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첫사랑
필봉 최해량
첫사랑은 보고 또 봐도 그리워지게 만든다. 이 애틋함을 나는 두 번이나 겪었다. 첫사랑 향수병이 도질 즈음 이를 달랠 겸 옛 추억의 여행을 떠난다. 오늘 가는 이 길은 엄밀하게 말하면 두 번째 사랑이요 어쩌다 첫사랑이다. 이 사랑은 주경야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에는 공부를 했다. 간간이 짬을 내어 미래 설계도도 크게 그렸다. 그게 배만 부풀린 억머구리 마냥 덩치만 크게 키우는 꿈으로 변했다. 결국 똘망똘망한 눈망울들을 애써 외면하며 교직을 떠났다. 첫사랑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떠나갔던 교단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9년 만에 다시 돌아왔다. 물설고 낯설은 경남 합천의 오지 학교 덕곡에 발령이 났다. 고령에서 버스를 타고 경남북의 도경계선 ‘기미재’를 넘었다. 구불구불 산길을 내려오니 이내 굵은 돌멩이가 울퉁불퉁 튀어나온 비포장 길이 나타났다.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며 또 하나의 높은 고개를 넘어 겨우 학교에 도착했다. 전교생 60여명의 시골 벽지 초등학교, 이곳이 나의 채우지 못했던 사랑을 다시 시작한 곳이며 내 영혼을 살찌운 곳이다.
길을 나서니 마음부터 설렌다. 오늘은 30여 년 전의 부임길 대신 가까워진 길을 택했다. ‘현풍 나들목’에서 나와 ‘구지’를 지나니 차량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 벼는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리기 시작했다. 여름내 모진 뙤약볕에 타들어가던 껍질은 제법 폼나는 황금 비단옷으로 치장했다. 호젓한 산길을 돌아 ‘이방’을 지나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율지교’로 들어섰다. 제방 언덕에는 드문드문 자란 갈대가 바람을 따라 흥겹게 춤을 춘다. 예전에 없던 다리에서 바라보니 손에 잡힐 듯 버스를 타고 힘들게 넘나들던 고개가 보이고 좌우로는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낙동강 쪽이 터지지 않았다면 가히 숨이 막힐 곳이다.
지금은 불과 50여 호의 작은 마을로 남았지만 예로부터 밤나무가 많아 율지, 밤나루, 밤마리로 더 알려진 낙동강 포구다. 한때는 800여 가구에 5일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낙동강을 헤치고 올라온 생선과 소금, 젓갈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창녕, 합천, 거창 등지로 팔려나갔다. 인삼 거래도 활발해서 전라도 상인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물건 값을 받아든 뱃사람들은 이방 들판의 영근 곡식을 구입해서 배에 싣느라 분주했다. 나루에는 크고 작은 배 10여 척이 늘 정박해 있었고 장날에는 다섯 마리의 소를 도축할 만큼 식당과 주막이 많았던 곳이다. ‘고성’지방에서 유명세를 떨치는 ‘오광대 놀이’도 이곳에서 발생했다고 한다. 그렇게 분주하던 나루터가 1930년 전후로 전국에 신작로가 생기며 운송 기능을 잃어갔다. 1967년에는 정기 시장마저 폐쇄되었다. 그리고 1999년 6월 1일 율지교가 건설되자 나루터는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졌다. 다리를 건너니 30여 년 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발령을 받은 이듬해인 1990년에 우리 가족은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아내도 남편의 손을 들어주며 기꺼이 시골학교에 전근을 왔다. 불과 10여리 떨어진 윗 학교와 아래 학교에 함께 근무하니 도심의 출근길에 비해 천국이다. 오지 생활은 불편함보다 기쁨과 감사를 더 많이 안겨준다. 재잘대는 산새소리에 절로 눈이 떠지고 현관문을 열면 소학산 등성이가 반갑게 맞아준다. 밤이 지천으로 떨어져도 누구하나 욕심내는 사람이 없는 평화와 안식이 내려앉은 곳이다.
학생이래야 겨우 12명, 그래도 나무랄 데 하나 없는 귀하고 복된 아이들이다. 조근조근 애기해도 다 알아듣는다. 6학년 담임을 맡으며 서울로 수학여행을 다녀왔다. 4학년들까지 모두 합해도 한 차가 되지 않았다. 마음이 들뜬 아이들과 함께 경복궁으로 종로로 흥겹게 뛰어 다녔다. 서울 대공원에서 무섭다며 타지 않으려는 ‘청룡열차’를 태웠더니 내리자마자 펑펑 울어대는 아이들을 달래느라 무진 애를 먹었다.
토요일은 반공일이다. 오후에 마땅히 갈 곳도 없고 문화 시설도 없어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은 교회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대구에서 오신 선생님과 흥겹게 율동도 하고 재미있는 놀이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대구남부교회 여선생님 세 분이 주말마다 찾아와서 봉사를 했다. 나는 아이들을 교회에 데려다주고 마치면 집까지 데려다 준다. 저녁 식사를 마친 선생님들을 대구 가는 막차에 태워다 드리야 한다. 어둠이 내려앉은 나루터는 지척을 분간하기 어렵다. 사공이 술에 취해서 늑장을 부릴 때도 간혹 있었지만 감사하게도 주말마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기억하고 대기하는 일이 더 많았다. 나는 차를 언덕에 주차하고 하이 빔을 켠다. 배가 안전하게 건너편에 도착해서 버스에 승차하고 돌아오기까지 등대 역할을 했다.
그 아름다운 추억을 곱씹으면 찾아간 곳은 기대와는 딴판이다. 아내가 근무하던 학교는 폐교된 지 오래 되었고 내가 근무하던 학교도 중학교와 병합하더니 결국 분교가 되었다. 언제나 온화한 얼굴로 따뜻하게 대해주시던 교장선생님과 선배 교사들, 교회를 함께 섬기던 교우들의 소식도 사라진 나루터와 같다. 졸업식날 내 마음을 온통 텅 비게 만들었던 열 두 아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른다. 모두 어디서 무엇을 하며 잘 살고 있는지…. 우리를 실어 나르던 사공도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모두 그립고 보고 싶다. 그나마 위안이 된다면 함께 근무하던 동년배 선생님들과 30년이 넘는 만남을 이어가며 그 시절의 추억을 나눈다는 것이다.
이게 무슨 129
필봉 최해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