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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라포션 이름 (파라샤) | 모세오경 (토라) | 예언서 (하프타라) | 신약 (브리트하다샤) |
케도쉼 (거룩 하라) | 레 19:1-20:27 | 암 9:7-15 | 요 7:53-10:21 |
<단락 1> 1. 레 19:2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거룩 (히 : 카도쉬)이란? 세상과 구별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거룩한 삶이란? 세상과 구별되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거룩한 삶은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 그분의 인격을 반영하는 삶입니다. 거룩한 자는 세상과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자가 아닌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땅에서 하늘의 통치를 받아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흔들어 깨우고, 변화되지 않는 영역들을 고침 받으며 날마다 거룩한 혁명을 경험해 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 안에 있는 성령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것입니다. 이처럼 거룩한 삶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베드로전서 1장 16절에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말씀합니다 (레 11:44-45). 이 말씀을 히브리어로 보면 이스라엘의 거룩함은 ‘שדק’ (코프 + 레쉬 + 쉰)의 단어로 사용되며, ‘카도쉬’라고 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함은 ‘שודק’ (코프 + 레쉬 + 바브 + 쉰)의 단어로 사용되며, ‘카도쉬’라고 읽습니다. 히브리어 ‘바브’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글자로 예슈아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신 못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함의 경지까지 올라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자아를 날마다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의 능력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말씀합니다.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평범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 믿는 것과 아는 일을 분리시켜서 놓았습니다. 이는 신앙과 삶이 분리되어진 이원론적인 삶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1) 레 20:26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로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
우리는 예슈아를 믿는 순간 만민 중에서 구별되어진 거룩한 신부가 되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동일한 존재, 또는 세상을 닮아가는 존재가 될 수 없습니다. 특별한 존재는 특별한 삶이 요구되어집니다. 특별한 삶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대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러나 거룩의 반대는 평범한 삶 (히 : 홀 : 평범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 평범한 삶을 거부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신앙 생활을 평범하게, 편안하게, 세상 사람들이 하는 것 다 해가면서 신앙생활하길 원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편의주의 신앙생활은 어떤 일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거나 처리하지 않고 임시로 그때그때를 적당히 넘기려 하는 태도나 사고방식입니다. 그리고 세상과 구별되어진 삶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와 목적에 의해 살아가게 되며 그 결과 세상과 섞이게 됩니다. 이러한 삶은 당장은 쉽고 좋아 보일 수 있겠지만, 나중에 멸망이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가운데 거룩한 삶을 잃어버리는 것은 거룩한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그 결과 영원한 생명 또한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창 1: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습니다. 형상의 히브리어는 ‘쩰렘’은 히브리어 ‘쩰’에서 파생되어졌으며, 이는 그림자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게 되어졌을 때에 세상 이들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의 그림자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에덴동산에 있으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며, 영적전쟁에 능한 군사로 훈련되어져, 온 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온 땅을 에덴동산처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주 ‘하프타라 (예언서)’의 말씀이 아모스 9장 11절에 나온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세우는 것입니다. 암모스 9장 11절에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일으키고 그것들의 틈을 막으며 그 허물어진 것을 일으켜서 옛적과 같이 세우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십니다 (암 9:11, 행 15:16-17). 그러나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세운다는 것은 어느 순간부터 무너져 버린 장막을 다시 세우며, 24시간 예배를 회복한다는 해석은 무리가 있습니다 (대상 16:6). 무너진 다윗의 장막 (히 : 숙캇 다비드 하 노펠레트) 이라는 것은 ‘무너진 다윗의 가문’을 뜻합니다. 즉, 하나님은 다윗의 가문인 초림 예슈아를 이 땅에 (이스라엘과 열방) 보내심으로 다윗의 왕조 (하나님 나라)를 회복시켰으며, 재림 예슈아를 예루샬라임 성전 보좌에 앉으셔서 온 이스라엘과 열방을 통치하고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완벽한 다윗의 장막의 회복은 예슈아께서 예루샬라임 성전 보좌에서 왕으로 재림하신 이후에야 충만하게 회복될 것입니다 (천년 왕국 시대).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다윗의 장막 예배를 드리는 자들을 통하여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하나님의 처소 (시온)을 세우는데 구체적인 힘과 시간과 재능과 보화 등을 사용한 것처럼, 우리의 헌신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써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사단은 다음과 같이 아담을 미혹합니다.
(1)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아담은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면서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갔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자신을 부인할수록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을 경험하게 되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깊어지며, 진리가 아담의 삶을 자유케 하여 풍성한 삶을 살게 되며, 온 열방을 다스리는 왕과 신랑 하나님의 신부로 세워지게 됩니다. 그런데 갑자기 아담에게 사단이 나타나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먹기만 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미혹합니다. 우선, 잠언 3장 17절에 ‘17.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 18.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19.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에 터를 놓으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견고히 세우셨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지혜를 얻는 자에게 ‘생명나무 (히 : 에쯔 하임)’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을 뜻합니다. 그래서 생명나무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말하며,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의 원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의 나무는 인본주의 (인간중심, 이성중심)를 통해 우리의 영혼을 미혹과 타협 가운데 있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우리가 주인된 삶을 살게 되어진다면, 우리가 ‘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과 원수가 됩니다 (롬 8:7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지금도 사단은 우리가 예수를 믿었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제부터 마음대로 살아도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 5장 16절에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방향을 돌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파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방향성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리면 혼란과 무질서를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심령과 생각과 감정이 깨어지고 돌파하는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풀어져야 하며, 육체의 생각에 의해 살아가는 자가 아닌 영의 생각을 좇아가야 합니다. 요한계시록 22장 14절에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 말씀합니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킨 자 (회개)를 뜻합니다. 이들은 예슈아의 재림을 통하여 회복되어질 에덴동산에 있는 생명나무로 나아가며, 이 땅에 임할 새 예루샬라임 성전에 들어갈 권세를 얻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떠한 나무로 자라나고 있는가를 살펴봐야 합니다.
(2) 살전 4: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하게 하심이 아니요 거룩하게 하심이니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이유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위해 살아가기 시작할 때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다시 세워지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우리의 가정, 직장, 교회,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질서 안으로 정렬되고, 하나님 나라가 회복되어지는 것입니다 (마 6:33). 그래서 자신이 신부라는 정체성을 깨달은 자들은 거룩하지 않는 것들과 싸울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한 세마포의 옷 입고 (성도들의 옳은 행실 : 계 19:7), 단장한 신부는 신랑이신 하나님과 함께 혼인잔치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거룩한 부르심을 저버리는 자는 곧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리는 자가 됩니다.
<단락 2> 2. 레 19:17 너는 네 형제를 마음으로 미워하지 말며 네 이웃을 반드시 견책하라 그러면 네가 그에 대하여 죄를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레위기 19장은 거룩함의 정점에 해당되어지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것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우리는 이웃을 말로만 비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 속에는 미움과 원망을 품고 있는데, 억지로 행하는 선행은 위선이며 헛된 것이 됩니다. 로마서 13장 8절에 ‘8. ...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10.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로 결단하였다면, 그 시작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삶이 거룩한지 거룩하지 않은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1) 요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우리가 예슈아의 제자라면 많은 열매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열매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예슈아를 나의 왕으로 결정한 자들이 모여 있는 교회 공동체에서 서로 사랑하는 열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날마다 사랑하기로 결정한 것을 믿는다면, 우리는 교회 공동체의 이웃을 날마다 사랑하기로 결단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에서 훈련되었다면, 세상에 나아가 동일한 방법으로 영혼들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때, 세상은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되며 (갈 5:22-23), 영혼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벧후 1:4-8). 그리고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기 때문에, 거룩한 몸 (공동체) 가운데 거하십니다. 거룩한 몸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슈아께서 지상재림 하시는 그 날까지 교회 공동체와 함께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육체를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파수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