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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리산 성지
행정 구역으로 분명히 안양시 안양 9동, 시 중심가에서 불과 몇 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적한 첩첩 산중이 나선다. 서울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해 있는 안양 수리산(修理山)은 산의 이름 그대로 세상의 이치를 하느님의 섭리로 갈고 닦았던 곳이라는 뜻인가.
예로부터 담배를 재배해 왔다 해서 '담배골', 또는 골짜기의 생김새가 병목처럼 잘록하게 좁다고 해서 '병목골'이라고도 불리었던 수리산은 박해 시대 때 외부 세계와 단절된 천혜의 피난처 구실을 해 왔다.
김대건 신부와 함께 한국 최초의 방인 사제로 피땀 어린 사목 활동을 폈던 최양업 신부의 부친 최경환 프란치스코(崔京煥, 1805-1839년) 성인의 묘가 수리산 적막한 골짜기에 모셔져 있다. 이곳에는 남부럽지 않은 집안을 일구어 오다가 천주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고향을 멀리 떠나 방랑해야 했던 그들 일가의 애환이 서려 있다.
최경환 성인은 본래 청양 다락골 사람이었다. 3대째 신앙을 지켜 왔고 지역에서 당당한 풍모를 자랑하던 최씨 집안은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이 되어 마카오로 떠난 후 고발을 빙자한 수많은 협잡배들로 인해 가산을 탕진하고 가족과 함께 서울 벙거지골, 강원도 춘천 땅으로 유랑길을 나선다. 하지만 계속되는 배신자들의 등쌀로 다시 경기도 부평을 헤매야 했고 최후에 정착한 곳이 바로 수리산 깊은 골짜기였다.
1837년 7월 수리산에 들어와 산을 일구어 담배를 재배하면서 박해를 피해 온 교우들을 모아 교우촌을 가꾸면서 그는 전교 회장직을 맡아 열렬한 선교 활동을 편다.
순례자 성당 외부.하지만 그를 쫓는 발길은 이 깊은 산 속에까지 미쳐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에게 붙잡히고 만다. 하지만 기록에 보면 그는 체포라기보다는 스스로 순교의 각오로 포졸들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어느 날 새벽 포졸들이 집 앞에 들이닥치자 "어찌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는 당신들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지만 아직 동이 트질 않았으니 좀 쉬었다가 떠납시다."라며 동네 사람들에게 순교의 용기를 북돋는다.
그의 부인 이성례 마리아(李聖禮, 1801-1840년)가 차려 준 아침을 먹고 난 포졸들은 40여 가구에서 골고루 한 명씩을 잡아갔지만 최경환만은 아들을 유학 보냈다는 죄목으로 부인 이성례, 아들 희정, 선정, 우정, 신정 그리고 젖먹이까지 모두 일곱 식구를 잡아가 옥에 가두었다.
여기서부터 시작된 최씨 일가의 비극은 후손들의 눈시울을 붉게 물들인다. 다섯 자식을 모두 끌고 옥에 갇히게 된 어머니 이성례는 세 살짜리 막내가 굶주림으로 숨이 끊어지자 그만 실성할 지경이 되고, 네 아이 모두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배교하겠노라 말하고 네 아이를 이끌고 풀려 나온다. 하지만 옥에 갇힌 남편 생각에 정신을 차린 그녀는 아이들이 동냥을 나간 사이에 다시 갇힌 몸이 된다. 4형제는 옥으로와 어머니를 목메어 부르지만 어머니는 다시 또 배교의 죄를 지을까 두려워 등을 돌린 채 자식들의 목소리를 애써 외면한다. 어린 자식들은 발길을 돌려야 했고 그 후로 동냥한 음식을 옥에 갇힌 부모에게 사식으로 넣어 주었다.
성례 마리아의 집에서 성인 묘소 산길 입구까지 계곡 옆으로 조성된 묵주기도 길.1839년 9월 12일 최경환 성인은 치도곤을 맞은 후유증으로 옥에서 치명한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1일에는 그 부인 이성례가 당고개에서 참수된다. 어머니의 참수를 앞두고 소식을 들은 어린 4형제는 온종일 동냥한 쌀자루를 메고 희광이를 찾아가 단칼에 어머니를 하늘나라로 보내 달라며 쌀자루를 건네는 눈물겨운 장면을 연출한다. 그리고 당일 한칼에 목이 떨어지는 어머니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던 어린 자식들은 동저고리를 벗어 하늘에 던지며 어머니의 용감한 순교를 기뻐했다고 전한다. 이성례 마리아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현재 담배골 부근은 도시화의 영향으로 옛 마을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지는 않다. 성지 입구에는 순례자 성당과 피정을 위한 성례 마리아의 집이 자리하고 있다. 여기서 50여 미터만 올라가면 최경환 성인의 고택이 2008년 복원되어 성당으로 사용되고 있고, 고택 왼편 계곡을 건너 산을 오르면 최경환 성인의 묘역이 나온다. 성인 묘역까지 오르는 길에는 1987년 안양 시내 교우들이 세운 14처가 있고 묘역에는 동굴 성모상과 야외미사터가 마련되어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0월 23일)]
수리산, 골배마실, 은이 - 박해 시대의 교우촌
박해의 칼날을 피해 비밀리에 형성된 전국의 교우촌들은 영원한 본향(本鄕)인 천당길을 얻으려는 숨은 꽃(隱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신앙을 지켰으며, 순교를 향한 오랜 고통과 세월을 참고 기다려야만 했다.
우리 본향 찾아가세.
인간 영복(永福) 다 얻어도
죽고 나면 허사되고,
세상 고난 다 받아도
죽고 나면 그만이라.
아마도 우리 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 없네.
(최양업 신부의 천주가사 '사향가' 중에서)
그러나 그 대부분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홀연히 형성되었다가 배교자나 포졸들의 눈에 띄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 우리 교우촌이었다. 다행인 것은 현재까지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곳이 곳곳에 남아 있고, 신앙 후손들에게 그 신심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1830년대 최양업(토마스) 신부의 부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에 의해 교우촌으로 가꾸어진 수리산(修理山, 안양시 안양 3동의 뒤뜸이 마을). 성 김대건(안드레아) 신부가 성장한 골배마실(용인군 내사면 남곡리)과 이웃 '숨은 이들의 마을' 은이(隱里) 교우촌. 이 두 지역은 경기도에서도 가장 유명한 교우촌이자 카타콤바와 같은 박해 시대의 비밀 교회로서 신앙을 이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1836년 초 수리산에서는 최양업이 교우들의 추천으로 신학생으로 선정되었고, 얼마 뒤에는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도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함께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수리산이나 골배마실 골짜기는 땅이 척박하였으므로 신자들 대부분이 화전이나 담배 농사를 지어 생활을 꾸려가야만 했다. 그러니 생활에 여유가 있을리 없었지만 그들은 언제나 새 신자들을 환영하였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그들이 생활 터전을 마련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 신부의 방문이 있을 때면 여럿이 모은 공소전(公所錢)을 바쳐 교회 사업을 도왔으며, 아침 저녁으로 함께 모여 기도하는 것을 일상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하였다. 이것이 바로 초대 교회로부터 내려오는 나눔과 섬김의 전통이었다.
최경환 성인 고택 입구. 고택 내부는 성당으로 꾸며져 있다.1839년의 기해박해 때 이곳은 모두 포졸들의 습격을 받게 되었다. 당시 수리산의 회장 최경환은 이미 순교를 각오하고 있던 터였으므로 태연히 그들을 맞이하였다. 뿐만 아니라 아내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에게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도록 한 뒤 교우촌 신자들과 함께 오랏줄에 묶인 채 포도청으로 끌려갔다. 그리고는 무지한 형벌을 여러 차례 받은 뒤 그 상처 때문에 옥중에서 순교하고 말았다. 반면에 최양업 신부의 모친 마리아는 두 살짜리 막내 자식에 대한 육정(肉情, 모정)을 이기지 못하고 배교하였으나, 이내 잘못을 뉘우친 뒤 끊어지는 육정을 억누른 채 순교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마리아는 첫 번째의 배교로 제외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린 자식 때문에 일시 배교했으나 이를 뉘우치고 순교한 사실은 오히려 조선의 전통에서 본다면 모정과 신앙을 모두 지킨 모범적인 순교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시복 과정에서는 마땅히 마리아를 다시 '하느님의 종'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 골배마실에 살던 김대건의 부친 김제준은 사위 곽(郭) 씨의 밀고로 체포되어 순교하였으며, 아내 고 우르술라는 동냥으로 목숨을 부지해야만 하였다. 그러니 첫 번째 방인 사제가 되어 귀국한 뒤 모친을 뵙게 된 아들 김대건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김대건이 골배마실로 돌아와 모친과 함께 생활하면서 은이 공소를 중심으로 활동한 것은 1845년 말부터 다음해 부활절까지였다. 그러다가 그는 황해도 지방의 해로를 개척하러 나갔다가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다.
성지 입구의 순례자 성당과 성례 마리아의 집. 가운데 길로 조금 올라가면 왼쪽으로 최경환 성인 묘역이, 오른쪽으로 최경환 성인 고택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경환과 김제준이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가족들에게 거두어져 수리산 자락과 골배마실 인근에 각각 안장되었다. 그러나 최경환의 무덤이 후손들에 의해 가꾸어져 온 반면에 김제준의 무덤은 잊혀지고 말았다. 이후 최경환의 유해는 1930년에 발굴되어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되었으며, 본래 무덤 자리와 교우촌은 1965년부터 사적지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또 골배마실에는 1962년 양지 본당 신자들에 의해 김대건 신부상이 건립되었고, 은이 공소 터는 최근에 일부가 매입되어 사적지로 조성되고 있는 중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5월호]
교우촌 수리산
모방 신부는 조선 입국 이래 끊임없이 지방 교우촌을 순방하면서 가는 곳마다 회장을 임명하거나 신자 집단을 새로 조직하는데 열중하였다. 이때 성 이문우(李文祐, 요한)가 그의 복사로 활동하였는데, 그는 이천의 '동산밑'(경기도 이천시 동산리) 출신으로 춧날 천주가사 "옥중제성"(獄中提醒)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모방 신부가 방문한 교우촌 중에서 유명한 수리산(修理山, 경기도 안양시 안양 4동의 담배촌)과 골배마실(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이 들어있었다.
수리산은 최양업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된 성소의 터전으로,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 성인을 탄생시킨 곳이었고, 성인의 시신이 묻혀있던 성지이다. 1970년대까지도 그 앞으로는 수리산 자락의 뒤뜸이 마을과 좁은 입구로 가려진 병목 안 마을이 자리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개발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수리산 교우촌의 중심지인 뒤뜸이는 본래 아무도 살지 않던 곳이었는데, 신자들이 새 마을을 이루면서 신촌(새말)이라 불리게 되었고, 담배 농사를 지으며 생활한 탓에 담배촌으로도 불리었다.
이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다. 일설에는 1837년경이라고 하지만 근거는 없다. 여러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볼 때, 이보다 훨씬 전인 1832년경에 성 최경환이 처음으로 가족들을 이끌고 이곳에 정착했다고 생각된다. 최경환은 1804년 충청도 다락골의 새터(지금의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태어나 세 살 위인 이성례(마리아)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18세 때인 1821년에 아들 최양업을 얻은 뒤 형제 가족들과 함께 서울 낙동(서울 중구 회현동)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러던 중 거처가 발각될 위험이 있게 되자, 이곳 저곳으로 옮겨 살다가 마침내 이곳 수리산에 정착하여 교우촌을 일구게 되었다.
1836년 초에 15세의 장남 최양업을 천주의 종으로 바친 최경환은 회장으로 임명되어 교우들을 돌보다가 1839년의 기해박해(己亥迫害) 때 체포되어 포도청에서 갖은 형벌을 받으면서 40일 이상을 항구함으로 버텨냈다. 이에 형리조차 그를 바위와 같은 사람이라고 하면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러나 형벌로 헤어진 몸을 가누지 못하고 마침내 옥사로 순교하였으니,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6세였다.
최경환 회장이 순교한 뒤, 옥졸들은 그 시신을 가마니에 넣어 노고산(老姑山, 마포 노고산동의 서강대학교 뒷산) 밑에 갖다 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둘째 형 최영겸(崔英謙) 부자가 그 시신을 찾아 이름을 적은 사발과 함께 그 산 중턱에 가매장하였다가, 몇 해가 지난 뒤 시신을 발굴하여 뒤뜸이 앞 수리산으로 이장하였다. 그 후 최경환 회장이 1925년에 복자품에 오르게 되자 교회 당국에서는 1930년 5월에 그의 무덤을 찾아 시신을 발굴하여 명동 대성당 지하 묘지에 안치하였고, 1967년에는 다시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 모셨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8년 6월호]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9.20) 기본정보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두 번째 방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부친으로 충청도 홍주군 다래골의 어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천주교의 계명을 지켰다. 그는 원래 성질이 괄괄해서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를 억제할 수 없을 정도였으나, 신앙의 힘으로 많은 노력을 한 결과 사람들은 그가 본래 성질이 온순한 사람인 줄 알았다고 한다.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는 우상숭배에 빠진 주위 사람들 속에서는 참 신앙생활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서울 벙거지골이라는 동네로 이사를 하였다. 그러나 이사를 하자마자 외교인과의 송사 문제로 가산을 탕진하게 되어 가족을 이끌고 산골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생활하다가 마지막으로 자리 잡은 곳이 과천 고을 수리산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자기의 본분을 지키며 종교서적을 자주 읽고 가난 중에도 애긍시사를 하니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여 그의 권고를 즐겨 듣고 천주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려고 멀리서도 찾아오곤 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훗날 다음과 같이 회고 하였다. “저의 부친은 자주 묵상하고 신심서적을 대하셨으며, 언제나 종교와 신심외의 것은 말하지 아니하셨으며, 아버지의 말씀은 힘 있고 설복시키는 능력이 있어 모든 이에게 천주의 사랑을 심어 주셨다.”
기해박해가 엄습하고 또 서울과 인근 지방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을 때, 회장으로 임명된 그는 많은 의연금을 모아 옥에 갇힌 사람들을 돌보아 주었고, 순교자의 시체를 매장하였다. 그리고 집안사람들에게 순교토록 준비시킬 때가 된 것을 알고 성패와 성물을 감추었으나 서적은 감추지 아니하였다. 이것을 보고 조카 최 요한이 놀라서 “다른 교우들은 혐의를 받을만한 것을 모두 감추는데 이 책을 그렇게 내어 두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성물은 불경한 무리들이 더럽히지 못하게 감추는 것이지만, 서적이야 어디 강복한 물건이냐? 군사가 전쟁 때에 병서를 참고하지 않고 언제 하겠느냐?” 하고 대답하였다고 한다.
1839년 7월 31일 밤 서울에서 내려온 포졸들이 수리산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최 프란치스코의 집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마치 가장 친한 친구를 대하듯 포졸들을 친절한 태도로 맞이하였고, 그의 이러한 태도에 포졸들은 안심하고 누워 잠을 잤다. 해뜰 무렵에 포졸들을 깨워 음식을 대접하고는 프란치스코와 남자들과 큰 아이들이 앞장서고, 그 뒤로는 부인들과 젖먹이들이 따라가고, 맨 뒤에는 포졸들이 따라왔다. 때는 7월이라 찌는 듯한 더위로 빨리 걷지를 못하였고 어린 아이들은 피곤하여 울부짖었다. 행인들은 악담과 저주를 퍼붓는 사람도 있고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있었다. 이에 그는 “형제들아 용기를 분발하라. 너희 앞을 서서 갈바리아로 올라가시는 오 주 예수를 보라!”고 하며 격려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어서야 옥에 당도하여 밤을 지냈다.
포장은 프란치스코를 두 차례나 주리를 틀게 하고, 뾰족한 몽둥이로 살을 찌르게 하여 배교한다고 할 때까지 고문을 하게 하였다. 프란치스코의 아들 하나가 나라 밖으로 나갔다는 것을 안 포장은 더욱 분이 치밀어서 무지하게 매질을 하여 그의 팔과 다리의 뼈가 어그러졌다. 그는 태형 3백 40도와 곤장 1백 10도를 맞았다. 다른 많은 교우들은 석방되었으나 끝까지 신앙을 증거한 이는 프란치스코와 그의 아내와 일가 부인 3명뿐이었다. 그 후 프란치스코는 포장대리 앞에 끌려 나가 치도곤 50대를 맞으니 그것이 최후의 출두요 형벌이요 신앙고백이었다. 옥으로 돌아온 그는 “예수께 내 목숨을 바치고 도끼날에 목을 잘리는 것이 소원이었으나 옥중에서 죽는 것을 천주께서 원하시니 천주의 성의가 이루어지이다”라고 말한 후 몇 시간 뒤에 숨을 거두었다. 때는 1839년 9월 12일이요, 그의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1925년 7월 5일 교황 비오 11세(Pius X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복녀, 이성례 마리아(5.29) 기본정보
1801년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난 이성례(李聖禮) 마리아(Maria)는, 내포 지역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집안 사람이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지녔던 그녀는 17세 때 최경환 프란치스코 성인과 혼인하여 홍주 다락골의 새터(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서 살면서 1821년에 장남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낳았다.
이 마리아는 언제나 집안일을 지혜롭게 꾸려 나갔고, 일가친척들이 불화 없이 지내도록 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나이가 어린 남편을 공경하고 그의 말에 순종하면서 가정을 화목하게 이끌어 나갔다. 그러다가 얼마 뒤에는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주하였으며, 박해의 위험이 있자 다시 강원도를 거쳐 경기도 부평,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도 안양시 안양 3동)로 이주하였다. 그동안 장남 최양업 토마스는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마카오로 떠났다.
이처럼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자주 이주하는 가운데서도 이 마리아는 모든 어려움과 궁핍을 기쁘게 참아 내었다.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릴 때면, 요셉과 성모 마리아가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인내심을 갖도록 하였다. 또 수리산에 정착한 뒤로는, 남편을 도와 이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노력하였다.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난 뒤, 남편 최 프란치스코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묻어 주고 교우들을 돌보자, 이 마리아는 남편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그러던 가운데 포졸들이 마침내 수리산 교우촌으로 들이닥쳤다. 이때 그녀는 음식을 준비해서 포졸들을 대접한 다음, 남편 일행의 뒤를 따라 어린 자식들과 함께 한양으로 향하였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 마리아는 남편이나 다른 자식들과 격리되어, 젖먹이 최 스테파노와 함께 여인들의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다음 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으나, 용감하게 신앙을 증언하였다.
이 마리아는 이러한 육체적인 고통보다 갓난아기에 대한 모성애 때문에 더 큰 고통을 느껴야만 하였다. 젖은 나오지 않았고, 먹일 것이 없어서 한 살밖에 안 되는 최 스테파노가 굶어 죽어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남편이 매를 맞다가 순교하고, 최 스테파노가 더러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 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어야만 했던 그녀는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이 마리아는 자신의 본디 마음과는 달리 현세적인 구원을 도모하려는 그릇된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녀는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장남 최양업 토마스가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에서 유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이내 그녀는 다시 체포되어 형조로 압송되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인자하심으로 당신 여종의 나약함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셨다. 형조에 이르자, 이 마리아는 용감한 신자들의 권면으로 큰 용기를 얻게 되었다. 이제 그녀는 이전의 잘못을 진심으로 뉘우쳤고, 재판관 앞으로 나가 전에 한 말을 용감하게 취소하였다. 또 모성애를 비롯하여 모든 유혹을 용감히 이겨 냈으며, 막내아들을 하느님께 바친 것을 기뻐하였다. 이 무렵 그녀의 둘째 아들인 최의정 야고보가 한 달 이상 감옥을 오가면서 모친과 신자들의 시중을 들었다.
이 마리아는 관례대로 마지막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감옥으로 찾아온 자식들에게 “형장에는 오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자신의 마음이 약해질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녀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는 다들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마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1840년 1월 31일(음력 1839년 12월 27일), 이성례 마리아는 동료 신자 6명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원효로2가)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영광스럽게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녀의 나이는 39세였다. 순교 당시까지 그녀는 안온하고 평화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성례 마리아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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