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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26강 - 반야심경 2(42:23)
00:07 <불교의 견성>
청정광명심. 이걸 알려야 불교인데요. 그렇죠. 지금 조계종도 청정광명심 붙잡아야지 그냥 전법에만 목을 맨다고 되지 않습니다. 뭘 전할지가 없어요. 기독교면 성령 전해야 되고요. 성령 받게 해 줘야 기독교고요. 왜냐하면 그래야 거듭나거든요. 불교는 청정광명심 만나게 해줘야 돼요. 그래야 견성할 수 있거든요. 그게 안 되면요 이론으로 떠드는 것은 자기들이 경전에서 다 얘기한 거예요. 희론(戱論)이라고. 언어유희밖에 안 돼요. 희론을 즐기고 싶으시면 학당 강의 5천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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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냥 개념놀음 하고 싶으시면 원 없이 즐길 수 있어요. 그런데 한 생각 돌이키지 않으면 계속 비행기가 활주로만 달리는 격이에요. 우리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제일 빠르다고 자랑하면 차를 타시지 굳이 비행기를 왜 탔겠어요? 그렇죠. 과학이 아니고 굳이 철학을 하겠다 그러면요 견성 못 하고 철학 못 합니다. 철학의 핵심이 존재론 인식론 실천론인데 존재론에서 참나 모르면 우주의 근본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존재론이 엉망이 되고요. 인식론에서 진리를 직관화하는 청정광명심 자리 모르면요 진리에 대한 인식이라는 게 제대로 설 수가 없고요. 오감 갖고 노는 6근 작용밖에 안 돼요. 6근으로 하는 철학은 과학이지 진짜 철학이 아니에요. 무분별지 빠진 철학은 철학이 아니에요. 역대 최고 철학자들 4대 성인급들 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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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에서 신성을 얘기하지 않은 분이 없어요. 그렇죠. 소크라테스는 다이몬이라고 해요. 철학도 하나의 다이몬교예요 그러면. 소크라테스교인데 철학이 알고 보면 다이몬교라고요. 내면에 있는 그 신성, 작은 신이라고 해서 다이몬이라는 뜻이거든요. 자기 안에 있는 작은 신성, 우주의 큰 신성에 똑같은 질을 가진 작은 신성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내 안에서 내비게이션 역할을 해 줘요. 이런 게 없다면요 내 머리로 철학하겠다, 분석과 추론으로. 그건 과학에 적합한 도구지 인식 도구지 철학을 연구하는 데 적합한 인식 도구는 아닙니다. 인식 능력이자 인식 도구로서 뭐가 필요해요? 하나 더 필요해요. 참나를 만나야 돼요. 초의식. 초의식에 접속을 못하면 깊은 철학으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분과학으로서의 철학은 가능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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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문의 근원으로서의 철학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철학은 근본적으로 정신철학이에요. 우리 정신에서 끌어내야 돼요. 그 새로운 인식 능력이 나와야 돼요. 실천론, 이 인식 능력, 이 고차원적인 직관의 능력을 개발하지 못하고 나의 실천이 바뀔 리가 없어요. 윤리학을 배운다고 우리가 윤리적이 될까요? 안 바뀌어요, 인간은. 인간을 바꿀 수 있다는 게 거듭남입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은 청정광명심 만나지 않고는 거듭날 수가 없어요.
03:35 <불교의 핵심>
앞 시간에 얘기한 제트 자 이론의 다 들어 있죠. 모든 철학의 정수입니다. ① 우리 안에 있는 신성의 현존을 체험해야 되고, ② 그 안에서 진리를 직관해야 되고, ③ 뒤에 분석을 할 때 이 직관에 부합한지 아닌지, 즉 마음속의 잣대를 가지고 분석을 해야 돼요. 분석을 하다가 찜찜해지면 멈춰야 돼요. 자명도가 떨어지면 멈춰야 돼요. 직관이 먼저 있어야 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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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이. 체험이 없는데 개념을 갖고 놀다 보면 산으로 갑니다. 그래서 명확한 분석, 자명한 직관에 근거한 자명한 추론, 분석이 이어질 때 그게 실천으로 이어집니다. 진리의 실천으로. 모든 철학의 핵심이 저의 이 제트 자 이론에 들어 있으니까 제트 자 이론은 MZ세대는 더 열심히... 제트 세대 아닌가요? 뭐라도 꼬셔보려고 해봤습니다. 그래서 이게 진짜 학문이고 이게 법이고 이건 인류 역사가 앞으로 언제까지 이어지든지 철학은 꼭 필요합니다. 과학과 함께 철학은. 과학도 당연히 필요하고요. 우리가 이렇게 모여서 떠들 수 있는 것도 과학의 힘입니다. 과학과 철학은 함께 가야 된다. 그런데 과학은 잘 나가는데,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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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안 해도 잘 나가는데, 철학은 우리가 관심을 안 주면 죽어버려요. 왜 그러냐면 이미 죽었거든요. 죽었는데 더 죽을 것 같아서. 그래도 살려보자고. 아직 불씨가 있다. 살려보자. 이런 차원에서 말씀드립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청정광명심, 왜 불씨는 영원히 살아있냐면요 청정광명심 없는 존재는 없으니까. 다 있으니까 캐기만 하면 되니까 불씨는 항상 있어요. 그런데 캐라는 가르침이 안 나오면 죽는 거죠. 반야심경 공부하실 때도 그런 관점에서 청정광명심에 대한 탐구로 보셔야 돼요. 불교의 모든 건. 모든 종교 철학이 다 다 마찬가지지만 특히 불교 안에서도 회통이 안 되는 지금 상황에서 반야심경 따로. “반야심경은 공을 얘기한 거잖아요. 왜 청정광명심을 얘기하십니까?” 그러면 땡이에요. 뭐가 공허하냐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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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이 공한 거 아닌가요? 연기하니까.” 이렇게 나올 거란 말이에요. 땡이라는 거예요.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걸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반야의 심경이란 건, 반야의 제일 핵심은 “5온의 자성이 그대로 공성이더라”는 거예요. “만법이 본래 열반이더라”는 거예요. 이 말이 나와야 돼요. 자 “만법에는 영원한 자성이 없습니다”랑 다른 말 아니에요. 법공의 제일 핵심 모토는 “만법이 본래 열반이다” 예요. 모든 경전에서 외쳐요. 대승기신론에도 나옵니다. “만법은 본래의 열반이다.” 이 말 이상하잖아요. 이게 8천송 반야경부터 나와요. 제일 초기 반야경부터 등장한 말이에요. 그런데 공을 단순히 없다로 풀어버리면 만법이 없더라 이 말을 하고 싶어서 만법이 본래의 열반이라는 말을 했을까요? 이상하죠. 자 지금 보실 게 공종과 상종과 성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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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이면 화엄종입니다. 화엄종. 대표적으로. 천태종이나. 공종(空宗) 이게 반야경 강조하는, 공 강조하는 공종. 각주예요 지금. 상종(相宗) 성종(性宗). 이 3개 구분해서 말씀 많이 드렸었죠, 그때 지난번에도. 한 번 더 드려볼게요. 공종 상종 성종 다 같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다르게 보지 마시라는 거예요. 이게 근본적으로 같아요. 이 공은 뭐의 공이에요? 청정광명심이요. 청정광명심이 우리의 본성이라는 거고요 청정광명심에서 우주가 나타났다는 겁니다. 청정광명심에서 8식 7식 6식을 거쳐서 우주가 나타나는 걸 강조하는 게 상종이고요. 이 자리가 본래 공하다는 걸 강조하는 게 공종이고요. 이게 만법의 본성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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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광명심이 그대로 본성이다. 우주의 진리다. 이 말 하는 게 성종이에요. 비었죠, 공(空)은. 성(性)은 채워졌죠. 여기(성종)는 자성을 강조하는 데고 여기(공종)는 공성을 강조하는 데고 여기(상종)는 육식(六識)의 나툼이니까 현상을 강조한다. 어떻게 우주가 펼쳐졌냐는 거예요. 텅 빈 데 우주 어디서 나왔냐는 거예요. 어떻게 나왔냐는 거예요. 왜 이렇게 사실적으로 있냐는 거예요, 지금. 공으로 있을 때가 편하셨죠. 6근(六根) 갖게 된 뒤로 나날이 힘드시잖아요. 6근 운전하기가. 날마다 시빗거리가 생기고. 내가 좀 쉴려면 또 저놈이 괴롭히고. 그렇죠. 어디서 나왔냐? 그런데 이 두 개를 종합해서 공에서 상이 나오려면 자성이 있어야 되거든요. 텅 빈, 텅 비기만 했으면 어떻게 상이 나와요. 요한복음에 이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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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어디까지 가나 보자 하실 수 있겠지만, 요한복음 한번 가볼까요. 태초에 하나님이 계셨는데 태초에 하나님이 계실 때 누구랑 같이 있어요? 로고스랑. 그래야 만물이 다 거기서 나오거든요. 본성이 없는데 어디서 나와요? 텅 비면서 왜 상이 나올까요?
09:20 <반야심경의 포인트>
본성이 있어야겠죠. 이 본성을 강조합니다. 텅 비었지만 꽉 차 있다는 얘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이해되세요? 그런데 이 셋이 다 청정광명심을 말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참나를 찾아야 불교가 다 들어오는 건 이거예요. 참나 안 찾고 연기공(緣起空)을 자꾸 따지고 계시면 개념 놀음에 빠져서 희론(戱論), 비행기가 활주로에서 못 벗어나듯이 희론에 빠져서 못 벗어나요. 보실래요, 똑같은 소리를 하고 있는 거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을 행할 때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공성ㆍ청정ㆍ진여ㆍ법신ㆍ열반)에 들어간다(법공法空).” (菩薩摩訶薩 行般若波羅蜜時 入諸法自相空. 마하반야바라밀경摩訶般若波羅蜜經, 공종空宗)] 공종. 보살 마하살은. 마하반야바라밀경에 나온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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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보이시죠. 1페이지 각주.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서 그래요. 어디야 이러시는 것 같아서 제가. 그런데 지금 반야심경 하니까 웃고 계시지 유식학 들어가면요 제가 두려워요. 제가 예전에 주역 계사전(繫辭傳) 때 체험했거든요. 주역 계사전을 이렇게 하는데 흰자위들이 확 보이는 거예요. 빨리 그 강의 빨리 접었어요. 빨리 중단시켰어요. 그러니까 아니 빨리 끝냈죠. 진도를 빨리. 더 오래 끌 일이 아니다 이게. 유식학 이게 거의 불교의 주역이죠. 미리 제가 미리 말씀드렸습니다. 나중에 뭐 몰랐느니 하지 마시고. 반야심경은 껌이다, 그거에 비하면. 이제 곧 이어진다 유식학으로. 유식학만 살아남으면 됩니다. 유식학이 제일 어려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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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 따지는 것은 중관론이 더 난해하다고 할 수도 있는데. 언어를 해체하려고 하니까. 그건 오히려 우리가 오히려 안 봐도 돼요. 뭔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다. 끝. 그런데 유식학은 우리가 어느 정도 알아야 되거든요. 왜냐하면, 어떻게 우주가 펼쳐지는지를 제일 자세히 연구한 게 유식학이에요. 우리 의식에서 어떻게 우주가 펼쳐지는지. 그러니까 재밌겠죠. 그게 주역이죠. 거의 불교의 주역입니다. 같이. 이건 예고편이고요.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무분별지, 공성의 직관이 포인트라고 그랬죠. 이것만이 반야바라밀은 아니지만 보통 포인트는 이거예요.
11:44 <자성의 불변성>
공성의 직관을 행할 때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에 들어간다. 만법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에 자상이 공함에 들어간다. 만법의 모든 그런 자체의 형상이 텅 비어 있음에 들어간다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비슷하죠. 지금 이게 반야심경이랑. 마하반야바라밀경에서 이 반야심경과 제일 통하는 구절을 뽑아온 거예요, 제가. 아까 구절도 좋은데요. 그 8천송에서 뽑은 구절, “5온(五蘊)은 자성(自性)이 없는데 공성(空性)을 자성(自性)으로 갖는다.” [7) 심오한 반야바라밀(공성의 지혜)에 안주하면 ‘공성’(무루ㆍ무위의 진여)에는 ‘5온’으로 대표되는 만법의 ‘차별상’(시간성ㆍ공간성ㆍ인과성ㆍ이원성 속에서 나타나는 만법의 차별상)과 ‘오염된 법’(무명에 의해 아집ㆍ법집으로 오염된 만법)의 자성(독립ㆍ고정ㆍ불변의 실체)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만법의 승의의 자성인 ‘공성’(진여ㆍ법신)에 갖추어진 ‘청정한 법’(본유종자本有種子)을 닦아서 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일체의 고통ㆍ재앙을 넘어간다.] 이거 지금 못 따라오시면요 이 뒤로 못 갑니다. 이 말 자성(自性) 나올 때마다 헤매시면 자성(自性)과 공성(空性). 자, 자성(自性)은 불변의 실체예요, 불변의 본질이거나. 본질이라는 건 원리, 불변의 원리거나 불변의 실체, 아니면 불변의 존재입니다. 이해되시죠? 딱 고정돼서 윤회하지 않는 변치 않는 존재. 무상한 세계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어떤 것. 그런데 이게 자성을 그렇게도 쓰는데 또 아까 뭐라고 썼죠? 본질. 본질로도 얘기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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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리. 원리도 되고 진짜로 변하지 않은 어떤 존재를 말할 때도 써요. 그냥 퉁쳐서 불변의 실체 이러는데 이 실체는 본질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요 5온(五蘊)에 불변의 본질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여러분. 그냥 찍어보세요. “내 예감에는 있을 것 같다. 없을 것 같다.” 5온에 불변의 본질, 즉 5온에 자성이 없다 있다로 지금 싸우잖아요. 여러분들의 참나의 소식은 어때요? 5온에 불변의 본질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없으면, 만약에 없다면요, 없다면 여러분이 명상에 들어갔다가 나올 때마다 5온이 6온이 돼 있다가 다음에는 4온이 돼 있다가 이래야 되지 않나요? 왜 한 생각이 일어나면 딱 5온이죠? 항상 불변의 본질이 있죠. 그런데 이 용수보살이 무리한 논리를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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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해체를 시도한 게 “5온 자체를 언어일 뿐이다” 하고 날려버리면요 자성이 없다를 그런 식으로 해석하다 5온에 불변의.. 자 보세요. 5온에 불변의 본질이 있냐 없냐를 용수는 이런 식으로 접근한다고요. “5온 중에 불변의 변하지 않는 존재가 있냐?” 이렇게 들어가 버려요. 5온은 변하잖아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그런데 여러분 지금 (5온에) 불변의 본질이 있는 것 같잖아요. 뭔 차이죠 지금? 5온에, 이 펜에 불변의 본질이 있나요? 이게 5온이라고 했을 때. 여러분이 펜의 본질이 있는 것 같아요. 왜냐하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일정한 이런 모습을 갖추면 펜이라고 부를 거 아니에요. 그렇죠. 불변의 이치 그게 이데아예요. 이데아가 있다고 지금 생각하시는 거예요. 불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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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가 있다고 보는 거예요. 티벳 지금 겔룩파는 이데아를 부정하는 쪽입니다. 이 양반들은 이데아까지 시비 걸어요. 이데아 없다고 그래요. 불변의 본질이라는 게 없다. 그러면 놀고 있죠. 학문이 산으로 가는 거죠. 불변의 본질도 없는 학문을, 내 말은 다 거짓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어떻게 들어요? 내 말은 다 거짓말이라는 그 주장은 거짓말일까요? 진실일까요? 뭐 좀 이상한 말이죠. 이상한 말이에요. 불변의 본질이 없다면서 우리 가르침만이 불변의 본질이라고 주장하는 거예요. 이런 게 다 무리한 수입니다.
15:38 <5온의 불변의 본질>
여러분들은 상식적으로 지금 생각할 때 5온에 불변의 본질이 있다는 거는 5온이 변치 않는다는 게 아니죠. 용수는 5온만 붙잡고 늘어집니다. “5온에 불변의 본질이 있다고? 5온을 볼까. 불변인가?” 여러분들 황당할 거예요. 이건 유물론밖에 안 돼요. 예전에 유물론이 관념론 공격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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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아를 물고 늘어지거든요. 이데아 없다. 존재하는 것은 오감의 영역밖에 없다. 6근의 영역, 오감에다가 생각 포함해서 6근의 영역 밖에서 영원한 걸 찾는 건 다 잘못됐다고 해서 변증법적 유물론이 이런 관념론적인 그런 철학을 깠습니다, 이데아를. 똑같아요. 그 똑같은 방식으로 귀류논증파가 영원한 참나와 이데아의 세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이게 놀라운 게 그럼 유물론 사상과 통해버린다고요, 귀류논증은 가다 보면. 다 무상하다. 이쪽은 다, 변증법적 유물론이 그렇죠. 무상하다죠. 우주는 무상하다. 계속 변증법적으로 변해갈 뿐이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 이쪽(귀류논증)도 다 무상하다. 연기한다. 영원한 건 절대 없다. 이런 논리로 귀결돼 버리면요 철학도 아니고 뭣도 아닌 거예요. 과학 흉내 내는 유사과학이 돼 버리는 거예요. 황당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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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리가 되게 무서운 얘기입니다. 이 펜의 이데아를, 어떤 등신이 이데아가 여기(펜) 있다고 했을까요? 플라톤이 여기 있다고 했나요? 이게 펜의 이데아가 이 안에 들어 있다고 했나요? 아니면 이 펜이 그대로 이데아라고 한 적 있나요? 동굴의 비유 있죠. 우리가 보는 건 거죽이고 이것의 본질의 본질이 이데아라는 것 아닙니까. 이것의 본질은 보편법칙이고 이 펜에 적용되는 보편법칙의 본질이 이데아라는 거거든요. 누구도 현상계에서 이데아를 주장한 적이 없어요. 어떤 철학자도. 그런데 갑자기 “현상세계에서 이데아가 있다고? 그러면 한번 찾아볼까? 현상세계에.” 이게 부처님이 했던 방식을 흉내 낸 겁니다. “참나가 있다고? 그러면 찾아볼까? 6근에서.” 6근에서 참나 있다고 누가 얘기하겠어요? 힌두교에서. 그러니까 거기에 까이는 존재들은 6근에서 참나를 찾았던 존재들만 비판받겠죠. 용수가 깔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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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 대상은요 현상계가 불변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 아니고는 비판 대상이 안 돼요, 근본적으로. 참나를 주장하고 이데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누가 현상계가 그대로 참나요 이데아라고 한 적이 있겠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소리예요. 그러니까 불변의 본질은요 있어요. 그게 불교에서는 법입니다. 다르마라고 하는 거예요. 이 다르마가요 이 청정광명심 안에 무한한 다르마가 들어있다는 게 성종(性宗)에 와서 아주 강조됩니다. 대승기신론은 정확히요 “진여 안에는 무루의 공덕이 들어 있다” 그래요. “무량한 무루의 공덕이 들어있다”고. 그 공덕이 다 하나하나가 이데아들이에요. 불변의 진여 안에 있는 거니까 계속 불변이거든요. 불변의 만법의 본질이 있어서 유식학에서 뭐라고 뭐냐면 “불변의 본유의 종자, 무시이래로 우리 아뢰야식 안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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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유의, 본래의 청정한 종자가 있어서 거기서 현상계가 펼쳐진다”고 나와요. 5온도 거기서 나오고. 5온도 원래, 본래 다 설계도가 있다는 얘기예요, 우리 의식 안에. 여기서는 그냥 청정광명심의 공성만 강조해 주면 되지 과하게 공을 강조하다가 현상계까지 들어와가지고 현상계도 공하다는 걸 주장하려다가 꼬인 거예요. 현상계에서 이데아를 찾고 현상계에서 불변의 실체를 찾고 하면서 “봐. 현상계에 불변의 실체가 없지. 그러니까 현상계가 공인 거야.” 이건 유사품입니다. 짝퉁 공이에요. 본래 말하고자 했던 공이 아니에요, 부처님이. 짭(가짜나 모조품을 속되게 이르는 단어)이죠. 짭. 어디서 짭을 들고 와가지고 “나 법공 깨달았다고. 저도 정사(正士)인가요.” 학당에서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탈퇴 처리되실 수 있어요. 공종의 주장을 들어봐도
20:00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하다가 만법의 자체 형상이, 만법의 자체의 어떤 고유 본질이 텅 비어 있는 거란 걸 알았다는 거예요. 충격적이죠. 자, 이 말 이해되세요? “이 펜의 본질이요 사실은 텅 비어 있어요. 왜? 청정광명심의 나툼이기 때문에 그래요.” 이렇게 이해하는 거랑 “텅 비어 있어요. 연기하거든요.” 누가 또 땡기세요? 근본적으로? 연기하거든요 이거는 더 어떻게 말해 주는 소식이 없어요. 여러분 집에 가서 고민하시면 됩니다. 이 세계가 무상하다는 걸 이제 알았으니 어떻게 사실 것인가? “안 죽을 줄 알았는데 내가 죽는다네.” 이런 소식 아니에요. 의미 없는 소리라고요. 연기하니까 공하다는 걸로 여러분 탐진치가 해결이 될 리가 없어요. 아무리 연구해 보세요. 이게 탐진치를 줄여주나? 무상하니까 탐나는 거거든요. 그렇죠.
21:00
무상하니까 오늘 밤만 잠깐이라도 더 탐진치를 끓어오르게 하는 요소입니다. 무상이라는 건. 영원하면 당장 시급할 필요가 없어요. 영원히 내 곁에 있는데요. “내일 보지 뭐.” 한 1년 뒤에 봐도 돼요. 영원히 있겠다는데. 지금 아니면 못 보니까 우리가 애가 타죠. 오히려 무상은 반대로 탐진치를 자극하는 요소입니다. 우리가 무상한 줄 몰라서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줄 아신다면 진단 자체가 잘못되셨어요. 우리가 모르는 것은요 이 펜이 당신 참나의 작용이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모르고 계신 겁니다. 이걸 알아야 탐진치가 해결돼요. 이 펜이 무상해서. 이 펜이 또 없는 것도 아니에요. 이 펜은 있는데, 무상해서, 불변의 존재가 아니라는 걸 가지고 여러분이 “충격적이다. 나 드디어 해탈할 것 같다.” 이럴 리가
22:00
없어요. 그렇죠. 공종 주장 들어보셨죠. 여기서는 보세요. 논리가 똑같아요. 반야바라밀을 하다가 만법이 뭐라고 했다는 거죠? 만법에 자상(自相)이 공하다. 자상이나 자성(自性)은 같이 씁니다. 자성이 공하다는 걸 깨달았대요. 그런데 여기에 어디에도 연기하니까 이런 말 없어요. 그냥 반야바라밀을 했더니, 근데 반야바라밀이 께왓다경에 나오는 그런 순수의식 상태란 말이에요. 무분별지 상태에 들어갔더니 만법에 자성이 거기는 없더라. 텅 비어 있더라. 동시에 그 텅 빈 게 결국은 만법의 자성이었더라. 텅 빈 중에 만법에 자성의 본질이 꽉 차 있었겠죠, 사실은. 그러니까 이거예요. 만법에는 그래서 제가 독자적이라는 말을 쓰는 거예요. 만법에 독자적인 자상이 없더라는 거지 만법 자체는요 공 안에 불변의 본질로 꽉 차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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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없으면 왜 나와요? 만법이. 이해되세요? 이게 왜 나와요? 만법이. 나올 수도 있는 거 아닌가요? 이러시면 철학 전공하게 하시기에는 조금 그렇죠.
23:19 <만법의 자성>
자 그러면 상종 한번 상종 주장 볼까요? 상종은 어떤 입장인지 이런 반야심경 같은 주장을 어떻게 했는지? [“일체의 모든 법이 모두 ‘자성’(독자적 불변의 실체)이 없으며(자성이 텅 비어있음), 생겨남도 사라짐도 없으며, 본래 고요하며 자성(불변의 실체)이 열반이다(공성이 자성임).” (一切諸法 皆無自性 無生無滅 本來寂靜 自性涅槃, 해심밀경解深密經 상종相宗)] 일체의 모든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만법에, 여기도 만법에 자성이 없대요. 상종도 똑같아요. 만법에 자성이 없으며. 그런데 보세요. 본래 생멸이 없고 본래 고요하여 자성이 열반이다. 이상하죠? 자성이 열반이다. 만법의 자성은 열반이라는 주장이 나옵니다. 다른 얘기죠. 같은 얘기예요, 사실은.
24:00
“만법의 자상(自相)이 공이다, 만법의 자성(自性)이 공하다”는 거랑 “만법의 자성이 열반”이라는 건 같은 얘기입니다, 원래. 8천송 반야경이라는 최초의 반야경을 근거로 봤을 때 같은 말이에요. 거기서는 진여라는 말도 써요. 진여가 같다. 만법의 본질이 공이다는 건 진여다. 이 얘기입니다. 진여다. 열반이다. 열반이라고도 하고요. 자. 이해되셨죠. 반야경에서도 이렇게 주장했고, 유식, 해심밀경이라는 지금 유식학 경전에서도 만법은 본래, 여기서 자성이라는 건 뭐라고 읽으셔야 돼요? “독자적인 불변의 실체는 없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고, 이때 “자성은 본질이 열반이다.” 이렇게 읽으시면 돼요. 불변의 본질, 실체라고 하면 되겠네요. 실체 불변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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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세요. 독자적이라는 말 하나 붙고 안 붙고가 이렇게 다릅니다. 독자적인 불변의 실체가 있냐? 이 펜에 독자적 불변의 실체가 있으면 이 펜의 이데아가 독자적으로 존재해야 돼요. 나의 참나랑 별개로. 그런데 이 펜의 본질이 나의 참나라니까요. 이게 반야바라밀의 소식이에요. 반야바라밀을 얻으셨다면 이 펜의 본질이 나의 참나라는 걸 아셔야 돼요. 지금 황당하시죠. 만약에 이게 그냥 처음 들으시면 황당한 말이죠. 여기서 고개 끄덕이시는 분들은 견성하신 거죠. 이런 얘기예요. “만법의 자성이 열반”이라는 얘기는 “만법의 본질이 나의 청정광명심이다.” 그거 어떻게 알았냐? 청정광명심 자리 들어가 보니까 거기 가니까 만법이 없더라. 근데 거기서 한 생각이 일어나니까 만법이 펼쳐지더라. 5온이 펼쳐지고 12처가 펼쳐지고 18계가, 12처 18계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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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근 작용을 그냥 나누는 거예요, 5온이 펼쳐지고 6근이 펼쳐지더라. 갈무리하면 도로 무분별지(無分別智)더라. 펼쳐지면 현상계(現象界)더라. 그걸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안 거예요. 일체유심조를. 그러면 거기서 나온 결론이 뭐겠어요? “만법의 본질은 나 밖에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나의 순수의식이 만법의 본질이더라.” 이게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의미입니다. “5온이 결국 나의 순수의식이고 나의 진여요 열반이요 법신 자리더라. 둘이 아니더라.” 자성이 등장했다는 게, 상종 얘기는 더 와 닿으시죠. 자성이 뭐다 이렇게 그러면 성종 가볼까요? 대승기신론에 뭐라고 했는지? [“5온법의 자성이 생겨난 적이 없어서 소멸할 수도 없으니, ‘본래부터 열반(本來涅槃)이기 때문이다(공성이 자성임).” (五陰法自性不生則無有滅 本來涅槃故, 대승기신론, 성종性宗)] 5온법이라는 게 5온입니다. 5온법, 5온의 자성은 생겨난 적이 없고 멸한 적도 없다. 왜냐? 5온의 자성은 본래의 열반이니까. 어때요? 여기까지. 다 같은 얘기하죠, 지금. 다 같은 얘기하는데 조금씩 말이 약간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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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지죠. 자성이 본래의 열반이래요. 열반이 뭐라고요? 진여요. 이 열반이 공이라는 얘기예요. 그러면 5온이 공하다는 걸 대승기신론은 뭐라고 얘기했냐면 5온은 본래의 열반 자리다. 열반에 들어 있다 이 소리를 한 겁니다. 이 펜이 본래 열반이라는 건 이 펜이 참나의 작용이기 때문이지 다른 어떤 근거가 없어요. 연기하니까 열반이다. 이상하죠? 말이. 연기공 이 말이, 경전에 나온 말이 연기공을 말한 거였다면 연기하니까 열반이다? 그러면 “본래 자성이 열반이다” 이 말을 어떻게 풀 거예요? 어떻게든 풀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달라이 라마 보면 어떻게든 풉니다만 와 닿지가 않죠. 억지로 논리로 풀려고 하니까. 그런데 달라이 라마 본인도 잘 알아요. 논리로 푸는 걸 다 떠나야, 희론을 떠나야만 오롯이 진짜 공성을 직관한다. 이렇게 말만 하고 거기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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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이 없어요. 그 직관에서 나온 겁니다. 그게 반야바라밀인데요. 그런데 관자재보살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해서 나온 결론이 최소 무분별지에서 말한 거지 어떻게 연기공을 얘기한 거겠어요? 그래서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2번 볼까요. [2. 사리자여, ‘물질’(色)이 ‘공성’(청정ㆍ진여ㆍ법신ㆍ열반)과 다르지 않으며, 공성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 물질이 바로 공성이며(물질의 자성이 공성임). 공성이 바로 물질이다(공성의 작용이 물질임).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식별’(識)이 또한 이와 같다. 舍利子 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卽是空 空卽是色 受想行識 亦復如是] 사리자여. 최신 번역입니다. 예전 반야심경하고 좀 번역은 다를 거예요. 제가 다듬었어요. 산스크리트본이나 티벳본을 참고해가지고요 좀 많이 다듬었습니다. 사리자여, 물질이 공성과 다르지 않으며. 이때는 공성이라고 읽어야 돼요. 앞에 5온의 자성이 공하다 할 때는요 없다라고 읽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번역을 그렇게 한 거예요. “5온의 자성이 없는데 동시에 자성이 공성이다.” 이렇게 번역한 거고요. 여기서는 그냥 공성입니다, 실제로. 공한 성질이 있다. 물질이 그대로 없다가 아니고 공성과 다르지 않으며. 여러분 이런 표현 쓸까요? 이 공성이 진짜로 연기하니까 무상하다 정도의 의미라면, 굳이 “물질이 그 자성 없음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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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지 않으며” 이런 말 쓰시겠어요? 좀 이상하다는 거 아시겠죠. 그런데 또 그분들은 또 그것도 풀어요. 우리 식으로 봐야 해설이 정확합니다. 물질이 공성 다르지 않으며. 여기서 공성은 진여, 열반 자리랑 다르지 않으며. 공성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 그런데 아까같이 ‘물질이 자성이 없음과 다르지 않으며 자성이 없음이 물질과 다르지 않다.’ 좀 이상하죠. 이렇게 읽으셔야 된다는 얘기를 드리는 거예요. 다음 또 이어져요. 보세요. 물질이 바로 공성이며. 이제 물질이 그대로 공성이며. 물질의 자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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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성이라는 소리입니다. 물질의 본질이 그대로 청정광명심 자리 공 자리며. 공 자리가 바로 물질이다. 공성이 그대로, 공성의 작용이 물질이다. 느낌 생각 의지 식별 즉 5온 전체적으로 다 이와 같다. 그러면 느낌도요, 느낌도 자성이 공성이고 공성의 작용이 느낌인 겁니다. 생각의 자성이 공성이며 공성의 작용이 생각입니다. 의지, 식별도 마찬가지예요.
30:30 <반야심경의 무명>
아! 이거 엄청난 얘기인데요. 공이요, 이 공성이 진여, 열반이 아니라면 성립이 안 되는 말입니다. 여기서 그대로 5온이 나왔다는 얘기예요. 둘이 같다는 거예요. 5온의 자성이 공이고 공성의 작용이 5온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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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또 뭐가 되냐면요 5온이라는 건 생(生)이에요. 12연기에서 생한다는 건 5온이 태어나는 걸 말해요. 5온은 그대로 우리가 태어난 거라고요. 생이라고요. 생이 그런데 공성이요 공성의 작용이 생이에요. 이게 뭔 얘기냐? 12연기론을, 12연기론을 그대로 그냥 그대로 대입하면 결국은 생을 날리겠다는 거거든요. 무명(無明)으로 인해서 어둠, 무지로 인해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논리거든요. 그래서 지혜를 얻으면, 지혜를 얻으면 무명을 타파하며 안 태어난다는 이론이에요. 그런데 이것도 가만히 보면요 무명으로 생긴 생이죠. 그래서 이거는 유루(有漏)의 생을 말해요. 번뇌 있는, 무명으로 인해 생겨난 건요 번뇌 있는 태어남입니다. 만약에 무명을 명(明)으로 바꾸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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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루(無漏)의 생이 가능하다는 거예요. 새로운 가능성이 생깁니다. 12연기는 그냥 안 태어나려는 논리로만 출리심(出離心)으로만 그동안 해석했는데 대승에 오면 무명(無明)이 본래 명(明)이다. 무명도 본래 없다 예요. 무명도 본질이 뭐예요? 무명이라는 것도 즉 탐진치, 무명이 부풀어진 탐진치라는 것도 사실은 공(空)이에요. 공의 작용일 뿐이에요. 따라서 무명이 본래 밝음인 줄, 공성인 줄 알아 버리면 무루의 생이 끝나고 유루의 생이 시작되겠죠. 왜 이런 얘기를 드리냐? 12연기에 의하면 무명으로 생이 생겼다는 주장인데, 반야심경에 의하면요 5온이, 생이라는 건 5온의 탄생을 말하는데 공에서 바로 나왔다는 거예요. 내 생명 현상이요 그대로 자성(自性)이 공(空)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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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작용으로 내 생명 현상이, 6근이 굴러가고 있는 겁니다. 6근이 그래서 그대로 청정한 거예요. 이상한 논리가 된다고요. 이런 논리 들어보신 적 없을 거예요. 대승을 깊게 이해를 못하니까, 소승과 대승이 섞여 있다 보니까 지금 불교 이해들이 엉망이에요. 중관(中觀)까지 등장해가지고 막 섞어놨어요. 변종, 변종 소승이 대승인 척 또 들어와 가지고 논리가 섞이다 보니까 대승이 하고 싶은 말이 2000년간 지금 제대로 선포가 안 되고 있어요. 유마경(維摩經)이 안 읽혀요. 지금 제대로. 유마경이 법공 경전인데 구공 경전이고. 유마경을 읽을 수가 있나요? 그래서 이 유미경 같은 데 보면 지계제일 존자가 우바리 존자인가. 지계제일이 파계한 두 비구 꾸짖는 장면이 나와요. 그러다가 유마거사 만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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뚝배기 깨집니다. 유마가 뭐라고 하냐면요 “계율을 가지고 율법을 가지고 단죄하지 마라. 파계도 본래 공하다. 죄도 본래 공하다는 걸 가르쳐야 된다. 법공을 가르쳐야지. 너희는 율법주의 계율주의로 가르치느냐?” 하고 까요, 아라한을. 이런 게 유마경입니다. 유마경은 죄도 본래 공하다 예요. 성경과 거의 유사한 게 유마경이거든요. 시대도 비슷해요. 그쪽은 바리새파 뚝배기 깨시죠. 예수님이. 이쪽(유마거사)은 아라한들 뚝배기를 깹니다. 파격적인 발상을 하는 거예요. “간음한 여인한테 죄 없는 자 돌 던져라” 하듯이 이쪽은 파계한 비구들을 꾸짖는데, 지당한 말을 하고 있는데 가서 까요. 왜냐? 논리가 얕다는 거예요. 그 논리로는 실제로 죄를 없앨 수가 없다. 탐진치에서 벗어날 수 없다. 네가 그렇게 지적한다고 해서 이 사람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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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지 못한다는 거예요. 진짜 구원은 청정광명심 안에서 죄도 본래 없는 그 자리를 만나야만 구원받는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이게 법공의 소식입니다. 이게 나오면서 불교는 자유자재가 된 거예요. 그 전의 아라한은 숲에 갇혀 있던, 탈출만 6도에서 탈출하려고 꿈꾸고 있던 아공 수행자들이 이제 6근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노닐면서 시공을 초월해서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게 보살사상입니다. 화엄경 가면 진짜 시공을 초월합니다. 제가 한 마디가요, 이 시간성 공간성을 한 덩어리로 봐서, 제가 한 한 마디가 이 시공 전체에 영향을 준다고 보고 말을 해요. 사고가 폭이 차원이 달라집니다. 왜? 4차원 시공 한 덩어리니까. 과학에서도. 그걸, 화엄경은 그걸 알고 노래한다니까요. 시공을 왔다 갔다 하는 얘기를 한다니까요. 왜냐하면, 시공 자체에서 초월해 있으니까, 청정광명심이.
36:02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
사고가 이렇게 확장해 가지고 법공 구공 사상이거든요. 그래서 이게 초기 불교로 담지를 못합니다. 다만 지금 계속 제가 초기 불경에 있는 께왓다경을 가지고 설명할 수 있듯이 부처님 안에서 이미 다 나온 얘기들이에요. 그 얘기들이 새로운 조합을 만들어낸 것뿐입니다. 그런데 새로운 조합을 읽어내야 되는데 니까야로 보는 반야심경, 뭐로 보는 반야심경 해서 다 죽여버려요. 이래가지고는 절대 반야심경을 이해하지 못한다. 대승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반야심경을 이해하겠어요. 왜 이런 말을 했는지를 알아야 돼요. 5온이 그대로 공이다. 공의 작용이 5온이라는 건 영원히 우리는요 현상계에 머문다는 소리예요. 영원히. 부처가 되면요? 청정한 5온으로 등장하겠죠. 그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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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온의 질을 바꾸는 거지 5온 자체를 날리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밀교(密敎)가 등장해서 5온을 청정하게 바꾸는 법을 주로 탐구한 게 밀교입니다. 그래서 밀교는 호흡수련 해서 에너지 만들고 하는 거예요. 이제 실제로 몸을 가꾸는 데 집중해요. 영성계 헬창(헬스에 미친 사람)들. 몸을 가꿔요. 대승에 오면 몸을 가꿔요. 대승과 소승의 차이점이 제일 대표되어 있는 차이점이 그겁니다. 소승은 해탈해서 열반만 얻잖아요. 그걸 해탈신(解脫身)이라고 그래요. 청정광명심을 얻긴 얻는데 해탈한 부분만 얻지만 우리는 색신(色身) 보리신(菩提身)을 얻는다. 무한한 전지전능한 지혜의 몸, 물질의 몸을 얻게 된다. 그래서 법신(法身)만 얻느냐? 색신(色身)까지 얻느냐에서 대소승을 구분합니다, 불교 경전들이. 그런 거 보시면요 충격적이에요. “아니 왜 부처님이 자꾸 이렇게 몸에 집착하시지?” 하는. 밀교 경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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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시다 보면. 유식학만해도, 대승경전들이 다 그래요, 근본적으로. 유식학 해심밀경에 가서도 똑같아요. 소승은 절대로 몸을 못 가져요. 열반에 들 수만 있지. 그런데 대승은 자유자재로 색신을 나툽니다. 그래서 얼마나 장엄한 몸을 갖췄느냐가 대승을 입증하는 게 돼요. 이상하죠. 이제 이야기가. 초기 얘기에서 많이 멀어집니다. 그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가 뭐라고요? 법공 논리예요. 그러니까 법공을 잘못 이해해버리면 대승불교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왜 얘네들은 갑자기 몸뚱이에 집착하기 시작했지? 왜 밀교를 가지고 하지? 왜 티벳 절에 가면 남녀가 합체돼 있는 불상이 있지? 저질이야.” 제가 번역한 용호비결이 용호(龍虎) 합일을 얘기한 거거든요. 그게 남녀로 비유돼가지고 불상까지 만들어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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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불 이런 합체불들이 있습니다. 음양을 합해야 된다. 이런 얘기가 나와요. 이거는 다 보고서 나온 거예요. 후천적인 5온을 변화시키는 것은 결국 음양 이론이 등장하는 거예요. 밀교적 이론이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현상계를 더 자유자재로 경영하는 문제로 관심을 돌렸기 때문에 대승보살도는 정치나 경제나, 유마거사는 재벌이었죠, 정치나 경제, 왕들도 보살로 등장합니다, 화엄경에는. 그래서 모든 게 다 이제 그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남녀 문제까지 해가지고 다. 사바세계의 모든 것은 그대로 연금술적인 정신을 갖고 사바세계의 모든 것을 청정광명심이 모든 걸 정화시키는 보배로운 구슬이라고 합니다. 마니주(摩尼珠)라고 하는데 불교에서 마니주만 넣으면 흐렸던 물이 청정해진대요. 사바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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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가 이 청정광명심을 복용하면 다 청정해져요. 왜? 본래 청정광명심의 작용이기 때문에. 본래 작용이니까 가능한 거지 억지로 하는 게 아니에요. 자 이런 논리들은 힌두교 논리와도 통합니다. 힌두교까지 포섭할 수 있는 철학이 등장한 게 대승이에요. 대승불교가 인도에서 그렇게 나온 건데 힌두교한테 졌죠. 그래서 인도에서는 또 인도인들이 힌두교인, 굳이 힌두교 있는데 왜? 이러면서 힌두교로 많이 믿다가, 대승불교가 그나마 힘을 떨치다가, 이슬람교의 공격을 받고 나란다대학 파괴되고 하면서 싹 날아갔죠. 여러 가지 불운이 겹쳐가지고 사라졌는데. 이런 것 같아요. 대승불교는, 그러니까 해탈쪽은 해탈쪽은 초기 불교에서 강조하던 건데 대승불교는 그걸 더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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펼쳐가지고 시바신을 모델로 한 관세음보살 같은 존재들이 등장하고 하면서 완전히 사바세계를 경영하는 철학으로 등장하게 됐는데, 기존 불교 안에서도 소화가 안 된 거예요. 소승과 대승이 섞이고,. 내부 정리도 잘 안 되는 중에 힌두교에 밀리고, 또 이슬람의 공격을 받고 하면서 사라진 겁니다. 그래서 지금 제대로 된 대승을 복원한다는 게 쉽지가 않다. 인도에서도 사라진 철학인데 왜 그런데 재미있는 건 대승철학이 몽골족들만 그렇게 좋아해요. 티벳, 중국, 일본, 한국 해가지고 몽골족들만 엄청 좋아해요. 더운 나라들은 소승으로요. 더워 죽겠는데 무슨 경영이에요. 어디 그늘만 있으면 찾아가서 쉬고 싶은데. 그러니까 6도에서 탈출해서 쉬고 싶은 소승철학이 히트치는 데들은 더운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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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간 철학들이 그렇고요. 약간 추운 지역,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쪽은요 다 대승합니다. 그러니까 더 잘 살려고, 더 사바세계에 더 경영을 잘하려고, 더 많은 사람을 도와주려고 홍익인간 철학이 있는 쪽은 대승사상이 들어옵니다. 같이 보시고요. 대승의 맛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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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녹취) [홍익학당] 진여와 열반 26강 - 반야심경 2(42:23) (홍익학당) | 작성자 수호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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