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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7권) 제1부 대망 -불타는 흙 2
가을하늘
츠키야마는 아까부터 마루에 나와 반 각 가까이나 꼼짝 않고 양지쪽에 앉아 있었다.
하늘은 더없이 푸르고, 느티나무 가지에 때까치가 와서 앉아 찢어질 듯이 울어댔다. 그 모습을 때때로 쳐다보며 츠키야마는 한숨을 쉬었다. 노부야스는 어제 무사히 귀환하여 오늘은 본성에서 주연을 베풀 예정이었다.
그 전에 오가 야시로를 만나고 싶었다.
대관절 코슈 군은 어떻게 되었을까? 카츠요리는 어디서 어떻게 나를 맞이하겠다는 것일까?
노부야스가 사자로 보낸 노나카 고로 시게마사는 츠키야마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마침내 나가시노를 함락하여 고이의 마츠다이라 게키 님으로 하여금 수비케 하시고, 성주님은 일단 하마마츠로 돌아가셨습니다. 작은 성주 님께서도 크게 공을 세우셨습니다. 마님, 정말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노부야스가 무사한 것은 물론 기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면 나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야시로를 은밀히 부르러 보냈던 키노의 언니 코토죠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츠키야마는 다시 한숨을 쉬었다. 물론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나가시노 성을 탈환하기 위해 타케다 군은 더욱 공세를 강화할 것이므로 행운이 언제까지나 이에야스 편에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조용히 옆방의 장지문이 열렸다.
"코토죠냐?"
"아니, 키노이옵니다."
츠키야마는 엄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냐?"
나무라는 투로 물었다.
일부러 하마마츠까지 갔으면서도 오만에게는 손도 대지 못한 키노에게 츠키야마는 아직도 화를 누그러뜨리지 못하고 있었다.
키노는 겁먹은 듯이 츠키야마를 쳐다보았다.
"저어, 토구히메 님이 무사히 순산하셨습니다."
"뭣이, 순산을?"
"예... 예."
"아들이냐, 딸이냐?"
"따님이옵니다."
"그래? 딸이라..."
안심한 듯 중얼거리고 다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키노, 작은 성주에게 축하한다고 전해라. 나중에 나도 대면하겠다고 하고."
"예."
키노가 조용히 장지문을 닫았을 때 정원에서 츠키야마에게 말을 건네 온 사람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 안색이 안 좋으십니까?"
츠키야마가 기다리던 야시로였다.
"오, 야시로. 그런데 코토죠는?"
"만나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작은 성주 님과 우리를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야시로는 그대로 마루 위로 올라와 두 손을 짚고 절했다.
"무엇보다도 작은 성주 님과 성주 님이 무사히 개선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그 어조가 너무나 쌀쌀했기 때문에 츠키야마는 순간 깜짝 놀랐다.
"거듭되는 기쁨은 토쿠히메 님의 출산... 이것으로 가문은 만만세 입니다."
"야시로."
"예."
"가문이 만만세 라니... 그렇다면 야시로, 그대의 계획은 어떻게 되는 거요?"
다그쳐 묻는 츠키야마에게 야시로는 더욱 쌀쌀하게 되물었다.
"계획이라니요?"
츠키야마는 너무나 뜻밖인 야시로의 반문에 잠시 동안 말도 못하고 입술을 부르르 떨면서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야시로는 그 눈길을 충분히 의식했다.
"오, 때까치가 시끄럽게 울어대는군요."
하늘을 쳐다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그리고는 꾸짖듯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 작은 성주 님게 고자질을 해서, 방금 무기고 앞에서 뜻하지 않은 말을 듣고 왔습니다."
"사부로에게..."
"예. 나에게 오가 야시로가 반 심을 품었다고 밀고해온 자가 있다, 만일 그것이 야시로가 아니었다면 그대로 믿었을지도 모른다. 앞으로는 그런 미움을 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야시로는 하늘을 쳐다보며 단숨에 말하고 눈길을 츠키야마에게로 돌렸다.
"작은 성주 님은 매우 기분이 좋으셔서 저에게까지 수고가 많았다고 선물을 주셨습니다."
츠키야마는 참다못해 물었다.
"카츠요리 님은 무어라고 하셨나요?"
"성주 님과 작은 성주 님의 무용이 두려워 어느 전쟁터에도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다는 소문입니다."
"어느 전쟁터에도... 그럼, 겐케이는?"
야시로는 그 말에 눈을 치뜨고 조소를 떠올렸다.
"녀석은 보기와는 달리 겁이 많아, 작은 성주 님의 의심을 받을 것이 두려워 어디론가 잠적해버린 줄로 압니다."
츠키야마는 내뱉듯이 말하는 야시로의 대답에 무심코 눈을 부릅뜨고는 무릎걸음으로 다가왔다.
"야시로."
"예."
"나에 대한 약속은 대관절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약속이라니, 누구의?"
"카츠요리 님의 서약서 말이에요. 나를 코슈로 맞이하여 오야마다에게 참가시키겠다고 한 그..."
"마님!"
야시로는 낯을 찌푸리고 입술을 일그러뜨리면서 혀를 찼다.
"말씀을 삼가십시오. 이 야시로는 그런 서약서 따위의 일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뭣이, 지금 뭐라고 했나요? 그 서약서를 모르다니?"
"쉿. 딱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전쟁에는 승패라는 것이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나, 현재로서는 나가시노를 비롯하여 이 가문의 승승장구, 패하는 전쟁이라면 대장으로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게 아닙니까."
"그 말을 들으니 더욱 마음에 걸리는군. 그럼, 카츠요리 님이 전사했다는 소문이라도?"
야시로는 탁 무릎을 쳤다.
"더 이상 이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다시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오늘은 보기 드물게 활짝 갠 날. 곧 본성에서 주연을 베푸실 시각입니다. 작은 성주 님의 씩씩한 모습을 뵈러 가야겠습니다."
야시로는 가만히 혼자 중얼거렸다. 그리고 츠키야마 앞에 두 손을 짚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츠키야마는 쏘는 듯한 눈길로 야시로를 노려보았다. 야시로는 츠키야마의 당황하는 모습이나 분노 따위는 잊은 듯이 태연한 태도로 다시 천천히 정원을 돌아 밖으로 나갔다.
츠키야마는 온몸을 부르르 떨면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 보아도 싱싱하던 피부가 오늘은 네댓 살은 더 늙은 것처럼 축 늘어져 보였다. 그러나저러나 이 얼마나 사람을 무시하는 야시로의 태도인가. 이미 이곳에서는 마음이 떠나, 카츠요리가 마중 올 것을 고대하며 코슈에 대한 꿈을 부풀리고 있는 츠키야마였다.
'일상용품까지 챙기고 몰래 준비하고 있었는데...'
전쟁에는 물론 예측을 불허하는 사태가 있다. 이길 줄 알았던 코슈 군의 전세가 불리해져 예정한 지점까지 나오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법한 일. 그렇다고 해서 오가 야시로가 쌀쌀맞게 자기를 박대하다니 이 얼마나 건방진 태도란 말인가.
'마치 자기 여편네나 하녀처럼...'
이런 생각에 더더욱 몸이 떨리고, 분한 생각이 가슴을 죄어왔다.
'야시로 녀석, 자세한 사정은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츠키야마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리고 떨리는 손으로 문갑 밑바닥에서 카츠요리의 서약서를 꺼내 갈가리 찢어버리려다가 생각을 바꾼 듯 다시 펼쳤다.
지난번 겐케이를 통해 보내신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아드님 사부로 님으로 하여금 이 카츠요리의 편을 들도록 하십시오. 계략이 성공하여 노부나가와 이에야스가 멸망했을 때는 이에야스의 영지는 물론이고 노부나가의 영지 중에서 원하시는 한 곳을 할애해 드리겠습니다.
다음에 츠키야마 님에 대해서는, 오야마다 효에라는 장수가 지난해에 상처하고 홀아비로 살고 있으므로 그의 아내가 되시면 좋겠습니다. 노부야스 님과 상의가 끝나시면, 곧바로 츠키야마 마님을 코슈로 모시겠습니다. 카츠요리 수결
읽어 내려가는 동안 츠키야마의 눈에서 주르르 눈물이 흘렀다. 이 증서 한 장에 츠키야마의 모든 꿈이 걸려 있었다.
남편 이에야스에 대한 복수, 외삼촌 요시모토를 죽인 노부나가에 대한 원한... 이것을 이 세상 어딘가에서 큰 소리로 웃어주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할 망집의 귀신이 되어 있었다.
츠키야마는 그 서약서를 다시 조용히 말기 시작했다. 지금은 코슈 군이 불리하여 아스케와 나가시노도 모두 가증스러운 남편의 손에 떨어졌으나, 이것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반드시 타케다 군은 이 오카자키로 들어온다. 아니면 그 역시 미진한 꿈에 대한 집념일까.
서약서를 다 말고 나서 츠키야마는 공손히 받들었다. 그날이 오기를 남몰래 비는 것만이 지금의 츠키야마에게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때는 야시로 녀석도 그냥 두지 않겠다.'
살아 있으면서도 지옥에 사는 츠키야마는 다시 그것을 문갑 깊숙이 감추고 마르기 시작한 눈물을 닦았다.
이때 야시로를 부르러 갔던 코토죠가 돌아왔다. 그녀는 츠키야마가 지금 문갑 깊숙이 감춘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돌아왔습니다."
두 손을 짚고 말하면서도 코토죠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코토죠의 눈에 비친 츠키야마는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로 처참한 귀신의 형상이었다.
지금까지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으나 오늘은 유별났다. 잔뜩 치켜 올라간 눈이 야릇하게 빛나고 입술이 흙빛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그녀가 침착성을 잃고 눈길을 사방으로 굴리면서 코토죠가 가장 두려워하는 그 밀서를 문갑에 감추고 있는 중이었다.
코토죠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본 츠키야마도 한 순간 숨이 끊어지는 것 같았다.
전에는 깜빡 잊고 선반에 올려놓았다가 코토죠에게 읽히게 했을 정도로 부주의했던 츠키야마도, 지금은 험악해진 주위의 분위기 때문에 의심의 화신이 되어 있었다.
"코토죠냐..."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 보고 있었구나."
츠키야마는 문갑 옆을 떠나 대들기라도 할 듯이 한쪽 무릎을 세우고 있었다.
코토죠는 차라리 눈을 감고 싶었다. 떨지 않으려 해도 떨림이 멎지 않고 대답하려고 해도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단지 카츠요리로부터의 밀서를 본 것만이 아니라, 하마마츠에 다녀온 동생 키노로부터 그곳의 일을 소상하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키노는 하마마츠에서 만난 오만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사심 없는 분."
그리고 오아이에 대해서는 눈물을 흘리면서 극구 칭찬했다.
"마음씨 착한 훌륭한 여장부."
그런 고백을 한 키노의 말도 코토죠에게는 큰 부담이었다. 적에게 은혜를 입고 돌아온 동생. 동생의 마음은 이미 츠키야마보다 오아이 쪽으로 기울어 있는지도 몰랐다.
"코토죠!"
"예."
깜짝 놀라 대답하고 코토죠는 웃으려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기 하나만이 아니라 동생의 목숨까지 위험해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겁을 먹었다.
"보았거든 보았다고 해라."
"예, 보... 보... 보지는 못했습니다마는... 겐케이 님으로부터 무슨... 좋은 소식이라도?"
눈길을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다시 웃었다.
순간 츠키야마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이 같은 표정의 급격한 변화도 코토죠에게는 두렵게 느껴졌다.
'미치기 시작한 것은 아닐까...'
이런 불안이 계속 고개를 들었다... 츠키야마는 갑자기 눈물을 글썽거렸다.
"코토죠."
"예."
"성주 님이 드디어 나가시노 성을 손에 넣으셨다는구나."
코토죠는 그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렇습니까?"
"그리고... 오만도 지금쯤은 이미 출산했을 거야."
"그런 소식이 있었나요?"
"있을 리 없지. 나는 오만을 미워했으니까. 아들일지 딸일지...?"
그렇게 말하고 이번에는 상냥하게 웃으며 옷깃을 여몄다.
"코토죠, 머리가 흐트러졌으니 좀 빗겨주지 않겠느냐?"
코토죠는 옆방에서 거울을 가져왔다. 츠키야마의 뒤로 돌아가 검은머리를 풀기 시작했다. 거울 속에서 마주친 눈길이 눈물을 머금은 채 힘없이 웃고 있었다.
"코토죠."
"예."
"나는 하마마츠의 성주 님께 사죄를 해야겠지?"
코토죠는 당황하여 눈길을 피했다. 순간 가슴이 뭉클했다.
늘 감정의 굴곡이 심한 마님. 무서울 대는 귀신처럼 보이고 악마처럼도 보였으나, 그것이 어떤 순간에는 더없이 애처롭고 가련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느 쪽이 진정한 마님의 모습일까...?'
계속 조마조마해 하며, 코토죠는 그 어느 쪽도 거짓이라 할 수 없는 면이 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약한 마음을 가지십니까?"
츠키야마는 대답 대신 가만히 눈물이 맺힌 눈꺼풀을 눌렀다.
"오만의 출산도 진심으로 축하해줄까 생각한다. 성주 님이 기뻐하신다면... 코토죠, 그런데 성주 님은 정말 나를 미워하실까?"
"아닙니다, 그럴 리가..."
대답하다 말고 코토죠는 깜짝 놀라 입을 다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런 말을 묻는 것일까?'
이것을 확인하지 않고 섣불리 말했다가는 나중에 어떻게 변할지 무서웠다.
"그렇지 않을 거라고 너도 생각하느냐?"
"예... 예. 그럴 까닭이 없다고..."
"그래? 이만 됐다. 아주 잘 빗었구나. 치워도 좋아."
"그러면..."
코토죠는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으로 도구를 정리했다. 그동안 츠키야마는 사람이 달라진 듯이 부드러운 태도로 고쳐 앉았다.
"나도 이제 마음을 바꾸겠어. 카메히메를 만나고 싶구나. 이리 들라고 해라."
코토죠는 시키는 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오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했다.
주위의 사정이 츠키야마에게 결코 호전되고 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겐케이로부터 그 후에 소식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고, 야시로는 츠키야마에게 몹시 쌀쌀맞았다. 노부야스의 부인 토쿠히메는 무사히 딸을 낳았고, 늘 미움의 대상이었던 하마마츠의 오만에게도 전혀 손을 쓸 수 없었다.
이러한 일들이 거꾸로 츠키야마의 마음을 진정시켜 깊이 생각하는 계기를 만들어준 것일까?
만일 그렇다면 코토죠도 키노도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 수 있을 텐데...
둘째 성에 있는 노부야스의 누나 카메히메의 방에 왔을 때 그녀는 언짢은 얼굴로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노부야스에게 불려가 있었는데, 이제부터 어머니를 찾아가려 하고 있던 참이었다.
"어머님의 심기는?"
"예, 좋으십니다."
코토죠가 이렇게 대답하자 카메히메는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몹시 기분이 나쁜 것 같아 준비가 끝날 때까지 코토죠는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노부야스의 누나 카메히메는 장성함에 따라 점점 더 눈에 띄게 버릇이 나빠져 갔다. 천성적으로 억센 성격이라기보다도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듯 종종 하인들을 무섭게 꾸짖고는 곧 사과하곤 했다.
그런 만큼 성안에서는 노부야스의 부인 토쿠히메, 때에 따라서는 아야메보다도 가볍게 취급당했다. 우선은 몸집이 작은 탓이었고 마음먹은 것을 그대로 입밖에 내는 탓도 있었다. 이런 카메히메는 노부야스보다 어리게도 보였다.
그 카메히메가 찾아오자 츠키야마는 녹아들 듯이 웃었다.
"이번엔 경사가 겹쳤어."
이런 것도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카메히메는 눈을 크게 뜨고 앉기가 바쁘게 버릇없이 물었다.
"경사가 겹치다니요?"
"작은 성주는 무사히 개선하고 성주 님은 나가시노 성을 손에 넣으셨어. 그리고 작은 마님과 오만이 출산을... 이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인지 몰라."
카메히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라면 별로 이의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어머님, 제 혼담이 결정된 모양이에요."
그러나 곧 잔뜩 부은 얼굴로 던지듯이 내뱉었다.
"저는 어디까지나 작은 성주나 아버님의 의사에 따르기로 작정하고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오쿠다이라 집안으로?"
카메히메는 다시 아무렇게나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에 작은 성주가 찾아와, 아버님의 분부이시니 다른 생각은 말라고 엄한 얼굴로 말했습니다."
"사부로가 직접 찾아와서?"
"예. 기후의 성주 님이 중매한 것이므로 괜히 고집을 부리면 오다와 도쿠가와 양가 사이에 균열이 생길 테니 단단히 각오라면서."
카메히메의 말을 들은 츠키야마의 얼굴이 갑자기 파랗게 질렸다. 오다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도 츠키야마 앞에서는 입밖에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문 앞에 선 채 코토죠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오다의 성주님이 중매를 했다니 이 얼마나 얄궃은 일인가...'
조마조마해 하면서 츠키야마의 기색을 살폈다.
이토록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 계속되어서는 나중에 닥칠 폭풍이 걱정이었다. 그런 어머니의 동요를 모를 리 없는데도 카메히메는 다시 서슴없이 말을 내뱉었다.
"어머님도 저도 따지고 보면 말 한 필이나 칼 한 자루처럼 취급당하고 있어요. 공을 세운 가신에게 주는 선물에 지나지 않아요."
코토죠는 더 이상 츠키야마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언제나 그런 사실들에 대해 심한 저주의 말을 퍼붓고 미쳐 날뛰는 츠키야마가 아니었던가...
"카메히메."
잠시 후 츠키야마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딸에게 말했다.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왜죠?"
"그것은 사부로나 아버님이 나빠서 그런 것은 아니야. 그러지 않고는 살아남지 못할 더 가혹한 세상이 있기 때문에..."
코토죠는 깜짝 놀라 츠키야마를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누가 그런 말을 해도 절대로 들으려 하지 않은 츠키야마였다. 그 츠키야마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말에 코토죠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카메히메 역시 의아하다는 얼굴로 어머니를 보고 있었다.
츠키야마는 고개를 갸웃하는 카메히메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말했다.
"내 말을 수긍할 수 없는 모양이로구나..."
그리고는 가만히 사방침을 앞으로 가져다 놓았다.
"이 어미도 지금까지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어. 이 세상의 바람은 남자들에게보다 여자에게 더 가혹하다. 아니, 여자에게 가혹한 바람을 보내는 것은 남자들이라고 생각했었어."
츠키야마의 어조가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에, 카메히메의 얼굴에는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하는 호기심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
코토죠는 숨을 죽이고 모녀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이 바람은 남자들에게 더 가혹하다는 것을 알았어. 여자는 그런 대로 출가한 곳에서 살 수 있어. 그러나 남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생사의 갈림길이라는 현실을 알았지..."
카메히메는 소리내어 웃기 시작했다.
"카메히메, 뭐가 우습다는 것이냐. 이 어미가 여태껏 걸어온 길을 말하고 있는데."
"그럼, 어머님은 이제 아버님을 용서하셨나요?"
"용서하고 말고 할 것도 없는 일을 가지고 혼자 애를 태웠다는 사실을 깨달았지. 카메히메, 이 어미가 부탁하겠다. 아버님이나 사부로의 뜻에 거슬리는 짓은 하지 말기 바란다."
"그런 말씀을 하시면서도 사실은... 터놓고 하실 말씀이 있는 것이겠죠, 어머님?"
"무... 무... 무슨 말이냐, 그것이."
"괜찮아요. 어머님 마음은 저도 대충 짐작하고 있어요. 그래서 상의 드리려고 온 거예요."
카메히메는 흘끗 코토죠를 바라보고는 목을 움츠렸다.
"어머님, 저는 작은 성주에게 뜻대로 하라는 말을 남기고 왔어요."
"그래야지, 그래야 해."
"중매인은 기후의 성주 님, 그래서 저는 혼담이 진행되어 시집가기로 정해진 날에 깜짝 놀랄 일을 벌일 거예요. 그게 최선이죠! 그렇죠, 어머님?"
"아니... 그런."
깜짝 놀라 몸을 앞으로 내미는 츠키야마 앞에서 카메히메는 재미있다는 듯이 몸을 흔들며 웃고 있었다.
"아버님도 깜짝 놀라실 것이고 기후의 성주 님 체면은 납작해질 거예요. 어머님, 저는 어머님 딸이에요. 어머님께 억울한 일은 저에게도 억울해요. 아버님 마음대로는 하지 않겠어요."
코토죠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겁먹은 눈길로 모녀의 모습을 살폈다. 갑자기 사람이 달라진 듯한 어머니와, 그 어머니의 이전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는 딸의 대결. 얄궃다기보다도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마른침을 삼키게 되는 장면이었다.
"아니면 어머님께 더 좋은 수단이라도 있으신지..."
"카메히메!..."
"예."
"너는 이 어미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는구나."
"후후후, 말씀보다도 더 깊은 곳을 보고 있습니다."
"..."
"어머님, 무언가 생각하시는 것이 있지 않아요? 저에게 말해주세요. 어머님답지 않으시군요!"
그 말을 들은 츠키야마의 눈에는 다시 반짝반짝 이슬이 빛났다.
코토죠는 여전히 마른침을 삼키고 있었다. 만일 카메히메의 관찰이 정확하여, 츠키야마가 무언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코토죠 자매의 운명과도 관계가 있었다.
'마님의 눈물은 무엇을 의미하고, 눈물 속에 숨은 눈빛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어머님, 저도 생각은 하고 있어요. 마침내 시집가게 될 때 모두의 체면을 납작하게 만들어줄 것인가, 아니면 태연히 시집을 갔다가 깜짝 놀라게 만들 것인가."
카메히메는 도리어 즐겁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어머님 같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물론 저는 어머님 말씀대로 할 것인지 아닌지는..."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하고 웃었다.
"카메히메!"
츠키야마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엄한 목소리로 꾸짖었다.
"그러면 안 돼. 인생이란 장난이 아니야."
"물론 장난이 아니에요. 바로 그래서 남자들이 마음대로 하는 장난감은 되지 않겠다는 거예요."
"너는 이 어미가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냐?"
"후후후, 잘 알고 있어요. 후회하는 것처럼 꾸며 적을 방심하게 만들려는 계획, 저는 그것이 못마땅하여..."
"말조심해!"
그 말에 카메히메보다 코토죠 쪽이 더 놀라 머리를 조아렸다. 조아린 그녀의 귀에 요란한 때까치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어머니와 딸은 계속 아무 말도 없었다.
이윽고 카메히메가 벌떡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어머님까지 그런 생각이시라면 저는 앞으로 누구도 의지하지 않겠어요. 제 생각대로 하겠어요."
"카메히메!"
"안녕히 계세요. 코토죠, 이만 돌아가야겠다."
코토죠는 황망하게 일어나 현관까지 그녀를 배웅했다.
"카메히메 님, 그러면 마님께서는..."
현관 마루에 이르렀을 때 겨우 이 말을 꺼내자 카메히메는 뒤를 돌아보고 목을 움츠리며 키득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얼굴에 노기를 띠고 사라져갔다.
코토죠는 그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되돌아왔다.
츠키야마는 마루에 나와 기둥에 손을 대고 서 있었다. 코토죠가 돌아왔는데도 돌아보지 않고 나무 사이로 뚫린 푸른 하늘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코토죠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카메히메가 손도 대지 않고 남겨둔 찻잔과 과자그릇을 치우기 시작했다.
술은 창고를 지키는 아시가루에게까지 돌아간 모양인지 그쪽에서 왁자하게 떠드는 소리와 함께 손뼉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코토죠..."
"예... 예."
코토죠는 정리를 끝내고 츠키야마 뒤에 공손히 대령하고 있었다. 츠키야마는 기둥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렸다.
"저 깊고 푸른 가을 하늘이 나를 빨아들이는 것 같구나... 부축해다오. 너만은 나를 꼭 부축해다오."
코토죠는 얼른 일어나 그 말에 따라 츠키야마의 팔을 어깨로 부축해 주었다. 다시 아시가루들의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차남 탄생
나가시노에서 하마마츠로 철수한 이에야스는 온몸에 마른풀과 말가죽 냄새를 풍기며 쉴 틈도 없이 일했다.
오랫동안 전쟁터에서 지냈기 때문에 분명히 여윈 모습일 줄 알았는데, 밭갈이용 밤색 말을 연상케 하는 씩씩한 모습으로 돌아온 그는 돌아온 그 날부터 사방팔방으로 사람을 보내 영내의 경작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이 정도면 평년작 이상이다."
물론 그가 없는 틈을 이용하여 공격하려 했던 타케다 군은 모리고까지 들어왔으면서도 손을 쓰지 못했다. 오스가 고로자에몬, 혼다 사쿠자에몬, 혼다 헤이하치로, 사카키바라 코헤이타 등 최 정예 맹장들을 성에 남겨둔 탓도 있었다. 그러나 당장에라도 철수할 것같이 보이고는 엔슈에 있는 적의 배후를 휘저어 거꾸로 나가시노 성에 총공격을 가한 그의 놀라운 전략이 타케다 군에게 움직일 기회를 주지 않았다고 해도 좋았다.
타케다 군은 나가시노 함락을 계기로 조금씩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이동에는 젊은 대장 카츠요리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성의 수비대장 혼다 사쿠자에몬 시게츠구는 이에야스의 귀성과 동시에 나가시노 함락을 축하하는 주연이 베풀어질 것을 예상하고 술을 준비시켜놓았다. 그런데 이에야스는 좀처럼 그것을 내놓으라고 하지 않았다.
"성주 님, 탁주가 식초로 변하겠습니다."
사쿠자에몬은 이에야스와 함께 동북으로 이어진 성곽의 방어태세를 점검하면서 슬쩍 운을 떼었다.
햇볕에 타서 눈까지 황금빛으로 보이는 이에야스.
"그게 무슨 상관인가."
가볍게 넘겨버렸다.
"성터에 풀이 자라게 하기보다는 식초를 만드는 편이 더 좋아, 사쿠자에몬."
사쿠자에몬은 그의 성격상 바로 승복하지는 않았다.
"식초는 사기를 오르게 하지 못합니다. 어떤 일에나 나름대로의 이치가 있습니다."
말하고 나서 어떤 꾸중이 돌아올까 하고 잔뜩 부릅뜬 눈으로 이에야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좋도록 하게."
이에야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얼른 다른 곳으로 걸어갔다.
'많이 성장했어, 그 어린 성주가...'
그 날밤 사쿠자에몬은 성주의 이름으로 모두에게 술을 내놓았다.
성안에는 터질 듯한 활기가 넘치고, 이때에도 코헤이타와 헤이하치로가 이에야스 앞에서 거침없이 춤을 추었다.
이에야스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바라보고 있었으나 자기 앞에 놓인 잔에는 입을 대지 않았다.
츠쿠데의 카메야마 성에서 타키야마 성으로 들어간 오쿠다이라 사다요시 부자를 도와 타케다 군을 물리치고 돌아온 히라이와 시치노스케 치카요시에게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시치노스케, 내일이라도 오카자키에 가서 사부로를 잘 일깨워주게. 전쟁은 이제부터라고."
그 이튿날 아침이었다.
사쿠자에몬은 성안을 순시하고 있었다. 구석진 발래터에서 오아이가 아직 물이 차게 느껴질 계절도 아닌데 더운 물로 무언가를 열심히 빨고 있었다. 사쿠자에몬이 가까이 가자 오아이는 얼굴을 붉혔다.
"성주 님의 내의, 저어, 이가..."
사쿠자에몬은 모른 체하고 그 자리를 떠나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술잔은 입에 대지 않으면서도 이는 분명히 오아이에게 옮기고 있었다.
'그렇군, 이라는 말을 들으니 생각이 나는군.'
사쿠자에몬은 아직 오만의 출산을 이에야스에게 알리지 않았다.
오전에는 활짝 개어 있었으나 오후부터 하늘에 낮게 구름이 깔리기 시작했다.
하마나 호수에서 그 외해에 걸쳐 납빛 파도가 흰 거품을 일으키고 있었다. 소나무에 와 닿는 매서운 바람에 싸늘한 가을 기운이 담겨 있었다.
"사쿠자에몬, 이 부근의 성곽에 자네 이름을 붙일까 하네."
여전히 진바오리 차림의 조심성 많은 이에야스. 성주는 언제쯤이나 낮에 갑옷을 벗을까.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사쿠자에몬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쩌면 모두에게 마음의 긴장을 늦추지 말라는 훈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마음에 가하는 채찍질인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가신들을 꾸짖는 태도가 전보다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 정도로 이 사쿠자에몬의 방어태세가 마음에 드십니까?"
"그러네, 그대들의 고심을 잊어서는 안 되지."
"성주 님."
사쿠자에몬은 일곱 번째 군용 우물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이에야스의 뒤에서 말했다.
"저는 아직 오만 님에 대한 말씀을 드리지 않았군요."
"음, 유토의 나카무라 겐자에몬이 보살피고 있다지? 지금쯤은 해산할 때가 되었을 텐데."
"성주님, 벌써 출산하셨습니다."
상대의 말이 담담했기 때문에 사쿠자에몬도 담담하게 말했다.
"뭐, 낳았어?"
이에야스는 깜짝 놀란 듯이 사쿠자에몬을 돌아보았다.
"사내아이인가, 여자아이인가?"
"성주 님, 우선 앉으십시오. 성주 님이 너무 바쁘신 것 같아 그만 보고가 늦어졌습니다."
사쿠자에몬은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망루 옆의 돌 위에 자기 손수건을 폈다.
이에야스는 주위를 살펴보고 나서 그곳에 앉아 다시 물었다.
"아들인가, 딸인가?"
"예, 아드님이긴 합니다마는..."
"합니다마는..? 사쿠자에몬, 아들이라면 조심해야 돼."
"조심하다니 누구를 말씀입니까?"
"또 능청을 떠는군. 그대는 능청스런 늙은이야. 오아이에게 어렴풋이 들은 말도 있고 하니 명심하게."
"허어, 그럼 성주 님은 벌써 오아이 님에게 다녀오셨군요. 참으로 빠르십니다."
"그런 농담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사쿠자에몬."
"예."
"나는 츠키야마를 가엾은 여자라 생각하고 있네."
"이 또한 뜻밖의 말씀이군요!"
"세상에는 사랑하고 싶어도 사랑할 수 없는 여자가 있어. 그녀는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이지."
"과연 그럴까요?"
"만나기만 하면 늘 대드는 거야. 정보다 원한이 앞선다면, 여자는 자기보다 나은 남자는 만나지 못해. 서로 부딪치면 남자는 성급해진다는 것을 여자 쪽에서 알아야 해."
"성주 님! 저더러 마님께 그런 말씀을 드리라는 것입니까?"
"아니, 그렇지는 않아. 그런 여자이기 때문에 조심하라는 것일세. 경우에 따라서는 당분간 딸이라고 속이고 키우는 것이 좋을지도 몰라. 어쨌든 사내아이임에는 틀림없겠지?"
이에야스의 말에 사쿠자에몬은 정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확실히 사내아이와 사내아이... 성주 님, 사내아이가 한 사람만이 아닙니다."
뜻하지 않은 사쿠자에몬의 대답이었다.
"또 농담을 하는군..."
이에야스는 낯을 찌푸렸다가 얼른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쌍둥이란 말인가, 사쿠자에몬...?"
"그렇습니다. 도련님 두 분이 동시에 태어나셨습니다."
"으음, 둘이 나왔다는 말이지..."
"성주 님, 곧 성으로 맞아들여 형제의 서열과 이름을 정하십시오."
"으음."
이에야스는 고개를 갸웃하고 다시 한 번 한숨을 쉬었다.
"놀라게 만드는군, 태어날 때부터... 그러고 보니 배가 여간 아니게 불렀던 것 같기도 해."
"성주 님, 설마 두 아기 모두를 따님으로 키우려는 것은 아니시겠지요? 저는 성주님의 그러한 마음가짐이 못마땅합니다."
"못마땅하다니, 츠키야마를 꺼리는 일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쿠자에몬은 얼른 대답하고 무릎걸음으로 다가앉았다.
"성주 님은 마님을 언짢게 여기고 계십니다마는, 마님을 그렇게 만드신 죄는 바로 성주 님게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에야스는 그 말에는 대꾸하지 않고 다시 한 번 심각하게 말했다.
"그랬구나, 쌍둥이였구나."
"성주 님!"
"말해보게, 사쿠자에몬."
"이번 일을 계기로 더 이상 마님을 멀리하지 마십시오. 뱀을 설 죽이면 도리어 화가 돌아온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억척스럽고 성가신 분이라 하여 멀리하신다면 더욱 성질을 돋우게 됩니다."
이에야스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점점 더 흐려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면 좀더 엄하게 대하라는 말인가?"
"그렇습니다."
사쿠자에몬은 강요하는 듯한 어조였다.
"겉으로만 냉담한 것처럼 하면 결국 상대를 혼란에 빠뜨려 점점 더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러는 것보다는 차라리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불만이 있느냐! 하고 강하게 나가시는 것이 자비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그만 하세."
이에야스는 사쿠자에몬을 제지하고 다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표정이 되었다.
물론 사쿠자에몬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에야스가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그 가운데서 저절로 상하관계의 서열이 생겼다. 이에야스는 슨푸에 있는 동안 츠키야마에게 필요 이상으로 콧대를 높여주어 우두머리가 둘인 집안으로 만들어버렸다. 다투기가 싫은 탓이었으나, 결국 그것이 츠키야마를 멀리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 억척스러운 것이 슨푸를 떠나 이 낯선 오카자키에서 살게 되었으니...'
이렇게 여기며 국 참아왔고, 이마가와 일족의 전성기를 생각하여 꾸짖는 것도 자제해왔다. 그것은 분명히 이에야스의 실수여서, 그럴 때마다 츠키야마의 반항이 심해졌다.
'사쿠자에몬의 말대로 무섭게 꾸짖고, 꾸짖고 나서 사랑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이제는 그 골이 너무 깊어졌다. 오만을 나카무라 겐자에몬의 집에 숨기게 된 사정도 어렴풋이 오아이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런 만큼 사내아이가 태어나면 얼마 동안 딸이라고 속여 키워야지... 이런 식으로 생각했던 것인데, 사태는 이에야스의 조심성보다 더 기묘한 진전을 보이게 되었다.
'그랬구나, 사내아이 쌍둥이였구나...'
이에야스는 다시 한 번 마음속에서 중얼거리고 하늘을 달리는 검은 구름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성주 님, 노부야스 님도 형제가 늘었다고 기뻐하실 것입니다. 지금 마님을 두려워하시면 훗날 분란의 씨앗이 됩니다. 확실하게 마음을 정하십시오."
사쿠자에몬은 다시 재촉했으나 이에야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서쪽에서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모양이었다. 산은 모습이 완전히 감춰지고 성곽 언저리에서 까마귀의 목쉰 울음소리가 뒤섞여 들리기 시작했다.
"사쿠자에몬."
"결심하셨습니까?"
"아니,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와 이번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차이를 생각하니 녀석이 여간 불쌍하지 않아."
"그래서 성주 님은 태도를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내가 태어날 때는 생모를 비롯하여 아버지와 가신들도 모두 신불에게 기도 드리며 기다렸다고 하더군... 그런데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받고 목숨을 노리는 자가 있는가 하면 더더구나 쌍둥이라니."
"성주님은 짐승이나 쌍둥이를 낳는다는 속된 말에 신경을 쓰고 계시는군요."
"아니, 그렇지 않아. 나는 그렇지 않지만 츠키야마를 비롯하여 욕을 퍼붓는 자가 없지 않
을 것일세."
"그러시면 한 아기는 남에게 맡겨 키우도록 하십시오. 그러나 한 아기만은..."
"사쿠자에몬, 그렇게 서두를 것 없네."
이에야스는 사쿠자에몬의 말을 가로막고 가볍게 눈을 감았다.
이에야스의 기억에 있는 아기 얼굴은 카메히메와 누부야스뿐이었는데, 그 노부야스의 빨
간 얼굴 둘이 나란히 뇌리에서 움직이고 있었다.
"여보게, 사쿠자에몬. 나는 확실히 츠키야마를 잘못 다루었어. 그렇다고 지금 오만이 쌍둥
이를 낳았다고 알려 펄펄 뛰는 모습은 차마 볼수가 없네."
"역시 마님을 두려워하시는군요."
"사쿠자에몬, 그대는 이성을 잃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할 수 있나?"
"무어라 하건 상대하시지 않으면 됩니다."
"지난번에도 츠키야마는 오만이 살찐 농부들과 간통한 음탕한 계집이라고 소문을 퍼뜨렸
어. 그렇게까지 매도하던 여자의 배에서 이번에는 쌍둥이가 나왔단 말일세."
이에야스는 얼굴을 돌렸다.
"태어난 아이들이 불쌍하지 않은가. 더구나 실성한 여자의 증오로 목숨까지 위험할 뻔했
으니 말일세."
사쿠자에몬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 이에야스가 이렇게까지 자세히 말하는 이상 자신
의 말을 들어줄 리 없다고 내다보았기 때문이다.
"그럼, 성주님 마음대로 하십시오."
이에야스는 눈을 감은 채 가볍게 두서너 번 고개를 끄덕였다. 사쿠자에몬은 입을 다물고
이에야스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뱀을 설 죽였다가는 도리어 화를 당한다고 했지, 사쿠자에몬?"
"그렇습니다."
"그러면 일단 악마가 되어보세. 내 허락도 없이, 내가 없는 동안에 나카무라의 집에 멋대
로 가서 아기를 낳았다는 것은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일."
"성주님... 도대체 그것은 누구를 가리키는 말입니까?"
"오만일세. 그런 여자가 낳은 아기 따위는 이 이에야스가 알 바 아니라고 하게."
사쿠자에몬은 넋이 나간 듯 이에야스를 쳐다보고 나서 잔뜩 얼굴을 찌푸리고 침을 탁 뱉
었다.
새삼스럽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사쿠자에몬은 이에야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쌍둥이
라는 것을 알고 갑자기 불길한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아니, 그 이상으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지난 1년 반 동안 이에야스는 거의 이 성에서 한가롭게 지낼 틈이 없었다. 그리고 오만의
성격은 오아이와는 달리 사람을 잘 따르고 외로움을 잘 느끼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누구에
게나 말을 잘 걸었고, 이것이 도리어 말괄량이로 보이게 했다. 정원을 손질하러 오는 정원사
에게 말을 걸거나 순찰 도는 가신들에게 차를 대접하기도 했다.
사쿠자에몬은 그런 것을 이에야스가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은근히 주의를 준 일도 있는
데, 이것과 츠키야마를 꺼리는 마음이 하나가 되어 갓 태어난 아기를 냉담하게 생각하게 된
모양이었다.
"두 아기를 그대로 방치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러는 편이 아이들을 위해서도 나을 것 같아."
"성주님!"
"왜 그러나?"
"성주님은 질투심이 강한 분이군요. 또 고집이 세고 제멋대로이고."
"허어,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가?"
"마님만 하더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까 우선 질시를 받게 되시고, 거기에 고집까지 부려
서 물리치셨습니다. 일단 물리치고는 사과도 할 수 없고 해서 크게 꾸짖을 뿐 이쪽으로 마
음을 돌릴 수단도 갖지 못하셨습니다. 좋지 못한 성격이라 생각지 않으십니까?"
"용서하게. 천성인 걸 어떻게 하겠나?"
"성주님! 이번에 태어난 아기들이 성장하여 오늘 성주님이 하신 말씀을 듣게 되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사쿠자에몬은 눈썹 밑으로 이에야스를 흘끗 쳐다보았다.
"태어나기 전부터 저주를 받은 가엾은 녀석이라고 하신 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어느 틈에 한두 방울씩 비가 떨어지기 시작하고, 바다 위로 조금 보이던 푸른 하늘까지
어두워져 있었다.
"성주님! 제가 이렇게 무엄한 말을 하는데도 노하지 않으십니까? 제말이 너무 옳아 하실
말씀이 없으십니까?"
이에야스는 한 손으로 비를 받으면서 천천히 일어났다.
"사쿠자에몬, 그만 가세. 아직 돌아볼 곳이 남았네."
"성밖에 있는 나카무라 겐자에몬의 집도 돌아보시겠습니까?"
"사쿠자에몬."
"왜, 그러십니까?"
돌 위의 손수건을 집어 허리에 찔러넣은 사쿠자에몬은 아직도 대들 것 같은 기세였다. 혹
시 이에야스가 오만의 정조를 의심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니 태어난 아기를 위해서라도 분
노하지 않을 수 없는 사쿠자에몬이었다.
"나가시노 성에는 누구를 보내는 것이 좋을까?"
"성주님은 말씀을 돌리려 하시는군요."
"역시 자식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세. 카메히메를 출가시켜 오쿠다이라 미마사카노카미
부자에게 성을 맡기는 것이 어떨까 하고...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나?"
화를 삭이지 못하고 있는 사쿠자에몬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화는 내지 말게, 사쿠자에몬. 나는 훌륭한 가신을 가진 것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네. 그대
가 하려는 말은 잘 알고 있어."
' 이 성주가! 이 성주가 어느 틈에...'
혼다 사쿠자에몬 시게츠구는 마음속으로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두 번 다시 이에야스
앞에서는 아기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어느 틈에 이에야스는, 사쿠자에몬의 의견에 똑
같이 반응하여 자신을 드러내 보이던 이전의 이에야스가 아니었다.
어디가 어떻게 성장했다고 말해야 할까?
어쨌든 사쿠자에몬이 생각하는 것 정도는 나도 생각하고 있다는 유연성을 가지고 사쿠자
에몬에게 전혀 대꾸를 하지 못하게 했다.
나가시노 성에 관한 일.
오카자키, 요시다 두 성의 방어에 관한 일.
노부나가에 관한 일.
타케다 군의 저항에 관한 일.
이런 중대한 문제를 하나하나 이야기하면서 날이 저물 때까지 가랑비를 맞아가며 성의 방
비태세를 돌아보고 다녔다. 그래도 무슨 지시가 있을 것 같아 마지막으로 발을 씻을 때까지
곁에 있었다.
"수고가 많았네."
이에야스는 발을 씻고 나서 한마디 하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사쿠자에몬은 오기로라
도 이 문제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오만을 성밖으로 옮기도록 한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
신이었다.
'그냥 두었더라면 아이들이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하자 화가 치밀었으나, 당사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속마음을 파
악할 수 없었다.
'이대로 그냥 있을 수는 없다...'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가 사쿠자에몬은 말을 타고 성밖으로 나갔다.
갓 태어난 아이들에게는 생각이 있을 리 없으나 그들을 낳은 오만도, 돌보고 있는 나카무
라 겐자에몬도 성주로부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말을 유토의 나카무라네 집으로 달리면서 사쿠자에몬은 몇 번이나 한숨을 쉬고 혀를 찼
다. 이미 첫 이레가 지났는데도 이름조차 갖지 못한 쌍둥이. 겐자에몬에게는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지만, 산욕기에 있는 오만에게는 이에야스가 오늘 한 말을 이야기할 수 없었다.
"제기랄, 이 사쿠자에몬이 거짓말을 하다니..."
태어난 아이들도 가여웠으나, 이런 처량한 심부름을 해야 하는 자기 자신도 한심스러웠다.
"귀신이라는 소리를 듣는 나도 울고만 싶다."
혼자 중얼거리면서 겐자에몬의 집 앞에 이르렀을 때였다.
"누구냐?"
빗속에서 묻는 자가 있었다. 오만이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겐자에몬이 일부러 부하들을
시켜 집 주위를 경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수고가 많다. 혼다 사쿠자에몬이다."
"아, 그러십니까. 어서 들어가십시오."
사쿠자에몬은 문 안으로 들어가 말에서 내렸다.
"아니...?"
고개를 갸웃하고 얼른 입구의 기둥에 말고삐를 매었다.
집안이 이상할 정도로 밝고 어디선가 향을 피우는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그는 가슴에 치
미는 불안을 눌렀다.
"게 누구 없느냐."
말보다 먼저 입구의 문을 열었다.
사쿠자에몬의 모습에, 안채 중앙에 제단 비슷한 것을 차려놓고 그 앞에 앉아 있던 겐자에
몬이 벌떡 일어나 다가왔다.
"사람을 보냈는데 만나셨습니까, 사쿠자에몬 님?"
사쿠자에몬은 잠자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에서 곧바로 나왔네. 숨이 끊어진 모양이군?"
겐자에몬은 침통하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기일 테지, 오만 님은 아닐 것이고."
"그렇습니다, 먼저 태어난 아기가."
"그럼, 다른 아기는 잘 있나?"
"예, 건강하기는 합니다마는..."
사쿠자에몬은 양미간을 모으고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쌍둥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을 텐데."
"무어라 하셨습니까, 사쿠자에몬 님?"
"아니, 아무것도 아닐세. 그럼, 어쨌든 그 불행한 영혼에게."
사쿠자에몬은 얼른 위로 올라가 조그마한 제단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제단이라고는 하지만 작은 탁자 하나.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동생 노리요리의 7남 마사
노리 이래 계속 이 고장에서 행정관을 지내온 나카무라 집안이었다. 따라서 안채의 정면에
한 단 높에 대기실이 만들어져 있었다. 어린 영혼은 흰 천에 덮인 채 북쪽으로 머리를 두고
있었다. 성안에서는 아무런 지시도 없었으나 어쨌든 미카와, 토토우미의 패자 도쿠가와 이에
야스의 아들이었다.
"사쿠자에몬 님, 시신을 즉시 성안으로 옮겨주시겠지요?"
사쿠자에몬은 못 들은 체하고 향을 피운 뒤 합장을 하면서 말했다.
"같은 어머니의 배에서 나왔으니, 그대도 뒤에 남은 아기를 지켜주도록."
"사쿠자에몬 님."
사쿠자에몬은 손을 흔들고 작은 탁자 옆을 지나 상단에 있는 죽은 아기 곁으로 다가갔다.
얼굴에 씌운 흰 천을 들치고 보니, 쪼글쪼글한 살덩어리가 촛불이 흔들림에 따라 웃기도 하
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하면서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을 보면 성주는 무어라 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쌍둥이라고 말한 꺼림칙한 마음이 아직 그대로 남아 있고, 인생의
짓궂음에 그만 화가 났다.
"으앙."
갑자기 힘찬 울음소리가 어딘가에서 들렸다.
"허어!"
사쿠자에몬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울음소리의 주인공을 만나보고 상의하기로 하세. 이 안쪽이지?"
겐자에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촛불을 들고 안내했다.
다시 바람이 불기 시작했는지 하마나 호수의 물결소리가 발 밑을 스치듯 들려왔다.
"갑작스런 일이라 산실을 지을 틈도 없이 노인의 방을 깨끗이 치우고 그대로..."
이렇게 말하는 겐자에몬에게 사쿠자에몬은 겸사의 말을 했다.
"아니, 너무 많은 폐를 끼쳤네."
그리고는 환하게 밝은 방안에서 불빛에 흔들리고 있는 오만의 그림자를 보고, 장지문 밖
에서 말했다.
"사쿠자에몬입니다. 우선 건강한 아기부터."
"아, 사쿠자에몬 님이신가요?"
안에서 애원하는 듯한 오만의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한 아기는 그만 눈을 감았습니다. 그러나 한 아기는 이렇듯 건강하게..."
사쿠자에몬의 모습을 보고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낮은 오만은 무슨 말부터 호소해야 할지
몰라 마구 몸을 흔들었다.
"성주님은 무어라 말씀하시던가요? 딸인 줄 알았는데 아들이라고... 아니 태어날 때부터
한 아기는 약하고, 그 대신 한쪽은 울음소리가 우렁차고 움직임도 활발하다고..."
사쿠자에몬은 손을 들어 그녀를 제지했다.
멋대로 성밖으로 나가 낳은 아기이므로 모른다고 해라-이렇게 말한 이에야스의 말이 떠
오르면서 더없이 마음이 무거웠다.
"우선 아기부터 보시지요."
오만을 시중들던 겐자에몬의 딸이 아기를 안고 와서 내밀었다.
"음, 이거 참."
사쿠자에몬은 뜻도 없는 말을 했다.
"과연, 으음."
몸집은 확실히 죽은 아기보다 컸다. 그러나 건강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아
들 센치요가 태어났을 때에 비해 3분의 2밖에 되지 않았다. 과연 이 아기가 제대로 자랄 것
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서, 축하의 말을 해야 할지 애석하다는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사쿠
자에몬이었다.
"오만 님."
"예."
"성주님은 아기의 탄생을 여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츠키야마 마님
과의 일도 있고 하여... 아시겠지요?"
"예."
"당분간은 아기의 탄생을 표면화하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기의 안전을
위해서입니다. 만일의 경우가 생기면 안 되니까 오만 님이 계시는 곳도 비밀, 아기의 탄생도
비밀로 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난 아기에 대해서는 앞으로 제가 이 집 주인과 상의하여 해
결할 것이니 그렇게 아시고 이대로 여기서 정양하도록 하십시오."
"저어, 그대로 이 집에서..."
사쿠자에몬은 머리를 끄덕이고 얼른 겐자에몬의 팔에 안긴 쪼글쪼글한 아기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그럼, 도련님. 젖 많이 드시고 어서 건강하게 자라십시오. 이만 실례합니다."
"아..."
오만이 무슨 말을 하려고 손을 들었을 때, 사쿠자에몬은 이미 앞장서서 안채 쪽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겐자에몬이 촛대를 들고 그 뒤를 따랐다.
"사쿠자에몬 님, 무슨 곡절이 있는 것 같군요."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들은 그대로일세. 알고 있을 텐데."
"그럼, 눈을 감은 아기의 장례는?"
"아직 핏덩어리이니 그대와 내가."
"으음. 그리고 살아 있는 아기의 이름은?"
"그대가 임시로 짓도록 하게."
"사쿠자에몬 님도 아기가 쌍둥이의 반쪽이라 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알았습니다, 잘 알았어요!"
나카무라 겐자에몬은 약간 노기를 띤 어조였다.
"어떤 분이 저주하고 있다는 말은 들었어요. 좋습니다! 이 겐자에몬이 목숨을 걸고라도 쌍
둥이의 반쪽을 건강하게 키우겠습니다."
"겐자에몬, 이해해주게. 성주님은 말일세, 미카와와 토토우미의 태수가 되고도 자기 아들
을 아들이라 부르지 못하는 불쌍한... 아니, 겁쟁이일세!"
사쿠자에몬은 얼굴을 돌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업화
오다 노부나가는 토라고제야마 진지에 있는 막사의 뜰에 서서, 아까부터 아사이 나가마사
부자가 웅거하고 있는 오다니 성 여기저기서 깜빡거리는 불빛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
다.
하늘에는 별이 반짝이고 있었으나 달은 없었다. 8월 26일 저녁 때였다. 때때로 주위의 어
둠 속에서 말 울음소리가 들렸다.
옆에는 성 키노시타를 하시바로 바꾼 히데요시와 니와 고로자에몬이 대령하고 있었으나
모두 오늘 저녁에는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임시 막사 안에 있던 시바타 카츠이에가 노부나가
를 채근했다.
"성주님, 막사 안으로 들어오시지요."
"흥."
노부나가는 코웃음치듯 대답했을 뿐 돌아보지도 않았다.
카츠이에의 아랫자리에는 사쿠마 노부모리와 마에다 토시이에가 역시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멍청한 녀석이야. 중요한 우군 아사쿠라가 망했는데도."
다시 카츠이에가 중얼거렸지만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미카와의 이에야스가 나가시노 성을 함락한 8월 20일은 노부나가에게도 잊을 수 없는 날
이었다.
아사이 부자와 손을 잡고 기어코 노부나가를 쓰러뜨리려고 계획했던 에치젠의 아사쿠라
요시카게가 쫓기던 끝에 자결하고 그 목이 노부나가의 손에 들어온 날이었다.
그날 노부나가는 아사쿠라의 반신인 아사쿠라 시키부노다이부카게아키라 등으로부터 에치
젠의 이노야마 성에서 요시카게의 목을 건네받았다. 노부나가의 맹렬한 공격을 받고 사방으
로 쫓겨다니던 마흔한 살의 요시카게.
칠전팔도
40년 생애 통틀어
나도 없고 남도 없다
인간 세상은 모두 공이로다
종이에 이런 지세이를 써서 남기고 깨끗이 사라졌다.
부인 또한 그 이틀 후 성밖에 있는 어느 농부의 집 우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살다 보면 좋은 구름도 나쁜 구름도 생기게 마련
이제는 숨어드는가, 저 산으로 이지러진 달이
그녀는 농가의 벼루를 빌려 종이조각 끄트머리에 애절한 지세이를 써놓았다.
외아들인 아이오마루도 에치젠 북쪽에서 니와 고로자에몬에게 살해당했다.
이로써 아사쿠라 가문은 완전히 멸망했다.
노부나가는 갑옷을 벗을 여유도 없이, 항복한 적장 마에나미 요시츠구를 성주 대리로 삼
고, 부교로 아케치 미츠히데, 츠다 모토히데, 키노시타 이에사다 등 세 사람을 남기고 급히
오미로 돌아왔다.
물론 아사이 부자의 무모한 반격을 봉쇄하기 위해서였으나, 가능하다면 막내여동생 오이
치의 남편과 손을 잡았으면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제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고 해도 이
미 아사이의 무력과 노부나가의 무력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눈을 뜨게 되겠지.'
이렇게 생각하고 오늘 아침 이 성채에 도착하는 즉시 사자를 보냈으나 회답은 여전했다.
"우리 아사이 부자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오다 님과 일전을 불사할 각오이니..."
짓밟아버리기는 쉽다. 게다가 이 회답이 매제인 비젠노카미 나가마사가 아니라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그의 아버지 시모츠케노카미 히사마사의 의견임을 알았을 때는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분노가 끓어올랐다.
분노를 참지 못하고 여동생과 그 세 딸을 모조리 태워 죽인다면 아마도 히사마사는 빈정
거리는 웃음을 떠올리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써 노부나가를 경멸하면서 죽을 것이 분명했다.
"이것이 바로 오다 공의 잔인한 본성."
그 빈정거리는 웃음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목숨이 아까워 아첨하는 자들은 그럭저럭 처리할 수 있었다. 사사건건 노부나가를 방해하던
히에이잔의 승도들도, 깊은 신앙 따위가 어디 있느냐고 일소에 부치고 불살라버린 노부나가
였으나, 히사마사 부자는 달랐다.
완고한 것은 아버지 히사마사. 하지만 그 아들 나가마사 역시 목숨을 아끼는 자가 아니었
다. 효도를 더 없는 덕으로 생각하고 깨끗이 히사마사와 운명을 같이할 그런 사람이었다.
"토키치로!"
노부나가는 잠시 뜰을 서성거리고 나서 하늘의 별을 쳐다보면서 하시바 히데요시를 불렀
다.
"아사이 부자는 결심한 것 같네."
"그렇습니다. 항복할 가능성은 없는 것 같습니다."
노부나가의 고충을 잘 알고 있는 히데요시는 침통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이치 님도 세 따님도 운명을 같이할 것 같습니다."
"그대는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나?"
"황송하옵니다마는 죽이는 자는 죽임을 당하게 마련이라고, 중 냄새 풍기는 야유를 성주
님께 던지고 싶을 테지요."
"그럴까?"
노부나가는 다시 묵묵히 별을 쳐다보다가 오다니의 불빛을 노려 보며 걸었다. 히데요시에
게 물어볼 것도 없이 그런 것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으면서도 물어본 것은, 요즘
노부나가는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의견에 더 무게를 두려 하고 있었다.
"어떤가, 마에다 마타자에몬, 어떻게 항복을 받을 방법이 없을까?"
"글쎄요, 아들은 몰라도 아버지가..."
"고집불통이라 어렵다는 말이지?"
"그렇습니다."
"성주님! 어떻겠습니까, 만일 부인과 딸들을 살려주면 아사이 부자의 목을 베지 않겠다고
제의하시면..."
사쿠마 노부모리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잠자코 있어!"
노부나가는 버럭 소리질렀다. 그런 것으로 말을 들을 상대가 아니라는 불만 외에, 에치젠
에서의 사쿠마에 대한 분노도 섞여 있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 노부나가도 오기가 있었다."
"예."
"시바타 곤로쿠로, 오이치와 딸들을 구할 방법은?"
"저로서는 묘안이 없습니다."
"흥, 섣불리 대답했다가는 꾸중을 들을 것 같아 조심하는 거로군. 그대가 몸을 사린다면
니와 고로자에몬은 더더구나 입을 열지 않을 테지."
"침통하신 심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니와 나가히데는 이렇게 대답하고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좋아, 토키치로!"
"예."
"그대는 이 성채를 쌓은 장본인,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것이야. 타케나카 한베에와 상의
해보게. 내 체면도 설 수 있도록."
히데요시는 싸늘해지기 시작하는 땅에 두 손을 짚고 신중하게 대답했다.
"분부시라면."
노부나가는 그들에게서 홱 등을 돌리고 저도 모르게 싱긋 웃었다.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원숭이!"
"예, 조금은."
"멍청이 같은 것! 조금은 안 돼. 무엇 때문에 그대만이 에치젠으로 돌아왔다는 말이냐. 좋
아, 오늘은 이대로 쉬고 내일부터 전쟁이다!"
그 말끝은 쏘아붙이듯이 매서웠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오기와 초조감을 잘 알고 있었다.
에치젠의 아사쿠라 집안과 친척인 혼간 사 코사는 키이의 승도에게 원조를 청하여 아사이
부자가 패하기 전에 카와치에서 거사하려 하고 있었고, 오미의 나마즈에 성에서는 롯카쿠요
시스케가 다시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노부나가가 만일 사사로운 정에 사로잡혀 이 전쟁을 지연시키면 츄고쿠와 시코쿠는 물론 북
부 이세의 정세도 심상치 않게 바뀔 것이었다. 노부나가로서는 전쟁을 이긴 대군을 일단 토
라고제야마에 집결시키는 것만으로써 아사이 부자의 항복을 받고 싶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가 임시막사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자기 막사로 돌아와 즉시 타케나
카 한베에를 불렀다.
"전략회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한베에는 들어오자마자 히데요시가 펼치고 있는 오다니 성의 지도를 들여다 보았다.
"역시 오이치 님을 구하고 싶으신 거로군요."
"무리가 아니야."
히데요시는 한베에의 얼굴도 보지 않았다.
"오이치와 그 아이들을 죽여 없애면, 후세 사람들이 우리 대장은 형제의 정애를 모르는
짐승 같은 자라고 손가락질할 것이 아닌가."
한베에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시모츠케노카미 히사마사도 그것을 간파하고 있습니다. 히사마사는 성과 더불어 운명을
같이할 것입니다."
"이봐 한베에, 그렇게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히데요시는 얼굴을 들고 진담인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 대장이 짐승 취급을 당하게 되면 곤란해. 이 히데요시에게도 이번이 내 운을 시험
할 때야."
한베에는 다시 가만히 웃었다. 히데요시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운의 시험장 아닌 곳이 한
번도 없었다. 이 사자는 언제나 토끼를 잡는 데 전력을 다해왔다.
"한베에, 이 히데요시가 오이치에게 반했다고는 생각지 말게."
"이런 마당에서도 농담을 하시다니 놀랍습니다."
"어때, 히사마사를 깜짝 놀라게 할 방법이 없을까?"
"깜짝 놀라게 할 사람은 히사마사가 아닙니다."
"그럼 누구냐, 나가마사라는 말인가?"
"아니, 우리 대장인 노부나가 님이 아니면 안 됩니다."
"그래, 그래야만 하겠지. 좋아, 그럼 군사 양반, 우선 이 제자의 생각을 먼저 말해보겠네.
잘못된 점이 있거든 지적해 주게."
히데요시는 부채 끝으로 오다니 성의 구조를, 산꼭대기의 본성에서부터 밑으로 짚어내려
왔다.
"어떨까, 이 츠부라가오카에 있는 쿄고쿠 성을 새벽에 공격하면? 여기가 본성에 있는 아
들과 산노 성에 있는 아버지와의 사이에 쐐기를 박을 수 있는 다시 없는 장소라고 생각하는
데."
타케나카 한베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히 그곳을 지키는 장수는 미타무라 사에몬노스케와 오노키 토사, 그리고 아사이 시
치로 등 세 장수일 것이요. 하지만 그 츠부라가오카를 점령한다고 해서 오이치 님의 목숨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목숨을 구한다고? ...그럴 생각은 없네."
히데요시는 잔뜩 얼굴에 주름을 잡고 비로소 큰 소리로 웃었다.
"그 완고한 늙은이에게 구명을 제의해보게. 그야말로 통쾌하다는 듯이 우리 대장을 매도
하는 것이 고작일 거야."
"상대는 오이치 님 모녀를 지옥까지 데리고 가서 우리 대장에게 짐승이라는 누명을 씌우
려는 히사마사일세. 구명 같은 것은 소용없는 짓이야."
히데요시는 다시 지도로 부채를 가져가 성채의 길을 이리저리 더듬어나갔다.
표고 450미터인 오다니야마는 문자 그대로 산 전체가 성곽이며 요새였다.
성주인 나가마사는 맨 위의 본성에 있었고, 그 밑 둘째 성과 쿄고쿠 성을 사이에 두고 아
버지인 히사마사의 산노 성이 있었다. 그리고 다시 그 아래 산기슭에는 아카오 성이 인접하
여 그것을 지키고 있었다. 아카오 성에는 중신인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가 버티고 있었다.
히데요시는 우선 성곽의 허리에 해당하는 츠부라가오카의 쿄고쿠성을 맨 먼저 공격하여
본성에 있는 나가마사와 산노 성에 있는 히사마사의 연락을 끊어놓자는 것이었다.
"구명을 청하지 않고 달리 무슨 방법이..."
한베에는 기색을 살피듯 히데요시를 바라보았다.
히데요시는 예의 그 농담하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코고쿠 성을 함락시킨 뒤 바로 산노 성과 아카오 성 사이에 군사를 투입하자는 것일세."
"아카오 성은 무척 견고할 텐데요."
"용맹한 하치스카 코로쿠에게 공격을 맡기면 쐐기를 박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산노 성의 히사마사를 고립시킨다는 말씀이로군요."
한베에는 비로소 맑은 미소를 떠올렸다.
"저도 대체로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 하하하, 이만하면 나도 상당한 군사라 할 수 있겠어."
두 사람은 함께 웃으면서 내일 아침부터 실행에 들어갈 병력배치에 대한 상의를 시작했
다.
우선 아버지 히사마사가 있는 산노 성을 고립시키고 항복을 권하는 사자를 보낸다. 그러
면 무엇보다고 굴욕감이 강한 히사마사는 당장 자결할지도 모른다. 그것으로 족하다. 만일
자결할 경우 그것을 본성의 나가마사에게는 비밀로 하고 사자를 보낸다.
"산노 성은 함락된 것과 다름없다. 아버지의 생명을 구하고 싶거든 일족이 모두 항복하거
나, 아니면 오이치 모녀를 넘겨달라."
목숨을 살려다라고 애걸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강경하게 요구하여 노부나가의 체
면을 세우려 하는 히데요시였다.
한베에와 상의를 끝낸 히데요시는 즉시 장수들을 집합시켰다.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라
생각하고 오늘 밤은 일찍 인마를 휴식시킨 체 대기하고 있었다.
맨 처음 츠부라가오카를 공격할 군사는 2,000명. 히데요시가 직접 이들을 지휘하기로 했
다. 산기슭에서부터 몇 겹으로 쌓아올린 성채를 밑에서부터 공격해 올라가는 데에도 자신이
있었다. 히데요시는 지난 몇 년 동안 이런 일에만 전념해온 부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 새벽이 되기를 기다리도록. 우리 대장의 명령은 반드시 안개가 걷히기 전에 내릴
것이다."
히데요시는 이렇게 말하고 부하들을 각각 작전 지점에 배치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오다니야
마를 바라보았다.
오이치가 있는 본성의 창은 여전히 밝기만 했다. 어쩌면 그 안에서 며칠밖에 남지 않은
성의 운명을 깨닫고 부녀와 부부가 끝없는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에 거칠게 날뛰는 히데요시의 가슴에도 한 가닥 허무한 느낌이 후두득 가을비를
뿌렸다.
'별로 좋은 세상이 아니야...'
히데요시가 생각했던 대로 노부나가는 날도 밝기 전에 히데요시의 막사로 말을 달려왔다.
언제나 꾸짖는 듯한 어조로 말을 시작하는 노부나가였다. 그러나 이미 출전준비를 갖추고
명령이 내리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히데요시의 부대 모습을 보고는 달빛에 눈을 빛내며 아무
말도 않고 히데요시 앞에 말을 세웠다. 히데요시는 그의 앞에서 어젯밤부터 자신이 계획한
책략을 꼼꼼히 설명했다.
"코고쿠 성으로 진격하여 본성보다 먼저 노인이 웅거해 있는 산노성의 급소를 찌르는 것
이 선결문제라고 생각합니다."
노부나가는 대답 대신 흘끗 오다니 성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나가마사가 말을 듣지 않거든 밑에서부터 불을 질러라! 한 사람도 남기지 말고
태워 죽여라."
말을 마치고 홱 말머리를 돌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물론 그것은 노부나가의 본심이 아니었다. 은퇴한 히사마사의 급소를 찔러 항복을 권유해
도 오이치와 어린 딸들을 넘겨주려 하지 않으면 그때는 망설이지 말라는 의미였다. 그렇기
는 하나 노부나가의 말에는 언제나 복선이 깔려 있었다.
히데요시는 노부나가의 모습이 사라지자 저도 모르게 크게 한숨을 쉬었다.
노부나가의 말대로 만일 오다니 성을 밑에서부터 순차적으로 불태우지 않을 수 없게 되어
그 업화속에 오이치와 어린 딸들이 모두 죽는다면 아마 히데요시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아니, 목은 달아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 실패로 인해 노부나가의 신임을 잃고 그 대신 뿌리
깊은 증오가 남게 될 터.
노부나가의 성격을 너무도 잘 아는 히데요시는 한숨을 쉬고 나서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노부나가로부터 공격개시 명령이 내렸을 때는 이미 츠부라가오카로 나가 적군의 이동을
봉쇄하고 있었다. 새벽의 공격이라기보다 야습에 가까웠다.
타나카 한베에를 불러 몇 마디 상의하고 나서 히데요시는 2,000의 군사를 이끌고 선두에
서서 토라고제야마를 달려내려갔다.
카토 토라노스케, 후쿠시마 이치마츠, 카타기리 스케사쿠, 이시다 사키치 등 용맹한 부하
들이 눈을 빛내며 히데요시 주위에서 행동을 같이했다.
선두가 오다니야마 기슭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이슬 속에 숨을 죽인 채 첫 번째 성채 밑
에 당도하여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별이 숨어들고, 가을의 산 안개가 골짜기에서 나무들 사이로 하얗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토라고제야마에 있는 노부나가 본진에서는 진군의 소라고둥소리가 계속 울
려퍼졌다.
그것은 아사이 군에게도 예정된 일로 받아들여졌을 터. 오다니 성 여러 망루에서 바라보
았다면, 네 길로 나누어진 오다 쪽 여러 장수들의 깃발이 안개를 뚫고 오다니 성으로 육박
해들어오는 모습이 보였을 것이다.
이때 갑자기 츠부라가오카 밑에서 히데요시 군의 함성이 터져나왔다. 아니, 함성이 터져나
왔을 때는 이미 선두에 섰던 부하들이 앞을 다투어 성채의 돌담을 기어오르고 있었다.
쿄고쿠 성은 꿈을 깬 순간부터 정신을 잃고 혼란에 빠졌다.
"아, 호리병박 깃발이다. 벌써 성에 침입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인가."
쿄고쿠 성의 대장 오노키 토사는 도마루를 입으면서 역시 대장인 아사이 시치로에게로 달
려갔다.
아사이 시치로는 오노키 토사보다 먼저 달려온 미타무라 사에몬노스케와 서원의 마루에서
큰 언월도를 짚고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노키 토사는 그들 앞으로 달려가 뒤따라온 부하의 손에서 창을 받아들었다.
"여러분, 전사할 때가 왔소. 각자 최후의 결전을 벌입시다."
"기다리시오, 오노키 님."
시치로가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기다리라니?"
"보다시피 아군에게는 투지가 없소."
"그 역시 각오했던 것이오."
"아니, 이것 보시오."
이번에는 사에몬노스케가 엄숙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성에서 투지가 있는 분은 성주님 부자밖에 없소. 그래서 이 점에 대해 생각해야 할
일을 상의하고 있던 중이오."
"생각해야 할 일이란?"
"...이 성을 순순히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넘겨주는 것이 상책 아니겠소?"
"농성을 하다가 전사하자고 한 것은?"
"우선 내 말부터 들어보시오."
아사이 시치로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곳을 히데요시 군에게 넘겨주면 성주님 부자간의 연락이 끊어집니다. 두 분이 하나가
되면 멸망할 수밖에 없으나 따로 떨어져 있으면 혹시 두 분의 눈이 뜨일지 몰라요..."
오노키 토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런 부자간이 아니오."
"누구보다도 자식에 대한 고민이 크신 분, 그리고 사이가 좋기로 소문난 마님은 노부나가
공의 여동생이요. 그렇지 않소, 미타무라?"
"그렇소. 투지도 없는 자들을 억지로 사지에 몰아넣으면 도리어 부하들 중에 주군을 해치
려는 자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도 없는 일이오. 그렇게 되면 후세에까지 웃음거리
가 될 것이오."
"와아!"
그들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에 함성이 마침내 건물 주위를 둘러싸기 시작했다.
과연 두 사람이 말한 것처럼 선잠을 깬 병사들이 무기도 들지 않고 문밖으로 뛰어나가 우
왕좌왕하는 모습이 보였다.
다시 함성이 건물 입구 근처에서 들렸다.
"지체할 여유가 없소. 성주님은 오다 가문의 사위요. 결단을 내립니다, 오노키 님."
오노키 토사는 힘없이 창을 내던졌다.
투지가 없는 것은 병졸들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한쪽은 에치젠의
대군을 섬멸시키고 파죽지세로 밀어닥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이쪽은 십중팔구 처음부터 승
산이 없는 전투라 계산하고 있었다. 그런 전투를 굳이 하려고 했던 것이 이미 무모한 일이
었는지도 몰랐다.
"알겠소. 알았으니 내가 가겠소!"
오노키 토사는 이렇게 외치고 일단 버렸던 창을 다시 집어들었다. 그리고 허리에 두르고
있던 흰 천을 풀어 떨리는 손으로 창 끝에 묶었다.
"전사할 준비가 항복준비로 바뀌었군."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두 눈을 빛내면서 건물로 쳐들어온 하시바 군을 향해 그대로 달려
갔다.
"항복하겠소. 항복할 테니 히데요시 님의 본진으로 나를 데려가 주시오. 항복하겠소."
어떤 전투에서든 반드시 패한다는 믿음이 널리 퍼져 있을 때 가신에서 병졸에 이르기까지
일사불란하게 뜻이 통할 리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아사이 부자는 지휘를 잘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신의 깨끗한 마음이 일개 병졸들에게까지 받아들여지고 있다고 믿어 성과 더불어
죽을 결의를 지나치게 드러내고 있었다.
히데요시와 타케나카 한베에는 그러한 부자의 성격을 예리하게 꿰뚫어보고 군사를 쿄고쿠
성으로 진압시켰다. 그러면서도 이곳에 쐐기를 박기까지는 당연히 2, 3백 명의 희생은 감수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성을 지키는 세 장수가 아직 아무 희생도 치르기 전
에 항복해왔다.
정오에 쿄고쿠 성은 완전히 히데요시의 손에 들어왔다. 히데요시와 한베에는 성안으로 호
리병박 깃발을 들여보내고 그 밑에서 담소를 나누면서 점심식사를 했다.
물론 이것으로 끝날 전쟁이 아니었다. 오다니야마를 빽빽이 에워싼 오다 쪽 여러 장수들
이 지켜보는 가운데 히데요시는 오이치를 구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점심을 끝낸 뒤 곧 하치스카 코로쿠 마사카츠가 히데요시 앞으로 불려왔다.
"코로쿠, 아사이 노인이 있는 산노 성과 아카오 미마사노카미가 지키는 아카오 성 사이를
차단하는 데 자네 힘으로는 얼마나 걸리겠나?"
하치스카 코로쿠 마사카츠는 큰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히죽 웃었다. 히데요시의 어조에는
언제나 반쯤 농담 비슷하면서도 교묘한 선동이 숨겨져 있다.
"글쎄요, 이 각(4시간) 정도면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런가, 참 빠르군. 그럼, 당장 시행하게."
히데요시는 진지한 표정으로 한베에를 돌아보았다.
"코로쿠가 이 각이면 군사를 들여놓을 수 있다고 하는군. 나 같으면 일 각 반이면 가능할
것 같지만 그런대로 괜찮겠지."
코로쿠는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외쳤다.
"주군!"
히데요시는 태연하게 말했다.
"알고 있네. 특별히 선발한 정예로 일거에 아카오 성을 공격하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게.
우리도 그 뒤를 따르는 것처럼 하겠다. 알겠나. 그리고 적이 성을 사수할 결의를 굳혔을 무
렵 슬쩍 산노 성과 아카오 성 중간으로 나가는 거야. 어느 쪽도 저편에서 먼저 치고 나올
우려는 없어. 사방이 우리 편 깃발로 가득 들어차 있으니까. 그럼 코로쿠, 이 각이야, 알겠
지?"
"주군이라면 일 각 반이라."
코로쿠는 쓴웃음을 띠고 내뱉듯이 중얼거리며 발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이번에는 소라고둥소리에 이어 징과 북소리가 함께 터지며 산 전체를 진동시켰다.
하치스카 군 약 1,000여 명이 만자 깃발을 앞세우고 아카오 성을 향해 일제히 달려내려가
기 시작했다.
이때 산노 성에 있는 나가마사의 아버지 히사마사는 거실 밖의 마루에 늘어놓은 국화 화
분을 손질하고 있었다. 마루에 앉아 바라보고 있던 히사마사가 총애하는 코와카 춤꾼 츠루
와카다유가 깜짝 놀라 일어섰다.
"시모츠케노카미 님, 저것은, 저 소리는?"
시모츠케노카미는 일부러 돌아보지 않고 태연하게 가위질만을 계속했다.
"다유, 오다 님은 인생 오십이라며 곧잘 아츠모리를 춘다고 하더군..."
허리를 굽힌 채 말했다.
다시 함성이 울렸다. 아카오 성 쪽에서 화살이 날아오고, 총포소리도 섞였다.
그러나 국화의 떡잎을 자르고 있는 히사마사의 태연한 모습을 보는 한 더할 나위 없이 상
쾌한 가을이었다. 정원의 그림자가 뚜렷이 드리워진 연못 맞은편에 희고 붉은 싸리꽃이 만
발해 있었고, 연못에서는 잉어가 유유히 흰 구름에 반사되며 헤엄치고 있었다.
"큰일이 난 것 같습니다. 시모츠케노카미 님."
다시 츠루와카다유가 말했다.
"다유, 인생을 오십 년으로 본다면 나는 그 나이를 살았어."
히사마사는 조용히 얼굴에 미소를 떠올렸다.
"내 평생은 숭고했다. 내가 옳다고 믿는 것 외에는 절개를 굽히지 않고 살아왔어."
"그 말씀은 이미..."
"그것을 안다면 끝까지 국화를 가꾸는 내 마음도 알 수 있겠지. 나는 패배해서 죽는 것이
아닐세."
"그러시면...싸워보시지도 않고."
"하하하..."
히사마사는 비로소 등으로 펴고 웃었다.
"싸워보지도 않고라니... 다유, 나는 언제나 싸우고 있네. 새삼스럽게 창을 들거나 칼을 휘
두를 것이 없이."
이렇게 말하고 다시 큰 소리로 웃었을 때였다.
"큰 성주님!"
황급하게 복도를 달려온 것은 오랫동안 히사마사의 오토기슈 역할을 해온 후쿠쥬안이었
다.
"적이 드디어 아카오 성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쿄고쿠 성은 완전히 점령당했습니다."
늘 짓토쿠를 입고 다도를 벗삼기에나 어울릴 예순이 넘은 노인이, 도마루를 입고 머리띠
를 두른 모습에 창을 들고 눈초리를 치뜨고 있었다.
"후쿠쥬안!"
"예."
"그대는 누구 허락을 받고 그런 용맹한 차림을 했는가?"
"이미 적이..."
"닥쳐!"
"예."
"나는 적이 우리를 포위하거든 깨끗이 할복하겠다고 그토록 말했는데도 잊었단 말인가?
안타깝군."
"무장도 하지 않으시고."
히사마사는 천천히 마루에 걸터앉았다.
"무장할 정도라면 무엇 하러 국화를 손질하겠나. 나는 오다의 병졸 한두 명을 죽이기보다
는 내가 좋아하는 국화의 성장에 마음을 남기고 떠나고 싶어."
후쿠쥬안은 얼굴을 돌렸다. 그러나 다시 생각난 듯 두 손을 짚었다.
"부탁이 있습니다."
"새삼스럽게 무슨 부탁인가?"
"그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오나, 아직 춘추가 한창이신 성주님을 위해, 또 세 명의 손녀를
위해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허어, 그렇다면 그대는 이런 용맹한 차림으로 나에게 항복을 권하러 왔다는 말인가?"
"가문을 위해서입니다."
"멍청이 같으니라고!"
히사마사는 그 허약한 몸의 어디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까 싶을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로
꾸짖었다.
아사이 후쿠쥬안은 히사마사의 질타를 각오하고 있었던 듯.
"당연한 꾸중이십니다. 그러나 큰 성주님이 말씀하셨듯이 오다 성주가 잔인하고 냉혹한
성격이라면 큰 성주님도 성주님도, 또 마님도 손녀들도 모두 불태워 죽이고 시원하게 잘 처
리했다고 기뻐할 뿐... 저는 그것이 원통합니다."
히사마사는 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하늘에 떠 있는 하얀 가을 구름을 쳐다보고 있었다.
함성은 아까보다 약간 멀어지고, 화창한 햇빛이 주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부탁입니다! 아무쪼록 아사이 가문의 대가 끊기지 않도록 사자를 보내십시오."
"후쿠쥬안."
"예."
"그대도 약간 망령이 든 것 같군."
"예. 이 늙은이의 망령을 이번만은 가납해 주십시오."
히사마사는 다시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그대도 과거에는 불문에 들었던 사람, 우선 그 무장을 풀고 이 상쾌한 가을 기분을 맛보
는 것이 좋겠네."
"황송합니다마는, 저는 국화나 나무의 생명보다 가문의 일이 더 걱정스럽습니다."
"후쿠쥬안, 더 이상 말하지 말게. 알겠나, 이 히사마사의 마음을 그대들의 말로 움직일 때
는 이미 지났어."
"가문이 어떻게 되건 상관없으십니까?"
"용서하게. 어쩌면 천하를 제패하려는 노부나가의 꿈도 업화, 이에 항거하여 아사이 가문
을 멸망으로 이끄는 히사마사의 고집도 그 이상의 업화일지 몰라."
후쿠쥬안은 힘주어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히사마사의 고집은 이미 이성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자기가 아무리
노부나가를 싫어한다고 해서 그 때문에 자식과 손자와 며느리를 죽여도 된다는 말인가. 히
사마사는, 자기가 죽이는 것이 아니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노부나가는 야심을 위해 육친인
여동생을 적에게 시집보내고 그것도 모자라 죽여버린 악마였다고 후세 사람들에게 믿게 하
여 자신의 고집을 관철시키려는 것 같았다.
후쿠쥬안에게는 그것이 얕은 생각으로 여겨졌다. 노부나가는 부자의 생명은 빼앗지 않겠
다는 사자를 자주 보내왔다. 그러므로 일부러 일족을 죽이는 것은 노부나가가 아니라 히사
마사라는 생각이었다.
"후쿠쥬안, 알겠지? 누가 옳았나 하는 것은 후세 사람들이 판단할 걸세. 어서 그 답답한
무장을 벗어버리고, 마침 츠루와카 다유도 있으니 차라도 함께 마시세."
후쿠쥬안은 맥없이 자리를 떴다.
그때 일단 멀어졌던 함성이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히사마사는
다시 가위를 들고, 곁에 츠루와카 다유가 있다는 것도 잊은 듯 국화를 한 그루 한 그루 찬찬
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아뢰옵니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이구치 에치젠노카미 마사요시가 무장한 모습으로 달려왔다.
"오오, 마사요시로군. 적이 가까이 온 모양이지?"
"그렇습니다. 적의 선봉은 아카오 성을 공격하는 체하다가 도중에 방향을 바꾸어 이 산노
성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마사요시, 내 인생은 재미있었어."
"예...?"
"좋아. 센다 우네메노쇼와 합력하여 잡인들이 이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
이렇게 하여 27일은 하시바 군의 하치스카 부대가 아카오 성과 산노성 사이에 군사를 진
입시키는 것으로 끝났다.
날이 밝으면 텐쇼 원년(1573) 8월 28일.
새벽부터 오다니 성은 격렬한 공방전의 전쟁터로 화해 있었다. 오다군은 하시바 군이 먼
저 빼앗은 쿄고쿠 성을 발판으로 하여 나가마사와 히사마사를 따로따로 공격해갔다.
이미 함락은 시간문제라 해도 좋았다.
산노 성의 히사마사는 그날도 무장을 하지 않았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아군의 고전소식을
듣고도 수고했다는 한 마디뿐, 결코 항복을 허락하지 않았고 낯빛도 변하지 않았다.
"그래? 수고했다."
사시(오전 10시)가 지나 온몸에 세 개의 화살을 맞은 센다 우네메 노쇼가 달려왔다.
"드디어 산노 성의 일각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센다 우네메노쇼의 보고에 히사마사는 웃었다."
"그럼, 우리도 나갈 준비를 해야겠군."
옆에 있는 모리모토 츠루와카다유와 후쿠쥬안을 조용히 돌아보았다.
후쿠쥬안은 무장 대신 오늘은 가사를 걸치고 있었다. 츠루와카다유는 히사마사의 침착성
에 영향을 받았는지, 비록 안색은 창백했으나 체념 뒤의 고요함을 되찾고 있었다.
"우네메, 부탁일세. 우리는 떠난다고 마사요시에게도 말해주게."
우네메노쇼는 순간 치켜뜬 눈을 깜박였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그럼!"
다시 칼을 들고 달려갔다.
"후쿠쥬안, 잔을 가져오게."
"어떤가, 오늘은 하늘도 맑지만 우리 마음 역시 활짝 개었어."
후쿠쥬안도 츠루와카다유도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수그린 채 작별의 잔을 준비
했다.
술은 히사마사가 평소에 아끼던 윤기 있는 호리병박에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잔을 든 히
사마사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츠루와카가 따라주는 술을 석 잔 마셨다.
"자, 후쿠쥬안. 이번에는 자네 차례일세."
후쿠쥬안은 흘끗 히사마사를 쳐다보고 얼굴에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그는 어젯밤, 히사마사를 죽이고 아사이 가문의 안태를 도모하는 것이 어떨까 하고 여러
번 칼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그것도 소용 없는 짓이라 체념하고 오늘을 맞이했다. 그 역
시 아사이 가문의 일족이었다. 만일 그의 의사가 나가마사에게 잘못 전해져 사리사욕을 위
한 반역으로 오해받는다면 더욱 웃음거리가 될 뿐이었다.
후쿠쥬안도 또한 격식대로 석 잔을 마시고 웃으면서 츠루와카에게 잔을 돌렸다.
"자, 그대에게는 이 후쿠쥬안이 따라주겠네."
"고맙게 받겠습니다."
미소를 띤 채 츠루와카가 잔을 비우기를 기다렸다가 후쿠쥬안은 히사마사에게 마지막 말
을 하고는 옷의 앞가슴을 벌리고 담담한 표정으로 아랫배를 칼끝으로 푹 찔렀다.
"큰 성주님, 불문에 몸담은 제가 먼저 이슬로 돌아가게습니다."
히사마사는 그 모습을 보고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츠루와카, 카이샤큐를 하게. 역시 후쿠쥬안, 내 마음을 잘 알고 있었어."
인간은 결국 아집의 미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동물인지도 몰랐다. 후쿠쥬안의 할복은 히
사마사에 대한 분노와 주변 정세에 대한 체념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히사마사는 그렇게 받아
들이지 않았다.
추루와카다유의 카이샤쿠로 후쿠쥬안의 목이 문지방 쪽으로 굴러 떨어졌다.
"알겠나, 후쿠쥬안. 이것으로 나는 노부나가에게 이긴 것일세."
미닫이에서 방바닥에 이르기까지 피가 흥건한 곳에서 히사마사는 입을 크게 벌리고 웃고
있었다.
"자, 이번에는 내 차례야."
웃고 나서 잠시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웃통을 벗었다. 속옷은 순백색이었고 태도도 당당
했다.
히사마사는 눈을 감은 채 칼을 집어들었다.
"드디어 적이 현관에 난입한 모양이군."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고 칼끝을 왼쪽 옆구리에 푹 찔렀다.
"카이샤쿠를..."
츠루와카다유가 말했다.
"필요없어."
히사마사는 외치듯이 말하고 앉은 채로 오른쪽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단
숨에 칼을 오른쪽으로 그었다. 동맥이 끊어진 모양이었다. 허리에 감았던 흰 헝겊이 순식간
에 빨갛게 물들고 히사마사의 얼굴은 흙빛으로 변해갔다.
"하하하..."
히사마사는 웃었다. 추루와카다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듯, 하지만 그것은 말이 되
어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히사마사는 점점 번져가는 다다미 위의 핏속으로 털썩 엎어져 숨
이 끊어졌다.
츠루와카다유는 히사마사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칼을 든 채 마루에서 두서너 번 아래위도
뛰어다녔다.
이미 적은 눈앞에 다가와 칼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고함소리가 그를 몰아세웠다. 물론 히
사마사를 따라 죽을 마음은 굳히고 있었으나, 이 경우 난입해온 적과 싸우다 죽을 것인지
아니면 할복할 것인지 망설여졌다.
세 번째로 다시 서원으로 돌아온 추루와카다유의 뒤에서 병졸 하나가 창을 꼬나들고 따라
붙었다.
"얏!"
병졸이 뒤에서 찌르는 창이 추루와카의 옷소매를 궤뚫었다.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나고
추루와카다유의 몸은 정원으로 날았다.
"잠깐, 잠깐만 기다려."
쫓아오는 병졸에게 추루와카다유는 칼과 목소리로 위협도 하고 애원도 하는 형상이 되었
다.
"큰 성주님의 할복을 지켜보고 나서 함께 저승길에 모시려는 우리, 굳이 창으로 찌를 것
없지 않느냐. 가까이 오지 마라, 다친다."
병졸은 한 걸음 물러나, 방안에 이미 숨이 끊어져 있는 두 구의 시체와 목 하나를 보고는
얼른 창을 내리고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뒹굴고 있는 목을 히사마사의 것인 줄 알았던 모양
이다.
그 사이에 추루와카다유는 정원석에 걸터앉아 자기 배에 칼을 대었다. 그리고 그의 몸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을 때는 이미 적과 아군으로 주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난세의 업화는 히사마사와 후쿠쥬안 그리고 추루와카다유에게는 한 가닥의 감
상도 남기지 않고 더욱 격렬한 불길로 번져나갔다.
운명의 사자
오다 군의 공격은 현재의 성주 나가마사가 지키는 본성에도 쉴새없이 계속되었다. 이미
일곱 점 반(오후 5시)이 되려 하고 있었다. 나가마사 역시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검은 실
로 비늘을 엮은 갑옷에 황금색 비단 가사를 걸치고 붉게 칠한 언월도를 손에 든 그는 지금
망루에 서 있었다.
산기슭으로 피어오르는 안개가 찾아 시야를 흐리게 하여, 쿄고쿠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
졌다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그 밑의 산노 성과 아카오 성은 어떻게 되었는지 알 길이 없
었다.
이 전투는 오다니야마에 3대에 걸친 아사이 가문의 무인으로서 그 기개를 남기려는 비원의
전투. 그것도 한 걸음 한 걸음 종말을 향해가고 있고, 이미 히사마사는 그 시체를 적에게 짓
밟혔으나, 이곳에서는 연락두절로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갑자기 발 밑에서 쌍방이 질러대던 함성이 그쳤다. 또다시 사자가 온 모양이었다. 나가마
사는 손을 이마에 얹고 혀를 찼다.
그는 600의 군사를 다섯으로 나누어 적이 접근할 때마다 한 부대씩 내보내 맞아 싸우게
하고 있었다. 그 한 부대 사이를, 계란을 연상케 하는 둥글고 살갗이 흰 노부나가의 사자가
침착한 모습으로 성문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나무 사이로 보였다.
벌써 이틀 전부터 세 번이나 이곳을 찾아왔던 후와 카와치노카미였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대하기 힘든 상대가 있는 법이었다. 만지면 미끄러질 것 같은, 목소리
마저 둥글둥글한 느낌이 드는 카와치노카미는 솔직한 사람인 듯했지만 왠지 나가마사로서는
상대하기가 거북했다.
그는 나가마사가 무슨 말을 하건, 또 아무리 심하게 이맛살을 찌푸리건 전혀 개의치 않
았다. 다만 부드러운 어조로 끈질기게 노부나가의 말을 전하기만 했다.
처음에는 아사이 가문을 배후에서 위협하고 있던 아사쿠라 집안이 이미 멸망했으니 앞으
로는 형제의 의리에 따라 노부나가가 아사이 가문을 지원하겠다, 무익한 전쟁은 중지하고
어서 이 땅에 평화를 이룩하자고, 설교에 능한 승려가 신자인 선남선녀를 설득하는 듯한 어
조로 말했다.
두 번째 왔을 때는 아버지 히사마사의 목숨을 구하고 아사이 가문을 번영케 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나가마사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뻔한 사실을 한참 동안이나 되풀이해서 말했다.
세 번째는 오늘 아침(28일)이었다.
쿄고쿠 성은 이미 함락되었다. 그런데도 여기서 일족을 모두 죽이는 고집을 부림은 의리
를 지키는 것 같지만 실은 무위무책, 어찌할 바를 몰랐다는 평을 듣게 될 것이다. 노부나가
는 결코 나쁘게는 처리하지 않을 것이니 농성을 풀어라...고.
나가마사는 세 번 모두 그 제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우리 부자는 이미 이곳을 죽을 장소로 결정했으니 그런 설득은 필요없다. 우리도 힘껏
싸울 것이니 마음대로 공격하도록 하라."
그 후와 카와치노카미가 네 번째로 사자가 되어 찾아왔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오이치와
딸의 이야기를 꺼낼 것이 분명했다.
나가마사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이미 남편이나 시아버지와 같이 이 성에서 죽기로 결심한 오이치와 딸들의 마음을 뒤흔들
게 될 것이 참을 수 없었다. 나가마사는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지도 않고 언월도를 거머쥔
채 입을 꾹 다물고 망루에서 내려왔다.
나가마사는 이제 인간의 사자와 만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보다 큰 운명의 사
자가 그들 일족을 위해 지금 서방정토, 아니면 허공에서 마중하기 위해 소달구지를 보내놓
고 있었다. 그것이 도착하는 대로 할아버지도 손녀도 부부도 같이 타야 했다.
망루에서 내려온 나가마사는 무사들의 대기소로 돌아와 잠시 숨을 돌리고 있는 후지카케
미카와노카미에게 명했다.
"후지카케 미카와노카미가 또 찾아왔네. 만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쫓아 보내게."
그리고는 세 딸과 오이치가 있는 안채 복도로 향했다.
오늘 새벽에 이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스스로 다짐하고 건너왔던 복도였
다. 한낮이라면 여기서도 산기슭까지 한눈에 굽어볼 수 있으나, 지금은 안개와 저녁의 어스
름으로 시야가 좁았다. 적의 손에 떨어진 쿄고쿠 성 근처는 화재인가 싶어 발걸음을 멈출
정도로 환했다. 전쟁에 이긴 오다 군이 피운 모닥불이 안개에 반사되며 새빨갛게 타오르고
있었다.
"아, 아버님이..."
나가마사의 모습을 발견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불빛도 없는 방에서 들려왔다.
일곱 살의 맏딸 챠챠히메였다.
"어디, 어디 있니...?"
이번에는 챠챠히메에게 매달린 좀더 작은 모습이 복도 끝에서 떠올랐다. 여섯 살인 타카
히메였다.
"아, 정말 아버님이 오신다."
나가마사는 천천히 다가와 언월도를 왼손으로 바꿔 쥐고 타카히메를 안아올렸다. 스물아
홉 살, 한창 나이인 나가마사는 안아올린 작은 인형의 뺨을 비볐다.
"타카히메, 울지 않았니?"
"예, 착한 아이라서 잘 놀고 있었어요."
대답한 것은 아이들의 말을 듣고 얼른 일어나 나온 오이치였다.
두 사람의 눈길이 마주치자 약속이나 한 듯 서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웃었다. 어젯밤,
이것이 마지막 맺어짐이라 여기면서 나눈 관계가 아직 부부의 가슴에 안타까이 남아 있었
다. 앞으로도 계속 살아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면 서로에게 아집도 있었을 테지만, 죽음을 결
심한 부부에게는 어린 날의 꿈 그대로의 화합이 있었다. 다만 맏딸 챠챠히메만은 부모의 화
목함에서 심상치 않은 무언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죽인 채 두 사람을 바라보
았었다.
안채에서 이별의 자리를 마련한 것은 26일.
그때는 아래성에서 일부러 히사마사도 추루와카다유를 데리고 찾아왔고, 오이치도 쟁의
스승에게 지도를 받아가며 오래간만에 춤을 추고 연주도 했다.
"아직 아래성에는 이상이 없나요?"
"음, 아버지도 잘 버티고 계신 것 같아. 아버지가 세상에 계시는데 우리가 먼저 죽어서는
안 돼. 챠챠히메, 너는 왜 그렇게 언짢은 얼굴을 하고 있냐?"
언월도를 중방에 걸고 갑옷에 가사를 걸친 차림 그대로 나가마사는 자리에 앉았다. 그를
향해 맏딸 챠챠히메가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아버님, 언제 전사하세요?"
나가마사는 깜짝 놀라 오이치와 서로 마주보았다. 그리고 전보다 더 태연스럽게 웃어 보
였다.
"왜 그런 것을 묻느냐?"
둘째딸 타카히메는 아버지 무릎에 자랑스러운 듯이 올라앉아 생글생글 웃고 있었으나, 챠
챠히메의 눈동자는 어른들의 속마음까지 궤뚫어보는 눈빛이 되어 있었다.
"아버님은 다시는 만나지 못할 것이라고 오늘 아침에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어떻게 다시
돌아오셨나요?"
"왜 돌아왔느냐고? 그것 참 따끔한 질문을 하는구나."
나가마사는 웃으면서, 정말 자기가 왜 돌아왔는지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아름다운 아내에게 아직 미련이 남았기 때문일까?
세 딸에 대한 애정 때문일까...?
"글쎄, 너는 왜 돌아왔다고 생각하느냐?"
챠챠히메는 여전히 날카로운 눈길을 아버지에게서 떼지 않은 채 또박또박 말했다.
"모두 같이 죽게 하려고 돌아오신 것이겠죠? 어머님도 챠챠도 타카도 타츠히메도... 모두
죽게 하려고..."
나가마사는 저도 모르게 놀라는 눈으로 맏딸을 노려보았다. 뜻밖의 말을 듣고는 순간 그 의
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너는 화를 내고 있는 게냐?"
"아니에요."
대답과는 달리 그 눈은 여전히 대드는 눈이었고, 그 표정은 무언가 불안해하고 또 항의하
는 것임이 분명했다.
"타카히메를 데려가시오."
나가마사는 챠챠히메에게 확실하게 설명해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둘째딸을 아내에
게 넘긴 뒤 가만히 맏딸을 손짓하여 불렀다.
"싫어요."
챠챠히메는 고개를 가로젓고 뒤로 물러났다.
"싫다니, 내가 무서우냐?"
챠챠히메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죽기 싫어요, 저는 할아버님이 미워요!"
"그러면 못써..."
오이치는 깜짝 놀라 챠챠히메를 꾸짖었다. 그러나 챠챠히메에게는 일단 말을 꺼내면 끝까
지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녀가 밉다고 한 할아버지와 똑같은 고집이 있었다.
"저는 안 죽겠어요! 싫어요, 싫어! 싫어!"
나가마사는 망연자실하여, 아버지의 결정에 온몸으로 항의하는 어린 것을 바라보고 있었
다.
나가마사가 없는 동안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듯, 오이치가 깜짝 놀라 옷소매로 얼굴을 가
렸을 뿐 아니라, 깨닫고 보니 옆방에서도 시녀들이 이를 악물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이치..."
"예."
"챠챠는 죽은 다음에 가게 될 극락정토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지?"
그러면서 흘끗 맏딸의 기색을 살폈으나 일곱 살 된 항의자는 눈섭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러다가는 일이 닥쳤을 때 오이치의 힘으로는 감당하지 못하게 될 것 같다...'
그렇다, 그때는 끝까지 이곳을 수비할 키무라 타로지로에게 죽이라고 명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생각했을 때 당사자인 키무라가 툇마루에 두 손을 짚고 말했다.
"오다의 사자 후와 카와치노카미가 아까부터 객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자는 만나지 않을 것이다. 분명히 전하라고 명했을 텐데."
나가마사는 내뱉듯이 말했으나 키무라 타로지로는 단지 고래를 끄덕였을 뿐이었다.
"그 일이라면 저희가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마는 카와치노카미는 도무지..."
"돌아가려는 기색이 없다는 말이지?"
"꼭 말씀 드려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고 하면서."
"뻔한 일이야. 나에게 귀순을 권하는... 그 일밖에 다른 말은 있을 수 없어."
어느 틈에 촛대가 마련되고, 주위는 완전히 밤이 되어 있었다.
오이치도 딸들도 나가마사의 음성이 높아지자 불안스럽게 타로지로와 나가마사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시녀들 중에도 평소처럼 명랑하게 보이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죽음을 결심한 성주-아니 그보다 죽지 않으면 안 될 성주로서는 이러한 모습이 자연스러
울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둘째딸 타카히메와 유모에게 안겨 있는 네 살
된 타츠히메뿐이었다.
"황송합니다마는."
타로지로는 도마루 자락에 붙은 마른 풀잎을 떼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밤은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다는 말이냐. 마음대로 공격하라고 해라."
"아직 아녀자들이 성안에 많이 보안다, 오늘 밤에는 공격하지 않을 것이니 피난시킬 사람
은 피난시키라면서."
"닥쳐라."
나가마사는 당황하여 상대의 말을 가로막았다. 흘끗 오이치를 바라보니, 그녀보다도 유모
와 그 뒤에 있는 시녀들이 눈을 빛내며 타로지로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농성하고 있는 이상 아녀자들이라 해서 구별할 것 없다. 쓸데 없는 걱정 말라고 단
호하게 거절해서 돌려보내라."
"예..."
"어서 가라, 더 이상 볼일이 없지 않느냐."
"황송합니다마는 다시 한번 고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고려하라는 말이냐, 적에게 항복하라는 말이냐?"
"상대는 오다의 군사 삼 만을 뒤에 두고 있는 사자입니다. 단순히 만나지 않겠다는 말만
으로는 돌아가지 않을 것입니다. 제발 면담하십시오. 그런 뒤 마음에 드시지 않으면 베어버
리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병졸들이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점점 더 그 수가 줄어들 우
려가 있습니다."
나가마사는 그 말을 듣고 갑자기 벌떡 일어섰다.
"만나겠다. 죽여도 좋다고 했지?"
오이치가 칼걸이에서 칼을 꺼내 건네주었다.
"모두 얌전히 있거라."
타카히메의 머리를 쓰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챠챠히메는 아직도 아버지에게 반항적인 눈
길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에 쓰다듬어주고 싶어도 손을 내밀 수 없었다.
키무라 타로지로가 허둥지둥 나가마사의 뒤를 따라 사라졌다.
"오늘 밤에 공격을 않는다고 하니... 앞으로 하루는 더 살 수 있겠구나."
유모는 타츠히메의 잠든 얼굴에 뺨을 비비며 입술을 깨물고 울기 시작했다.
오이치가 유모를 꾸짖었다.
"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참아야 한다."
그러면서 울 수 있는 사람은 아직 행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앞날에 어떤 희망이라도 있다면 오이치도 이처럼 침착할 수 없었을 것이
다. 살고 싶다고 몸부림치고, 죽어야만 되는 처지를 한탄하며 광란하고 있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사정은 그런 몸부림을 허용하지 않을 정도로 절망의 병풍을 몇 겹이나 두르고 있었
다.
'살아남는다 해도 그 앞에 무엇이 있다는 말인가...'
시아버지와 남편의 결심을 움직일 힘이 오이치에게 있을 리 없고, 혼자 살아남는다고 해
도 그것은 단지 절망적인 삶의 연장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었다.
'다시 어딘가로 시집가서 똑같은 고통을 거듭할 뿐...'
시아버지를 원망할 생각도 없거니와 남편이나 오빠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다만 세 아이 생각을 하면 참을 수가 없었다. 무수한 바늘이 한꺼번에 가슴을 찔러오는
심경이었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하는 자식을 어머니조차 절망한 이 참담한 세상에 그대로
남겨두어도 될까? 처음에는 남겨두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은 그 생각이 달라졌다.
"챠챠히메, 이리 가까이 오너라."
아직도 아버지가 사라진 쪽을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맏딸을 부르며 오이치는 웃고 있었
다. 지금으로서는 하다못해 모두가 웃는 얼굴로 이 세상을 떠나고 싶었고 또 떠나가게 하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부름을 받은 챠챠히메는 순순히 어머니 곁으로 왔다.
"아버님은 외삼촌의 사자를 베어버릴까요?"
고개를 갸웃했다.
뛰어난 감수성을 지닌 이 아이는 벌써 아버지와 가신의 대화까지 파악하고 있었다. 오이
치는 챠챠히메의 삼단 같은 머리에 손을 얹었다.
"아버님은 그런 난폭한 일은 하시지 않아. 심성이 착하신 분이니까."
"하지만 화를 내고 나가셨어요. 죽여도 좋으냐고 하시면서..."
"챠챠히메."
"예."
"너는 아버님과 내가 죽더라도 혼자 살아 있고 싶으냐?"
챠챠히메는 대답 대신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어린 생명의 본능적인 저항인 것 같았다.
"그렇구나. 살고 싶다는 말이로구나."
오이치는 혼잣말 비슷하게 말했다.
"무리가 아니지. 여자의 일생이 어떤 것인지 모르니까."
챠챠히메는 경계하듯 가만히 어머니 곁을 떠났다. 크게 뜬 눈에 촛대의 불빛이 반사되어,
거기에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저항의 화살이 잇따라 날아오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
오이치는 당황했다. 어린것의 눈동자가 다시 어머니를 무섭게 나무라고 있었다.
'챠챠히메, 용서해라...'
오이치는 공포 속에서 마음을 정했다.
'이 아이 하나 때문에 모두의 죽임이 무의미해져서는...'
어느 틈에 성 안팎이 조용해졌다.
객실에서는 후와 카와치노카미와 나가마사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교환되고 있을까?
밥상이 들어왔기 때문에 오이치는 어린 딸을 그 앞에 앉게 했다. 밥상 앞에 앉은 챠챠히
메와 타카히메의 태도는 완전히 달랐다. 한쪽은 평소와 다름없이 천진스럽고 맑은 표정이었
으나, 다른 쪽은 붙들려온 새처럼 잔뜩 겁을 먹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다. 밥 한 공기를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곧 젓가락을 놓았다.
"챠챠, 왜 그러느냐?"
챠챠히메는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내일이면 죽을 것 아니에요?"
"아니, 아직 내일이라고는 정해지지 않았다. 자, 챠챠. 어서 더 먹도록 해라."
이렇게 말했으나 가슴이 메어지는 것 같아 자기가 먼저 옆방으로 얼른 건너가고 말았다.
하다못해 저녁이라도 즐겁게 먹도록 하고 그 뒤 베개를 나란히 하고 자야지. 아니... 무심
히 잠든 틈을 보아 챠챠만은 오늘 밤 안으로... 그렇게 생각했는데, 어린 영혼의 거울에는 이
것이 똑똑히 비치는 모양이었다.
'과연 내 손으로 아이의 가슴을 찌를 수 있을까...?'
오이치는 옆방에서 눈물을 닦고,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않게 하려고 자기 손으로 과자
를 들고 돌아왔다.
"자, 이것을 하나씩 먹어라."
챠챠히메는 과자에도 손을 대지 않았다.
독을 경계하는 것일까? 그런 이야기를 언제 누가 이 아이에게 해준 적이 있었을까...?
"왜 먹지 않느냐, 너는?"
"배가 불러요."
오이치는 마침내 챠챠히메가 미워졌다.
마음을 독하게 먹고... 생각하는 순간 저절로 손이 품속에 숨겨둔 단검 쪽으로 갔다.
"어머님!"
갑자기 작은 몸이 어머니에게 덤벼들었다. 동시에 어머니 무릎 옆에 울컥 하고 무언가를
토해냈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먹은 것을 그대로 토해냈으나 챠챠히메는 그렇게 생각하
지 않았다.
밥에 독이 들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울며 매달려왔다.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어머님, 저도 죽겠어요. 어머님과 같이 죽겠어요."
오이치는 단검에서 손을 떼고 정신없이 챠챠히메를 끌어안았다.
'이토록 싫어하는 것을 죽게 하다니, 과연 그래도 되는 것일까?'
어린 것이 앞으로 살아가야 할 모습이 가엾어 같이 죽으려 한 것은 과연 잘못이 아닐
까...?
우는 일이 버릇처럼 되어 있는 이 집안은 이를 계기로 다시 오열의 도가니로 변했다. 바
로 이때 복도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성주님이 사자와 함께 오시는 중입니다."
후지카케 미카와노카미와 키무라 코시로가 몹시 상기된 표정으로 나타났다.
"아니, 성주님이 사자와 함께?"
"예, 어서 방을 정리하십시오."
시녀들이 허둥지둥 밥상과 과자를 옆방으로 옮겼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나가마사와 후
와 카와치노카미가 들어왔다.
나가마사의 표정은 나갈 때와는 달리 이마에서 입술까지 파란 물감을 칠한 듯이 창백했
다.
"그대는 이쪽으로.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물러가라."
나가마사는 자신과 같은 위치에 노부나가의 사자 후와 카와치노카미를 앉게 하고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챠챠히메도 타카히메도 모두 밖으로 나갔다.
촛대 너머로 남편의 모습을 바라본 오이치는 가슴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남편은 굳게 입을
다물고 때때로 눈길을 허공에 보내고 있었다. 침착한 나가마사로서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
"부인."
갑자기 후와 카와치노카미가 직접 오이치에게 말을 걸었다.
오이치는 남편의 안색을 살피면서 대답하는데 더듬었다.
"예...예."
"성주님께서는 저희들의 청을 받아들여 이 성을 버리고 토라고제야마로 가시게 되었습니
다."
"..."
"성주님 앞에서 드리는 말씀, 거짓이 아닙니다. 부인께서도 따님들과 함께 떠날실 준비를
하십시오."
오이치는 자기의 귀를 의심했다.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눈길을 남편에게서 카와치노카미
에게로, 다시 카와치노카미에게서 남편에게로 옮겼다.
"그것이... 그것이... 사실입니까?"
"준비하시오."
이번에는 나가마사가 한숨 섞인 소리로 말했다.
"사정이 바뀌었소. 산노 성의 아버님은 이미 토라고제야마에 있는 노부나가 님의 본진으
로 향하셨다고..."
"그럴 수가!"
오이치는 비로소 남편이 침울해 있는 원인을 알았다.
'어쩌면 그토록 완고하신 시아버님이...'
믿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밎지 못할 것 같기도 하여 섣불리 감정을 나타낼 수 없었
다.
그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나가마사가 다시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아버님도 그대와 아이들이 가련하여 마음을 바꾸셨을 것이 분명하오. 나도 곧 뒤따라 갈
것이니 그대들은 먼저 가서 무사한 모습을 아버님께 보여드리도록 하시오."
오이치는 문득 챠챠히메의 시무룩했던 얼굴을 떠올렸다. 부모가 결심한 죽음에 대해 온몸
으로 반항하던 어린것의 불안한 얼굴을. 그러나 입에서는 전혀 반대되는 말이 봇물이 터지
듯 터져나왔다.
"싫습니다! 모처럼 결심하고 이 오다니야마의 흙이 되려고... 싫습니다! 이제 와서 구차하
게 목숨을 구걸하기는... 저는 노부나가의 여동생이 아닙니다. 아사이 비젠노카미의 아내입니
다."
나가마사는 이렇게 말하는 아내를 망연히 바라보기만 하고, 후와 카와치노카미는 연신 고
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이치..."
"싫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이대로 여기서..."
"오이치!"
나가마사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그대는 아버님이 노부나가 님의 손에 목숨을 잃어도 좋다는 말이오?"
"예? 그럼, 우리가 산에서 내려가지 않으면..."
"아버님의 목숨과 관계되는 일이오. 어서 내 말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먼저 산을 내려가시
오. 나도 곧 뒤따르겠소."
나가마사는 이렇게 말했다.
"후지카케 미카와노카미, 키무라 코시로, 그대들은 즉시 마님과 아이들을 토라고제야마로
데려가도록 하라."
단호한 목소리로 명했다.
"그렇지만..."
또다시 오이치가 입을 열려 했다.
"서두르라고 하지 않았소."
나가마사는 엄한 소리로 꾸짖었다. 그러나 다음에는 곧 목소리를 낮추어 부드럽게 말했다.
"자 어서... 아버님이 기다리시고... 노부나가 님도 고대하고 있소. 알겠소? 마음을 진정시
키고."
오이치는 맥없이 마음이 꺾이는 것을 깨달았다. 왠지 크게 소리내어 통곡하고 싶어졌다.
부자연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있는 동안에는 마음 어딘가에 오기가
살아 있었다. 그것이 지금은 거품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이것으로 딸들은 살 수 있다.'
당연히 기뻐해야 할 일일 텐데도 도리어 마음은 불안으로 떨었다. 인간이란 죽으려고 결
심하고 있을 때보다 살아야 할 때 더 겁쟁이가 되는 모양이었다.
세 채의 가마가 준비되었다.
제일 앞의 가마에는 오이치, 다음 것에는 챠챠히메와 타카히메가 탔다. 마지막 가마에는
타츠히메를 안은 유모가...
나가마사는 본성 문까지 배웅했다. 맨 앞에는 후지카케 미카와노카미, 맨 뒤에는 키무라
코시로가 횃불을 들고 따라갔다. 성문을 나섰을 때 오이치는 남편을 돌아보았다.
나가마사는 붉게 칠한 언월도를 짚고 서서 뚫어지게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먼저."
"나중에 나도 가겠소. 아이들을 잘..."
오이치는 가슴이 메어 눈물을 흘렸다.
"가거라!"
"예...예."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휴전령이 내렸는지 어디나 모두 조용하기만 했고, 오이치의 모
녀를 맞이하는 오다 쪽 군사들은 길 양쪽에 도열하여 일행을 통과시켰다.
"챠챠..."
뒤따라오는 가마를 향해 말했다.
"예."
타카히메와 같이 대답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는 죽지 않아도 될 모양이구나."
오이치는 이렇게 말하고 비로소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린 생명을 죽이지 않게 되었다는
안도감이 드디어 온몸을 따뜻하게 감쌌다.
오이치로서는 어떻게도 할 수 없었던 전쟁터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봄의 꽃밭으로 걸어가
고 있었다. 슬픈지 기쁜지도 모르는 채 마음이 설레었다.
쿄고쿠 성 부근에 이르렀다.
맨 앞에 있는 후지카케 미카와노카미가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행렬이 멎었다. 오이치의
가마 옆으로 작은 체구의 사나이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치히메(오이치)님!"
"아니... 그대는."
"하시바 히데요시입니다. 이제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오오, 따님들도 건강하시군요."
히데요시는 이렇게 말하면서 환한 웃음을 횃불에 떠올리며, 크게 턱으로 지시했다.
"어서 통과하라."
운명의 행렬은 다시 하시바 군이 도열한 가운데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산노 성
이 가까워 계곡의 물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낙화의 향기
아사이 비젠노카미 나가마사는 오이치와 딸들의 가마를 밝히는 횃불이 쿄고쿠 성의 모닥
불에 섞여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부하들을 집합시켰다. 본성을 적에게 넘기고 그 역
시 산을 내려가 토라고제야마에 있는 노부나가의 본진에 가기로 약속했다.
"준비가 되었거든..."
여전히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후와 카와치노카미가 계란을 연상시키는 둥근 얼굴로 나가
마사를 재촉했다. 나가마사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약간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섭섭하기 짝이 없으나 산을 내려갈 수밖에 없겠지."
"그 심중 잘 이해합니다."
나가마사는 다시 입술을 일그러뜨리고 웃으면서 끄덕였다.
나가마사를 따르는 자는 100여 명, 나머지는 대관절 어떻게 되었을까? 전사한 사람도 있
을 것이지만 항복한 자, 도망친 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분명했다.
카와치노카미의 배려로 나가마사도 그를 따르는 자도 무기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 오다
군의 전령이 그들보다 먼저, 양자 사이에 충돌이 생기지 않도록 각 지휘관에게 달려갔다.
밤은 이미 삼경(오후 11시-오전 1시)에 가까워 있었다. 행렬 뒤에는 카츠기를 쓴 16, 7명
의 여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성문을 나와 망루 앞에 다다른 나가마사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고 할아버지 때부터
3대에 걸쳐 살아온 오다니 본성을 쳐다보았다. 아직 군데군데 불이 켜져 있기는 했으나, 밤
하늘에 솟은 새카만 지붕은 무언가를 나가마사에게 말해주는 듯이 보였다.
나가마사는 다시 가슴을 펴고 묵묵히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바로 뒤에서 따라오는 냉
정 그 자체인 후와 카와치노카미에게 무언가 격한 말을 퍼붓고 싶었으나 그것도 지금에 와
서는 무의미했다.
'아버지가 노부나가에게 항복했다고 거짓말을 하다니...'
나가마사는 카와치노카미의 말 따위를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노부나가
앞에 끌려가 목숨을 구걸할 아버지가 아니었다-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믿는 체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자결하셨다!'
오히려 나가마사는, 카와치노카미가 한 말의 뒤에 숨어 있는, 아버지가 살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완강한 딸들이나 싸울 의사가 없는 자기 군사들을 죽음의 동반자로 삼는다면 사나이 된
나가마사의 체면이 용서치 않는다. 무엇보다도 나가마사를 놀라게 한 것은 맏딸 챠챠히메의
말이었다.
"... 아직 전사하시지 않았어요?"
이 말을 들었을 때 나가마사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보다 더 통렬한 신의 계시가 또 있을
것인가.
무장과 무장의 고집을 내세워 아무 생각도 없는 자까지 희생해서 좋을 까닭이 없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셨다...'
나가마사는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아버지의 고집에서 자기 고집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아내도 살리자. 아이들도 살리자.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가신과 부하들을 살리자...
이러한 나가마사의 속마음은 아무도 모를 터. 당사자인 후와 카와치노카미는 감쪽같이 나
가마사를 속인 줄 알고 있을지도 몰랐다. 뻔뻔스럽게도 무감동한 표정으로 어느새 나가마사
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었다.
'이놈을 어디서 베어버릴까.'
나가마사는 횃불이 카와치노카미의 옆모습을 비출 때마다 그것을 생각했다.
일행은 조금 전에 오이치와 딸들이 지나간 쿄고쿠 성에 접어들고 있었다.
이번에도 하시바 히데요시가 나가마사를 마중했다. 승리에 도취한 공격군의 대장이란 오
만한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고, 어디까지나 주군인 노부나가의 일족을 대하는 태도로 속삭
이듯 말했다.
"성주님, 부인과 따님들은 모두 무사히 토라고제야마에 도착하셨습니다."
나가마사는 갑자기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아버지의 고집도 잘 알고 자신이 취할 길도 정해놓고 있으면서도 '정세의 흐름이 변했
다...'는 것을 절감했다.
고집에 죽고 고집에 사는 엄격한 무인의 상식에, 마구 날뛰는 노부나가나 히데요시의 생
활 방식이 새로 그것을 대신하려 하고 있었다. 더구나 그 속에는 빈축을 받아야 마땅한 살
벌한 비인도성과 뜻하지 않은 인정이 야릇하게 뒤섞여 교차되고 있었다.
히에이잔을 불태우고 학살을 감행하여 전국을 진노케 한 노부나가는 그야말로 악마이고
악귀였으나, 그 노부나가가 이번의 오다니 공격때 보인 태도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느낌
을 주었다.
나가마사는 히데요시를 보았을 때,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계신가?"
이렇게 마음껏 조소하고 싶었다. 그러나 히데요시는 그럴 틈을 주지 않았다.
"토라노스케, 비젠노카미 님의 통행에 지장이 없도록 그대가 직접 산노 성으로 모셔라."
카토 토라노스케에게 명하고 극진하게 예의를 갖추었다.
나가마사는 히데요시의 진지를 벗어나자 다시 분노가 치밀었다. 누구에 대한 분노인지 알
수 없었다. 노부나가에 대해서도 아니고 아버지에 대해서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기 자신에
대한 본노도 아니었다. 굳이 말한다면 이 천지에 사는 인간의 삶에 대한 견딜 수 없는 짜증
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짜증이 드디어 후와 카와치노카미에게 폭발한 것은, 이 역시 적의 손에 들어간 산노
성 옆을 지나 아카오 성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아카오 성은 아직 아군이 지키고 있었다. 수비하는 장수인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는 히사
마사의 유지를 굳게 받들어 이곳을 죽음의 장소로 정하고 있었다. 모닥불이 점점이 나무 사
이의 어둠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카외치노카미."
나가마사는 침착하기만 한 후와 카와치노카미를 돌아보았다.
"그대는 이 나가마사를 감쪽같이 속인 줄 알고 있겠지?"
후와 카와치노카미는 천천히 나가마사를 쳐다보고 웃었다.
"당치도 않습니다. 비젠노카미 님은 저 같은 사람에게 속을 분이 아닙니다."
"뭣이! 그럼, 전에 한 말은?"
"히사마사 님이 항복하셨다고 하지 않으면 부인과 따님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기 때
문입니다."
나가마사는 크게 눈을 부릅뜨고 저도 모르게 언월도를 고쳐 쥐었다.
후와 카와치노카미는 나가마사가 아버지의 항복을 믿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태연히 거짓
말을 했다. 그렇다면 나가마사는 계란을 연상시키는 이 사나이에게 뱃속을 읽힌 셈이었다.
끝까지 침착한 상대의 모습에 나가마사의 피가 거꾸로 흘렀다.
"건방진 것. 그렇다면 아버님이 산노 성에서 자결하셨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었구나."
"물론입니다."
카와치토카미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담담하게 대답하는 후와 카와치노카미의 말에 나가마사는 다그치듯 물었다.
"그럼, 속이라고 명한 것은 노부나가란 말이냐?"
카와치노카미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대장님은 다만 성주님 부자의 목숨을 구하라고만 하셨을 뿐입니다."
나가마사는 언월도로 힘껏 땅을 쳤다.
"그 후의 지시는 누가 한 것인가?"
"저와 하시바 님입니다."
"나를 속인 보복, 각오는 하고 있겠지?"
"물론입니다. 언제라도 상대해드리겠습니다."
나가마사는 발을 굴렀다.
"내가 만일 토라고제야마에 가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카와치노카미는 비로소 굳은 표정이 되었다.
"성주님이 순순히 가시리라고는 처음부터 생각지 않았습니다."
"뭣이! 알고 있으면서도 나를 여기까지 안내했다는 말이냐?"
"성주님..."
카와치노카미는 다시 어조를 누그러뜨렸다.
"뜻대로 무장의 의지를 관철시키십시오. 우리 대장님은 그런 훌륭한 아버지를 둔 자식이
라고 따님들을 자랑스럽게 양육하실 것입니다."
나가마사는 나직하게 신음했다.
이때처럼 노부나가와 그 심복의 긴밀한 유대를 부럽게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나가마사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며 이 전투에 임했는지를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항복했다고 말하러 온 카와치노카미의 허를 찔러, 아카오 성과 합심하여 대대적
으로 복수전을 치를 생각으로 산에서 내려온 나가마사의 속셈을...
"그렇구나... 알고 있었구나."
"수비하는 아군이 의심할지 모릅니다. 우선-"
일행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나가마사는 검은 하늘을 잔뜩 노려보고 걷다가 아카오 성과의 갈림길에 이르러 묵묵히 왼
쪽 길로 접어들었다. 오른쪽으로 가면 토라고제 야마에 있는 노부나가의 본진과 곧장 통했
다.
후와 카와치노카미는 그러는 나가마사를 제지하려 하지 않았다.
'나가마사 님의 죽음을 방해할 수는 없다.'
아버지의 죽음을 알고 노부나가에게 항복할 나가마사가 아니라는 것을, 노부나가도 히데
요시도 카와치노카미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요컨대 오이치와 그 딸들을 구출할 구실을 나
가마사에게 주기만 하면 되었다.
아카오 성에서는 나가마사의 갑작스런 하산에 놀라기도 하고 환성을 지르기도 했다.
"성주님! 큰 성주님은 어제 그만..."
"원통한 일입니다!"
여기저기 모여 있던 군사들이 일제히 일어나 성 안팎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나가마사는 그러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다시
카와치노카미와 딸들, 아버지와 히데요시의 얼굴이 유성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드디어 아카오 성을 죽음의 장소로 정할 운명이 확정되었다.
'노부나가도 훌륭했다. 져서는 안 된다.'
죽음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근성을 그 죽음에 새겨두고 떠나지 않으면 안 된
다고 나가마사는 생각했다.
아카오 성에서 나가마사가 최후의 반격을 명한 것은 그 이튿날 아침 여섯 점(오전 6시)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는 붉게 칠한 언월도를 종횡으로 휘두르며 세 번째 공격자들 속
으로 쳐들어갔다.
오다 군도 파도처럼 서로 교대해가며 오카오 성을 공격했다. 그리고 그 한 파도가밀려올
때마다 아사이 군의 피해가 두드러지게 눈에 띄었다. 전사하는 자, 상처를 입고 포로가 되는
자, 도망을 시도하는 자, 항복하는 자...
아사이 나가마사는 그러한 혼란속에서 거실로 돌아와 명했다.
"화상은 어디 계신가, 화상을 모셔오라."
오늘도 가을 하늘은 지상의 싸움을 외면하고 한없이 맑기만 했다. 미풍에 싸리가 한들한
들 흔들리고 철 지난 나비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었다.
키무라 타로지로가, 나가마사가 귀의해 있는 유잔 화상과 함께 급히 달려왔다. 칼자루에
피가 묻어 있고 왼쪽 허벅지를 흰 헝겊으로 동여매고 있었다.
"오오, 화상이시군요. 가까이 오십시오."
나가마사는 미소를 짓고 귀를 기울였다.
"세 번씩이나 공격을 했으니 이제는 적도 내가 할복할 것이라 알고있는 모양일세. 공격해
오는 소리가 멎었어."
"예."
키무라 타로지로는 대답했다.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카이샤쿠는 제가 하겠습니다."
나가마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잔 화상은 그러는 두 사람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나가마사 옆에 앉았다.
"따님들에게는 마님이 계십니다. 무언가 하실 말씀은?"
"별로 없소."
"그러면 유언으로 남기실 말씀은?"
나가마사는 흘끗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없소."
"묘지로는 어디를 바라십니까?"
"글세."
나가마사는 천천히 칼을 뽑았다.
"스물아홉 해의 생애, 꿈속의 꿈..."
가만히 중얼거리고 다시 한 번 바깥의 웅성거리는 소리를 듣는 표정이었다. 가증스러울
정도로 나가마사의 마음을 궤뚫고 있는 오다 군은 이미 잠잠해져 있었다.
"적도 아군도 없고 원한도 없고 슬픔도 없으며, 그렇다고 기쁨도 없었소... 참, 묘지는 비
와 호의 밑바닥이 좋겠소."
유잔 화상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님이 좋아하시던 치쿠부시마의 앞바다에."
"그렇게 해주시오."
"계명은 토쿠쇼지덴 텐에이소세이 다이코지라고 제가 지었습니다마는."
"어마어마한 이름이군요. 하하하... 그럼, 타로지로."
타로지로는 피묻은 칼자루에 손을 얹고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적도 아군도 없고, 슬픔도 원한도 없다는 스물아홉 살 된 나가마사의 죽음은 원한에 맺힌
아버지 히사마사의 죽음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슬픔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럼..."
"안녕히 가십시오."
옆구리를 푹 찌르는 키무라 타뢰로의 피묻은 칼이 번쩍 빛났다. 유잔 화상은 눈을 부릅뜨
고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특별히 합장도 하지 않았다.
다시 싸리가 살랑살랑 흔들리기 시작했다. 길 잃은 나비가 차양에서 마루로 들어왔다가
다시 푸른 하늘로 훨훨 날아갔다.
이곳은 토라고제야마 본진이 있는 임시막사.
측근들은 물러가게 한 노부나가 앞에는 막내를 안고 있는 오이치와 챠챠히메, 타카히메가
인형을 나란히 놓은 것처럼 앉아 있었다. 챠챠히메는 언니 구실을 하느라 타카히메에게 과
자도 주고, 막사 앞에서 꺾어 온 가을꽃을 나눠주기도 하였다.
노부나가도 오이치도 그 티없는 모습을 아까부터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9월 1일의 정오가 되어가고 있었다. 이미 오다니 성은 완전히 오다쪽에 들어와, 화살이 날
아가는 소리 대신 졸음을 유발하는 듯한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아뢰옵니다. 아사이 이와미노카미 치카마사, 아카오 미마사카노카미 키요츠나를 본진으로
데려왔습니다."
근시가 마루 끝에 와서 보고했다.
아카오 성에서 나가마사가 자결한 후 포로로 잡은 적장들이었다.
노부나가는 고개를 끄덕였을 뿐 여전히 눈길을 여동생인 오이치에게 보내고 있었다.
오이치는 피부만이 아니라 육체까지 투명해 보일 정도로 애처로운 모습으로 조용하게 아
이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이치..."
"예."
"아이들을 위해 살겠다...는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야."
"이미 답은 드렸습니다."
"분명히 죽지 않겠다, 자결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는 말이지."
"예. 아무도 오빠의 말을 거역하지 못합니다."
노부나가는 혀를 찼다.
"그만 애를 태워라. 네 얼굴에는 아직도 죽겠다고 씌어 있어."
오이치는 흘끗 오빠를 쳐다보고 다시 눈길을 품에 안은 아기에게로 떨어뜨렸다.
"너는 그토록 나가마사에게 빠져 있었다는 말이냐!"
"..."
"나가마사는 너희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스스로 항복하겠다고 말했어. 너희들을 속인 것
은 내가 아니라 나가마사야."
"아니에요."
오이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아버님이 항복했으니 항복하라고 한 것은 오빠였어요."
노부나가는 이를 부드득 갈고 혀를 찼다. 아무도 노부나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하
면서도 감시를 게을리하면 자결할 결심인 오이치였다. 그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어
쩌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노부나가 같은 맹장을 꼼짝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너는 강한 여자로구나!"
"아니, 아무 힘도 없는 약한 여자예요."
"그... 약하다는 것이 바로 강한 거야. 약한 자가 강하다는 것은 정말 화가 나는 일이야."
다시 이를 갈려다가 노부나가는 생각을 바꾸었다. 고집을 부리면 부릴수록 오이치의 결심
은 굳어질 뿐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오이치."
"예."
"너는 열녀라고 생각하느냐?"
"아닙니다. 다만 죽은 남편에게 진심으로 사죄할 뿐이에요."
"좋아, 그토록 못 잊어 한다면 나가마사에게 보내주겠다. 남의 손을 빌릴 것도 없이."
이렇게 말하는 노부나가는 진심으로 자기 동생이 미워졌다.
오이치는 잠자코 있었다.
죽이겠다는 말 대신 나가마사에게 보내주겠다고 했기 때문에 예민한 챠챠히메도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챠챠히메의 감수성은 이곳에 온 이후 이제는 생명의 위험이 사라졌다고 안심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치, 왜 대답이 없느냐? 나가마사에게 가게 된다면 불안은 없을 테지."
오이치는 흘끗 오빠를 쳐다보고 다시 아이들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나는 부처를 섬길 생각이에요."
"또 마음이 변했다는 말이냐?"
오이치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울지 않으려고 결심했으나 다시 눈앞이 뿌옇게 흐려
지고 화초를 가지고 노는 두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오빠 말에는 뭔가 꿍꿍이가 있어요."
"꿍꿍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냐? 네 희망대로 저 세상에 보내주겠다고 했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나를 위해... 나를 살리려고 화를 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고..."
오이치의 말에 노부나가는 낯을 찌푸렸다.
"못된 것!"
그리고는 내뱉듯이 말했다.
"너는 이 노부나가의 마음을 읽고 있어. 죽이지 못할 것을 알고 오기를 부리는구나. 오이
치, 나가마사는 네가 살아 있기를 바랬어. 그것을 모르는 네가 가증스럽다."
"그래서 부처님을 섬기겠다고 한 거예요."
"그 말에 거짓은 없겠지? 중이 되어 딸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말이냐?"
"예..."
오이치는 가볍게 대답하고 옷소매로 조용히 눈물을 닦았다.
노부나가는 어떻게 하든 오이치를 살리려고 초조해 하고 있다. 그러나 오이치로서는 살아
갈 수 있는 힘이 자기에게 있는지 없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상했다. 원해서 시집갔던 것도 아니었다. 시집갔을 당시에는 싫기
까지 했다. 나가마사의 우람한 가슴에 타오르기 시작한 애정 때문이었을까.
유별나게 달콤한 말을 교환한 것도 아니고, 말로써 위로를 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자기
몸을 따스한 안개 같은 것으로 감싸주어, 여기가 아니고는 사는 보람이 없다고 저절로 믿게
하는 마음이 나가마사에게는 있었다.
마지막으로 나가마사는 처자를 살아남게 하려고 한층 더 높은 사랑을 보여주고 떠나갔다.
그것이 오이치에게는 안타까웠다.
'남편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나도 살아 있지 않겠다.'
이렇게 결심한 이면에는 살이 있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었다. 살아 있으면 재혼문제도 생
길 터. 오이치로서는 두 남편을 섬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두려움이었다. 그래서 부처
를 섬기겠다는 핑계를 대어, 당장에는 노부나가의 심한 추궁을 벗어날 생각이었는데...
노부나가는 여동생의 마음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알 수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그러면 불문에 들어가게 해주겠다."
노부나가는 무심히 놀고 있는 아이들 쪽을 보면서 전과 다름없이 큰 목소리로 옆방을 향
해 소리쳤다.
"이것으로 결정은 났다! 누구 없느냐, 히데요시를 불러오너라."
노부나가는 근시가 히데요시를 불러올 때까지 오이치와는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자기
혈육인 여동생을 이토록 크게 매료시키고 죽은 나가마사의 혼백에 대해 오기로라도지지 않
겠다는 묘한 감정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나가마사 녀석, 마누라 하나만은 확실하게 붙잡아놓고 있었구나.'
끝내 천하의 대세를 내다보지 못하고 부자의 정에 사로잡혀 생명을 떨군 나가마사였다.
그 순수성은 인정할 수 있으나 배포의 크기는 인정 할 수 없었다. 노부나가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그릇이 작다고 경멸도 하고 낙담도 했는데, 그런 나가마사가 어떻게 오이치를 그
토록 확실하게 붙잡아놓고 있었을까...?
노부나가의 마음에 불현 듯 혈육의 애정이 사라지고 짓궂은 생각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자기도 다루기 힘든 오이치를 히데요시 녀석은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짓궂은 호기심이었
다.
"부르셨습니까?"
히데요시는 무장한 채 정원으로 들어와 노부나가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았다.
"오, 정말 귀엽구나!"
눈을 가늘게 뜨고 마루에 있는 챠챠히메 곁으로 갔다.
"마치 인형과도 같습니다."
실눈을 뜨고 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부럽습니다! 저에게는 아이가 없어요. 나가마사 님은 이처럼 아름다운 생명의 핏줄을 세
상에 남기셨습니다. 이 아이들이 자라서 어떤 훌륭한 아기들을 낳게 될지..."
"토키치로."
"예."
"그대가 오이치를 노부카네에게 데려가도록 하게."
"알겠습니다."
"자네가 세상을 떠나게 만든 나가마사의 유족일세. 더구나 오이치는 나가마사의 뒤를 따
르겠다고 완강하게 고집하고 있어. 이 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데려가도록."
히데요시는 흘끗 오이치를 바라보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이치는 말이다, 말로는 죽지 않겠다고 했어. 그러나 말과 마음이 다른 여자일세."
"그 무슨 지나친 말씀을."
"나는 있는 그대로를 말하고 있는 거야. 알겠나, 오이치는 나하고 약속했어. 불문에 들어
가겠다고."
히데요시는 안타깝다는 듯 양미간을 모으고 다시 한 번 오이치를 바라보았다. 오이치는
도자기와 같은 표정으로 여전히 아이들에게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게 새빨간 거짓말이야. 당장 이 자리를 모면하기 위한 구실이야!"
"설마 그럴 리가..."
"잠자코 듣기만 하게. 구실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으나 일단 약속한 이상 그대로 지키도록
하겠다. 절은 나중에 내가 지정하겠어. 그 사이 단식을 시도하여 죽으려 할 테지만 그렇게
하도록 놔둬서는 안 돼. 그럴 경우에는 입을 벌려서라도 먹이도록. 분명히 그대에게 명한
다."
히데요시는 순간 입을 멍하니 벌리고 노부나가를 바라보았으나 곧 묘한 소리를 내고 웃었
다.
"이거 황송합니다. 설마 부인께서 이 히데요시에게 입에 손을 대게 하시지는 않겠지요. 좌
우간... 알겠습니다. 어김없이 모시고 가겠습니다."
정중하게 대답하고 다시 숱이 많은 챠챠히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결국 오이치는 자결하겠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은 채 히데요시의 호송으로 기후에 있는 오
다 노부카네에게 맡겨지게 되었다. 코즈케노스케 노부카네는 노부나가의 수많은 동생 중의
하나로 이이치에게는 오빠가 되었다. 남매 중에서 오이치의 불행을 가장 동정할 수 있는 사
람으로 보고 맡긴 셈이었다. 노부나가의 뜻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결을 단념케 하려는 데에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히데요시는 도중에 그녀의 마음을 바꾸게 하려고 일부러 노부나가의 본
진에서 자신의 본진까지 오이치를 두 딸과 함께 걸어가게 했다.
오다니 성을 공격하기 위해 히데요시가 닦아놓은 길이었다. 단단하게 다져진 황톳길 양쪽
에는 보랏빛 도라지꽃, 노란 마타리꽃에 섞여 싸리 이삭이 하얗게 자라고 있었다.
챠챠히메와 타카히메는 그 자연 속에 천진난만하게 녹아들어 걸어가고 있었다. 새가 있다
면서 소리지르고 들국화가 피었다고 달려가서 꺾었다. 그러나 어머니 오이치는 전혀 그런
풍경을 보려 하지 않았다. 막내딸은 따로 유모와 같이 가마를 타고 갔기 때문에 카츠기 사
이로 드러나 보이는 단아한 얼굴은 두 딸의 어머니라기보다 언니처럼 보였다.
"사히바 님..."
길을 반쯤 왔을 때였다. 갑자기 오이치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남편의 목은 어찌 되었는지 알고 계시나요?"
히데요시는 잔인할 정도로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쯤 우리 대장님에게 바쳐졌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오이치는 그 이상 말을 않고 입을 다물었다.
"부인..."
히데요시는 도리어 말을 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부인의 심경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입장이라면 부인이 아니더라도 살고 싶은 생각이
없을 것입니다."
"하시바 님은 이해할 수 있나요?"
"굳게 결심을 하셨다면 자결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히데요시는 이렇게 말하면서 속으로는 전혀 반대되는 환상을 그리고 있었다. 오이치가 오
늘 일을 깨끗이 잊고 자기 곁에서 아내로서 자기를 대해주는 환상이었다.
'만일 그렇게 될 운명이라면 집에 있는 아내는 어떻게 되지?'
히데요시는 쓴웃음을 지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이없는 공상이 우습기도 하고 또 두
렵기도 했다.
"죽은 사람의 목을 확인하는 잔인한 일은 언제부터의 습관일까요?"
다시 생각났다는 듯이 오이치가 말했다.
"죽은 사람을 욕되게 하다니, 부처님의 마음은..."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의 육체란 요컨대 악취가 나서 코를 들 수 없는 구더기의
집, 빨리 보지 않으면 이미 썩어 분간할 수 없습니다. 더러운 것만 생각하다 죽은 시체니까
요."
그 말을 듣고 오이치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분노를 못 이겨 숨을 몰아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가령 부인만 해도 시체가 되면 악취와 구더기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것이 엉뚱한 일에
집착하는 인간에 대한 부처님의 벌입니다."
오이치는 이미 히데요시를 피해 멀리 골짜기 쪽으로 눈길을 던진 채 걷고 있었다. 그 눈
동자에는 조금 전의 본노는 없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두려움이 가을 햇빛과 함께 가득 차
있었다.