를 돌려
풍묵풍에게 말했다.
"네가 이처럼 괴이한 무기를 사용하다니 과연 황영감의 제자답구나.
솔직히 말해서 네가 무공으로 나를 이길 성싶으냐 ? 황영감의 제자가
만약 정정당당히 나와 일대 일로 덤빈다면 이길 수 있단 말이냐 ?"
풍묵풍이 담담히 말했다.
"만약 그대가 무기를 잃지 않고 시간이 좀뎌 지났다면 나를 이길 수
있었겠지."
이막수가 오만스럽게 말했다.
"알기는 아는구나. 그럼 종이에다 도화도 문하생이 내게 패배를 인
정했다고 적어라."
풍묵풍이 고개를 숙여 한참을 생각하더니말했다.
"그렇게는 안 돼 ! 만약 진매곡육(陳梅曲陸) 네 분 사형이 이곳에
있었다면 어느 분이든 너보다는 강하다. 진사형,곡사형은 물론 말할
것도 없이 무공이 탁월하며, 매사자(梅師姉)도 여자이긴 해도 너 따위
가 결코 그녀를 이겨 내진 못할 것이다."
이막수가 냉소를 띠며 말했다.
"그 사람들이 증명해 낼 수 없는데 그걸 말해 무엇하랴 ? 황영감의
무공도 마찬가지지. 본래 그의 친딸인 곽부인의 신기를 좀 보려 했는
데.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이젠 됐다."
말을 마친 이막수는 몸을 돌려서 가려고 했다.
양과가 돌연 그녀를 불렀다.
"잠깐 !"
이막수가 수려한 눈을 올려보며 말했다.
"왜 !"
"도화도주의 무공이 이처럼 형편없다고 말한다면 그건 틀린 말이다.
그는 내게 옥소검법(玉簫劍法)을 일러 주어 당신의 불진무공을 파괴시
켜 버리도록 하셨으니까."
양과는 철사를 들어 땅에다 그림을 그려 가며 해설을 했다.
"자, 당신이 이렇게 앞에서 공격해 들어온다. 신속하고도 매섭게.
그러나 그가 장검을 이쪽에서 휘두르며 막아 낸다. 만약 당신이 정면
에서 혈맥을 찍으려 한다면 그는 호랑이 기세로 검자루를 돌려 당신의
견정혈(肩貞穴)을 찍어 버릴 것이다. 이 일초를 어떻게 보느냐 ?"
이 일초는 누가 보더라도 정말 정교했다. 정면불혈(正面拂穴)은 이
막수의 불진무공 중 절초의 하나인데, 양과가 말한 이 일초는 그녀를
제압하여 반격의 여지를 찾을 수 없게 해, 불진을 떨구곤 패배를 인정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초식이었다.
양과가 또 그림을 그리며 말했다.
"당신의 오독신장에 대해서도 도화도주는 방비책을 남겨 놓으셨지.
이렇게 일장을 펼쳐 올 때는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탄지공(彈指
功)을 전개해 손톱을 당신 손바닥의 중앙에 튕겨 버리면 당신 손바닥
은 상처를 입지 않을 수 없게 되지. 그는 단지 손톱을 튕겼을 뿐이므
로 당신 장법의 독물은 그의 몸에 조금도 닿지 않게 되는 것이지."
이어서 양과는 그녀의 무공을 제압할 수 있는 10여 초의 초식을 그
녀에게 말해 주었다.
이 말을 듣자 이막수의 얼굴빛이 흑색이 되었다. 그의 말 한마디 한
마디마다 모두 이치에 들어맞을 뿐만 아니라 방법 또한 교묘하기 이를
데 없어 확실히 자기가 당해 낼 수가 없다는 양과의 말을 인정하지 않
을 수가 없었다.
양과가 또 말했다.
"도화도주는 방약무도한 당신을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대종의 신
분이니 친히 너와 대결할 필요가 없어 이러한 방법들을 내게 전수하여
그를 대신해서 너를 수습하도록 명하셨지. 그러나 당신과 나의 사부와
의 동문의 정을 생각해서 당신께 이렇게 얘기하여 줌으로써 이후로는
그의 문하생을 보면 멀리 달아나 주길 바랄 따름이다 !"
이막수는 묵묵히 한참을 있다가 말했다.
"됐다. 이제 그만 해라 !"
하는 말을 마친 뒤 휙, 하고 달려가더니 잠시 후에 그녀의 신형은 이
미 산기슭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녀의 신법은 확실히 강호에서 보기
드물게 빨랐다.
사실 이러한 초식을 황약사가 양과에게 전수해 주긴 하였으나 적을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연마하려면 빨라도 5,6년은 걸리는 것이었다.
양과는 이렇게 말함으로써 직접 대결을 피했을 뿐만 아니라 그녀로 하
여금 겁을 집어먹게 만들어 이후로는 가볍게 황약사를 모욕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만든 셈이었다.
육무쌍은 이막수의 위세에 눌려 그녀의 말만 들어도 가슴이 쿵쿵 마
구 뛰었었다. 그녀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보자 휴,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바보야 ! 넌 정말 입심이 좋구나. 내 사부까지도 놀라 달아나게
만들다니."
전영은 자기가 짠 두루마기를 양과가 이막수에게 주어 버린 것을 보
았을 때, 그때는 상황이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여겼다. 그러나 양과는
속에 여전히 그 낡아빠진 옛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그것은 소용녀
가 짠 것으로, 그가 결코 그녀를 잊지 않고 있음이 역력했다. 정영은
가슴이 다소 아려 왔으나 전혀 내색은 하지 않았다. 곧바로 네 사람은
멍청이 여자를 보러 안으로 들어갔다.
막 문 안으로 들어서려는 순간 산기슭에서 인마 소리가 벼락처럼들
려와 네 사람이 동시에 뒤돌아보았다.
양과가 말했다.
"내 자세히 보고 오지."
말등에 뛰어올라 잽싸게 수 리를 달려 어느새 큰 길에 다달았다. 주
위를 살펴보니 흙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깃발들이 창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몽고병 대대가 파도 같은 기세로 남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양
과는 지금껏 대군이 움직이는 것을 본 적이 없어 이렇게 놀랄 만한 장
관을 보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넋이 빠졌다.
두 군관이 장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야, 이 멍청한 놈아 ! 뭘 보고 있느냐 ?"
이들이 달려들자 양과는 말머리를 돌려 달아났다. 두 소군관은 화살
을 재어 휘익, 하고 양과의 들을 쏘았다. 양과는 가볍게 손을 돌려 화
살을 잡아 쥐었다. 화살의 기세가 대단히 힘이 있고 빨라 만약 무공을
지니지 못하였다면 가슴이 뚫리며 즉사했을 일이었다. 두 소군관은 양
과의 무공이 대단한 것을 보자 말을 멈추고 더 이상 쫓아오지 않았다.
양과는 대장간에 돌아와 방금 본 일들을 이야기했다. 풍묵풍이 한숨
을 내쉬며 말했다.
"몽고 대군이 과연 남하했구나. 아아, 이제부터 우리 중국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을까 !"
양과가 말했다.
"몽고인들은 기마술과 궁술이 뛰어나 송나라 병사들이 당해 내기 어
렵겠어요. 이번 재난은 정말 매우 심각해요."
"양공자는 한참 나이인데 어째서 남쪽으로 내려가서 군에 들어가 외
적을 막지 않는가 ?"
양과가 잠시 주춤하다 말했다.
"나는 북상하여 내 사부를 찾아야 해요. 몽고군의 기세가 이처럼 대
단한데 내 한 사람의 힘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
풍묵풍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한 사람의 힘은 비록 미약하나 여럿의 힘은 강한 것이지. 사람들이
모두 다 공자 같은 생각을 한다면 어느 누가 나서서 이민족의 침입에
대항할 것인가 ?"
양과는 그의 말이 옳다고 느꼈으나 자신에게는 세상에서 소용녀를
찾는 일보다 더 긴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강호
를 전전하면서 관리들에게 굴욕을 당해 왔었다. 비록 몽고인들이 흉폭
스럽다고는 느꼈지만 송나라 황제 또한 결코 좋은 사람이라 여기지를
않았다. 양과는 그를 위해 나설 필요가 없다고 여겨 가볍게 웃기만 할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풍묵풍은 철추, 집게, 풍로 등을 한데 묶어 등에 짊어지고는 정영에
게 말했다.
"사매, 이후로 사부님을만나거든 제자 풍묵풍은 결코 사부님의 가
르침을 잊지 않고 있다고 전해 줘. 나는 오늘 몽고군에 투항해, 우리
강산을 침략해 온 한두 명의 몽고 대장을 어떻게든 척살하겠다. 사매,
부디 몸조심해야 돼 !"
말을 마친 풍묵풍은 쇠지팡이를 짚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가 버렸
다. 물론 양과에게는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양과는 육무쌍과 정영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뜻하지 않게 이곳에서 저런 이상한 사람을 알게 되다니......"
육무쌍도 양과와 같은 생각이었다.
"언니, 언니네 사부 문하생은 언니만 빼놓고모두 바보가 아니면 미
친 사람 같아요."
정영이 웃으며 담담히 말했다.
"사람이란 개성이 있으니 그것도 억지로 되는 게 아니겠지. 너는 그
가 미치광이 같다고 말하지만 그도 우리를 보고 무정한 사람들이라고
말하지 말란 법이 어디 있겠니 ? 다시 말해 우리들 자신들도 어리석
고 미치광이 같은 점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 !"
양과는 가슴이 뛰었다. 그녀를 보니 평소와 같은 표정이어서 그녀가
말한 저의를 짐작해 낼 수가 없었다.
돌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멍청이 여자가 의자에서 넘어져 떨어졌
다. 세 사람 모두 놀라 황급히 그녀를 바닥에 눕혔다. 그러나 그녀는
얼물이 벌써 벌겋게 달아올랐으며 두 눈에는 초점이 없었다. 오독신장
의 독성이 또 발작되는 것이었다. 즉시 그녀에게 약을 먹인 뒤, 양과
는 그녀의 혈도를 짚어 주었다. 그녀는 두려운 듯 그를 쳐다보았다.
얼굴에는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양형(兄), 나를 해치지 말아요. 나는 당신을 해......"
정영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언니, 두려워 말아요. 그는......"
양과는 돌연 그 생각이 다시 떠올랐다.
(지금 그녀는 정신이 희미한 상태이다. 이때 모든 사실을 실토하게
만들어야겠다.)
양과는 두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목을 움켜쥐며 엄한 목소리로 물었
다.
"누가 나를 해치려고 했지 ? 말하지 않으면 너를 죽일 테다."
"나, 나는 아니야 !"
"말을 안 해 ! 좋다, 죽여 줄 테다."
양과는 그녀의 목을 졸랐다. 그녀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정영과 육무쌍은 양과의 저의를 몰라 일제히 소리쳐 말렸다.
"양대협 !"
"바보야 !"
"그녀를 해치지 말아요 !"
"지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야 ?"
양과는 그녀들의 말에 조금도 개의치 않고 손에다 조금씩 힘을 주
며, 흉악스런 표정으로 이를 악물며 말했다.
"나는 양형(兄)의 원혼이다. 내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지 너는
아느냐 ?"
"알아요. 당신이 죽은 후, 까마귀들이 당신의 살을 파 먹었어요."
양과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그는 아버지가 비명에 돌아간 것만 알
았지 죽은 후에 시신이 어떻게 매장되었는지조차 몰랐었다. 까마귀밥
이 되었다고 하자 고함을 내질렀다.
"누가 나를 죽였느냐 ? 어서 말해라. 어서 !"
그녀의 음성이 점차 쉬어 갔다.
"당신 자신이 고모를 치자 고모의 몸에 독침이 있어 당신이 죽은 것
이지요."
양과가 고함을 질렀다.
"고모가 누구냐 ?"
그녀는 목이 눌려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곧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그녀는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댔다.
"고모가 고모지요."
"고모의 이름이 뭐냔 말이다 ?"
"나......, 난 몰라요. 제발 놔 줘요 !"
육무쌍은 사태가 험악해지자 양과의 팔을 잡아 끌었다. 양과는 이미
거의 미쳐 버릴 것 같은 상황인지라 육무쌍을 힘껏 밀쳐 버렸다. 육무
쌍은 그만 밀려나가 꽝, 하고 벽에 부딪쳤다. 정영은 이 광경을 보고
는 크게 놀라서 손발에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양과가 생각했다.
(오늘 만약 부친을 죽인 자의 이름을 알아내지 못한다면 내 즉시 피
를 토하고 죽을 것이다.)
잇달아 물어 댔다.
"고모의 성이 곡씨냐 ? 아니면 매씨냐 ?"
그는 그녀의 성이 곡씨라 생각해 그녀의 고모도 아마 곡씨라 여겼
다. 그렇다고 매초풍이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발버둥을 쳤다. 그녀는 양과보다 훨씬 오래 무공을 수련하였
지만 무공이 그를 따라가지 못했다. 게다가 손목의 혈도가 잡힌 몸이
라 단지 더듬더듬 말할 뿐이었다.
"고모를 찾아 따지세요. 나를......, 나를 괴롭히지 말고."
"고모는 어디에 사느냐 ?"
"나와 할아버지는 나왔어요 ! 그녀와 남편은 섬에 살아요."
양과는 이 말을 듣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떨리는 음성으로 다시 물
었다.
"고모가 네 할아버지에게 뭐라고 부르느냐 ?"
"아빠라 부르지, 뭐라고 불러요 ?"
양과의 얼굴이 흑빛이 되었다. 일을 그르치게 될까 봐 얼른 다시 물
었다.
"고모의 남편 이름이 곽정이 아니더냐, 그렇지 ?"
"난 잘 몰라요. 고모가 예전에 <곽오빠, 곽오빠> 하고 불렀어요."
그녀는 황용이 곽정을 부르는 소리를 흉내내었다. 돌연 그녀는 돼지
멱 따는 사리를 지르며 두 발을 마구 차 댔다.
"살려 줘, 살려 줘요. 제......"
이때 양과에게 더 이상 어떤 의심이 있을 수 있겠는가 ? 자신이 어
려서부터 홀로 되어 사람들에게 수모를 당했던 지난 일들이 순식간에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만약 아버지가 화를 당하지 않았다면 어머니도 애통해 하며 그렇게
일찍 돌아가시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도 그토록 고생을 하지 않
았을 것이고...... 도화도에 있을 당시 곽정 내외가 나를 자연스럽게
대하지 않았어. 어떤 때는 친절하게, 어떤 때는 피하려 들었다. 결코
무씨 형제들을 대하는 것처럼, 말할 때는 말하고 혼을 낼 때는 혼을
내지 않았어. 그러나 당시 나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지. 그들이
우리 아버지를 죽였기 때문에 마음속에 비밀을 지니고 있는지 내가 어
찌 알 수가 있었겠는가. 그들이 내게 무공을 전수해 주지 않고 전진교
로 보내 그런 굴욕을 당하게 한 것들도 이제 보니 모두 이유가 있었던
것이야.)
그는 너무나 흥분해 손발의 맥이 탁 풀렸다. 멍청이 여자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정영은 양과 옆으로 다가와 살며시 말하였다.
"바보 언니가 당신께 바보스럽게 행동하는 것은 당신도 알고 있지요
? 그녀가 상처를 입은 후 더욱 횡설수설하는 것이니 절대로 그녀의
말을 믿지 마세요."
그러나 그녀도 속으로는 멍청이 언니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고 믿고
있었다. 이러한 권고가 쓸데없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양과
를 살펴보니 격동과 비분이 뒤엉켜 좀처럼 참아 내기 힘든 모양이었
다.
정영의 몇 마디 말을 양과는 전혀 듣지 못했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그는 고함을 지르며 문을 박차고 나갔다. 몸을 날려 말에 올라타고 두
다리에 힘을 가하자 말은 질풍같이 내달았다. 양과를 태운 말은 순식
간에 10여 장 밖으로 달려나갔다. 등뒤에서 <바보야 !>, <양대형 !>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생
각하기를,
(복수를 하겠다 ! 복수를...... !)
한바탕 정신없이 내달려 양과는 한 시간여만에 수십리를 달렸다. 갑
자기 입술에 통증이 느껴져 손을 대어 보니 선혈이 낭자했다. 비분감
에 젖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다 보니 입술이 터져 버린 것이었
다.
(곽백모는 원래 내게 잘 대해 주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
기 내게 잘해 준 것은 모두 거짓이었어. 그러나 백부는, 곽백부
는...... !)
그는 마음속으로 곽정을 줄곧 존경해 왔었다. 곽정의 덕행과 무공이
매우 뛰어날 뿐만 아니라 자기에 대해서도 진심으로 따뜻하게 대한다
고 느꼈었다. 그러나 지금에서야 그 모든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간사스럽기가 황용보다 더하다고 느낄 뿐이
었다. 그의 가슴이 온통 찢어질 것만 같았다.
상심한 나머지 양과는 말에서 내려 큰길 가운데 앉아 머리를 쥐어뜯
으며 통곡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처럼 구슬피 우는 소리에는 세상사의
온갖 슬픔과 괴로움들이 뒤엉켜 있었고 하늘과 땅도 따라서 슬퍼할 것
같았다.
그는 부친의 얼굴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 남들이 이야기하는 것도
듣지 못했다. 어머니마저 절대로 말을 못 꺼내게 하곤 했었다. 그러나
어린 마음에 양과는 아버지야말로 팔방미인으로서 세상에서 가장 훌륭
한 사람으로 여겨왔다. 이렇게 훌륭한 영웅호걸이 곽정과 황용의 간계
에 빠져 죽게 되었다니......
그가 한바탕 울고 났을 때 갑자기 말발굽소리가 들리더니 북쪽에서
4필의 말이 달려왔다. 말 위에는 모두 몽고 무사가 타고 있었고 맨 앞
의 사람은 긴 창을 잡고 있었다. 창끝에는 두세 살 난 어린아이를 매
달고서 신나게 숫으며 달려왔다. 그 어린아이는 아진 죽지 않았는지
약하게 울음 소리를 내곤 했다.
네 명의 몽고 무사들은 양과가 길에 앉아 통곡을 하는 것을 보자 조
금은 이상스레 여겼다. 그러나 이렇게 다 떨어진 옷을 입은 한민족 소
년은 도저에 흔해ㅃ바진 일이라 조금도 유념하지 않았다.
"길을 비켜라."
한 명이 외치면서 창으로 그를 찌르려 했다.
양과는 마침 화가 나 있던 참이라 창끝을 잡아당겨 그 무사를 잡아
끌어 휙 돌려 버렸다. 그 무사는 수장 밖으로 날아가 머리가 부서지며
즉사했다. 나머지 세 명은 그만 겁을 집어먹고는 일제히 말을 돌려 도
망쳤다. 퍽,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어린아이가 길 위에 떨어졌다.
양과가 끌어안아 보니 한민족의 아이였다. 포동포동하게 살이 쪄 무
척 귀여웠다. 긴 창끝에 배를 찔려 금방 죽지는 않겠으나 치료하기에
는 이미 너무 늦은 상태였다. 조그마한 입술에서 아아아, 소리와 함께
<엄마>하고 가느다랗게 울부짖었다. 양과는 상심한 나머지 더욱 비통
에 젖었다. 다 죽어가는 어린아이를 끌어 안고 양과는 또 눈물을 흘렸
다. 아이가 고통을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을 본 양과는 가볍게 일장을
내려쳐 즉사시켜 버렸다. 양과는 비통한 심정으로 몽고병의 긴 창으로
땅을 파서 아이의 시신을 묻어 주려 했다.
10여 차례 파내려 갔을 때, 말발굽소리가 벼락치듯 들려오며 호각소
리와 함께 몽고병 대대가 몰려왔다. 양과는 왼손으로는 죽은 어린아이
를 끌어안고 오른손으로는 창을 잡고서 말에 올라탔다. 이 여윈 말은
원래 오랫동안 전쟁통을 누비고 다녔던 전마로, 진영을 보자 길게 울
음을 터뜨리며 몽고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양과는 창을 휘두르며 잇달아 네 놈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적병들이
계속 새까맣게 몰려들자 그는 즉시 말머리를 돌려 황망히 달아났다.
등뒤에서 화살이 불나방들처럼 날아들었다. 그는 총을 휘둘러 화살들
을 하나하나 모두 떨어뜨렸다. 야윈 말은 발걸음이 기이하게 빨라 순
식간에 추격병들을 멀리 떨구었다. 그러나 잠시도 안심할 수 없어 계
속 채찍을 휘둘러 황야를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날이 저물기 시작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잡초만
무성했다. 길이 끊긴 것이다. 피처럼 붉고 창망한 저녁 노을 속에 고
요한 정적만 있을 뿐 까마귀 한 마리, 참새 한 마리 눈에 띄지 않았
다.
그는 말에서 내렸다. 손에는 여전히 죽은 어린아이를 안고 있었다.
아기의 얼굴이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이 아이의 부모는 자기 생명처럼 이 애를 사랑했을 텐데. 아기가
죽은 것도 모르고 얼마나 애간장을 태우고 있을까. 이 흉악무도한 몽
고병들이 대거 남하하는 도중에 얼마나 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해쳤을
까 ?)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난감해졌다. 양과는 즉시 큰 나무 옆에 구덩이
를 파고 어린아이를 묻어 주었다. 다시 멍청이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이 아이는 죽었어도 내가 이렇듯 묻어 주었건만 나의 아버지는 까
마귀밥이 되었다니...... 아아, 너희들은 그를 죽여 놓고는 어째서 묻
어 주지도 않았단 말이냐. 악랄한 놈들 같으니 ! 아, 복수를 하지 않
으면 나는 사람도 아니다.)
그날 밤 양과는 큰 나뭇가지 위에서 잠을 잤다. 다음날 아침, 말에
올라타 여윈 말이 가는 대로 산과 들판을 마구 헤댔다. 때로는 고묘로
돌아가 소용녀를 볼까 하는 생각도 했고 때로는 어쨌든 곽정,황용을
먼저 죽여 부친의 복수를 해야 한다고도 생각했다. 배가 고파 오자 과
일을 따서 허기를 채웠다.
나흘째 되는 날, 멀리서 어떤 사람이 나무에 뛰어올라 과일을 따는
모습이 보였다. 양과가 말을 달려 가까이 가 보니 금륜법왕의 제자 달
이파였다. 그는 뛰어오를 때마다 단지 1개의 과일만 따 낼 뿐이었다.
나중에는 귀찮아쳐서 팔을 뻗어 냅다 몇 차례 갈기자 그 과일나무는
치이직 소리를 내며 부러져 버렸다. 그는 과일을 잔뜩 품안에 집어넣
었다.
양과는 주위를 살피며 생각했다.
(금륜법왕이 설마 이 근처에 있는 것은 아니겠지 ?)
그와 금륜법왕은 원래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었다. 이제 곽정,황용
을 부친을 죽인 원수로 알게 되자, 양과는 당시 곽정,황용을 도와서
금륜법왕과 상대했던 일이 후회되었다. 양과는 살금살금 달이파의 몸
뒤로 가서 그가 어떻게 하나 살펴보려 했다. 달이파는 나는 듯이 내달
려 산 아래로 가 버렸다. 양과는 말에서 내려 거리를 두고 뒤따라갔
다. 달이파는 산림 속으로 들어가 점점 높이 올라갔다. 양과도 그를
따라 산봉우리에 올랐다.
산정에는 조그마한 모옥이 세워져 있었다. 사면이 확 트인 모옥 가
운데 금륜법왕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과실을 내려놓고 몸을 돌리
는 순간 달이파는 양과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얼굴색이 확 변했다.
"대사형 ! 사부를 해치러 왔소 ?"
하고 말하면서 달이파는 양과에게 달려들어 양과의 옷소매를 움켜잡
았다. 그의 무공은 양과보다 위에 있으나 지금 사부가 위험한 지경에
놓여 외부의 공격을 받게 되면 즉시 생명을 잃게 되므로 황망한 가운
데 서둘렀기 때문에 달이파의 이 일초는 엉강이 되어 버렸다. 양과에
게 오히려 팔을 잡혀 서로 밀치고 당기다가 끝내는 양과를 넘어뜨리게
되었다.
달이파는 마음속으로 양과를 대사형의 전신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
런데 그가 넘어져 땅에 구르게 되자, 달이파는 곧바로 양과의 앞에 다
가섰다. 양과는 그가 또 공격을 하려는 줄 알고 얼른 몸을 일으켜 뒤
로 1보 물러섰다. 그가 돌연 무릎을 꿇더니 절을 하며 말했다.
"대사형 ! 전생의 은사님의 정을 생각하십시오. 사부님께서는 중상
을 입고 스스로 치료를 하는 중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를 놀라게 한다
면, 그럼......, 그럼......"
달이파는 말을 채 끝내지도못하고 목이 막히는지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양과는 비록 티벳어를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의 격동하는 표정과 금
륜법왕의 초췌한 얼굴을 보자 이내 사태를 짐작했다. 급히 그를 일으
켜 세우며 말했다.
"나는 결코 그를 해치지 않을 것이니 안심해도 좋아요."
"달이포는 양과의 얼굴색이 부드러운 것을 보자 매우 기뻐했다. 비
록 그가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이미 적의가 사라져 버린
것만은 사실이었다.
바로 이때 금륜법왕이 눈을 떴다. 양과를 보더니 그는 깜짝 놀랐다.
그는 방금 운기조식을 하였기 때문에 양과와 달이파의 대화를 듣지 못
하고 있다가 갑자기 강적이 눈앞에 나타난 것을 보자 길게 탄식을 하
며 느릿느릿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헛되이 수련을 하였구나. 도를 얻지도 못하고 오늘
죽게 되다니......"
그는 원래 커다란 바위에 부딪혀 내장에 중상을 입었던 것이다. 이
며칠간 이곳의 모옥에서 조용히 상처를 치료하고 있었던 것인데, 뜻하
지 않게 양과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은 조금도 힘을 쓸 수가 없어 달
이파에게 명하여, 양과를 쫓아 버리게 할 수밖에 없었다. 싸운다 해도
그 싸움으로 그의 심신에 자극을 주게 되어 상처를 치유하기가 점점
힘들게 될 판이었다.
그런데 양과가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에 온 것은 대사와 대결하기 위해서가 아니오니 걱정하지 마십
시오."
법왕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순간, 갑자기 가슴
에 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그는 급히 눈을 감고 운기를 시작했다. 양
과가 모옥 안으로 들어가 우장을 뻗어 그의 등뒤에 있는 지양혈(至陽
穴)에 갖다 댔다. 이 혈도는 일곱째 척추뼈 밑에 있는 것으로 전신의
맥을 지휘하는 대혈이었다.
달이포가 대경실색을 하며 양과를 제지하려 했다. 양과는 좌장을 흔
들어 그에게 눈짓을 했다. 달이파는 사부에게 아무 일도 없는 것을 보
자 얼굴에 안도의 웃음을 띠었다.
양과의 수련은 그리 깊지 않은데다가 서장파 내공에 대해선 더욱 몰
랐다. 손바닥에 은근히 그의 체내에 흐르는 기가 느껴졌다. 하나의 열
기가 위로는 영대(靈臺), 신도(神道), 신주(身柱), 도도(陶道) 각 혈
로 통하고 있었고, 아래로는 중추(中樞), 척중(脊中), 현추(懸樞) 각
혈로 통하고 있어 그의 맥을 유지해 주고 있었다.
달이파는 비록 고강한 무공을 지녔으나 수련한 것은 모두 외공뿐이
라 사부를 치료해 줄 수가 없었다. 이 며칠간 단지 옆에서 애를 태울
뿐이었다. 금륜법왕은 등뒤의 걱정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임맥에 기를
주입시켜 전력으로 가슴과 배의 상처를 치료해갔다. 한 시간 남짓만에
통증이 크게 줄어들고, 얼굴에는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금륜법왕
은 눈을 떠 양과에게 고맙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양거사(居士), 어째서 나를 구해 주신 게지요 ?"
양과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최근에 알게 된 부친의 원수와 무의식
중에 달이파를 따라 산에 오르게 된 정황을 말했다.
금륜법왕은 비록 이 소년이 매우 교활해 십중팔구는 그 말을 그대로
믿기 어려웠지만 그러나 오늘은 오히려 자신을 도와 주지 않았는가.
상대방에게 적의가 없음을 알고 말했다.
"원래 거사에게 이줌있는 줄 몰랐구료. 그러나 곽정
부부의 무학은 너무 깊어서 양거사가 복수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을
것이 걱정이오."
양과가 얼마간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우리 부자 이대가 그들의 손에 죽으면 그만이지요 !"
금륜법왕이 말했다.
"나도 처음엔 천하에 적이 없다고 자부하였지. 한 사람의 힘으로 중
원 군웅들을 압도해 무림 맹주의 자리를 얻으려고 했지요. 그러나 중
원 무사들이 단독으로 겨루는 규칙을 어기고 무리를 지어 몰려들어 어
쩔 수가 없게 된 거요. 이 몸은 상처가 치유된 후 많은 고수들의 도움
을 얻을 작정이오. 우리 편 세력이 커지면 중원 무사들도 어쩔 수 없
게 될 테니 공평하게 승패를 결정할 수 있지 않겠소 ? 당신 혹시 우
리 편에 참가할 의향이 없는지요 ?"
양과는 대답하려는 순간, 몽고병의 잔악무도한 형상이 생각나 말했
다.
"나는 몽고를 도울 순 없소."
법왕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대 혼자서 곽정 부부를 없애 복수하려고 든다면 그 일은 정말 어
렵기 짝이 없소."
양과는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 소, 내 당신이 무림 맹주를 취하도록 돕겠소. 대신 당신은 나의
복수를 도와 주셔야 합니다 !"
금륜법왕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대장부 일언은 중천금이오. 손바닥을 부딪쳐 맹세합시다."
두 사람은 세 차례 손바닥을 부딪쳐 맹세를 했다. 양과가 말했다.
"나는 단지 무림 맹주 자리에 앉는 것을 도울 뿐이오. 몽고병이 강
남을 침략해 백성을 죽이는 것을 돕는 일이라면 나는 절대로 나서지
않겠소."
금륜법왕이 웃으며 말했다.
"사람이란 누구나 제각기 지조가 있소이다. 억지로 해서 되는 게 아
니지요. 양형제, 당신의 무공은 매우 다양해 나의 오랜 경력에서 나오
는 것과는 사뭇 다르오. 여러 가문의 것을 취하여 교묘한 점은 대단하
나 난삽하여 어지러움은 면하기 어렵지요. 당신이 가장 자신 있는 무
공은 대체 어느 문하의 무공이오 ? 어느 파의 무공을 사용해 곽정 부
부를 대항하려고 하고 있소 ?"
이 몇 마디 말은 양과의 입을 다물게 하기에 족했다. 그는 평범하지
않은 운명에 샘이 많아 전진파, 구양봉, 고묘파, 구음진경, 홍칠공,
황약사의 무공 등을 모두 적지 않게 익히고 있던 터였다. 이들 무공들
은 모두 극히 오묘하여 필생의 정력을 다해 정진해 들어가도 그 끝을
보기가 힘든 것인데, 그는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기웃거렸기 때문
에 진정 최일류의 경계에 이른 무공은 하나도 없었다.
다소 떨어진 상대를 만나 시전하게 되면 매동작이 화려하기 짝이 없
어 상대를 혼란케 하지만 그러나 진짜 고수를 만나게 된다면 어쩔 수
없이 결점을 보이게 되곤 했다. 금륜법왕의 제자인 달이파나 곽도와
비교해 보아도 양과는 아직 미치지 못한 점이 많았다. 그는 고개를 숙
이고 생각에 잠겼다. 금략법왕의 이 몇 마디는 실로 정곡을 찌른 것으
로, 그의 무학의 근본적인 폐단을 지적해 준 것이었다.
(나는 이미 아가씨와 평생을 같이하기로 결의해 놓고 어째서 여기저
기에다 정을 주었을까 ? 정영, 육무쌍, 또 완안평. 나는 그녀들에게
진정으로 대하지 않으면서도 단정치 못하게 행동한 것이나 아닐까. 나
라는 놈이 본래 너무 탐욕스러운 거나 아닌지......)
양과의 생각은 계속 이어졌다.
(물론 홍칠공, 황약사, 구양봉, 전진칠자, 금륜법왕...... 모두는
일가를 이룬 분들이다. 모두들 본문의 무공을 정진 수련했다. 다른 파
의 무공을 알지 못하는 것도 아니지만 단지 그 이치만을 살필 뿐 연습
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나는 어느 무공을 전공으로 연마해야 될
것인가 ?)
아무래도 고묘하의 옥녀심경을 연구함이 옳을 것 같았다. 그러나 홍
칠공의 오묘한 타구봉법과 황약사의 정교한 옥소검법을 생각하니 그
어찌 또 아깝지 않으리오 ? 또한 의부의 합마공과 경맥역행, 구음진
경의 제반 무공 등 어느 것 하나로도 세상에 이름을 떨칠 수 없는 것
이 없었다. 익히기가 어렵다고 해서 어찌 그것들을 유물로 버릴 수가
있겠는가 ?
그는 모옥을 나와 산봉우리에서 뒷짐을 지고서는 고심을 하기 시작
했다. 반나절이나 머리를 짜내던 중 갑자기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각 파의 장점들만 취하여 일가를 이룰 수는 없을까 ? 천하의 무공
이란 모두 사람이 창안한 것이다. 남들도 창안해 냈는데 나라고 해서
설마하니 창안해 내지 못하란 법이 없잖은가 ?)
이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눈앞에 광명이 서리는 것 같았다.
그는 산봉우리에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평생 동안 보았던 여러
정교한 무공들을 하나하나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찌기 구양봉과
홍칠공이 구술로 비무 시합하는 것을 본 적이 있어, 그 자신도 말과
그림으로 이막수를 물리친 적이 있었다. 지금 머릿속에 여러 무공들의
장점을 취하자니 말하는 것보다 치열하고 신속했다. 생각을 하면서 동
시에 자신도 모르게 손과 발을 움직여 시전해 보았다. 처음에는 이 일
초가 홍칠공에게, 저 일초는 구양봉에게 배운 것이라고 판단할 수가
있었으나 나중에는 한데 어우러져 그는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고 그
대로 기절해 넘어졌다.
달이파가 멀리서 보니 양과가 미치광이처럼 손발을 움직이며 괴상한
짓을 하고 있었지만 그 내용을 알 수 없었다. 돌연 그가 넘어지는 것
을 보자 달이파는 구하려고 황급히 달려가려 했다. 금륜법왕이 웃으며
말했다.
"그의 심사를 건드리지 말아라. 너의 재능이 평범해 그의 심중을 알
아내기가 힘芮것이다."
양과는 한참 자다가 다음날 새벽녘에 일어나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레 동안에 그는 잇달아 다섯 번이나 혼절했었다. 여러 문파를 종합
해 일가를 이룬다는 일이 어디 말처럼 쉬운 것인가 ? 이 때의 양과의
능력으로는 절대 성공하기가 힘든 것으로서 반 개월만에 될 성질의 일
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며칠간을 계속 생각한 끝에 양과는 깨달은
바가 있었다. 제반 무공들을 사용할 수 있게 하여, 합일시킬 수 없는
것은 강구할 필요가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나중에 적과 마주쳤을 때
사용하면 그만이지 굳이 무공의 출처와 내력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일가를 창설하는 것과도 차이가 몇개 나지 않았다. 이 점을 깨닫자 마
음이 상쾌해졌다.
금륜법왕은 이 며칠간 운공조식하여 상세(傷勢)를 거의 다 치유시켰
다. 그날 양과가 갑자기 평온한 표정에 성장한 듯한 모습을 드러내자
금륜법왕은 양과가 무학의 길에 진일보한 것을 느끼게 되었다.
"양형체, 오늘 내가 당신께 한 사람을 소개해 주지. 그 사람은 통이
크고 웅지를 지닌 자로 보게 되면 반드시 감복하게 될 것이오."
양과가 물었다.
"누구신데요 ?"
"몽고왕자 쿠빌라이[忽必烈]요. 그는 징기스칸의 손자로 황세자 타
뢰(拖雷)의 네째 아들이지요."
첫댓글 즐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